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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상태구원 120824강의에스겔

상태구원 120824

이름 : 이근호(IP:220.81.41.202)

서경수(IP:14.♡.106.224)

12-09-10 10:38

광주 강의(2012. 8. 24) 33-1

에스겔 34장은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에게 질타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2절에 보면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목자들을 친다는 말은, 이스라엘 전체를 양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양으로 볼 때는 하나님과 인간(양) 사이에 목자를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을 목자와 양. 목자도 은밀하게 말하면 양 속에 포함 되는데, 어쨌든 목자의 임무는 양을 하나님 앞에서 양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는 양이 되고 싶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양이고, 양답게 살아야 돼.”라는 일방적인 요구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고, 집단이 있다면 이 사람들이 스스로 “우리 집단은 이렇게 하기로 하자.”라는 결정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 소용없어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야쿠자로 활동하자.” 이런 것 소용없어요. “우리가 모여서 교회를 만들자.” 이것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일체 거부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양으로 이미 규정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양으로 규정했으니까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양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데, 그것도 인정 안 합니다. 왜냐? 하나님이 양으로 규정할 때는 양다운 원칙이 있어야 돼요.

“우리는 양이다.”라고 해서 우리를 양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는 양이야.”라고 말만 하시고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양다움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십니다. 그 원칙을 먼저 알고 그 원칙대로 살도록 할 책임자를 목자라고 해서 세웁니다. 그러니까 양이 있는 곳이 반드시 목자가 있겠지요.

따라서 목자는 본인이 목자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목자가 세워지고 또 양이 규정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이제 하나님 안 믿어. 하나님의 양이라는 것도 싫어. 목자도 하기 싫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포기 하실까요? 아닙니다. 끝까지 그들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은 재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 걸려든 겁니다. 깡패 조직에서 ‘여러 사람 가운데 한 놈만 친다.’는 말이 있어요.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나 기타 맹수들이 양이나 말, 염소를 공격할 때, 딱 한 마리만 노리지요. 그럴 때 표적이 된 짐승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자기 말고도 다른 짐승이 많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 나만 공격하는가? 맹수들이 이렇게 한 마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이유는 그래야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말고도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을 만들어 놓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계속 다루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양 되기 싫어해요. 목자도 되기 싫어하고.

싫다고 해도 강제로 하나님이 “너는 내가 원하는 양이 되어야 하고 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안 되면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거예요. 누가 목자 되고 싶어서 환장했습니까? 그렇다면 “아이고, 잘못 되었습니다.” 하겠는데, 그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노리듯이 찾아와서 “너는 왜 목자답지 못해?” 그러면 목자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언제 목자 한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나오겠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독재를 하시면서 이것을 ‘선택한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 호세아 이후에 보면 어떤 말이 나오는가 하면, “나는 너의 남편이다.”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길가는 아가씨에게 “당신은 내 아내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죠.

남편이라고 불러줘야 남편이지. 그렇잖아요?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하면 그 사람이 남편이 아니지요. “여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야 그 사람의 남편이잖아요. 이스라엘은 이미 남편을 정했어요. 바알이 남편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뭔가 하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어떤 신을 믿을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한다는 거지요. ‘믿는다. 행동한다. 가진다.’할 때 결정은 누가 합니까? 내가 결정하지요. “내가 이것은 갖고 싶어.”하면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너 이것 가져.”하면 괜히 기분 나빠요.

인도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힌두교에도 근본주의가 있는데 이건 이슬람 근본주의보다 더 무섭답니다. 인도 근본주의 아가씨에게 서방의 기자가 질문했어요. “아버지가 당신을 그렇게 때리고 다리미로 지지면서 행동을 똑바로 하라고 강요하는데 그런 아버지가 밉지 않습니까?” 아가씨가 답하기를 “아버지가 고맙지요.” “그런 폭행을 가하는데 고맙다니?” “죽여도 되는 나를 살려주셨으니까 고맙지요.”

힌두교 근본주의에서는 딸을 낳으면 당장 죽이게 되어 있어요. 죽여야 되는데 부인이 “내 딸 죽이면 당장 이혼한다.”고 해서 안 죽인 거예요.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아무리 매를 맞아도 죽이지 않은 것만도 고맙다는 거지요. 복음 같아요. 다른 여자아이들은 죽었는데 본인은 살았으니까 얼마나 감사하냐는 거지요.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면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입니다. 우리들의 의견은 들을 생각도 안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보수적이라. 강남 스타일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의견은 일체 고려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어떤 남편을 보고 남편감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의사를 말해서 합의에 의해서 부부가 되잖아요. 그런데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이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는 너의 남편이고 너는 나의 신부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부될 사람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신부로 정했어요. 왜 이런 식으로 하셨는가? “너의 안목으로는 나(하나님)를 남편감으로 지목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결정은 어떤 것도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거나 흡족한 것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렇다고 내팽개치면 지옥 갈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을 묵살하고 하나님의 일방적 의지만 그 인간 속에 담기 위해서 없었던 인간을 새로 만드는 거예요. 집에 혼자 사는 어떤 아가씨가 심심해서 곰 인형을 갖고 싶어요. 그러면 그것을 구입해야겠지요. 인터넷으로 구매를 해서 택배로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어떤 아가씨는 강아지도 싫고, 곰 인형도 싫고 혼자 있고 싶은데 어느 날 갑자기 택배가 와서 곰 인형을 주고 갔다면 이것은 자기가 원했던 것이 아니니까 그 곰을 칼로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뒤늦게 곰 인형 보내신 분이 찾아와서 “내가 준 곰 인형 어떻게 했니?” 이렇게 묻는 거예요.

“내가 준 성령, 내가 준 믿음, 소망, 사랑을 너는 왜 안 돌아보냐?” 이런 식입니다. 나중에 주님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내가 먼저 있고, 이런 나를 하나님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요소를 담을 그릇을 만들다보니까 이스라엘이 생긴 겁니다. 이사야에 나와요.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릇을 만들 때 천한 그릇과 귀한 그릇을 토기장이가 결정하는 것이지 토기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뭐냐? 거룩한 토기. 그리고 이방 나라는 망치로 때려고 부숴버릴 용도로 만들어진 토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수용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뭐가 붕괴되어야 합니까? 매사를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서 외부와의 관계(하나님과의 관계)도 갖는다는 이런 생각이 어린양 앞에서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이것이 믿어지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기에 반드시 개인구원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 알고, 이런 일하면 구원 됩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개인 구원이 아니라 “너희들은 구원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구원 받는 너희들 속에 포함이 됩니까?” 또 이렇게 개인적인 것을 삽입해서 질문하지요. ‘너희’에는 관심이 없고 ‘나’에게만 관심이 있는 거예요.

‘개인 구원’도 ‘집단 구원’도 적당한 용어가 못 됩니다. 집단 구원을 말하면, “나는 그 집단에 포함 됩니까?” 또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그래서 저는 ‘상태 구원’이라고 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는 상태, 그 상태를 하나님께로부터 돌려받는 식으로 구원 작업이 진행됩니다. 이것이 ‘예수 안’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태를 찾고자 합니다. 상태를 찾고자 한다는 것은 먼저 ‘구원이라는 상태가 이미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져야 되고, 그 상태가 그대로 구원의 내용이 담겨서 회수되는 방식으로만 주께서 일하신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해결이 됩니다.

개인은 상태가 있어도 이 상태는 상태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상태에서 나는 구원 받을까?’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오늘 버스를 타고 광주로 오는데 순창을 지나는데 비가 쏟아져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버스 안에 있는 TV에서 골프 중계방송을 하는데 거기는 날씨가 쾌청해요.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는데, 비오는 공간 속에서 화창한 날씨의 화면이 나오더란 말이지요. “맞아. 바로 저거야!” 지금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잖아요. 이 저주받은 세상에 하나님이 TV모니터를 설치해서 그 속에는 축복된 천국의 모습이 나온단 말이지요. 이 상태를 우리가 만들어냈습니까? 아니지요. 그리니까 우리 구원은 예초에 접어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 받을까? 내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그 희망을 접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서 우리가 내미는 손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화목을 이루시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을 냉혹하게 외면하고 거부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구원을 이룬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간추리면, ‘개인 구원을 추구하는 자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태 구원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버스는 폭우 속을 달리는데, 버스 안 TV에서는 날씨가 맑아요. 그런데 TV화면 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 "HOLE IN ONE." 이라고 쓰여 있고, 뒤에 멋있는 승용차가 있었어요. 이것의 의미는 홀인원을 하면 승용차를 준다는 거예요. 이걸 보고, “야, 우리도 한 번에 천국 구멍에 빠지면 얼마나 좋겠나?”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요.

저주의 폭우가 쏟아지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저 구멍에 빠져서 차도 타고, 날씨 좋은 곳에 살면 얼마나 좋겠나?

모니터가 이미 장착되어 있으면 화면이 나오지요. 그러면 이 버스에 탄 사람 30명 가운데 저 모니터에 관심 있는 사람은 어떻게 돼요? 효과를 보지요. 이것이 구원 효과인데, 모니터의 설치효과 있지요. 주께서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거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 인생의 방향성이 그쪽으로 기울듯이, 주께서 켜놓은 복음의 모니터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겠지요.

이럴 경우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현재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주변의 광경, 버스 운전수의 복장, 차장 밖 지리산에 비가 내리는 것 등등이 그 모니터에 있는 아름다운 골프장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못 빼앗습니다. 왜? 방향이 그쪽이니까.

만약 머리 큰 사람이 화면을 가린다면 “머리 치우세요.”라고 나오겠지요. “어이, 이단! 빨리 비켜. 나는 십자가가 보고 싶어.”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제 앞에 앉은 어떤 사람이 화투 패를 돌리면서 “화투 같이 칩시다.” 한다면, TV 속 골프 치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화투는 당신들끼리 치세요. 나는 골프 봅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화투장을 저는 ‘교회 하기’로 봅니다. “우리 모여서 하나님 섬기기 위해 교회 합시다.” 하면, “비키세요. 나는 지금 십자가 복음 듣고 싶어요.” 이렇게 되면 화투장 들고 돈 벌려고 하던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이 동네는 장사 안 되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 골프장은 버스 안에 없습니다. 바깥 서울에 있어요. 서울에 있는데 생중계를 하니까 TV를 통해서 모습과 자막이 나왔잖아요. 지금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어린양의 나라입니다. 그 어린양이 계시는 나라의 소식이 모니터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과연 몇 명이나 거기에 관심을 갖겠습니까?

화투 치기에 바쁘고, 저쪽은 스마트 폰 들고 채팅하고, 뒤에는 이어폰 꼽고 음악 듣고, 어떤 사람은 잠자면서 가고 있단 말이지요. 주위에 이들을 깔아놓은 것은 진정으로 그 모니터 골프장에 관심 두는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구원 효과입니다.

지금까지의 강의를 정리하면, 주의 말씀은 우리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자기 백성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능력이 같이 작용합니다. 바로 그 사실을 우리는 끌려가면서 고백하는 겁니다. “내가 신부도 아닌데 나를 신부라고 하시니 너무 감격스럽습니다.”라는 고백. 나는 양이 되고 싶지도 않은데 양이라고 부르시는 그 고마움. 목자도 아니데 목자로 인정해 주시는 그 은총.

이 모든 것이 감격스럽게 나오는 그것을 성경에서는 ‘회개’라고 하는 겁니다. 질질 짜고 우는 것이 회개가 아니고, 방향성을 모니터 쪽으로 제대로 잡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모니터가 뭡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그 모니터가 예수님이었고, 오늘날은 예수님의 영, 성령입니다. 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만 보여주는 거예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강의 내용을 잘 이해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해보면, 양이나 목자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해서 우리에게 전달한다고 했고,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구원 받고자 하는 욕망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 개념을 왜 하나님이 안 받아드리는가 하면, 우리 쪽에서 뭘 끄집어내도 결국 내가 신이 되기 위한 모양새기 때문에 주님이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 수 없는 새로운 능력이 외부에서 주어져야 돼요. 즉 외부에서 구원하는 것이지 나의 내부적 능력으로 마중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행함이 아닌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서 믿음의 주체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효과 중 하나가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능력이 우리 능력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냥 능력에 뒤덮인 셈이 되겠지요. 광주에 비가 많이 왔지요. 비가 내리는데 이제 그만 내리도록 우리가 결정할 수 없어요. 비가 내릴 때 비가 필요한 밭이 있다면 “빨래 늘어놓은 우리 집에는 비 내리지 마시고 우리 밭에만 비가 오게 하옵소서.” 이렇게 할 수 없지요. 그냥 하늘에서 내리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어요.

이처럼 믿음은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어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그냥 태풍이 와서 퍼붓고 가는 것처럼 우리는 거기에 휩쓸려 갈 뿐이지 따로 내가 어떻게 결정하고 판단할 수 없어요. 만약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바울에 의하면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 됩니다.

로마서 4장에서 ‘행함’은, 아브라함이 자기 행한 것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미 구약부터 있었어요. 구약 때부터 이미 행함 층과 믿음 층이 나란히 간 겁니다. 그래서 행함 층 보다 믿음 층이 이긴 사람은 구원 받고, 행함 층이 이긴 사람은 멸망 받습니다.

제가 어릴 때 삼촌과 같이 방을 썼어요. 우리 형제와 삼촌이 같이 자면서 이불은 하나였습니다. 여름에는 괜찮은데 겨울에 큰 삼촌이 이불을 감고 자면 나머지는 이불도 없이 움츠리고 자야합니다. 믿음의 쪼가리가 제한되어 있다면 우리는 저쪽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져가면 우리는 받을 믿음이 없겠지요?

이 말을 하는 것은, 믿음은 곧 행함의 면적이나 양으로 따질 수 있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져도 그 믿음의 두께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행함으로 한다면 아브라함 이불 따로 있고 우리 이불 따로 있고 이렇게 되는데, 이러면 우리 구원은 보장받지 못합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 층에서 온 것은 구원의 효과가 아니라는 거지요. 방금 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구원은 덧셈이 아니고 뺄셈이다.’ 왜 그런가? 덧셈은 자꾸 보테고 첨가해야 합니다.

플라톤 철학이 뭔가 하면, 이상(이데아)계와 현실계를 나누어서 이상계는 진짜고 현실계는 이상계의 모방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삼각형을 그리라고 하면, 각자 삼각형을 그려요. 여러 삼각형 중 어느 것이 진짜 삼각형입니까? 진짜 삼각형, 세 각의 합이 180도인 것은 따로 있는데, 그 진짜의 모방만 다양하게 그렸을 때 이게 현실계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인간이 누구인가? 이 세상에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없지요. 여러 사람이 있지만 진짜 사람은 없어요. 우리 중에 누구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없어요. 그런데 철수, 영희, 순자 이렇게 모아놓고 사람이라고 한 겁니다. 사람의 원형은 따로 있고, 이 세상에서는 그 모방체들만 현실을 채우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신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플라톤은 이런 주장을 한 겁니다.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진짜는 신만 품고 있고, 그 유사품들을 이 세상에 깔아놓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각자 다르다고 해서 신이 없다고 하지 마라. 사람들이 다 다르지만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라는 거지요.

집사님은 왜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성립되려면 “신이 만들었어.” 이 대답밖에 없어요. “엄마, 왜 내가 있는 거야!” “내가 너를 낳았거든.” “그럼 엄마는 누가 나았는데?” 이러면 그 다음부터 “밥이나 먹어라!” 하면서 강제로 대화를 차단시킵니다. 왜? 계속 이야기해봐야 답이 없거든요.

신이 있어야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성립되고,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야 윤리와 도덕이 탄력성을 받습니다. 만약 아무도 만든 이가 없는데 내가 여기 있다면 누가 신입니까? 내가 최초의 신이 되지요. 내가 최초의 신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희들은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거든요.

내가 술 먹고 칼 들고 옛날 직장 동료를 죽이든 말든 너희들이 왜 간섭하느냔 말이지요. 힌두교 가정에서 자기 딸을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였단 말이지요. 딸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죽였을 때, 경찰이 와서 “살인자 나와!” 한다면, 누가 말리는 줄 알아요? 일가친척들이 다 말려요. 왜? “이건 우리 가정문제인데 나라에서 왜 간섭하는데?” 이렇게 나와요.

힌두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뭐라고 이야기해야 됩니까? ‘우리가정을 위해서 국가가 있는 것인데, 우리 가정을 위해서 국가가 도움은 못 줄지언정 왜 훼방을 놓는가?’ 할 때 나라가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이렇게 답변해야지요. “우리나라 인도는 법치국가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가정의 관행이나 풍습, 전통보다 국가법이 우선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골치 아픈 것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나쁜 짓한 사람을 신부가 개인적으로 죽였다. 그러면 경찰이 와서 신부를 잡아갈 때 신부는 뭐라고 항변합니까? “이 일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교회법에 따라 처리할 테니까 국가는 관여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상식적으로 알아두세요. 근대국가는 어떤 법보다 자연법이 우선됩니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자연법은 천부인권설입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처단할 자격은 없는 겁니다. 어떤 명목으로도. 다만 그 공동체(국가)가 결정한 법에 의해서 인간을 처단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났기에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법의 존재를 언제 아는가? 그 법을 위반했을 때 비로소 국가가 뭔가를 알 수 있지요. 바람피우는 여자에게 “당신은 왜 남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는가?” 하니까 “언제부터 국가가 내 몸을 관리했지?” 라고 되물어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위반했을 때만 간섭하지 말고 내가 굶고 있을 때 먹을 것 주면서 내 삶을 간섭하면 따르겠다는 거지요.

플라톤이 죽은 후에 신플라톤 주의가 등장합니다. 이 둘의 차이점이 뭔가? 플라톤 주의는 제가 앞에서 이야기했지요. 이상계와 현실계가 단절된 것. 신플라톤 주의는 단절된 이상계와 현실계에 단계를 만들어서 연결시킵니다. 더러운 세상에서 점차 신에 대한 정보와 내용을 많이 덧붙이면 점점 신 쪽으로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이 신플라톤 주의를 교회에서 활용했습니다. 지난 수련회에서 말씀드렸지요.

수련회 강의 내용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제 질문은 강의가 처음부터 복음이었냐는 것입니다. 다 복음과 연관되어 있어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면서 민주주의에 안 들어오잖아요. 우리는 의례히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따져보면서 무엇이 민주주의인지 알아야 되듯이, 우리가 복음이라고 하니까 당연히 바울이 복음이고 베드로가 복음이고 요한이 복음인 줄 알잖아요. 그러면서도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잖아요. 그게 싫다는 거예요.

복음과 교회가 어떻게 다른가를 알기 위해서는 교회가 어떤 식으로 성경과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 그런 강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의를 들어보면 별로 은혜도 안 되고, 나쁜 이단들이 하는 짓 같은데 그런 내용을 왜 시간 낭비하면서 길게 이야기했는가? 이런 의문이 들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 속에도 얼마든지 그런 요소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거론한 겁니다. 상대성 원리를 이야기한 것은 현대인들은 과학을 진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납득이 되고 합리적이고 논리에 빈틈이 없어요. 우리는 거기에 뿅 가잖아요. 반면에 복음은 논리도 비약적이고 말이 안 되는데, 그냥 믿으라고 하니까 믿는 척하는데, 뭔가 찜찜하고 분명하지가 않아요.

복음은 인정하지만 과학이 더 끌려요. 과학으로 따지면 딱딱 맞으니까. 이것이 우리의 심성인데 그것이 바로 로고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로고스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어요.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어떻게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느냐? 그걸 해야 돼요. E=MC2 에너지가 물질로, 물질이 에너지로 변한다는 그 공식이 막말이 아니잖아요. 이것이 옳은 공식이라는 것이 바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통해서 확인되었어요. 원자폭탄이 기도해서 터졌습니까?

미국의 핵 잠수함에 보면 E=MC2이라고 써 놓았어요. 왜 이걸 써놓았어요? 지금 이 공식의 힘으로 7만톤이나 되는 항공모함이 움직이고 거기에서 비행기가 뜬단 말이지요. 이게 실재고 이게 현실이지 이것 외에 무슨 현실이 있냔 말이지요. 이 말은 과학만이 실재고 과학으로 점검 안 된 것은 못 믿겠다는 겁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지금 놓여 있습니다. 로고스 속에. 그러니까 이 시대를 인정하면서도 복음을 믿는다? 그러면 하늘의 태양이 둘이 된 것입니까? 예수님도 맞고 과학도 맞고 그런 것입니까?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예수를 믿든지 과학을 믿든지 둘 중 하나를 믿어야 합니다.

이론상으로는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마음은 과학에 더 끌리고. 이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과학이 로고스에서 나왔다고, 그 로고스는 항상 내 편한 쪽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편한 것이 진리가 되지요. ‘나는 진리가 아니요, 나는 길이 아니요, 나는 생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낯선 진리가 들이닥칠 때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신플라톤 주의의 덧셈이라는 것은 계속 추가적인 로고스와 지식을 더할 때 신에게 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매개 역할을 누가 했는가 하면 교회가 하고 있어요. ‘과학이 옳은 것을 아시는 분들 교회 오세요. 여러분들이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한 천국을 우리가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거부할 사람은 없지요. ‘과학도 맞고. 그 다음 과학으로 해결 안 되는 것이 천국 가는 일이니까 이것은 교회 와서 해결하겠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겠다는 심보인데, 이게 옳은 생각입니까? 이게 신플라톤 주의입니다. 로고스에서 나온 거예요.

수련회 마치고 그 강의 내용을 언제까지 우려먹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할 생각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로고스 집단입니다. 로고스로 얻어맞는 로고스가 구원합니다. 그 당시의 유대교가 이랬어요. 점점 거룩해지면 천국에 가깝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천국으로 골인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걸 교회가 미끼로 해서 사람들을 교회에 끌어모은 겁니다. 모든 교회 설교가 이 바탕에서 진행됩니다.

이런 바탕이 아닌 설교 들어보셨어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이런 바탕에서 설교합니다. ‘마음을 낮춰라. 순결하세요. 욕심 부리지 말고 십자가 바로보세요.’ 이 모든 소리가 다 이런 바탕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뭐가 정답인가? 덧셈이 아니고 뺄셈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을 생태 구원이라고 했지요. 다 이룬 것 속에 무엇이 구원이 아닌가를 뽑아내는 방법입니다. ‘아, 이게 구원이 아니었구나! 헌금, 기도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십자가 알고, 복음 아는 것도 구원이 아니었구나.’

내가 십자가를 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십자가로 인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납치되는 것이지 주님을 우리가 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되는 것이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되는 것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차이를 아는 사람이 복음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출발해야 만족합니다. 정신이 희한해요.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자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그 목적이 자기에서 꽂혀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텐데 주님이 나를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어요. 나를 위한 링거(영양 주사)가 주님이고 나는 주님의 링거를 받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면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쪽 빨아먹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홀쭉해 집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빨아먹습니다.

어제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있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은 주님께 말려들었어요. 왜냐하면, 다윗이 밧세바를 맞이하는 것도 주님이 설치해 놓은 덫에 걸린 거예요.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그물에 걸리게 해놓고 용서해 주시고.

그래서 우리는 용서 받기 위해서 걸려들어야 합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용서받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덫에 걸려들어야 돼요. 그 모든 배경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너는 내 양이라.”는 그 한 마디 속에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리고 자칭 양을 돌본다는 그 인간들은 무조건 거짓 목자가 되어야 해요. 왜냐? 그래야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참 목자가 티가 나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참 목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으면서 어떤 사람을 내보내서 “네가 거짓 목자 역할을 해.” 하면서 떠미는 거예요. 그래서 엉뚱한 짓 실컷 하도록 한 후에 참 목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에 등장한 거짓 목자들은 참 목자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가지 싫어도 억지로 등장해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없으면 안 됩니다. 거짓 목자노릇을 해야 합니다. 조00 목사가 그런 짓해야 되고 다 그렇게 해야 돼요. 자기도 자기 인생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5중 복음 외쳐야 돼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데살로니가 후서에 나오지요. 사단이 역사하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구원 받는 것은 택한 자 외에는 안 되도록 하는 교묘한 전략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전략에 말려들었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이야기, 그 목자라는 개념 안에 이처럼 엄청난 것이 들어있어요. 목자의 개념은 양을 겨냥하고, 양과 목자 그리고 하나님, 하나님과 양 사이에 목자가 개입해서, ‘내가 규정하는 양처럼, 내가 규정하는 목자로써 제대로 역할을 못했냐고 책임을 묻는 것’ 그 모든 것은 모니터에 있는 날씨 좋은 골프장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구원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목자 안 될래. 나는 양 안 할래.” 이런 식으로 거부하면 그 사람은 방향성 자체가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자기 자신에게만 꽂혀있는 그런 셈이 되겠지요.

10분 쉽시다.

(2012. 9. 10. 09:41 녹취 마침)

서경수(IP:14.♡.106.224)

12-09-18 16:15

광주 강의(2012. 8. 24) 33-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34장 2절에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했는데, 목자들이 뭐가 잘못 되었단 말입니까? 2절에는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라고 되어 있고, 3절에는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4절에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은 결국 뭔가? 진짜 목자는 이렇지 않은데 가짜 목자는 이렇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목자가 나왔습니까? 안 나왔지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진짜 목자는 나중에 무대에 등장하는데, 자기 앞서 가짜 목자를 먼저 보내는 거예요. 엉터리 목자를 미래 보내놓고 그들이 하는 행세를 보고 뒤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저 인간들은 가짜 목자입니다.” 이런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것을 미리 깔아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의인 되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주께서 깔아놓은 것은 ‘주님 앞에 모든 자는 죄인’이 되도록 하신 겁니다. 죄를 지으란 말이 아니고 어떤 행위를 하고, 말고 이전에 이미 죄인 되도록 깔아놓은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 방식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태풍이 몰려오는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그리고 어떤 인간도 상대를 돌로 칠 수 없다는 것,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미리 깔아놓으시는 그 방식을 이해해야 돼요. 그 방식을 첫째 시간에 ‘상태 구원’이라고 했지요. 어떤 상태? 오직 주님만 의롭고 모든 사람은 죄인인 그 상태 자체를 건져 올리는 거예요.

이 상태는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훼손 안 되려면 모든 인간은 마땅히 죄인 될 때 그 상태가 온전한 상태입니다. 온전한 죄인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죄인이 스스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의인 되려고 애쓰면 안 되는 겁니다.

이사야 53장 4절을 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는 하나님께 벌 받아야 마땅해!’라는 생각을 우리들이 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돼요? ‘예수라는 작자는 벌 받아야 마땅해!’라는 생각을 해야 그것이 제대로 된 우리 모습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이것이 주께서 정해놓은 우리 모습입니다. 이걸 그대로 수용하면 됩니다.

우리가 메시아에 대해 좋게 본다는 것은 우리가 가짜 메시아를 보고 있는 겁니다. 가짜 메시아를 사랑하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진짜 메시아가 오면 너희 손으로 때려죽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제대로 믿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어야 된다니까요. 아무도 없어야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 되지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눈치 채고 성령이 오기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그냥 성령이 바람같이 불어서 우리를 낚아채면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사용할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목자가 살진 양을 잡아먹고, 이런 저런 책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목자 나름대로 양을 다루는 방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목자는 ‘이는 내 양이다.’라고 지목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목자 됨을 위해서 양은 저거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평소에 우리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행동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느 인간이 교회 와서 “주여, 나의 죄인 됨을 폭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까? 그럴 것 같으면 룸살롱에 가지 왜 교회에 오겠습니까? “주여, 남들은 놀러 갔는데 저는 교회에 왔습니다. 예뻐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강아지처럼 쓰다듬어 달라고 교회 오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주여,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나를 부숴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교회 온다면 그것은 기특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왜 기특한 것이 아닌가 하면, 이 세상에 기특한 일은 없고 지정된 말씀대로 될 뿐입니다. 말씀대로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실망을 해야 돼요.

실망을 해야, “너희들은 내가 하나님께 매를 맞고 고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데, 나의 찔림은 너희의 허물 때문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연결이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런 죄인의 품성을 마땅히 보여야 합니다.

서울에서 어떤 분을 만났는데 “나는 자꾸 주님을 원망하는 투로 이야기합니다.”라고 하는데, ‘원망하는 투가 있을 때 그것이 좋은 줄 알아라. 원망할 때 비로소 그 순간만큼은 불꽃놀이처럼 주께서 원망하는 그 때에 나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주님 공로만 100%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우리의 구원에 무엇이 보탬이 되겠습니까? 100% 주님의 공로가 아니고 ‘나도 주님을 좀 생각했는데.’ 이것이 가미되겠지요. 이것이 가미되면 이사야 53장 말씀과 맞지를 않아요. 우리는 늘 이사야 53장 말씀처럼 주님을 원망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기쁨으로 수용해야 됩니다. 내 모습이라고 수용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이 만들어 놓은 지정된 자리로 받아들여야 해요.

여기에 나오는 목자는 특별히 나쁜 목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습입니다. 2절에 나오지요.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 누가 있습니까?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이란에 갔어요. 이란은 서방지역에 대해 반기를 들고 북한과 협력해서 남한 사람인 반 총장을 테러할 지도 모르는데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그곳에 갑니까? 간단합니다. 자기 명예를 위해서.

만약에 이것과 반대로, 예전 총장은 목숨을 걸고 위험한 지역에 가서 15일 동안이나 머물며 그들과 협상했는데 반 총장은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참석했다가 하루 만에 돌아왔다면 반 총장이 욕을 먹겠지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총장으로 세웠는데 당신 자신만 생각하고 --” 이렇게 욕하겠지요.

반 총장은 그것을 알고 예전 총장이 15일을 머물렀다면 자신은 30일 머문단 말이지요. 이런 행동 자체가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입니다. 여기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벗어나는 자가 있다면 이사야 53장의 말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채찍 맞은 것’은 헛수고입니다.

테레사 수녀, UN 사무총장 그 어떤 사람의 행동도 예외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지정된 말씀대로 주님께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의 지정된 장소는 ‘예수는 매 맞아도 싸다.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도 마땅한 자야!’ 라는 심보를 우리 속에 장착하고 있어야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찾는 것은 세상살이가 너무 힘드니까 도와달라고 찾습니다.

사람이 위험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만사가 잘 될 때입니다. 이때는 공중에 붕 떠있어요. 갑자기 귀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저는 변호사인데 김00 노인이 죽으면서 당신께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곳에 사인하시고 재산 상속하세요.” 이렇게 할 때 “주여, 어찌 나에게 이런 심한 벌을 내리십니까?”라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기도했더니 이제야 주께서 응답하셨구나.’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런데 다음 날 변호사가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제가 주소를 착각해서 엉뚱한 분을 찾아왔군요. 미안합니다. 상속자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 뒷집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하는 식으로 자기만 먹이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세상에 어느 목자가 돈 없는 양만 반기고 돈 있는 양을 싫어해서 돈 있는 양이 헌금하면 “제발 헌금 좀 하지마세요. 그렇게 하려거든 우리교회에서 나가주세요.” 이런 목자 봤습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목자를 상상하지만 성경은 모두 자기만 먹이는 목자 외에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이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멸망은 필연적이라는 겁니다. ‘양이 양 되기 위해서는 목자가 좋아야 한다.’ 이 말씀은 ‘목자가 나쁘면 양도 그 양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이걸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제가 찾고자 하는 것이 17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서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면, “나의 양떼 너희여”라는 말이 있는데, ‘너희여’ 속에 기존의 양들이 포함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목자가 문제가 되었잖아요. 그러면 양도 같이 문제가 된 거예요. 왜냐하면, 목자라는 그 개념과 양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나는 양이다. 저 사람은 목자가 되어야 돼.” 라고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목자는 자기만 먹인다고 하지요. 그러면 양은 어떻습니까? 양은 목자를 위해 삽니까? 양도 양 자신을 위해서 살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양이 말하기를 “하나님, 저는 양입니다. 저분은 날 도와주기 때문에 진정한 목자입니다.” 라고 양이 규정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할까요? 그걸 인정 안 해요.

우리는 양들인데 개떡 같은 목사가 와서 교회를 버려놓았다.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제대로 된 목사가 오기를 기도합시다.”라고 기도할 때 그것이 옳은 기도냔 말입니다. 이게 옳은 기도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순간 그 사람은 뭘 생각합니까? 17절에 나오는 것처럼 주님이 나서서 양과 양 사이를 심판해야 할 텐데 그 교회 양들은 자기는 무조건 천국 가는 것으로 결정하고 말았어요.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먹이는 목자와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가 양 맞습니까? 결정할 수 있는 심판의 목자가 오게 하옵소서.”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기도 응답이 안 되면 천만다행인데 만약에 기도가 응답되어서 “너희는 양이 아니었어!” 이렇게 판결이 되면 자신이 어떻게 되느냔 말이지요.

야구 시합하다가 심판과 감독이 싸움이 붙었어요. 심판은 스트라이크라고 하고 감독은 틀림없이 볼이라고 하면서 다퉈요. 그래서 비디오 판독을 하자고 나왔습니다. 괜히 비디오 판독해서 잘못 판정한 것이 탄로가 나면 창피하지요. 그래서 그냥 양보하겠다고 합니다. 사실은 양보한 것이 아니지요. 비디오 판독하면 오심이 들통 날까 싶어서 그렇게 했어요.

우리 인생을 비디오로 판독해 봅시다. 기가 막힐 거예요. 누가 보기 싫어할까요? 우리가 보시 싫어요. 이때까지 거짓말 안 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하나도 없고, 과장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남을 위해 산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이지요. 자기는 남을 위해 안 살아놓고 다른 사람이 날 위해주지 않는다고 얼마나 미워하고 욕했습니까?

농사도 지을 수 없을 만큼 안 좋은 땅이어서 그냥 버려두었는데 갑자기 도로가 생긴다고 보상금 받아가라고 해서 갔더니 보상금이 무려 10억이나 나왔어요. ‘하나님은 은혜다.’라며 너무 좋아하고 있는데, 뒷집 아줌마가 와서 보상금 얼마나 받았냐고 물어서 “우리 땅이 1,000평 인데 10억 받았습니다.” 하니까 그 아줌마 하는 말이 “나도 1,000평인데 우리는 15억 주던데.” 라고 하니까 갑자기 화가 나서 정부를 상대로 고소를 하고 난리가 납니다.

뒷집 사람이 안 찾아왔으면 은혜였어요. 찾아오니까 내가 나만을 위해서 은혜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감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들통 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사람을 보낸 것은 주님이 보낸 것입니다. 주님이 이웃사람을 보내서 나를 고발합니다. 내가 나만 챙기면서 그것을 축복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음을 폭로케 한 것이지요.

이렇게 나만 위해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누가 찾아왔는가? 진짜 양과 가짜 양, 그리고 진짜 양과 염소를 나눌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 진짜 목자가 우리 앞에 등장했을 때 모든 사람이 그를 때려죽이고 말았습니다.

“나쁜 목자여서 죽였습니다. 제대로 된 목자라면 저희도 순한 양으로 그 목자를 대우했을 것입니다.” 라고 우기는 그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진짜 목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 에스겔 34장의 내용입니다.

이런 강의를 하면 당장 나오는 질문이 있어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분명히 ‘나의 구원’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다는 내용은 성경에 없습니다. 내가 뭔데 구원해 줍니까? 주님 말씀은 “너희는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의 구원’이 아니고 집단적 구원입니다. 집단 구원이니까 나를 버리고 집단에 소속되어야 될 텐데, 나를 안 버린 채 집단에 들어가니까 엉뚱한 의문이 생겨요. ‘하나님은 내 편입니까, 집단 편입니까?’

이것은 마치 천국 가서 “하나님, 우리들 중 누가 제일 높습니까?” 라는 물음과 같아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지요. 주님은 너그럽게 “다 내 피로 구원받은 거야.”라고 하시면 사람들은 “아멘!” 해놓고 돌아서면 또 싸워요. “주님은 나와 시선을 맞췄어. 날 더 사랑하셔.”라고 우기면서. 이런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사람이 제일 힘든 것이 뭔가 하면 지루함, 권태입니다. 지루함을 잊기 위해서 사람은 서사(이야기)를 집어넣는 거예요. 인생에서 이야기를 집어놓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며 내뱉는 내용은 다 거짓말입니다. 지루함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나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이것을 플라톤 철학에서는 ‘코라’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혼돈인데 어떤 혼돈상태냐 하면,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은 혼돈상태입니다. 사람이 엄마 자궁 안에 있으면 주체와 객체를 나눌 이유가 있습니까? 없지요. 엄마가 시장에 가면 아이가 우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나와 떨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어른의 입장에서는 엄마는 엄마 몸이고 아이는 아이 몸이니까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아이들한테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처럼 하나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혼돈상태에 있는 것이 원형인데 세상을 살다보면 여기에서 이곳까지 나라는 것을 남들이 요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계룡산에서 수행하다가 50년 만에 하산했다고 합시다. 행색이 초라하겠지요. 초라한 모습으로 서울 거리를 다니는데 경찰이 수상하다고 여기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합니다. “당신이 뭔데 나에게 그런 이상한 것을 보자고 합니까? 나는 나이면 그만인데.”

내가 내 안에 담겨 있으면 주민등록증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까? 필요 없지요. 그런데 내가 관공서에 가서 여권을 발급하려고 하면 주민등록증이 필요하지요. 관공서에서 주민등록증을 요구할 때 “당신이 뭔데 나에게 주민등록증을 요구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상태구원과 자기가 하나가 되어 있지요. 이것이 1번입니다.

이제 2번. 어떤 사람이 나를 납치해서 어느 도시에 던져놓았어요. 내 집은 대구인데 광주에 내가 있단 말이지요. 전혀 낯선 동네여서 경찰관에게 물었어요. “아저씨, 대구에 가려고하면 어느 쪽으로 가면 됩니까?” 경찰관 왈 “그런 것을 왜 내게 물어요?”라고 했다면, 이때 상태는 뭡니까? 나는 작아지고 내가 아닌 바깥 상황이 나를 지배하고 있지요. 이럴 때는 뭐가 필요합니까?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도움을 받으려면 그쪽에서 요구하는 주민등록증을 내가 제출해야 내가 여기에서 도움을 받고 생존할 수 있단 말이지요.

계룡산에서 방금 내려온 사람은 복장도 행색도 이상하니까 경찰이 “주민등록증 봅시다.” “그게 뭔데요?” “(수갑을 채우고)따라오세요.” 그래서 계룡산 도사가 경찰에 끌려갑니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통달한 도사가 수갑의 효력도 몰랐던 거예요.

사람들의 원형은 신이든 예수든 간에 다 자기 발밑에 있어야 돼요. 이웃이고 아버지고 친구고 간에 모두 다 내 발밑에 있어야 돼요. 이게 원형이에요. 이게 ‘코라’상태라니까. 이걸 사람들이 희망하고 있어요.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가니까 그게 안 먹히니까 자기 자아를 축소시켜야 합니다.

그 축소할 때 주민등록증도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도 베풀고 이런 식으로 자기를 압축시켜 줘야 됩니다. 그래서 압축이 되면 여기에서 벗어나는가 하는 문제를 제가 지금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압축되면 여기에서 벗어났습니까? 안 벗어났지요. 혼돈이 나의 원형인데,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내 원형인데.

그래서 중들은 머리 깎고 산으로 가잖아요. “나는 너희들하고 안 놀라. 주민등록증하고는 안 놀라.” 이것이 ‘코라’ 원형의 세계. 플라톤 철학에 의하면 창조되기 이전의 혼돈상태입니다. 그 혼돈의 상태 그 모습을 찾아서 떠나는 겁니다. 성철스님, 법정스님 이런 분들은 고집이 센 사람들입니다.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보통 고집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자기에서 집중하면서 이웃 사랑을 한다고? 이런 상태에서 이웃 사랑을 하면 ‘역시 나는 훌륭해!’ 자기 존재를 부각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응축이 되니까 여기 심판주가 누굽니까? 나만이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잖아요. 여기에 만약 메시아가 와서 경찰이 와서 “잠시 주민등록증 봅시다.” 이것은 만들어서 보여주면 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네 의를 보자.” 이렇게 나오면, 우리는 그 손목을 잘라야 됩니다. 용수철은 누를 수 있어요. 그러나 한계에 다다르면 튕겨나가지요. 이것이 마귀입니다. 우리 안에 마귀가 들어있어요. 마귀는 뭘 싫어합니까?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에스겔 34장 본문에서 다윗의 자손이 목자로 온다는 이 이야기는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어!’ 이런 뜻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윗의 자손 앞에 설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34장 2절을 보면, 나쁜 목자가 있다고 하니까 ‘설마 그 많은 목자들, 그 당시 제사장, 선지자들이 전부 나쁜 자들이겠는가? 한두 명 쯤은 선한 목자도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 목자로 왔다는 말은, ‘단 한 사람도 참 목자가 없었고 전부 자기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슬프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반겨야 하고 기뻐해야 됩니다.

성경은 우리로 회개케 하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합니다. 방향성이죠. 우리로 하여금 ‘내가 죄인인 것을 왜 진작 몰랐을까?’ 말로는 ‘죄인입니다.’라고 수 천 번 했는데 ‘진짜 우리는 죄인이어야 정상이군요.’라고 느낀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습니까?

가락교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불꽃놀이는 1, 2초 동안에 번쩍 터지지요. 찬란합니다. 1, 2초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사라지지요. 우리의 믿음도 이런 겁니다. 불꽃놀이 같아요. 시도 때도 없이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면 재미없어요. 늘 우리가 우리한테 불꽃으로 터지기 위해서 늘 우리의 지정된 자리, 나만 생각하는 자리에 가있으면 주께서 불꽃을 팡팡 터지게 해 주십니다. “죄인 맞잖아. 거봐!” 하면 우리는 “아멘! 우리는 죄인 맞습니다. 나만 생각했군요.”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뭐라고 부릅니까? ‘인자’지요. 에스겔은 되도 않은 인간인데 인자의 이름을 뒤집어썼어요. 이 이름은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인자라고 불렀어요. 이것은 남의 운명을 본인이 뒤집어 쓴 거예요. 진짜 인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미리 에스겔에게 그 운명을 담은 거예요. 그러니까 에스겔이 이런 소리를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핍박 받는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도가 뭡니까? 성도는 인자를 믿지요.

성도가 인자를 믿는다는 말은, 나 자신을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내 본성대로 나만 챙기는 행동은 하지만, 그래도 믿는 것은 인자를 믿어요. 행동은 내가 하고 믿는 것은 주님이고. 이것은 날마다 주님에게 얻어터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저의 죄악 된 행동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이와 같은 소리란 말이지요.

성도라는 말은 신약 시대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도를 대신해서 유다 나라가 있어요. 유다 나라에 뭐가 있습니까? 성전이 있어요. 이 성전이 에스겔 시대에 불타버렸지요. 그래서 성전 대신 뭐가 유다 나라와 함께 있습니까? 그랄 강가에 인자가 등장했지요.

성전이라는 건물 대신에 인자라는 인격체가 움직이고 있어요. 에스겔이죠.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유다에게 이야기합니다. “유다가 망한 것은 목자가 목자 구실을 안 해서 그렇다.” 라고 했을 때, 그래서 유다 나라는 포로 잡혀가고 성전은 불태워집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어디서만 볼 수 있습니까? 유대인은 생각했어요. ‘성전이 있는 이곳은 하나님 나라고, 성전이 없는 이방 나라는 지옥이다.’ 라고. 그런데 정작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성전이 불태워 져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터지는 그 현장에서만 유일하게 지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진정한 지옥은 십자가입니다. 왜? 독생자마저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옥이나 천국 개념은 우리가 있는 지점에서 정하면 안 되고 우리가 죄인의 입장에 서서 십자가에 합류할 때 여기에서 궁극적인 지옥을 경험하잖아요. 그러면 천국은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천국이 지옥 바깥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지옥 사건이 벌어지는 그 현장에서 사흘 만에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천국이 발생되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가장 지옥 같은 생을 살았잖아요. 그런데 나사로가 죽을 때 아브라함 품에 안기잖아요. 그러니까 지옥이 있는 곳에만 천국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가? “내가 바로 지옥 갈 인간입니다.”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그 성도 자체가 천국임을 주님이 선언하십니다. “네가 바로 성도야!” 왜? 이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아니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만 챙기는 자입니다. 과연 그런지를 판정하시는 분이 에스겔 34장 23절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어렵지요? 다윗은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요? 이미 죽은 사람이 왜 등장하지요? 죽은 이순신 장군이 등장해서 갑옷 입고 설친다면 곤란하지요.

죽은 다윗이 다시 등장했다는 것은, 전에 있던 다윗이 역사적이라면 새로운 다윗은 구름타고 올 다윗이기에 묵시 층의 다윗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역사 층에서의 양과 목자 개념이 장차 오실 다윗으로 말미암아 묵시 층에서 새롭게 양과 목자 개념이 형성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 층에서 있었던 양과 목자는 전부 죄가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목자라고 여기는 목사들, 양이라고 여기는 자들 모두가 죄인으로써의 목자고 죄인으로써의 양인 겁니다. 이것은 묵시적인 목자를 만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상당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34장 7-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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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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