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모양 120822
사람의 모양 120822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사람의 모양(겔 1:25-28)
이근호
12-08-22 21:33
사람의 모양
2012년 8월 22일 본문 말씀: 에스겔 1:25-28
(겔 1:25, 개역)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겔 1:26, 개역)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 1:27, 개역)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겔 1:28, 개역)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성전이 있는 곳은 천국이요 성전이 없는 곳은 지옥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들의 상식이 에스겔을 통해서 깨어집니다. 성전이 있는 곳이 지옥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옥이 아니라 제대로 지옥다운 지옥은 성전이 있어야 비로소 파악이 된다는 됩니다.
성전이 없으면 물론 지옥이고 천국이고 뭐고 간에 전혀 파악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에스겔을 통해서 성전이 지닌 제대로 된 의미를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그 전달이 사람의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아니됩니다.
언어란 사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책을 가지고 ‘꿀’이라고 말하고, 컵을 가지고 ‘물개’라고 말한다면 제 이외의 사람은 아무도 못 알아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일방적으로 저만 아는 의미를 가지고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사게 되면 전혀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독불장군처럼 “나만 알면 그만이다”고 버틸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로 인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인하여 마치 하나님께 우리 인간 세상을 일단 일정해준다고 간주하게 마련입니다.
십계명에 쓰여진 그 단어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단어와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단 인간 자체를 인정해주고 상관하신다는 쪽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인간들에게 이런 오해를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에 나서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7:21-23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지시에 따라, 명령에 준해서 실행하기만 하면 예수님을 기뻐시게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 쪽에서 도리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내가 아는 자가 아니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난감하고 황당한 사태입니다.
이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쓰는 말씀을 전할 때는 어떤 변환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의 형상’을 지니신 분의 작용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이 변환 작용이 그냥 인간 대 인간의 대화 형식이 아니라 무서운 저주와 심판의 불이 담겨 있는 글귀로서 인간 세계에 찾아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쳤지만 결국 예수님에게 돌아온 것은 ‘예수님에 대한 부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 자신들이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는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보여진 이 환상은 바벨론 그날 강가에서 주신 겁니다.
이것은 유다를 침략하는 바벨론이나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이 불태워지는 것이나 모두 다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자행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유다 나라에서는 성전 있음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있어 성전에 나타난 이 사람의 형상은 ‘어린양의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저주성이 그 완성을 보여주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날 때는 오로지 저주로서만 나타나는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마저도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불이란 영원한 저주와 심판을 행사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천명입니다.
곧 하나님의 모든 말씀 속에서는 이 저주성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시면서 이 저주성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했습니다.(고후 5:14) 요한계시록 15장에서는, 홍해바다가 불의 바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그 누구 예외없이 영원한 불의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 바다를 건너가는 사람은 오로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자기 의견을 개진 할 입장이 못되는 겁니다. 즉 “나 지옥에서 빼내어 천국 넣어주세요”라고 요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자들은 모두 다 저주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이나 영생을 얻을 자라는 것은 하나님 자체 내에서 결정될 사항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머금은 그 저주 안에서 생명작용과 구원작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를 만들어내는 구조인 성전에서 어떻게 사랑과 영생과 구원의 능력이 나올 수 있습니까?
무서움에서는 무서움만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구원이란 전쟁에서 비로소 결실 맺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냥 좋게 좋게 대화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을 동원하여 자기 백성을 상대로 전쟁을 벌리시는 분이 바로 성전이라는 전차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생명은 말씀 실행을 7 천사에게 맡긴다는 것이 요한계시록 15:7에 나옵니다. 그 7 천사는 7 대접을 가지고 지상에 저주를 퍼붓습니다. 이러한 작업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근거해서 비롯된 능력으로 시행된다면 이는 곧 그 어린 양의 죽음에 참여된 자만이 예수님의 생명을 얻을 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이 ‘거저 주신 것’의 귀중함을 날마다 되돌아보는 겁니다. 온 천하 보다 귀한 것이 저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뜻을 위하여 행동에 나서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8-23 11:42
3강-에스겔1장 25-28(사람의 모양)1208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장 25절에서 2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25-28
“그 머리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참 성경 보면서 모양새,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잡아야 할지가 난감하지요. 음성은 나오는데, 음성은 분명히 사람 같은데 음성이 사람 같다면 그 모양새도 사람이어야 하겠지요. 사람과 그 음성의 일치, 우리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사람의 소리가 들리면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일은 없지만 만약에 강아지나 당나귀나 물개가 사람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는 기겁해서 나자빠질 겁니다. 사람도 아닌 것이 왜 사람 음성을 내는가, 그 정체가 뭐냐, 네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가, 라고 하겠지요.
라디오에서 성우음성 나올 때 옛날 할머니들이나 어린아이 때 굉장히 놀랬습니다. 그 자그마한 상자 안에 사람이 실제로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TV안에서 사람이 움직일 때 사람이 작아져서 그 안에 들어가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요. 그것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가지고 사람 영상을 각 가정의 TV모니터에 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TV에 나오는 그 사람 모습이 진짜 사람모습이 아니고, 실체는 아닌데 실체는 방송국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요.
지금 에스겔이 뭔가 봤어요. 봤는데 26절 끝에 보면 “그 보좌의 형상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사람의 모양 같더라, 해서 여기 듣고 있는, 에스겔이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 쪽에서 에스겔 쪽으로 뭔가 하나님의 음성, 계시가 전달되면서 그 모습이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그것을 통로로 해서 말씀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중간에 있는 사람 형상을 매개로 해서 전환되어서 에스겔이 알아듣는 사람의 음성으로 들려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선지자에게 이야기할 때 사람이 알아듣도록 중간에 하나의 변환장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언어의 사회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언어의 사회성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여기 있는 찬송가를 찬송가로 하지 않고 이제부터 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컵이 있는데 이것을 컵이라 하지 않고 이것을 물개라고 하겠다고 내 맘대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자, 여러분, 꿀 560장을 부릅니다.’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지요. 이제부터 물개를 마십시다, 하면 누구도 못 알아듣습니다.
결국 못 알아듣는다면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나와 나하고만 이야기해야 돼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다 끊어지고 나는 나하고만 이야기한다면 결국 빌어먹지요. 사람과의 관계가 다 끊어지니까. 언어라 하는 것은 결국 내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아니하면 외톨이가 돼버리지요. 외톨이가 되고 자기 폐쇄적으로 잠기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전달할 때 사람들이 알아듣는 단어와……, 쉽게 말해서 지금 유다사람들 내부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가지고 우리에게 전달을 할 때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익히 알고 있는, 익히 사람과 사람사이에 통용되는 단어를 사용해서 주어진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 단어를 알아듣는다는 그것 때문에 무슨 오해에 빠지느냐하면, ‘아, 하나님도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인정해주는구나.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인간끼리 모여 사는 이것을 진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사회구나.’라고 오해를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자기가 폐쇄적이 되니까. 너희는 모르고 나만 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폐쇄적인 존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면서 그 당시뿐만이 아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에요, “그 날에 많은 사람” 할 때 그 날은 예수님 십자가 지고 부활하신 뒤에 날, 지금 이 날을 말하지요,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여, 우리가 주의 일을 했습니다.’라고 한다 이 말이지요. 제가 강의하는 것을 누가 들었던 모양이지요. 그것을 듣고 뭐라고 하느냐하면, ‘이 근호 목사는 주를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하는데 주를 위해서 살지 말라는 성경 대목이 어디 있느냐.’라고 반박을 해요. 주를 위해서 죽으라는 것은 있어요. 주님을 이용해서 밥 먹고 살라는 대목은 성경구절에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내가 한 거예요.
예수 잘 이용하게 되면 우리가 살고자 하는 대로 잘 하면 밥 먹고 살 수 있다, 이런 성경구절은 없다고 제가 이야기를 했거든요. 모든 성경이 다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아까 읽었던 마태복음 7장 22절에 보면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사하고, 쉽게 말하면 목사 짓도 하고 다 했다 이 말이지요. 하지만 주님은 너를 모른다고 한 거예요. 지금 주여, 주여, 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권능 행하고 귀신 쫓아냈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굉장히 황당한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을 것이고 우리는 그 말씀에 따라서 현재 사람과 사람이 사용하는 그 단어를 사용해서 ‘주여, 이런 뜻이 맞지요? 그런 뜻이라면 제가 이렇게 행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행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고 설교를 했는데 정작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는 주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난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라고 되어버리면 주를 위해서 한 것이 다 뭐가 되느냐 그 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에, 주께서 우리에게 알아듣는 말씀을 해놓고 나중에 결과적으로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라고 한다면 도중에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왜 하신 거예요?
그냥 룰루랄라, 하는 식으로 우리가 아예 못 알아듣는 말씀을 했다면 모를까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용하시기에 우리는 ‘맞다, 이거다.’라고 했는데 나는 너희 모른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의 말씀을 하느냐는 겁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열두 제자가 3년 동안 자기들 딴에 예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간들도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했고 그 고백을 듣고 주님께서도 그 베드로의 믿음에 대해서 인정을 한 거예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분명히 언급을 했다 이 말이죠.
그 소리를 들은 베드로가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겠습니까? 그렇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주께서 인정해준다, 라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주님의 수제자로서 했던 모든 것이 뭉쳐져서 결국 전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다는 결론으로 나와 버린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본인 입으로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주님을 부인해 버리고 주님을 놔둔 채 도망치고 말았지요. 이런 문제를 그냥 방치하면서 ‘목사님, 주의 말씀이 뭡니까? 제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주의 종 하겠습니다.’ 이런다고 구원이 되느냐 그 말이지요. 구원이 안 되지요.
제가 지금 설교하는 취지가 뭐냐, 우리가 같으면 이렇게 하지요. ‘에스겔아, 이리 오너라. 네 친구들과 이웃들과 일가친척들이 사용하는 용어 있지? 그 용어로 그대로 내가 이야기할 테니까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그대로 해라.’ 우리 같으면 에스겔 곱게 불러다가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고 에스겔이 종잡을 수 없는, 이 세상의 이미지가 아니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거론하면서 그 속에서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이 나오는 쪽을 쳐다보게 되면 거기에는 네 생물이 나와요. 네 생물 나오고 머리 위 궁창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이 사람의 형상 같고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는 이것이 이 세상에서 에스겔이 구경했던 어떤 물체도 이런 물체는 없었습니다.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에스겔은 감 잡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회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단어(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를 사용하더라도 하나님이 묘사하고 알려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내용이 거기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에스겔은 감 잡아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그 단어 하나하나가 흔히 쓰는 시장바닥의 일상용어들, 그 사회의 사람들이 쓰는 용어를 쓴다 할지라도 그 단어에 담긴 내용은 기존의 우리 인식으로는 풀어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중요한 말씀이 나오지요. ‘주님, 왜 우리에게 비유로만 이야기합니까?’ 예수님 말씀은 간단했습니다. ‘알아듣는 자가 실력으로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하나님께 선택받아서 알아듣는 복을 받아야 알아듣게 되어 있는, 알아듣게 하는 능력까지 같이 받아야 알아듣는 내용으로 내가 이 땅에 말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저쪽에서는 그런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따라 다니고 듣고 배워도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말을 한다.’ 그렇게 했습니다.
이사야 6장의 말씀이 거기에 거론되어 있지요.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구원 안 되게 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 뒤쪽의 이야기를 우리가 추적해 봅시다. 추적해 보면 뭐가 나오느냐, 오늘 본문의 불의 형상이 나옵니다. 사람 목소리기 때문에 사람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사람은 어디에 둘러싸여 있느냐, 무서운 불에 의해서 불을 발산하는 형상의 사람으로서 음성을 지금 에스겔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단순히 ‘내가 들은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 정도가 아니고 ‘내가 들은 것은 불 붙은 사람의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은 좀 더 나아가면 내가 지금 받아서 너희에게 전하는 모든 단어와 문장 속에는 불이 붙은 채로 이 땅에 등장해서 사람과 대화에 나서는, 불로서 사람과 대화에 나서는 기능을 발휘하시는 하나님의 기능과 작업이 그 말씀 하나 하나 속에 담겨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좀 더 나아가면 ‘만약에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너는 이 심판의 불에 싸질러지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불에 태워질 것이다, 라는 조로 주어진 말씀을 너희는 나로부터 듣고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말씀을 할 때 그 말씀 안에 불을 담아놓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지요. 이 말씀 안 들으면 완전히 불바다 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에 나온 이 모양새가 요한계시록에는 어떻게 나왔느냐, ‘너희들이 메시아를 어린양 되게 만들었던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식으로 너희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대해야 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사람의 형상이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여러 군데 보면 사람의 형상이 아니고 어린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 또는 불로 된 바다를 택한 백성이 건너가면서 그들이 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 이 대목이 요한계시록 15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2절에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데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에 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5장 7절에 보면 네 생물중 하나, 천사지요, 네 생물중 하나가 일곱 천사에게 어떤 지시를 해요. “네 생물중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준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15장에 나오는 네 생물이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에스겔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의 보좌가 있는데 그 보좌가 사람 쪽으로 향할 때는 네 천사의 모양새, 네 생물의 모양새로 세상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물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일사불란하게 바퀴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고 그 가운데서 사람 손이 나와서 택한 백성을 추수하고 건져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이것을 농기계 콤바인 같다고 했지요. 죽 밭을 갈면서 건질 자를 손 내밀어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이 세상에서는 네 생물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거예요. 그 네 생물 자체가 사람의 형상이고 오늘 본문에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다, 사람의 형상을 하신 분이 있다 이 말이지요.
지금까지 한 긴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룰 때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말씀으로 먼저 선지자에게 전달해서 먼저 통보를 해줘요. 마지막 종말에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를 통해서 나팔을 불게 해서 선지자 입에서 나오는 그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먼저 깔아놓고 그 말씀을 못 믿고 안 듣는 사람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준비된 저주의 징벌을 내리는 식으로 하는데 그 저주의 징벌담당자가 누구냐, 네 생물이고 그 네 생물에서 파견된 천사가 일곱 천사인데 그 일곱 천사가 뭘 하느냐, 저주의 일곱 대접을 붓는다는 말입니다.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굉장히 복잡하지요! 복잡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왜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하느냐하면, 모든 인간을 다 지옥 보내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는 지옥에서 면제를 해 줘야 되는 거예요. 제 말을 유념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천국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간다는 말을 제가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은 지옥 가는데 그 중에 택한 사람만 천국에 간다는 식으로 제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마땅히 지옥 가는데 구원받았다 하는 이것은 아주 특별한 조치다 그 말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갔을 때 모든 인간은 죽은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할 때에 모든 인간은 이미 저주받아 마땅함이 결정된 상태에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안 나타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하나님, 어떤 사람은 구원 받을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 있지요. 구원받는 자리에 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할 수 있고 뭔가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어떤 여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나니까 아담이라고 생겨먹은 인간은 전부 다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아버지에게 저주받은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오직 저주밖에 없는 겁니다. 저주밖에 없는 인간,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이 밝혀진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가 눈에 안 들어오고 십자가를 치워버리고 십자가를 던져 버리고 하나님하고 상대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자기가 저주받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 근거가 없으니까, 저주 안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이여,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너는 그럴 자격도 없어. 너는 저주 받아야 되거든.’ ‘하나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는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저주해버리면 모순되지 않습니까?’ 이런 소리 하는 거예요.
우리가 십자가를 경과하지 않고 십자가를 빼버리고 바로 기독교라든지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칩시다. 십자가 없이. 십자가 없이 교회를 생각하고 기독교를 생각한다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뭐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래서 ‘이 힘든 인생 살면서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죄 지어서 천국에 못가니까 죄 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 보내셔서 십자가지고 부활하게 하셔서 하나님은 교회 만들고 기독교 만들어서 예수 믿는 사람만 구원받게 하는구나.’라는 지식을 우리가 수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내가 나열한 이 지식 가운데서 어떤 대목도 ‘나는 당연히 저주받아야 돼.’라는 내용이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거쳐서 나아가게 되면 이 세상에 교회라는 것과 기독교라는 것이 누구 약 올리는 것밖에 안돼요. 왜냐, 그것은 구원되는데 아무 보탬도 안 되고 소용도 없는 짓이거든요. 교회 있음이 우리가 저주받아야 합당하다는 것을 알려 줍니까? 아니잖아요. 오히려 교회는 낙관적이고 긍정적이고 희망을 주잖아요. ‘여러분, 교회 오시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주지 교회가 ‘너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어.’라는 소리를 하려고 기독교가 생기고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니라 그 말이지요. 그런데 막상 이 에스겔 같은 입장에서는, 에스겔이 받았던 그 메시지는 긍정적이라든지 뭘 희망하는 것이 없어요.
그런 것은 일체 없고 네 천사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등장한 이 모든 말씀은 그 네 천사에게 모두 일임되어 있다는 것, ‘하나님이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는 그 협상의 여지가 완전히 차단되고 누가 구원될지 안 될지를 우리한테 물어보거나 우리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부리나케 움직이는 네 생물의 전차, 혹은 움직이는 그 마차 같은 것, 하늘나라 불의 마차, 거기에서 어떤 작용이 되어 가지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성과 때문에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는데 새롭게 발생되는 식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완전히 구원이 누구한테 일임되어 있느냐하면, 완전히 네 생물 안에 계시는 그분 쪽에 일임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네 생물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의 형상 속에서, 어떻게 이 불속에서 사람이 되고 영생의 생명이 나오느냐, 구원이 나오느냐, 이것이 굉장히 궁금한 거예요. 분명히 무서운 하나님, 에스겔 1장 27절에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난다고 되어 있다고요. 차이점이 뭐냐, 허리 위에는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이 뚜렷하게 등장하고 아래는 분명치 않다는 것뿐이죠. 사람 형상이라는 것은 허리 위쪽을 봐서 알 수 있잖아요. 분명히 사람은 사람인데 무서운 불로써 휘감겨 있는 분이 현재 이 인간세상을 향하여 지금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완전히 불바다 되는 거지요. 불바다 되는데 어떻게 불바다 속에서 구원이 되고 불바다 속에서 무슨 사랑이 나오고 불바다 속에서 무슨 영생이 나오느냐는 말이지요. 완전히 저주의, 저주의, 저주의 바다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하는 겁니다. 이 어려운 것을 하기 위해서 먼저 쉬운 것을 언급할게요. 하나님의 사랑, 영생,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전쟁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것이 힌트입니다. 전쟁. 전쟁. 무슨 전쟁인가, 하나님은 사람하고 전쟁을 합니다. 사람 배후의 마귀하고 전쟁을 하는데 지금 에스겔이 본 것이 성전이거든요.
에스겔이 계시를 받는 장소가 갈대아 땅 그발강가인데 이 계시가 원래 무엇을 겨냥하느냐 하면 저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 성전과 결부해서 받은 계시에요. 성전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축복이 있다, 구원이 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남의 땅에 가서 성전을 이야기할 때는 성전에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저주가 있고 심판이 있는 성전임을 왜 미처 몰랐느냐, 하나님의 성전 있는 곳이 곧 지옥이라는 사실, 지옥이 성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왜 너희들은 몰랐느냐, 그것을 일깨워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할 때 인간들은 그 말씀을 지키는 줄로 알았습니다. 아까 제가 언급한 마태복음 7장, ‘주여, 주여, 제가 주의 말씀대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 쫓아내고 설교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너희 누군지 모른다.’ 설마 주신 이 말씀 안에 ‘너 누구야?’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서 우리한테 주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이 예상치도 못한 거예요. ‘나는 너 모르거든?’ 하는 내용으로 우리한테 편지를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그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받을 때 내 바깥에서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심겨진 내 안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 전쟁은 구약의 에스겔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에스겔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전쟁하는 그 모든 전쟁의 내용이 신약성경에 이미 구원받은 우리 안에서 되풀이되어 이루어지고 있음도 우리가 수용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누구를 치려고, 자기 백성을 치기 위해서 에스겔 선지자를 동원해서 그 예언을 한 겁니다. 이렇습니다. ‘하나님인 내가 바벨론을 가지고 너희들을 치겠다, 왜, 너희들은 나의 적이기에.’ 이것은 전쟁이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 전쟁의 대상이 된 원수 된 자는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이여, 저희들을 이렇게 벌주심이 웬 일입니까? 이것은 예상 못한 것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낯선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하더라는 말이지요.
그 가운데서 그 하나님이 낯선 하나님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스겔을 보낸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예수님 역할을 하는데 바로 하나님, 하나님, 이라고 부르짖는 그 사람들에게 에스겔이 치이도록 하는 거예요. 한 평생 다가도록 에스겔의 모든 삶 속에서 에스겔은 비난받고 모독 받고 모욕당하고 핍박받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받는 수난을 앞당겨서 받는 그 에스겔의 모양새가 그 현장에 보이고 있습니다. 에스겔 속에 움직이는 하나님의성전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던 겁니다. 네 생물이 그 안에 있었고 천사들이 있었고 활동한 겁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붙들고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포로 되어 바벨론에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그러면서 그 바벨론과 예루살렘 양대 사건을 다 같이, 포로 잡힌 자를 포로 잡게 하는 사건,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는 사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성전답게 하기 위한, 필연적으로 없애기 위한 조치인 거예요. 말씀을 마치면서 하는 말은 뭐냐, 저주가 비로소 나타나서 가짜를 싹쓸이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구원이요 그것이 바로 생명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지요. 그렇다면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과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선물로 받아야 비로소 내 안에 영생과 구원과 사랑이 여기서 싹 튼다는 것,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무서운 말씀으로 줬는데 신약성경에서는 바로 십자가로서 우리 속에 집어넣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날마다 죽는 거예요. 날마다 죽어야 되는 거예요. 이 죽는 작업이 바로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그 멸망의 작업이 우리 속에 되풀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일곱 천사가 이 세상을 저주하고 심판하는 것,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는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 모든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는 바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선물로 주신 우리의 사랑과 거저주신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생명과 구원, 주님이 주신 것 속에 이런 것이 들어있네요, 라고 그것을 감사하는 사람, 이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온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에게 그 은혜가 주어진 거예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갑니까, 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주어진 것을 찾아가며 사는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제가 오늘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성도의 삶은 이겁니다, 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도, 애매하지도 않고 분명하지요, 그런데도 또 돌아서면 물어요.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주께서 선물로 주신 것을 항상 돌아보면서 감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제가 두 차례에 걸쳐서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서면 또 질문해요.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듣는 제 뉘앙스가 뭐냐, ‘지금 가정에 우환 있고 사업 안 되고 교회는 어려운데 내가 어떻게 신앙생활 하면 가정도 화목하고 교회도 부흥되고 사업도 잘되겠습니까? 신앙생활 내가 잘 못해서 애도 아프고 사업도 안 되는데 어떻게 신앙생활 잘하게 되면 다시 원상회복되겠습니까?’라는 조로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하면 됩니까? 교회도 나오고 십일조도 하고 다 했는데 일이 이렇고 꼬이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는 식으로 물어요. 주께서 주신 것이 없으면 그 물음도 다 소용 없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받았는데 우리는 내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자증내고 달려듭니다. 이미 받은 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랍고 소중한 것인지는 깨닫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 달려드는 이 더러운 심보 날마다 죽여주시고 예수님의 은혜로, 자비의 덩어리로, 사랑 덩어리로 다시 태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