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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2. 7. 27) 1강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 강의(2012. 7. 27) 1강

이름 : 서경수(IP:14.44.106.224)

광주 강의(2012. 7. 27) 32-1

에스겔 33장을 봅시다. 1절 이하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숫군을 삼은 그 사람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3장의 주된 내용이 뭐냐 하면, 파숫군을 하나 세우는데, 에스겔이 파숫군 역할을 합니다. 파숫군을 왜 세우느냐? 파숫군은 경고의 사이렌을 울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이렌 소리를 울리기 위해 파숫군을 보낸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에스겔을 통해서 경고 사이렌을 들어야 하는데, 사람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나에게 누군가 경고를 하는구나 생각하겠는데, 모든 일이 평탄하고 조용한 가운데 있는데 경고한다고 하면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협박으로 들리겠지요.

그래서 6절에 보면,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경고를 보낼 때 바로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고 1번 하나님과 에스겔 관계를 먼저 정립합니다. 정립해 놓고 그것을 백성들이 에스겔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게 하는 식으로 하나님이 경고를 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여기에 페스트 전염병이 퍼집니다.” 라고 경고를 한다고 합시다. “이렇게 깨끗하고 정상적은 생활을 하는 곳에서 무슨 페스트가 퍼진단 말이야? 거짓말 하지 마!” 하고 반발했는데, 다음 날 보니까 그렇게 경고한 사람의 얼굴을 보니까 시꺼멓게 변해 있고, 피를 통하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의 말이 맞구나! 이제 페스트가 퍼지는구나.”라고 아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1차적으로 에스겔과 관계해서 하나님과 에스겔 관계를 통해서, 그 다음에 백성들이 에스겔을 통해서, 이런 두 단계를 거쳐 하나님의 경고를 보내는 겁니다. 그게 바로 파숫군 역할입니다. 이 긴 이야기를 짧게 해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할 때는 심판을 이야기할 당사자에게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저주하기 이전에 저주를 전파할 예수님에게 먼저 저주가 임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제가 언급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재판하고 있지요.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재판받고 있는 그런 예수를 믿으라.’ 그런 예수를 누가 믿습니까? 돈 봉투 갔다 줘도 믿을지 말지 하는 판인데, 사람들에게 처벌받는 그런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메시아, 기대하지 않았던 메시아를 보내셨어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메시아를 보냄으로 말미암아 이 경고가 장난이 아님을 보여주신 겁니다.

7절에 보면,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경고하는 사람은 좀 봐주면 좋겠는데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수월하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면 좋겠는데 쉽지 않아요.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가는데 그 현장에서는 난감한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매를 맞기도 하고, 굶기도 하고,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강의 위험을 당함이다.

이렇게 되니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바울에게 땡볕에 일을 시켜놓고 냉수 한 잔도 안 주는 식으로 보이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 하실 수 있느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관된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싶어도 그의 행색이나 삶을 보니까 정나미가 떨어져서 믿을 마음이 안 생깁니다. ‘당신이 전하는 복음 믿다가 나도 당신처럼 되면 어떻게 하나?’ 인생 망치고 집안도 파탄 납니다. “여러분, 제가 전하는 복음 믿으면 저처럼 행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좋겠는데, 바울처럼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왜 이런가 하면, 경고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판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온갖 심판을 뒤집어쓰고 등장할 때 이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파숫군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자신을 ‘파숫군’이라고 하면서 ‘파숫군’잡지를 전하는데, 그것은 주님이 보내는 파숫군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8-9절을 봅시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하나님이 일하실 때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일하시는가 하면, 비로소 이스라엘은 에스겔 앞에서 제대로 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선포자, 또는 경고자, 파숫군이 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죄 지을 수가 없어요. 이들이 등장해야 제대로 죄를 지을 수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대로 한 번 죄를 지어 보라고 우리가 원치 않는 다른 메시아 상을 갖고 있는 에스겔을 내세웁니다. 평소에 점잖고, 인간성 좋던 사람이 에스겔의 이러한 선포 앞에서 속이 뒤집어 지지요. “더러워, 저리 가!” 할 때, 그동안 그들이 제대로 본색을 드러내지 못한 죄악 된 본성을 에스겔을 파견해서 제대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겁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리가 죄 짓는 것도 하나님이 특별한 기회를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냥 좋게 지내면 죄가 안 나옵니다. 김 집사님이나 여러분들이 친척들에게 복음을 안 전하면 그들이 제대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오랜만에 찾아온 친척이 “해인이는 점점 예뻐지네. 멀리서 대학교 다니면서 힘들 텐데 내가 등록금도 한 번 못 내주고 미안했는데 적지만 용돈이나 해라.”고 하면서 봉투를 줬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금 제대로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해인이가 “아저씨 감사해요. 그런데 아저씨도 복음을 믿어야 해요.”라고 했을 때, 그 친척은 준 봉투를 빼앗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 사람이 제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혜택을 해인이가 준 것입니다.

그런데 해인이는 그런 역할을 하기 싫어요. 그러면 하기 싫다는 그 죄 값을 성도가 담당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돼요.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라도 살려고 할 생각은 하지 말라.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목숨이란 살기 위해 간직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향해 던지라고 있는 목숨입니다.

화투를 칠 때 광은 내놓지 않고 시시한 것을 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도의 목숨은 시시하다고 보기 때문에 주의 일에 가볍게 내놓습니다. 성도 또한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 가볍게 자기를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 목숨이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내놓지를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에스겔을 보내서 확인시킵니다. 에스겔의 운명에 동참하면 이스라엘도 다른 민족 앞에서 에스겔처럼 무가치한 존재로 복음을 위해 가볍게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에스겔을 보니까 처참하네. 나는 에스겔을 따르지 말아야지.”하고 다른 길로 가면 그 사람은 에스겔처럼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저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은 자기 목숨을 하나님 말씀을 위해서 내놓아야 될 목숨입니다. 33장 15절을 봅시다.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구약에 나오는 율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의 전당물을 해가 질 때까지 갖고 있지 말라.’ 전에 있던 모세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심판을 내리시는데, 그걸 먼저 에스겔에게 말함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의 전당물을 해가 질 때까지 갖고 있지 말라는 이 말씀이 에스겔에게 이전되면 에스겔에게는 뭐가 되는가 하면, “너는 주님의 심판을 그들에게 증거해라.”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좀 어려운데, 개념이 추상적으로 바꾸어집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는 우상이 있어요. 우상이 점점 구약 끝날 쯤에는 뭐로 바뀌는가 하면 ‘거짓 것’으로 바뀌어요. 그리고 더 진전이 되면 ‘거짓 것’ 속에 ‘거짓 인간’이 포함됩니다. 처음에는 ‘우상’입니다. 우상은 돌로 형상을 만들고 섬기는 것이 우상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는 ‘거짓 것’이 전부 우상이고, 잘못 된 것이 전부 우상이 됩니다.

그러면 ‘우상’이 ‘거짓 것’으로 확산되면서 개입하는 게 뭔가 하면 모세 율법인데, 우상은 특정한 사물, 물체만 우상이 아니고 말씀에 위반되는 모든 거짓 것들은 다 우상으로 취급당하고, 더 나아가면 거짓 것 속에 인간도 포함이 돼요. 그러면 인간은 우상을 불에 태울 때 “아이고, 아프겠다. 얼마나 뜨거울까?” 이런 생각은 안 하지요. 그런데 인간이 거짓 것에 포함이 되면 인간을 불로 태울 때 “아이고, 저것은 아깝다.”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못하지요.

그런 생각을 안 하려면 우리가 뭘 알아야 하는가 하면, 우상이 거짓 것으로 전이 될 때 여기에 율법이 개입되고, 율법의 개념조차도 추상화되는 개념을 품고 있어야 나중에 하나님이 거짓 된 인간들을 칠 때 “아이고, 그래도 사람은 인격이 있는데 하나님이 너무 모질게 한다.”라는 소리를 하면 안 되지요.

예를 들어 제가 만약 에스겔이라면, “여러분,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심판하십니다.”라고 선포했는데, 보니까 자기 동창생이 있어요. 그 친구는 교회는 안 다녀도 자기 부모에게 효도를 했단 말이지요. “그래, 효도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 심판은 율법에 기준해서 진행되는데 자기 쪽에서 친구한테 갈 때는 율법에다 뭘 섞었습니까? 사적인 동정심이죠. 이런 것이 들어오면 그 책임을 누구한테 묻는다고요? 바로 나에게 묻겠다는 것이 본문에 등장하는 파숫군의 입장입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율법에 따르면 ‘우상을 섬기면 벌 받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부처상이나 기타 어떤 형상을 세워놓고 섬기는 것을 우상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점점 구약의 역사가 진척되면서 우상이 그런 물체만 우상이 아니고 거짓 것을 생각하는 것이 전부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상에서 거짓 것으로 추상화되는 개념으로 넘어 갈 때에 율법이란 것이 우상을 섬길 때는 내가 우상을 섬기지요. 우상이 저기 있고 내가 여기 있다면 나는 우상이 아니지만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지요. 그런데 율법이 추상화되면 우상을 섬기는 것이 우상은 아니지만 같이 거짓되다는 개념에서 범위가 하나로 묶어져서 우상에게 내리는 징벌의 범위가 확대되어 우상 섬기는 나에게도 우상이 당하는 꼴을 당한다는 것으로 확대됩니다.

거짓 것에서 그 다음에 집단적으로 우상을 섬긴 사람도 우상처럼 망한다는 것이 성립되려면 무엇이 병행해서 개념이 확대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개념도 덩달아 추상화되어야 이쪽을 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추상화 과정에 누가 개입되는가 하면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르지요. 인자는 하나의 몸이에요.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에스겔의 지시와 명령을 받지 아니하면 단연코 우상이 된다. 왜? 그것은 자기 자신을 거짓 것으로 안 보려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데 에스겔은 안 그래요. 에스겔이 하나님께 어떤 지시를 받는가 하면 “만약 네가 ‘주의 말씀대로 이 백성이 망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그 죄 값을 너에게 찾겠다.”고 해서, 에스겔은 자기 몸을 자기가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본인이 살기 위해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성도입니다. 활용도가 있어요. 주께서 쓰시는 용도가 있어요. 착해서 쓰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있어서 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적으로 나를 귀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바로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우상 그 자체입니다.’ 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제 2의 에스겔입니다.

내가 늘 주님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아침에 눈을 떠서 “오늘은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뭔가 자신에 대해서 집중하게 되면 그 순간은 자신이 우상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착한 날 위해 하나님은 뭘 해 주시렵니까?” 그렇게 나오겠지요. 이렇게 되면 인자의 기능(파숫군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아이고, 계속 늙어가고 있네. 이제 다 산 것 같아. 그런데 이런 인간이 왜 아직도 살아야 하지?” 이렇게 될 때는 우상 개념에서 미끄러져서,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보는 안목으로 나를 지켜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이 부분에 대해 상세하게 다룰 계획입니다.

우상의 모든 교리는 로고스 개념입니다. 로고스가 뭔가? 아무도 몰라요. 요즘 SBS에서 [유령]이란 드라마를 해요. 유령이 뭐냐 하면, 언어의 문자에서 심판이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만약에 언어, 문자에서 심판이 나온다고 하면 주문 외우는 겁니다. ‘이런 특정 언어가 있으면 이것은 조심해야 된다.’ 왜? ‘이것은 반복해서 외우면 복 받는다.’ 이것이 옛날 이스라엘 초기에 하나님을 우상 안 되게 섬기는 방법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복을 받게 돼요.

반복적으로 절기를 지키고, 반복적으로 손을 들고 기도하고, 어떤 형식과 시스템을 갖추면 자동적으로 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우상을 섬기던 것이 추상화되기 이전에 형식적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아벨이 양을 잡을 때 기름을 분리해서 잡았잖아요. 그 당시는 뭐냐 하면, ‘아벨이 드린 제사를 그대로 드리면 우리도 아벨과 같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던 시대입니다.

율법의 차원에서는 맞습니다. 율법이 얼마나 기계적입니까? 어떻게 하라고 다 되어 있지요. ‘남의 것을 취했으면 20%를 더 추가해서 주라.’고 되어 있고, 양을 잡을 때, 소를 잡을 때의 규칙이 다 있어요. 이것은 인간 자신은 추상화해서 볼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추상화되면, 모든 언어는 은유고 비유입니다. 예를 들어 ‘40일 후에 심판 받는다.’고 했다면, 이 문자 자체는 심판이 아닙니다. 성경에 ‘불로 태우리라.’는 말이 있는데, 성경책에서 불이 나옵니까?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실제로 언어로 하여금 작용하도록 하는 그 권력은 유령처럼 붙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니고데모가 뭐라고 했지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유령 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니고데모가 물을 때는 육으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가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고, 니고데모의 이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나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어를 해독해서, 자신은 그 말씀을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언어 배후에는 유령이 있다니까요. 자유롭게 떠도는 언어를 움직이는 권력이 있어요. 언어에 권력이 있다는 것을 라캉이 밝혀낸 거예요. 자꾸 미끄러진다고 했어요. 의미라는 것은 잠시 머물다가 참기름이 발려 있는지 미끄러져요.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찬송가 405장을 부르면서 은혜를 받았어요. 그런데 다음 날 부르면 그런 은혜가 없습니다. 계속 미끄러지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 몸이 우상화 된다는 생각은 못하고 자기는 정상으로 여기고, 그 때 나에게 은혜를 준 요소들을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옛날 은혜 받을 때 바위에서 기도할 때 은혜가 임했지.” 하면서 그 때의 상황을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의 몸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유령이 있다니까요. 드라마 [유령]의 이야기는, 컴퓨터에 백신 프로그램을 깔아 놓았는데, 사실은 백신이 아닌 해킹 프로그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이러스 이런 것은 유령이잖아요. 잡을 수가 없지요. 앞에 나온 글자 말고 글씨가 갑자기 지워지고 이상한 형태로 깨어지고 하잖아요. 이것이 현대판 유령 아닙니까.

자판을 치면 ㄱ(기억)나오고, ㄴ(니은) 나오잖아요. 그런데 바이러스에 걸리면 기억, 니은이 없어진단 말이지요. 있음이 없음으로 바뀝니다. 이게 유령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의 언어가 은유와 비유입니다. 그래서 원어를 아무리 연구해도 그 유령은 나타나지 않아요.

제가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는 미군부대에서 급식을 줬어요. 점심 도시락을 못 싸오는 학생들에게 옥수수 빵을 줬어요. 이 빵을 제법 크게 잘라서 줬어요. 요즘은 빵을 그렇게 덩어리로 자르지 않고 얇게 자르는데, 이 자르는 것이 ‘마디’입니다. 고대 언어는 개념들이 한 단어로 여러 군데 동시에 사용했기 때문에 빵을 큰 덩어리로 자른 것과 같아요.

이번 수련회에서 강의할 것인데, 기독교는 이방인 종교입니다. 원래 기독교의 뿌리가 유대교잖아요. 유대교의 언어(큰 덩어리로 잘려져 있는 언어)를 이방 언어로 바꾸니까 적당한 언어가 없어요. 그런데 적당한 언어를 찾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 믿으면 되지 언어를 왜 찾습니까? 삼위일체가 개인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즉 통합된 고백을 함으로써 하나의 로마 제국을 형성하자는 거예요.

콘스탄티누스가 그것 때문에 칙령을 선포하고 325년 니케아회의를 통해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왜? 교회가 눈에 보이고 구체화 되어야 하니까. 구체화 되려면 하나의 언어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같은 고백을 하게 되면 같은 기독교 신자로, 지상에서도 같은 나라 백성이고 천국도 같이 가겠다는 아이디어가 발동한 겁니다.

이들은 무엇을 놓친 겁니까? 언어 속에 유령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요. 이 유령은 언어(문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성령’이라고 하지요. 금속에는 자유전자가 있어서 빨리 전기가 통합니다. 자유전자란 하나의 원소에 매이지 않고 떠돌아다녀요. 어떤 언어도 사람은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뭔가? 그 배후에 유령이 있어서 그래요. 다른 말로 하면 ‘권력’이 있어요.

모든 언어의 배후에는 권력이 있습니다. “오늘 날씨 참 덥지요?”라고 했다면, “예, 정말 덥습니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서로 마음이 통하는 좋은 사이라는 뜻이고, “덥기는 뭘 더워?” 이러면 이 사람은 미운 감정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사랑하는 힘이 있으면 유령이 전면에 부각되고 언어는 뒤로 물러나요. 만약 언어가 많아버리면 그 사랑의 유령이 빛을 잃어요. 좋아하는 사이에 말이 너무 심하면 짜증납니다.

그 말 많던 욥이 재를 뒤집어쓰고 아무소리 못하지요. 거기에서 삼위일체나 기타 교리가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것을 거론한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사랑 자리에 다른 권력이 대체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 권력이 뭐냐? 그 동안 육적으로 살아왔던 국가 권력, 그것이 바로 숨어 있는 짐승의 권력, 세상 권세, 어둠의 권세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없어요. 처음부터 교회는 국가 교회였습니다. 집단 구원을 위해서. 국가 교회에서 나왔기 때문에 떨어져 나온 그 교회들이 무슨 물을 먹었는가 하면 ‘나도 언젠가는 전 세계를 복음화 시키고 말겠다.’는 로마 제국의 황제 같은 심보로 선교와 전도에 나서는 겁니다. 이것이 어두움의 권세에요.

그러니 예배당을 하나 지어도 이것은 ‘이 용봉동을 복음화 시키고 말거야.’라는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같은 사고방식이 필요해요. 교회를 하나 세워서 신앙고백과 교리, 우리교회의 특징 이런 것을 문자화 시키는 거예요. 이런 작태들이 바로 초창기 율법으로 나라를 만들었던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한 오해를 그대로 다 보여주는 겁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시키는 질서 체제와 형식은 다 지켜요. 문자로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나 이사야에 보면 ‘마음은 나에게서 멀다’고 하지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을 내가 언제 원했나?”고 하시지요. 그러면 그들은 뭐라고 하겠어요? “율법에 나와 있잖아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 율법이 유령인 줄 몰랐어?” 라고 하십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갈 때까지 멈추면 안 돼요. 그리스도에게 도착할 때까지 계속 새롭게 변신하면서 그 내용이 점점 지상 배후에 있는 권력과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겁니다. 처음 모세가 고난을 받아도 에스겔처럼 고난을 받지는 않았어요.

에스겔 33장에 보면, 에스겔이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동안 에스겔이 일체 말을 못하다가 이제 말을 하는 거예요.

에스겔은 자기 나름대로의 개성이나 자존심을 챙기면 그 책임을 누구한테 묻겠다? 하나님은 모든 책임을 에스겔 너에게 묻겠다고 하지요. 그래서 에스겔이 이해하는 율법이란 개념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지키는 개념이 아니고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예 나를 말씀화 시키는 작업에 나섰다’는 사실을 에스겔이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주께서 율법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워서 우리가 뭘 해도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시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내가 성공하면 성공했다고 헤헤거리고, 실패하면 주께 따지면서 대들고, 평안하면 주님을 잊고 자기에게만 도취되어 문제고. 우리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어떤 분이 십자가마을 게시판을 통해 질문하기를, “목사님은 책도 쓰고 강의도 하는데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왜 의미 없는 일을 계속 하십니까?”라고 해서, 제가 답하기를 “이것이 의미 없다고 해서 다른 것을 하면 의미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해도 의미 없기 때문에 이것을 하는 겁니다.”라로 했어요.

다시 정리를 해봅시다. 옛날 모든 개념은 마디가 굵어서 정확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기계적으로, 문자적으로 흉내만 내면 지킨 것으로 오해할 만한 그런 말씀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마디가 크기 때문에 이 법대로 지키면서도 따로 내 사랑과 내 욕심을 챙길 수 있는 방도를 연구합니다.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암8:5).”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한 것은, 자기 딴에는 안식일은 지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자기 자신이 이미 주님에 의해서, 에스겔에 의해서 추상화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옛날 조상들이 틀렸던 식으로 율법이 그런 식으로 다루어진다고 오해한 거예요.

이미 주님께서 율법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배후에 있는, 언어 문자 뒤에 있는 은유, 문자를 은유로 만든다는 말은 실제 의미가 뭡니까? 문자가 다가 아니고 그보다 더 크고 깊은 의미가 바깥에 유령처럼 놓여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리고 그 놓여있는 의미는 문자를 지켜도 지킨 것이 아니고 결국 그 의미를 모르는 이상은 문자를 지켰다는 그 자체가 배후에 있는 의미에 의하면 안 지킨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지금 율법이 점점 더 확대되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동안 이스라엘을 끌고 왔습니다. 에스겔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마누라가 죽어도 울지 말아야 하고 온갖 것을 다 시키는데 모세에게는 그런 일을 안 시켰어요. 그러면 모세가 살기 편합니까, 에스겔이 살기 편합니까? 어느 쪽도 살기가 편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그 시대 환경과 교류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안과 밖의 구분이 없습니다. 안과 밖의 구분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편하게 산다고 할 때는 환경에 맞으면 행복을 느끼고, 안 맞으면 거북함을 느낍니다. 공리주의를 말한 벤담에 의하면, 행복은 즐거움에서 고통을 뺀 나머지가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간단하지요? 이것저것 빼고 남는 것이 있으면 행복한줄 알라는 거지요.

남는 것이 없는 마이너스 행복은 불행입니다.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즐거움에서 고통을 빼면 행복이기 때문에, 마음이 높아버리면 고통도 같이 높아져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돼요? 마음을 낮추면 됩니다. 마음을 팍 낮추면 모든 것이 행복하다는 겁니다.

이런 스토아학파의 윤리, 도덕이 성 프란시스까지 연결 됩니다. 이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밝혀낼 거예요. 이게 기독교가 아닙니다. 전부 철학입니다. 스토아학파는 로고스가 중심입니다. 로고스가 뭔가 하면, 우리를 둘러 싼 울타리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인간은 안과 밖이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로고스는 뭘 합니까? 계속 영향을 주고, 우리는 로고스에 보답하고.

로고스를 요즘 말로하면 ‘질서’입니다. 옛날에는 물질적인 자연 질서를 말하는데, 자연 질서에 정신 질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물질과 정신을 분리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자연 안에 정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서 속에 우리가 있다고 하면 이것이 로고스입니다. 살기 힘들고 변덕스러운 이 세상에서 로고스가 지켜준다고 하면 우리는 평안을 느낍니다. 그 로고스,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그 당시 로마제국에 사는 여러 종족들이 딴 것은 이해 안 되는데 무엇은 이해되겠어요? 우리를 지켜주는 마음의 질서. 그리고 자연의 모든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그 질서를 내가 그냥 수용하는 것이 되지요.

여기에는 회개도 필요 없어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도 필요 없지요? 다만 여기는 몰랐던 것을 추가적으로 지적으로 하나 더 보태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미처 몰랐던 로고스를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로고스를 희미하게 알았는데 이분이 바로 로고스입니다.’하고 예수님을 제시하게 되면 ‘아, 그 로고스가 이 로고스구나.’해서 수용만 하면 되잖아요. 이게 바로 고대 신학의 3파 중 하나인 동방신학입니다.

이 로고스를 번역하면 ‘말씀’이다, 또는 ‘계시’라고 하는데, 원래 로고스의 뜻은 ‘모으다, 편집하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하이데거에 의하면 ‘숨어있는 말씀이 바깥으로 현실화 된 말씀’으로 표현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지요. 그 말씀이 로고스, 그것을 그리스 초기 철학에서는 ‘이성’이라고 했지요.

말씀 자체가 질서고, 질서를 이성화 시키면 언어가 되고.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어떤 고백을 하게 되면 그 고백이 언어잖아요. 언어를 통해서 자동적으로 세상 질서와 융화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음’ 하는 소리는, 브라만인가 동양 신비주의에 보면 인간의 다섯 가지 모음 중에서 ‘음’하면 이것이 우주를 움직인답니다.

재수가 없고 일이 꼬인다는 것은 지금 우주와 자기 몸이 어긋나서 그런 거래요. 그럴 때는 ‘음’하면서 어긋난 것을 풀어야 합니다. 보통 교인들이 일이 잘 안 풀리면 교회 와서 ‘주여, 주여!’ 하고 외치지요. 그러면 주님이 모든 일을 제자리에 갖다 둔다는 거예요. 이게 로고스에요.

자기를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질서의 능력, 숨어있는 질서. 그것이 로고스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로고스로 풀면 다 풀립니다. 로고스를 액기스화 한 것이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이런 것.

그런데 에스겔은 뭐로 봅니까? 로고스가 아니고 에스겔 몸에 주님의 심판이 달라붙어 있어요. ‘심판을 저쪽에 이야기 안 하면 그 심판은 너에게 머물고, 이야기를 했는데 저쪽이 안 믿으면 너에게 달라붙은 심판이 그들에게 갈 것이다.’

피로 회복 약 선전할 때 보면, 시꺼먼 옷 입은 사람이 뒤에 붙어있지요. 에스겔은 지금 심판의 귀신이 붙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은 말합니다. “나에게 심판이 달라붙어 있다. 이것 믿으면 좋고, 안 믿으면 너희들이 심판 받는다.” 이것이 바로 인자 자체가 말씀화 되어가는 겁니다.

우상이 다른 것이 아니고 말씀화 되지 않는 내 몸이 곧 우상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10분 쉽니다.

(2012. 8. 21. 17:12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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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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