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강-미2장6-11(욕설과 예언)120819-이 근호 목사
04강-미2장6-11(욕설과 예언)120819-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1.16)
04강-미2장6-11(욕설과 예언)1208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2장 6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2페이지입니다.
미가 2:6-11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구약성경을 우리가 늘 대하면서 느끼는 점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도대체 현대 말로 고쳐서 쉽게 한 성경을 봐도 문제가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그 당시 선지자의 울분, 그건 선지자의 울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분통이겠죠. 선지자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스피커, 엠프로 사용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음성, 이것을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서는 예수님의 영이 미리 구약 선지자 속에 계셔서 오실 예수님, 나타나실 하나님의 진짜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일부 그들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예고편이죠. 예고편 보여주고 coming soon, 개봉박두 곧 나타나신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선지자를 이해 못하는 것이나 오늘날 예수님이 이 땅에 와도 이해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 못하니까 그 다음에 나온 공작이 뭐냐 하면 이해되는 예수를 새롭게 조작해 내는 겁니다.
그 공작이 뭐냐 교회라는 곳 이예요. 지난 수련회 때 교회사를 통해서 사도바울과 그리고 교회에서 유용한 교회가 부흥되는데 필요한 새롭게 다듬어 낸 교리와 사도바울의 진짜 구원과 어느 부분에서 이게 갈라지느냐 하는 것을 제가 설명을 해줬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시간까지는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적인 종교성을 이야기했고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 아홉째까지는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해서 제가 나누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누어 보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인간 속에 로고스, 인간의 이성이 있더라 말이죠. 인간은 이성이 있어서 인간이 ‘우리는 이렇게 똑똑합니다. 이 똑똑함으로 이 똑똑함을 넣어주신 분이 신이니까 신의 똑똑함과 우리 똑똑함이 서로 만나서 우리 좋은 관계를 유지합시다.’ 이게 바로 교회 2천 년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똑똑함이 우리 속에 있기에 우리는 똑똑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이 똑똑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것을 가지고 나올 테니까 주님 쪽에서도 똑똑하고 합리적으로 나오시면 우리 둘이 이야기가 통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똑똑함이 교인들만 똑똑한 게 아니에요. 교인 바깥에 있는 또 다른 철학자들도 더 똑똑한 사람이 많다 이 말이죠. 그런 사람들을 교회에서 포섭하는 방법은 그들 속이나 우리 속이나 공통된 게 있으니까 그 공통된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 생각하시면 다 ‘우리는 교회 와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문을 활짝 개방된 역할을 한 겁니다.
그런데 막상 미가에 보면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욕하는 걸로 들렸다. 교회에서 교인들 하나 아쉬운 판에 욕을 해서 되겠습니까? 삼성생명에서 또는 동방화재에서 회원들 모집하는데 알리안츠나 이런데서 펴놓고 이렇게 변액보험 발생하는데 ‘이 집안 구석 꼬라지 보니까 이건 안 되겠네.’ 이렇게 욕하는데 누가 회원 하겠습니까? 물건 하나 팔려하면 온갖 알랑방귀를 뀌어야 좋은데, ‘아휴, 훌륭하십니다. 이런 재주가 있었네요. 축복받은 가정입니다.’라고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줘야 되지, 거기다 욕을 하다니, 미쳤지 되겠어요?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욕을 해라, 그런데 그 욕이 나한테 합당하다고 여기면 그건 택한 백성이고 욕은 나한테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면 그건 지옥 갈 사람이다. 따라서 니가 할 일은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분류작업하면 되지, 니가 지옥 갈 사람을 천국 보낸다든지 그건 니 권한을 벗어나는, 오버한 업무에 해당 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동방박사가 주님 찾아왔을 때 이왕 몰약과 유향과 황금을 조금 가지고 오지 말고 많이 가져와서 아기 예수 만나고 난 뒤에 다른데 가서 나눠주면서 ‘다 오세요. 여기 아기 예수님입니다.’라고 선전하고 가면 자기들도 경배하고 다른 사람들도 경배하면 숫자가 풍성해지니까 뭔가 교회될 가능성이 안 있겠습니까? 그런데 동방박사는 그런 일을 할 생각도 없었고 또 하고자 싶어도 지금 주변에서 동방박사 죽이려고 서슬이 퍼런데 어디 갑니까? 후다닥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죠. 그럼 동방박사는 전도 하나도 못했으니까 천국 가서 영원토록 꿇어앉아서 손들고 ‘전도 몇 명 했어?’ ‘없습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손들고 있어?’ 이랬습니까?
노아는 어땠습니까? 노아는 옆집 201호도 전도 못했습니다. 저희 집 식구만 전도했어요. 그것도 얼마나 숫자가 적었으면 8명이겠습니까? 자기 며느리까지 다 합쳐서 8명이예요. 그 안에 들어온 것도 수상해요. 8명도 아무래도 수상해요. 함 가족은 나중에 또 분류될 사람 이예요.
‘병아리 감별 사‘라고 옛날에 30~40년 전에 영국에 취업하러 간사람 많아요. 병아리 감별 사, 암컷, 수컷 감별하면 된다고요. 구별하는 방법은 병아리 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욕설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욕설하는 사람은 ‘욕설 하시면 됩니다.’ 하면 제 말 들으면 ‘야, 그거 참, 목사님이 욕만 하면 된다고 하니 나도 한 욕 하는데 욕만 해서 하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본인부터가 남한테 욕을 먹을 때 ‘아이쿠, 뭐 훌륭하십니다. 예, 마땅합니다.’라는 마음 준비가 본인자체가 돼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욕하는 본인은 존경받으려 하고 자기는 욕해야 되고, 일방적인 그런 불공평한 게임이 어디 있어요? 공평하게 해야지. 차라리 욕 안하고 욕 안 먹겠다고 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소망이었습니다. 미가도 물론이고 전에 예레미야 할 때 예레미야가 했습니다. 자꾸 백성들이 욕한다 하니까 ‘하나님이여, 차라리 그런 소리 안 듣고 좋은 말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안 되는가, 니는 니가 하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살면서 겪어야 될 고초를 그들은 미리 앞당겨서 경험을 해야 되고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는 그걸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같이 고난에 동참해야 되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특히 이고니아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시체 팽개치고 갔는데 꾸물꾸물 안 죽고 일어나서 일했습니다. 차라리 그때 갔으면 편한데 주께서 그때 보내는 게 아니고 계속 억지로 살려서 기어이 사도행전 28장 다 쓰게 만들었다니까요. 그리고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옥중서신을 전부 다 골로새서를 쓰게 만들었어요. 지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좋으라고, 남은 백성 좋으라고 주께서 그렇게 활용하신 거예요. 우리가 어디에 활용될 지, 그건 우리 소관 아니죠. 주께서 필요한 사람 위해서 하는 겁니다.
자, 그럼 오늘 본문 하기 전에 몇 가지 어려운 것이 있는데 쉬운 것부터 하겠습니다. 이렇게 선지자가 욕을 하기 전에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는 선지자 편에 서면 안 돼요. 우리가 성급하게 주인공 노릇하지 말고 욕을 얻어 받는 편에 서야 이게 이해됩니다. 욕을 먹는 우리 안에 선지자가 있다. 그런데 오자마자 우리보고 돌아다니면서 욕하더라. 장로님이 어떻고 집사님이 어떻고, 욕하더라, 안 그래도 욕하는 사람 많아요. 욕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우리는 면역이 됐는데, 욕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들의 입장,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목회 관, 예수 구원관, 종말론, 그 사람들의 입장을 우리가 미리 다 알아야 돼요.
자, 교회를 한다. 교회를 하는데 우선 자본금 몇 명 해야 되지, 또 계약직을 해야 되니까, 계약직 때문에 욕 얻어먹는 사람이 있는데, 계약직도 몇 명 해야 되고 처음에는 앞앞에 얼마씩 돈 내서 피아노 기증도 해야 되고 앰프도 있어야 되고 한다 말이죠. 돈 내면 그 사람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교회 세운다고 참 고생 많았습니다.’라고 치하의 설교를 해야지, 돈 낸 사람을 욕을 하겠다면 어이하겠다는 말입니까? 지금 여기서 깨지자는 거예요? 갈라서자는 이야기예요?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목사가 봤을 때 성경이 이렇게 있으면 일단 성경은 생각 안 합니다. 모델이 되는 어떤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를 목표로 삼는 거예요. 그럼 그 교회가면 플랜카드가 위에서 아래로 휘장이 내려져 있어요. 뭐냐, ‘목적으로 이끄는 삶’ 이런 게 붙어있다 말이죠. 목적으로 이끄는 삶 옆에는 트럼펫 배우기, 영어 배우기, 노인 복지 교양과목이 줄줄이 있거든요. 담쟁이처럼 휘장을 해 놨다 이 말이죠. 교회 오너라. 골라잡아라 이 말이죠.
그런 사람 입장을 100%, 아니 325% 충분히 이해합시다. 충분히 이해하는 그들을 나쁘다고 하지 말고 어디서 복음 하나 듣고 나쁘다 하지 말고 일단 그 사람 편에 서야 돼요. ‘목사님, 왜 이렇게 목적으로 이끄는 삶, 그 다음에 전자 기타 배워주는 것, 공짜로 영어 노래방, ’이걸 왜 하셨습니까?‘ 묻고 그들의 진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진심을 받아들이기에 우리 어렵지 않습니다. 왜, 우리도 은근히 뭔가 복음 전하는 걸 핑계 삼아 결국은 복음 전하는 것은 수단에 불과하고 복음 전했는데 교회가 되더라. 뭔가 덩치 큰 교회되기, 이러한 노림수가 우리도 은근히 갖고 있다 이 말이죠. 방법이 다르다 뿐이지 교회 내의 안정과 생계가 유지되는 교회 하나 든든하게 잡는 것, 이거 자본주의에서 이거보다 더 큰 거 있습니까?
가게 하는 사람이 가게 안정되면 최고지, 딴 게 목적이 뭐가 있습니까? 인류평화 필요 없어요. 지 가게 하나 든든하고 손님 많이 오면 되는 겁니다. 목사도 마찬가지 아니냐 말이죠. 그럴 때 어떤 설교를 할 것이냐, 내가 그 마음이라 생각하고, 이젠 진퇴양란, 더 이상 절벽이라서 물러갈 때도 없을 때, 더 이상 목회 실패하면 어디 가도 목회 성공 못해, 죽기 살기고 이 교회 돼야 밥 먹고 사느냐, 마느냐, 이게 마지막d일 때. 죽기 살기로 하면 금메달 못 딴다 했죠? 그냥 죽기로 해야 딴다고 안 합니까? 레슬링 하는 사람이 그렇게 했잖아요.
마찬가지로 내 죽음과 바꿀 수 있는 건 뭘까, 내 속에 내 목숨보다 내가 원하는 게 뭐냐, 바로 그것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타인들에게 욕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 사람이 와서 도와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어요. 그것을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것을 인간하고 기계의 차이점은 설정을 해놓으면 설정한 그대로 가요. 우리 교회 컴퓨터는 안 그렇습니다만 다른 데는 대부분 그래요. 설정을 해놔도 만날 변해서 녹음 되고 안 되고 하는데, 기계라 하는 것은 설정의 조건을 맞춰 놓으면 사람이 손댈 때까지 계속 갑니다. 기계니까.
그런데 인간은 설정을 해놔도 소용이 없어요. 내일 되면 무슨 바람이 불지, 나라면 어떻게 다를 지, 처음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옛날에는 둘이 결혼하기로 하게 되면 한 80%이상 거의 했어요. 요새 젊은 20대는 결혼하기로 작정해 놓고 또 세 번, 네 번 작정을 합니다. 연애 10년 해놓고 헤어져요. 못 믿겠다 말이죠. 결혼 해놓고 혼인신고 안 해요. 아직도 못 믿겠다는 거예요. 6개월 살아보고 해놓고 그 다음에 또 못 믿어요. 하여튼 한번 설정해 놓는다고 인간은 계속 가는 게 아닙니다. 이게 뭐냐, 일치가 불가능하다.
오늘 본문의 내용의 주제가 뭐냐, 하나님과 인간의 마음은 일치되지 않는다. 일치되지 않을 바에는 욕설을 통해서 둘 사이가 끊어졌다는 것을 깨닫기만 해도 너희들은 땡 잡은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일치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치된다고 우기는 것은 이것은 더 문제를 더 심각하게 문제를 더 난감하게 만들어요.
나는 예수 믿습니다. 주님께서 ‘야, 너 지금 누구 사랑하지?’ ‘주님 사랑합니다.’ ‘누구 믿지?’ ‘예수님 십자가 피 믿습니다.’ ‘고래?’ ‘예, 그렇습니다.’ ‘그거 언제 설정이지?’ ‘8월 19일 날 설정된 겁니다.’ ‘그래, 낼 두고 보자. 낼 한번 볼 거야. 낼 오후 2시에 한번 볼 거야.’ 오늘 설정해도 낼 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나요. 그 사태 사건 속에서 우리 마음이 해리돼요. 다시 죽처럼 오늘의 모습이 모양새가 굳혀져 있는데 십자가 이런 거, 삼위일체 이런 거 믿는데 갑자기 내일 돼서 애가 아프다 하면 고만 정신이 혼미해 져서 지금 애가 아픈 게 제일 중요한 문제가 돼 버려요. 지금 정신이 혼쭐이 나서 십자가도 아무 생각이 안 나요. 다시 해리상태, 껄쭉한 죽처럼 죽죽 떨어져서 지금 다급한 일이 벌어져버렸어요. 어디 한가롭게 예수, 복음 생각할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이 몸이 어쩔 줄을 몰라요.
그것은 오늘의 내가 굳힌 내가 여기 있고, 내 바깥에 환경도 이렇게 단출하게 갖춰져 있는데 내일의 그 환경이 덮치고 밀려와 버리면 내가 단정하게 나는 ‘하나님,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주님에 대한 소망이고 이것이 주님에 대한 믿음이고 사랑이고 내 지식입니다.’라고 한 것이 넘쳐나는 홍수 물에 그것이 다 깨어집니다. 우왕좌왕,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내가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왜 이런 일에 정신이 혼미해서 신자인지 불신자인지도 생각이 안 나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또 다시 내가 보여줍니다.
신앙생활 30년 했고 노하우가 다 있고 이럴 때는 이런 구절 준비해서 은혜 받아야지 했는데 준비해 놨잖아요. 그거 생각 하나도 안 납니다. 뭐 어떻게 목사님, 어려울 때는 이런 구절 들이대면 효과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어떻게 저렇게 하는 이런 거, 기대했잖아요. 막상 일 터지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 안 나요.
어떤 여자 분이 있는데 50대 후반인데 우울증 걸렸어요. 우울증 걸린 사람에게 성경 구절이 통하겠습니까?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저쪽에서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 이쪽에서 먼저 말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쪽에 화를 돋우는 셈이 돼요. 그냥 기다림이죠.
미가가 하는 전체 내용이 그겁니다. 욕 해놓고 팔짱 낍니다. 기다리자, 그럼 그쪽에서 뭐냐 하면 욕을 얻어먹었잖아요. 그러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어이, 미가 선지자, 니가 뭔데 우리한테 욕을 하느냐.’ 미가는 팔짱 끼고 ‘기다려 봐.’ 저쪽에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래 우리가 욕을 얻어먹을 일이 없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라는 겁니다. 미가는 ‘니가 하나같으면 욕을 하겠느냐.’ 하나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면을 통해서 너희들은 너희 선에서 하나님 선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다리가 이미 끊어진 상태고 이어줄 다리는 없다는 거예요.
그럼 다리가 없다는 말은 신약성경에 와서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할 때까지 우리는 다리가 끊어져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마는 자, 오늘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 합시다. 내일 예수님을 안다. 밤에 잠잤으면 내일 아침 됐습니다. 조용합니다. 그런데 아침 9시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가만히 있어 봐, 이 더운데 장례사 번호가 몇 번이더라. 빨리 와서 염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되고 그 다음 절차가 동사무소에 가서 언제 할지.’ 갑자기 이런 생각이 ‘연락은 누구한테 해야 할지, 뺏다 하면 삐지니까 누구는 해야 되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더운데 뭐 하러 죽나, 시원할 때 죽지.‘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알아서 죽지, 이 더운데 죽어서 자식들 끝까지 애 먹이네. 아이고, 바쁜데 내일 강의 나가야 되는데. 십자가마을에 ‘미안합니다, 개인의 사정으로 또 늦춥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주님께서 일으킨 사건에 대해서 내 쪽에서 불만과 불평을 유발되는 나만의 폐쇄된 공간이 따로 이미 어느새 장만돼 있는 거예요. 이게 욕이 아니면 깨지지 않아요. 누가 욕해줘야 돼요. ‘목사 꼬라지 좋다. 그게 믿음이가, 허둥대는 꼴을 봐라.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라 하는데, 니 어머니 죽은 장례 하라 하는데 그 말씀은 니가 어떻게 적용시킬래? 남한테는 적용시키고 니한테는 적용 안 시키고, 니도 마찬가지야.’라고 욕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주님은 그 말 안 믿어요. 안 믿고 주께서 주님 사랑, 믿음은 주께서 장비를 다 갖고 와서 우리 인생의 복판에 사건을 일으켜 놓고 그 사건 한복판에 ‘나는 믿음 없습니다.’라는 순간 고게 바로 믿음이라고 새롭게 만들어내요.
그러니까 주님은 이동식 뷔페 하시는 분이예요. 집에서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요리를 다 준비해 옵니다. 준비를 다 해 와서 집안에 우리가 만든 요리를 확 다 치워버리고 주님이 새로운 요리를 해놓고 ‘먹어봐라.’ ‘맛있습니다.’ ‘니가 만든 것은’ ‘맛없네요.’ 그게 믿음인 거예요. ‘나는 죄인이고 주님만은 의인이고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하는 모든 장비를 만들어요.
매일 동행해야 돼요. 오늘 있는 신앙을 내일까지 우려먹으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일 되면 우리의 설정이 또 달라져요. 이 말을 한꺼번에 할 수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오늘 내가 간추려서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 있는 조건들이 나를 압박해서 요런 형태를 만든 거예요.
지금 내가 설교하는 순간에는 나이지리아 석유 생산량 생각 안 납니다.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에서 석유가 나오는데 그 생산량이 얼마인데 그걸 갑부가 얼마나 먹고 빈민 자가 얼마나 못 먹느냐, 지금 이 설교 시간에는 생각이 안 나거든요. 그런데 이 순간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갔다 합시다. 그리고 석유와 관련된 업종에 관련한다면 그때는 뭘 생각합니까? 석유생산량을 생각해야 되겠죠. 그럼 그걸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조성한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는가, ‘이것이 나다’라는 것을 내가 설정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주님의 것이 되게 하는데 주님의 것이 되는 것은 주님의 뜻이고,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이건 내가 평소에 하는 짓들이고, 이것을 주님께서 손을 놔버립니다. 이걸 쉽게 말해서 우리가 매일같이 깨어져야 돼요. 깨어지면 되는데 저나 여러분들이나 안 깨어지고 멍이 드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깨어진 그 안에 예수님이 나와서 ‘아’ 주님이 있는 걸 아는데 우리는 깨어지면 쉬운데 안 깨어지니까 멍이 시퍼렇게 든 거예요. 멍이 들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이여, 때려도 그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나는 죄인이다.’ 하라니까. ‘아닙니다. 죄인 아닙니다. 그동안 내가 공부한 게 얼마나 되고 책을 몇 권 냈는데 그만큼 주님 압니다.’ ‘어허, 너는 매일매일 너는 내가 만든다니까.’ ‘아닙니다. 제가 만듭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고 그만큼 배웠으면 나도 양심 있지, 내 일, 내 인생 내가 합니다.’ 그게 아니고 너는 매일같이 내가 만들어 내는 제조품이고 생산품이고 나의 작품이 되는 거예요.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을 걸어놓으니까 그림이 우쭐대서 ‘화가님, 더 이상 손대지 마세요. 뭐 이정도면 만족합니다.’ 화가가 꿈을 꾸다가 그림에 하자가 발견돼서 ‘내일 아침에 손을 한번 대야 되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쪽 산 쪽을 손을 대려고 하니까 그림이 발악을 하면서 ‘왜 이러십니까? 어제의 나는 뭐고 오늘의 나는 뭡니까? 어제의 나는 미완성이란 말입니까?’ ‘미쳤나??’ 어제도 완성이었고 오늘도 완성인 이유가 내가 직접 만들기 때문에!!
미완성은 없어요. 주께서 복음 전하기 위해서 오늘에 적합한 것은 오늘의 나를 따로 나를 만들고 내일되면 따로 나를 만들고 모래 되면 따로 만들어요. 설정은 누가 하느냐, 우리는 기계고 주님이 설정하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설정해서 과거의 나를 미래까지 억지를 부리면서 끌고 가려고 하니까 우리는 만날 주께서 욕하는 주님으로만 들려온다 말이죠.
선지자는 오늘 11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너희에게 바른 소리하니까 나보고 욕한다고 뭐라고 하는데 내가 만일 너희 포도주와 독주에 대해서 ‘이렇게 하시면 포도주의 생산이 많아집니다.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이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라고 했으면 여러분이 진짜 나를 선지자, 선지자로 인정을 해줄 것이라고 11절에 나옵니다.
선지자가 여기 6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전부 다 시비 걸 것들을 다 찾아내는 거예요. 이걸 우리가 용납해야 됩니다. 왜 선지자는 우리가 착한 것은 그냥 놔두고 나쁜 것을 골라 하느냐, 이렇게 하는데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어떤 분은 저하고 이야기할 때 꼭 나쁜 것만 집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집사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많이 있어요. 누구라고 말은 안 하겠는데 다 알아요. 목사님, 내일되면 어떻게 할 지 모릅니다. 그걸 십자가마을에 이야기해서, 맞습니다. 그 말 맞습니다. 그런 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한테 필요한 게 아니고 주님한테 필요하죠.
우리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그 하늘나라의 원칙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죄 성은 딴 게 아니고 ‘주님 이만하면 됐습니다. 주님 제발 좀 비켜주시든지 좀 나가 주세요. 내가 알아서 내가 하겠습니다.’라는 그 본성, 이거 타고난 거예요. 이럴 때 선지자가 와서 모두 허물을 잡을 때 터집니다. 터짐 이예요. 여기 나오는 게 다 터짐 이예요. 니가 백성을 어떻게 하고 고아와 과부를 어떻게 하고, 사실은 큰 욕을 당한 사람 같으면 이렇게 합니다. ‘어, 선지자, 그러지 말고 우리가 고아원 방문해서 많은 사람 구제하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느냐, 우리는 착한 일 많이 해서 트집 잡는 작은 일을 그냥 덮치려는 식으로 우리의 현재 자아를 유지하려고 시도하거든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돼 버리면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게 돼요.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작은 트집이라도 우리는 그걸 통해서 우리가 날마다 새로 해리되고 해체되고 날마다 새로 조립되는 그분에게 맡겨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말하기를 내가 어떤 환경이든지, 왜냐 환경이 나를 만드니까, 어떤 환경이든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된 기계. 못 한다는 게 없고 못한다는 자체가 안 돼요. 가만히 있는 자체도 우리는 그냥 성공 이예요. 실패는 없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일되면 무슨 일을 만날지 또는 누굴 만날지 우리는 우리의 본색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나, 자기 잘난 거, 똑똑한 거, 훌륭한 거, 믿음 좋은 거.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욕 얻어먹을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지금도 탄식하면서 기도하시는 분이 성령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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