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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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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믿음 120819우리교회누가복음

백부장의 믿음 120819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백부장의 믿음 (눅 23:44-49)

이근호

12-08-19 15:33

백부장의 고백

2012년 8월 19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3:44-49

(눅 23:44, 개역)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눅 23:45, 개역)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눅 23:46, 개역)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눅 23:47, 개역)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눅 23:48, 개역)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눅 23:49, 개역)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예수님을 구경하는 사람들,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 주목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백부장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달리 보았습니다. 단순한 동정심에서 바라본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형당하는 죄수를 향하여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도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죽이라고 외친 사람은 뭐가 됩니까? 정녕 죄인들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사람이 손 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불가능한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에 대한 모든 계획과 추진과 마무리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며 사람은 조금도 개입하지 못합니다.

“거듭나라”는 명령은 사실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마나의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이 육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기 설교란 바로 이런 겁니다. 육이 육을 조작해서 영으로 거듭나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은 다 실패로 끝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부장은 “저 분이야말로 진정 의인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예수님에 대한 감상이라면 백부장에게 구원이 이루어고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어떤 주부가 시장에서 물건 사다가 가게에 걸려있는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면서 “저 외국인 참 잘 생겼다”고 언급하는 것이 그 사람의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를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백부장은 십자가 사건 속에 같이 휘말려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이 기적이고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이 기적이듯이 이런 기적들과 더불어 백부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 분은 진정 의인이다”고 말입니다. 결국 이런 주변의 일들은 그 중심을 향하여 집결되게 되어 있는데 모두 십자가 효과를 위함입니다.

십자가 효과란 갈라디아서 2:20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고백이 단순한 사도 바울의 감상문이나 과장된 표현법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함께 죽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성령님에 의해서만 발생된 반복적 사건입니다. ‘반복적 사건’이란 내 쪽에서 한 번 경험했다고 해서 과거의 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치 홍콩 무술 영화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고 해서 그 다음의 상영에는 더 이상 죽을 사람이 안 나오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필름 안에는 앞으로 전개될 모든 내용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 안에는 천국의 모든 사정이 다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십자가 효과가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에서 먼저 임하게 됩니다.

백부장은 그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과는 달리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과 자기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기 공간이 먼저 있고, 그 안에 들어앉아서 밖을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이 안과 밖 사이가 바로 경계선입니다. 이 경계선이 있게 되면 관찰자 입장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으시는 그 십자가 사건의 현장까지 관찰자로서 살펴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죽음과 자신과의 죽음이 상관없게 됩니다. 단순한 관찰의 대상에 머물고 맙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는 순간, 그동안 자신이 다듬어 놓은 자아상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9:23-24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한 에베소서 1:8-9에 보면,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받은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공통점이 규정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규정은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껍데기로 사는 것이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나 의미나 목적이 없이 삽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죽는 죽음’입니다.

즉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유일하게 화목한 것은 ‘누군가 죽어야 성사될 일’입니다. 그 분의 죽음 이외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자신들이 수 백번 죽고 또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그 분의 죽음만이 화목이 성립됩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도 다 이 사실을 위하여 집중하면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만이 의미없이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은 자기만의 고유 공간을 따로 장만하면서 그것을 지키고자 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전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사를 놓고 보면, 톰슨이라는 사람은 원자에서 전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음극선 실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자가 원자 공간에 어떤 식으로 들어있는 지를 알지 못해서 그저 빵 위에 건포도가 군데군데 놓여 있는 식의 푸딩처럼 생겼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러더퍼드라는 사람이 알파선으로 원자를 투시해보니 가운데서 튕겨져 나오고 알파선이 산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자라는 공간 내부가 균등하게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에 딱딱한 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도 그 중심 부위가 딴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인류사 최고의 발견이 됩니다. 그 가운데 계신분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지면서 비로소 천국이, 곧 진짜 하늘이 열려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품고 사는 사람, 이 사건에 의해서 생산된 공간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가 성령받는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8-21 07:29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4절에서 4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8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3:44-49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서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폴짝 폴짝 뛴다고 해서 하늘나라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선 하늘나라가 하늘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하늘에 가도 하늘나라가 없고 땅 밑에도 하늘나라가 없고 이 지상에도 하늘나라가 없어요. 이 지상에도 하늘에도 바다에도 땅 밑에도, 어디에도 하늘나라는 없는데 예수님은 엄청난 이야기를 하십니다.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 없다.’(요 3:3) 했으니까 우리보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하늘에 가겠다고 비행기 만들고 우주선 만들어서 가 봐도 화성이나 목성은 있는데 하늘나라는 없어요.

바다 밑에 들어가려고 잠수함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도 없어요. 멀리 가려고 기차 만들고 자동차 만들고 비행기 만들고 철로 놓고 고속도로 닦고 하늘로 올라가 봐도 하늘나라가 거기 없지요. 깊은 산중에도 없지요. 중들은 깊은 산중에 들어가는데 거기에도 없어요. 하늘나라는 없는데 없는 나라를 왜 들어가는데요? 기껏 온다는 게 교회까지 오지요. 교회는 여러 군데가 많으니까. 교회까지는 왔는데 하늘나라는 못 들어간다,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문제 정도가 아니고 이것이 사기다, 사기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사기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 할 때에 그 당시 니고데모는 이미 자기의 유대교라는 것이 있었어요. 유대교가 하늘나라를 대체해서 꽉 쥐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을 거기에 몰아서 집어넣었습니다. 유대교에 있으면 뭔가 승부가 날 겁니다, 뭔가 일이 날거예요, 했는데 아무 일도 안 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보고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위에서 핀셋으로 집듯이, 젓가락으로 집어내는 식으로 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젓가락을 목사가 갖고 있으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나 필요한 사람, 자기 가족부터 먼저 집어낼 것이고 뒤에서 욕하는 사람들이나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다 없애버릴 것인데 그 핀셋이 나한테는 없다 이 말이지요. 여러분한테도 없어요. 여기서 사건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사건이라는 것. 사도바울이 썼던 모든 편지, 사도바울의 설교인데요, 그 설교는 그 설교에 참석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도바울의 설교에 참석하고 욕한 사람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설교가 곧 하나님의 계시였는데 그 설교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이 설교 듣고 성령의 사건이 되는 사람만 구원 받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내 말고 내 지혜로 여러분을 호리거나 설득하거나 가르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이 여러분에게 도달되면 여러분들은 제 말을 여러분 속에 심게 될 것입니다.’(고전 2:1-5) 라고 되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든다면 바늘이 있다면 그 바늘에 실을 꽂는 거예요. 그러면 바늘로 땀을 뜨게 되면 거기에 바늘구멍만 뚫리는 것이 아니고 바늘 따라가는 실이 거기에 심겨지지요. 누비이불 아닙니까, 누비이불. 누빈 거잖아요. 어떤 강의에서 저는 그것을 바늘로 한 땀 한 땀 뜨는 것보다 아예 미싱으로 두두둑, 박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사도바울이 설교를 하게 되면 그 구원의 능력이, 그것을 십자가의 효과라고 하는데요, 그 십자가의 효과, 구원의 효과, 거듭남의 효과가 바늘 가는데 실가는 것처럼 그 말씀과 같이 달려서 꽂히면 되는데 실은 없는채 바늘만 가면 이것은 학문이 돼요, 교육이 된다고요.

저는 십자가마을 수련회 할 때마다 실은 꽂히는 것이 없는 채 그저 지식으로나 될까 싶어서 좀 걱정이 돼요. 걱정 하나 마나 제 소관 아니니 어쩔 수는 없는 것이고. 교회사를 강의하는데 ‘목사님, 복음은 언제 전합니까?’ 할 때에 저는 가슴이 쿵덕, 했어요. 지금까지 계속 복음 전했는데 바늘만 꽂히고 실은 안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고……. 사도바울의 설교는 그 자체가 자기는 성령에 의해서, 성령에 떠밀려서 전하는 거예요. 그것을 ‘부득불’이라 합니다. 무슨 노림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안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에스겔을 보고 예레미야를 보고 이사야를 보세요. 부득불 하는 겁니다. 오늘 오후설교에 나오는 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오후 설교 제목이 ‘욕설과 예언’이에요. 사람이 욕하고 싶은 사람 없어요. 그런데 그들에게 말씀 전하니까 욕설을 전하는 것이 되니 그들로서는 욕하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나를 향하여 욕하시고 나를 향하여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문제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단과 정통을 구분도 못하는 사람 돼 버려요. 그래서 항상 성령께서는 사건으로 오는데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되고 본문에서 하나 알아야 될 것은 그겁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성령의 사건들이 어느 사건에 의해서 그것이 유발되었는가, 어느 사건의 되풀이로서, 반복성으로서 오늘날 2012년의 우리에게까지 동일하게 주어지는가, 우리가 진짜 어느 사건을 쳐다봐야 되는냐, 하는 거지요.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설교했다, 참석했다, 이것은 사건이 아니거든요. 사도바울이 전하는 말씀 속에서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그 사건은 바로 십자가사건을 이야기하더라는 말이지요. ‘여러분, 내 설교하는 거 그 사건을 경험했지요? 그러면 되었습니다.’ 그런 소리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설교는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설교 가운데서 십자가가 박아져야 되지 설교 했다, 설교 들었다, 이것은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어느 교회에 몇 년, 수십 년 다녔다, 이것은 소용없는 겁니다. 항상 사도바울은 십자가효과를 이야기해요. 십자가 피 만이 구원의 능력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전해서 어떤 이익을 챙긴다든지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십자가 그 사건 속에 있어야 돼요. 그 사건이 들어올 때는 뭉텅이로 들어오는 거예요. 한 30년쯤 전의 옛날이야기에요. 촌의 할머니들이 영화를 봤답니다. 그 할머니가 무식해서가 아니고 순진해서 그런 거예요. 중국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에 무사가 하나 등장해서 추풍낙엽처럼 계단 올라가면서 사람들을 다 쳐 죽여요. 옛날 가설극장이죠. 경상도 말로 그랑가, 시냇가에 천막 쳐 놓고 영화 보여주는데 홍콩영화였던 모양이지요.

그 영화를 보고 할머니들이 놀랜 거예요. 아버지 원수 갚는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친구 할머니 보고 ‘야, 그 사람 무섭더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니까 친구 할머니 하는 말이 ‘그래, 그럼 낼 나도 봐야지.’ 하니까 그 영화 본 할머니 하는 말이 ‘가 봐야 그 사람들 다 죽었어.’ 그 할머니는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에요. 그 사람들이 다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구경이고 뭐고 더 이상 없는 거예요. 이것은 그 할머니가 영화의 반복성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런 거예요. 십자가가!

그 할머니만 무식한 것이 아니에요. 오늘날 십자가 믿는다는 우리들도 무식한 거예요. 5년 전에 십자가 믿었다고 그만 믿는 것 아닙니다. 2천 년 전에 십자가 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효과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구축한 나의 세계관을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립니다. 경계선 알지요,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을까, 어떻게 비참하게 죽을까, 그거 구경하러 온 겁니다. 구경하러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성경말씀, 계시에 편입돼요. 그게 우리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사람이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했습니다. 이 사람 사건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는요, 상식에 의하면 우리는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 고요했다.’ 한다면 ‘죽을 사람이 죽었구나. 하나님한테 별 가치도 없는 인간이 죽었구나.’ 이렇게 되겠는데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다? ‘어? 살아났어? 그럼 나도 살 수 있겠네? 나도 예수 믿어야지.’ 이것이 인간들의 노림수잖아요. 인간들의 노림수! 죽었다, 할 때는 죽은 것은 죽은 것이지 뭐, 하다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니까 ‘야, 나도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도 영생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구나. 중국의 진시황제가 그렇게도 찾고 싶었던 그 불사의 약, 그게 가까운데 있었네. 십자가 믿으면 그 불사의 약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니까 나도 이제 예수의 십자가 믿고 부활을 믿어서 영생 해야지.’

이것은 성령이 아니어도, 바늘만 가고 실이 없어도 누구나 영원히 살고 싶은 그 본능과 충동에 의해서 충분히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의 놀라운 점은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부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그냥 죽었다는 것, 그냥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죽음을 보고도 뭐라고 하느냐, ‘이분은 정녕 의인’이라 했습니다. 이게 되느냐, 이게 우리한테 되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정녕 의인이라면 예수님 죽이라고 고함쳤던 모든 군중들은 정녕 죄인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 죽는데 막아서지 못한 백부장 본인도 역시 정녕 죄인이지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이 단독사건입니다. 예수님 혼자 죽었어요. 여러 명 같이 죽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고 여러분도 그렇게 보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뭐가 지금 풀리지 않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도바울의 말이 허풍이 될 수 있고 사기가 될 수 있고 과장된 표현이 될 수 있고, 실체가 아닌데도 그냥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오버액션 하는 것일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그냥 표현상의 수사로서 하나의 비유냐, 아니면 실제로 사도바울이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정말 십자가에 주와 함께 죽었느냐, 그 문제는 사도바울에게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성령이 나타났을 때에 현상을 고정시켜 놓았거든요. ‘성령이 여러분에 오게 되면 내가 경험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삽니다, 라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라고 제시를 했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는 그것이 실제이거나 현실이 아니고 하나의 오버액션이고 본인의 느낌이거나 감상이라면 우리는 그따위 것에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그렇게 심하게 믿지 않고 그저 예수님은 좋은 분이다, 이 정도 해도 나를 성령 받은 것으로 쳐줘.’ 이렇게 될 수가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것은 자기 맘 대로에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 받았다, 말로만? 아니지요. 보편적이고 동일한 규정이 나와야 돼요.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히 적용되는 현실이 구축이 돼야 되거든요. 그게 사도바울이 구축하면 안 되고 성령이 살아 계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니까 살아계신 예수님 부활하신 분이 성령을 줄때는 딱 규정된 대로 성령이 오게 되어 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규정에 일치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사시니까 나는 껍데기로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딱 규정이 돼야 된다 그 말이지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갑니다. 이것은 난제 중에 난제고 이것은 어떻게 우리가 손댈 수가 없어요. 로켓도 소 없다니까요. 미국 NASA에서 목성으로 로켓 쏴 올려도 그것은 하늘나라 아니에요. 이것은 돈이 많으니 적으니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예레미야 9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전라도 어디 가면 인물 자랑하지 말고 돈 자랑 하지 말라는 소리가 있지요. 여기 말씀에 지혜, 용맹, 부함, 이런 것 자랑하지 말라고 하면 교인들이 교회 와서 자랑할 것이 뭐가 남아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전부 다 이런 실적 자랑하려고 들어오잖아요. 어려울 때는 교회 안 나오다가 좀 된다 싶으면 교회 나오잖아요. 자랑할 것이 없으면 우리는 남 앞에 자기를 안 내세울 정도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명철을 자랑하라, 고 하는데 이 명철은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뭘 가지고 명철이라 하느냐, 성령에 의해서만 아는 명철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면 그 십자가 효과가 있는 사람이니까 십자가 효과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되면 하늘나라가 다 보이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왜, 부활이라 하는 것은 앞에 십자가가 있으니까 십자가가 출입구고 그 안에 들어가게 되면 부활의 세계가 열린다는 말이지요. 십자가에 들어가지도 않은 사람이 부활에 대해서 언급할 수가 없지요.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한다고 했지요.

십자가가 구멍이고 그 구멍에 들어가면 그 안에 부활의 나라가 있다 이 말이지요. 부활의 나라라 하는 것은 그냥 부활의 나라가 따로 없어요. 십자가의 효과가 퍼져 있는 그 공간을 가지고 천국, 아들의 나라, 하늘나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들어가는 것이 성령에 의해서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느 지점에도 바로 부활의 나라, 하늘나라가 없지요. 없으면서 주님께서는 어디든지 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니 이 말을 남에게 전해야 될 설교자나 사도의 입장에서는 참 난처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세계를 증거 하려 하니까 애초부터 이것은 막혀 있는 상태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기껏 표현한다는 것이 경계가 허물어진다, 이정도 하는데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제가 그 말을 한 이유가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를 구경하러 왔잖아요. 오늘 본문에 나오지만 ‘참 사람 안됐다. 괜찮은 사람인데 정말 안됐어.’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다 가슴 아파 했다는 말은 다 동정심을 표현했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어요.

예수님 저쪽은 내가 관찰해야 될 새로운 공간이고 나는 나만의 공간을 따로 챙기고 있는데 그 경계가 허물어진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사건에 같이 흡수 통합돼 버린 겁니다. 흡수 통합된 그것이 그때 그 사건에 단순하게 그치지 않고 영화처럼 그것이 반복이 되어버리면 그 뒤에 태어났던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말을 감히 자신만만하게 실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백부장이 자기는 관찰자고 예수님은 관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져요. 그것을 공간의 생산이라 하는데 하나의 공간이 생산되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의 능력이 예수님 죽어서 자기 혼자 천당 가려고 한다면 십자가효과라는 것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의 죽음은 나의 택한 자를 위해서 대신 죽는 죽음’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화목은 누가 죽어야 화목이 돼요. 하나님과의 화목은 누가 죽어야 된다는 것, 인류사 최고의 발견입니다. 우리는 산채로 살아 있는 사람과 화평하려고 하고 화목하려고 하잖아요. 부부사이에도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당신과 화목하고 살아 있는 애하고 잘 살자, 이것이 화목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화목은 그게 아니고 네가 죽어도 안돼요, 내가 죽어도 안 되고.

화목당할 사람이 죽어서 화목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천번 만번 다시 태어나서 또 죽어도 화목 안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아들로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저주 받을 자로 취급해 버려요. 그런데 저주 받을 자가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고 참 아들이 되는 것은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누가 죽어야 되느냐 하면, 하여튼 누가 죽어야 돼요. 그 일을 예수님이 담당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하나님과 화목 되어버리면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하면, 나의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아무 걱정 없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지금 예수님이 죽은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내 안의 공간, 나만의 공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내 공간, 내 공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죽도록 고민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내 공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공간문제를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공간은 쓰레기에요, 쓰레기! 우리는 쓰레기를 들고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우리는 죽을까 싶어서 벌벌 떨고 있다 보니까 지금 문제가 많지요.

영화를 한 번 더 보든지, 십자가 효과를 받든지 해야 돼요. 중국영화를 보든지 홍콩영화를 보든지 해야 돼요. 옛날에 내가 나쁜 짓 했다고 해가지고 지옥 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다음 영화를 안 봐서 그래요. 다음 영화 나머지 또 있어요. 나쁜 짓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저주받는 사이로 갈라진 것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으로 그 모든 문제가 다 깔끔하게 해결 본 거예요. 그걸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라 합니다. 그 언약을 이룬 것이 십자가 새 언약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요 6:54)이 있을 것이다. 내 살과 피가 새 언약이니 다시는 먹고 마실 것이 없다 그 말이지요. 다시는!

네가 너에게 어떤 행동을 가하고, 네가 너에게 어떤 버릇을 만들고, 네가 너에게 어떤 선한 일을 가미하는 것, 그것은 기존의 네 공간이지 주께서 새롭게 만든 공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 공간이 있으면 항상 주변에 경계선을 쳐요. 경계선을 치면 예수님을 하나의 관찰의 대상으로 봅니다. 예수님 참 안됐다, 불쌍하다, 저분을 좋아해 줘야지, 사랑해 줘야지, 그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내가 저 분 믿어줘야지, 사랑해 줘야지,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내가 저분 믿어 줘야지, 그런 식으로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그것은 행함 들이지요, 행함들.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할 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서 도대체 이 말을 그 당시에 누가 알아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다시 이야기해 볼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기 아닙니까? 왜냐하면 분명히 십자가에는 달랑 예수님과 그 양편에 강도 둘이 있었다, 이것은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거기에 사도바울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 없었던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니 저 사람은 대체 무슨 객소리를 하고 있느냐,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그 당시에 그 편지를 본 사람들이 그 말을 진짜 알아들었는지 의심스러워요, 정말.

기껏해야 주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과장되게 표현해서 주님을 높인다고 그런 소리 했겠지, 지금 그런 과장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지요. 교회 나오고 우리가 성경 보면서 우리는 자꾸 상식을 언급해요. ‘목사님, 상식이 옳습니다.’ 제가 과학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과학조차도 상식이 아닙니다. 20세기 초에 톰슨이라는 사람이 음극선실험을 했어요. 음극선을 쬐니 거기서 전자가 나왔거든요. 전자가 나오니까 ‘아, 인간의 가장 작은 단위인 원소 속에 전자라는 것이 또 들어 있구나. 그런데 어떻게 들어 있을까?’ 빵 위에 건포도가 놓인 것처럼 군데군데 전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전자가 튀어 나왔으니까. 빵 위에 군데군데 새까만 건포도가 놓여 있는 것처럼 생각한 거예요. 그 후에 러더퍼드라는 사람이 금속판에 알파선이라는 것을 쬐였어요. 그것을 쬐여보니 만일 푸딩 같다면 이 알파선이 다 통과를 해야 되는데 일부는 휘어지기도 하고 180도로 다시 튕겨져 나오는 것이 있었어요. ‘야, 원자 속은 비율이 동일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단단한 것(핵)이 있구나.’ 그것이 나중에 깨지는 거예요. 그것이 깨지면 원자폭탄이 되는데 그것이 있다는 거예요.

이런 것이 일반상식선에서 보입니까? 알파선을 쬐니까 다른 것은 다 통과하는데 도로 튀어나오는 것을 보니 원자의 중간에 단단한 물질이 있더라는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나님 속에 단단한 물질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습니까? 이게 깨져야 되는 거예요. 깨어지는 하나님을 어느 누가 알았습니까? 인류역사상 아무도 몰랐지요. 하나님은 그냥 푸딩처럼 좋으신 하나님, 어지신 하나님, 점잖으신 하나님인줄 알았지요. 하나님 속에 하나님 들어 있는데 그 하나님은 이 땅에 올 때 깨어져야 된다는 사실, 우리 죄 때문에 깨져야 된다는 사실을 이 세상 어느 종교에서, 어느 도사가, 어느 지혜자가, 어느 용맹한 자가, 어느 부자가 그것을 알아챘느냐 그 말이지요.

그 깨어짐, 그 깨어짐 속에서 비로소 하늘나라가 열리거든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죽습니다. 죽는 하나님, 그동안 인간들은 상식적인 하나님, 상상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단단한 것이 있는데 그 단단한 것이 인간의 죄 때문에 깨어질 때 비로소 인간은 하늘나라에 건너갈 수가 있다는 사실, 참 재미있는 것이 인간은 의가 되면 안 되고 죄가 되어야 돼요. 죄가 되어서 단단한 주님, 연약한 주님을 깰 때 깨어지면서 그 안에서 비로소 십자가가 열리면서 비로소 아무도 갈 수 없었던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주님의 나라, 그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신에 대해서라면 도사, 하나님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상상한 말씀의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인줄 알고 까불대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훈장 타는 일인 줄 알고 설쳐대던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에서 핍박받아 깨어진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아, 이게 주의 언약이구나.’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말을 내 뱉을 수 있는 것은 나쁜 짓이 누적되어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전과 백날 더해봐야 그 말이 안 나오고 오직 십자가 앞에 설 때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이 사도바울은 자기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겁니다. 경계가 허물어지니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누가 사는 것입니까?’라는 우리보기에는 미친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내가 지금 살아 있거든요. 그런데 누가 사는 겁니까?’ 당연한 질문 아닙니까? ‘네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사는 겁니까?’ ‘네 안에 같이 죽었던 그리스도가 이미 너를 접수하고 흡수 통합시켜서 네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산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네가 산다, 의 그 산다가 된다.’는 거예요.

‘네 안에 나 있다.’는 주의 증인노릇하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사는 것이 되는 겁니다. 지금 사람들 사는 것은요, 중구난방이에요. 왜 사는지 모릅니다.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드라마 같은 것을 보세요. 제가 보면 사는 의미도 모르고 사는 목적도 없고 그저 되는대로 그냥 살아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올림픽 할 때 죽어라고 달리고 헤엄치고 던지고 축구하고 메달 따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다가 메달도 못 따고 그냥 오기도 하고. 그러면 그 모든 것을 한데 모아봅시다. 농사짓고 사업하고 가정주부가 설거지 하고, ‘그런데 그 일 왜 하시는데요? 설거지 왜 하십니까?’

아무 이유가 없어요.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고 그냥 떠밀려가요. 탁류에 떠밀려가듯이 그냥 떠밀려 가는 거예요. 떠밀려가다가 군데군데 덥다고 싸우고 민다고 싸우고. 우리 인간이 누구냐 하는 것은 우리가 몰라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니까 그것 때문에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나는 누군지 모른다는 그것에 절망하지 마시고 누군가 아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는 것이 뭐냐, 예수님께서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오늘 본문 44절에 “때가 제 육시쯤 되어(12시죠.)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오후 세시죠.) 계속하며(세 시간 동안 어둠이 지속되었다는 말이지요.)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해가 어두워지는 것이 기적입니까, 성소가 찢어지는 것이 기적입니까? 둘 다 기적이지요. 그런데 해가 어두워지면 다시 오후 네 시쯤에 밝아지면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오후 세시까지 어두워진 것은 네 시 되면 원상복구가 되는데 문제는 성소 한가운데 휘장이 찢어진 이것은 오후 네 시 40분이 되어도 원상복구가 안돼요. 결국은 뭐냐, 해와 달마저 무의미하게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휘장 찢어지는 타이밍과 맞추기 위해서 해와 달이 배정된 것이고 배치된 거예요. 해와 달이 우리보다 철이 더 들었어요.

우리 인간은 자기 맘대로 살지만 해와 달은 자기 맘대로 안 살아요.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노림수가. 어떤 사건을 겨냥하는 식으로 해와 달은 돌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성소 휘장을 찢어내는 거예요.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더라. 이런 저런 사건들의 기적이 모여서 무슨 기적을 낳느냐,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기적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게 과정이 있어요. 여기에 논리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복음적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사도바울의 편지 안에서 그 사건이 어떻게 홍콩영화처럼 늘 냇가에 설치된 가설극장에 가서 봐도 죽은 사람이 또 나오고 또 나오는 것처럼 단회 적으로 촬영한 영화가 상영할 때는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되고, 계속 되풀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사건이 또 되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던 백부장이었던 사람, ‘저분은 진정 의인이었도다.’ 부활되기 이전에 십자가질 때 그 때의 고백도 십자가 효과로서 성령 안에서 우리한테 매일같이 상영되고 되풀이 되는 거예요. 백부장이 한 ‘저분이 정녕 의인’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나는 언제 하나님이 죽이시는 그 죽임에 동참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저 자리에 내가 참여할 수 있을까?’ 하나님 아버지의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약속 때문에 죽으시는 그 죽음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느냐, 만일 참여 안 되면 나는 그냥 죄인으로 저주 받는 것이고 참여하면 주와 함께 죽는 것이 되고.

아마 백부장이 이런 생각 했다면 옆에 사람이 말렸을 거예요. ‘너는 백날 해도 안 돼! 안 돼~!’ 하거든요. 그 안 되는 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되는 겁니다. 새로운 공간이 새로운 피조물을 양산해낸 거예요.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내가 어찌하면 다시 태어나서 하늘나라 볼 수 있습니까?’ 하여튼 니고데모가 하늘나라를 무진장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자기 신상의 일들은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국회의원이든 뭐든 아무 관계없어요. 하늘나라 못 보면 국회의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명예도 자랑하지 말고 부한 것도 자랑하지 말고 건강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안 것을 자랑하라고 하는데 지금 평생 살아온 것이 소용없는 짓이 되는 거예요.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식으로 다시 태어납니까?’라고 했을 때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그것은 잊어라.’ 쉽게 말하면 육에서 나온 것은 잊어라, ‘성령으로 나게 되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성령이 뭐꼬?’ 이렇게 된 거예요. 사도바울은 이 성령이라는 것이 ……, 여기서 좀 약간 어려우니 눈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은 십자가 볼 때 불쌍하다, 안되었다, 관찰자 입장에서 관찰의 대상이었지요. 그것은 나의 공간과 저쪽 공간이 아직도 안 깨졌어요. 주님이 안됐지만 주님은 주님 일이고 나는 집에 가서 빨리 설거지나 해야지, 아직 자기공간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백부장은 그 경계선이 깨어졌습니다. 깨어져서 ‘저분은 정녕 의인이다. 저분이 정녕 의인이라면 나는 졸지에 저 분 앞에서 죄인이 된다.’라고 되었다 이 말이지요. 관찰자 입장에서 그만 흡수 통합 되었지요.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을 어떻게 내가 다룰까, 라는 나만의 공간이 아니고 성령께서 지금 나를 성령 자기의 세계로 참여시켜서 주물럭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요리가 ‘주물럭’이라는 요리가 나왔다는. 고기와 양파를 다져넣고 주물럭거려서 주물럭을 만들어내듯이 주께서 주물럭, 주물럭, 주물럭거리는 거예요. 그 경계선이 허물어지면서 뭐가 배출되느냐하면, 옛날에 나만의 공간이 있을 때 설계했던 나만의 비전과 꿈과 희망, 이런 것은 찌꺼기로 다 거기서 빠져나와야 됩니다.

나는 앞으로 5년 뒤에 이런 일을 하겠다, 나는 앞으로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득을 보겠다, 이런 꿈들은 다 빠져나와야 돼요. 이것은 상하수도 다 오염시키는 더러운 오염물입니다. 나의 공간은 다 빠져나와 버려야 돼요. 주님의 공간만 남아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말을 제가 조금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걸 한꺼번에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모든 행함의 지평선이, 행함의 인생들판이 전부 다 믿음의 들판으로 일거에 바뀌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나는 밥을 먹는다, 한다면 그냥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음으로 밥을 먹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거든요. 모든 것이, 심지어 오줌 누는 것도 나는 믿음으로 오줌 눈다, 이렇게 믿음의 지평선으로 다 바뀌는 거예요. 여러분 집에 도배를 하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장판부터 해서 다 뜯어내는 것이 나을까요? 도배해봐야 습기 차면 또 마찬가지잖아요. 아예 장판 자체부터 다 뜯어내는 것이 낫겠지요. 성령은 장판 자체를 뜯어내는 거예요. 신앙이나 교양, 이런 것으로 도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면 그동안 내가 행함으로 살아왔던 모든 것이 뜯겨져 나가고 그동안 모든 것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심겨준 하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으로 밑바닥 장판을 다시 까는 겁니다.

말을 해놓고 보니 어렵습니다. 제가 사기설교 먼저 전해드리고 사기가 아닌 설교를 또 전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게으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을 부지런한 아들로 만들고 싶어서 아들에게 거짓말을 했답니다. ‘저 포도원에는 금이 묻혀 있다. 그러니 네가 그 포도원에서 금을 찾아 봐라.’ 아들이 희망을 품고 금을 찾는 노력을 열심히 했더니 찾는 금은 안 나왔지만 금 찾는다고 밭을 파헤치는 바람에 밭이 갈리고 산소가 유입되고 양질의 땅이 되어 포도가 무럭무럭 자라서 금 수확보다 포도수확이 더 돈이 되었더라, 아버지의 지혜가 이런 지혜구나, 놀라운 지혜다!』 이거 사기설교입니다. 이게 행함의 설교에요.

또 행함의 설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시는 일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축복이니까 열심히 일도 하시고 거기에 예수까지 믿으시면 여러분은 복도 받고 예수 믿음으로 구원도 받습니다.』 이거 사기설교입니다. 이거 속지 마세요. 그러면 사기설교 아닌 것은 뭐냐, 『여러분이 자기 종사하는 여러분의 업, 농사면 농사, 장사면 장사, 여러분의 업에 인간은 의미를 둘 것입니다. 그 장판 다 뜯어냅니다. 목사는 목사일 한다고 의미 두는 것 다 뜯어냅니다. 다 뜯어내는데 뜯어보니 그것이 전부 다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죄인으로서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십자가에 합류가 됩니다. 나는 죽어야 될 자요 그 분은 나대신 죽음으로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해 죽으시는 분이 되는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음을 한 평생 두고두고 온 몸으로 느끼는 것 목사가 되든지 장로가 되든지 아니면 사업을 하든지 전부 다 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죄라는 것을 알 때 그 상태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할 때는 예수가 하나의 관찰의 대상이 되지만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는 관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나 자체가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누굴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이 자체가 문제 있어, 이것도 죄입니다, 라고 자기의 관찰 자체를 박살내는 겁니다. 주님에 의해 주물럭거려지는 가운데. 그것이 모든 것이 믿음이 되는 겁니다.』

재판장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점잖은 판사가 보통 ‘피고는……’ 이렇게 선고할 텐데 ‘아이고, 피고선생님! 실수해서 그런 죄를 지었어요? 미안합니다만 제가 5년 때리겠습니다. 너무 감정 세우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7년인데 선생님을 존경해서 5년만 때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 5년 후에 새 출발하세요.’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피고를 진짜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무시하는 거예요. 사람이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모독의 한 형태입니다. 몰랐지요? 상대방에게 잘해준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잘해주는 나를 스스로 존중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일환입니다.

내가 어떻게 가치 있는 존재가 될까, 연구하다 보면 내가 남한테 대접하고 남을 존중하면 그 남은 또 나를 존중하고 잘 대접할 것이라는 통박, 되도 않는 계산, 이런 것이 있으니까 사기설교가 먹히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 자신을 되게 무시한다면 상대방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나부터 인간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나부터 그 점을 안다면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남 보기에는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배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뭘 보라고? ‘나는 나 안 볼 테니까 당신도 당신 보지 마. 우리는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에 누가 죽었다는 그것만 봐.’ 그것만이 사랑이에요. 그것 빼놓고 나머지는 사랑이라는 말을 붙이지 맙시다. 그걸 붙이게 되면 자기 행함이 돼요, 행함이!

행함이라는 것이 뭐냐, 자기존중을 기본으로 까는 것이 전부 행함이에요. 그런데 자기 자신이 나는 모독당해야 되고 무시당해도 마땅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와 나 사이에 관찰의 대상의 십자가가 아니라 관찰의 경계가 허물어져 버렸어요.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것이 소통한 겁니다.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누구도 못한 겁니다. 왜 우리는 못하는가, 우리는 못해야 마땅하지요. 왜, 우리는 무시당해야 마땅하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만큼은 그걸 해냈기 때문에 주님만큼은 존경을 받아야 되고 찬양을 받아야 합당한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거기서 나오는 공간이라 하는 것은 기존에 내가 장만한 나의 공간은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 공간에서 일어난 어떤 사태와 사건,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맙시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인생에는 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어느 날 옥정이라는 곳에 갔어요. 옥정, 잘 못 들어보셨지요? 하동 골짜기인데, 거기 가는 아주 좁은 길이 있는데 턱이 열 개가 넘어요. 운전하면서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턱 넘으면 다시 평탄해지고 턱 넘으면 다시 평탄해져요.

그것을 보면 그 턱이 여러 개가 되니 짜증이 나는데 이 턱이 한 개라면 어떻게 되는가? 이 턱만 넘으면 더 이상 아무 턱이 없는 세계가 있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불현 듯이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느낀 것은, 첫 번째는 인간은 턱이 있어야 된다는 것, 턱이 있는 것을 불만스러워하지 말고 있어야 되는데 여러 개가 있으면 곤란다다는 거예요. 단 한 번에 턱만 넘으면 어떻게 되는 그런 세계가 없을까? 백부장이 봤을 때 턱만 넘으면 이제는 그동안 내가 고민했던 것, 나는 어떻게 하면 의인이 되느냐, 라는 그 자체가 의미 없는 고민이라는 사실을, 내가 처음부터 죄인이고 죽을 때도 죄인인데 왜 자꾸 나는 착해야 복 받는다, 착해야 사업이 잘된다, 내가 착한 일 해야 주께서는 행운을 안겨준다, 왜 자꾸 이런 나만의 공간을 스스로 쥐려고 했던가? 나만의 공간, 나만의 경계는 허물어져야 되는데!

아무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을 왜 자꾸 나는 끝까지 붙들려고 하는 이 심보, 대체 누가 나에게 이런 괴로움을 안겨주었던가, 그 말이지요. 이게 마귀가 안겨 준거지요, 마귀가. 이제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턱 이전이든 이후든 그 모든 것이 주께서 주신 성령의 믿음으로 되었다면 우리가 바라볼 것은 바로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죽음중심, 그 예수님 죽으심이 모든 화목,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잘못도, 어떤 정죄도 없다는 사실이에요. 간통한 여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너를 다시는 정죄하지 않겠다는 그 이야기가 그 영화의 반복성처럼 간통한 여인에게 들린 그때만 들리지 말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일같이 ‘나는 다시는 너희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그것이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실제적인 사건을 근거로, 그 피를 근거로 우리 코앞에 내미는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지금도 안겨주시는 경계 허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관찰자 입장에서 봤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따로 놀고 나는 내 인생 따로 놀고 그렇게 하면 구원 받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이제는 나의 모든 것에 쳐들어와서 깨어지게 하옵소서. 나의 모든 것이 깨어져서 주님께서 주무르시고 이끄시는 모든 것이 믿음의 세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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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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