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다니엘1장(다니엘의 시작)120809-1강b-이 근호 목사
가락교회-다니엘1장(다니엘의 시작)120809-1강b-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1.16)
가락교회-다니엘1장(다니엘의 시작)120809-1강b-이 근호 목사
제 1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사과를 깎으면 껍질이 나오잖아요. 보통 사과를 먹을 때 껍질은 안 먹잖아요. 사과를 벗기면 하나의 필름처럼 나와 있듯이 껍질만 있다고 봅시다. 그러면 사과 껍질만 모아서 동그랗게 모양을 만들면 그 실체는 없지만 어느 정도 사과 크기의 윤곽이 나오겠죠. 사과 껍질 끊어진 것을 이어보면 ‘아, 이 껍질을 보니까 사과 알맹이가 이쯤 되겠다.’라고 눈에 들어오잖아요.
다니엘은 바로 껍질을 보여주는 거예요. 껍질을 보여서 거기서 알맹이가 진짜 등장하도록 그렇게 껍질로 감싸는 역할 그게 역사라는 겁니다. 역사가 없다는 것은 오해죠. 저보고 ‘역사는 없습니까?‘ 이렇게 묻는 교수가 있는데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사과 껍질을 보게 되면 그 안에 묵시가 있는 거예요. 만약에 묵시, 알맹이를 보여주면 그 자체로 묵시가 아니고 역사가 되기 때문에 거기서 알맹이를 보여주면 안 돼요. 껍질만 계속 이어져야 돼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뭐다? 복되다 했잖아요. 도마는 만지고 봤잖아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되죠.
보이는 눈을 가진 인간이 이미 자체가 역사적 존재이어서 역사적 존재에서는 항상 역사적 존재만 들끓고 역사와 존재만 온다는 거예요. 사과껍질은 껍데기만 만나게 돼 있어요. 그런데 그 껍데기를 만나는 가운데서 안쪽의 묵시에 의해서 껍질이 발생된다는 사실을 감 잡게 됩니다. 그러면 껍질이 아닌 사람은 그걸 허황되게 보이죠. ‘이거 뭐 똑같은 사물을 보고 그건 그냥 우연이야.’ ‘아니야, 주님이 하신 거야.’ ‘아무리 봐도 주님이 하신 걸로 안 보이는데, 어디서 주님이 나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 대표적인 모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53장 성경책을 봤잖아요. 그냥 책 봤어요. 책을 봤는데 빌립 집사가 와서 책의 주인공이 이렇게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이분이 누굽니까?‘ 했을 때 그것이 어려워요.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 고난 받는 종이 누굽니까? 할 때 그 분이 바로 얼마 전에 돌아갔다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입니다. 이야기하는 그것이 안의 껍질과 껍질이 아닌 사람은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 안에 동그란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껍질로 이렇게 동그랗게 쌌다고 생각한다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보이지 않지만 사과를 통해서 껍질을 보게 되고 빌립 집사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이걸(껍질) 보니까 둘이 같은 껍질로 만나게 되는 겁니다.
안쪽의 사과를 모르게 되면 이사야 53장에서 무슨 예수란 말이 안 나오잖아요?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빌립 집사가 뭘 받았느냐 하면 성령에 충만했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성령에 충만한 게 뭐냐,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실체가 이렇게 축구공처럼 있고, 보이지 않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 축구공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 그렇게 생각 될 때, 그러면 이쪽 사람도 그렇게 될 때 예수 안을 통해서 상대방을 보고 예수 안을 통해서 상대방을 보고 ‘이렇게 우리는 다 같이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하는 주님이 만들어 가시는 주님이 칼질해서 벗겨놓은 또 벗겨 놓은 사과껍질이죠. 우리가 죽고 난 뒤에는 또 성령께서 예수 믿는 사람을 또 껍질로서 벗겨 놓으면 그들도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만 증거 하게 된다 이 말이죠.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베드로하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예수님보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자들은 그걸 엘리야와 모세 나타나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일종의 하나의 역사적 인물로 봤죠. 묵시적 인물로 안 본 거예요.
어렵지만 해봅시다.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라면, 역사적 인물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계시면 여기는 예수님이 없이 돼 버려요. 예수님이 덩치가 있고 키가 있고 몸무게가 있잖아요. 예수님이 이 방을 나가버리면 이쪽은 예수님이 없는 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왕의 신하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니까 거기 계시지 말고 걸어서 이동해서 그 몸체가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아들한테 손을 얹으면 같은 역사적 인물이니까 손을 대면 병이 낫겠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니 아들은 이미 나았다.’하는 거예요. 나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신하가 믿었어요. 이게 이상해요. 미쳤다고 그걸 왜 믿느냐 말이죠. 방금 예수님보고 ‘오셔서 손을 대야 병이 낫겠다.’ 했는데 역사적 인물이 오지도 않았는데 나았다. 말이 안 되죠. 믿고 가보니까 말씀하신 그때에 병이 낫다 이렇게 되죠. 그래서 하는 말이 ‘도대체 너희들은 기적과 표적이 아니면 믿지 못하는구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어떻게? 그게 어떻게 말로 설명이 됩니까? ‘어떻게‘라고 묻는 자체가 내가 아는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예수님을 역사적 사실로 표현하라 이 말인데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로 설명이 우리 역사적 표현력에 담기지 않게 돼 있어요. 안 담깁니다. 왜, 사과껍질은 사과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과껍질에서 사과가 나온 게 아닙니다. 그냥 감 잡았을 뿐입니다.
이런 믿음들이 주님에서 나온 믿음만이 주님에게 인도하게 돼 있습니다. 내가 믿음 만들어서 주께 다가갈 수 없어요. 주께로 나온 믿음만이, 사과에서 나온 껍질만이 우리가 나온 다시 사과 본체 알맹이로 우리를 데려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데려가서 포근히 우리는 그 몸을 지키는 지체로서 감사하게 돼 있죠. 지금도 주께서는 사과를 계속 깎고 있습니다. 잘 눈에 안 띄어서 그런데 지금도 깎고 계실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묵시를 설명할 때는 묵시가 역사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고 묵시가 만들어 낸 역사적 흔적들이 다니엘에 깔려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역사와 묵시의 차이점이 뭐냐, 그게 오늘 강의의 제일 중요한 어려운 부분인데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형은 의사다. 이 세상에서 역사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죠? 우리 형은 의대 나와서 지금 의사다. 이게 틀렸습니까? 역사적으로는 안 틀렸는데 역사 자체가 묵시를 만나게 되면 이게 몽땅 틀린 표현이 되는 겁니다. 뭔 뜻이냐 하면 묵시를 표현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틀렸다. 죄다. 부족하다. 미흡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우리 형은 의사다. S는 P다. 논리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어려운 말은 하지 마시고, 우리 형은 형이고, 의사는 의사다. 같이 붙여보면 우리 형 + 의사,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묵시가 되는 겁니다. 뭔 뜻이냐 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과 결과를 역사에서 찾아내게 돼 있어요.
자, 매직이 이렇게 스톱돼 있죠? 매직을 던집니다. 2바퀴 돌았죠? 역사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매직이 2바퀴 돌은 걸 가지고 그 원인을 내가 팔에 에너지 힘을 줘서 돌리기 때문에 돌았다. 이렇게 돼요. 그러면 이 2바퀴 돌은 매직이 연결되면서 같은 역사적인 것으로 표현이 되는 겁니다. ‘내 매직은 2바퀴 돌았다.’가 돼요. 그런데 묵시적으로는 이게 맞다? 안 맞다? 이게 안 맞는 겁니다. 여기 있는 매직이 있고, 2바퀴 돌은 매직이 있는 거예요. AND, ~과 ~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역사는 ‘~~는 ~~다.’ 가 되는데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묵시에서는 2바퀴 돌은 원인을 지상에서 찾을 수 있다? 없다? 찾으면 안 돼요. 내가 밥을 숟가락을 들고 먹었으니까 밥이 되는데, 역사적으로는 이게 되는데, 묵시에서는 숟가락을 드는 것도 내 힘이 아니고 입에 들어가는 것도 내 힘이 아닙니다. 숟가락 들었다. 밥이 넘어갔다. 이렇게 돼야지, 숟가락을 들어 밥을 뜨니까 밥이 넘어갔다. 이렇게 되면 이건 역사적 산물이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이만큼 된 것은 다 내 누구 덕이다? 내 덕이다. 이건 역사적 산물 이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이게 묵시가 되는 겁니다. 쉬운 것 같지만 무진장 어려운 거예요. 나는 니 때문에 못 살겠다.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겁니다. 나는 니가 못살게 굴기 때문에, 못살게 구는 너도 묵시적 존재고, 못살게 당하는 나도 묵시적 존재고, 니는 나를 핍박했고 나는 핍박 받고, 원인과 결과가 성립이 안 되게 돼 있어요.
다니엘에 있어서 느부갓네살이 꿈을 꿉니다. 꿈을 꾼 이유는 원인과 결과를 찾아낼 수 있는 놈 나와 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이 평소에 그동안 멋진 꿈꾸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까? 애를 써서 꿈 꿨다면 느부갓네살은 계속해서 줄 곧 역사적 인물로서 마감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잖아요. ’얘들아, 얘들아.‘ ’예, 대왕마님‘ ’어제, 꿈 꿨다.‘ ’저도 꿈 꿨습니다.‘ 이러면 문제없는 거예요.
요셉이 꿈을 꿨잖아요. 요셉이 꿈을 꿨다.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형, 나 꿈 꿨어. 해, 달, 별이 나한테 절했고 볏 집단이 나한테 절했어.’ 이거 꿀 수 있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왜 형들이 화를 내느냐 말이죠. 형들은 그걸 역사적 꿈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그걸 역사적 꿈으로 보지 않고 뭐로 봤느냐, 묵시로 봤기 때문에 요셉이 속해 있는 층, 포지션과 요셉의 형이 속해 있는 포지션이 차이난다는 것을 형들이 감을 잡고 화를 낸 겁니다. ‘이게 건방 떨고 있어. 어디서 건방 떨고 있어.’
소년 다윗이 골리앗 전쟁 때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형들은 골리앗을 못 이긴다. 왜 못 이기느냐, 키는 3미터 넘고....., 그러면 요셉의 형들이나 사울 왕은 역사적인 것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에 골리앗을 이기려면 골리앗을 이길만한 더 힘 센 장수가 있어야 돼요. 이번에 장 미란이 메달 못 땄잖아요. 힘 센 중국 사람이 등장해서. 골리앗을 이기려면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야 이긴다는 것이 우리 몸에 익혀 있는 역사적인 논리 구조입니다. 거기에 소년 다윗이 등장했잖아요. 젖이나 더 먹고 와라. 어디서 어린 애가 위험한 곳에서 노느냐, 빵빵 총이나 가지고 놀아라.‘고 내보내죠.
주님께서는 골리앗 만나는 역사적 사건으로 알고 있는 그것을 뭐로 바꿉니까? 다윗 하나 심어놓음으로서 역사적 상황이 묵시적 상황으로 바뀌면서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이 해석할 수 없는 약속의 개입이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거예요. 약속은 역사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그 마당에 묵시적인 사건으로 침범하고 침투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가 뭐, 예수님 처형당한 거죠. 간단한 문제죠. 대들다가, 종교적인 나라에 종교적으로 대들고 반항하다가 민중들이 화가 나서, 종교라 하는 것은 정신세계가 혼란스러우면 나라꼴이 안 돼요. 만약에 예를 들면 김 일성 동상을 무너뜨렸다. 그야 또 만들면 되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북한은 용서 안 되죠. 왜냐 하면 정신으로 김 일성 동상은 우상이기 때문에 신이기 때문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역사 속에 계속 묶이게 하는 그것은 악마는 묵시의 세계에 있어서 악마는 묵시를 뭐로 바꿉니까? 역사로 바꿔놓고 역사에서 못 벗어난 채 묵시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이게 다니엘 70이레 논문 보셨습니까? 그 논문을 이해하려면 역사에서 나온 묵시와 묵시에서 나온 묵시가 다르다는 그 점을 알고 있어야 돼요. 그거 모르면 이미, 아직 가지고 계속 우려먹을 수 있어요. 내가 지적한 것은 역사적 사고방식 갖고 있는 묵시가 있는데 그건 가짜 묵시다. 그건 옛날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구름 타고 오실 것이다. 기다리면 뭐 합니까? 이미 왔는데, 구름 타고 오실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꾸려면 느부갓네살이 바뀌어야 됩니까? 다니엘이 바뀌어야 됩니까? 다니엘부터 바뀌어야 돼요. 다니엘부터 감 잡아야 돼요. 내가 있는 포지션이 보통 포지션이 아니라는 사실. 포지션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은 유일신이다. 하나 밖에 없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우리나라의 신을 섬기지 마라가 아니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다른 신과 나, 나만 섬겨야 돼요. 그래서 지지지직~ 해서 뭐가 나오죠. 오 용익 목사님은 지지지직을 zzzzzzzzz 나와서 오른 편에 주님이 등장합니다. 주님이 등장하게 되면 주님이 등장했다는 것은 사람 눈에 안 보이죠. 유일신인데, 신이 둘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렇게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 신은 무슨 신이다? 유일 신이니까 여기서 하나님만 잘 섬기면 되지, 여기서 튀어나온 신을 또 섬길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다윗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때문에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고 목욕하는 여인을 내가 겁탈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주께서 다윗 언약으로 지지지직~ 해서 요 부분이 사과라면 사과껍질이 어디에 주어집니까? 다윗의 행위를 사과껍질로 연결시켜 버립니다. 연결시켜 버리면 누가 죽었습니까? 다윗과 밧세바에서 태어난 애가 죽죠. 죽고 난 뒤에 다윗은 눈물을 쓱쓱 닦고 그 다음부터는 애통하지 않죠. 그 뒤 태어난 여디디아, 누가 태어납니까? 솔로몬이 태어나죠.
다윗은 뭘 알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이 한분인 것을 알았는데 그래서 나는 그 하나님을 철떡 같이 믿고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그 지지지직~ 튀어나온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자기 역사적인 사건 속에 자기를 집어넣어요. 묵시적인 사건화 돼 버린 다윗의 인생이 되고 말아요. 다윗의 인생 자체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죽었다가 솔로몬 되는 이러한 사건 속에서 내가 여태까지 알았던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이 앞장 세워서 일한다는 사실을 다윗은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한테 있어야 돼요.
‘하나님, 이 말씀 지키면 되죠?’ 이랬던 우리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갖고 논다는 것, 내 안에 십자가 사건을 묵시적 사건을 일으키면서 나를 거기다가 십자가에다 푹 집어넣어서 삶듯이 우리 자체가 푹 삶기게 하는 겁니다. ‘아! 내가 죽어도 마땅한데, 돌에 맞아 죽어도 마땅한데 내가 이렇게 살았네, 살았네. 누구 때문에? 우리 주님 때문에.’ 새로운 하나님, 새로운 예수라는 주 예수라는 새로운 주님을 우리로 하여금 증거 하게 만들어요. 하나님, 하나님이 아니구나, 이게, 이게 아니야, 십자가야, 십자가! 이렇게 바뀌게 되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꿀 때 다니엘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 같은 경우에 꿈 해몽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감옥에 있을 때 요셉은 절망입니다. 그 절망, 그 절망이 바로 역사에서 묵시, 묵시에서 역사로 넘어 갈 때 저쪽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절망의 다리를 건어가야 돼요. 십자가로 된 좁은 길 아니면 영생은 없습니다. 그 절망으로 갈 때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절망을 해야 돼요. 완전히 노예에서 자기 힘으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모세가 애국자 안중근처럼 해서 쫓겨나간 하지만 안 돼요, 안 돼, 안 되는 거예요.
절망을 경험케 함으로 말미암아 너는 묵시적 존재에 속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과껍질로 이 세상에서 다루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게 있어요. 우리가 묵시적 사건으로 다루어지면 그때부터 우리의 몸 때문에 그 묵시가 뭐로 변하느냐 하면 묵시가 사과껍질이 아니고 우리자신이 사과로 변하는 수가 생깁니다. ‘나는 묵시야, 묵시야, 나는 묵시 사람이야, 예수 안에 있어서.’ 이렇게 까불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제 내가 하는 뭐든지 선한 것이고 나는 주와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뭐든지 성령이 하는 일이야.’ 완전히 교주 다 돼 버리죠. 요거 묵시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졸지에 역사로 바뀐 겁니다. 그 일을 누가 했습니까? 다윗이 그렇게 했어요. 다윗이 왕 되고 나서 우리야 처단하고 자기는 하나님 믿으니까, 율법 다 아니까, 자기는 왕이니까 자기는 묵시적 존재니까 뭐 걸릴 게 없죠. 막 계시 받고, 시편 보세요. 전부 다 계시 받고 한 예언 아닙니까? 인구 조사도 하고, 그런 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거예요. 원수가 되는 그 모습 자체가 이미 다윗은 묵시적 존재에 포함이 돼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묵시적 사건 속에 이미 하나의 연극배우로 포함이 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보면 돼요. 묵시를 역사화 시켜서 내가 소지할 수가 없다는 걸 명심해야 돼요. 어제 은혜 받았습니까? 그 은혜 오늘까지 안 들어갑니다. 유효하지 않아요. 늘 우리는 새로운 절망과 그 절망 속에서 비취는 주님의 새로운 구원의 손길을 손잡아야 되는 겁니다. 늘 우리가 잡는 게 아니고 주께서 먼저 잡게 하시죠.
다니엘에서의 느부갓네살의 꿈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서 절망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돼요. 뭐냐 하면 ‘다니엘아, 니 똑똑하지? 어제 내가 꿈 꾼 것 니가 기억나도록 해봐라.’ 이건 도저히 못 합니다. 거기서 못함, 나는 도저히 안 됨, 그러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역사적으로원인이 되어서 어떤 결과를 낳겠다는 그 논리 자체가 주님의 묵시 앞에서는 안 통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헌금하면 복주겠죠? 이거 안 통하거든요. 십일조하면 복 주겠지, 이거 안 통합니다. 왜, 이렇게 되면 내가 묵시를 역사로 내가 소지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안 돼요. 주님을 우리가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참기름 발라놨어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요.
마리아 마르다가 예수님을 잘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 편이었습니까? 거기다 예수님은 누굴 칭찬했습니까? 마리아보고 칭찬했죠. 마리아보고 단독적으로 칭찬한 게 아니고 마르다와 비교해서 칭찬했죠. ‘마르다야, 니는 음식 준비한다고 그렇게 분주한데.’ 마리아는 주님 앞에 턱 받치고 요렇게 앉아 말씀 들었다고요. 얼마나 밉상스러웠겠어요? 그걸 네 가지, 또는 싸가지라고 해요.
자, 칭찬을 했을 때 마리아보고 칭찬했지, 마리아 자체를 두고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마르다는 뭘 느꼈습니까? 마리아 앞에서 절망을 느끼는 거예요. 자기 딴아 열심히 준비하는데 이건 싸가지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이건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나온 모든 결과는 이건 역사일 뿐이지, 뭐는 아니다? ‘묵시는 아니다’는 겁니다.
그냥 묵시가 오게 되면 나는 원인을 내가 세울 수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절망에 빠집니다. ‘내가 어제 꿈 꾼 거 알아내봐.’ 자, 그럴 때 명령이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원인이 돼서 찾아낼 게 있어야지, 내가 그 사람하고 같이 동침해도 안 돼, 뇌파를 집어넣어도 병이나 알 수 있지, 꿈으로 해몽은 안 되잖아요. 블랙박스도 아니고, 안 되잖아요. 꿈 블랙박스 있으면 우리는 틀기가 곤란합니다. 대충 아침에 꿈 편직해서나 기억나지, 꿈 다 꾼 거 다 그대로 노출되면 낯 들고 못 살걸요. 우리는 항상 기억을 편집하게 돼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지금 다니엘의 서론 부분이니까 계속 다니엘 선지자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다니엘은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아닌 거예요. 우리 같으면 절망이죠. 그런데 그 절망을 다니엘은 뭐냐, 그걸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뭐냐 하면 나한테 절망을 주었다는 말은 주님이 원인이 돼서, 묵시적 세계의 내가 결과물로 이미 가입돼 있다는 것, 포함이 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니가 못해, 내가 해.’라는 그 업무에 그 작업에 우리가 이미 하나의 재료로 삽입이 되었다는 이 기쁨, 그게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예수님이 12제자와 다니면서 하는 일이 그 일이였거든요. 제자들은 그걸 이해를 못했어요. 물 위를 걷기도 하고 오병이어도 하고,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원인을 ‘내가 뭘 했어? 내가 뭘 해서 이런 복을 받았지?’ 자꾸 역사적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기적 일으켰다는 소문 듣고 하는 말이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면 당신을 메시아로 믿겠다.’고 나온 거예요. 그러면 기적을 우리가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기적이 되면 이게 뭡니까? 기적을 이미 우리는 우리가 원인이 되어서 안다는 뜻이거든요.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안 보여줘’ 하는 게 아니고 요나의 기적, 절망입니다. 죽음이죠. 니가 죽는다는 것이 그게 바로 기적이다. ‘니는 안 죽고 싶지? 내가 죽여줄게.’ 이게 기적인 거예요. ‘나는 안 죽고 싶어요.’ 이게 원인이 되어서 더 살고 싶다. 이건 역사적 우리 인생관입니다. 그런데 그걸 종합해서 주께 포함된 사람은 그게 허용이 돼요? 허용이 안 돼요? 허용이 안 됩니다. 우리는 살고 싶어도 죽어야 되고, 놀라운 사실은 죽고 싶어도 계속 살려내고 있어요. 계속 살아야 돼요.
제가 주일 날 설교했습니까?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왜, 살려내는 그 순간부터 내 것은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니, 마 마 마 마 니 죽었어. 죽었는데 살았어. 더 이상 니 꺼라고 하지 마 마 마 마 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깁니까? 차라리 구원 받기 위해서 무슨 짓 할 때가 더 그리워지죠. 요거 봉사하면 복 받으려고 하고 하던 것이 더 그리워져요. 이제는 그때가 좋았지, 그게 없어져 버려요. 이제는 무조건 살았어. 무조건이야, 무조건 살았어, 무조건. 무조건 살았으니까 앞으로 인생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건 주님이 원인이 된 것이기 때문에 감당이 안 돼요.
그러니까 어제 나 같으면, 어제 ‘나’가 오늘 ‘나’가 아니라 어제 ‘나’ 따로 있고 오늘의 ‘나’가 따로 있으니까 ‘우리 형은 의사이다.’ 가 아니고 우리 형과 ~다? 의사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제 나도 나고, 오늘의 나도 나고 내일이 되면 낼 죽을지 모르지만 내일되면 나고, 영어로 and, and, 뭐 그리고 뭐 그리고 뭐 그리고, 묵시적 논리입니다.
역사적 논리는 뭐라고요? 뭐는 뭣이다. 뭣이 원인이 되어서 이런 경우가 나온다. 묵시적 원인은 역사 속에 없습니다. 그냥 사과껍질만, 만들어진 사과껍질만 열쇠고리처럼 이어지고, 이어지고 할 뿐 이예요. 그래서 다니엘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하자.’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안 되거든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 70년이란 포로기간, 이렇게 보게 되면 70년이란 포로기간을 정해 준 것도 주께서 묵시를 보여주기 위한 적합한 기간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죠. 70년이라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완성의 기간입니다. 결국 70년이 나중에 70이레로 바뀌면서 이게 셋으로 쪼개집니다. 7+62+1로 분해되면서 이 7과 62가 1이레에 여기에 쏠리는 방식으로 됩니다. 1이레!
1이레, 이거는 다니엘 9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계시를 받을 때, 물어봅시다. ①번, 다니엘이 70이레 계시 받을 때가 좋았다. ②번, 사자 굴에 나왔을 때 좋았다. ③번, 느부갓네살이 꿈 꾼 것을 자기도 모를 때 내가 알아맞힐 때 좋았다. 몇 번 입니까?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좋았습니까? 정답 말씀드릴게요. 모두 다 나로 하여금 절망케 했습니다. 다니엘로 하여금. 더 이상 나는 이미 살려낸 몸이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좋다, 기쁘다,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그런 아쉬움? 내 인생 내가 관리할 수 없다는 아쉬움 같은 것. 아! 주께서 무섭게 다루시는구나.
그러면서 다니엘에게 인자야, 장차 1이레를 이루시려고 오실 분, 1이레를 이룬다는 말은 70이레를 이룬다는 말이고, 70이레를 이룬다는 말은 70년의 의미를 70년 동안 포로 잡혀야 되는 70년의 의미를 비로소 완성이란 이름으로 알려 줄 그분을 안다는 게 됩니다. 결국은 그분 있으매 내가 있는 것. 그분을 위하여, 그분 때문에, 그분을 주님이라고 높이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그러한 논리에 귀결됩니다. 그 다니엘이라 하는 것은 역사에서 묵시로 비행기가 이륙하듯이 이륙하는 그 논리적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책, 그거 다니엘입니다.
어떻게 역사적 땅에서 묵시적 약속의 땅으로 이게 도약이 가능한가, 그건 짐승이 등장하고 그 짐승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그 짐승을 극복하고 거기서 이겨낸 그 인자의 왕국이 등장함으로써 역사에서 묵시로의 도약이 가능한 겁니다. 고걸 풀이하면 묵시에 있는 분이 역사적 인물로 길로 늘어뜨렸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묵시적 세계에 있던 그분이 발을 길게 이 땅에 발을 놓은 거예요.
요것을 누가 보여주느냐 하면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이 보여줬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이 원래 느부갓네살이 바벨론 시대에 필요한 금신상이죠. 머리는 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철과 진흙이고, 이런 식으로 돼 있죠. 그것을 하나님께서 눕혀 버립니다. 하늘까지 높아지겠다는 금 신상을 눕혀버리니까 역사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역사에서 역사로 계속 이어질 뿐인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하늘나라가 이 역사 속에 개입을 하는 겁니다. 말을 해도 어렵다.
땅과 하늘 사이를 꽉 차게 잇게 만든 금 신상을 발로 차서 엎어져 버리면 자빠지죠. 자빠지면 이것이 하늘은 역사 끝에 있게 돼요. 이렇게 개입하시는 이분이 진정한 하늘이다. 우상을 발로 차고 우상 끝이 역사 끝으로 조성하기 위해서 개입하신 그분이 바로 하늘인데 그것을 숫자로 이야기하면 바로 70이레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70이레 나온 근거는 포로 벌 받는 기간이 몇 년? 70년이고, ‘유다야 니 손들고 있어.’ 이 말입니다. 니는 손들고 벌 받고 있으면 나머지 모든 해결은 누가 한다? 니한테 손들게 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70이레 만에 모든 것을 손 털게 완성하시고 완료 하겠다 그런 이야기를 다니엘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말한 끝을 알려면 우리가 하늘나라로 계속 세상 전체가 높은 저 하늘나라를 쳐다보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으로 하늘나라로 나아가겠다는 그러한 분위기가 우~ 우~ 자꾸 일어나야 되죠.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나를 하늘로 올려 보내겠다는 그 운동, movement, 그 운동, 종교죠. 기독교라든지 이런 거. 그런 종교 운동을 한껏 많이 확산시켜야 됩니다. 그게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 먼저 가죠? 자, 근거 대 보세요.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 먼저 간다는 것,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예수님이 ‘너희들 유대인 바리새인들보다 세리나 창기가 먼저 하늘나라 가고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기도하고 죄인은 손들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 감히 하늘도 쳐다보지 못할 때 ’니가 바로 의인이다.‘고 평 받았잖아요. 그렇게 되는 근거가 하나밖에 없어요. 묵시적으로 오신 그분이 ’죄 없다.‘하면 그 순간 죄 없는 거예요.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자 보고 ’나는 니 죄를 묻지 않겠다.‘하면 누가 와도 그 여자 죄 물으면 안 돼요. ’얼레리 꼴레리, 간통하는 거 봤다.’ 이러면 안 돼요.
결혼해서 아가씨가 라면도 제대로 못 끓이고 퍼지게 만들었다. 연애할 때는 라면을 사먹고 다녔으니까 그걸 몰랐죠. 한번 끓여보라고 하니까 안 끓여진다. 사랑과 전쟁 나와서 재판을 해서 이혼을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런 문제 생기죠.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왜 그 여자한테 라면 잘 끓이면 내 아내답다는 그 원인을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나는 여자는 라면을 잘 끓여야 한다.‘는 그 원인을 내 안에 내장돼 있었던 것을 그걸 아내한테 요구한 셈이 돼 버리죠. 그러면 만약 그러한 심정 심보 같으면 구원받는 것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제가 요렇게 행동하니까 저 예뻐서 구원하겠죠?‘라고 그 원인을 자기의 선한 행위로서 출발하겠죠? 이 자체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솔직히 딱 깨놓고 있어요. 있는데 그 자체가 죄라고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이걸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해야 복 받는다는 이것 자체가 죄라는 것, 그걸 인간의 힘으로 고백이 안 돼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잘해야 구원받는다는 이것 때문에 우리 주님 죽었습니다. 이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습관, 버릇, 평생 지니고 가야 될, 평생 나오고 또 나오고 할 수밖에 없는 이 역사적인 그것 때문에 묵시적 존재를 오해하고 묵시적 존재인 예수님을 오해해서 주님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면 문제 해결 다 된 셈이죠. 내가 누구냐? 내가 ‘나는 역사적 존재, 이러면 문제 해답이죠. 다른 말로 하면 ’니 누구야?‘ ’나는 내가 원인이 돼서 뭔가 결과를 항상 기대하는 그런 존재. 그래서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니엘은 바로 그것을 실생활로 하는 거예요.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그런 환경들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다니엘 3친구는 우상에 절하라 할 때 절 안했습니다. 자, 느부갓네살이 내가 우상보고 절하라 했는데 안 했으니까, 그때는 금신상이죠. 금신상보고 절 하느냐 안 하느냐 원인 결정을 니가 해라. 만약에 절을 하면 니는 살고, 절 안 하면 니는 죽는다. 여기 있는 우리 다 역사적 존재야, 나는 절해서 살았어. 니는 절 안했으니까 니는 죽어야 돼.‘ 다 같이 우리는 거기에 파묻혀 있고 거기서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다니엘 3친구는 뭡니까? ‘나는 아니요’ 하겠다는 말 이예요. ‘나는 당신들이 아는 그런 법칙에 난 동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그럼 죽는다.’ 하거든요.
요걸 한번 설명해 봅시다. 이게 본격적으로 다니엘 들어가는 실마리가 됩니다. ‘니가 금 신상에 절 안하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럼 이게 뭡니까? 죽음이죠. 다니엘 3친구가 죽게 된 원인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 약속 때문에 그렇죠? 지금 주님께서는 망태, 또는 잠자리 채를 뭐로 보느냐 하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잠자리채를 하나 준비해 놨습니다. 여기 걸리기만 해봐라, 해서 십자가 잠자리채에 걸리면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게 안 보이니까, 세상 포지션.
인간은 우리가 우리 되는 것이 아니고 포지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했죠. 세상 포지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고 사는 것은 누구 손에 달려있습니까? 절하면 살고 안 하면 죽으니까 죽고 사는 것은 누가 원인이 돼요? 내 하기 나름에 따라 죽느냐 사느냐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요 죽음(세상 포지션)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죽음은 뭐냐 하면 ‘내 말에 의해서 좀 죽어줘.‘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느부갓네살이 ’절 안하면 죽는다.‘라는 말을 느부갓네살이 한 게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누굴 부린 거예요? 말 타고 ’강남 스타일‘ 싸이가 춤추는 거 나오죠? 주께서는 누굴 부리는 거예요? 느부갓네살을 부려서 다니엘 3친구 찾아가게 해서 세상적인 역사적인 질문을 던져서 다니엘 3친구로 하여금 세상적인 죽음을 거쳐서 어디 죽음에? 진짜 구원받은 매미채에 걸려오도록 주께서 그렇게 다니엘 3친구에게 작용을 했습니다. 다니엘 3친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할 때 이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절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죽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가만있는데 지금 사무보고 있는데 괜히 절 안한다고 시비 걸었으니까 이건 어떻게 내가 손 쓸 수 있는 입장이 안 돼요. 구원은 원래 그런 식으로 구원받습니다.
내가 헌금해서 구원받으면 내가 손 쓸 수가 있어요. 하나님 보이시죠? 인증 샷 찍어서 할 수 있는데 우리의 구원은 내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버려요. 그래서 모든 공로는 ‘주께서 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죠.
그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죠. 니가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구원받은 사람이 뭐라 합니까?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게 겸손 이예요? 겸손 아니에요? 겸손 아니에요. ‘내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언제 내가 옥을 돌아보았습니까?’ ‘이 소자에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 아, 그때 그 애 하나. ‘아닙니다. 그거 아니거든요.’ 몰라요. 주께서 영생 주기로 한 사람은 주께서 버리지 않고 늘 곁에서 천사를 보내든지 성령을 보내서 늘 이런 사태를 일으킵니다. 일으켜서 내가 원인이 안 된 이상한 것이 우리 속에서 발산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십니다. ‘내가 이런 놈이 아닌데, 나는 뭐든지 굽실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때는 절하기 싫던데.’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내 능력 밖에서 내가 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 일들이 사과를 깎아놓은 사과 껍질에 해당되는 겁니다. 묵시적인 껍데기가 우리에게 해당되는 역사가 되는 거죠. 그 역사는 우리에게 나온 원인이 아닙니다. 주께서 원인이 되는 겁니다. 이거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족들하고 다니엘 같은 사람들이 몇 몇 수천 명이 포로 잡혀 갔죠.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대부분의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주 가난한 사람은 과수하라고 남겨두고 중간 되는 사람들, 군사들은 죽었죠. 결국 포로 잡혀 왔다는 것은 죽음을 대체한 거죠. 죽음을 대체한 거죠. 이미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70년 포로 기간 동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야 될 것은 진작 ‘우리는 이미 죽어 있는 존재다.’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되는 겁니다. 이제 문제는 그거예요. 왜 죽이시는가, 무엇 때문에 죽이시는가, 그거만 알면 돼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신 거 여러분 아시죠? 우리가 남아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왜 죽으셨는가, 도대체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 죽으셨는가, 그거 아시면 되는 겁니다.
그거 우리 힘으로 모릅니다. 왜 우리는 만날 역사적 존재기 때문에. 주께서 묵시적인 사태를 만들어 주게 되면 ‘아! 이런 것 때문에 우리 살리기 위해서 죽으셨구나.’하는 것을 깨달아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막같이 약한 막, 세상도 알고 영적 세계도 알고 간들간들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태가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보는지 상관없이 주님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저희들이 알고 싶습니다. 다니엘을 시작하셨사오니 다니엘을 통하여 고막같이 얇은 막이지만 우렁찬 주님의 음성이 나오고 우렁찬 악마의 음성도 같이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교회-다니엘1장(다니엘의 시작)120809-1강b-이 근호 목사.hwp (128.0K), Down: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