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20726b-마12장25(성령과 악령)30강-이 근호 목사
대전120726b-마12장25(성령과 악령)30강-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35)
대전120726b-마12장25(성령과 악령)30강-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마태복음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여기에 귀신 이야기 나와요. 마태복음 12장 22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보고 욕을 하지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은 바알세불이다.’ 바알세불이라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니가 귀신의 오야 봉, 마귀다 이 말이죠. 귀신을 부리는 자다. 오야 봉이다. 이 말은 귀신 나라가 있는데 니가 거기서 오야 봉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이 본문 볼 때에 예수님 입장에 서지 마시고 이렇게 욕하는 바리새인들 입장이 돼서 그들 입장을 이해하면서 이 분문을 한번 봅시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습니다. 특히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사울이 어떻게 율법에 열심이었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다 아시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지금 하나님께서 구원하게 된 이 장치를 나는 그대로 인정하는 거예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성전이 있고 말씀이 있고 십계명이 있고 율법이 있다는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자는 거예요. 바리새인 입장에서. 그러면 이 율법에 의하면 말씀에 의하면 뭐가 있느냐 하면, 사단이 있고 악마가 있고 귀신이 있겠죠.
그렇다면 이미 율법에 의해서 성전에 의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의 거룩한 백성으로 이미 굳혀져 있는데 결국 어떤 외부인이 와서 ‘너 율법 잘못 되었어. 성전이 성전도 아니야, 구원 못 받아.’ 라고 공격한다면 바리새인 입장에서 ‘아하, 우리 하나님 말씀에 나오는 사탄이 바로 우리를 공격하는 니가 바로 사탄 맞구나.’라고 그들은 분명히 모든 사실이 분명하게 떨어져 느껴졌다고 느낄 거다 말이죠. ‘아, 사탄이 그렇게 보고 싶은데 오, 사탄이 여기 있구만.’ 왜, 우리 개인을 공격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소속돼 있는 이 율법으로 만든 체제 시스템, 이 시스템 자체를 흔들흔들 거릴 것 같으면 그건 우리가 궁금했던 그렇게 성경에서 이야기했던 사탄, 사탄이란 말이 욥기에도 나오고 그래요. 사탄이라 하는 게 이렇게 실제로 등장할 줄이야, 참 적어도 사실은 깨닫게 된 거죠.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교회가 온 교인이 기도해서 땅 샀는데 주의 은혜로 땅 값이 올라서 교육관을 잘 지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여러분, 교회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비로소 교인들은 그렇게 보고 싶은 사탄을 보게 된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가 이 교육관 지을 때 그냥 아무렇게나 돈 던졌으면 ‘가만있자, 누구 말이 맞지?’ 하고 의심을 하겠는데 자기가 그때 목사가 시켜서 빡세게 금요철야해서 작심을 해서 그것도 성령께 ‘성령이여, 50만원? 아니면 100만원 낼까요?’ 자기가 열심히 응답 받아서 낸 돈 가지고 축복, 축복, 30배, 60배, 100배를 받아서 교육관을 잘 지어 놨다 말이죠. 잘 지어놨는데 그때부터 느끼는 건 뭐냐 하면 ‘내가 주의 축복으로 했기 때문에 이 축복을 건드리면 저주 받는 쪽이다.’ 라는 게 분명해지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돈 내어서 진 예배당, 내가 열심히 기도해서 새벽제단(요새 제단이 있습니까마는)을 쌓아서 했던 그거. 요번에 수련회 때 하겠습니다만 ‘제사’라는 게 없습니다. 신약엔 제사가 없거든요. 그런데 ‘미사’란 말이 뭔 뜻인지 알아요? 그게 제사란 뜻입니다. 이게 5세기경에 보면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구약으로 돌아가요. 천주교회가. 왜 구약으로 돌아가느냐 하면 구약이 돼야 안 믿는 사람을 교회로 잡아당길 수 있는 접촉점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으로 돌아가면 예배가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제사가 돼요. 제사가 되려면 거기 제사에 종사하는 주 멤버들이 구약에 있는 제사장 복장을 갖출 때 무지몽매한 민중들은 살아있는 구약 성경을 덤으로 보게 되는 그런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림을 그려놔요. 그걸 아이콘, 이콘이라 해요.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에 효과가 있어요. 귀신 쫓아내는 효과, 성령 받는 효과, 그래서 그림에다 뽀뽀를 하고 그림을 숭배하는 겁니다. 그게 성화 숭배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그걸 숭배하느냐 하면 그림 그릴 때 빡세게 기도해서 그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글자를 몰랐던 민중들은 골치 아프게 성경말씀을 안 봐도 뭘 볼 수 있느냐, 그림으로 보고서 합격점을 받는 거니까 이거 얼마나 수월합니까?
그 예배 참석했다. 미사 참석했다. 그림 봤다. 난 감동 받았다. 그걸 보고 우리 신부님께서 정교회에서는 신부라 해요. 신부님께서 ‘당신 구원받았다.’고 확증해주니 이건 정기적으로 잠시 지 몸만 얼굴만 보이면 되는 거예요. 이 성경 말씀 배울 리도 없고 알 필요도 없어요. 알려줄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것은 쇼, 이벤트라고 해요. 연극을 만들어요. 입장료 내고 참석하면 구원받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할 때, 마음은 우상 섬기면서 겉으로는 여호와 섬긴다고 할 그때 이사야에 나왔던 예언 중에 나와요. ‘너희들이 월삭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백날 해도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 제발 좀 그러지 마. 니가 손을 들고 기도해? 니 기도의 손에 피가 묻어있는데, 기도한들 나에게 기도 응답 받겠느냐, 니가 제물을 드린다고 받겠느냐, 만만의 기름과 천천의 수양, 이건 미가 나오는 이야기고 아모스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렇게 백날 드려봐라 그걸 받겠느냐, 내가 원하는 것은 딴 게 아니야, 니 나 사랑하느냐, 하나님께서 진짜 어려운 걸 이야기해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뭐라고 합니까?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게 전두환한테도 해당되고 노태우한테도 해당된다고요. 안철수, 박 근혜, 다 해당돼요. 지금 대선 주자들 대통령되려는 걱정보다도 그걸 해야 돼요. 뭐냐,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그걸 걱정해야 된다고요. 오늘 밤에 멕시코하고 축구 하는데 그걸 걱정하면 안 되고, 벌써 그것부터 기도하고 난리 났어요. 그게 아니고 내가 누굴 사랑하느냐, 그걸 정리해야 된다고요. 그걸.
교회가 예수님을 대체할 순 없습니다. 왜, 교회는 내 노동이 들어가 있거든요. 내 헌금이 들어가 있고. 자기가 예뻐하는 사람을 지가 사랑하는 거 그런 식으로 사랑하지 말라 했어요. 성경에 보면. 니가 자연스럽게 대접 받는 거, 하늘나라 상이 없다 했어요. 니가 대접할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대접해 버리면 하늘나라 상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 바로 우리가 진짜 꼴도 보기 싫은 모습으로 오셨다 이 말입니다. 세리와 창기와 강도나 주님 섬겼지, 누가 섬겼습니까? 제자들도 이용할 뿐이고.
바리새인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마귀대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예요. 사람들로부터 가장 먼~ 쪽에, 아무리 계산해 봐도 ‘메시아 일체 아니야. 절대로 메시아 아니야’ 라는 존재 아닌 그쪽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그런 모습으로 보내는 겁니다.
어떻게 보내느냐, 로마서 8장에 보면 내어버린 자, 버린 자. 누구한테? 사람들에게 내어 버림 받아야 될 존재로서의 모습으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그 누구도 자기 공로로 예수를 못 믿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아버리면 예수님의 독자적인 공로가 날라 가 버리고 그렇게 되면 천국이 아예 지옥 돼 버립니다. 천국은 모든 면류관도 예수님께만 드리게 돼 있어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만 집결되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천국 가려면 내 공로라 하는 것은 날마다 육포 만들듯이 그때그때마다 부서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하는 겁니다.
사람이 뭔가 잘 되면 항상 사람이 본의 아니게 교만하게 돼 있습니다. 잘 되면. 사람이 아무 대책이 없고 절망 가운데서는 주님을 바라보지만 뭔가 숨통이 트이면 그때부터는 좋은 것으로 시선이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러니 이게 성령의 관리 없으면 우리는 구원 못 받습니다. 성령께서 관리해서 우리로 하여금 육포 만들어서 이것도 교만, 저것도 교만, 교만 덩어리인 것을 고백해줘야 비로소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너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바리새인이 이런 이야기할 때 그 취지가 뭐냐 하면 우리가 쫓아내지 못하는 귀신을 네가 쫓아내는 걸 봐서 ’아, 한 통속이구나. 야, 우리 편, 우리 편, 철수해, 철수해.‘ 말 잘 듣는 걸 보니까 같은 패기 때문에 저렇게 말을 잘 듣는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단정을 짓는 이유는 귀신 쫓아내는 걸 보면 뭔가 대단한 사람 같은데, 율법에 대해서 보면 완전히 자기들 해석하고 다르니까 일단 나쁜 사람이고 나쁜 존재인데 귀신 쫓아내니까, 아, 귀신과 그 나쁘다와 연결시키게 되면, ’아, 귀신대장 맞네.’ 딱 나왔어, 결론 귀신대장! 이렇게 정리한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반박하는가 보세요.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상당히 이 말씀이 현대 입장에서는 굉장히 난해하게 들리지요? 그 거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개인주의 사고방식입니다. 요것부터 여러분들이 먼저 아셔야 됩니다. 개인주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내가 뭐하면 구원받지?’ 요 구원도 개인주의 구원 이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당시, 예수님 당시의 구원은 개인구원이 없습니다. 단체로 구원받습니다. ‘우리 단체가 근사하지? 우리 단체가 정상이지? 이러면 그 단체 소속 회원들은 단체가 구원받기 때문에 거기에 소속되어서 저절로 구원이 확정되는 겁니다. 고 점을 먼저 염두에 둬야 돼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항상 염두 해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항상 이스라엘 단체에서 나쁜 악마가 끼어들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되죠. 노력을 하게 되면 개개인이 각개전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러면 개인구원밖에 안 되니까. ‘좋겠네, 니는 구원받고 그럼 우리는 구원 못 받고. 그게 무슨 집단 구원이냐?’ 성경에는 집단구원으로 돼 있거든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아들이니까. 아들들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아들 이예요. 이스라엘이 단체로 구원받아야지,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 안 받고 돼 버리면 언약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할례 행하고 안식일 지키면 구원받는다. 에스겔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할례 행하고 안식일 지키려면 거기에 누군가 집행관이 있어야 되겠죠? 지가 정지(부엌)칼 들고 할례 행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성전 섬길 때 쥐나 개나 다 성전에 올라가서 불 피고 하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성전을 인정한다는 것은 뭐를 인정한다? 성전에 종사하는 자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해 주고 할례 하고 유월절 지키는 거기 소속돼 있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합법화 되어야 돼요. 하나님 보시기에도 합법화되고 그 사람을 건드린다는 것은 곧 누굴 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자체를 건드리는 것으로 이미 체제가 잡혀있어야 돼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반대 입장을 들고 있다 말이죠.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확고한 합법적인 체제에 정당한 체제에 그리스도가 반대 의견을 가지고 들고 나왔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싶었던 사탄의 나라가 ‘아, 딱 저거네, 저거. 예수집단이 사탄의 나라.’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 체제가 무슨 체제지요? 바로 율법 체제지요. 율법 체제에서 어떻게 사탄과 귀신이 설칠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문제를 자기 내부에 사탄이 들었다는 문제를 찾아야지, 니는 예수 나보고 사탄이라고 쫓아낼 생각만 하지 말고 우리 체제가 뭐가 문제이기에 어떻게 우리 체제 내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사탄을 쫓아내는 행사가 그 게 왜 필요 하느냐 이 말이지요.
율법으로 뭐든지 완벽하면 사탄이 끼어들 여지도 없어야 되는데, 그 이유는 뭐냐,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생각을 너희들이 한번 해 봐라 이 말입니다. 사탄이 지배했을 경우에는 귀신이 활개치고 설치고 거기에 대해서 율법이 대책이 없이 돼 버려요.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29절 봅시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요래야 이게 단체고 요래야 제대로 된 집단이라는 겁니다.
제가 말을 쉽게 해볼게요. 단체라 하는 것은 어른이 있어야 되고 어른이 있으면 그 밑에 졸개는 ‘꼼짝 마라’가 돼야 그게 안정된 제대로 된 구원의 단체라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내 말을 안 듣는 게 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온전하다? 온전하지 않다? 문제가 많은 거예요. 바로 너희들이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이 예수 내가 쫓아냈다는 말은 결국은 귀신은 누구 말을 듣는다는 말입니까? 귀신 체제, 율법 체제, 성전체제 말을 듣는 게 아니고 누구말을 듣는다? 예수님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너희들이 결국 귀신을 못 쫓아냈다는 말은 결국 뭡니까? 우리가 아무리 말해도 ‘흥, 웃기네.’ 하고 더욱 큰 위세를 떨고 있는 어떤 마귀집단이 너희들 세계를 이미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주께서는 강한 자라고 하는 거예요. 강한 자 속에 너희들은 꼼짝 마라, 에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뭘 감당 못했다? 예수님이 쫓아낸 귀신을 감당 못했다 말이지요. 너희들이 감당 못한 것을 내가 감당하니까 너는 뭐라 하느냐 하면‘에이, 귀신이니까 귀신대장 쫓아냈지.’ 이런 식으로 해서 소극적으로 자기 집단을 따로 챙기려 하는데 탁 깨놓고 이야기해서 지금 귀신이 설치고 있다는 자체만 해도 너희들의 나라가 지금 하자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쪽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면 니 나라 예수 니 나라는 괜찮나?’ 그럴 거 아닙니까?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강한 자를 결박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그 속에 속해 있는 세간들을 빼내 간다는 말은 내가 어떤 사람을 구원한다는 말은 이미 너희들이 감당 못한 세알세블 강자가 이 예수 나한테는 꼼짝 마라, 그런 수준에 있다 이 말입니다.
여기에 개인 구원은 있을 수가 없어요. 개인구원으로 봐 버리면 ‘아이고, 나 저 나라 말고 예수나 믿을래.’이리 되는데 그게 아니고 지금도 개인 구원은 없어요. 지금도 개인 구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구원받지, 개인적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자기 몸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발톱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구원 받고 난 다음에는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 식으로 오해를 얼마나 받습니까? 이 근호목사는 예수 믿고 지 맘대로 살라고 했다고. 그게 그들이 자꾸 안 믿으면서 믿는다 하니까 맘대로 살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로 믿는 사람 같으면 맘대로 살고 말고 간에 이미 주님 앞에 붙잡힌 삶이 되어 가지고 주님 마음대로지요. 주님 마음대로.
내 마음이 아니고 주님 마음대로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중국집에 가서 고민이 그거잖아요. 짬뽕 먹을까? 짜장 먹을까? 분명히 짬뽕 먹겠다고 결심해가지고 막상 옆 테이블에 짜장면 있으면 짜장면 먹고 싶고, 짬뽕 먹을까? 짜장 먹을까? 기도해 보세요. 주여, 짬뽕이 좋습니까? 짜장이 좋습니까? 짬짜가 좋습니까? 일단 뭘 먹게 되면 범사에 감사예요. 어떤 선택을 해도 그건 주님이 주신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어디를 갈까요? 법대를 갈까요? 공부를 잘해야 법대도 가겠지만, 어디를 갈까요? 법대를 갈까요? 법대를 하다가 어디를 갈까요? 의대생이라 공부해서 의사가 될까요? 온갖 것을 해도 무슨 수를 해도, ‘오늘밤 니 영혼 데려 갈 거야.’ 모든 것도 나가리 돼요. 나가리. 화투에서 나가리라 하죠. 나가리 되어 버려요. 파토 나 버려요. 그걸 전쟁이라 해요. 전쟁이 있을 때는 내게 개인적인 군사는 없습니다. 군대에 소속된 나의 전쟁이 아니고 주님의 전쟁이에요. 군인이지, 나를 위한 나의 전쟁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지금도 집단구원이 유효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27절에 보면,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에서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이게 뭐냐 하면 귀신을 쫓아낸다는 그런 활동이 유대인한테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진짜 귀신을 쫓아낸 유대인이 있다면 그들이 너희들한테 최고 왕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 이 말이지요. 귀신을 쫓아내지도 못하면서 쫓아낸 사람을 탓하지 말라, 뭐라 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영적 전쟁에서는 누굽니까? 지가 도 닦고 많이 똑똑한 게 고수가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는 분이 귀신을 이긴다 했지요. 그렇다면 그 분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 예수님밖에 없다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밀어버려요. 마태복음 12장 30절 봅시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렇게 해서 집단이 있지요. 집단을 우선화해야 하는데 집단은 개인이 아닙니다. 어떤 누구하나 감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제사장들, 백성 하나, 하나가 감정이 있는 게 아니고 여기서 하나의 우리만 유대인만 구원받는다는 집단의식 이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은 집단입니까? 개인입니까? 예수님은 개인인 거예요. 왜 개인인가 하면 바리새인은 뭐라 합니까? ‘야, 집단 속에 들어와! 우리 집단 속에 당신이 회원으로 가입 안하면 그 쪽은 개인이야. 이러는 거예요. 이 쪽(예수님)이 집단이 돼도 저 쪽(유대인) 집단에 소속이 안 되면 무조건 개인으로 취급 되는 겁니다. 우리 집단에 오지 않으면 개인 취급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 같으면 ‘야, 너희들 믿어서 구원 못 받아. 나를 믿어야 구원 받아.’ 라고 이야기해야 될 텐데, 중간에 어떤 과정을 집어넣습니다. 이러면 집대 대 개인이 되잖아요. 그건 주의 뜻이 아니거든요. 집단 되기 위해서 여기 하나 집어넣어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성령을 집어넣어요. 31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이리 되거든요.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현재 십자가 이전에 이 집단이 확고히 합니다. 이 유대교 이외에는 구원이 없어요. 그들은 율법대로 산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언약백성 말고는 구원이 없잖아요. 이 집단이 마지막 최후의 집단이고 유일한 집단인데 예수님은 여기에 반대를 해버렸다 말이지요. 그러면 이 집단에서 나와 버리면 개인의 주장으로 하나의 개인 사설, 이단이 돼 버려요. 나중에 보면 이 개인이 중심이 돼서 뭐가 됩니까? 나중에 집단이 되지요. 교회란 이름의 집단이 되잖아요. 그건 나중의 문제이고, 지금 이 시대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사람아! 바리새인들아! 내가 귀신을 쫓아낼 때 내 개인의 자격으로 귀신을 쫓아낸 게 아니고 성령의 이름으로 했으면 이 성령의 단체가 너희 집단단체를 대체하는 단체로서 등장했다는 것을 너희들은 눈치 못 채느냐? 이 말입니다.
너희들은 자꾸 내 개인적으로 귀신 쫓아냈다고 하는데, 여기 28절에 봅시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힘입어? 성령을 힘입지요. 그러면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누구 힘이 오지 않으면 못 쫓아낸다? 성령이 아니면 못 쫓아내는 거예요. 성령은 바리새인들도 유대인들도 알고 있었어요. 성령은 마지막 이스라엘이 완성할 때 오는 영을 성령이라 합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에스겔 때는 마지막에 성령이 비같이 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그 희망했던 최후에 완성된 집단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미리 와서 예수님이란 개인에게 임해서 성령이 귀신을 쫓아냈으면 이미 에스겔이 말하는 최후의 집단작업은 이미 개시, 시작이 이미 된 거예요. 그래서 시작단계에 있는 인자는 초라한 개인으로 보이겠지만, 마지막 때에 성령을 부인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어느 누구도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 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집단과 숨어있는 집단인 예수님과 현재 눈에 보이는 집단에 대결에서 성령이 어느 쪽의 편에 서서 현재 귀신 쫓아내는 일을 하느냐, 그걸로 판정되는 거예요. 상당히 난해하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기존의 교회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지금부터 해석해 보겠습니다. 교회 목사가 있습니다. 목사장은 기름을 부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는 성령 받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했다는 소식은 들리는데 눈에 보이질 않네. ㅎㅎ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주의 종, 기름 부은 주의 종, 주의 사자를 성령 부어서 강대상 앞에 여러분 앞에 세웠다는 말은 비록 예수님은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뭐라 뭐라 해도 주께서는 안보였다는 이유 때문에 봐주는데, 예수님이 안 보인다고 너희들이 뭐라 뭐라 하는데 오해 하지 마~~ 나, 성령 받은 목사는 보인다 말이지요.
성령 받은 목사가 방언까지 하네. 방언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아무나 하겠지만, 방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요. 방언을 하니까 너희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보낸 성령 받은 이 주의 종, 목사를 대적하면 앞으로 오는 세계에 영원토록 용서를 받지 못한다, 라는 식으로 해석하면서 자, 내가 이 강단에서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이 본문과 어긋난 게 있거든 이야기해봐! 이 아마츄어 교수야! 아마츄어 똑똑한 장로들아! 내가 비록 무식해서 너희들보다 박사 석사 안 돼도 이 본문 그대로 내가 주의 사자로서 이야기하는데 이 설명에서 뭔가 문제 있고 하자 있거든 반박해봐! 아무도 반박 못 하지요.
그래서 목사들이 이거 믿고 버티고 온 겁니다. 누구든지 주의 종을 대항하면 주의 종을 욕하면 벌 받는다, 초창기에는 그렇게 했지요. 그것도 진화해요. 진화해서 주의 종을 편안 하게 못 하면 저주 받는다고 발전하잖아요. 그 보다 더 발전하면 주의 종의 새 차 갖고 싶은데 새 차 안 사준다든지 주의 종이 사택을 증축하시는데 증축 안 한다든지, 주의 종의 옷을 안 챙겨 준다든지, 주의 종의 아들에게 유학비를 안 보내준다든지, 한우고기 안 사주면 오는 세대에 영원히 용서를 못 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만 이야기하면 교인들 화나잖아요. 반대로 또 이야기해요. 이 말 듣고 어떤 장로회에가서 그 목사에게 이만큼 잘했더니만 그 장로가 승진해가지고 복을 받아 아가 서울대에 합격했고 의사인 며느리를 봤고 갑자기 땅값 올라서 거부 돼 가지고 간증하고 돌아다닌다고 또 이런 이야기하지요. 교인들에게 자, 둘 중에 어디로 선택하렵니까? 복 받을 쪽을 선택하렵니까? 저주 받을 쪽을 선택하렵니까? 복 받을 쪽은 간단합니다. 여기 있는 이 목사를 무시하지 마시고 주의 종을 섬기면 다 나 좋아라 하는 게 아닙니다. 다, 여러분 복 받으라고 하는 짓인데, 다 여러분 좋아라 하는 짓인데 이 상한 심령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렇게 저렇게 오해를 하시는데...., 우리나라 목사들치고 돈 밝히지 않는 목사 거의 없습니다. 다들 저도 그런 목사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장사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교인들이 아무리해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신상을 사랑한다는 것을 악마가 알기 때문에 그런 목사를 강단에 세운 겁니다. 진리에 관심 없고 뭐가 나한테 이익이냐, 유리 하냐, 내 집안에 어떤 쪽이 잘 되는 쪽이냐, 그것이 주의 축복으로서 바꿔지게 하는 만반의 마음을 준비한 채 교회 오는 겁니다. 할 수 없지요.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가 아니면 십자가 복음을 모르게 돼 있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듣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 해석 확실하게 알았지요? 애매한 거 정 해 드렸습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나옵니다. 이 말은 성령이라 하거든 예수 십자가만 전방에 세우게 되지 십자가 빠진 성령이란 없습니다. 왜, 그 목사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성령 받았다고 우기는 그 목사도 주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도 십자가 앞에서 당연히 죄인이고 여러분도 죄인이니까 우리는 여러분 자신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 십자가만 바라봅시다. 이것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 한 사람 안 믿으면 저주 받는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도 그 사람이 몇 초 갈지 모르거든요. 그 사람이 다음 주에 가면 무슨 소리 할지 모르거든요. 사람을 믿으면 안 돼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항상 편하면 교만하고 다시 또 육포가 안 되고 다시 자기 똘똘한 자기 암석층이 생겨 가지고 ‘내가 이렇게 복음 아는데 나 안 알아주면 섭하지.’ 또 자기 부인이 안 돼. 하여튼 명태하고 여자는 패라고. 주께서는 사흘이 아니고 매일같이 우리를 팹니다.
여기서 32절에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 이게 뭐냐 하면 이거 하나 법칙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는 예수님마저도 성령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힘을 입지 않고서는 예수님은 아무 일도 못합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순종하고 부활 죽는 것도 성령께서 알아서 하고 기도하는 것도 성령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기적도 성령 안에서 했어요.
이것이 예수님 십자가 부활 승천되고 난 뒤에는 이게 역전돼요. 전에 성령자리가 예수님이 되고 예수님 자리가 성령이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전에 주셨던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아들에게 전달된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난 뒤에는 어디에 갔느냐, 하면 하나님 우편에 주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님의 역할을 해서 성령을 주셨던 그 자리를 예수님이 차지하고 난 뒤에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 성령 주실 때는 예수 믿으라고 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서 성령 주실 때도 예수님 자신이 다 이루었음을 믿으라고 주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 받은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오, 내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구원 받아 버렸네.’라는 사실을, 진리라 하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그 자체로 진리가 이미 종결된 거예요. 보태고 빼고 할 것도 없어요. 내가 어떻게 뒹굴고 살고 몸부림치고 살던 간에 이미 진리는 이미 진리로서 완성되고 종결 끝장났어요.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순간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기쁨과 감사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보면 십자가를 보다가 갑자기 자신을 보면 한심스럽지요. 다시 여기서 미비한 거 채우려 하고 모자란 거 반성하려하고 이렇게 하면 기쁘고 저렇게 하면 기쁘고, 믿음이 없이는 기쁨이 없거든요. 믿음이 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다 기쁜데, 우리는 내가 잘해서 기쁨을 드리려 하는 그런 시도를 하려고 자꾸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게 날씨도 더운데 몸에 땀만 뺄 뿐이에요.
마귀가 옆에서 또 장난질하지요. 더 열심히, 완벽하게 니 기도하지, 끓어 앉아, 끓어 앉아, 막 시킵니다. 두 손 모으고 그게 뭐야, 좀 더 모아, 모아, 기도할 때는 주기도문도 다시 하고, 주의 이름으로 할 때는 기도 방해 될 때는 주기도문 더 해야 되지, 이게 막 온다고요. 가만히 하다보면 설치다가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다 이루어졌는데. 주께서 시켜서 하는 기도 가지고 마귀가 들어오면 내가 만들어 놓은 기도로 어느새 전환되고 말아요. 주께서 하신 헌금을 가지고 어느 때보면 헌금을 하다보면 뺄까? 더할까? 복 받으려면 더 할까? 벌 받을까? 어느새 내 헌금으로 바뀌었어요. 마귀가 자꾸 장난질을 칩니다. 이거는 우리가 약간의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세상 적으로 봐도.
사랑하는 사이에 있어서 이빨에 고춧가루 끼어도 아름답게 보는 법이에요. 모든 게 아름답고 모든 게 용납될 만반의 준비가 다 돼 있어요. 저 여자를 만날 때 어떤 옷차림을 하든지, 어떻게 하던지 간에 그것은 아예 안중에 들지도 않아요. 그대 있음에 다만 왕~왕~ 신비로울 뿐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손도 대기 싫어요. 왜? 너무 경건스러워서. 가까이 하기에도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식으로 정말 사랑하는 사이 같으면 말도 함부로 안 되고 그냥 처분에 맡깁니다. 그래서 제가 서울의 강의할 때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처분에 모든 것을 나를 일임한다는 거예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랑이라 하는 것은 니는 이 만큼 했는데 나는 이 만큼 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흥정이고 난전에서 시장통에서 하는 것이고 사랑이란 상대방의 처분에 일임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상대방의 처분에 일임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조건이란, 스펙에 대해서 시비를 걸 자격이 있다? 없다? 없지요. 고춧가루 끼었느니, 키가 작다느니, 눈 쌍꺼풀을 했느니, 이런 것도 없어요. 그냥 있음에 존재함에 그대가 존재함에 내가 비존재 돼도 그대 있음으로 나는 만족해. 이게 사랑인데, 이런 사랑 한 번 해 보셨습니까? 그게 얼마 안 가요. 두뇌에 돌파민이 있어 가지고 3개월 가는지 몰라. 뿅 갈 때는 미쳤지요. 다 퍼주고 해도 얼마 안가요. 그게 세상적인 사랑이고.
제가 말하는 사랑은 저 분이 어떤 모습이냐, 내가 어떤 모습이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주님한테 얼마나 깨끗한가, 멋있는가 이것도 문제 안 되고, 주님이 나한테 주신 한 달 수입이 에게게 이것밖에 안되고 이것도 문제가 안 되고, 그냥 다 이루심에 저는 감격일 뿐입니다.
착한 일해도 구원, 안 해도 구원, 죄 지어도 구원, 교도소가도 구원, 어떤 일을 해도 다 이루심에 감격할 뿐인데, 갑자기 그 감격이 사라지면 내가 오늘 죄를 몇 번 지었지, 나쁜 생각, 마음속으로 음란, 자꾸 이런 생각이 들끓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랑에서 뭘로 갑니까? 율법으로 가는 거예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끝나 버리면 안 되잖아요. 주께서 다시 육에서 어디로 모은다? 성령으로 모으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해주십니다. 이것이 주께서 마귀가 설치는 세상에서 날마다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그 모든 것을 주님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이 오기 때문에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영원히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하셨다는 것만 증거 할 뿐임을 그 이야기 드리고 싶은 겁니다.
33절 봅시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요거 해석을 예수님 십자가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12사도들이 뭘 증거 했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복음 전했지요. 심지어 사도바울이 베드로 만나서 뭐라 했습니까? ‘할례를 받지 않아서 구원 못한다구요? 어디 그런 게 있어요. 그리스도의 형제를 당신이 그렇게 넘어뜨리면 안 되지, 예수님이 주신 율법 없는 이방인에게는 성령이 오심으로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관계없이 다 구원 받는데, 그러면 안 되지.’ 라고 한 것이 이 열매가 성령의 열매지요. 이게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성령의 열매 맞잖아요.
그런데 이걸 교회의 입장에서 해석해 봅시다. 교회입장에서 해석해 버리면 교회에서 봉사도 안 해, 청소도 안 해, 전도도 안 해, 헌금도 안 해, 선교회비도 안 내, 예배 참석 안 해, 설교시간에 졸아, 그러면 이게 뭡니까? 교회입장에서는 열매가 하나도 없어요. 그 때 목사가 설교하면서 ‘그래 믿음 좋다고? 열매도 없는 게 무슨 믿음이 좋아?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지, 봐라 성경말씀 있잖아.’ ‘마태복음 12장 33절 나오잖아, 봐! 목사가 성경에 없는 소리하나? 있는 소리 하는데.’ 라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똥개는 눈에 똥 밖에 안 보인다고. 교회만 챙기는 눈에는 모든 성경해석을 교회이익을 위해서 해석하지요. 그리고 추임새 붙는 게 뭐냐 하면, 한 소리 한다면 당신 집구석만 해가지고는 당신 집안 잘 되는가 두고 볼 거야. 이리 되지요. 구약 학개에. 예배당은 놔두고 자기 집만 잘 짓는 사람들, 그걸 보고 34절 뭡니까? 무슨 자식이라 합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와 싸웁니까? 다시 할게요. 예수님은 단체와 싸웁니다. 요즘 교회지요. 단체와 싸울 때 예수님은 개인의 입장입니다. 그 당시 민중들은 집단에 순복하지, 예수님 개인에게 순복하지 않지요. 12제자도 사실은 억지로 따라서 온 거지요. 그 때나 지금이나 성령의 시대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집단이냐, 아니면 예수님이냐, 예수님이 구원하느냐, 교회가 구원하느냐, 교회의 성만찬 세례식이 우리를 구원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구원하느냐, 그 싸움이에요.
34절,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여기는 독사의 자식들아 되어있지요. 다른데 가면 독사의 새끼들아, 되어 있어요. 이거나 저거나 욕인 건 마찬가지예요. 이 나쁜님이라 백날해도 욕은 욕이에요.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바리새인보고 하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자기 역할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 중에서 최고 선한 사람이 누구냐? 바리새인이고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은 누구입니까? 사울이었고 그 사울이 그 선함의 극치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을 했지요.
그래서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당신 사울이요? 아니요?’ 이걸 판정하는 셈이 되는 거예요.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35~37절,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바로 그 당시에 예수님 빼 놓고 다른 모델이 없었어요. 그렇지요? 십자가 지기 전에는 옆에 있었던 제자들도 이해 못했으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모델은 누구만 찾는다? 예수님만 찾을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이 현재 누구한테 지배 받는다 했어요? 아까한 성령의 지배 받지요.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예수님 안에는 선한 것만 쌓이게 돼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 받아 가지고 악령을 몰아내고 자기 백성을 건져 낸다면 예수님을 욕하는 사람은 어디에 속했다? 어디의 지배를 받는다? 악령의 지배를 받으니까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속에 쌓인 것이 뭐 밖에 없다? 악만 쌓인 거예요. 그 이야기 하신 겁니다.
내 속에는 선만 쌓여있고 너희 속에는 악만 쌓여 있다. 따라서 너희들이 내게 대해서 이야기한 그걸로 심판받는다는 거예요. 아무나 보고 쌓여가지고 야호~ 한다고 심판 받는 게 아니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 하는 거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 심판받는다는 겁니다. 왜, 주께서 먼저 시비 걸고 들어갔으니까. 나, 메시아인데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미 시비 걸고 외쳤거든요. 지금도 복음 들고 외치고 있잖아요.
그 복음에 대해서 너희들은 뭘 사랑하느냐 말이지요. 그런데 비로소 인간은 복음 앞에서 얼마나 악한가를 발악이 되지요. 그 기준. 그 것이 마지막 수능시험입니다. 수능시험 문제는 이미 공개 되었어요. 인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미 공개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미 공개 된 거예요.
공개되면 뭐합니까? 다른 메시아를 찾고 있는데. 다른 문제를 찾고 있는데. 출제도 안 될 그 문제를 찾고 있는데. 바리새인 문제집을 들추고 있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는데. 우리가 얼마나 모자랐으면 주께서 친히 대신해서 다 했겠습니까? 대신해서 손 털어서 다 했다는데, 꾸물꾸물하고 있다 말이지요. 중국집에 가서 음식 시켰는데 치매 걸린 엄마가 어디 갔나 보다 보니까 지가 주방에서 짜장면 만들고 있다 말이지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다 주는데 지가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주방장의 공로가 모독 받잖아요.
예수님은 다 했다고 나오고 우리는 ‘아휴, 그래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는 구원 안 됩니다.’ 이런 고집이 바로 자기는 겸손이라 하는데 겸손이 아니고 누구를 가해자로 만드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피해자로 만드는 겁니다. 꼴 난 자존심 때문에, 그 놈의 자존심 때문에, 얼마나 자존심이 세면 예수를 못 믿게 하는 자존심, 이게 마귀의 자존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십자가 복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늘 항상 다 이미 이룬 채로 주께서 만들어내는 인생을 우리가 합류하면서 주에 의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에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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