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전의 구조 120815
하늘 성전의 구조 120815
이름 : 이근호(IP:117.55.135.113)
하늘 성전의 구조(겔 1:4-14)
이근호
12-08-15 21:24
하늘 성전의 내부
2012년 8월 15일 본문 말씀: 에스겔 1:4-14
(겔 1:4, 개역)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겔 1:5, 개역)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겔 1:6, 개역)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겔 1:7, 개역)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겔 1:8, 개역)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겔 1:9, 개역)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겔 1:10, 개역)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겔 1:11, 개역)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겔 1:12, 개역)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겔 1:13, 개역)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겔 1:14, 개역)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 같이 빠르더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사의 등장을 우리가 조성한 현실 속에 집어넣을까요 아니면 말까요? 천사가 활동하지 않는 현실관은 모든 현실의 삶을 우리가 책임지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공포와 두려움이 휩싸여 살게 됩니다. 천사를 고려하지 않고, 천사를 배제하고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쫓겨다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천사가 개입한 현실이 된다면 이 때부터 우리 인간의 주도권이 우리 인간에게서 천사로 바뀝니다. 물론 오늘 본문은 구약 시대이니 천사의 등장을 통해서 설명합니다만, 신약 같으면 천사의 활동 주가 되지를 않습니다. 다른 현실관이 제시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이야기하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뭔가 하는 것’으로, 즉 내가 나에게 뭔가 작업을 감행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른 행함을 요구합니다. 즉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라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자기에게 작업을 감행해서 결코 ‘다시 태어남’이 성사될 성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이 주어지는 그 명령을 따르므로서 자신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는데 보탬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것은 그것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다시 태어나는 작업을 이미 태어난 자가 자기 몸에 가할 수 없는 처지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스스로 극복하므로서 도달될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공포에 짓눌러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행위를 하든지 간에 그 실패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실패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은 애초부터 일이 실패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구약에서는 천사들이 해내게 됩니다. 이 천사들은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 주변에 대기해 있던 천사들입니다. 그 천사들의 존재만을 우리의 현실 속에 집어넣어서는 아니됩니다.
차라리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천사에 의해서 새롭게 거듭나고 만들어지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대상자로서 선택당한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말씀대로 변신시켜 나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4존재의 천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천사에 대해서 인간 쪽에서 다룰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정면으로 바라보는 식으로 상대를 대하지만 4명의 천사 집단은 각기 다른 면을 바라보기에 사람들이 다룰 수 있는 대상자가 아닙니다. 즉 주도권이 천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직업중심으로 현실을 재구축합니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자기 이익이 되는 식으로 하나님과 상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낼 때는 천사의 활동없이는 하지 않습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지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께서는 일하시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이 자기에게 행위를 가해서 거듭나거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고백할 것은, “나는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는 것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4 천사집단 속에서 사람의 손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해서 기어이 구원받는 자들이 친히 모집합니다. 천사들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마치 큰 평야에 콤바인을 통해서 농작물이 자동적으로 수확하는 식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3: 39-43에 보면,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사가 개입하게 되면 전쟁은 바로 천사와 악령과의 전쟁이 됩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 성도가 고정된 자기 위치를 고집하게 되면 우리는 이 전쟁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그 모든 것이 전쟁통에 와해될까봐 두려운 법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성령에 의해서, 혹은 천사에 의해서 발려들어간 자들은 자기 자신의 자리를 고정자리로 삼지 않습니다.
한 예를 들면, 잠자리 한 마리가 방에 들어왔다고 칩시다. 고정된 우리가 그 잠자리를 잡으려고 한다면 그 잠자리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가 고정된 인간 자리를 고수할 것이 아니라 어깨죽지에 날개가 생겨 같이 잠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잠자리와 같은 무리가 되어 움직이게 되는데 바로 이런 안목에서는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있음’이 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천사보고 우리 있는 곳에 와서 나의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성령님이 이끄시는대로 움직이게 되면 그곳이 바로 항상 고정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곳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세상의 모든 지평에서 ‘행함으로’ 음직이든 것이 아니제 ‘믿음으로’ 움직이는 것이 됩니다.
즉 ‘나는 아침에 일어났다’가 아니라 ‘나는 ’믿음으로 아침에 일어났다‘가 됩니다. 혹은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 나는 매를 들고 때렸다‘가 아니라 ’나는 믿음으로 내 아이에게 매를 들고 때렸다‘가 됩니다. 모든 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이 은혜로 산다는 말이요 이 말은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이 내려주신 선물이요 하나님의 작품이라면 마치 내가 책임져야 될 인생인 것처럼 간주하지 않기에 두려움과 공포에 쫓기듯이 살 필요도 없을 것이요, 실패와 낭패를 겁내지 않을 것이요, 혹은 남에게 돋보이고 싶어 욕심을 부리는 인생일 필요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 있음 자체가 곧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검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8-16 14:38
2강-에스겔1장 4-14(하늘성전의 구조)12081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장 4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4-14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며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같이 빛나며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같이 빠르더라.”
에스겔 1장 4절에서 방금 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실상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그 앞에 있는 천사들의 모양새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네 천사들의 모습이 이렇게 등장하는데 이 천사들의 모양새를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이 현실 속에다가 용납을 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천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다 집어넣어줄까요, 아니면 뺄까요? 천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집어넣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 자신이 달라지고 바뀌어야 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천국에 가려면 세상에서 살던 우리가 바뀌어져야 돼요.
바뀌어져야 되는데 안 바뀌고는 우리가 천국에 못갑니다. 제가 바뀐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성경 요한복음 3장에서는 거듭나라, 다시 태어나라, 라는 어려운 주문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한 번 태어난 인생, 밥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서 겨우겨우 아슬아슬하게 가는데 재주를 넘으라는 식이지요. 다시 태어나라니, 이것은 있는 몸체조차 감당 못하는 입장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못 본다고 하니 우리보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바뀐다고 해도 옷을 갈아 입으라든지, 이발을 하고 오라든지, 똥배를 집어넣고 오라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가능한데 다시 태어난 채로 오거라,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숙제 같은 것을 짊어지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아셔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명령, 거듭나라, 하는 이 명령은 그 명령을 듣는 순간부터 내 몸은 내 관리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명령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하는 것은, 십계명을 비롯해서 많은 명령이 있지요, 이 명령을 하는 것은 내가 내 몸을 관리할 수 있는 주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달리 해서 ‘네 몸에서 손을 떼라’ 하고 같은 이야기에요. 네 손을 떼고 내가 너를 직접 손대겠다, 손대는데 어떻게 하는가, 내가 너한테 명령한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너를 다시 태어나게 만들겠다,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제일 힘든 것이 뭐냐, 공포스럽다는 거예요.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어떤 사람은 눈뜨기 전에 꿈속에서 이미 그렇지만, 눈을 뜨면서부터 인간은 무섭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서워요. 전부 다 미친 사람들 같아요. 세상 전부가 미친 사람들 같아요. 뭔가 무서움을 벗어내지 못해서 환장한 것 같은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사가 다 무서워요. 시장에 가서 장을 보면서도 무서워요. 이 집에 가야 헐하게 살까, 저 집에 가야 헐한 값으로 살까, 이것도 겁나요. 세상 모든 들리는 것, 보는 것이 우리를 천국가게 하기 위해서 나를 거듭나게 하는 일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 우리를 꽉 조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하늘나라 가는데 거듭나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일들이 온 주변에 가득 차 있어요. 대표적인 것은 양학선 선수가 체조 도마에서 금메달 딴 것, 기 보배 활 쏜 것, 박 태환 수영 금메달 못 딴 것, 축구 선수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세레모니 하다가 시상대에 못 올라간 것,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정치적인 세레모니를 하다가 시상대에 못 올라갔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공포가 되는 것은 ‘앞으로 올림픽 할 때는 주의해야지’라는 공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제가 이번에 서울 도서관에 갔다가 박 윤진 성도를 만났어요. 그분이 회사생활을 이야기하는데 그 자체가 공포입니다.
현재 과장인데 진급이, 승진이 무서운 거예요. 자리를 확확 빼버리니까. 이것은 나중에 부장되어서 임원되기 전에 탈락해서 퇴직할 그 이전부터, 과장자리에 있을 때부터 벌써 겁나는 거예요. 주부가 애 세 명 키울 때 다 잘 자라주면 좋은데 행여나 애 하나가 중간에 아프다, 그러면 목돈이 들어갑니다. 목돈 안 들어가도 혹시 들어갈까 싶어서 또 겁나요. 다른 애들 조기유학 보내는데 자기 애 못가면 영어 못하는 바보 될까 싶어서 남 유학 가는 그것조차도 우리한테는 압박과 스트레스와 공포로 주어집니다.
어느 한 순간도, 어느 시점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리는 공포에 의해서 쫓기듯이 사는 거예요. 공포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 없어요. 매 순간이 공포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입니다. 아마 노인네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오늘도 할 짓이 없이 하루 그냥 보내려 하니 그것도 공포스럽지 싶어요. 그것을 술이나 담배로 그 짧은 순간 잊겠지만 술 깨면서 머리가 아프면 그것도 공포스럽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천국가게 한다, 할 때에 우리는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그래, 이 세상 산다고 고생 너무 많이 했어. 애들 키운다고 고생 너무 했어. 좋은데 천국으로 가야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천국을 만드신 주님이 우리에게 마중 나와서 하는 말이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했어요. ‘너 고생스럽냐, 천국에 넣어줄게.’ 이런 것은 없습니다. 이런 것은 한국교회가 이야기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한 것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은 뭡니까? 잘 들으세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그겁니다. 한국교회는 ‘천국에 넣어줄게’ 하잖아요. 예수님은 반대로 합니다. 천국에 못 온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몸 아프면 만사가 짜증나요. 몸이 아프니까 자살해서라도 인생 마감하고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은 충동이 왜 없겠습니까?
저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있을 거예요. 세상일 맘대로 안 되는데 치사스럽게 실패하며 사는 것 보다는 아예 그런 욕을 안보고 안 듣는 것이 더 낫지요. 하지만 주께서 또 이야기합니다.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못 온다.’ 가고 싶어도 저쪽에서 오지 말래요. 안 거듭났거든 오지 말라는 겁니다. 십계명 한 계명도 우리가 못 지켜요. 하나님께서 탐내지 말라, 고 한 것도 못 지키는 주제에 거듭나라는 그 말씀을 무슨 수로 지킵니까? 이것은 안 돼요. 못 지키는 거예요. 주께서 못 지키는 말씀을 주는 것은 ……, 벌써 잊으셨지요, 친절을 베풀어서 다시 이야기해 드립니다.
주께서 우리가 지키지도 못 할 명령을 주시는 이유는 이제부터 네가 너한테서 손 떼고 네가 안 되는 그 일을 내가 되게 하는 식으로 직접 너에게 손을 대겠다, 라는 식으로 가는 겁니다. 어떻게, 거듭날 능력도 없는 인간을 거듭나게 만들고야 말리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거듭나게 해서 천국에 넣어주고야 말리라, 이것이 주님의 솜씨입니다. 주님이 다가오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뭡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만 하면 돼요. ‘ 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나이다.’ 참 쉽죠, 잉! 굉장히 간단한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 보면 ‘값없이’ 넣어준다는 말이 나옵니다. 값없이, 사람들은 그 대목을 왜 훌쩍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 그 대목이 얼마나 중요한 대목인데,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 대목이 로마서 4장에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왜 그냥 슬쩍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그냥 지나치면서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의 ‘하라’ 하는 것들을 가지고 되지도 않는 것을 한다고 그렇게 억세게 하잖아요. 기도하라, 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 사람 보면 제가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제가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했고 헌금하라고 해서 헌금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합니다. ‘거듭났습니까?’ 그러면 꿀리기 싫어서 거듭났다고 이야기해야 되거든요. ‘예, 거듭났습니다.’
‘거듭날 때 무슨 방법으로 거듭났습니까?’ 저쪽에서 할 말이 없지요. 차마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을 못해요. 왜,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은 자기가 안했다는 뜻이거든요. 제 말 맞잖아요. 처음부터 우리 육으로는 할 것이 없잖아요. 그 말이 제 말 아닙니까?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은 우리가 거듭남에 대해서 개입할 것이 없었다, 그 말 아닙니까? 그걸 고백하시면 그게 천국 가는 사람이라니까요. 제가 저한테 손 댄 것이 없이 그냥 덜렁 천국가게 되었습니다, 그 고백을 쏟아내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 고백을 하는 대신 얼마나 우리는 내가 이만큼 했다는 그것을 자랑 질 하고 싶어서 마음이 막 바쁘잖아요. 그러면 방금 신약 요한복음 3장에서 성령님이 하신다면 구약에서 성령이 오기 전에는 뭐가 했는가, 그게 오늘 본문 에스겔 1장에 나온 겁니다. 에스겔 1장 4절부터 14절에 보면 천사들이 나옵니다. 4절에 보면 “번쩍번쩍” 6절에 보면 “네 얼굴” 7절에 보면 “마광한 구리” 8절에 보면 “사람의 손”이 나오고 9절에 보면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0절에 보면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고.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뭘 생각했느냐하면, 야외콘서트 할 때 앰프 시설이 생각납니다. 총 열 여섯 개 달린 스피커, 이쪽에 네 개, 이쪽에 네 개, 이쪽에 네 개, 이쪽에 네 개, 마이크에 대고 소리 내면 한꺼번에 소리가 울리는 그 앰프. 넷이 한조가 되어서 넷은 사람의 얼굴이고 넷은 사자의 얼굴이고 넷은 소의 얼굴이고 넷은 독수리 얼굴이다, 그 다음에 12절에 보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한다. 방금 제가 나열한 이 말을 한꺼번에 딱 줄여서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습니까?’ 물으신다면 우리가 우리를 손댈 수 있는 인생이 아닌데 우리 대신 훨씬 활동성 있는 분, 네 천사들이 이렇게 하나님 보좌에서 나와서 움직임을 보이면서 왜 활동 하겠습니까?
왜 활동하겠어요? 우리가 나에게 손대는 것이 아니고 그분들의 활동력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여기에 나오는 천사를 우리의 삶의 현실에 집어넣을까요, 말까요, 라고 질문 드린 겁니다. 네 존재의 천사를 우리 인생에 심어놓으면 오늘 아침에 밥 먹고 설거지 하고 빨래한 이 모든 것도 천사들의 힘에 의해서 우리가 하게 된 것이고 만약에 천사를 빼버리면 우리는 하루하루 공포에 쫓기듯이 살게 되고, 그런 겁니다.
여러분, 천사가 귀신을 무서워할까요, 안할까요? 천사가 여기 있는데 ‘귀신 나온다. 왁!’ 하면 천사가 ‘헉! 아이고, 놀래라. 이 천사 놀랐잖아요.’ 그럽니까? 천사가 귀신 보고 놀라는 것 봤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같은 천사인데. 악한 천사, 선한 천사, 다 천사인데 놀랄 일이 없지요. 그런데 사람보고 갑자기 어이! 하면 깜짝 놀라지요. 평소에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 살다 보니까 조그만 일 하나 있으면 깜짝 깜짝 놀라는 겁니다. 작은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신문지상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놀라고, 이 명박 대통령 독도만 가도 놀라고, 겁나고.
그만큼 우리가 갖추어놓은 현실 속에는 천사가 없더라, 그 말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천사가 나와서 천사가 우리를 다 도와주고……, 완전 하이카 아닙니까, 손댈 것이 아예 없도록 주께서 알아서 다 해줘서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왜 그 말씀은 우리 현실에 없느냐 그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려고 말씀을 대상으로 놓기 때문에 그래요. 이 경계선, 말씀의 세계와 우리세계가 여기 있다면 그 경계선을 넘어가게 되면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다듬어가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말씀이 나를 다듬어가요. 여기 애가 하나 나왔으니 오늘 좋은 예가되는데, 엄마 아빠가 식당에서 회의를 합니다. ‘여보, 삼성 주식 사놓은 것이 이번에 얼마나 올랐지?’ 그런데 꼬마가 ‘아빠, 오르면 내가 대학갈 때 보탬이 돼?’ 이렇게 이야기하면 부모가 보기에 같잖지요. ‘아빠, 내가 좀 보태줄까?’ 이것은 더 웃기는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부모 아닙니까? 우리는 애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들어지면 그것이 거듭난 인생이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 헌금 좀 해드릴까요? 주님, 제가 전도 좀 해 드릴까요?’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무슨 이런 애가 다 있습니까? 예?
왜 우리가 어른 행세합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하고 막 먹으려고 해요? 누가 키우시는데?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 라는 말을 주께서 하셨거든요.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말이지요. ‘공중의 참새도 키우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 6:26) 너희를 기르시는데 뭘 로 기르시느냐, 양식으로 기르시는 것이 아니고 호빵, 찐빵 만들어서 기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친히 길러요. 우리는 말씀 안 좋아합니다. 하지만 ‘너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매일같이 너를 말씀으로 살게 하는 방식으로 너희들을 거듭나게 해서 천국 보내겠다.’라는 일을 하시면서 그 하나님 앞에 있는 천사들을 우리 곁에 보낸 겁니다.
그 보낸 천사들의 모양새가 이런 모양새로 온 겁니다. 진도 계속 나가봅시다. 우리가 천사를 봤다, 사람 같구나, 소 같구나, 사자 같구나, 독수리 같구나, 라고 봤다고 합시다. 그렇게 보면 구원 받습니까? 보는 것으로 구원 받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본 사람 한 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마지막 재판정에 설 때에 군중들이 모여서 예수님 봤고 예수님 십자가 질 때에 길거리에 무슨 이벤트 벌어져나 싶어서 애들부터 아줌마들까지 다 나와서 봤고 어떤 아줌마들은 울기도 하고 그랬어요. 지난 주일엔가 설교 했잖아요.
그러니 예수님 본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예수님 본 사람들 다 구원 받았습니까? 교회 처음 나온 사람 중에 이런 사람도 있어요. ‘예수님 한 번만 보면 내가 구원 받을 건데.’ 본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본다고 구원 안 받으면 어떻게 구원 받는데? 주께서 나를 다루어야 돼요. 주께서 나를 다뤄줘야 구원받습니다. 마리아가 천사 봤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천사가 마리아속에 아기예수를 잉태시켜 줘야 마리아는 아기예수님을 품은 여인으로서 구원받는 겁니다. 마리아 뱃속에 아기예수 심어놓듯이 지금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들이 각자 여러분의 몸속에 여러분이 해야 될 일을 시키는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서울대학 치과대학을 나온 사람이 공부를 잘했지요. 치과의사를 하면서 돈도 좀 벌었어요. 치과의사 돈 벌어서 뭐 했느냐, 김밥 집 차렸습니다.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놀랐습니다. 서울대 치대 나오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의대 공납금 얼마나 많습니까? 김밥 집 차릴 거면 서울대학 왜 갔습니까? 그 사람은 서울대 나와서 전문의 하면서 치과병원 하면서 늘 생각한 것이 뭐냐, ‘이게 내가 갈 길이 아닌데.’ 이것을 성경적으로 하면 ‘천사가 치과의사 하라고 심어준 것이 아닌데 김밥 장사를 하라고 심어준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김밥 장사 했어요. 지금은 말아먹고 다시 치과의사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하면, 10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9절 후반부부터 보면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다. 네 천사지요. 네 천사가 죽 갈 때 이 천사들의 모양새가 사방팔방 다양해요. 장치도 다양할뿐더러 그 모양새가 다 다릅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하면, 내가 천사를 붙잡아서 그 천사를 하인 부리듯이 부려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이 아니고 오히려 천사가 활동하는 대로 우리는 말려들어가고 끌려들어가서 그 천사의 활동력으로 인하여 주님의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끌려 들어가는데 천사는 말씀대로 하거든요. 우리는 명을 못 지켜요.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못 지킨다는 고백 외에 할 수가 없어요. 못 지키는 것을 지키도록 천사가 활동하는 겁니다. 지금 이것은 구약시대인데 신약시대에 가면 성령께서 천사와 더불어서 이 천사의 역할을 완성상태에서 우리에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이 네 천사의 각각의 모양새는 우리가 하나로 붙들거나 다룰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거지요. 같은 천사라도 어떤 면은 사람이니까, 한쪽편이 다 같이 사람이니까 이것은 특별히 지혜에 관한 것, 그 다음에 사자는 용기, 용맹, 그리고 소는 성실성, 우직성, 그 다음에 독수리는 민첩성.
그런데 그 어느 한쪽을 대상으로 삼아서 ‘나는 사람 잡을래, 아니야 나는 소 잡을래, 나는 사자야.’ 이런 식으로 우리 쪽에서는 붙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이 어려워지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천사가 나타날 때 한 면으로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그 천사가 나타낸 그 면 가지고 우리 눈이 앞에 있으니까 그 앞에 대고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에스겔에 나타난 천사가 뭐냐 하면, 사람, 독수리, 소, 독수리 양쪽 옆과 뒤, 이런 식으로 오니까 ‘아, 천사는 사람이시군요.’라고 붙들면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가 천사를 호출한다고 해서 천사가 오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사건을 일으킬 때만 우리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주도권이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천사에게 주도권이 있고 천사가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는 식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을 더 알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방에 있는데 잠자리가 한 마리 들어왔어요. 애한테 주려고 잠자리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잡으려고 하니까 잠자리가 가만있지를 않고 자꾸 이동을 해요. 나는 움직이지 않는데 내가 있는 이 방에 잠자리가 들어왔다, 잠자리가 천사라면 ‘어, 천사가 있네.’ 잡으려고 하면 천사는 안 잡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천사한테 붙들려서 갑자기 우리의 양쪽 어깨에 잠자리 날개가 생겨서 앞에 들어온 천사(잠자리)와 함께 다니다 보면 그 잠자리 있는 곳에 하나님이 같이 계신 거예요. 천사가 있는 곳이 곧 하나님이 계신 겁니다. 내가 멈췄을 때 천사가 이동하는데 내가 천사와 함께 이동하다 보니까 뭐가 이동하느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 되는 거예요. 부질없는 것, 하니 또 노래가 생각나네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거예요. 내가 스톱, 이 고정된 자리를 확보하니까 나의 재물 운, 출세 운, 건강 운, 이런 것이나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미아리 점쟁이가 생기는 겁니다. 그 사람은 한 자리에 눌러 앉아 있어요. 자리 잡고 앉아서 ‘당신의 관상을 보니 상속 운이 있네.’ 전에 관상 한 번 알려드린 적이 있지요? 눈썹이 이렇게 붙어 있는 경우를 가지고 상속 운이 있다고 했지요. 온갖 것 다 봅니다. 돗자리만 펴면 되겠지요. 눈이 이런 식으로 째지면 복이 샌다고 하고 눈이 모아져야 재산이 모인다는 등, 이런 것이 관상에 있어요. 이 출발점이 전부 다 내가 여기 중심잡고 앉아 있으니까 나 되게 하는 운들아 여기 좀 모여 앉아 있어라, 그 말이거든요.
그런데 에스겔 1장에 나오는 천사의 활동은 이 세상에서는 가만있지를 않아요. 잠자리처럼 돌아다니는 거예요. 돌아다니다 보니 돌아다니는 그곳이 어디든지 주께서 함께 계시는 거예요.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하늘 끝에 갈 지라도, 바다 속에 있을지라도, 주께서 거기에 함께 계신(시 139편) 겁니다. 여기서 천사가 넷인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사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이 네 천사는 대표로 보여준 거예요. 천사의 눈도 굉장히 많아요.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눈이 얼마나 많은지 온통 다 눈이 가득하다(계 4:8)고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과 요한계시록 4장과 통하거든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이 천사들 속에 뭐가 있는가, 에스겔 1장 13절에 보면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같이 빠르더라.” 이것을 글로 써놓았는데 글로 설명하면 실감이 안 나니까 실감나게 하려면 예배시간에 여기에 모닥불을 피워야 돼요. 모닥불 피워놓고 휘발유를 부어놓고 그 모양새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불꽃이 굉장히 까불면서 타오르겠지요. 가만있지를 않지요. 그런데 그 불꽃에 다가서면 타버립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태풍이 들이닥치는 모습이죠. 이 ‘북방에서부터’ 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북쪽 나라 바벨론을 통해서 이 남쪽 유다나라를 불꽃으로, 맹렬한 심판으로 불 질러 버린다는 말입니다. 북쪽의 민족을 들어 써서 남쪽의 자기 나라 유다백성을 불 싸질러 버린다, 없애버린다, 소실시켜 버린다, 이런 겁니다. 이것이 에스겔의 주제거든요. 이것을 누가 했느냐, 천사들이 아주 재빠르게 그리고 지혜롭게, 성실하고 아주 용맹스럽게도 주저 없이 하나님이 시키신 이 작업을 진행시킵니다.
그렇다면 이 천사에 의해서 누가 구원받는가? 이 천사의 모양새를 5절부터 봅시다.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이 손이 있더라.” 여기에 “사람의 손”이 있더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기계로 본다면 뭔가 추수할 때 곡식을 수확하는 기계, 콤바인이라고 하지요. 대농장에서 벼를 수확하는 농기계 이름이죠. 한쪽에서 벼를 자르면 그 다음에 그 안에서 탈곡이 되어서 뒤쪽에서는 가마니에 탈곡된 이삭들이 차곡차곡 담겨서 나오지요.
그것처럼 이 천사가 추수를 한다니까요.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마지막 때 천사가 와서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는데 의인은 알곡으로 거두고 악인은 쭉정이로 따로 분류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작업을 누가 하느냐, 천사가 한다니까요. 이것을 신약시대에서는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성령이 천사를 앞장세워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수확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고백을 하느냐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 어깨에 잠자리 날개가 달렸군요, 그래서 가라고 하면 가고 날라고 하면 날고 기라고 하면 기고, 내 어깨에 날개가 있어서 주께서 미국 가라면 미국가고 한국에 살라고 하면 한국에 살고 독일에 가라고 하면 독일에 가고, 어디를 가더라도 주와 함께 바퀴 달린 채 콤바인처럼 달려가고 또 다른 사람을 수확하는 그 일에 우리가 종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은 어떤 공포라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인생 살면서 검은 그림자, 어두운 그림자가 필요치 않아요.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한다면 그때부터 검은 그림자가 귀신처럼 뒤집어쓰게 되지만 주께서 나를 구원하는 작업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 모양이다, 라고 주께서 지금 손질한 모양이 콤바인처럼 이런 모양새로 가고 있다고 믿어버리면 우리 인생의 얼굴에 검은 기미조차 있을 수 없어요. 검은 그림자가 낄 수가 없다니까요. 그걸 가지고 뭐냐, 모든 행함을 뭐로 바꿔라, 모든 행함을 모든 믿음으로 다 바꿔버려요.
아침에 뭘 했습니다, 가 아니라 아침에 뭘 믿었습니다. 애가 말을 안 들어서 쥐어 팼습니다, 하지 말고 나는 오늘 애가 말을 안 들어서 패는 믿음으로 믿었습니다. 모든 행함의 지평선을 뭐로 바꿔야 돼요,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에(믿음에서 믿음으로)”(롬 1:17) ‘오늘도 믿음으로 식사했고 믿음으로 출근했고 믿음으로 잠잤고 믿음으로 기도했고 믿음으로 TV봤고 믿음으로 축구했습니다.’ 모든 것이 믿음으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께서 행하고 계신다는 주의 인생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얼마나 조마조마하면서 살아왔습니까? 천사가 뭐가 필요하며 성령이 뭐가 필요한지 이유도 모르는 채 내가 열심 내서 구원 받고자 했던 모든 것이 다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도 주께서 만들어 내는 인생이 우리의 현재 가진 인생이오니 이 안에서 범사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