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의 의미 120812
동족의 의미 120812
이름 : 이근호(IP:117.55.135.113)
동족의 의미(미 2:1-5)
이근호
12-08-12 15:38
동족의 의미
2012년 8월 12일 본문 말씀: 미가 2:1-5
(미 2:1, 개역)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미 2:2, 개역)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
(미 2:3,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히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니라 하셨느니라』
(미 2:4, 개역) 『그 때에 너희에게 대하여 풍사를 지으며 슬픈 애가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미 2:5,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하나님은 쉴새없이 일하십니다. 인간들도 쉴새없이 일합니다. 만약에 충돌이 일어난다면 인간은 큰 낭패를 당하겠지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이 도리어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미움과 배척을 당한다는 예언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선지자는 결코 사람편에 서서 변호하듯이 일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편입니다. 사람편에서 일하고 말하는 선지자는 가짜 선지자요 그들은 참된 선지자를 핍박해야만 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실을 보고 있고 우리 역시 현실 속에서 살아갑니다. 저 현실과 이 현실이 동일하다는 것은 저쪽 지방의 하늘이 이곳의 하늘과 같다는 사실의 연장입니다.
하늘과 같지만 땅은 같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특수한 땅 위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은 가나안이라는 곳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원래 살던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 원주민들에게는 침략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자신들이 이 가나안 땅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원주민들은 거부했습니다. 마치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여기는 것에 한국사람들이 반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기생 라합 식구 빼놓고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땅은 이스라엘 땅이 안됩니다. 하나님이 상주하시는 땅이어야 합니다.
땅을 원주민을 추방하고 저주하면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시는 것도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인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됨을 앞장 세워서, 원주민들은 거룩치 않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추방하고 지배합니다. 그리고 이 명분으로 전쟁에 나서십니다.
이렇게 해서 그 땅을 이스라엘이 살게 되려면 공격 이전에 먼저 거룩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거룩된 관계로 맺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이 미치지 못한다면 그들도 저주받은 원주민 꼴 나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보다 가나안 땅의 풍요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들어야 겨우들 정도로 엄청난 무게의 포도송이는 어느 사람들이 보기에도 축복 그 자체로 여겨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축복이 어디서 오느냐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곳이 자신들이 살만한 세계라는 점에 먼저 눈독을 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하나님이 영원히 사시는 장소라는 점의 무서움을 이스라엘은 감안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 밑에 또다른 땅이 밑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 땅이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은혜로 유지되는 땅입니다. 즉 인간의 행함이나 노동으로 유지되는 땅이 아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나안의 땅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결실은 약속의 땅의 요구에 부응되지 아니하면 열리지 않는 열매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에 들어갈 때에 왜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장 서야 하고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좋은 땅에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실을 낳기 위해 희생제물이 매일같이 성전에서 불태워지는 그 사연을 그들은 소홀히 했습니다.
은혜의 땅이란 그냥 누리는 땅이 아니라 매일 내부에서 올라오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죄의 현실성과 그 무게를 알고 그 넘쳐남에 대해서 어찌 손쓸 수 없음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에게만 영광과 고마움을 드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쳐난다는 이 거룩의 원리를 잊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은 자기 죄를 정당화하는데로 나아갔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곧 남을 지배하고 남의 것을 강탈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상이 힘의 원리 속에서 움직이고들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신들이 침략자요 이스라엘에 대해 앗수르 군대같은 역할을 일찍부터 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앗수르라는 침략자가 들이닥친 것은 같은 속성을 지닌 요소가 이미 이스라엘이나 유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귀족이나 권력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이방민족 노릇을 충분히 해오고 있던 입장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을 차지할 수 있어도 진정한 약속의 땅은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약속의 땅이 곧 가나안 땅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은 하나님이 계신 곳만이 약속의 땅이 됩니다.
유다 나라가 불타고 성전이 불탈 때라도 하나님의 성전은 타지 않고 포로잡혀가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이전됩니다.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는 곳이 곧 어디든지 하나님 계신 성전입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발생하는 그 현장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가나안 땅과 약속의 땅의 차이점은, 힘있는 자에게서 점령되는 곳은 가나안 땅이요 힘없는 자들이 가는 곳이 약속의 땅입니다.
고린도후서 13:4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무시당해도 상관없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찬송가 471장 4절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이 세상 날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진정 십자가를 안다고 세상에서의 무시는 우리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바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약함에 동참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모든 것을 일임했습니다.
자체적인 힘 축적으로 살도록 허용하지 않는 곳이 곧 약속의 땅입니다. 천국을 이런 식으로 미리 알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하나님의 용서와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사는 겁니다. 이것이 약속된 진짜 백성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침략하는 침략자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가진 힘으로 버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8-13 16:12
03강-미2장1-5(동족의 의미)1208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2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2페이지입니다.
미가 2:1-5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찐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히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니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너희에게 대하여 풍사를 지으며 슬픈 애가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그냥 신앙이 없다고만 이야기해도 되지만 구약성경의 방식은 그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남의 것을 빼앗는도다. 그런 식으로 신앙이 없다는 말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의 특징이 거기에 먼저 깔려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특징은 뭐냐 하면 공짜로 얻은 것을 공짜로 얻은 것이기에 그 공짜임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이 우리 안에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아이 둘 셋 키우는 부모님이 외부에서 맛있는 케익이 나오면 애들한테 균등하게 골고루 나눠줘요. 아주 나이차가 많으면 큰 애는 많이 주고 이렇게 하지만 세뱃돈도 큰 애는 많이 주고 하지만 연대가 비슷하면 공정하게 나눕니다. 분명히 나눠줄 때는 크기가 같았는데 나중에 먹을 때 보면 힘 센 자식이 빵을 많이 갖고 많이 먹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어떻게 내가 줄 때는 똑같이 줬는데 어떤 애는 배불리 먹고도 남아서 나중에 지 혼자 먹으려고 감춰놓기도 하고 감춰놨다가 썩어서 엄마가 ‘누가 감췄느냐’ 이렇게 나오고 분명히 자기 것으로 아껴먹으려고 했는데 아껴먹으려고 한 것까지 몽땅 힘센 형제한테 다 빼앗기는 경우, 어릴 때부터 불평등한 사회, 그래서 이미 체험하고 있는 중이죠.
믿음이 없다는 것을 믿음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왜 남의 것을 빼앗는가, 라고 하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니가 받은 범위를 넘어서 그것을 니 것으로 전환시키느냐,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일반 사람들은 안 통하는데,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살던 이스라엘, 유다나라에게만 이게 해당되는 거예요.
또 그 이야기를 약간 진전시켜 버리면 약속의 땅에 있던 모든 것은 애초부터 약속의 땅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여리고성을 한번 예를 들어볼게요. 여리고성에는 원주민들이 있어요. 그 원주민들을 누가 빼앗았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빼앗은 게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동원시킨 분이 빼앗았죠. 이스라엘 사람들을 동원시킨 분을 성경에서는 여호와라고 하는데 여호와를 용사라고 하는데 그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동원시킬 때 ‘그냥 따라와’ 해서 동원시킨 것이 아니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나의 거룩함에 미흡한 이 원주민들은 쫓겨나고 이 땅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에 거룩한 내가 살기 위해서 거룩한 백성들에 둘러싸여서 살아야 된다.’ 이 원칙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에 둘러싸여서 사는 겁니다.
그런가하면 그 땅에 있는 원주민을 내쫓기 이전부터 무슨 원칙이 성립돼야 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에 거룩한 관계가 과연 맺어졌는가, 그것부터 먼저 정립이 돼 있어야 돼요. 하나님 백성이라고 거룩한 거 아닙니다. 먼저 거룩하다고 판정을 받고 난 뒤에 그때 하나님과 백성을 같이 함께 움직이게 돼 있어요. 함께 움직인다는 말은 하나님이 치는 것과 백성들이 치는 것과 동일한 칼날이 돼야 된다 이 말이죠.
기드온이 칼질해서 미디안 군사를 죽일 때 기드온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것은 나의 기드온 칼뿐만 아니고 여호와의 칼이라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여호와께서 거룩이란 관계에 딱 맺어져서 거기다, 아침에 했던 예를 들면 꽃향기죠. 화살. 화살을 쏘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화살 끝에 꼬치 요리처럼 그 안에 이스라엘 백성, 자기 백성을 꿰뚫어놓고 그 백성들한테 영생, 거룩이란 푯말을 달고 세상에 나오게 하죠.
‘저리 비켜라, 여호와 하나님이 사시는 땅이지, 너희들이 살만한 땅이 아니니 너희들은 안 살아야 돼.’ 하고 원주민 쫓아내고 그들이 거기를 차지하면서 간판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약속의 땅’이란 간판을 걸었습니다.
이제부터 좀 어려워요. 보통 땅은 땅 이예요. 가나안 땅, 가, 나, 안, 땅, 이름만 생각하면 제과점이 생각나는데, 제과점이 왜 가나안 간판이 있느냐 하면 젖과 꿀이 흐른다고, 맛있다고 그렇게 달아놓은 거예요. 가나안 땅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가나안 땅 밑에 또 땅이 있어요. 그게 뭐냐 약속의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은 그냥 젖과 꿀이 흐르는 게 아니고 밑에 있는 약속이 약속대로 유지가 될 때 위쪽 표면층에 젖과 꿀을 생산하게 돼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보기에 구라, 또는 과장됐다는 표현들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 가나안 땅의 포도가 얼마나 포도가 큰지, 포도송이를 운반할 때 사람 손으로 운반 못하고 두 사람이 들 것으로 들어야 포도송이가 운반된다고 하는 거예요. 킬로수를 계산해보면 약 150~200킬로그램, 장 미란이가 와서 못 들 정도로 정말 엄청난 무게의 포도. 이건 경산 자인 땅에서 나는 거봉을 한 200개, 한 상자 갖다 붙여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포도크기가 왔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뭐가 띄느냐 하면 그 왕 포도만 눈에 띄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밑바탕을 못 보는 겁니다. 그냥 아무나 그 포도를 따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사람들은 건성으로 이야기해요. 이렇게 큰 포도 딴 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입이 싸서 말은 잘하지, 본인이 은혜를 안 좋아하는데, 본인이 은혜를 안 좋아해요.
하나님의 은혜를 좋아하려면 어떤 사람이 좋아하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도 나도 은혜다.’ 이렇게 주장해야 될 텐데 지가 사는 것은 지 노력으로 살아놓고 얻어 챙길 것은 필요하니까 ‘주의 은혭니다.‘ 요따위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 이 말이죠.
여러분, 은혜가 내가 은혜라면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나는 내가 지금까지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냥 나에게 손해만 끼치는 짓만 나한테 죄만 양산하는 짓만 했습니다.‘라는 고백을 했을 때 은혜가 은혜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로마서 5장에 보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은혜가 넘쳐야지 그냥 있어버리면 까먹으면 그만이잖아요. 계속해서 넘쳐나야 돼요.
어제 교정청에 가서 어떤 분하고 담소를 하면서 ‘부부사이가 어떻게 하면 사이가 좋아집니까?’라는 질문을 저한테 했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을 했습니다. 결혼했다고 행복이 보장된 것이 아니고 날마다 그 배우자에게 새로운 면이 발견될 때 부부는 지루하지 않고 즐겁습니다. 늘 새로운 면.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 볼 때 ‘ 오, 우리 남편이 저런 면이 있었어?’ 새로운 면, 그리고 남편이 아내 볼 때 ‘오, 내 아내한테 저런 면이 있었어? 아이쿠, 20년을 살아도 이런 것은 처음이네.’ 하고 어떤 새로운 면이 있어야 돼요.
그러면 새로운 면이 나쁜 쪽으로 새로운 면, 방귀 뀌는 것 말고, ‘뭔가 내가 못하는 새로운 면이 나오면 부부는 늘 매일같이 행복합니다.’라는 말을 했거든요. 그 듣는 사람이 낙담을 하는듯한 얼굴을 하면서 우리 집은 그렇게 안 된다는 거예요. 어디 우리 집은 그렇게 됩니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날마다 자신이 배우자를 상대해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낮추면 나중에 우리는 시시하게 봤던 것도 새롭게 나타나고 새롭게 느껴지는 겁니다. 안 되는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십자가마을 제3부 순서에 들어가는 겁니다.
가나안 땅 밑에 약속의 땅이 있어서 이 약속의 땅은 조건이 있어요. 뭐냐, ‘거룩을 유지하면 젖과 꿀이 흐르게 해줄게.‘라는 약속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밑바탕에 있는 약속의 땅은 모르고 사람들은 금방 따먹을 수 있는 가나안 땅의 풍성한 결실에 대해서 그만 마음이 혹하고 말았습니다. 선악과 보고 달려드는 말씀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선악과 보고 달려드는 그 아담의 우리조상의 본성이 어디 가겠어요? 같은 DNA인데. 그 본성 받아서 먹음직하면 앞뒤도 안 가리고 먼저 선점하려고 달려들잖아요. 그래서 다 따먹어버렸어요. 일단 눈에 띄는 건 다 따먹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는 다시 생산되지 않는다는 문제예요.
사람들은 원인을 몰라요. 원인을 왜 모를 수밖에 없느냐 하면 오늘 본문 내용은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너희를 쳐들어와서 너희들을 잡아가고 그 땅을 지배하고 너희 것을 다 빼앗아 가고 너희들을 죽일 것이고 너희들을 추방시킬 것이다.’라는 내용을 하면서 그 앗수르 군대가 침략자라면 앗수르 군대가 침략자 됨은 바로 니가 너희들 동족에게 침략자가 됐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침략자가 외부에서 오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을 침략하고 괴롭히고 못 살게 굴었던 우리가 앗수르 군대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외부 침입자가 등장해서 그들과 너와 동질화 된다.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예언의 말씀을 하신 겁니다.
적이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나의 적은 내가 되는 거예요. 만날 눈에 띄는 맛있는 과실과 젖과 꿀이 흐르는 그런 걸 탐내다 보니까 누가 뒷전이냐 하면 그 과실, 젖과 꿀이 흐르게 하시는, 영생을 샘솟게 하시는 그 예수님의 고난과 핍박과 아픔을 우리는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겁니다. 놓쳐버리는 거예요. 주님의 탄식 소리가 안 들리는 겁니다. 지가 탄식해서 기도하는 지 기도소리가 너무 왕왕 들리기 때문에 그 기도보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탄식하는 소리는 안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원에 가면 기도 꽤나 한다는 사람들이 거기서는 터주 대감 행세를 하는 겁니다. 지금도 여름에 덥다 할 때 갈만해요. 주왕산 기도원 3500원 주면 주왕산 기도원에 입장료 없이 편히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한 기도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60대는 끼지 마세요. 70대, 80대, 기도 노하우, 잠도 안자고 기도하는 노하우가 3, 40년 챙긴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거기 가면 기도원에서 정기적으로 하게 되면 박수 쳐주고 그냥 노는 거예요. 놀고 그 권사님들, 사모님들 목사 표내는 데는 귀신입니다. ‘저 목사 옛날 어느 기도원에서 했고.’ 하면서 죽 있어요. 마치 K 팝 스타들 다 추적하는 것처럼, 다 그쪽 스타들 다 아는 겁니다. 그쪽 스타에 제치면 ‘저 어디서 굴러온 돌인가.’ 이렇게 무시해요. 박수도 안 칠 것이고, 아멘 소리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기 잘난 것을 끌어 모아서 젖과 꿀을 획득하겠다는 이런 이방종교적인 심보, 그런 것이 발달된 나라가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이예요. 거기는 거룩도 없고 언약도 없고 자기 힘으로서 남 침범해서 빼앗음으로서 자기 존재가치를 더 높이는 재미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1절을 봅시다.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찐저” 손에 힘 있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힘이 없으면 남한테 해코지를 안 하는데 이 말씀은 뭐냐, 힘은 방향성을 갖게 돼 있다. 힘은 간직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힘은 반드시 힘 꽤나 행사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힘 있다. 끝나는 게 아니에요. ‘한번 써 먹어볼까.’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힘 좋아하던 이스라엘, 유다나라, 그 큰 힘자랑하는 사람한테 먹힌다는 이야깁니다. 미가가.
그리고 그것이 약속의 땅에 숨겨진 비밀이었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숨겨진 그 비밀은 그 비밀을 논리적으로 다 하면 골치 아프니까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또 십자가를 믿는다 하잖아요. ‘그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이냐’라고 누가 물으면 단번에 답변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보면 십자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예수님 본인 자체로서는 약하고 아버지께서 건지신다는 믿음은 강하고, 그러니 자기 자신의 약한 힘으로 십자가를 벗어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아버지를 의지함으로써 아버지께서 나서서 예수님을 죽은 십자가에서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우리가 들어가네요.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은 참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그러니까 우리보고 ‘약하라’ 이 말 이예요.
이번 수련회 주제가 뭐였습니까? 무시당하라 이 말 아닙니까? 무시당하고 약하세요. 약한 것을 잊는 순간부터 우리는 강자가 되고 우리는 앗수르, 침략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약한 사람으로 살면 항상 그 순간은 우리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제발 약하세요. 벤츠를 모실 때도 약하게 몰고 다니시고 넓은 100평짜리 아파트에 살 때도 항상 겸손하게 에어컨 팡팡 틀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에어컨을 틀던 뭐를 살던 관계없어요. 약하다는 것은 어떻게 내가 이것 때문에 힘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만 아니면 돼요. 힘이 없어도 강자 노릇하는 사람 있고 힘 가진 것 많이 있어도 늘 약한 사람 있어요.
만약에 자기가 강자노릇하면 타인을 무시하게 돼 있고 자기가 약한 사람 되면 자기는 무시당해도 싸다는 느낌으로 사는 겁니다. 우리가 무시당해도 싸다는 느낌으로 살아야 돼요.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 많이 무시당하시고 많이 당한만큼 돈 ....., 저는 일부러 물건 살 때 약한가, 아닌가 말을 해보거든요. 세게 나오는 상인들 있어요. 그러면 안 갑니다. 뭣 때문에 돈 주는데? 약한 거 괴롭히는 그 재미로 돈 지불했는데, 지가 더 강해버리면 기죽어서 못 가죠.
그래서 세상이라는 것이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아 함께 살리라” 이 공식 말고 다른 준비된 공식은 이 공식 외에 없어요. 이 공식을 지금 가나안 땅 밑에서 약속의 땅에서 이게 뿜어져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몰랐던 겁니다. 유다 사람도 몰랐던 겁니다.
땅 위에 살면서 내 땅이 무슨 힘으로 사는지를 몰랐던 겁니다. 그걸 모르니까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거기다 밀가루 전 부치듯이 프라이팬에 뿌리듯이 퍼억 퍼지잖아요. 유감없이 거기다 사방팔방에 다 뿌리는 거예요. 뿌려서 나중에 굳어지니까 그게 바로 앗수르예요.
자, 그러면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미가서 5장 전체를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저 북쪽 가나안 땅을 다 점령을 해요. 제가 이렇게 ‘앗수르 군대가 와서 여러분 땅을 점령을 한다.’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렇게 할 거예요. ‘약속의 땅은 약속의 백성이 있어야 되는데 왜 침략자가 왜 약속의 백성도 아닌데 약속의 땅에서 왜 삽니까? 그러면 앞뒤가 안 맞잖아요. 하나님.’
가나안 땅은 점령해요. 그런데 약속의 땅은 점령을 안 당합니다. 그런데 앗수르 군대가 바보들 같이 뭔가 자기 딴아 ‘야, 가나안 땅을 점령했다.’고 거기서 자기들의 위세를 유지하면서 괴롭히는데 하나님께서 성도 아닌 사람이 핍박을 하게 되면 성도는 자기 힘으로 당해낼 수가 없어서 핍박을 받고 패배합니다. 그런데 그 패배했다는 그것을 빌미로 해서 약속의 땅이 가나안 땅으로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약속의 땅은 원래 하나님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하나님 계신 곳이 약속의 땅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는 철수했지만 약속의 땅에서는 철수를 안 했어요. 지리적으로 같은 땅이라고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지리적으로 같은 땅이 아니고 성전의 유무에 따라서 성전이 없으면 가나안 땅, 있으면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제가 이야기하면 ‘성전 불탔잖아요?’ 성전 불 탄 것은 가짜였고 진짜 성전은 포로 잡혀가는 그들을 성전 되게 하고 성소 되게 하는 에스겔의 그 다음 작전이 있었던 거예요. 그걸 사람들은 눈치 못 챈 거예요.
이스라엘은 쳤는데 진짜 이스라엘 알맹이는 쏘옥 다 빼버린 거예요. 주께서 따로 특별 관리해서 뽑아 세운 겁니다. 동방박사를 잡으려고 헤롯이 군대를 풀었는데 진짜 동방박사는 빠져나간 거예요.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덤벼들었지만 이미 천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가정은 애굽으로 이미 빠져나간 후에 그들은 베들레헴을 공격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이 이런 뜻 이예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은 우리 세상 재산을 보존해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 복음, 그 믿음은 우리가 어디를 가도 복음 안에서 살도록 주께서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걸 빼앗기는 가운데 빼앗겨도, 빼앗겨도 빼앗기지 않는 게 있어야 돼요.
오늘 이 말씀하고 설교 마치겠습니다. ‘순교자’라는 유명한 소설에 나오는데 여러 번 제가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면 알 거예요. 북한에서 예수쟁이를 잡아 죽이는데 기껏 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 사진 그려놓고, 위에서 ‘니가 밟으면 기독교 신자 아니라서 살려줄 것이고, 만약에 주저주저하면서 예수님 십자가, 얼굴을 못 밟고 지나가면 니는 기독교 신자니까 죽여 버린다.’라고 인민군이 그렇게 했다 말이죠.
그 소설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이번에 수련회에서 동방정교회가 무슨 짓을 했는가는 아시죠? 예수 믿기 위해서 아이콘과 성화 그림을 그려놓고 그거 제작 생산해서 거기에 뽀뽀하면 구원받고 하는 조치가 정통 러시아 정교회, 현재 그리스 정교회, 그들이 하는 짓이라 했잖아요. 카톨릭도 못지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걸 제시해서 밟고 지나가면 그건 그 종교 안 믿는다 하는 그 수법은 앗수르, 소위 언약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기껏 자기 종교 유지하는 방법이 그 방법 이예요. 형상 지키시면, 형상은 형 + 상인데, 모양과 이미지, 그런 것을 통해서 신에게 접촉을 시도하는 그 인간적인 종교성, 그 종교성은 차라리 시키지도 않아도 우리가 평소에 우리를 밟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인민군 장교가 바보짓 한 거예요. 진짜 예수쟁이는 다 놓친 거예요. 가짜 예수쟁이는 다 죽이고.
하나님께서 앗수르 같은 그런 시험들이 지금도 시작되는 이유가 하나님이 나를 믿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붙잡아서 구원받는 것인지,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 시험케 하는 겁니다. 주께서 복음 주어서 믿게 하면 그 복음이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다.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구원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 쪽에서 어떤 형식을 만들고 법을 만들어서 ‘이것대로 지키면 나는 구원 받겠지.’ 라고 한다면 꼭 똥파리들이 따라서 그것 가지고 시험을 해요.
본인 스스로가 시험받는 짓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 마지막 시험은 죽는 거였어요. 그 죽은 그 시험에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평소에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고 지 살려고 믿은 거예요. 지 살고자 예수님이 도움이 될까 믿은 거예요. 다 도망갔습니다. 다 도망간 것을 성령이 와서 뒤쫓아 가서 한사람, 한사람 다 불러내어서 예수 안에 디 집어넣었잖아요. 그 긴 로봇 팔, 가제트 형사, 모자에서 나온 긴 로봇 팔이 나와서 어디 있든지, 바다 끝에 있든지 땅 끝에 있든지 하나, 하나, 집어넣어서 ‘니는 이 피로 영생 얻어야 돼, 니는 빼도 박도 못하고 못 빠져 나와.’라는 그러한 것을 우리는 언제 느끼는가, 내 식으로 내 신앙을 지키려고 부질없는 노력을 할 때 문득 우리는 그 느낌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결론은 앗수르가 있어야 되고, 어쩌면 우리자신이 매일같이 나를 앗수르 같이 내가 나를 괴롭히는, 주님께서 만든 나를 껍데기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돌아보게 하는 말씀 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 감사해야 될 텐데 예수 잘 믿는 나에게 감사하는 이 모순, 그런 식으로 신앙 있다고 버티는 이 교만, 그것이 힘이 되리라고 여기는 힘센 사람 되고 싶어 하는 야망, 주여 부질없는 그런 짓 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져 주께서 주도하시고 함께 하시고 주의 작품으로 만들어 나가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만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