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12:21-23 (유월절의 피)
Re..출 12:21-23 (유월절의 피)
이름 : 이근호(IP:)
유월절의 피
2004년 4월 25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2:21-23
12: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12: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12: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집 문 밖으로 나가지 마라', 히브리인들은 꼼짝없이 갇힌 셈이 되었습니다. 과연 자기 집에 갇혔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피의 약속 안쪽으로 갇혔을까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가두어두십니다. 그것은 안과 밖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용서가 피어나는 안과 용서 대신 저주가 가득 차 있는 바깥 세계를 구분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신약에서 '예수 안'으로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2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 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우리 인간에게 안과 밖을 모두 장악할 권리가 아예 없더란 말입니까?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안과 밖이라는 제한이 가해졌습니다. 에덴 동산 밖으로 추방된다는 것은 곧 저주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간다는 것은 생명나무의 혜택을 입는 세계로 진입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축복과 저주의 공간이란 인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고 말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행복의 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에덴동산의 즐거움과 무관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삼스럽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안과 밖을 구분 지으려고 합니다. 그 구분 짓는 기준도 사람에게 묻지를 않습니다. 현재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식이 아닙니다. 단, 애굽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불필요하고 어리석다고 간주되는 방식이 동원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문설주에 피로 페인트 칠 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수월할까요 아니면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예수 안에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수월할까요?
이점에서 대해서 함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옛날 애굽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알아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보기에 히브리인들의 종교가 너무나도 시시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애굽 인에게 있어 애굽 나라는 어디까지나 자신 소유의 나라이기에 그 주인행세에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소수 종족의 일개 종교일 따름이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타종족의 종교가 모든 인류의 유일한 종교인 것을 그들은 용납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종교마저 주인이 믿는 종교만이 권위를 받는 종교가 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모든 것을 소유자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에게 어떤 절대적 진리를 배우고자 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저들이 아직도 우리 것이냐 아니면 우리 것에서 떼어주어야 하는 소유관계로만 계산할 뿐입니다.
사람이 뭔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소유물로부터 모든 논리가 전개되어 나옵니다. 슬픔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하는 감정도 모든 것이 '뭔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나올 수 있는 감정에 불과합니다. 소유의식은 감정이 나오는 기초가 됩니다.
'있음'은 그 자체로서 그 '있음'을 포기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습니다. 있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워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기쁘고 즐거워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신이 자기에게 행운을 주는 흔적을 늘 찾고자 합니다. 교회 나오든지 절에 다니든 마찬가지입니다.
애굽 사람들처럼 소유의식이 기본이기 때문에 소유가 늘어나면 신의 축복이라고 여기고 소유가 줄어들면 신으로부터 별다른 혜택을 못 입고 있다고 간주합니다. 바로 이러한 '있음'이나 소유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빛내기 위해 인간은 온갖 재주들을 거기에 적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신의 논리나 주장을 이해가 될 수 있어도 그 있음에 대한 소유권을 전면 부정하는 논리란 그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어린양에 기초를 두고 나오는 논리는 '연속'이 아니라 '단절을 촉구하는 겁니다.
즉 그 어떤 소유권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 앞에서 무효가 된다는 겁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것을 전혀 용서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공간이 되었던 시간이 되었던 하나님의 능력이 개입해 버리면 모든 것은 영속성이 인정받지 못하고 단절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소유의식에 대한 부정적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을 높이는 모든 것은 용인이 되지 못합니다. 12절에 보면,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 나라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애굽의 모든 신을 치신다는 말은 신들 위에 신이 따로 계신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그 신께서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간주되면 모조리 멸망시킨 신임을 천명하십니다.
인간들은 자기 소유를 찬란하게 빛내보려고 합니다. 온갖 신경과 관심을 자신의 소유물에다 집중시키고 애지중지합니다. 목숨 이상으로 간주하면서 관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찬란한 꿈도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모두 무너져 내립니다.
그동안 퍼부었던 정력과 수고도 한순간에 헛발질로 드러나 버립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이처럼 허무로 종결됩니다.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는 하나님의 일은 마지막 피로서 말하고자 합니다.
즉 피를 가지고 피를 요구하시는 겁니다. 피와 피의 만남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정수로 보여주는 바입니다. 즉 죽음이 없이는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23절에도,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예 단단히 벼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세력이나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은 무너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히브리인들의 사정을 봅시다. 그들은 어째서 하나님의 재앙에서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들은 따로 뭔가를 소유해야 하는 민족이 아니라 아예 여호와 하나님에게 소유 당해야 될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을 대표하는 것은 피입니다. 이 피는 하나님이 넘겨주신 피입니다. 이 피가 피를 부르는 하나님 사자를 마중 나갑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히브리인들의 문설주에서 뭔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집 안으로는 목숨을 빼앗기 위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도대체 문설주에 발랐던 피가 무슨 피였기에 그냥 넘어가 버리는 겁니까? 이것은 애굽인의 가정과 비교함으로서 밝혀집니다. 애굽 인들은 하나님의 사자를 저지할 방도를 갖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 존재 자체를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신을 앞장세우면서 자신을 지켜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른 신이란 곧 여호와 하나님이 평소에 적으로 간주했던 그 신입니다. 도리어 화를 자초한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문설주에 발랐던 그 피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취하고자 했던 그 흠 없는 피입니다.
죄가 없는 곳에는 저주도 없기 마련입니다. 죄 없음이 히브리인들을 구원한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의를 만족하지 못하는 대상은 저주로서 앙갚음을 하는 것이 그 분의 임무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이란 저주의 대상에게도 동일하게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단출하고 간결한 결정입니다. 구약에서의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일이나 신약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나 모두 세상 적인 소유의식에서 완전히 탈피된 상태에 들어간다는 점에서도 동일한 마음가짐입니다.
애굽 같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원리와 전혀 상관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축복 안'과 '축복 바깥'을 확정짓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피로 구원이란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방식입니다.
피로 구원하기에 그 피를 생산해 낼 수 없는 존재들인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구원 불가 판정'인 셈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구원 불가'를 수용하는 인정하는 견해입니다. 구원불가의 대상 안에 구원자가 들어앉은 셈입니다.
그렇게되면 히브리인들은 그 때부터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죽음의 사자가 히브리인들을 공격할 수 없는 이유는 자기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피만 의지하는 피의 백성입니다. 이것은 언약과 인간의 관계가 오직 피만으로 맺어짐을 확실히 보여준 조치입니다.
이 유월절이 지속됨으로서 피는 역사를 따라 계속 흘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와 더불어 죽음의 사자도 따라 붙입니다. 죽음의 사자는 지속적으로 유월절 양상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아예 하나님의 자기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피 밖에서 성도는 늘 죽음이요, 피 안에서는 늘 생명을 제공받고 있는 사이가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상은 비 언약적으로 자기만의 신으로 자신들의 호위하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조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할 때,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피를 대신 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진정 피만이 생명인 것을 안다면 피가 발려야 될 자리에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이 성취하시는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피의 전달자입니다. 피 만을 증거하기 위해 남은 생애를 지새야 될 자들입니다. 그리고 피로서 세상을 판단하며 피로서 세상을 구별하는 자들입니다. 피가 없는 곳에 저주가 임함을 유일하게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피 안에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