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두움 120810
빛과 어두움 120810
이름 : 이근호(IP:117.55.135.113)
김창길(IP:210.♡.60.38)
12-10-01 19:30
서울 의존교회120810a (빛과 어두움)―이 근호 목사
살전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살전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살전 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살전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너희’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희’ 또는 ‘너희’, ‘형제들아’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제가 적어볼게요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저희’ 또는 ‘너희’, ‘형제들아’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을 하나님께서는 표현하려고 하느냐 하면 ‘어두움’이라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어두우니까 심판받았고 멸망되어야 됩니다.
보통 어둡게 표현하려면 도화지에 검은색 크레파스만 있으면 되겠지요. 도화지에 검은 것을 그려 보세요 하면 도화지에 검은 크레파스로 문지르면 새까맣게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너희 저희는 이 사람들은 크레파스가 아니고 사람이죠. 사람을 가지고 어둠을 묘사하고자 하는 겁니다. 어두움과 빛을 묘사하죠. ‘저희는 어두움이고 너희는 빛이다.’ 할 때 도화지로 그림을 그리라하면 까맣게 하얗게 그리면 쉬운데 사람을 가지고 어두움을 표현하고 사람을 가지고 빛을 표현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자신을 어두움으로 표현하고 싶은 사람 손 들으라고 하면 아무도 없을 거예요 왜냐 하면 우리들의 일상 상의 관심사는 일해서 돈 벌어서 밥 먹고 사는데 관심이 있지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동원될 의사는 우리한테 없습니다. 우리 살기도 바쁜데 거기에 왜 동원되느냐 말이죠.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성경 말씀은 네가 어디에 관심 있든지 상관없이 너로하여금 빛과 어두움, 어둠과 빛. 그것을 표현하는데 나는 너희들을 거기에 집어넣겠다. 라는 것이 하나님의 단호한 고집이 있습니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빛과 어두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피조물이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는 전부 다 사적인 생존의 문제가 우선이고 그게 전부입니다. 크레파스라면 검은 색으로 그리면 쉽게 어두움이 되고 하얀색으로 칠하면 빛이 되니까 어렵지 않지요 인간을 가지고 빛과 어두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크레파스가 아니고 사람인데 사람을 가지고 빛과 어두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계 문제, 세상 문제는 하나님의 관심사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 우리가 사는 것이 그냥 일상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뜻에 동의 하지 않는구나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에 대해서만 관심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한 적이 과연 있었느냐? 여기서 우리가 구약이라는게 필요한 거예요 신약에 나오는 빛과 어두움은 상당히 추상적인 것입니다. 손에 잡히지 않아요. 실체가 없습니다. 빛 오백원어치 주세요 이러면 말이 안되잖아요 어두움 두근에 얼마 합니까? 이게 말이 안된다 말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실체가 없다 이 말입니다.
실체가 없는데 너희, 저희, 신월동 시장 통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있잖아요 뱀은 이제 그만 나오게 했지요 뱀 열댓 마리 나왔으면 많이 나온건데 뱀이 나와서 너희, 저희, 형제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 말이죠. 우리가 그냥 빛과 어두움 같으면 뱀, 호랑이가 와도 별로 놀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실체가 아니니까 하지만 뱀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놀라지요 멀리 대구에 있는 나도 걱정되는데 혹시 미아씨 자는데 뱀이 와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무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 되더라구요
이 실체인 인간의 몸가지고 추상적인 빛과 어두움을 묘사하는데 먼저 동원된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구약이 중요한 거예요 구약은 역사라는 바탕위에서 이스라엘 사람이나 우리나 자기 생계 문제, 생존 문제가 우선이에요 생계 문제, 생존 문제가 우선인 그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을 표사하는데 그들은 동원되어서 거기에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 작업에 들어 가면서 그들이 오해들이 왜 없겠습니까? 나름대로 빛과 어두움을 성사 시키는데 나름대로의 오해가 있었죠. 그 오해의 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모세가 생각하는 빛은 자기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서 새로운 증거를 세워서 이스라엘의 중심의 증거를 세워서 자기 백성들을 질곡과 흑암에서 해방시키는 그러한 해방자로서 등장함과 정의 사회를 구현하고 불의가 없고 거기 법대로 바로 시행되는 그런 사회를 그런 세상을 모세는 꿈꾸었습니다. 그게 빛입니까? 아닙니다. 빛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한 그 모세의 행동이 어두움의 세력 앞에 오히려 현상수배범으로서 쫓겨가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하는 그런 정의로 결심과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서 하나님을 생각해서 이 땅에서 이상적인 천국을 이루겠다는 그 사고방식이 놀랍게도 어두움의 다른 형태였고 어두움의 변종이었습니다. 다른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자기 민족을 그런 식으로 해방하겠다는 것은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의 한계입니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기껏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고 하니까 율법지키는 것을 바리새인한테 욕할게 아니라 누구든지 인간으로서 율법을 대하면 그 정도, 그게 전부입니다.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까발리시고 그 한계로서는 오히려 어두움에게 쫓겨 다니는 그런 꼴사나운 꼴이 되게 만들었다 이 말이죠. 어두움은 그대로 건재하고 어두움에서 빛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어요 모세마저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빛을 시절을 만들 때 인간이 기껏 그 정도 실력밖에 안된다면 아예 애초부터 써 먹지를 말아야죠. 이게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믿음 좋을 때는 하나님께서 써 먹을 것이고 내가 믿음이 안 좋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거든요 ‘아이 나 같은 사람은 믿음 없으니까 나 같은 것은 쓰지 마세요’ 마치 기드온이 하나님의 성신이 임할 때 자기는 아주 극구 사양하지요 ‘나 같은 사람은 안 됩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쓸만한 사람을 써야지 나같은 사람은 최고로 비겁한 사람인데 그런데 제일 비겁한줄 알고 찾아 왔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그 빛과 어두움은 빛과 어두움을 묘사할 때 인간의 몸체, 실체가 있는 인간을 빛에 배당하고 어두움에 배당하는 식이 아니고 어두움을 실체로 만들어 놓고 그 어두움이라는 실체로부터 핍박받는 억압당하는 형식이 그게 바로 빛의 자녀가 되는 방식을 사용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빛이 되느냐 할 때 ‘너는 너의 한계만 들어낼 뿐이다.’ 주께서는 그런 식으로 접근을 금지합니다. 어두움이 인간의 몸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발산하느냐를 보여 주는 겁니다. 그러면 애굽이 어둡다고 해서 애굽이 만날 나쁜 짓만 하고 살인만 하고 그랬습니까? 아니죠. 애굽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하면 그냥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는 겁니다. 애굽 나라에 단 하나 빠진게 있어요. 뭐냐하면 출애굽기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요셉의 은혜를 안 지켰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우리 힘으로 살아간다고 여기는 것, 이것 보다 더 큰 어두움은 없다고 주께서는 판정을 내리십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도 만만치 않습니다. 히브리인도 마찬가지에요 ‘애굽 나라가 있음에 우리는 행복하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해 히브리인이나 애굽이나 똑같아요. 그런데 애굽은 애굽으로서 행복하다가 되고 든든하다가 되는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나는 애굽 나라에 그냥 살기만하면 됩니다.’라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허락을 안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신월동에 살고 있는 우리가 빛의 자이냐 어두움의 자녀냐 라는 판정은 간단합니다. 그냥 내가 가진 것 가지고 내가 열심히 번 돈 가지고 내 건강 가지고 그냥 밥 먹고 살면 충분히 천당 가겠다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예외가 없어요. 그 생각에 머물도록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바로 같은 생존과 돈과 권력에 대해서 같이 경쟁하면서 빛의 자녀가 밀리게 되고 손해 보게 되고 당하게 만들고 패배자가 되는 주께서 그런 식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 힘으로 내가 살수 없구나, 그렇다면 나는 살수도 없는 인간이 이 땅에 왜 태어났으며 등장해서 왜 힘들게 이 땅에서 버티어야 되는가? 자기 자신의 문제, 포지션, 영어로 말하면 position 우리말로 하면 어떤 지점, 위치, 자리를 말합니다.
내 자리가 과연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뒤에 그 다음에 자기 자리가 있다고 여깁니다. 내가 있고 내가 옷을 입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 자리가 건전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을 뒤틀어 버리는 겁니다. 자리가 먼저 있고 그 자리에 맞춘 백성을 추후에 생겨나게 했다는 식으로 순서를 바꾸는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순서를 바꾸는 작업은 내가 여기 있고 나를 위해서 어떤 내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로, 소거되고 제거되어야 되고 소멸돼야 해요 쉽게 말서 죽음이고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사라져라 얍’입니다.
내가 있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적절한 자리를 줘야 됩니다. 하는 인간아! 그 인간은 사라져라 얍! 사라질 위인이 없습니다. 안 사라집니다. 한 고집들 하거든요 사라지도록 그런 생각이 자신에게 위기가 초래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무엇을 이용하느냐 하면 어두움의 포지션을 갖고 있는 자들을 충분하게 이용을 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오기 직전에 애굽나라에 열 가지 기이한 자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자연이라 하는 것은 마치 큰 규모의 하우스, 집이에요. 자연은 우리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환경 같은 겁니다. 자연이 변란이 일어나 버리면 주기성이 깨진다던지 반복성이 깨진다던지 갑자기 태풍불다가 갑자기 가뭄된다고 하면 누가 곤란합니까? 날씨가 38도까지 올라가고 서울이 38도까지 올라간게 몇 십년만에 처음 이라 했지요
우리는 지금 자연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의지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이 고요하고 정상적으로 주기가 질서가 잡힐 때 우리는 안전감을 느끼고 생존의 터전으로 의존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애굽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립니다. 10가지를 흔들리라 하지요 흔들리라 하니까 주께서 흔들기 전에는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애굽이나 일본이나 이웃에 살아보세요 떡 하나 나눠주고 하는 그런 사이에요 뭐 감정 생길이유가 없습니다. 음식 쓰레기 대신 버려주고 하는 그런 사이고 택배 오면 대신 맡아주고 다 주는 게 있고 받는게 있는 그런 사이인데 주께서 의도적으로 강제로 빛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를 압력을 가해서 자연을 통해서 그렇게 분류시키고 말았습니다. 당황스러운 것은 양쪽다 당황스러워요
이번 강의 첫 번째 중요한 단어 나옵니다. ‘당황스러움’ 빛의 자녀의 특징이 뭐냐 ‘당황스러움’이 있어야 됩니다. 어, 이럴 수 없는데 이러면 내 포지션이 제로인데 내 위치도 있고 내 자리도 있었고 이 자리는 나를 먹여 살리는 자리인데 이 자리가 제로이면 나는 어떻게 살죠? 나는 뭐하고 살지? 내가 소멸되겠네, 내가 사라지겠네!
안양 강의에서 그런 질문을 했어요. 아담이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답변했습니다. 소명한다는 뜻입니다. 큰 땅덩어리에 작은 부분 땅이 결국 죽어서는 없어져 버려요 땅 속에 그냥 편입된 것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잠깐 있다가 말라비틀어지는 그런 암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이었습니다. 흙에서 왔으면 흙이라는 위치가 우선인데 우리는 몸이 우선이고 흙은 나중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살아있는 게 먼저이고 죽음은 기이한 현상이라 보는데 중요한 게 뭡니까? 우리가 원래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이 삶보다 순서적으로 먼저 있었던 겁니다.
흙이 먼저 있고 흙에서 발생된 것이 우리의 몸체이고 그 몸체는 잠시 있다가 ‘있었나?’ 하는 소리와 더불어 휙 불어버리면 다시 원상 복귀되어 가지고 불에 타고 나중에 보면 아무 것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유가 뭐냐?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을 표현해 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인간이라는 실체가 빛과 어두움이 추상에 불과한데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빛과 어두움은 추상이 아닙니다. 실제로 캄캄한 어두운 세계는 지옥이라고 표현되고 하여튼 어둡습니다. 반대로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니까 천국은 해와 달도 쓸데없더라 해와 달을 조명기구로 주문했는데 가져가라는 거예요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빛 자체가 해와 달의 색깔을 무색하게 만들어요 마치 태양안의 초불처럼, 태양 앞에 초불처럼 태양이 초불정도밖에 안됩니다.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잠시잠깐 눈부심을 경험했습니다. 빛이라 하는 것, 빛의 세계라고 하는 것을 잠시 경험했습니다. 감히 얼굴을 들고 볼 수가 있어요. 너무 빛이 빛나서……. 모세도 잠시 경험했습니다. 빛이 있음에 졸지에 어둠의 세계에서 밥먹고 살려고 애썼다는 사실이 들통난 겁니다. 빛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어둠에 속한 나를 위하여 빛이 있다는 그런 되지도 않는 그런 망상을 꿈꿔 왔던 겁니다. 자기가 우선이 아닌데 하나님이 창조가 우선인데 그 창조를 흔들어 버리니까 같은 창조물중에 하나인 우리도 같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만원버스 흔들리면 내가 흔들리면 다 흔들리잖아요 파도 치면 선장은 안흔들립니까? 다 흔들린다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면서 흔들리라 하는데 어떻게 흔들게 하느냐 하면 첫 번째부터 세 번째 까지는 같이 흔들어요. 네 번째 쉬고 다섯 번째부터는 애굽이 사는 동네와 히브리인들이 사는 동네와 차별해서 하나님의 자연을 다루십니다. 그러면 자연세계라 하는 것이 결국은 해와 달과 우박과 메뚜기라는 것이 실체 아닙니까? 메뚜기가 손에 만져지잖아요 실제로 있잖아요 물체아닙니까? 그 물체 내부에 하나님의 추상적인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이라는 우리 보기에는 추상적으로 보이는 그런 세계가 먼저 존재하고 그 세계를 꽉꽉 채우기 위해서 이 자연 세계가 흔들기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에 덩달아서 우리 인간도 같이 흔들린다는 사실을 애굽의 10가지 재앙에서 우리에게 보여 준 겁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우리는 애굽 사람이 왜 나쁜지 애굽 사람을 그렇게 벌 하는지 이유를 몰라요 모르는데 성경에 10가지 재앙이 차분하게 진행되는 가운데서 무엇을 알았느냐 하면 바로의 마음이 갈수록 강퍅해 져요 바로 이 사람은 우리 보다 성격이 못되고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사람과 히브리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한 조치가 발현되면서 바로 왕이 마음이 강퍅한 마음으로 서서히 진행됩니다.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긍휼과 강퍅을 구분하지요 구분할 때에 ‘야 너 강퍅할래? 긍휼히 여길래?’ 이렇게 묻지를 않는 다는 사실이에요. 물어 버리면 바로 까지 저 긍휼 입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존재가 없어지고 자기는 나중이 되잖아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바꿔치기 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있고 그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겁을 주는게 아니고 긍휼이라는 포치션, 위치가 먼저 있고 그 긍휼이 긍휼답게 가기 위해서 크레파스처럼 사용되야 될 창조물의 일부를 한 곳에 집합 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긍휼 쪽에서만 그렇게 작업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작업이에요. 긍휼한 자를 모으는 작업과 같은 식의 작업이 뭐냐 하면 강퍅해야만 하는 사건을 따로 모으는 작업을 또 시도 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 이렇게 하면 드디어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는 이 문제는 벌써부터 떠나 버리죠. 계속해서 애굽 이야기하고 히브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사실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왜 시장 통에서 물건사면서 물가 오르는 것을 그것만 현실로 사실로 보고 왜 성경에 있는 이런 내용은 마치 비현실인 것처럼 이것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사고방식이 우선 내 존재 자체를 실체로 보는 거예요
실체는 빛과 어두움이 실체인데 진짜가 있는 것은 내 몸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번 수련회에 의존교회가 많이 참석을 못했는데 며칠 전것까지만해도 수련회 내용을 간추려서 하나라도 설명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그렇게 생각을 했었지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람이 자기 위치가 없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정해 준 자리가 우선이 아니고 내 존재가 우선이 돼 버리면 여기서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로고스라는 겁니다. 지금 수련회 강의 한참 많이 듣고 계시지요? 제가 너무 앞서가서 실례의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로고스라는 것을 다른 말로 말, 또는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할 때 그게 로고스입니다. 그 단어가 로고스라는 단어에요 로고스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뭔가 있다는 거예요 쉽게 예를 들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내가 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중요합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내가 있는데 매일같이 나를 내가 있게 만들어서 열심히 만들어서 내가 있는 것은 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저 해와 달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거기다 올려놓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해를 이렇게 달까, 밤에 달도 달고 별도 몇 개 이렇게 달아놓고 내가 안 했다는 거예요 내가 손을 안 댔는데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무서운거예요 우리의 평소의 버릇이 내 하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누가 내 할 일을 안 도와 주거든요 밥 먹을 때 내가 숟가락 들고 먹어야 돼지 치매 걸리지 않는 이상 누가 먹여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소변보는 것부터 밥먹는 것까지 전부 다 내가 사는 거예요
내가 하나씩 알아서 하기 때문에 지금 까지 버티고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세수 안하면 얼굴이 시커매 지지요 내가 나를 손 타야 되고 손 데야돼요 우리는 거기에 집중해서 우리는 로고스, 다른 말로 깨닫는 이성, 이치적 합리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저 해와 달은 내가 아침마다 손질했습니까? 해와 달을 막 닦아주는 겁니까? 내가 손질도 하지 않았는데 거기에 있다는 것은 그 이유를 내가 알아요? 몰라요? 내가 모르는 거예요 내가 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요.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서 출근해야 하는 줄 아는데 해의 때를 어떻게 닦아주는지는 내가 모른다 말입니다. 모른 잖아요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은 항상 내 미래에 위험요소가 되는 거예요
해결책은 뭡니까? 하나밖에 없어요. 해를 만드신 분에게 아부하면 됩니다. 뇌물주고 아부하는 거예요 주여 제가 아는 게 나밖에 모릅니다. 해 달 그것은 하나님이 신히 만들었기 때문에 신은 저보다 많이 알잖아요 그러면 내가 해와 달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잖아요. 모른다는 말은 뭐가 되느냐 하면 나의 미래가 불확실하다 이 말입니다. 내가 어떤 계획과 목표를 세워놨는데 해와 달이 어떻게 방해 할지 모르잖아요. 해와 달을 신을 만들었기 때문에 뇌물을 주고 약을 쓰는 거예요 나보다 더 많이 아시는 분이 내 앞길을 제발 훼방하지 말고 도와주기라도 좀 해 줘 하고 미리 초를 써놓는 게 사전 작업을 하는 거예요 혹시 복이 올까 싶어서…….
그게 뭐냐, 중심이 뭡니까?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게 중심이고 해가 존재하고 달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존재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 존재하는 거예요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 스톱시켜 보세요. 다 존재되지요 그렇다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로고스가 나오죠 로고스가 뭔가 하면 신께서 우리의 지혜를 능가하는 내가 아는 것은 일상뿐 이지만 내 일상 보다 두루두루 나 말고 저 강아지부터 두루두루 아시는 것은 신께서 로고스를 보래서 했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해와 달이 이상하게 같은 시점에 그 자리에 오더라 이 말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것을 하나님의 마음, 신의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 때는 똑같은 것을 반복하잖아요. ‘신이여, 신이 있다면 마음을 나타내 보이소서. 오 아침에 해 뜨고 또 뜨네 달이 오니까 조수간만의 차가 있네 별자리가 바뀌니까 일식이 있네’ 인간의 로고스가 발현되어서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동방박사 그 사람들은 종교인들이 되는 거예요 성직자 되는 거예요 성직자는 일반 사람들이 농사지을 때 미리 앞당겨서 지금 쯤 물고를 개방해야 됩니다. 조금 있으면 장마옵니다. 하면 ‘장마오네 야 저 사람 도사다’ 도사가 아니에요 천문학같은 별자리를 보고 늘 하나님의 마음이 뭐냐 하면 같은 일을 되풀이 한다는 것은 신께서 질서 있는 신께서 자기 마음을 팍팍 보여준 거예요
야들아 이게 내 마음이니까 네가 알아서 기라 하고 보여준다 말이죠.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이 바로 성직자들 천문학자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앞을 미리 예측해서 농사짓는데 보탬이 된다면 충분히 월급 받을 그만한 일을 한 거죠 신은 무질서하게 하지 않고 질서 있게 착착 하는 겁니다. 질서 있게 하니까 우리는 그 질서에 감사하면서 신께 드릴 것 드리고 우리 것 쓸 것 쓰면서 시작하면 되는 거예요 그 자연, 그 로고스, 그 이성, 하나님의 질서 그게 애굽 10재앙때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혼란에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애굽의 10재앙때, 나는 애굽의 모든 신들에게 보내 주겠다. 문제는 벌 주시는 하나님이 나타나는게 이게 문제에요 벌을 주는데 벌을 주는 그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벌만 오지 벌을 주시는 분이 오지를 않아요. 나타나지를 않아요 몽둥이가 몽둥이 자루를 들수가 없습니다. 맞기는 맞았는데 누가 때렸는지 몰라요 그러다 보니까 왜 맞았는지를 몰라요 신에게 그동안 뇌물을 많이 줬는데 갑자기 때린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신이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너희들이 신의 마음이라고 천문학을 통해서 잡아놓은 자연 질서, 그것은 신의 마음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신의 마음을 어디서 찾아요? 이제 새롭게 구성되는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서 신의 마음이, 신의 뜻이 거기에 모일 겁니다. 그들의 움직임 이스라엘의 움직임과 그들의 모든 행동이 신의 뜻을 듬뿍 담고 이동할 거예요 마치 거북이 위에 가마 얹혀서 사람 태우고 가듯이 느린보 거북이처럼 느릿 느릿 가게 되면 그 주변에 신이 아닌 것들이 들통나고 폭로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포지션, 위치, 자리라고 한 겁니다. 그게 바로 무슨 자리이냐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들추어내는 빛의 자리 언약의 자리,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 이스라엘의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합니다. 아하, 우리 살려주려고 애굽을 쳤구나 하는 것은 이것은 말도 안되는 엄청난 오해입니다.
진실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내 존재가 우선이고 나를 먹고 살게 해 줘야 좋다는 내 존재가 신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존재를 위해서 신이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이 주님께서는 그것을 뒤바꾸는 작업을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이 작업의 롤 모델을 야곱을 통해서 이미 실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야곱을 통해서 했고 이스라엘를 통해서 했습니다. 이삭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밀어주는 아들한테 모든 것을 밀워줬다가 납득을 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동원해서 거짓말이 진실이고 진실이 거짓인 것을 드러내는 거예요 완전히 역전이에요. 반전이에요. 뒤바꿔버려요 빛이 어두움이고 어두움이 빛이에요. 이단이 예수님인 구세주고 이단이 아니라는 그들이 이단입니다. 그 모든 반전 그 모든 뒤바꿈은 자기 로고스 중심입니다. 인간의 자기 존재중심이에요.
로고스라는 말은 왜 있느냐? 나라는 존재가 신의 도움을 받기 위한 신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유일한 것이 이 로고스라 이성이라 또는 질서라 또는 반복되는 질서 또는 말이다. 이렇게 본겁니다. 그 로고스를 깨는 로고스가 드디어 예수님입니다. 로고스를 깨는 로고스, 교회에서 그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로고스가 말씀되었다는 말씀을 다 하는데 로고스가 육화되었다는 것의 교리가 삼위일체입니다. 그런데 그 로고스를 깨는 로고스 또는 다른 말로 그 로고스에서 깨져 버린 로고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복음과 교리가 갈라지는 그 지점을 추적해서 진짜 구원받는 생명의 결과 교회라는 넓은 길이 어디서 문제가 돼서 어디서 갈라졌으며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했는가 모든 말씀의 오해는 바로 자기 존재의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에 오해가 되는 겁니다.
정답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소속되어 있는 위치가 뭡니까? 그 위치에 부합되도록 주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고 다듬어가는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정하는 겁니다. 그것도 그때그때 마다 재료를 뽑아서 정하는 것입니다. 전주 비빔밥 같은 경우에 보면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시키면 밥있고 나물있는데 여러 가지 나물과 고기와 계란과 고추장을 넣어 비비면 그게 뭐가 되겠어요? 하나의 비빔밥이 되겠지요 그 비빔밥에 가미되는 요소들이 비빔밥 될 내가 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는 저 남편 싫고 이 남편 좋고, 나는 저 아내 싫고 이 아내 좋고 저 자식 싫고 이 자식 내 자식하고……. 우리가 비빔밥을 만들 자격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되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왜? 내 존재가 우선이니까 내가 비빔밥이라면 이런 맛있는 비빔밥이 되고 싶다는 내 생각이 따로 있어요 그것은 내가 정하는 내 인생인데 그것을 주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그 남편 만나야 내가 비빔밥 돼요 다시 태어나도~ 하는 노래 그것은 좋을 때 부르는 노래이지 갈라설 때는 부를 수가 없지요 끔찍하지요 나를 만들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속해 있는 포지션, 위치를 만들기 위해서 나를 하나님께서 이용한 거예요 너는 이런 요소 이런 요소로 비빔밥 되어야 그게 가장 너다운 너야 긍휼 입은 너다. 긍휼의 자리,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요소를 집어넣는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빛의 자리가 되기 위해서 내가 고집을 부리는 샘이 되어 버려요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그렇게 만들면서 이스라엘을 어디로 몰아넣느냐 하면 끝까지 멸망 시켜 버립니다. 소명시켜 버려요 멸망시켜요
멸망시킬 때 이스라엘의 존재입장에서는 우리 참 망했다 이렇게 되지만 그게 망한 것이 아니고 그게 성공이에요. 망해야 그게 성공한 겁니다. 내가 망해야 내가 살아요. 내가 정해 놓은 인생이 망해야 주께서 정해 놓은 내 인생이 보이는 겁니다. 내 인생을 내가 정해 버리면 우리는 지옥갑니다. 백부장이 뭐라 했습니까? 가라하면 오라하면 오나이다. 쉽게 말해서 까라하면 까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누가 까라 깝니까? 주께서 까라 해야 저는 그때 까이는 제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주님한테 납품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멋있는 인생 만들 어서 주앞에 드리되고 이거 넣어주께요 하고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정하고 내가 정한 인생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정할 자격이 없어요 ‘나’라는 인간이 구성될 때 필요한 모든 구성요소는 주께서 적절하게 필요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곳곳에 그것을 배치해 놓고 그것을 잡아서 오늘의 나를 만든 겁니다.
말이 나지 인생이라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포라해요 얼마나 얻어맞았으면 찢어져서 유포가 돼요 러닝셔츠 바위에 쳐보세요 구멍 뻥뻥 뚫려서 너덜너덜한 천만 될뿐입니다. 그게 오늘날 우리모습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고집이 안 죽고 살았다고 너덜한 천 가지고 걸레조각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쳐주는 것도 주님의 은혜에요 강퍅해 하는 우리를 쳐서라도 긍휼을 깨닫게 만드는 식으로 나가는 인생을 만들어서 빛의 자녀로 집어넣은 거예요 빛의 자녀에 합당한 것은 오직 긍휼, 사랑, 자비만이 빛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다른 것은 필요치 않아요. 우리는 혼자되어 버리면 자만과 교만이 주특기가 되어버립니다. 시기와 질투, 남이 가진 것 뿔따구 나서 못견디는 것, 남 잘되면 배가 아파서 뒹굴 수 밖에 없는 그것, 우리는 기껏 그게 주 특기에요 그것밖에 못합니다.
그것은 어두움의 자녀에요 어두움의 실체에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종말을 이야기할 때, 끝을 이야기할 때 우리 보고 끝을 기다리라고 하지 않고 아예 우리 자체 속에 끝을 집어 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움직이는 것 끝 이동하는 것 끝 활개 치는 것 끝 마지막 우리 자체가 마지막이에요. 우리가 끝을 유발하는 유발 요인이 되는 겁니다.
마치 우리 몸체가 있으면 여기에 창을 관통해 찔러버리면 활끝이 나오겠지요. 끝이 화살이 되어 우리를 관통할 때 이 자체를 가지고 주께서는 이스라엘로 삼으시고 끝이 이루웠느니라고 써먹기 위해서 우리부터 먼저 끝속에 꽂히게 꽤뚫은 꼬치처럼 우리 존재는 끝속에 마치 꽤뚫려 달려가는 존재가 된 거예요 끝이 늘 관통하고 있어요. 우리의 하루 일상이 끝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상들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가 기보배가 우리를 향하여 쏜 엑스트라 텐, 10점 만점에 10점입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저는 베트멘 영화를 안봤어요 별로 보지를 않았습니다. 가면 쓰고 설치는 것을 싫어해요 가면 쓰고 하면 뭐 되는 줄 아는데 벗어보면 죄인인데 만화로 나와서 내용은 대충 알고 있는데 그 베트맨 영화나 만화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걱정하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다음 시에 살고 시민들이 멸망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다리죠. 그것은 아직 화살이 안 꽂힌 상태에서 주어지는 공포와 두려움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김창길(IP:210.♡.60.38)
12-10-01 19:31
서울 의존교회120810b (빛과 어두움)―이 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끝을 조립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녀를 사용한 다는 겁니다. 끝이 무엇인가를 끝이 라고 하는 것은 추상인데 그 추상에 실체를 보태서 우리의 신체를 실체로 바꾸어버리면 끝이 구체화됩니다.
구체적인 끝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끝이 우리가 종말을 기다리면 되면 내가 종말이 될 이유가 없지 않느냐, 내가 종말이라는 것은 서울에 달에 보면 종말이가 나오죠. 옛날 드라마, 내가 종말이 된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기이하고 이것은 성립이 안 되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예수님에게는 이게 되거든요 예수님 자신이 움직이는 종말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보라 심판의 날이 이르렀으니 회개하라 했죠. 누구 앞에서? 회개하라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다니까 가까이 왔으니까 공간의 접근인거예요 태풍이 몰려올 때 공간의 접근인거예요 태풍이 필리핀에서 대만 거쳐 일본 쪽으로 한반도 쪽으로 올라오잖아요. 그러면 회개하라 태풍이 가까왔다 하면 말이 승인이 되는 거예요 왜? 실체가 움직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가까이 왔다 할 때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례요한 바로 뒤에 따라 오신 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 뒤에 따라 옵니까? 나는 쇠해야 되고 그분은 흥해야 된다는 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는 뭐냐 그냥 보이스, 소리, 자기는 소리에 불과한 거예요 광야에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 거예요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는 것은 뒤에 오시는 분은 이 세상을 광야로 간주하는 거예요 광야로 간주한다는 것은 너희들이 너희 존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 하던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약의 개입을 가지고 너희를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예요 광야, 언약적 개념입니다. 광야 다음에 언약에 의해서 약속의 땅이 나오겠죠. 그러면 이 광야가 된다면 오실분은 약속의 땅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 오실분이에요. 약속의 땅은 다른게 아니고 천국이죠.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 다음에 뭐하라? 회개하라! 세례요한이 딱 끌고 사라지죠.
이번 올림픽에서 벨로드롬, 영국에서 나무로 만든 자전거 경주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추월 경주가 있는데 선수들 앞에 5바퀴 돌 때 오토바이가 먼저 달려요 다른 사람은 추월하면 안 돼요 오토바이 뒤 따라 가다 5바퀴 돌고 오토바이가 싹 비키면 그 다음부터는 전 속도를 다해 달려서 누가 1등 하느냐 시합을 하는 경기가 있습니다. 오토바이가 바로 세례요한이에요. 싹 인도 하고 난 뒤에 유인하고 난 뒤에 싹 빠져 나가죠 빠져 나오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위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그 위가 같은 시선으로 우리 앞에 등장 했다는 거예요 그 말은 그렇게 생각 했던 하늘나라가 가짜였다는 겁니다. 어두움에 포함된 어두움이 상상해 낸 조작해 낸 하늘나라이고 천국이고 메시야이고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세례요한이 만났을 때 그들이 위협을 느낀 것은 당신이 진짜이면 우리는 가짜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진짜 되기 위해서는 당신은 좀 죽어 줘야 되는 겁니다. 목자가 둘되면 안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것이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 라고 해서 ‘주님 앞에 회개하지 말고 주님의 죽음 앞에 회개해라’ 주님이 죽은 게 십자가 잖아요 주님의 죽음 앞에서 회개할 수 있느냐? 나는 스스로 죽는다 스스로 죽는 분 앞에 우리의 존재를 다시 되비쳐볼 수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주님의 죽음 앞에서 회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내가 정작 죽어야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저주 받아야 될 존재는 나의 존재는 어떤 때 의미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나에게 저주 주시는 분입니다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그러한 죽음에 우리가 참여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 먼저 보여 주셨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보여 주셨잖아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너희들이 할 수 있느냐를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런 아버지는 나 안 믿는데요? 나는 살려주는 아버지를 믿었지 나를 버리는 아버지, 그런 아이디어는 우리가 없는데요? 나는 내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었는데요? 이렇게 나오 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포지션, 위치가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회개했습니까? 십자가 달릴 때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다 어디 갔어요? 예수님 제자 다 어디 갔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제자 어디 갔어요? 고기 잡아 줬던 베드로 어디 갔어요? 물위를 걷던 베드로 어디로 갔어? 아무도 없어요. 원자핵폭탄입니다. 끝의 진수는 십자가에서 이미 다 드러났습니다. 저주였습니다. 저주를 드러내기 위해서 피조세계가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다. 그분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겁니다. 죽어있으면서 마치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은 옳지 않은 겁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기보배 선수의 화살을 쏴서 우리 앞에 꽂히게 된 거죠. 그러면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안에 꽂히게 되는 겁니다. 꽂히게 되면 십자가로 인하여 내 쪽에서 하나님께 나가고자 시도 했던 율법으로 의롭다하는 그 모든 것이 애초부터 성사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오히려 우리의 입을 막고 심판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그런 내막이 우리 안에서 펼쳐집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율법은 우리를 입 다물게 하기 위해서 박하사탕처럼, 자일로톨 껌처럼 확 퍼지게 됩니다. 율법이 이 모든 말씀이 나를 끽소리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나의 존재라는 이 영역은 몇 평되지 않지만 이 영역은 누가 접수하느냐? 화살이 접수해요 십자가가 접수합니다.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너는 너의 것이 아니고 너는 내 것이다 하고 수색영장으로 하드웨어 모두 다 중요한 것 다 들고 갔어요 다 들고 가니까 우리 속에 죄를 가져 갔어요 그 죄에서 하나님의 낯선 의,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의로움을 행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의로움을 여기서 생산해 냅니다.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에 관통하니까 주님께 저주가 관통하고 화살 끝에 나온 것이 의,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영생이 주어지니까 이 모양새는 끝 지점에 있을 때 천국과 지옥이 뭐로 갈라지느냐를 우리의 성도를 통해서 낮같이 다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끝이 우리를 조립하게 되고 끝이 우리 속에 꽂히게 되면 여기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누출현상, 뭐가 새어나와요 뭐가 새어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통해서 새어 나옵니다. 화살의 끝이 의와 영생이었습니다. 그 영생이 우리를 통해서 흘러나와요 그게 바로 성령의 열매이죠.
성령이 계시다는 이유 때문에 나와 버린 열매들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그런 것들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는 거예요 네가 육을 위해서 살지 말을 영생을 위해서 살아 라는 그 말씀, 그것이 생명의 열매에서 나오죠. 그런데 이 의는 의가 나왔을 때 뭐를 관통했습니까? 죄를 관통하고 나온 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의가 있는 곳에는 더욱더 죄가 넘쳐 나는 거예요 모든 게 죄에요
어떤 분이 질문했죠. 신학 공부가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할 때 제가 오락가지고 이야기했죠. 오락이 아닌 것은 태어나고 출산하고 죽는 것, 다시 말해서 내 몸에 어찌할 수 없이 몸에서 나오는 것, 배고프다, 소변보고 싶다 이게 전부 다 오락이 아닙니다. 쌍꺼풀 없이 태어난 것도 오락이 아니죠. 쌍꺼풀 없는데 쌍꺼풀 하게 되면 이게 오락이 됩니다. 왜? 남은 시간 심심하잖아요. 주어진 시간은 많고 할 것은 없으니까 꾸미고 하지요 이 세상에 농사 짓는 것 이 모든 것이 오락입니다. 그거 안하면 뭐할 건데요? 뭐 할게 없어요. 할게 없으니까 그 짓하는 겁니다.
박태환이가 수영 안하고 빵 구우면 그게 박태환이겠습니까? 빵 구워서 세계에서 금메달 따겠어요? 물놀이만 받지 그래서 물놀이만 하는 거예요 사람이 전부 다 오락 자랑 질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자랑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돼요 이 세상의 못난것들과 가진것도 없는 것들 배운것도 없는 것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못 배운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죠. 죄를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 죄를 죄되게 드러나게 하신, 관통하신 기보배의 그 화살, 하나님의 의, 예수님의 의를 자랑하라고 우리를 더욱더 죄인이 죄인 되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끝은 결국은 의냐 아니면 의가 통과하지 못해서 죄가 그대로 있느냐?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마지막 모습이 이 모습이에요. 이 모습을 미리 우리 성도의 몸에 장착시켜 버린 겁니다. 성도의 운, 팔자에 그것을 장착 시켜버린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아침에 눈뜨고 밥먹고 사는 것만 열중하고 그것을 전부 다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그것, 그게 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그것을 훼방하는 죄가 되는 겁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데 안 옮긴 것처럼 그냥 사망에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가 안 되겠어요? 회개가 안 되고 사투, 먹고 살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안돼요
내 로고스, 내 존재, 내 귀한 것은 못 내놓겠습니다. 하는 그 고집, 그게 나온 게 육의 열매입니다. 시기와 질투, 분쟁 이것이 육의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을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을 읽어 보면서 제가 이것을 느꼈어요.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할 때 5장1절부터 4절까지 읽었는데 이대로 설교를 해서 과연 교인들이 남아있겠나? 걱정이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게 너무 도발적으로 너무 과격해요 설교가 너무 과격합니다.
살전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살전 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못하리라
결단코 뭐하지 못한다고 나옵니까? 피하지 못하죠. 이미 게임 끝난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해요 몸부림친다고 이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 끝을 보여주는 성도가 출현했다는 말은 그런 식의 인생이 아니면 이미 그것은 배린 몸, 배려버린 인생이에요. 주께서 관여를 안 했으면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밥 먹고 살고 돈 벌고 살고 그냥 구별될 것도 없어요. 누구나 똑같아요. 똑같이 있다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니까 졸지에 가만히 있다가 어두움에 소속됩니다. 아무 짓도 안했는데 졸지에 지옥가게 됐어요. 얼마나 과격합니까?
멸망이 도적 같이 임한다는 말은 이미 임한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성도는 놀라지도 않아요. 자기가 자기를 보고 놀라죠. 자기가 자기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자기가 집착을 보일 줄은 예전에 미쳐 몰랐어요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 이렇게 집착과 사투를 벌이면서 하나님보다 내가 중요하다고 고집을 부릴 줄 예전에 미쳐 몰랐어요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계속해서 말씀이 양궁선수를 보내서 우리를 관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도 오락으로 끝나고 죽을 때 까지 계속 나옵니다. 또 쏘아 됩니다. 아침부터 쏘아됩니다. 그래서 끝에는 나는 누구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너 인간이야? 나는 인간아니므노이다. 뭐야? 가루상입니다.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고 주께서 만든 빛의 자녀가 돼야 돼요 빛의 자녀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나라는 이름이 거기에 붙는 거예요 내가 있고 내가 빛이 나야 되는 것이 아니고 어제 가락교회에서 했는데 참석 하신 분들이 너무 어려울 거예요
의존교회 버전으로 해 보겠습니다. ‘빛의 자녀는 나다’는 것이 구원에서 육신의 세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논리로 보만 ‘p는 s다.’ 주어 술어로 이해가 안 돼요 그러면 뭐냐? 빛의 자녀다, 나는 나다 하고 and, 그리고 뭐는 뭐다가 아니라 빛의 자녀 있고 나는 나 따로 있는 거예요 매일같이 어제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어제의 빛의 자녀가 오늘의 나다가 말이 안 돼요 어제의 빛의 자녀라면 오늘 나는 빛의 자녀로 만들어 질 때만 빛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이게 묵시세계입니다. 묵시세계는 우리를 떠나지 않아요 우리는 주께서 한번 도와주고 보내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나를 관리 하는 식으로 구원받고 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주인공이 돼요 그것은 화살을 맞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 한테 화살을 쏘게 되면 자기 안아픈데만 쏘는 거죠. 자기 안 들키는데만 쏩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만날 시시한 것을 회개합니다. 오늘도 예배 늦게 왔습니다. 정작 회개할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을 회개해야 되는데 회개 안되는 것는 다 빼버리고 반성되는 것만 골라서 시시한 것만합니다. 내가 운전하다가 남에게 욕을 했습니다. 앞으로 욕하지 않게 하옵소서.
근원적인 것은 뭐냐? 내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주께서 하시는 작업이 더 우선인데 우리는 그것을 회개해야 되는 거예요 주여 나보다 주님이 우선이고 주님 때문에 내가 만들어진 이것을 내 인생을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께서 정해 놓은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될 텐데 우리는 만날 내가 정한 것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어 주옵소서 하고 철야하고 새벽기도 나오고 이짓하고 있다 말입니다. 그게 반성이 안돼요
살전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할 때 여기 너희는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누가 정합니까? 너희가 정한 게 아니에요. 내가 정한 게 아닙니다. 주께서 정해 놓은 사람은 너희에 해당되고 주께서 정하지 않은 사람은 표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누가 택해서 정해 놓은 사람입니까? 주께서 정했다고 믿는 사람이 주께서 정한 사람이에요. 가루상입니다. 주께서 정해 놓은 사람이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정하지 않습니다를 믿는 사람이 주께서 정한 사람이에요. 주께서 정해 놓으면 내가 행한 요소가 거기에 토핑 되고 집어넣는 게 아니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는 주의 성실성이 자꾸 우리한테 꽉꽉 채우는 거예요 우리 가방에 계속채워 넣는 거예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채우고 이미 너희 죄를 용서받아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것도 채우고 그 배낭에다 꽉꽉 채워요
우리가 채우면 만날 초콜릿하고 쥐포하고 자기 좋아하는 것 빵하고 카스텔라 주스하고 이런 것 넣어서 소풍 갈 생각 하는데 주께서 채우는 것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믿음에 믿음으로 행한 것도 없이 의롭다함을 받고 하는 이런 것들이 들어갑니다. 선한 싸움 싸우고 그런 말씀을 우리는 다 빼버려요 다 빼고 무엇을 집어넣느냐 하면 성경책 담는 거예요 성경 들어 있으면 내것 됩니까? 성경책을 내꺼 만드는 방법은 우리한테 없어요. 성경책에서 나에게 그것을 연결할 수 있는 재주가 우리한테는 없어요. 우리가 그것을 안 집어넣어도 지금 성경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살아있습니다. 괜히 살아있는 것을 가지고 태엽 안 감아줘도 주의 말씀은 살아있어요. 우리가 태엽 감아준다고 주께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운동력이 있어서 살아있습니다. 만날 우리는 화살 쏘고 있어요. 오래 산 만큼 많이 얻어맞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너 존재 내 존재 아니다 보니까 우리한테 뒤집어씌운 것은 빛의 자녀입니까? 어둠의 자녀입니까? 주님께서 정해 놓은 그 개념만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한 달 수입이 얼마 입니까? 그런 것은 우리한테 해당이 안 되고 여자 입니까? 남자입니까? 유대인입니까? 아닙니까? 그런 것은 우리한테 해당이 안 되고 빛의 자녀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까? 아니면 못 옮기고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다가서고 묻는 겁니다. 그리니 이 설교가 어렵고 이 설교 듣고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놀라울 수밖에 겁니다.
살전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살전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이것을 오늘날 설교를 하게 되면 우리 목사님은 잠도 자지 말라고 한다고 이렇게 나옵니다. 왜?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제가 위치로 온다고 했는데요 제가 여러 번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존재로 하면 달력을 보게 돼요 1992년 10월 18일 자꾸달력을 봅니다.
이게 평소에 같은 인간들끼리 상종하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을 써서 주께서 그렇게 온다고 생각한 거예요 주님의 마지막은 위치로 옵니다. 말씀이 관통하는 말씀으로 오거든요 말씀으로 오는데 우리는 시간재서 오는 줄 알고 심지어 특정 장소에 오는 줄 알고 지금 감람산 올라간다고 감람산 기도원 말고 이스라엘의 감람산, 멀어요. 차비 많이 들어요 주께서 그쪽으로 오게 되면 비좁습니다. 감람산에 몇 명 올라가겠어요? 줄서야 돼요 번호표 받아야 돼요
자연 세계에는 갈라져 있어요. 연꽃잎이 넓잖아요. 연꽃잎에 밥을 담아서 하는 밥이 있잖아요. 넓은 연꽃잎에 우리는 밥알처럼 되어 있어서 우리는 지평선 넘어서 주께서 언제 구름타고 오시나 기다리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 연꽃이 자연세계라면 축이 말려서 폭 싸버려요 싸면서 불태워버립니다. 우리가 기껏 보는 것은 자연세계 물리세계입니다. 물리적 세계, 상대성 원리 따지는 그 세계,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열 가지 재앙, 애굽 사람들이 바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자연이 질서 있게 움직일 필요가 있어요. 자연이 흔들리면 갑자기 파리 떼가 날고 흑맘이 와버리면 누가 못삽니까? 죽을 지경에 날씨 더울 때도 힘들고 태풍와도 힘들고 가뭄이 와도 힘들잖아요 인간이 잘난 체해 봐야 우리가 연꽃잎같은 자연세계를 벗어날 수 있어요? 못 벗어나요? 못 벗어나요 미국이 농토가 넓고 전 세계의 최고의 곡물 수출국이지만 지금 50년만에 최고로 비가 안와서 tv를 보니까 옥수수가 다 말라 죽었어요.
무슨 재주로 물을 다 붙습니까? 인간은 자기 잘난 체하지만 사실 똑바로 깨놓고 말해서 자연 의존적입니다. 자연의 힘입니다. 자연이 안 도와주면 인간은 못살게 되어 있어요. 신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자연 세계를 보면서 환경을 쳐다보면서 제발 좀 점잖게 있어라 제발 고르지 말고 그것을 탐문하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이것을 돌돌 말아서 폭 쌓아버립니다.
이 자연 세계에서 인간이 기다리는 것은 시간과 공간 기다림입니다. 시간과 공간마저 싸여 버렸다가 의미 없이 되어 버려요 시간과 공간만이 날아가 버린 겁니다. 어느 때, 어느 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말아서 무당이 촛불에 종이 태워서 날려버리듯이 홀라당 올라가 버려요 그리고 준비된 새 하늘 새 땅이 나타나지요 사람은 그렇게 약합니다. 그렇게 까불어도 적조 일어나니까 물 걱정하고 있잖아요. 적조일어나도록 기도한적 있습니까? 주여 적조되게 하옵소서 녹조도 말고 적조되게 하옵소서 녹조 적조 아무거나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 안했거든요 제발 먹고 마실수 있는 말을 주옵소서 라고 했잖아요 그런 식으로 기도 하지 말란 말이에요. 왜? 물은 니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인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자연세계가 있는 거예요 자연세계에서 물이 안 나온 것은 마치 애굽의 10가지 재앙도 마찬가지인거예요 그토록 믿었던 자연이 배신한다니까요 그토록 믿던 자연이 우리를 배반해요
그리스라는 나라가 청년 실업률이 55%입니다. 이 말은 통계상 반이라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보통 청년 실업이 20%만 되도 그냥 반 일하고 반 논다고 보면 됩니다. 아르바이트도 다 쳐서 그렇게 되는 거니까 그리스도 55%가 실업자에요 그들이 국가를 믿겠습니까? 안 믿으면 이렇게 할 건데? 안 믿으면 보트다고 아프리카 갈 겁니까? 어디로 갈 거예요? 포루투칼이 국가의 위기가 닥쳤어요 포루투칼 말을 쓰는 나라가 어느 나라 이냐? 브라질입니다. 옛날에는 브라질이 원조나라가 포루투칼이고 포루투칼의 식민지가 브라질이에요. 브라질의 자연을 이용하여 포루투칼이 큰 나라를 이룬겁니다. 그들은 같은 말을 사용하니까 브라질사람이 못살아 포루투칼을 갔는데 이제는 반대가 되었어요 포루투칼사람들이 배 타고 브라질에 이민 가는 거예요 마치 남쪽에서 휴전선 넘어서 북한에 취재 가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결국 기껏 인간이 산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의지 할 것만 내가 의지 했다는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낼 뿐이에요.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었지 마지막 때를 위해서 내가 산적이 없습니다. 하는 그 노골적인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생활이에요. 안되지요 우리 힘으로서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없는데 안되는 것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세력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되게 하십니다.
사망보다 생명이 더 좋다는 그런 마음으로 살게 만들고야 마는 겁니다. 나에게란 이런 식으로 사는데 하지만 이건 죽어가는 거고 사는 거 말고 다른 사는 것 예수님 때문에 영생 얻는 것 이것을 위해서 그 포지션 그 지점을 위해서 나는 불을 받았습니다. 하는 고백을 수시로 직장에서 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금도 만들고 인도하시는 의미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직장생활에서 또는 결혼생활에서 대범하게 이루어집니다. 그 예가 다니엘에 나오는데 다니엘 고위 공무원이거든요 월급 많거든요 다른 신에게 기도 하면 어느 인간이던 다 처형한다 하는 소리를 듣고 문을 활짝 열었어요. 당황스러운 것은 느브갓네살이 당황스러워서 다니엘을 빼낼까 싶어서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 갔을 때 사자가 입을 각도 벌리고 그게 나를 잡아 먹지 못할 것을 사자가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몰랐지요. 그것을 걱정한다면 다니엘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 그냥 속으로 봐주세요 나 믿음 좋은 데 사자가와도 안 물리게 해 주세요 하는 그것은 포지션보다 자기 존재가 우선되는 거예요 우상을 만든 것도 느브갓네살 왕이 있는 것도 다 포지션이 하나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