삯꾼 목자 120810
삯꾼 목자 120810
이름 : 이근호(IP:117.55.135.113)
공은주(IP:218.♡.193.135)
12-08-29 10:08
안양-베드로후서2:9(삯꾼 목자)120810a-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2장7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리 되어 있지요. 구원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놓여 있는 장소가 복음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될 그런 환경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롯이 있습니다. 롯이 있는데, 롯이 구원을 받잖아요. 롯이 구원을 받을 때, 여기서 뭐가 튀어 나온다고 했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고통이 나오지요. 이 고통이 생계 문제 때문에 고생 하는 것, 그런 고통이 아니고 이 고통은 복음을 인하여 받는 고통을 복음이라 했습니다. 복음만 버리면 고통은 당합니까? 안 당합니까? 안 당하지요. 복음을 내가 버려버리면 고통을 안 당하는데 괜히 복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거예요.
그러면 고통을 당하는 복음을 버리지, 왜 안 버리느냐, 복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고통이란 아픔이 가미되면서 복음은 찾아오고, 그 고통이 가미된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롯이 구원받을 때 고통 받는다, 이거 하고 로마서 1장에 보면 의인은 오직 믿음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고 어떤 연관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하면 전혀 고통이 없지요. ‘믿나?’ ‘믿습니다!’ 이게 뭐가 아파요. 혀가 약간 아파요? 전혀 고통스럽지 않지요. ‘학생! 구원 어떻게 받지요?’ ‘선생님,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이게 뭐가 어려워요. 전혀 고통스럽지 않잖아요. 그런데 정작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뭐가 수반되어 있어요? 고통이 찾아오게 되어 있고, 이 고통은 복음을 버리면 안 찾아오는 고통이고, 복음을 유지하게 되면 늘 찾아오는 고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을 버리면 되지, 하는데 복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니에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아, 또는 부부의 관계와 같아,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너는 성령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 되어 있고, 너희는 나의 신부라 되어 있으니까 성경에서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가 우리가 임의로 철수하는 관계로 표현하지 않아요. 부부관계 또는 부자관계가 우리 쪽에서 취소한다고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혈연관계, 혈연관계는 한 번 태어나면 영원한 아버지고, 영원한 자식이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임의로 거부할 수 없듯이, 그 이상으로 주님께서 그 혈연관계보다 더 단단한 관계로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게 되는 겁니다.
고통이 싫다고 해서 복음을 철야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애초부터 신자가 아닙니다. 지가 골라잡은 거지, 동대문시장의 물건도 바꿀 수는 있습니다마는 믿음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골라, 골라, 떨이, 떨이해서 산 게 아니기 때문에 바꿔주는 것도 없어요.
그래서 욥은 고통을 내 뱉으면서 예수님이 당했던 고통을 이 시대에 앞당겨 살면서 주님의 고통을 내뱉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우리에게 나오는 고통이라면 그 고통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당했던 고통을 우리 속을 통해서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발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득이 되는 게 뭐냐, 하나님의 좋은 점이 뭐냐 하면, 그 뒤에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불법이라는 것이 성사가 되고 어렵지요. 이렇게 의로운 롯에게 고통을 당해서 구원을 건지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얻고자 이러한 의로운 롯에게 고통을 주시는가? 그것은 뭐냐 불법 또는 무법 그리고 여기에 따르는 심판, 이것이 이 세상이 분명히 이렇게 무법하고 불법하고 심판 받는다, 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증거물로서 이렇게 의로운 롯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겁니다.
요게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나오지요. 두 증인이 죽게 됐는데 사람들은 두 증인을 죽였다고 춤을 추고 좋아하고 선물을 서로 교환하고 귀찮은 존재 없앴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두 증인이 죽었던 장소가 바로 십자가라 하고 동시에 소돔이고 애굽이지요. 보세요. 사건하나 터지니까 이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 되니까 졸지에 주변에 롯이 있는 자리가 십자가 사건 동시에 주변은 뭐로 바뀌었냐, 애굽으로 변하고 소돔으로 변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로고스, 수련회에서 배우셨지요? 우리의 로고스의 인식으로서의 소돔이라 하는 것은 여기 저기 소돔이 아니라 지금 사해근처에 있는 그 마을이 소돔이잖아요. 인간적인 로고스는. 필리핀하면 저 북극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남태평양 그 나라지, 쥐나 개나 필리핀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묵시적 세계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 복음을 인하여 고난 받는 그 현장이 뭐가 되는 겁니까? 소돔이 되는 거예요. 거기 소돔, 고모라가 돼 줘야 모든 세상이 심판받는 것도 정당하게 되는 겁니다. 세상이 심판받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으로 고통 받는 이러한 의로운 자의 모습을 자기 백성에게 안겨주게 되어 있어요. 우리 팔자가.
특히 윤집사님 같은 경우는 친구들이 잘 나가는 친구들 아닙니까? 이제 나이 60후반 되어 가지고 성경문자 보내고 그러면 백이면 백 ‘미쳤다! 드디어 치매현상도 여러 가지 현상 중에서도 교회에 미쳤다!’ 그 사람들은 성경 모르니까. 교회에 미쳤다, 기독교에 미쳤다 해요. 기독교에 미친 그런 치매가 있네. 아마 다들 그렇게 하실 거예요. 모임에 있다가 화장실가면 안 됐다고 쯧쯧 거리고 ‘멀쩡했던 사람이 왜 저렇게.... 인생 저렇게 해서 망가지는구나!’ 얼마나 뒤에서 뒷다마 많이 듣겠습니까?
특히 성경을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예를 해 놨어요. 요한복음도 마찬가지고. 너희가 나로 인하여 세상한테 미움을 받는데, 너 때문이 아니고 니가 믿는 나 때문에 너희도 같이 다행스럽게도 같이 미움 받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을 아주 다행스럽게 여겨라,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예요. 하나. 이로서 우리가 하나 된다. 하나 되려고 빡세게 기도하지 마세요. 그냥 복음 믿고 있으면 주변에서 미쳤다 소리 듣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 되면 어떤 점이 좋냐, 우리가 예수님을 버릴 수가 없을 정도로 주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버리고 싶어도 허락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우리를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그 하나 됨을 스스로 유지시켜 나가는 혜택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취직 한 번 잘 하신 거예요. 특히 결혼 한 번 잘 하신 겁니다. 신랑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신랑. 그런 신랑 있으면 나와 보라 하세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아브라함에게 있는 모든 축복이 다 우리 것으로 주시는 그 신랑을 만난 겁니다.
수요일날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에스겔 묵시이야기하면서 지금 에스겔 보면서 도저히 가상치도 않는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 안양에 살고, 인덕원에 살고, 역사 속에 있으면서 감히 천사들이 우굴 거리는 그 세계를 뛰어올라간다는 게 이게 정신이상자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 있을 수 없는 것을 주께서 이루어주시는 겁니다.
잘나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는데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라고 우리보고 그렇게 해준 거예요. 그리스도만 자랑하라고. 사람이 따져보면 자기에게 자랑할 게 있는데 주께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사람들, 꽃송이가 모여서 꽃다발이 되는 것처럼, 그런 저런 사람들이 모였는데, 다 각자 자랑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 다 자랑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해서 꽃다발처럼 하나 모을 때 그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그게 바로 고린도교회에서 말하는 교회증인이에요. 그렇게 모아질 때 본드 역할 하는 것이 뭐냐, 십자가 피라는 거예요. 고리도전서는 어쩌면 내용이 간단해요. 십자가 피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너희는 성령이 알려주어서 알았다. 따라서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예수님의 죽으심 죽음으로 인하여 구원받았다, 이 말이지요.
다시 지금까지 정리해 보면, 욥이 구원 받을 때, ‘나는 믿습니다.’ 큰소리치면 될 일인데 그렇지 않고 실제로는 고통이 따라왔다. 고통이라 하는 것은 복음만 버리면 안 오는 고통인데 복음 때문에 유발한 고통이다. 이 고통이 오게 된 하나님의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노리는 게 뭐냐, 이 세상은 불법과 무법하다는 세상이라는 것을 규정해서 심판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당연하다는 조치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한 번 물어 볼게요. 이 불법하고 무법하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대목에 대해서 동의합니까? 안 합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나쁜 짓해서 설쳐서 그런 게 아니고 바르게 사는 쪽으로 살겠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보고 불법이라 무법이라 했으니까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 제일 납득이 안 되는 것이 힘들게 교회 왔는데, 교회 참석도 죄가 된다고 할 때에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는 두 시간, 한 시간 차 달려서 힘들게 왔는데, 그게 죄가 된다 하니까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경우는 뭐냐 하면 자기가 두 시간 동안, 가는데 한 시간, 오는데 한 시간, 무려 이동시간만 두 시간 받친 자기 자신을 믿고, 그 다음에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고통 받지 않는 나 되기 위해서 사실은 그 교회 출석해서 하나님 믿었다.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실제 하나님은 고통을 줬는데 교회 온 사람들은 교회 옴으로서 들 고통스럽게 인생 살고자 교회 온 사람들이에요. 어느 교회 다니면서 ‘주님이여! 오늘도 고통 받으러 왔습니다.’ 이리 교회 온 사람 누가 있어요? 그것도 뒷자리에 앉지 않고 앞자리에 앉는 이유가 ‘고통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성전의 세리 말고는 없어요. 성전에 엎드려서 감히 고개를 못 드는 세리 말고는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세리 말고는 다른 사람은 있을 수 없지요.
백부장의 종이 아플 때 백부장은 그걸 어떻게 해석했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 종이 아팠다. 이리 해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이 신기하지요. 따라서 종이 아픔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님 앞에 어떤 사이인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사이이다. 이런 관계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요. 주님이 놀래시고 이 만한 믿음 본 적 없다. 저 천국 차지하는 거 다 물렀거라! 다 나가, 나가, 나가. 그리고 너희들이 채워진다는 거.
수요일날 잠깐 언급했지요. 불타는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으로는 불타 버려야 돼요. 불타는 하늘나라. 이렇게 정리 했습니다. 그러면 그걸 고통이라 했는데, 고통은 어디서 나오는가? 고통은 바로 죽음에서 나옵니다. 아프다는 것은 뭐와 가깝다? 죽음이 전에 보다 더 가까이 느껴질 때 고통스럽지요. 정신적으로 외로울 때는 죽고 싶다 하지요. 기분 좋을 때 죽고 싶지 않지요. 물론 아주 기분 좋을 때는 우리 이대로 죽자, 하는 경우도 있지만 특이한 경우이고, 집안이 안 됐을 때 죽고 싶다 하는 것은 그 만큼 늘 현존하고 있는 죽음을, 죽음 속에 쌓여 있으면서도 못 느끼는데 자기 챙기는 것이 안 될 때 죽음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지요. 롯에게 고통이 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겠습니다. 롯에게 주님의 죽음이 있었다. 주의 죽음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보면 되지요.
엘리야가 그릿강가에서 음식을 어떻게 조달했습니까? 까마귀가 와서 줬지요. 내가 만약에 엘리야라면 아침에 까마귀가 음식을 줬잖아요. 점심 때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분명히 백이면 백 아침에 다 안 먹고 좀 남깁니다. 사람이라 알 수가 없으니까. 까마귀가 오면 아침에 마냥 먹고, 사람이 준비성이 있어야 되잖아요. 엘리야는 왜 그렇게 안 했는가? 엘리야는 죽으러 간 거예요. 오히려 양식 물려주는 것이 더 무서워. 자살하려고 물에 빠졌는데 건져주면 더 짜증나는 것처럼.
어린 초등학교 애들이 샤워하고 있으면 뒤늦게 온 엄마가 사정도 모르고 ‘야, 야, 뜨거운 물로 해야지.’ 해서 뜨거운 물로 할 때 아이는 기겁을 하지요. 실컷 하고 나오려 하는데. ‘야, 야, 머리 이리 하면 안 된다. 더 감아라.’ 요거 감고 숙제하려고 하는데 아이 머리 집어넣고 샴푸 집어넣고 강제로 감기면, 아이들은 미쳐요. 엄마의 열심히 아이로 하여금 상처를 주는, 엄마의 일방적인 평가에 의해서 돌발적인 사태를 갔다 안겨줄지 아이들은 겁을 내고 슬슬 문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요. 눈을 마주치기 싫어해요. 너무 잔소리를 해대면. 그런데 엄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엄마의 존재 이유가 남편에서 자식으로 넘어갔는데 할거리가 생겼는데 놓치면 안 되지요. 미끼인데.
여기서 죽음이 롯과 함께 있을 때, 이 죽음은 롯의 죽음이 아니고 롯을 구원하신 분의 죽음이 롯과 함께 있어서 그래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롯은 지금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 사람과 동행한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나 때문에 죽을 사람이 나와 함께 동행 한다면 결국 나는 어떤 짝이 나느냐 하면, 팔자가 되느냐 하면, 동행하는 것 때문에 나는 복음 때문에 죽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굉장히 많지요. 가능성 정도가 아니고 확실합니다.
복음 때문에 죽는 것, 그럼 복음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죽을 때만 복음 때문에 죽을까요? 아니면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나날이 복음 때문에 죽음에 포함되어 있을까요? 포함되어 있습니다. ‘밥 먹어. 열심히 먹어 놔. 열심히 먹어놔야 복음 때문에 죽을 수 있어.’ 이런 식이다 말이지요. 쓸데없이 금식 같은 거 하지 마세요. 금식은 굶어서 죽는 방법이 지가 채택한 게 되기 때문에 영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주께서는 밥 먹어가면서 죽으라는데 지가 고집을 부려가지고 금식해서 죽겠다고 나서니 이것은 주님 하신 걸 모독하고 있지요.
함께하신 분이 밥 먹으라 하면 밥 먹고 굶으라 하면 굶으면 돼요. 함께 하신 분이 굶으라 하는 것이 어느 경우냐 하면, 밥맛이 없을 때, 먹고 싶어도 모래 뜨는 것 같아. 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애가 시험에 떨어졌을 때, 계 탈 때 계 오야가 도망갔을 때 이런 경우들이 있지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롯의 죽음이 있는 것은 본인의 인생은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나를 위한 인생은 더 이상 주께서는 남겨두지도 않고 허락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세상은 롯과 같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불법이고 무법이 되는 거예요. 이게 좀 어려워요. 창세기 4장하면 쉽습니다. 아벨이 죽는 이유는 누구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까? 가인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가인의 죄를.
만약에 아벨이 처음부터 양 잡아서 흠양하는 제사를 드렸다면 그리고 그 뒤에 가인이 제사를 드렸다면 가인이 뭘 딱 보겠습니까? ‘아~하! 동생 저 제사 불이 내려와서 응답하는구나!’ 그러면 ‘야, 동생아! 무슨 재료로 사용했노?’ ‘이렇게 했습니다.’ ‘조미료는?’ ‘조미료는 약간 뿌리고.’ ‘소금은?’ ‘쳤고.’ ‘파는?’ ‘송송송 썰어서’ ‘옳지!’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천의 수양도 만만의 제물도 다 나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다. 니 마음을 원하지. 형식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알겠지요. 9절 봅시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그러니까 한 쪽이 구원 받았다는 말은 한 쪽이 구원 되지 않기로 결정 났다, 그 말입니다. 구원된 사람과 같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단지 구원 받은 롯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않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자동적으로 저 쪽은 지옥가게 돼 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 해야 될 이유는 지옥 갈 사람들을 표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에요.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대해서 무지하고 거부하고 감사하지 않고 대항하는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지옥 가는 사람으로 분류시키기 위한 분류시킬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먼저 와 버린 겁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말씀에 먼저 된 자 나중 된다 하지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은 소위 오래 믿었다 하는, 그 당시 바리새인두고 하는 얘기예요. ‘오래 믿었다! 에헴!’ 하는 사람들에게 처음 믿은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보냄으로서 그들로서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만든 겁니다.
중풍병자가 친구들이 몰고 와서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내려 놨을 때,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예수, 당신은 병만 고쳐라.’ 왜? 그 정도는 자기들, 유대인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죄 사함을 받았나니 했는데, 중풍병자가 낫다 말이지요. 그러면 죄 사함은 하나님께 속했으니 우리가 터치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기도함으로서 병이나 낫는 것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한계이고 전부인데, 요 원칙이 있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다른 방식의 구원방식을 노선을 가지고 왔다는 셈이 돼 버리지요.
그럼 졸지에 기존방식을 주장하던 사람은 뭐가 됩니까? 이거는 완전히 이리요, 도둑놈이요, 사기꾼이 된 겁니다. 고 사건 이후에 나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시고 그 뒤에 나온 말이 뭐냐, 옛 술은 옛 부대에 담고, 술 마시고 잘 먹고 잘 떨어져라 이말 이에요. 새 술은 새 부대가 있어야 새 술이 담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새 부대는 깨끗한 부대? 아닙니다. 고상한 부대? 아니거든요. 착한 부대? 아닙니다. 중풍병자처럼 예수를 믿는 부대! 거기에 예수님의 피가 새 부대와 담겨서 죄인과 피의 만남으로 진짜 하나님이 구상한 구원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된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놀랬지요. ‘누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거, 지가 왜 하는데?’ ‘내가 하나님이거든.’ 그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어디를 봐서? 어디를 봐서?’ 니가 보고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말을 안 한다. 그들은 봄으로서 오히려 안 믿었어요. 안 보면 상상이나 하지. 배트맨은 끝까지 가면을 벗지 말았어야 했어요. 괜히 배트맨 가면 벗어서 신비감 다 떨어지고.
그래서 기존교회 목사는 항상 평신도 만날 때는 음성 변조가 돼 있습니다. 할~렐~루~야~ 신비감을 계속 유지해 줘야 돼요. 간격, 지옥과 천국간의 고리처럼 평신도와 목사사이에 간격이 있어서 당회장실도 함부로 못 들어가요. 당회장 만나는 것이 예수님 만나는 것 같아요.
10절에 보세요.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육체를 따라 정욕가운데 행한다니까 이 지옥 가는 사람의 육체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육체가 있지요. 그럼 천국 가는 사람 육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시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쪽은 육체를 따라 육체의 정욕대로 하고 한 쪽은 육체의 정욕 따라 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영이 그걸 못하게 만들지요. 왜? 육체를 누가 접수해 놨기 때문에? 육체의 전환권이 누구한테 전환되었기 때문에? 값을 주고 산 것이 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육체를 다루기 때문에 본인이 자기 육체를 다룰 수 있는 것이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사는 것도 지 맘대로 못 살고요, 특히 지 맘대로 못 죽어요.
성도의 즐거움이라 하는 게 그겁니다. 이상하게 내 뜻대로 삶이 아니라는 것이 수시로 느껴지는 게 이게 아주 신기해요. 내 뜻대로 아닌데 누가 나를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계획했던 것이 없는데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나면서 나중에 보니까 그게 더 좋아 보이고. 그게 옳아 보이고. 나의 결심이나 선택보다도 우연히 가져다주는 그것이 내 선택보다 훨씬 더 괜찮아 보이는 그런 거. 그런 것들이 성도한테는 굉장히 영에 의해서 자기 육체가 다루어진다는 그런 특징이 있어요.
그런 특징들을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케 한다.’ 사람이 자기 마음이 돛대처럼 높아지면 아무리 비싼 집, 맛있는 음식, 많은 돈을 벌어도 짜증나요.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마음이 교만하니까 뭐, 이리 좀 줘도 ‘아이고, 이 정도는 당연하지.’ 이리 되어 가지고 지가 행복하지를 않아요. 주께서 우리 뜻대로 안 되는 이유는 우리를 낮추고, 낮추고 계속 낮춥니다. 낮춰 놓으면 우리 육체가 또 올리고 내리면 또 올리고 계속 이런 식으로 가지요.
몇일만 주님 생각안하면 이만큼 올라가 있고 재앙이 있어서 한꺼번에 훌떡 밑으로 내려가고. 인기를 얻었다. 자기는 그것이 큰 실수인 줄 몰랐지요. 인기 전까지는 굉장히 겸손했는데 인기가 있었다, 없어지니까 그 때 그 인기 다 어디 갔나? 그거 찾아다녀요. 난 이 정도는 아닌데. 특히 가수들, 배우들, 차라리 처음부터 인기 없었으면 같이 시장바닥 걸을 수 있는데. 좀 인기 있다고 여자 분들은 모자 쓰고 다니고 복잡해요.
10절에 봅시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이 경우가 무슨 경우입니까? 우리는 무슨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지요? 이게 뭐냐 구약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무슨 이야기냐, 구약에서 여기에 권세 있고 권위 있는 게 뭐냐, 이스라엘과 함께한 그 분,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이런 예가 성경에 이렇게 있으니까 이런 경우가 언제 있었지? 롯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다가, 다른 이야기 보편적인 이야기처럼 보이는데, 이걸 좀 설명하겠습니다.
구약이 바다라면, 여기에 거대한 항공모함이 있다면 주변에 뭐가 일어납니까? 항공모함이 5만톤, 7만톤이 되니까 배가 얼마나 큽니까? 여기에 여파가 일어나겠지요. 이거는 평평한 바다에 파장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냥 니 살고, 나 살고 고요한 이 땅에 이스라엘나라 등장해서 죽 흩고 지나가니까 주변에서 아우성이고 난리에요. ‘저런, 민족이 다 있어?’ ‘저거는 깡패야 뭐야? 저거는?’ 여호와 믿고 돌아다니는데 가는데 마다 다 당하고 패배하고 이방나라는 다치고 울고, 불고 그 나라는 승리하고 뭐야? 조폭도 아니고. 그게 바로 권세 있는 분과 함께 있는 특징입니다.
이스라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주변이 어두움이 되고 졸지에 육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나라로 드디어 들통이 난 겁니다. 가만히 있는 평범히 살아가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면서 서로 이웃나라로 편하게 살아가는데 거기에 갑자기 망나니 같은 어떤 히브리인들의 집합체가 등장해서 가는 곳마다 다 헤치니까 모압 나라에 비상 걸렸고, 여리고성에도 비상 걸렸습니다. 모압나라 왕이 뭐라 합니까? ‘안 된다. 우리 영토에 못 온다.’ ‘과수원 그거 안 따먹을게. 우물 안 먹을게.’ ‘못 믿는다. 너희들 소문 다 들었어. 다 들었어. 가는 곳마다 작살났다는 거 다 들었어. 아말렉도 작살나고. 아예 통과하지 마. 돌아가.’ 돌아가면 또 민족 만나지요. 또 처단하고, 또 처단하고.
누구 때문입니까? 언약궤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이스라엘의 언약궤입니다. 민수기 10장 35절 봅시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이스라엘이 없었으면 적도 없어요. 이 동네에 오지도 않으면 여호와의 적인지 구분도 안 돼요. 그냥 사이좋게 윈윈처럼 지내는 거예요. 유별난 나라예요. 뭘 앞장 세웠다? 언약궤를 앞장세우니까 여호와여 일어나사, 언약궤는 여호와를 일으켜 세워요. 마치 바다의 해적선이 가게 되면 해적선 앞에 큰 톱이라든지 창을 달아서 가는 곳마다 다 부숴지고 파손되는 것처럼 그냥 들이미는데 주변 나라들이 감당을 못하지요.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땅은 인간과 안 맞는다.’ 땅은 인간을 저주합니다. 가인이 죄 짓고 난 뒤에 피를 머금고 가인의 후손들이 이 땅에 도시를 건설했고 그들이 예술, 공업 모든 목축, 특히 성곽, 도시, 법령 함무라비법전, 왕 위주의 법이 생긴 거예요. 그걸 ‘정주’라고 해요. 안착해서 사는 것. 주저앉아 사는 것을 어려운 말로 정주라고 합니다.
사람은 땅에서 정주하려는 것이 있어요. 자꾸 거기에 안착해서 안착하고 난 뒤에는 이유도 없이 무조건 확대하고 확장하려고 하는데, 그걸 누가 반대하느냐 하면, 토해내치고 엉덩이를 밀어 내치느냐 하면, 땅이 밀어내요. 땅이 잡초가 나온다 했잖아요. 엉겅퀴. 땅은 밀어내고 인간은 갈 곳이 없으니까 땅에 정주는 해야 되고, 둘 사이에 얼마나 심합니까? 텃밭에 잡초 뽑는 거 얼마나 짜증납니까? 보기는 아름답지요. ‘아이고, 참 촌에서 잘 키우셨습니다.’ ‘한 번 살아볼래요?’ ‘아니요.’ 못 살지요.
이거는 고요한 촌에 가서 문화생활하려고 갔다가 잡초 뽑는데 사역하고 있다구요. 뽑아도 또 올라오고 뽑아도 또 올라오고 뽑으면 안 올라와야 되잖아요. 비 오고 난 뒤에는 와르르 쏟아져 있어요. 뽑으면 또 생기고, ‘누구야? 잡초 뿌린 자가?’ 화가 나지요. 땅이 말합니다. ‘나, 니 안 좋아하거든.’ 반가운 채 하면 ‘나, 니 안 반갑거든.’ 땅이 유일하게 반가워하는 사람은 한 분 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11장에 보면, 아이가 사자 굴에 손을 넣지요. 양이 사자와 같이 하고, 그게 뭐냐, 땅이 받아줘서 그래요. 동물이든 식물이든 땅이 안 받아주면 땅에서 못 살게 되어 있습니다. 참 가련한 신세에요. 인간의 신세가. 이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받아 줄 곳이 없습니다. 부도난 그룹 안 받아주지요. 대우그룹이 그렇잖아요. 계열사가 아무도 안 받아줘서 부도나 버렸잖아요. 부채가 너무 많아서 안 받아줬잖아요. 우리가 부채가 너무 많아요. 이미 부도났어요. 땅이 받아주질 않습니다. 받아주면 정주해서 거기서 안착해서 법을 만들어서 이제는 지가 왕질 하고 있어요. 땅의 고마움을 모르고 지가 잘나서 잘된 걸로 안다 말이지요.
제가 방금 땅이라고 했는데 땅은 뭐도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비, 구름도 포함되어 있어요. 햇빛도 포함되어 있어요. 여기서 땅이라는 말은 평평한 흙 성분을 말하는 게 아니고, 땅은 하늘에서 비 내리고,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잖아요. 땅 자체가 그 공간, 삶의 공간 전체를 땅이라 하는 거예요.
그 땅이 하나님의 매서운 손맛을 봤지요. 그게 노아 홍수잖아요. 땅하고 인간하고 맞다? 안 맞다? 맞기? 안 맞기? 안 맞기! 맞지를 않아요. 그래서 물청소를 해 버려요. 물청소를 싹 하니까 거기서 아무도 살아남을 인간이 없었어요. 오직 방주만 살아남아요. 왜 방주만 살아남는가? 방주는 친히 하나님이 만들라 했으니까. 이는 지상에서 인간이 창의해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배가 노아 방주입니다. 그 거 배 같지도 않아요. 재미도 없어요. 어떤 창고 같아. 그게 무슨 배입니까?
노아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방주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노아가 구원 받았고 장차 저주받을 노아의 아들 함까지 거기서 구원을 받지요. 그게 노아 방주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아 방주를 언약이라고 해요. 언약에서는요,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구원해줘요. 노아는 그 덕분에 살았기 때문에 노아는 알지요. 노아는 죽었다가 살아났잖아요. 똑같은 사람 다 죽었으니까. 육에 속한 사람 다 죽었으니까. 자기가 살았다는 것이 더 무섭지요. 이제는 사명을 듬뿍 부여 받았어요. 무지개가 뜨면서 무지개가 뜨는 이유를 대대로 전해야 될 사명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기의 수치를 덮어주는 그 야벳과 셈을 축복하는 기능을 하지요. 그게 뭐냐 주님의 은혜를 후손에 전달, 전달하는 전달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걸 해야 되지요. 만나는 사람마다 그걸 전하지요. 예수님이 방주니까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죄인이었습니다. 그걸 증거 하는 겁니다.
땅이 인간을 안 받아 주지요. 이걸 붕~ 떴다고 할 수 있는데, 정착이 안 돼요. 항상 붕~ 떠있어 가지고 땅하고 자꾸 반발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나중에 땅 자체를 하나님께서 불 질러 버려요. 땅을 위해서 불 질렀겠습니까? 땅에 뭐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땅하고 안 맞는 족속들 한꺼번에 태워버리지요.
연꽃잎이 있지요. 밥 쌓아 먹잖아요. 연잎을 펼쳐 놓고 그 안에 밥을 넣을 때, 넓은 연 잎이 자기 세상인 줄 알아요. 여기서 빌딩 짓고 올림픽 하고 살기 좋다고 사진 찍고 이리 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연꽃이 삼킬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 연잎위에서 미국에서 목성에 인공위성 보내서 착륙시키고 좋다 하는 거예요.
우주가 종이 축 휘말리듯이 돌돌돌 말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와서 이불을 돌돌돌 말아보세요. 인간은 모래위에 지은 집이 무너지듯이 바탕 자체가 없어요.
아무것도 없으면서 인간은 고집을 부리고, 이 땅에 디딜게 없어요. 안개 같아요. 축축한 물방울 같아서 잠시 있다가 바짝 마르면 어디 있었나? 하고 사라지는 거예요. 이번 수련회 때 개그콘서트에서 나오는 대목을 하나 이야기를 했어요. 가루상입니다. 가루상이란 콩가루란 뜻이에요. ‘가루상이 그렇게 하면 되나?’ ‘가루상 사람 아니무니이다.’ 그 말이 너무 멋있는 말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가루상은 말 아닙니다.’ 질문 자체에 근거를 없애버린다고요. ‘그럼 너 뭐야?’ ‘가루상무니이다.’ 로고스로 끝나버려요. 바탕이 없는.
인간 자체가 땅과 안 맞아요. 땅의 주인은 창조하신 주님이신데 주님이 담요 확~ 가지고 가면 후당탕 떨어져서 맨땅에 붕 떠 있는 상태에요. 그 땅을 불사르게 되면 그 불길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지구상에 있는 모든 자에게 임하시리라. 누가복음 24장에 나오지요. 모든 자에게 재앙이 임한다는 거, 다 불태워 버린다는 것. 그래서 국회의원 됐다고 까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오락이고 연세 많으신 분은 알겠지만, 지나가보면 다 시간 감당이 안 되어서 그냥 해 보는 짓이에요.
산에 올라가는 것도 마찬가지고 암벽 타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냥 남아도는 시간 할 것 없어서 해 보는 거예요. 죽는 것도 태어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태어났고,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죽고, 거기에서 일구어지는 모든 사태와 사건도 육체를 다루시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성령이 다루신다면 우리는 그냥 이 구경, 저 구경하다가 고통가운데서 남의 땅에서, 안 맞는 땅에서, 고통하고 있다가 맞는 새 하늘 새 땅으로 쑥~ 들어가면서 사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61.♡.205.105)
12-08-30 11:40
안양-베드로후서2:9(삯꾼 목자)120810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첫 째 시간에 땅하고 인간하고 안 맞는다 했지요. 안 맞지만 사람들은 지 나름대로 살다보니까 누가 괴로운가 하면 땅이 괴로운 거예요. 그게 가인 같은 경우에 땅이 못 견디는 겁니다. 의인의 피가 흐려지니까 땅이 못 견디면 누구한테 호소하겠어요? 하나님한테 호소하지요. 그 대목이 창세기4장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4장11절에 보면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땅이 못 견뎌서 하소연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에 뭐가 따르느냐 하면, 심판과 복수가 따르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심판은 처음부터 있었습니까?’ 심판이 처음부터 있었어요. 다만 국소적이지요. 미시적이고. 대규모 심판은 노아 홍수 때 일차 있었지만, 나중에는 장차 주님 오실 때 오겠지만, 그 전에 이미 심판이 군데, 군데 있었던 거예요. 심판들이 있는데 심판들을 할 때 심판이 심판으로 있으려면 반드시 심판받을 짓들을 해줘야 되거든요.
그러면 무엇을 양성화 시켜야 하느냐 하면 불법과 무법이 땅위에서 양성화 돼야 됩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그렇게 양성화될 때 어떤 류의 인간들이 이 지상을 지배하고 설쳐 다니고 있는가가 낱낱이 우리 눈에 띄어야 돼요.
어떤 사람이 ‘목사님, 나는 성도입니다.’ 한다면 그러면 묻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도 아닙니까?’ 물어야 돼요. ‘나는 예수님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그거 말고 ‘어떤 사람이 성도 아닙니까?’ 저는 새로운 목사를 만나게 되면 묻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이단에 대해서 어떤 정의를 내리고 계십니까?’ 묻고 싶어요. 왜냐 하면 어떤 교회 담임하는 목사가 이단에 대해서 정의를 갖고 있으면 그 기준에 맞추어서 사람들을 내 사람과 저 사람과 구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단의 기준이 없으면 ‘아무나 온나, 아무나 온나’ 이리 된다고요.
우리 십자가마을에 논쟁이 있을 때 여러 번 물었어요. ‘무엇이 이단입니까?’ 물은 거예요. 답변을 안 해요. 왜 답변을 안 할까요? 왜 답변을 안 하느냐 하면, 십자가 마을이 공격받는 이유가 너무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만 옳다하고, 자기만 복음 안다고 주장하고, 그러니까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것을 공격했다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묻는 게 뭐냐, 그러면 ‘그렇게 물으시는 분은 어떤 것이 이단입니까?’ 물으면 답변을 안 하는 거예요. 그 답변을 하는 순간 본인도 폐쇄적이고 본인도 고집부리는 거예요.
여기에 고집이야기 나왔지요. 베드로후서 2장 10절에 나오지요. 그 뒤 이야기가 12절에 보면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이것은 어떤 특정 개인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한 사람의 총집합을 언급해 놓은 거지요. 총 집합을.
한 사람을 가지고 이단이라 할 건데 이건 어떤 특정사람을 가지고 이단이라 하지 않고 이런 류가 한데 같이 모이게 되는데 요런 사람이 한데 모이도록 홀치는 다른 동기가 있는 거예요. 성경 자체가 어렵게 되어있는데, 여기가 세상인데 땅은 사람과 안 맞지요. 안 맞으니까 이 땅은 심판을 호소하게 되니까 심판이 와야 되고 심판은 기정사실인데, 이 땅에서 심판받을 이유들이 있어야 심판이 정당화되니까 그 이유들이 나타납니다. 마치 난타할 때 북을 치면 북위에 물이 튀듯이 탁! 탁! 튀게 하는 그게 불법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하는 기반은 한결 같아요. 그게 바로 복음이고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이 사람들은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을.
자기가 복음을 거부하고 있다는 본색이 들통 났으니까 그냥 발작을 일으키고 저항을 강렬히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짐승 같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특정 사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이스라엘을 항공모함을 몰고 가게 되면 거기에 따라서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이 계속해서 발생되게 되어 있어요. 끊임없이.
한 가지 예를 들면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있을 때 바로 왕이 성경대로라면 완전히 미친 사람이에요. 지금 백성들이 죽을 판이에요.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그냥 히브리인들 보내줍시다. 보통일이 아닙니다. 지금’ 해도 바로 왕은 안 보내줘요. 왜? 마음씨가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강팍케 해요. 의도적으로 왜? 어떤 역할을 해야 되거든요. 이성 없는 짐승역할을 해줘야 돼요. 누군가는 해 줘야 된다 말이지요. 그것이 식구일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심지어 부부간에 있을 수도 있고. 같은 목사들 속에 교인일 수도 있고. 하여튼 아까 처음에 한 복음 때문에 고통 받아야 됩니다. 이건 할 수 없어요. ‘복음 아는데 왜 고통주십니까?’ 해서 너무 대들지 마시고요. 아~ 복음 때문에 받는 고통이라면 ‘주께서 하나같이 다루고 있구나!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듯이 이젠 나를 하나님처럼 다루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아요. 구원 받은 롯도 고통 끝나고 지금 편히 놀고 있잖아요. 좋잖아요. 제대해서요. 제대하려면 고통이 있어야 돼요. 아무나 제대 안 시켜 주거든요.
9절 봅시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여기서 ‘까지’ 또 나왔지요. 심판 날만 지키고 그 다음은 안 지킵니까? 그게 아니고 까지라는 말은 목적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기어이 심판하고 말리라, 그런 뜻입니다. 이신바예바가 5m를 못 넘었는데 5m를 넘었거든요. 기어이 5m넘을 때까지 하면 그 다음에는 5m 안 넘습니까? 넘잖아요. 기어이 심판 때 까지라는 말은 역할과 사명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정도 이상으로 계속 주님의 일은 포기되지 않는다. 줄기차게 밀어붙인다. 기어이 심판받게 한다. 심판받으려면 심판 받는 자가 발생되어야 돼요.
발생되는 요건은 뭐냐, 우리가 복음을 품고 살면 우리가 항공모함 되어서 우리 주변에 심판받을 사람들이 발생되게 돼 있습니다. 친구라고 해서 봐줄 수 없어요.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일을 우리가 변경시킬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에게는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행복한 거죠. 사람들은 내일 되면 또 다른 소리 할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내일되면 다른 사람이 못할 처지에 있다 말이지요. 오늘도 십자가 피! 내일도 십자가 피! 20년 후에도 십자가 피로 구원 받고 죽을 때도 십자가 피만이 용서 받는다. 똑같은 소리해야 될 팔자니까 얼마나 안정되어 있습니까? 이 정도만 안정되어도 얼마나 자식들에게 훌륭한 엄마고, 훌륭한 아빠입니다.
하도 엄마부터 흔들리니까 자식들도 갈피를 못 잡아서 혼돈되지만, 엄마가 딱! 서서 든든하게 ‘이건 돼! 이건 안 돼!’ 분명히 해 주시면 자식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러면 자식은 지 본색을 드러내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길렀던 공들였던 애가 없으면 죽고 싶었던 애가 복음을 거부할 때는 기가 막히지요.
12절 봅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이리 되어 있잖아요. 한 번 적어 볼게요. 이 사람들은 ( )해 놓고 하늘나라 수능시험 있습니다. 괄호 속에 들어갈 말을 다음 중 고르시오, 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어떻냐 하면,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지옥가기 위해서 이렇게 설쳐야 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본디 이 짓을 해야 할 사람들이에요. 반드시 해야 돼요. 너무 말리지 맙시다. 우리가. 말린다고 말 들을 사람이 아니고. 본디 지 본성대로 갈 뿐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섞여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섞이니까 좋은 친구인데 복음만 외치니까 본디 자기의 본성을 더 이상 감출길이 없지요.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훼방한다, 훼방이라 하면 쉬운 말이 있어요. 비난한다. 아무소리 안하는 것 하고, 비난하는 것 하고 다릅니다. 아무소리 안 할 때는 저 소리가 뭐나 하고 모를 때고 비난한다는 말은 충분히 알고 본격적으로 하면 팔 걷어붙이고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거예요. 그게 훼방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음녀가 이 짓해요.
음녀 나오는 거 미리 볼까요. 14절에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요거 현대말로 고치면 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 대도시’를 말합니다. 강남 스타일로 보시면 돼요. 왜냐 하면 요한계시록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음녀가 특정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집단이 하나라고 통일될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정신이 먹구름처럼 고루고루 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똑같은지, 똑같이 덮어버려요. ‘어이! 3차 갈까? 가자!’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지 몰라요. 1차 가고, 2차 가고, 4차 가보셨습니까? 5차 옛날에. 땅이 저주할 때, 복음 모를 때, 복음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지. 아시잖아요? 복음 모를 때 있었잖아요.
이 사람들은 개인으로 하는 게 아니고 결국 생각이 같은 본성이 통일되게 되어 있다 말이지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다루시는 성도 주변에 바짝 올라오면서 성도는 노아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뚝딱! 뚝딱! 강날스타일이든지, 강북스타일이든지 관계없이 노아방주 만들지요. ‘왜 만드십니까?’ 물어보지도 않을뿐더러 물어봐도 설명해도 못 알아들어요. ‘예수의 피를 마시며......’ ‘에이~ 가자, 가자, 강남 가자.’ 어제 지하철에서 술꾼들 봤지요. 어떻게 모르는 사람들끼리 생각이 똑같은지. 술만 먹으면 전부다 대동단결돼요. 이성 없는 짐승 같아요. 그런 것을 우리한테 목격하게 하시기 위해서 아직도 이 세상을 살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들을 이해해 봅시다. 왜 술을 먹었으며 기분 좋아서 먹는 경우는 없어요. 대부분 기분 나빠서 먹어요.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술을 먹거든요. 니가 뭔데? 맞지도 않는 땅에 살면서 땅이 니 맘대로 안 된다고 해서 화를 내는 너는 뭐냐 말이지요. 너는 어디서 기어 나왔느냐 말이지요.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있다가도 언제 있었나? 할 정도로 흙에 같이 합류되었으니까 훅~ 불면 없어지는데. 선덕여왕? 예쁜지, 안 예쁜지 모르겠어요. 선덕여왕 없어요. 세종대왕 없어요. 괜히 우리 기억 속에, 연상 속에, 추억 속에 있지, 지금은 없다 말이지요. 우리도 장차 없어져요. 흙에서 와서 흙으로 살아서 흙속에서 이름도 없이 성도 없이 그냥 가버릴 존재인데 옷 한 벌 건졌으면 수지맞은 장사잖아요. 으하하하 웃으면서 그저 빈손으로 와서 빈 몸으로 돌아가는 게 디모데전서에 나오잖아요. 거저 왔으니 거저 먹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뭐가 그리 화나는데? 키가 작은 사람은 오락이 아닙니다. 키 크려고 할 때 오락이 생기는 거예요. 없는 건 오락이 아닌데 만들면 그 때는 오락이에요.
14절 봅시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음심이란 말을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려운 게 아니고 눈을 다른데 돌리는 게 음심이에요. 원래 음란하다는 것은 뭐냐, 가정을 가진 배우자가 다른데 눈 돌릴 때 다른 배우자로 눈 돌릴 때 음란하다고 하거든요. 음란은 전체 개념을 확장시킨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언약, 뚝딱 뚝딱 노아가 방주 만드는 그 소리를 안 듣고 다른데 눈을 돌리면 그 전체가 음란이 되는 겁니다. 살인이고 음란이고 똑같은 죄에요. 하나님께서 홍수 줄 때 ‘가만있자, 이 마을은 음란이니까 더 받을까’ 이런 거 없어요. 음란죄 있는 마을보다 살인죄가 더 좋고 이런 게 없어요. 살인하나 음란하나 속으로 죄 지으나 전부 다 똑같이 불 심판 다 받습니다. 이거는 죄의 경중이 없어요. 왜, 이것자체가 죄인데 무슨 경중이 있어요. 방향을 다른데 튼다는 말은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이쪽이 십자가 안 보이는 방향 같으면 똑같이 마찬가지예요. 방향이 저 쪽 같으면 이쪽이 뭘 해도 안 보이게 돼요. 방향 이 쪽하고 뜨개질 해봐도 죄에요.
그러면 언제 방향을 돌립니까? 주께서 돌리시면, 주께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셔서 방향을 방주 만드는 소리에 십자가 흘린 피 소리, 신음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내 피를 마셔라는 그렇게 하십니다. 무지개만 펴도 마음에 감동되도록 하는 사람 있고 무지개 뜨면 옛날에 무지개 뜨는 언덕해서 그게 자꾸 생각이 나요. 얼마나 재미있던지 막 울면서 봐요.
15절 봅시다.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이거 어려워요. 현재 지금 저주 받는 모델이 나왔지요. 발람만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사실은 다 그런데 그 모델로 한 게 뭡니까? 발람이지요. 발람이 저주받은 자식이라 하는 것은 누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항공모함, 누가 등장합니까? 이스라엘입니다.
택한 백성 만들어 놓고 주변을 가지고 저주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택한 백성 된 것을 자부심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 때문에 자부심을 가져야 돼요. 이건 내 구원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세상 까발리라고 복음 준 겁니다. 주님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셨어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로 니에게서 일어나는 니 행동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냥 십자가 피 자체가 너를 구원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예요. 논리도 안 맞아요. 건너뛸 수 있는 논리가 없다니까요.
‘십자가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아니거든.’ ‘그러면 내가 예수님 사랑하면.’ ‘아니거든.’ ‘그러면 어떻게요?’ 아니, 처음부터 안 된다니까요. 안 된다 해도 고집이 세서 자꾸 뭘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어떻게, 어떻게, 자꾸 어떻게 찾아요. 어떻게 해도 소용없어요. 주께서 어떻게 찾기 전에 이미 다 했어요. 한 예가 뭐냐 하면 문 닫았을 때 들어오셨잖아요. 도마 없었고 나중에 도마 들어왔습니다. 도마한테 뭘 보여줬습니까? ‘어이, 도마야, 칼 있지? 창 있지? 찔러라.’ 안 했어요. 이미 찔렸어요. 도마 대신 로마 군인이 이미 찔러줬어요. 이미 옆구리에다가. 안양 사는 우리가 찔르기 전에 이미 그 당시 로마 군인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요. 피가 팍팍 쏟아졌습니다. 우리가 쇠사슬에 올라가려하니 키도 작고 못 올라가요. 이미 올려놨어요. 면류관 쓰시고 피나고 손에 못을 다 박아놨어요. 고맙게도 로마 군인들이. 그게 우리를 구원합니다.
내가 못 박는다고 망치질한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고 도마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도망치기 바빴지요. 그냥 보여줬다니까요. ‘그냥 만져 봐라.’ 누가 했어요? ‘제가 안 찔렀는데요.’ 이렇게 했습니까? ‘제가 안 박았는데요.’ 이렇게 했습니까? 도마가 기겁을 해버렸습니다. ‘주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오십니까?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왜 더러운 인간 속에 오십니까? 재래시장에 마트에 안 가시고. 에어컨 있는데 안 가시고 왜 재래시장에 오셔서 질퍽질퍽한 아스팔트에 왜 오셨습니까? 인간 속에 왜 끼어들었습니까? ‘니 하나 건지러왔다’ 이말 이거든요.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이 없어요. 다 이루었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십일조하면 복 받습니까? 만날 이런 식으로 사기치고 있다 말이지요. 교회에서. 선교회비하면 달란트 복 받습니다. 이런 소리 하고. 마지못해 선교회비 한다는 게 천원내고. 주고 싶지도 않고 안주려하니 찝찝하니 거지 동냥하듯이 천원 줘버리고. 그러면 그 선교사는 일 년 놀러 와서 슬라이드 해서 찍어놓고 돈 달라 하고.
발람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민수기 읽어보세요. 발람 훌륭합니다. 읽어 보셨지요? 발람이 처음부터 돈 돈 돈 이리 했습니까? 발람이 뭐라 했습니까? ‘니가 모압 당신 왕이 나한테 돈을 준다 할지라도 나는 여호와께서 시키는 대로 하지 니가 왕이라고 누굴 거지로 아나? 오해하지 마! 나, 거지 아니야! 싸가지가 없어. 아무리 이리 보여도 나는 선지자야! 선지자를 왜 돈으로 매수해! 내가 돈에 팔린 선지자야?’ 라고 한 사람이 누구 였었었습니까? 발람이었습니다.
아까 뭐라 했던가요? 본디 이성 없는 인간은 그 길로 가줘야 돼요. 본인이 원하고 안 원하고 관계없이 본디 삯꾼 돼 줘야 됩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지어낸 말인데요.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요. 국을 끓여놨는데 고기국에 하다못해 약간의 신문지조각이 있다. 국자로 그 부분을 덜어내지요. 드러내요. 또 군에 가면 강제로 하는 게임이 있어요. 구덩이에 10명씩 들어가서 상대방의 숫자를 바깥으로 다 드러내는 쪽이 이기는 거예요. 돼지잡고 파티 하는 게 있어요. 그 때 바짝 들어서, 바깥에 안 나가려고 발버둥 쳐요. 그러면 딱 들어서 떼어 놓고 소장님, 우리 이겼습니다. 하는 거예요. 고거 들어 내줘야 돼요. 니는 여기에 천국에 오면 안 돼! 바짝 들어내 주는 그것은 복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복음이면 분류가 돼요. 왜 그래야 하느냐면, 우리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게 우리가 원해서 받은 게 아니고 우리가 연구해서 신학공부 많이 해서 신학박사 돼서 안 게 아니고 이것은 얼또당또 않은 복음을 알아들었으니까 얼또당또 않게 알아버린 사람만 결국은 그리스도만 찬양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죄인 되고. 우리는 아무것도 의로운 게 없고, 우리 성령 받은 사람은 안 어렵지요. 내일되면 몰라, 그건 내일 문제이고 걱정할 필요 없고. 전혀 어렵지 않아요. 실제로 복음 안다는 사람들도 제가 물으면 쉽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집안에 돈 문제 얽히고 특히 교회에서 개인 감정문제, 집사가 과격하게 말실수할 수 있거든요. 아침에 부부싸움해서 교회 와서 화풀이하다 보니까 영원히 삐지는 거 있잖아요. 점심식사 하는데 ‘이 밥, 누가 했노? 이리 해서 사람들 밥 먹으라고 내놨나?’ 철없는 할머니소리 해서 그거에 삐져서 교회 안 나오고 이런 것이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 말하기 전까지는 복음만 있으면 우리는 됩니다. 죄인입니다. 다들 그렇게들 했었어요. 다들 했는데, 뭡니까? 바짝 들어서 들어내 버렸어요. 바짝.
이렇습니다. 발람이 지속적으로 삯을 받고 이건 나와 있으니까 알지만, 발람이 모압한테 이런 압력을 받은 거예요. ‘이스라엘을 잡아 죽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들이 스스로 타락하면 됩니다.’ ‘스스로 타락하기 위해서 그들은 뭘 좋아하는데?’ ‘여자를 좋아합니다.’ 여자가 보여주는 거룩한 파티가 종교적인 파티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방종교에는 그 시대에 스트레스 푸는 게 요새 같은 부흥회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남편하고 싸워서 스트레스 받는 거 새로운 만남으로 잠시나마 행복한 생활을 보냈는가 봐요. 이게 있어 가지고 인기 있었던 모양이라.
종교라는 것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 종교지, 울기만 해서는 안 되고 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뭔가 짭짤한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짭짤한 인위적으로 만들어 주는 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한 번 경험하고 난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숨어있는 본성을 주체할 수 없었던 모양이라, 그걸 그렇게 미끼를 던지도록 주동한 자가 누구다? 발람이 그렇게 했다 말입니다.
여기 바알 브올 신에게 부속해서 죽은 사람이 이만사천명이에요. 숫자 1명도 아쉬운 이때에 이만사천명이 군대라고 보면 돼요. 이만사천명이 전사했어요. 누구한테? 하나님한테 맞아서 전사했어요. 바알 브올에게 먹고 마시고 신에게 절함으로서 바알 브올이 뭐냐 하면 민수기25장 4절에 보세요.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아마도 바알 성산이 태양을 섬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태양을 섬길까요?
과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서는 아무리 봐도 이 세상은 신이 만들었는데, 신이 만들었으면 신의 Code, 암호 같은 것, 법칙 같은 것, 신의 코드 같은 것이 만들어진 것 속에 분명히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뭘 찾으면 돼요? 신이니까 일관성 있잖아요. 거기서 뭘 찾으면 돼요? 주기성을 찾으면 되지요. 그 때마다 똑같이 반복 되는 것. 이 자연세계는 우리가 안 만들었지요. 우리가 안 만들었는데 달이 차면 기울고, 기울면 그 면적대로 차츰 차츰 차다가 만월 되고 난 뒤에는, 우리가 시키지도 않았어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달이 알아서 조금씩 어두운 면이 많아지고 밝은 면은 줄어들고.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저런 조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 달을 만들어서 하늘에 매달을 수 있겠습니까? 지나가는 구름도 우리가 만들지를 못하는데 달을 누가 만들어요? 그러면 우리는 신을 부정하려면 뭘 부정해야 돼요? 인간이 만들어낸 컵이나 볼펜 이런 것만 있고 그 외에는 없다 해줘야 신을 부정할 수 있어요. 없어! 없어! 인간이 다 만든 거야! 그런데 밤하늘을 보니까 별이 반짝이고 달이 있더라, 누구야? 저 달 만든 공장이? 현대에서 만들었어? 삼성에서 만들었어? LG에서 만들었어요? 누가 만들었어요? 안 만들었는데 왜 있느냐, 그게 무서운 거예요. 인간이 미처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은 지가 죽는 이유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앞으로 내가 갈 때, 모르는 게 있어버리면 모르는 것 때문에 내 앞길이 방해가 되고 실패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겁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믿는 거예요. 왜? 자기 앞길이 만사형통하라고. 부흥회 한다! 부흥회 해! 진짜 이겁니다. 교회는 만사형통 때문에 가는 거예요. 신에게 미리 뇌물 주는 거예요. 뇌물 주고 미리 술수를 써 놓는 겁니다. 초를 쳐 놓는 거예요. 약을 먹이는 겁니다. 왜? 이렇게 신을 찾는 대견한 나에게 주께서 쓸데없이 자꾸 방해하지 말고 좀 보탬이 되라고. 이렇게 하는데 지도 양심이 있지, 얻어먹은 게 있으면 도와주는 게 있어야지, 그래야 보험을 들은 보람이 나지, 죽어도 보험 들어 놓으면 천당 갈 수 있잖아요. 그게 목사가 속여서도 그렇지만, 그런 말만 나는 듣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자기를 속였던 사람들도 문제 있어요.
듣기 좋은 것만 듣는 사람들도 문제 있어요. 사람을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