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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하늘이 열리며 120808우리교회에스겔

하늘이 열리며 120808

이름 : 이근호(IP:117.55.135.113)

하늘이 열리며(겔 1:1-3)

이근호

12-08-08 21:15

하늘이 열리며

2012년 8월 8일 본문 말씀: 에스겔 1:1-3

(겔 1:1, 개역) 『제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겔 1:2, 개역)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겔 1:3, 개역)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선지자는 본인 구원을 위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위한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엮여야 하는 선지자를 우리 자신과 직접 엮어서 해석하면 안됩니다. 즉 선지자가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도 이렇게 살자는 식은 옳지 않는 해석입니다. 선지자가 받은 영은 예수님과 관련된 영이기에 십자가의 영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이 전달한 모든 말씀을 우리의 영혼과 직접 연결 지어서 이해하게 되면,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해석을 내놓게 됩니다. 에스겔보다 더 예수님과 근접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이 세례 요한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쇠해야 하고 예수님은 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요 3:30)

이 원칙은 그대로 에스겔에게도 이어집니다. 그는 혹독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집니다. 마치 철판 위에서 구워지는 해물처럼 이리저리 되쳐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왜 선지자는 그해야 합니까? 자기를 위한 인생, 자신이 설계하는 인생을 일체 허용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위한 계시란 선지자에게 용납될 수 없습니다.

꼭 예수님을 위한 인생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드러내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이점은 세레 요한까지 이어지고 예수님에게 완성을 보게 되며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들에게는 동일한 운명으로 덮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공식으로 인해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사로잡힌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선지자는 지금 사로잡힌 채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에스겔은 사독 계열의 제사장 부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B.C 59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2차 침입했을 때 여호야긴 왕과 방백들 그리고 많은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포로 기간 중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 있는 델-아입에서 거주하였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가 소명을 받은 때는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 간지 5년 후인 B.C. 593년이며 그의 예언 활동은 22년 뒤인 B.C 570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사로잡혔다’라는 것이 과연 성립이 될까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로잡히지 않는 이상, 절대로 이스라엘이 사로잡힐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왕이 패배하지 않는 한 나라의 패배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사로잡힘’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애굽에서 노에 생활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서 그 어떤 누구의 힘에 의해서는 사로잡히지 않은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다시 ‘사로잡힌’ 처지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보다 힘 센 나라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왕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 백성들을 이방나라에 사로잡히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전부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출애굽 할 당시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던 것은 ‘어린양’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어린양’의 운명에 합류되지 못하면 ’어린양의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운명을 본격화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에스겔 1:4-7을 잠시 보면, “겔 1:4, 개역)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히 인간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세계가 하늘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사람을 집어넣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과연 가당치나 할 일입니까?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죽음’에 동참시키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1절에 보면, ‘하늘이 열리고’라는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인간 세계는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온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스스로 자기 구원을 성사시키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에게 있어 구원이란 자신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다루어지는 존재로서 구원이 성사됩니다. 그 ‘다루어지는 원칙’은 바로 ‘어린양의 죽음’ 속에서 함께 죽는 겁니다. ‘사로잡혔다’는 말은 그 어느 누구도 그 죄의 두께를 극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53:3에 보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여기서 ‘우리는’이라는 어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 생각들이 배제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생각과 사상과 충동과 마음을 배경으로 깔고서 그 마음에 연관해서 하나님의 뜻을 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면 고난을 당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이 생각에서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는 인물이 인간 중에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만 말씀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인간이 말씀을 말씀대로 되는 재료로 쓰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조차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합당하게 발생되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 어떤 사람이라도 말씀이 지정해 놓은 원칙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라면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단으로 알고 있었습니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라는 존재는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합당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종 결론이다”고 말입니다. 사로 잡혀 있어 우리 힘으로 그 죄를 이겨내지 못함을 분명할 때, 비로소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 됨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만 쳐다보면서 살아야 될 팔자입니다. 이럴 경우에만 예수님의 나라에 가서 영원토록 예수님으로만 즐거워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게 된 이 축복 외에 다른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8-10 09:18

1강-에스겔1장 1-3(하늘이 열리며)1208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1-3

“제삼십년 사 월 오 일에 네가 그 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오 일이라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오늘부터 에스겔서를 보겠습니다. 에스겔을 처음 대하면서 이 48장이나 되는 두꺼운 계시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이 상당히 궁금할 것 같아요. 에스겔 전체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가, 그것은 이것부터 먼저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다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앞당겨서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것을 내다보기 때문에 예수님과 연관 지어서 이 에스겔을 보셔야 됩니다. 선지자는 그냥 선지자가 아니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선지자, 그것이 바로 참된 선지자입니다.

오늘날 신약성경에서 성령 받았다, 나 성령 받아 구원되었다? 자기 구원받으라고 성령 준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연관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해서 성령 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성령을 뭐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영이라 할 때는 필히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느냐,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인간의 영혼, 인간의 영이라는 것, 그것은 성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전제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고 자기 영혼에 의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소망 갖고, 예수님을 섬기고 존대하는, 자기 영혼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과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과 관련되는 것은 그냥 정 반대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비슷하지도 않아요. 근처에는 갔다, 그것도 안 됩니다. 그냥 정 반대입니다. 왜 그런가, 성령은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만 주어지기에 반드시 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성령이 왔다는 것은 십자가의 영이 왔다는 말이고 십자가의 영이 왔다는 말은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십자가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지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고 어떻게 섬기고 봉사하든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논리가 상당히 간단한 논리입니다. 이 간단한 논리에 대해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주 극단적으로 반발하는 식으로 나서게 되는 겁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영을 한 번 조작을 해서 마치 성경에 나오는 성령 받은 선지자처럼 비슷하게 해 보려고 시도를 하다보면 십자가 복음과 대 충돌이 일어나는 거지요.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야기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사람 종이다.’ 그런 뜻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해서 자기 사람 만드는 것, 그것은 사람의종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상태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게 되면 그냥 갈 곳은 그저 사람들 모여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 모인 곳이 어디냐, 축구장이나 야구장이나 교회나 극장, 그리고 각자 사는 아파트 안, 시장 통, 그게 다 사람들 모이는 곳이죠. 천국은 그런 사람들 모이는 곳이 아니라 성도들이 모이는 곳인데 천국이라 하는 것은 바로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모여든 사람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처형을 당했기 때문에 결국 성령 받은 사람은 사람들 모인 곳에서 예수님과 같이 처형 받을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반드시 똑같은 일로써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 가신 길이 그 길이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 정리하면 에스겔은 뭐냐, 에스겔은 선지자입니다. 어떤 선지자인가, 본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아닙니다. 하나님 증거 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있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보면 선지자에게 예수님의 영이 임했다, 고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초반부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우리는 밝혀내야 됩니다. 에스겔 1장 1절부터 그렇습니다. 초분부터 단어가 하나 나오는 “사로잡힌 자 중에”라는 겁니다. 상당히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사로잡혔다.’ 유다가 BC 586년에 망하는데 그 망하기 12년 전에, 그러니까 BC 598년입니까, 그때에 제 2차로 포로 잡혀 갈 때 여호야긴 왕과 함께 선지자가 잡혀가요. 총 4차에 걸쳐서 끌려가는데 어쨌든 사로잡혀 갑니다. 그런데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실은 처음 이스라엘 나라 만들 때 애굽에서 노예로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자유를 얻어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을 사로잡지 못하는 형편에서 약속의 땅에 살게 된 나라가 이스라엘이지요.

사로잡혔다, 와 상관 없는 나라입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거기에 같이 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사로잡으려면 누구를 사로잡아야 되느냐하면 하나님을 사로잡아야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방나라와의 관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블레셋이나 암몬같은 이방나라를 사로잡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한테 사로잡힐 일은 없습니다. 원래 일시적으로 몇 명씩 있었지만 전쟁에서는 필히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 에스겔에 들어와서 선지자조차도 사로잡혔어요. 그것은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외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사로잡힌 것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스겔을 볼 때 이렇게 보시면 에스겔을 해석 잘못하는 겁니다. 잘못하는 해석을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에스겔을 보면서 우리는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에스겔처럼 바르게 살자, 이것은 해석이 잘못된 겁니다. 에스겔을 볼 때 이렇게 보면 옳습니다. ‘주여, 지금 우리가 어디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이렇게 보시면 정답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상당히 깊이 생각해 봐야 될 예인데,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유명한 대목이지요. 예수님 고난에 관한 겁니다. 여기서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다고 하는 거죠. 제가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떤 메시아를 보내셨느냐 하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싫어버린바 된 메시아를 보냈다, 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분명하지요? 여기에 대해서 이의가 없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구원해야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을 싫어하고 예수님을 멸시를 당하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줄 알아야 돼요.

이것이 어렵습니다. 남은 다 싫어해도 나는 예수님을 좋아한다, 이러면 그 사람은 구원에서 탈락하는 겁니다. 나는 교회 충성하고 목사기 때문에 이렇게 복음전하고 강의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되게 사랑한다, 이러면 안 돼요. 끝까지 우리는 ‘예수님은 멸시 당해야 마땅하고 나는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고 싫어한다.’라는 그 자리를 우리의 자리로 계속 있어 줘야 비로소 우리는 구원에 절망을 느끼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혼자만이 공로로 받는다는 것이, 이 방정식이 성립이 돼요.

우리는 얼마나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척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얼마나 고난 받는 척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주님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덜 고생해서 그래요. 만약에 둘 다 예수 믿는데 둘 다 부부싸움 크게 한다면 둘 다 예수님이 얼마나 싫어질까요? 바로 그 때입니다. 그 순간이에요. 이사야 53장 3절의 순간입니다. 제가 새순교회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까 이능우 집사님께서 이번 수련회에서 느낀 점을 게시판에 올려놓았어요. 수련회강의는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야외에서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강의도 있거든요. 그 강의에서 부부간에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이 주제가 되었나본데 그 강의에서 느낀 점을 써놓았어요.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부부사이에 복음이고 십자가고 관계없어요. 그냥 남자는 돈만 잘 벌어다 주고 여자는 살림만 잘 살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끼어드니까 되지도 않는 복음을 실천에 옮긴다고 하다 보니 둘 다 어설픈 거예요. 둘 다 어설프니 그 어설픈 핑계를 주님 탓으로 돌릴 가능성이 많다 이 말이지요. 딩동, 바로 그 순간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피로인지 그것을 짐으로 느낄 때 그때 이사야 53장 3절의 말씀이 딱 그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나는 예수를 평소에 안 좋아했다.’는 거예요. 나만 좋아하고 예수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예수님은 싫어 버린바가 된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은 그 이사야 53장 3절을 보면서 ‘딱 나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척 했지만 안 좋아하고 사랑하는 척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미워하고 주님을 의지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주님 없는 곳으로 내빼고 싶고 복음 안 들리는 곳으로 내빼고 싶은 충동이 딱 나다. 나 같은 죄인이 어디 있겠나. 나 같은 것은 돌로 쳐 죽여도 마땅한 인간이야.’ 이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발견하면서 성도와 비 성도의 차이점은 성도는 ‘내가 돌로 쳐 죽여도 마땅한 인간이지만 복음은 전해야 된다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사명이기 때문에! 내가 완벽하고 내가 부부생활이 좋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아내가 보기에, 남편이 보기에 돌로 쳐 죽여도 마땅한데 마땅한 것은 마땅한 데, 복음은 전해야지!

내가 완벽하려고 복음전하는 것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어떤 상공부의 고위관료가 사우디 아라비아에 큰 프로젝트 따내기 위해서 갔다 그 말이지요. 지금 수조원의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서 해외 출장 가는 남편에게 아내가 해야 되는 말은 뭡니까?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를 따내서 앞으로 우리 5천만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애써 달라.’는 이 정도 이야기를 하면 괜찮은데 ‘여보, 어디가도 나무젓가락으로 뭐 집어먹으면 안돼요. 나무젓가락은 중국제가 많은데 포르말린을 써서 몸에 해로워.’ 이런 되도 않는 엉뚱한 소리를 할 때 그 고위 공직자의 귀에 그런 소리가 들어오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이 프로젝트를 따내는 것이 중요하지요.

물론 건강상 나무젓가락 보다 뿔 젓가락이 낫지요. 안중요한 문제라는 말이지요. 지금 에스겔이 주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에스겔서 뒷부분에 가면 나와요. 자기 마누라가 죽어도 울지도 않아야 되고 390일 동안 모로 누워 자야 되고, 이런 온갖 짓들을 다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우리가 흉내 내서는 안돼요. 에스겔은 두루마리 성경을 찢어서 먹어요. 그러면 우리도 성경 찢어서 먹을까요? 에스겔이 하는 모든 행위가 뭐냐, 그것도 사로잡힌 자 중의 하나인 선지자가 하는 행위는 뭐냐, 이겁니다.

‘어떻게 역사 속에 있는 너희들이 묵시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제가 그 말을 쉽게 하기 위해서 4절을 미리 보겠습니다.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죽 나옵니다. 이거 어느 나라의 일입니까? 이 세상에 이런 나라 없지요? 지금 골치 아픈 이야기가 뭐냐, 사람이 살면서 경험했던 그것은 같은 사람들의 경험이에요. 그런데 지금 1장 4절에 나오는 이 세계는 인간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영역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거기에 들어가야 돼요.

이게 가당키나 한 것입니까? 전도하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그런 식으로 돌아다닌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겠습니까? 이것은 어마어마한 거예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도 참 힘들어요. 뛰다가 허들에 걸려 넘어지면서 초반에 탈락하고, 이신바예바같은 경우에는 결국 동메달에 그치고 다 되려고 하는 판에 허리부상으로 막판에 경기도 포기하고, 하여튼 금메달 따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요. 그런데 지금 그런 것은 세상이잖아요. 올림픽도 세상이잖아요.

한국축구가 브라질을 이긴다? 참 힘든 일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브라질을 이기겠습니까? 힘든데 힘든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천국은요. 천국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갔다면 집에 금메달 주렁주렁 없어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것은. 우리가 지금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맞닥뜨리고 있는 겁니다. 취직 안 된다, 결혼 못했다, 장가 못 간다, 이것은 천국 가는 것에 비하면 나무젓가락 사용하지 말라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그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에요. 수조원의 프로젝트를 따내는 것이 중요하지 나무젓가락 사용하지 말라는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을 보게 되면 에스겔을 주께서 다루시는 것을 보면 꼭 그것 같아요. 불판 있잖아요. 네모난 불판에 해물 얹어서 볶는 것 있잖아요. 이렇게 볶고 좌로 볶고 우리 볶고, 이 에스겔은 평생 동안 주님 앞에 뒤집었다가 똑바로 섰다가 죽었다가 깨어났다가 온갖 경험을 다 합니다. 왜, 이유는 단 한 가지, 천국 못갈 인간, 우리는 그를 멸시한바 된 것, 우리는 메시아가 와도 멸시할 수밖에 없는 안목이 우리의 전부고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알아보는 능력은 없어요. 주님을 알아볼 능력도 없는 인간이 무슨 수로 주님이 사시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안 되는 일이지요.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 되고 있어요. 예수 믿으라고 하면 참 훌륭한 분이기는 한데 믿기는 뭘 믿나, 이렇게 나옵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차리라 그들은 참 솔직한 사람들이에요.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하는 기독교신자들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사로잡혔다는 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왔는데 이것을 사로잡히게 만들었으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개입했지요. 그렇다면 다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기어들어갈 때도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어린양이 죽어서 나왔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들어갈 때는 이제 이스라엘이 죽어야 돼요.

이스라엘이 사로잡혀서 그야말로 몰살당하듯이 죽어야 돼요. 죽어야 가는 나라입니다. 죽어야 가는 나라에요. 약속의 땅에서는 살 생각 하지 말아야 됩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죽은 사람만 모이는 곳이에요. 그냥 죽으면 안 되고, 그냥 죽으면 그것은 개죽음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더 구체적으로 해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집합, 그래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주께서 우리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냥 활어에요, 활어, 펄펄 살아 있어요. 노량진 수산시장의 활어가 있잖아요, 살아서 펄떡거리는. 내가 살아서 펄떡거려요.

아까 불판에 에스겔을 올려놓고 해물볶음처럼 지진다고 했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에스겔을 죽이는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결혼한 사람치고 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잖아요. 그런데 결혼한 에스겔의 마누라를 하나님께서 죽여 버리는데 죽여 놓고 울지 말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어떤 것도 사적인 것을 허용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께서 그런 자태로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늘이 열렸거든요. 1절에 보면 “제 삼십년 사 월 오 일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그발 강은 현재 이란 아래쪽에 흐르고 있는 강이에요. 그 그발 강가에 사로잡혔을 때에 하늘이 열렸다는 말이지요, 하늘이.

하늘이 열렸으니 이것은 땅에서 모방하거나 흉내를 내서 될 그런 계시는 아니고 오직 하늘이 열렸을 때만 내려오는 계시를 듬뿍 에스겔이 받고 있는데 그 하늘이 열렸을 때 받고 있는 그 계시에 의해서 에스겔은 불에 튀기듯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 몸부림치는 이유는 에스겔 본인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어쨌든 간에 에스겔을 몸부림 치게 만들어서 장차오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몸부림을 쳤기에 예수님 공로로 죄인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면을 미리 에스겔에 담게 되는 겁니다.

방금 길게 이야기한 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에스겔의 사로잡힌 자 중에서 주어진 모든 계시는 회개토록하기 위해서 준 계시라,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회개하라고 준 계시란 무슨 뜻이냐 하면, 뭐는 아니냐하면 동업하거나 동조하거나 하청업자처럼 그렇게 협상할 여지는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하나님께서 인간보고 협상조로 ‘야, 네가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자.’ 이렇게 할 의사는 전혀 없는 겁니다. 세례요한도 회개해야 되고 사도바울도 회개해야 되고 사도베드로도 회개해야 되고, 늘 회개와 회개의 연속, 그것이 에스겔의 몸부림의 연속과 같은 유의 몸부림을 치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네가 좀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너하고 동업하거나 협상할 의사는 전혀 없거든. 꿈도 꾸지 말라.’는 거예요. 주여, 십년을 복음 전했으니 이쯤에는 주께서 알아주겠지, 안 알아줍니다. ‘그거 회개해라.’ 계속해서 회개하라, 에요. 세례요한이 이렇게 했어요. ‘나는 계속해서 망해야 되고 주님은 계속해서 흥해야 되고.’ 세례요한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선지자 중에 최고로 가까운 선지자가 세례요한이기 때문에 사실은 에스겔이 하는 그 모든 예언은 세례요한 안에 다 포함이 되어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양파 껍질로 보면 되거든요. 양파껍질 안에 양파가 들어 있고 제일 바깥 껍질이 세례요한이라면 그 바로 안쪽에는 말라기, 그 안쪽으로 다니엘, 에스겔 죽 들어 있습니다. 에스겔이 이러한 사명에 적합한 것은……, 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부시,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죠? 미국 전 대통령이지요.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 제사장이에요, 제사장. 제사장이라는 게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등장한다는 말은 에스겔에게 내려왔던 모든 계시는 모세가 받았던 그 제사장 언약을 이루기 위한 차원에서 백성들을 거기에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제사장언약을 하나님 내가 추호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 말입니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거룩이지요. 나는 거룩하지 않은 인간을 장차 오실 묵시의 세계에 넣어줄 용의는 전혀 없다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 겁니다. 이 거룩한 제사장이 사로잡혔어요. 자, 그러면 여기서 핵심은 서서히 밝혀집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사로잡혔다는 것은 과연 제사장이 품고 있는 그 거룩이라는 능력이 사로잡혔다는 그 강한 정치적 압력, 신앙적 압력, 사로잡혔으니 꼼짝마라잖아요, 완전히 덮씌워서 빼도박도 못하게 갇히게 만든 그 징벌의 두꺼운 두께를 이 제사장으로서 뚫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에스겔의 관건이 되는 겁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을 주게 되면 죄 층층히 계속 누적이 되게 되어 있어요. 죄가 쌓이게 되는데 죄가 약할 때는 백성들이 에스겔 말을 우습게 보면서 ‘흠, 그 정도는 우리가 지켜주지 뭐.’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계속해서 죄를 퍼부어 버리면 나중에는 사람들이 화를 내고 나자빠져 버립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 와서 설교를 들어봐요. 들어오면 딴 소리는 안 듣깁니다. 딴 소리는 안 듣기고 뭐가 들리느냐 하면 ‘헌금 안 해도 구원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돈이니까 ‘십일조 안 해도 구원받습니다. 예배 참석 안 해도 축복 받는 대상입니다.’ 이런 것이 귀에 들어오지요.

한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3년 지나면 점점 더 강도가 세져서 이제는 자기 나름대로 뭔가 말씀을 지켰다, 해냈다, 이것만큼은 내가 지켰다고 자부한다, 그것마저 왕창 다 깨질 판이 되거든요. 그때서야 슬슬 자리 털고 그 교회를 떠나갑니다. 왜, ‘사람에게는 일말의 의도 없다는 말인가?’ 처음에 교회 올 때는 헌금 안 해도 복 받는다, 이런 소리 듣고 왔다가 계속 들어보면 나중에 분통을 터트리게 됩니다. ‘나라는 인간은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말이냐.’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이야기하지요. 우리는 저주받아야 마땅합니다, 십자가가 그겁니다, 라고 하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딱 한 마디에요. ‘나 그거 알거든.’ 하거든요.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아는데 왜 화는 내시는지, 대체 앞뒤가 전혀 안 맞아요. 목사님들에게 복음 전하면 목사님들이 이야기합니다. 그 복음 알거든요, 하고 화를 내요. 그 복음을 알거든요, 하고 화를 낸다는 말이지요. 아는데 왜 화를 낼까? 그 복음 알아도 죄인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복음 알거든요, 이렇게 나와요. 마지막 최후까지 찾아서 계속해서 죄를 지적하는 이유는 사로잡히지 아니하면 하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악마에 사로잡히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아요. 제대로 사로잡히지 아니하면 아직도 뭔가 내 스스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여지, 조그맣고 소박한 영역이지만 나만의 가치를 챙길 수 있는 작은 영역 하나라도 마련하려고 애를 씁니다.

개척교회 하다가 숫자 줄어도 기어이 그걸 못 버리는 이유가 나도 곧 죽어도 당회장이라는 그 위신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 안 죽었다, 그 말입니다. 나 안 죽었다, 가 아니라 죽으셔야 돼요. 우리는 끝까지 사로잡혀야 돼요, 끝까지, 끝까지 우리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어야 돼요. 물론 내 힘으로는. 우리는 걸핏하면 마귀를 내 힘으로 이기려고 합니다. 마귀가 웃습니다. 욥도 마귀를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우리가 함부로 이야기 못한다고 되어 있잖아요. 주께서 함께 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우리는 내 힘으로 인간되기 글렀다, 하는 사실입니다.

나는 돌에 쳐 맞아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때부터 헌금이고 예배참석이고 그런 것이 전혀 우리에게는 짐이 되지 않는 거예요. 헌금이든 예배참석이든 전도든 내가 할까 말까, 라는 권리조차 우리는 박탈당해야 됩니다. 주께서 하라, 하면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이지 주께서 하라, 하신 것을 내가 알아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자기가 또 가치가 있어요. 예수님 보다 자기가 더 소중해 져요, 또. 또 그렇게 돼요. 거기다 십자가 전하면 ‘나 그거 알거든. 그러니까 나 무시하지 마라.’ 이렇게 나와요.

심지어 누가누가 복음 많이 아나, 그것 시합에 나섭니다. 부부간에 복음 들으면, 당신이 복음 많이 아나 내가 복음 많이 아나, 부부간에도 싸움 벌이고 자식하고도 시합 붙어요. 그것은 덜 사로잡혀서 그럽니다.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은 버렸다 해도 버리면 세배 네 배가 되어서 찾아옵니다. 귀신 하나 나가면 일곱 귀신이 또 들어와요. 나간 귀신이 직원들 다 데리고 다시 들어옵니다. 끝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내 힘으로 감당해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사로잡힌 것을 느낄 때 십자가가 같이, 우리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느끼는 그 장소에 주님이 십자가 지는 모습으로 같이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 일은 네 일이 아니고 너와 같이 있는 내(주)일인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소금 치듯이 그렇게 굴리시고 유격훈련 받듯이 그렇게 훈련시킨 겁니다. 이 모습은 장차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서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것 하나도 자기 맘대로 안하시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살아가신 거예요. 우리가 이 에스겔을 시작하면서 ‘사로잡혔는데 제사장이었더라.’ 사로잡힌 것과 제사장을 결부해서 제사장이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그 제사장 언약을 믿는, 모세 언약을 믿고 주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 에스겔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건설되는 현장을 우리가 목격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 천국은 이런 거구나.’라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불태워집니다. 하나님나라는 불태워지고 불태워진 그 현장에서 하늘나라가 새롭게 기어 올라오는 기적을 에스겔을 통해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 이용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주님이 우리를 이용하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그것을 다행이라 여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이용하지 말고 주께서 철저하게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 되는 성도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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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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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