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여름수련회녹취2강-한윤범 목사
2012여름수련회녹취2강-한윤범 목사
이름 : 이근호(IP:117.55.135.113)
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재 2페이지 밑에서 열째 줄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면죄’보다 교회라는 인간들의 집결체에서 제공하는 ‘면죄방식’이 훨씬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면 이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태도이다.] 사도바울의 면죄보다 죄를 용서해주는 방식에 사람들이 구미가 당기면서 어떤 감동을 받는다든지 호감이 간다면 이것은 사람들이 헛수고한 겁니다.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동방교회나 천주교에서 앞에다 성수를 축성이라 하죠. 뿌리는 것. 1톤 트럭 앞에도 뿌리고, 돼지 앞에도 뿌리고, 가게 문 앞에도 뿌리고. 아가씨들이 개업했다고 춤추면서 들어오라고 하는데 신부가 와서 뿌리고. 귀신 나가라는 말이거든요.
여러분, 귀신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보낸 분들입니다. 그걸 나가라 하면 어떻게 돼요. 사람들은 자기 좋은 것만 골라서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아니면 말고. 왜 그래요. 오늘 낮에도 그런 설교했지만 지금 메시아는 오디션 봐야 돼요. 마음에 드는 메시아가 나중에 우승하고 차 한 대 타고. 일주일마다 한 사람씩 떨어뜨리고. 이런 판국이에요.
면죄방식을 왜 자꾸 집어넣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면죄는 모르고 뭐는 눈에 확 들어옵니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이 소문에 소문이 나서 단골이 되어 교회가 이뤄지고 권력단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면죄 방식을 빼봅시다. 면죄방식 없는 하나님의 사죄 방식, 용서 방식 없는 용서를 해버립시다. 그러면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붙어있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곧 교회가 제시하는 사죄 방식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AD 500년경부터 면죄 방식이 ‘전례(典禮)’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세너는 그리스식 ‘마가 전례’와 ‘콥트-에디오피아 전례’가 도입됩니다. 안디옥에서는 ‘야고보 전혜’와 ‘요한 크리스토무스 전례’가 도입되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비진틴 전례’와 ‘아르메니아 전례’가 교회에서 사용되고, 로마에서는 ‘로마 전례’가 보급됩니다. 그런데 이 전례라는 사죄 방식이 구약에서 그 아이디어를 차용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봐서 구약의 모든 내용은 이미 십자가 안에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구약을 한약재라 합시다. 이 좋은 한약재를 다리면서 인삼도 넣고, 당귀도 넣고 짜니까 십자가 피가 나왔잖아요. 즉 십자가 사건 안에 구약의 모든 의미가 그 안에 다 담겨있는 거예요.
면죄, 속죄하는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십자가에서 짠 피에서만 나와요. 다른 건 어설퍼서 안 돼요. 소 잡고, 양 잡고 해봐야 그건 어설퍼서 면죄 안 돼요. 제사장 복장 걸치고 선무당처럼 날뛰어봐야 안 돼요. 오직 예수님의 피 안에서 되는데 그걸 마지막 언약 완성, 새 언약이라 해서 언약으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은 없다고 해서 끝난 문제란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면죄방식에 관심 있다는 그것을 포착해서 교회를 구약의 형식으로 인테리어를 다 바꾸었어요. 구약 인테리어로. 제사장도 제사장 복장을, 정통이라고 우기는 동방교회는 성직자들이 수염까지 기릅니다. 키에프 공국이라 해서 현재 러시아 되기 전의 나링빈다. 키에프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입니다. 모스크바로 옮긴 것이 1300년경이거든요.
그렇게 옮기고 난 뒤에 로마 가톨릭에서 파견한 사절단 목 쳐서 죽이고 우리 러시아의 종교는 러시아가 우두머리라 해서 따로 러시아 슬라브 종교 만들어서 남쪽으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유고슬라비아부터 해서 알바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쭉 내려오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 밑에 가면 마케도니아, 등등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영토 전쟁에서 교리, 종교라는 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어떤 민족이나 집단을 단체로 몽땅 가입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만약에 지금 북한에 선교한다면 개인을 선교할 필요 없어요. 집단으로 선교하면 됩니다. 즉 최고 지도자가 예수 믿으면 북한은 전부 기독교 교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민족이 집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종교 뒤에는 국가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국가교회’라 합니다. ‘국가교회’와 ‘교회국가’는 서로 차이가 납니다. 교황이 하나의 대통령이 되어서 황제가 되어서 지배하는 그런 교회를 교회국가라 합니다. 국가교회는 아예 나라 전체가 교회로 운영되는 것을 국가교회라 합니다. 러시아 같은 경우에 국가교회입니다. 폴란드, 헝가리 밑에 있는 이슬람교 나라 다 마찬가지에요. 터키도 마찬가지고. 사우디아라비아 전부다 국가이슬람교가 되겠죠.
사람이 자기 구원을 위해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권력적 환경이 강제로 개인을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 종교권에 운명이 맡겨지게 됩니다. 광고에 보면 피로가 짐이 되어서 어깨 위에 있는 것 본 적 있지요.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가 무서운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대통령이 무서운 거예요. 예수가 무서운 게 아니고 회사 취직하면 예수 믿는 사장님, 회장님이 무서운 거예요. 회장님 따라서 종교가 바뀌는 거예요. 만약에 대통령이 소망교회 가면 소망교회로 교회 바꿔야 출세하듯이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당회장 목사가 무서운 법입니다.
사람은 혼자 산다고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겁주고 지배하는 세력에 묶여서 삽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신체적인 안정과 생계의 보장을 위하여 사람들은 자기를 지배할 세력에 속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길들여져 있어요. 불교 집안에서 교회 간다? 이것은 자칫하면 호적 파는 일이 생깁니다. 기독교 집안의 아이로 태어나는 모태신앙을 갖고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 받아서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는 것으로 신앙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어깨 위에 짊어진 무거운 짐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짐입니다.
아버지, 엄마 따라 교회 갔다가 아버지가 장로라 해서 억지로 학생회 회장되고 신앙 있는 티를 내다가 고3이 되었다고 핑계로 교회 안 나가다가 그 다음부터는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면서. “이제 종교는 내가 선택합니다, 아버지.”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됩니다.
사도바울과 예수님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한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미 국가에 매여 있고, 집안에 매여 있습니다. 지금부터 학문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주무실 분은 주무세요.
요한복음 1장에 로고스란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가 기독교 이전에 이미 그리스 세계에서 쓰여졌습니다. 이태리가 장화 비슷하게 돼있어요. 여기에 크레타 섬이 있습니다. 유럽문명의 발상지가 됩니다. 이 밑에 아가야, 위에는 마케도니아라는 지방인데 지금 마케도니아라는 나라는 따로 있어요. 이 지방에 중요한 도시는 데살로니가라 해서 현재 그리스 두 번째 도시고, 아가야, 아테네는 제일 큰 도시고. 여기 보스포러스 해협이라 해서 흑해에서 내려오는 해협이고 여기가 터키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이스탄불이라는데가 있어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옛날 이름이 있어요. 칼케돈 여기 있고. 키프러스 섬, 곧 사이프러스라는 섬이 있어요. 사도 바울이 이 섬에도 전도 했습니다.
로고스란 말은 바로 이 지도에 나와 있는 지역에서 사용한 언어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표현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창안한 그러한 언어와 개념들이 구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 받는 이쪽 지역의 교회는 이방인 교회에요. 이방인 교회에다 구약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개념을 고스란히 담아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담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언어를 새롭게 개발할 필요가 있었어요.
이 언어를 개발하면서 동원되는 사상이 바로 로고스 사상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모으다’, ‘집합하다’ 그런 뜻도 있지만 나중에 이성. 혹은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숨어있는 게 드러나는 계시 같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성(理性), 말. 또 그런 것을 포괄적으로 말해서 ‘질서’라고 할 수 있지요. 로고스란 말이 구약성경에는 없는 말이란 것입니다. 신약에서 ‘말씀’이라고 번역에서 구약의 모든 것들을 이 안에 담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와플 있죠. 와플을 자를 때 듬성듬성 자르고 그 한 조각을 단어라고 한다면 이 단어 하나가 포함하는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에요. 이것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입니다. 옛날에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생산물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어 사용도 지금 생각하면 해괴망측해요. 만약에 식물, 동물을 분류할 때 새끼를 배면 포유류고, 물에서 뭍으로 왔다 갔다 하면 양서류고, 지금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옛날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 보면 동물 분류법이 다음과 같이 됩니다.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로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주인 없는 개, 인어(人魚), 전설상의 동물, 미세한 붓으로 그려낼 수 있는 동물, 멀리서 볼 때 파리 같은 동물 등등으로 분류됩니다. 밑에는 다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시절이 있어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다.” 옛날 시인들 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지금도 문학가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리고 데카르트라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물체는 좌표로서, 점으로 표현한다. x, y 좌표라 해서 그 지점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 이것이 공간개념입니다. 이런 내용은 17, 18세기 때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박혀있다고 여겼던 시절에는 이런 것들이 다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박혀있는 게 아니에요. 공간이 곡률에 따라 휘어져있습니다. 빛이 곡률 따라 날아오고 있어요. 공간 자체가 휘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이 공간과 더불어 같이 변한다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현대의 시간관에서 우주 그 어느 지점에서는 우리의 과거를 되풀이할 수도 있고, 혹은 현재 우리가 이미 지나간 어떤 우주 공간의 역사를 되풀이해서 뒤따라 갈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나 예를 들면, 길이 두 갈래 있는데 차가 시속 100킬로로 달립니다. 북쪽으로 달리죠. 그런데 이 차가 샛길로 100킬로로 달립니다. 그런데 북쪽과는 점점 더 멀어지죠. 아무리 달려도 이 차는 북쪽에 가까운데 이 차는 북쪽에 느리게 접근해나간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시간과 공간은 결합돼있어서 공간적 속도로 인하여 시간적 속도가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밝혀집니다.
식당에서 두 사람이 낮 12시 정각에 식사를 했다고 해봅시다. 식사를 끝나고 난 뒤에 “다음 날 이 자리에서 점심시간에 식사 합시다”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사람은 그 다음 날까지 식당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음 날 열두 시까지 분주하게 돌아다니다 그 다음 날 그 자리에 찾아왔어요. 과연 둘이 차고 있는 시계의 시간이 같으냐 이 말입니다. 같이 않습니다. 달라져 있습니다. 설친 만큼 시간이 빼앗겨서 시간이 정작 12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간과 관련된 공식은 이러합니다.
우주공간에까지 시공간의 지평 범위를 확대시키면, 우주 비행기 타고 다음날 나타나니 프런트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앉아 있고 우주 비행기를 타고 빛의 속도로 여행한 사람은 그냥 그대로인 겁니다. 이게 지어낸 것이 아니고, 이걸 믿자가 아닙니다. 믿든 아니 믿던 세상의 시공간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그렇게 진척이 되니까 뒤늦게 우리는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에요. 내가 일의 주체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