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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선지자의 애통 120805우리교회미가

선지자의 애통 120805

이름 : 이근호(IP:117.55.135.113)

선지자의 애통 (미 1:8-16)

이근호

12-08-05 15:54

선지자의 애통

2012년 8월 5일 본문 말씀: 미가 1:8-16

(미 1:8, 개역)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미 1:9, 개역)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미 1:10, 개역)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지어다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지어다』

(미 1:11, 개역)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미 1:12, 개역)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미 1:13, 개역)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미 1:14, 개역) 『이러므로 너는 가드 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미 1:15, 개역)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미 1:16, 개역)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선지자가 등장해서 잔소리 늘어놓는 것은 오늘이나 그 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선지자는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 등장하는 분들이 아니라 아직 뭔가 사람들이 기대고 의지할 만한 것들이 남아 있어 그것에 매달릴 때 등장하셔서 ‘그런 것 의지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당연히 선지자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은 선지자들이 새로운 계획을 내어놓는 분들이 아니라 기존의 언약 체계를 고수하는 분들입니다. 선지자는 왕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합시다. 도리어 그들은 왕이 왕답게 제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라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본인들이 왕 자리에 앉겠다는 자들이 아닙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이미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 언약에 따라 하나님과 관계하는 나라입니다. 다윗 언약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왕이 들어가는 관계입니다. 왕만 제대로 처신한다면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왕은 다윗의 혈통들이 세습적으로 개입한 나라가 바로 유다 나라입니다.

이 유다 나라에 미가라는 선지자가 새삼 외쳐야 하는 이유는 그 왕들이라는 자들이 제대로 다윗 언약의 취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왕이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왕국이 흔들린다는 말이요, 왕국이 흔들린다는 말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왕국은 망하고 백성들은 왕이 없이 나라없는 난민 신세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는 언약의 실효성과 현실성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언약은 사람들이 원하는 축복을 제공하는 언약이 아닙니다. 언약은 축복과 더불어 위반했을 때는 심한 저주가 퍼부어집니다. 축복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저주를 통해서 신의 존재로 나타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왕이 제대로 했으면 선지자가 나타나서 발설할 하등의 필요성이 없습니다. 다윗 혈통을 따라 등장되는 왕이 문제투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 같은 선지자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왕국의 주저앉음을 말하는 겁니다. 왕국은 내려앉고 언약은 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교회는 망하고 그리스도의 몸은 살고! 언약에 따라 이것이 옳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말씀을 선지자들이 전해야 진정 언약을 믿는 백성이냐 아니면 이미 자기 소유된 자기 나라로서 이스라엘을 껴안고 있느냐가 들통날 게 아니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언약에 관심 있느냐 아니면 교회에 관심 있느냐가 들통나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7개 교회가 모두 지금은 다 망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몸만을 바라보기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망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언약 활동의 원칙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 몸과 관련짓지 교회와 관련지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본문은 ‘활발한 언약활동의 일원’으로서 언약이 쉬지 않고 심판을 내리신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심판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곳이 세상의 중심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떨어지는 중심지에 있고 싶습니까 아니면 변두리에 있고 싶습니까? 중심지에는 맹렬한 심판이 감행되고 있습니다. 맹렬한 심판을 맞고 있다는 것은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점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내려졌던 하나님의 심판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 나라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차이점을 봅시다. 우선 공통점부터 살펴보면, 둘 다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심판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있던 롯은 본인의 신앙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삼촌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롯을 건지셨습니다.(창 19:29)

아브라함의 언약의 효과는 맹렬한 심판 와중에서도 거뜬하게 견뎌냅니다. 철저하게 구원될 자만 건지는 원칙이 아브라함 언약의 효과로서 절정에 이릅니다. “뒤 돌아보지 말라‘는 당부는 롯의 가족 중에서 탈락자가 있음을 시사하는 조항입니다. 부부가 한 몸이라지만 구원에 있어서 공동 티켓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미가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받아야 될 죄목들이 포괄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심판이 가까이 접근했다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명들은 그동안 유다가 스스로 자신을 의지할 만한 이유들을 제시했던 풍족하고 넉넉한 성읍들이었습니다.

그 성읍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조종받는 기계같이 움직이는 앗수르 군대에 대해서 철저하게 유린당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 외에 달리 의지할 만한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거나 허용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나 유다는 하나님의 약속 이외에 달리 의지할 만한 것을 그동안 마음 두고 살아온 겁니다.

어떤 면에 그러한지는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움직이게 하는 앗수르 군대가 밟고 지나가는 모든 성읍에서 터져나오는 통곡소리를 분석하게 되면 알 수 있는 겁니다. 가드는 그들은 유다 백성의 어려움을 신나게 느끼는 고장입니다. 유다 땅 처음으로 앗수르에게 호되게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성읍들은 앗수르 군대가 마주쳐서 진압하게 되는 침략 경로를 나타냅니다.

사빌이라는 동네는 예루살렘 북편의 호사로운 성읍입니다. 거기서 벌거벗은 채로 도망치게 됩니다. 사아난 동네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용맹을 떨치지만 앗수르 앞에서 전의를 상실합니다. 라기스라는 동네는 물이 좋아 말을 양식하는 마을인데 거기에 앗수르 말들이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마레사라는 동네는 귀족들의 휴양도시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던 동굴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귀족들의 영화로움과 번영을 구가한 동네이지만 그 왕족들의 영광은 그곳에서 아둘람까지 지나면서 사라집니다. 마롯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마을로서 앗수르 군대에 심하게 파괴 당합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인간의 내부에 가로질러 가면서 부모로부터 받았던 그 아담의 죄를 낱낱이 들처냅니다. “다 이루었다‘는 복음은 이런 과정 속에서 울러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심판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일의 중심지에서 하나님을 올려다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8-06 14:57

02강-미1장8-16(선지자의 애통)1208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1장 8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1페이지입니다.

미가 1:8-16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지어다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지어다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이러므로 너는 가드 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미가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때 설교의 근본 취지는 이겁니다. ‘일체 사람들의 요구사항은 듣지 않겠다. 미안한 마음이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겠습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그것은 하나님 소관이지, 제가 고려할 바는 못 됩니다.‘라는 근본 취지죠.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본은 선지자라는 것이 왕을 대신해서 등장할 때는 이미 왕궁은 망했다는 이야깁니다.

다윗 언약에 의해서 다윗의 자손이 왕위에 앉는 식으로 하나님은 자기 나라를 통치하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통치할 때, 유다 나라를 통치할 때 다윗 자손에게 난 혈육적인 후손으로 통치하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 계열의 왕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왕궁이라고 그렇게 오해들을 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새삼스럽게 선지자가 나와서 입을 열고 발설을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원래 원했던 왕국은 이런 식을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도 본문에 나옵니다마는 14절에 “이러므로 너는 가드 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다윗 계열의 소위 왕들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의 판정은 글렀다.’ 하는 식으로 이미 결론이 났다는 거죠.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은 왕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왕이 문제가 있다 하면 더 이상 그 나라는 존속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는 역할은 바로 그 역할인 거예요. 쓸려 나가라 이 말이죠. 탁류에 폭풍에 쓸려 나가라 그 말입니다.

안압지라 해서 경주에 가면 옛날 왕들이나 귀족들이 연못을 만들어서 술잔을 띄우면 이상스럽게 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름이 조성돼서 각각 연못가에 앉아 있는 각각 귀족들에게 자기 순서에 술을 마시는 그러한 정원을 꾸며놨어요. 사진을 보면 대단한데 막상 입장료내서 들어가 보면 ‘이게 뭐꼬? 애들도 만들 수 있겠다.’ 아주 별것도 아닌데 그걸 대단하게 보거든요. 그런데 어떤 영화에 보면 나오는데 그 술잔에다 꽃잎을 띄워서 보냅니다. 그러면 저쪽 편에 앉아있는 귀족 마나님이나 어떤 아가씨가 맘에 든다면 이쪽 총각이 편지를 써서 물 위에 띄워 보내면 술잔이 가는 그 뒷모습을 귀한 자제들이 보는 거예요.

떠나보낼 때 그 떠나보내는 그것을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술잔에 그동안 잘나고 잘났던 이스라엘의 모든 영광을 그 안에 담았다면 그 술잔은 영광을 싣고 어디로 떠나는가, 파선할 수밖에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지경으로 마지막 영광의 마지막 남은 몫을 담아서 보냅니다. ‘가거라. 이스라엘 영광 끝. 유다의 왕조 끝.’

그것이 바로 선지자 미가가 외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가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걸 찾기 위해서 성경을 보거든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위해서 보는데 만약에 이스라엘이 잘 되면 우리도 낙관적으로 희망을 갖는데 하나님을 그동안 우리 선배 격으로 잘 섬겼던 이스라엘, 유다 나라가 이렇게 파괴되고 무너진다면 무서워서 어디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는 계속해서 무서운 하나님을 전해야 돼요.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신발이 안 맞는 사람은 오지 말고, 신데렐라 신발이 딱 맞는 사람만 오라고. ‘자꾸 당신은 사랑의 하나님 말고 무서운 하나님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라고 하는데 이 세상 망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이 누구신지 궁금합니까? ’궁금합니다.‘ ’세상 조지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설교자가 이야기를 해줘야죠.

사람이 교회 온다 하는 것은 자기가 있을 장소가 따로 있다는 거거든요. 주님이 관심이 없다는 말은 관심 있는 사항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교회 와서 웃을 일이 없으면 웃을 일을 딴 데서 찾겠다는 겁니다. 뭐 축구 사랑에 들어가든지, 뭐 매달을 따든지, 거기서 찾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사람을 꼬실 때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와 주님 사이에 세상 것을 녹처럼, 또는 찌든 때처럼 그걸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그걸 먹구름 낀다 할까요?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영광을 흐리게 만드는,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옵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기 위해서 먹구름을 집어넣는 겁니다. 요즘같이 가물 때는 먹구름도 괜찮습니다만, 주님의 영광과 우리 사이에 뭔가 우리가 웃을 만한 거, 행복할 만한 것을 집어넣으면 그게 사실은 복음 세계에서는 먹구름 이예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보고 기뻐하다가 이제는 주님보다 ‘아이, 주님 재미없어.’ 딴 것 가지고 기뻐하는 거예요. 그럴 때 선지자가 등장해서 ‘옛날 선배들이 그렇게 나오다가 망했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이 뭘 좋아하고 기뻐하는가가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하는 다윗 언약이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이 믿음 좋은 왕을 통해서 우리가 저절로 복을 받는 그런 구조. 그런 구조를 하나님께서 유지하기를 원하는데 그 왕이 문제가 말썽이 일어나는 거예요. 잠간 영화롭게 되다가 이제는 처절하게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야 되는 완전히 나라 자체가 망하는 거죠.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세요. 괜히 우리를 유혹할 것들이 많이 나오지 말고 차라리 없애버리세요. 올림픽도 올해 런던 올림픽 끝나고 올림픽이 없도록. 월드컵이라는 것도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그랬으면 좋겠다. 그게 사도들의 심정입니다. 사도들은 야고도 안 좋아하고 축구도 안 좋아하고 무슨 재미로 사나 몰라. 그냥 사도들은 삼층 천 본 걸로 기뻐하고, 베드로 같은 경우는 변화 산에서 본 엘리야 모세 때문에 기뻐하고 이렇지, 그냥 변화 산을 가지고 축구 시합으로 대체한다든지 올림픽 메달로 대체하는 그런 사도? 글쎄, 야고보가 그랬던가요? 그런 사도가 있었습니까? 돈 좀 번거하고 부동산 투기해서 돈 엄청나게 번 것 가지고 주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는 그런 사도가 있던가요? 망할 세상에서 뭔가 챙겨서 그것 가지고 축복이라고 들이대는, 마치 놀러 가면 소시지에 잼 발라서 애 입에 쑤셔 넣고 ‘이거 먹고 울지 마라.’하는 것처럼 세상적인 소시지나 치킨 가지고 애들한테 주듯이 ‘아이쿠, 이거 먹고 축복이라고 여겨라.’ 그런 것 가지고 들이대는 그것이 사도일까요? 아니면 맛있게 빨고 있는 소시지를 뺏어서 ‘위, 주를 보라’ 이렇게 하시는 분이 사도일까요?

성경을 보고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어려운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심판을 내리느냐, 다른 데 심판 내리지 않고 이스라엘에만 하필 뭐가 억하심정에서 이스라엘만 조지느냐, 하는 그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겁니다. 그것을 제가 공식을 세워드릴게요. 심판이 벌어진 곳이 하나님의 일하는 중심입니다. 여러분, 중심되기 싫습니까? 변두리 좋아하십니까? 변두리 나가 있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중심을 좋아하십니까? 하나님이 직접 떨어지는 그 중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행하시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뭘 봐야 되느냐,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졌던 심판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심판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차이부터 하기 전에 공통점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라 하는 것은 그 속에 아브라함과 관련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롯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조카 롯이 있는 곳이 아브라함이 있는 곳으로 쳐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했죠. 원칙,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진 그 장소가 하나님의 뜻이 떨어지는 중심체라고. 이 세상에 그 많은 장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주어지는 중심체라 했습니다.

그 중심체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위상, 아브라함의 가치, 아브라함이라는 게 왜 존재 하는가, 그 이유가 거기서 드러납니다. 롯이 구원받은 것은 롯이 잘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천사를 대접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졌다고 분명히 성경에 창세기 19장 29절에 나오거든요.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은 ‘니 나하고 안 엮이면 끝났어.’ 그런 이야기다 말이죠.

지금 그걸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우린 왜 자꾸 가정이 힘들게 하고 우리 교회를 어렵게 하고 교인 다 빠져나가고 왜 자꾸 이렇게 합니까?’라고 우리가 짜증을 내면 주님께서 ‘니 내 아니면 끝났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 내 아니면 끝났어.’

만약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교회라면 그 사람은 교회 자체를 믿음의 대상으로 포함시켜 버립니다. 이번 수련회 어려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중에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성령께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됐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교인들은 ‘그거 뭐 다 아는 이야긴데,’ 라고 그래요. 그 다음에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따라서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교회 부흥과 관련된 고 이야기는 하는 것은 전부 다 이단이라 했습니다.

성령을 교회와 관련시키는 것은 다 이단 이예요. 왜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예수님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령님은 교회와 관련된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시킵니다. 그리스도 몸이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교회든 다 망해버리죠. 요한계시록 나오는 7교회를 수련회 안 가신 분들을 위해 친절을 베풉니다만 요한계시록의 7교회가 지금 터키 지방입니다. 터키 지방에는 현재 이슬람이 97%입니다. 이건 약간 잘 모르고 하는 통계지만 얼추 비슷해요. 그러니까 터키 지방 있던 7교회가 이슬람 돼 버린 거예요. 성령을 누구와 관련시킨다고요? 그러면 7교회 망했으니까 그럼 우리는 예수 믿지 말까요? 성령은 7교회 망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 몸과 관련 됐다는 것을 저쪽을 망하게 함으로써 저건 믿을 게 못된다고 알려주는 방식으로 그리스도 몸을 드러내는 겁니다.

7교회만 망해야 됩니까? 우리교회는 안 망해야 됩니까? 우리교회 안 망해야 된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남의 교회 망해도 우리 교회는 사라지면 안 돼, 영원해야 돼.‘라는 것도 그것도 아주 수상한 심보죠? 그리스도 몸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몸보다 우리교회를 믿습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그것도 또 마찬가지예요. ’십자가 마을 믿습니다.’ 십지가 마을이 성령과 관련돼 있습니까? 관련 안 돼 있어요. 그래서 ‘목사님, 저 설교가 좀 이상한 거 같은데요. 어디 틀린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고 애매한 것 제가 정리해 드립니다. 간단합니다.

뭐 좋은 거 다 동원시켜서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복된 교회다.‘ 이렇게 나오면 그거 이단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 내세웁니다. 아브라함의 몸과 관련해서 심판이 일어난 거예요. 아브라함과 관련된 인사가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는데 심지어 의인 열 명도 안 됐어요. 열 명도 안 됐기 때문에 망하는 것은 망하되 기어이 빼냅니다. 그런데 거기에 반전이 있어요. 뭐냐 하면 롯의 부인이 롯과 한 몸이잖아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한 몸이니까 하나 구원받으면 따라서 구원받는 줄로 알았죠. 세상에, 잠은 같이 자도 천국은 같이 못 가네요. 표가 원 맨 원 티켓, 영어가 되지도 않지만, 표가 1인용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신데렐라가 신던 신발은 롯의 마누라한테는 안 맞는 모양이죠.

‘뒤돌아보지 말라’는 조항을 집어넣은 것은 참, 하나님이 얼마나 얄궂은 가 보세요. ‘뒤돌아보지 말라’는 조항은 ‘너희들 나오는 식구 가운데 누구 하나는 뒤 돌아본다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집어넣은 겁니다. 기어이 안 될 놈은 안 돼, 기어이 못 갈 사람은 못 가게 잡아당기는 댕기머리 잡아당기듯이 잡아당겨주시는 고마움, 고마운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딜 넘봐.‘라고 잡아당기시는 고마움.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심판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곳에는 바로 중심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몸의 중심,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거기 있다. 다른 이 세상 필리핀이나 그런데는 없다. 바로 심판이 있는 곳에 곧 주님이 계시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공통점이다.

차이점이 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는 일괄적이고 그 당시에는 심판이 그렇게 상세하게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구석구석 인간의 죄를 낱낱이 다 까발릴 필요가 없어요. ‘이런 죄 때문에 심판 받는다. 이런 죄 때문에 심판 받는다.’라고 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하는 반면에, 오늘 본문에 있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보내서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지방을 쳐 내려가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지명들 있잖아요. 가드, 사빌, 사아난, 라기스, 마레사, 가드모레셋, 아둘람 이 모든 지명들은 앗수르 군대가 유다나라 남쪽 끝까지 침공하는 침공의 경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경로를 닿을 때마다 심하게 침략 당하는 그 지명마다 한번 닿을 때마다, 놀이에 그런 게 있어요. 뭔가 지점에 닿으면 또또로또또 음악이 나오고, 다른 데 닿으면 드리릭드리릭 이렇게 컴퓨터 게임에 그런 게 있어요. 지명에 대면 그 지명에서 나오는 노래가 그 지명만 품고 있는 노래가 막 튀어나오는 게 있어요.

고 지명에서 나오는 죄들이 각양각색이라. 어떤 데는 귀족의 휴양소로 앗수르 군대에 의해서 빠지지 않고 공격받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역시 귀족들의 휴양지 “가드 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그 당시에는 귀족이나 왕족들이 오게 되면 예물을 주고받고 ‘야, 이게 최고 좋지? 그쟈? 우리가 귀족 된 보람이 있지?’하고 연회를 즐겼던 곳입니다. 즐겼던 곳인데 그것도 어떻게 그렇게 정 반대의 결과물을 쏟아내는지.

그리고 여기에 또 보면 13절에 보면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유다나라에서 가장 물이 좋아서 말을 사육하는데 최적지가 라기스입니다. 그런데 그 라기스에게 하나님이 심판자가 되는 앗수르가 무참하게 들어와서 그걸 파괴하니까 ‘니가 그렇게 잘나고 교만에 빠졌던 그 말들이 이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제는 완전히 적들이 말을 차지해서 말들이 완전히 몰살당했다 이 말입니다. 개성 있고 특색 있는 그 지명의 특색 있는 죄악들을 뽑아낸다는 점에서 일괄적으로 다루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의 차이점이 그런 차이점이 있는 거예요.

대우건설에서 하는 CF에 보면 만화로 돼 있는데 제가 그걸 굉장히 감명 깊게 본 이유가 앞에서 작은 북을 쳐요. 치게 되면 그 뒤에 나오는 직원들이 일괄적으로 발 하나 안 틀리고 군대 사열하듯이, 제이, 제이 하면서 하는 만화가 나와요. 그게 바로 앗수르 군대의 행렬입니다. 바벨론 군대의 행렬 이예요. 이게 성경에 나와요. 그들은 대오를 흩트리지 않습니다.영어로 하면 머신(machine), 기계입니다. 완전히 터미네이터. 사람처럼 생긴 기계예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아무 융통성도 없이 고대로 가서 고대로 시키는 대로 하는 로봇입니다. 하나님께서 로봇을 보낸 거예요.

요한계시록에는 그걸 황충이라고 합니다. 황충이라는 이 벌레는 대오를 흩트리지 않습니다. 공격 목표를 고대로 가서 고대로 치게 돼 있어요. 아~주 조직력이 뛰어납니다. 한국 올림픽 대표 팀 같아요. 조직력이 뛰어나요. 영국도 필요 없고 브라질도 필요 없어요. 기계 같아요. 척척 가서 패스해서 그냥 기계 같아요. 기계기 때문에 이건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하는 겁니다. 애굽에 마치 죽음의 사자가 와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온 집안의 장자를 다 치는 것처럼, 이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여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각 고을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교만케 했고 자만케 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왕의 위치를 놓쳐버리고 가치를 없애 버리고 언약의 의미를 없애버리고 자기 즐거움대로 마음껏 노닥거렸던 그 죄악들을 기계 같은 앗수르 군대를 보내서 그걸 돌아다니면서 전부 다 그들의 죄를 낱낱이 다 폭로시키는 역할, 그것이 그만큼 장차 십자가에서 폭로되는 죄의 그 절정의 모습과 가까이 접근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들이 그냥 잔소리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여기 11절에 나오는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빌 거민은 유다나라에서 제일 호사스럽게 살았던 마을입니다. 그 호사스러웠던 것이 완전히 역전돼서 가장 벗은 몸으로 도망치는 그런 거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아난 거민이라 하는 것은 그 당시에 삶의 방식을 가장 모범적으로 살던 방식인데 그들은 거기서 자유분방한테 울지도 못하고 갇혀 있는 상태가 되고 그 뒤에는 웃음이 넘치던 마을이 이제는 울음으로 변하고 의지할 것이 없다.

자,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서 설교 마치겠습니다. 자, 우리가 십자가를 압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대상으로 삼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아요. 십자가는 움직이는 십자가거든요. 오히려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십자가를 집어넣고 움직이는 십자가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작렬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우리 인생을 지나갑니다. 마치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을 지나가듯이 우리 인생을 지나가게 되면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았던 모든 죄악이 지금 잠재돼 있고 누적돼 있잖아요. 우리 집안만이 갖고 있던 개성, 그게 죄가 돼요. 그걸 낱낱이 들추어내면서 죄들을 폭로시킵니다. 폭로시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누가 폭로시키느냐 하면 왕,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님이 폭로를 시킵니다.

폭로 시키는 그 밑바닥에 피가 묻어있어요. ‘니가 죄인 됨을 인하여 내가 죽었다.’ 주님의 공로만 증거 하게 됩니다. 그게 평생을 살면서 밭이랑을 갈듯이 호미로 쟁기를 해서 밭의 속에 있는 것을 전부 다 드러내듯이 우리의 속을 다 파헤치고 드러내는 겁니다. 드러내다 보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와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안개가 안 끼었다고 생각하는데, 안개 낀 장충단 공원처럼 갑자가 뭔가 많이 끼어있음을 우리가 알게 되죠. 자식 생각, ‘앞으로 우리 자식이 시집가서 잘 살려나.’ 하는 이런 생각, 그것이 주님과 우리 생각에 ‘애가 커서 공부를 잘해야 될 텐데.’ 또 사업하는 사람은 ‘ 아이, 사업을 벌려놨는데 사업이 잘 돼야 될 텐데.’ 온갖 세상의 자욱한 안개처럼 끼어있어서 말로는 예수를 믿은데 날마다 근심 걱정이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는 것, 그것을 십자가로 통과하면서 ‘니 나 안 좋아하지? 딱 깨놓고 이야기해, 니 예수 안 좋지?’ 그것을 우리한테 지적을 하고 우리는 지적당합니다. 그게 바로 구원받은 축복받은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를 주의 호미를 가지고 우리의 밭이랑을 일구어 주시옵소서. 내 안에 도대체 뭐가 담겨있기에 주님은 전혀 안 좋아하고 그저 세상 걱정과 슬픔과 우수에 깊이 잠겨있는 그 내막을 껍질을 벗겨서 다 들추어서 심판이 있는 곳에만 구원이 있다는 다 이루었다는 구원이 그게 기쁨으로 다가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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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7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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