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위하여 울라(눅 23:26-31) href="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1
너희를 위하여 울라 120805
이름 : 이근호(IP:117.55.135.113)
너희를 위하여 울라(눅 23:26-31)
이근호
12-08-05 13:36
너희를 위해서 울라
2012년 8월 5일 본문 말씀 : 누가복음 23:26-31
(눅 23:26, 개역)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눅 23:27, 개역)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눅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눅 23:31, 개역)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예수님이 만드시는 십자가 사건은 이런 저런 요소들이 담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울고 있는 그 여인네들의 울음도 예수님의 사건 안으로 모아졌다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때 보따리 풀이듯이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그 구레네 사람 시몬의 입장도 십자가에 담겨야 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처형했던 그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의견도 십자가 사건 안에 담겨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전달하면서 그 안에 있는 이런 내용도 같이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십자가를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네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을 목격함에도 불구하고 울 수는 있었지만 그 십자가 내막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예수님에게 핀잔을 듣게 됩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말입니다. 지금 누구를 걱정해야 하는지 너희들은 분간도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인네들이 볼 때에 예수님의 서글픈 팔자는 자신들과는 상관없이 예수님만의 고생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온 인류에게 벌어질 일이 안에 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휘감고 오신 것은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죽음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여인네들은 자신들이 현재 살아있다는 존재라고 여기고 그렇지 못한 예수님을 향하여 동정하면서 울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있다고 자부하는데부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잔뜩 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미 모든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잔뜩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항상 살아있는 쪽에서 파악하는 죽음입니다.
그러다보니 그저 눈만 감고 편히 쉬는 것이 죽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쪽에서 내민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닙니다. 무서운 저주와 심판의 폭풍우가 들이닥치는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 29-30에 보면,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죽 하나님의 죽음이 무서워서면 차라리 산에 깔리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기겠습니까. 이게 죽음입니다. 다른 죽음을 상상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니 죽음도 그냥 삶의 부록이나 꼬리처럼 그냥 붙어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인생 자체가 본격적인 죽음을 말하기 위해 선행적으로 세상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에 뜨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어서 그들이 어디로 갔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디로’라는 것은 산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지 이미 죽은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즉 산 자들이 ‘어디에’ 장소를 점유하는 식으로 ‘산다’고 여기는 버릇은 평소에 사람들이 현재 삶이 특정 장소를 차지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삶은 실은 사람들을 죽이는 그 능력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죽는다고 여기지 누가 자신에게 감정을 가지고 죽이는 방식으로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서 살고 딴 데 또 살고자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살던 방식대로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이유는 사람의 목숨보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가득 안고 죽으시는 죽음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그 앞에서 ‘살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인간들이 현 생활을 사는 것은 ‘죽어가는 방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죽이시는 겁니다. 단순히 목숨을 끊는 정도로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과 저주와 심판을 감행하시는 식으로 인간을 죽이십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살 생각을 하지 말고 도리어 제대로 죽을 생각을 해야합니다. 제대로 죽을려면 예수님을 강조로 우리 인생을 자신의 인생을 가담되도록 집어넣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 인생노선이 있을 것입니다. 북아프리카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의 한구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십자가 사건이 성사되도록 필요한 한 일꾼으로 호출된 것입니다. 자체적으로 자기 인생을 설계했지만 그런 인생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엮기도록 하셨습니다.
즉 시몬이라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잃은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잃은 겁니다. 이로서 인생이란 자신의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에서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여건들이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재료인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결과로만 나타날 뿐입니다.
늘 그러합니다. 인생은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성도가 늘 ‘잃는 경험’이 일어나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이 뭔가 잃게 되면, 그동안 본인이 일방적으로 자기 인생을 꾸리면서 지내왔음이 들통납니다. 자기만의 개성있는 인생이란 곧 여전히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과 같이 않고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릴 수가 있는 겁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은 것은 평소에 그들 본인들이 십자가를 안 지고자 하는 노력을 열심히 해왔다는 말입니다. 여인들이 웃는 것이 평소에 자신들은 자신이 안 죽고 있는 사실로 인해 위로받고 웃어왔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즉 인간들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자기네들 것’이라는 인식에 무서운 저주와 심판의 폭탄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건입니다. 정말 죽이시는 하나님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살리시는 하나님이 더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나의 것이라는 것은 일절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시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을 친히 만들어나가시고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데 이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것이 있다고 여기지 말고 모두 예수님께서 복음에 이용하기 위한 재료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8-07 11:34
139강-눅23장26-31(너희를 위하여 울라)1208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26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7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3:26-31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더라.”
예수님의 안목과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안목이 이렇게 큰 차이가 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안목으로 바라보시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해석할 때는 일단 자기 입장을 전제로 깔고 자기보다 처지가 좀 못하면 울고 자기보다 처지가 좀 나으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자기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입장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여기 등장하는 구레네 사람이라는 시몬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이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자진해서 십자가 지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고 강제로 예수님의 노선에 편입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는데 여러 가지 필요한 상황들이 있어요. 어떤 아줌마들은 예수님 보고 안 되었다, 하면서 울어야 되고 시골에서 올라온 이 구레네 사람, 구레네 사람이라는 것은 요새 말로는 북아프리카 사람인데 뭣 때문에 이렇게 예루살렘까지 왔는지, 출장을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강제로 편입되는 식으로 예수님 십자가에 가담이 된 겁니다. 이 구레네 사람, 그리고 예수님 보고 울고 있는 사람, 그리고 십자가 지고 가고 계시는 예수님, 이런 조건들이 뭉쳐져서 십자가사건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그 안에서 뭐가 쏟아지느냐 하면, 이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십자가를 강제로 졌다는 사실도 우리 가슴팍에 쏟아질 것이고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보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울고 있는 그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해당이 되고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또 일단의 무리가 있어서 십자가 사건을 이루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으로 하여금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만들었던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 그 명을 따라서 움직이는 경찰들, 종교지도자의 편승에 따라서 사형언도를 결정했던 실세, 실제로 권력 잡은 자인 본디오빌라도 총독, 이런 것들이 구성해서 오늘날 이렇게 십자가를 이룹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저런 것보다도 간단하게 목걸이 십자가 걸고서 하는 말이 ‘저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고 언급을 해버리지요. 그렇게 되면 남들은 안 믿는데 나는 그 십자가를 믿으니까 내가 참 대견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미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십자가까지 믿어주니 설마 하나님께서 날 괄시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아셔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지도록 하느냐, 그 말이지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기에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 있다.’(고전 1:23-24)라는 말을 한 거예요.
그 말을 안했으면 우리는 성경을 보고 도나 닦으면 되는 거예요. 제가 어느 시골에 가니 중국집에 온 그 분이 음식을 먹어 가면서 책을 하나 펴 놓고 있는데 그 책이 도 닦는 교본입니다. 도 닦는 교본을 보면서 어떤 의식을 행하더라는 말이지요. 만약 우리에게 성령이 안 오게 되면 성당이나 절이나 교회나 가서 시키는 대로 책 펴놓고 오늘 할 숙제는 이거니까 이것대로 하세요, 라고 하면 거기에 나오는 문구 몇 개 외우는 식으로 하면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편할까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것 저런 것 없이 그냥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를 믿어라.’
믿는 방식은 이야기하지 않아요. 이번 수련회 때 이야기 했잖아요. 죄를 면죄하는 것, 사죄만 사도바울은 이야기했지 죄를 사해주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안 해주니까 교회 2천년 역사가 영업에 나서기 위해서 용서하는 방식을 교인들에게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이미 사도바울의 복음과 교회는 완전히 엄청난 거리를 두고 다른 길로 새버린 거예요. 버스를 잘못타면 엉뚱한 곳으로 가잖아요. 사람들을 엉뚱한 곳으로 보내는 전세버스 역할이 교회가 되고 만 겁니다. 그것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믿는 방법, 용서받는 방법, 어떤 방식을 제시해버리니까 사람들은 어떤 방식을 교육하고 습득합니다.
교육을 받으면 몸에 익숙해질 것이고 몸에 익숙해진 그 방법을 종교적으로 사용하면 ‘우리 목사님이 이 방법 사용하는데 나도 사용하니까 되더라. 나는 누가 뭐래도 오늘 밤 죽어도 천국 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한 사죄 받는 방법은 교회가 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종교지도자급에 있었던 그 당시 사람들이 다 써먹었던 방식인 겁니다. 그리고 그 써먹었던 방식의 노하우를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몸에 익혔던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바리새인중이 바리새인이었던 사도바울을 데려다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외친 이야기가 뭐냐,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은 사람들의 지혜로서는 접근조차 못한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강제로 데려다 주지 아니하면 그 십자가 앞에 설 수도 없고 십자가 앞에 들어갈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유대인들은 뭐라고 불평을 터뜨렸겠습니까? 인간이 애초에 못할 이야기라면 애초부터 하들들들들, 말아야지,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에게 어떤 멘트를 날릴 자격이 있지만 해도 안 되거든요, 하는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말이지요, 해도 안될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들이 못하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은 사람, 영생주기로 작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따로 박혀 있기 때문에 그 박혀 있는 보석 같은 사람들……, 제가 보석 같은 사람들이라 했지만 사실은 여러분들이 보석입니다. 이 더운데 걸맞지 않는 멘트를 날려서 죄송합니다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보석 같은 사람들이 반짝반짝 있다 그 말이지요. 반짝인다고 다 보석은 아니지만 보석 같은 사람들이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뽑아내는데 있어서 곁자리들, 쓸데없는 잡초가 같이 섞여서 올라오면 안 되지요. 보석을 뽑아내는데 잡석이 섞여오면 그것을 또 분류하는 작업이 힘들어져요.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영생주기로 작정된 사람이라는 말을 왜 거론했겠습니까? 이왕이면 말 한마디 해서 수백 명씩 믿으면 더 좋았을 것인데 그 좋은 것을 마다하고 영생주기로 작정된 사람만 찾는 이유가 뭡니까? 사도행전 마지막에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그 이야기를 왜 자꾸 반복해서 이야기하는데요, 그렇게 해서 누구 심장 터트릴 일이 있습니까? 사람 심기 건드려서 교회가 될 리가 있어요? 사람 기분 상하게 해서 교회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십자가의 능력이 부활의 능력인데 그 부활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 사람들에게 인수인계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직접 자기 사도를 자기 종으로 부리면서 주님이 주도적으로 일을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시장의 도매상이나 공장에서 물건 떼 와서 소매점 차려서 사람들한테 장사하는 식의 교회라 하는 것은 성경자체에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왜 십자가라는 사건은 믿고 싶어도 못 믿는 것인가, 그 내막을 헤쳐 보니까 십자가사건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그 당시, 본문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예수님을 보고 동정심에 슬피 오는 아줌마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강제로 십자가를 짊어지우고 또 못을 박는 그 당시의 보안 책임자들, 정권가진 사람들, 그리고 순하게 이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우리 예수님, 도망치는 제자들, 이런 구성요소들이 갖추어질 때 성령으로 깨닫는 십자가 안에 다 포함되어서 우리 이야기로 다가오는 겁니다.
유대인들에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운 것은 자기는 그 십자가를 지기 싫다는 표현입니다. ‘아이고, 내가 저렇게 십자가를 질 일이 있으면 나는 안 산다. 나는 저런 식으로 인생 처참하게 끝날 것 같으면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것만큼은 기피하고 싶은 형벌, 자기 팔자, 내가 십자가 질 팔자라면 나는 스스로 자살하겠다, 할 만큼 심하게 피하고 싶은 그 징벌과 운명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짊어지운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지는 것을 보고 울고 있는 그 아줌마들도 마찬가지에요. ‘안됐다! 안됐다!’ 사람이 운다는 것은 자기의 속셈을 말끔하게 다 드러냈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말로 안 될 때는 울어버리잖아요. 울음을 수반해서 말을 하게 되면 자기의 솔직한 심정에 힘이 가해지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이 울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자들이 울 때 힘센 남자들도 그 앞에서 굉장히 나약해집니다. 보람인지 아람인지 펜싱 하는 여자선수는 1초 때문에 한 시간을 울었잖아요. 세계펜싱협회고 올림픽협회고 간에 나자빠질 판이에요. 우는 데는 당해낼 수가 있어야지요. 아줌마들이 울었다는 말은 자기 솔직한 심정을 다 토해낸 거예요. ‘아이고, 내 자식은 저렇게 되면 안 되지. 남의 자식이니까 그냥 우는 것으로 그치지만 내 자식이 저렇게 되면 이렇게 되면 보통 문제가 아니지.’ 그래서 그것을 울음으로 내놓는 거예요.
‘차마 나에게는 들이닥치지 말아야 될 상황이 저분은 무슨 재수가 없어서 저렇게 처참하게 당하는가, 안되었다. 나는 아직 그 상태는 아니야.’ 하는 안심 속에서 우는 거예요. 울음으로써 예를 표하는 거예요. 우는 것으로 배려를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아들이나 딸을 위해서나 울어라.’라고 이야기하지요. 우는 것도 문제라! 주님 앞에서 주님을 동정하면서 우는 것도 문제에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보고 운다는 것, 정말 그 우는 아줌마 중에서 예수님 십자가 보면서 자기 자녀 보고 울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없다는 거지요.
이 말은 약간 깊이 있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제 축구 보고 좀 힘들더라도 참으세요. 사람이 예수님 보고 동정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은 다른 것은 아는데 죽음에 대해서는 맥을 못 춰요. 굉장히 무서워합니다. 모르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하나님, 사람이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라고 보통 묻잖아요. ‘목사님, 사람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한다고요. 그런데 어디로, 라고 할 때 그 ‘어디’ 자체가 어폐에요.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이 나는 여기 있는데 죽으면 여기 있는 사람이 어디로 갑니까,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살아 있다고 여길 때나 나올 아이디어에요. 사람이 장소가 있어서 그 장소에 머물 때 그것을 산 것이라고 간주하는 발상은 살아 있을 때나 나올 상상력이다, 그 말입니다.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장소를 점유하고 공간을 점유해서 여기 있으니까 살아 있다, 라고 우기는 것처럼 죽어서도 내가 살아있을 때 장소를 점유한 것과 마찬가지로 죽어서도 어느 장소를 점유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살아 있을 때의 버릇이 연장되어서 브레이크도 없이 살아 있을 때의 버릇이 남발해서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죽은 때에 대해서는 우리가 관여할 수가 없고 물을 자격도 없는 이유가 뭐냐, 죽이시는 분이 결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알아서 죽으면 ‘여기 살다가 좋은 자리 있으면 죽어서 거기서 살래.’ 이렇게 결정할 수 있지만 사는 것도 우리 맘대로 안 될뿐더러 죽는 것도 우리 뜻대로 죽는 것이 아니에요. 죽는 것이 우리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은 평소에 살았다는 우리 목숨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 것이 아닌 것이 내 안에 들어 있을 때, 남의 것이 내 안에 들어 있는데 걱정은 뭐냐 하면,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내 것인 양 매일 아침부터 늘어지게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장염이 어쩌고저쩌고 배탈이 어쩌고. 대체 이 목숨이 누구 것인데 내가 걱정합니까? 장염 걸려도 주님의 장염이고 소화가 안 되도 주님의 것인데 마치 내 목숨인 것처럼 그렇게 자부하면서 살아가면서 예수님 죽으니까 그것 보면서 흐흐흐, 우는 거예요. 자기 것은 아직까지 괜찮다, 그 말이거든요. 예수님은 죽음을 잔뜩 짊어지고 이 땅에 등장했습니다. 죽음을 짊어지고 왔는데 사람은 자기 목숨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주께서 짊어진 것에 눈이 가지를 않아요. 주께서 뭘 짊어졌지? 거기에 눈이 안갑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 나는 이렇게 사는데 저 양반은 어떻게 살지, 저 분 사는 것과 내가 사는 것이 어떤 차이가 나지, 이렇게 내 것과 예수님 저분의 것과 비교하기에 급급한 데, 지금 예수님이 죽어가니까 안됐다, 하면서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는 그 아줌마들 보고 하는 말이 ‘네 새끼들과 네 자식들을 보고 울어라.’는 말이지요. ‘내가 짊어지고 온 것은 네 자식들도 이렇게 나처럼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다고 여기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소멸되는 것을 가지고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죽음으로 보지 않고 아버지의 저주를 된 통으로 받는, 아버지의 심판과 저주를 된 통으로 받는 그것을 죽음으로 보는 겁니다.
아버지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은 살아 있다고 여기는 사람한테는 그것이 눈에 띄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아요. ‘살아 있는데 뭐. 아침에 밥 먹었는데 뭐.’ 밥만 잘 먹더라, 그런 노래도 있어요. 저녁에는 칼국수 해 먹을까, 아니면 수제비를 먹을까, 목에 잘도 넘어가더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수제비도 못 먹고 십자가 지고 고생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잔뜩 짊어진 그 죽음은 단순히 목숨이 쉬는 것,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뭐냐, 28절부터 봅시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항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작년 장마 때 서울 예술의 전당 근처에 있는 우면 산이 무너져서 아파트를 덮쳤습니다. 그 아파트 주민이 산사태 일어나라고 평소에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누가복음 23장 30절을 근거로 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주여, 산들이 덮여지게 하옵소서.’
멀쩡하게 살던 집에 산사태가 일어나서 집 근처까지 온통 돌멩이와 흙탕물이 넘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지요? 왜냐, 자기는 살아 있으니까, 죽음이란 것은 살아 있을 때는 경험할 이유가 없고 죽고 난 뒤에 잠시 목숨 끊어지면 그것이 죽음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수준이 그 수준이에요. ‘아이고, 힘들어서 못살면 죽으면 그만이지. 한강에 빠지면 빠질 때 약간 차갑겠지만 그 뒤에는 편안하겠지.’ 누구 맘대로? 그게 죽음입니까? 그게 죽음이에요? 죽음을 맛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죽음을 잔뜩 지고 왔습니다.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이냐 하면, 얼마나 혹독한 죽음인지 차라리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그 목숨 끊어지는 그 죽음이 차라리 나아요. 산채로 산사태가 일어나서 산들이 나를 덮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죽음의 저주와 하나님의 그 무서움에 비하면 그런 죽음은 죽음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29절에 보면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수태 못하고, 애 배지도 못하고 애 배도 낳지도 못하고, 빼도 박도 못하고, 그 다음에 애를 낳기는 낳았는데 젖이 없어서 그냥 산채로 바싹 말라 죽을 판국인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철없는 인간들아, 내가 죽는 이 죽음이 너희에게 직접 들이닥치면 차라리 수태 못한 여자와, 수태는 했어도 애 때문에 고통 하는 여자와 애 놓고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게 만드는 그 여인의 아픔이 주님의 노출된 죽음이 아픔보다는 훨씬 편하고 덜하니까 그런 여자들이 오히려 우리는 복 받았지? 그렇지? 이런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그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 십자가 하니까 그저 나무 작대기 만들어서 교차시켜놓은 정도로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하니까 너무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통해서 알려준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았다, 여긴다면 필히 자기보다 못한 사람보고는 눈물을 흘릴 것이고 그 눈물이 나온다는 말은 아직도 십자가를 모르고 있다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눈물 흘려야 될 일이 아니고 경악스러워야 될 일이라는 말입니다. 우면 산사태가 나서, 아니 팔공산이 무너져서 덮쳐지는 맛이라도 한번 보게 되면 쪼끔, 우리가 죽고 난 뒤에 받을 저주가 이정도구나, 하고 쪼끔 아는 수준이라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여러 조건들이 우리에게 모아져 있습니다. 26절에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좆게 하더라.” 이 사람도 예수님 십자가 지는데 강제로 집어넣은 거예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십자가에 대해서 아무도 모른다면 그러면 예수님 혼자만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구원 받을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만 구원받고 말 뿐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이 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시골에서 올라오는 구레네 사람을 잡아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사람을 보세요. 자기 인생 노선이 있어요. 자기인생 노선이 있다는 말이 뭐냐,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간다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간다는 이것이 자기의 정해진 노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터진 십자가사건 때문에 자기가 만드는 인생 노선을 접어버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가야 되는 인생노선, 그런 운명에 처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사람이 인생 살면서 걱정과 고민이 되는 것은 뭐냐, 자기인생을 미리 자기가 정했기 때문에 그것이 말썽을 일으켜요.
만약에 예를 들어 바닷가에 가니 파도가 치는데 멋진 장면 찍는다고 까불다가 파도가 갑자기 세게 치니까 물에 카메라를 적셔서 고장이 나 버렸다, 사람이 자기 인생 가운데 ‘나는 바닷가에 가서 카메라 완전 망가뜨려야지.’ 이렇게 정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비싼 카메라를 바닷물에 적셔서 망가뜨릴 때 그 순간, ‘어, 이거 뭐냐? 내 계획에 없던 일인데?’ 나는 카메라를 고장 안 나게 하는 것이 내 인생인데 고장이 났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걱정이 되고 고민이 되고 짜증이 나는 겁니다. 휴가가 즐겁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뭐가 지금 잘못되었느냐하면, 내 인생은 이렇게, 이렇게 흘러가야 한다는 것을 미리 자기가 구성을 한 그것이 잘못이었다는 말이지요. 카메라가 고장 난 것도 내 인생의 일부라고 주께서 그 현장에서 새롭게 제작을 하고 구성을 해 나가는데 우리는 그런 요소를 안 집어넣는 내 인생을 자꾸 따로 상정을 한 거예요. 이 말은 사람들이 남을 모델로 삼아서 내 인생은 저렇게 되고 싶다, 하니까 그게 바로 주님 십자가를 보고 엉엉 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말이지요.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있는 모든 상황이 내 인생을 구성하는 재료로써 주께서 깔아놓은 거예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다시 태어나도 현재 있는 자기 부인과 결혼하게 되어 있다고. 왜냐하면 그 자기 부인하고 결혼해야 비로소 소급해서 그것이 ‘나’가 돼요. 저 여자 없고 다른 여자가 오면 지금의 나가 안 된다니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방언을 하고 있으니. 이사야 52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지는 것을 미리 이사야를 통해 예언했거든요. 예수님이 처참하게 당하고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더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사 52:14)다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 자신이 지금 너무나 위대한 분 같았었는데, 물위를 걸으시고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서 ‘저 사람이 뭔가는 되겠다.’ 싶었는데 그 인생의 끝은 처참하게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충격 받으면서 안됐다, 하고 걱정하고 눈물 흘리면서 놀라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사야 52장에 하는 말이 ‘지금 너희들이 나를 보고 놀라는데 너희들은 너희들 자신이 생각한 그 인생이 본인들이 생각한 그 인생이 아닌 것을 보고 너희들 스스로 놀랄 것이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야기한 ‘너는 이런 인생이다.’ 하는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놀랄 것이라는 거예요. 자기는 예상치도 못한 인생관을 주께서 우리한테 쏘고 있고 붓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망스러운 거예요. 누구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나는 그런 인생, 그런 소리 들으려고 예수 믿고 하나님 믿은 것이 아닌데, 쉽게 말해서 우리는 나의 것을 몽땅 잃어버린 거예요. 바로 잃어버리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조립해 나가시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목숨을 죽은 목숨으로 만드시는 그 분이 우리를 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은 무섭지 않아요. 더 무서운 것은 우리를 죽이셨다가 살리시는 하나님이 더 무서워요. 왜, 그 때부터 우리 것이라는 것은 허용이 되지 않기에.
살려주니 좋다고 하지요. 살리는 하나님이 더 무섭습니다. 주께서 때리시면 ‘아이고, 이참에 잘 되었다. 날도 38도나 올라가서 덥고 한데 죽으면 그 만이지.’ 하는데 지금 아직도 안 죽고 36도, 38도에서 살아남았잖아요. 권사님 같은 경우에 지금 몸이 아픈데도 살아 계시잖아요. 이게 더 무섭다니까요. 살아남은 이것을 어쩌라고, 어떻게 처치하라고. 살려줌으로써 기존의 ‘ 내가 살았다.’에서부터 시작되는, 내가 하나님께 바치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손을 쳐 버립니다. ‘네가 더 살고 싶어서 섬기고 바치고 봉사하는 그것, 네가 안 바쳐도 너는 살았거든.’ 그런데 그것이 더 무서운 이유가 그때부터는 우리가 바친 것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살아난 우리 전체를 주의 뜻대로 사용을 하니까 우리의 권한, 권리가 스며들 여지가 전혀 없는 거예요.
항상 내 뜻은 박탈입니다. 봐주는 것이 없어요. 사나 죽으나, 먹든지 마시든지 이제 너는 너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인데 값을 주고 너를 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농담으로 듣지요.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하나의 농담이라니까요, 농담. ‘아, 그거 믿으면 살아 있는 내가 더 살 거야.’라고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계속 유지하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챙기다가 좀 여유 있으면 말씀 못들은 체 하다가 좀 어렵다 싶으면 그 말씀 봐서 다시 정신 차리자, 이렇게 하는데 그런 수법은 내가 나를 만드는 수법의 일종입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 안 통합니다. 우리 보고 이야기합니다. ‘자꾸 잃어버려라. 카메라 좀 고장 났다고 하는데 그것만이 아니고 모조리 다 고장 나 버리고 다 잃어버려라. 다 잃어버리면 더 이상 내가 나를 만들겠다는, 그래서 쓸데없이 눈물 흘릴 일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 말이지요. 사람이 눈물 흘릴 일이 뭡니까? 자기가 자기를 만드는데 힘드니까 그 힘든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눈물을 왈칵 쏟아 내잖아요. 내 인생은 따로 있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되니까. 차라리 주님의 인생이 되어버리면 모든 매 순간순간이 주께서 살려내는 일환으로서 우리가 느껴지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시몬 구레네 사람, 이 사람은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지나가는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상세하게 그 사람의 가정구성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이라는 사람은 누구의 아버지인가, 루포라는 사람의 아버지라는 거예요. 마가복음에서 갑자기 예수의 십자가를 지운 이 사람을 그냥 시몬이라 하면 될 것인데 ‘루포의 아버지가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갈 때 힘들어 할 때 구경하다가 강제로 끌려 나와서 자기 인생에서 이탈해서 예수님 노선으로 갔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루포의 아버지라고.
루포가 누군가, 하고 보니 로마서 16장 13절에 보니까 거기 루포가 나와요.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당연히 시몬의 아내겠지요.)에게 문안하라.”(롬 16:13)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루포를 왜 거론했을까? 이 집안이 졸지에 미리 십자가를 통해서, 나중에 무시무시한 저주를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함께 받은 사람 으로써 성도가 된 가정이 되고 말았어요.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주께서 받은 저주를 함께 온 몸으로 샤워하듯이 쏴 하고 받아버리는 겁니다. 마치 주님의 혹독하고 무서운 거룩함 앞에서 차라리 산들이 나를 덮쳐야 될 만큼 무서운 그 지경에서 우리는 산들이 덮치는 것이 아니고 직접 예수님이 받았던 아버지의 그 저주를 우리는 직접 샤워하듯이 왕창 받아버린 거예요.
왕창 받아버리니 우리가 갖고 있던 이 산다는 것은 실은 사는 것이 아니고 진작 죽을 목숨을 끈끈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에 해당된 거예요. 그런데 고마운 것은 바로 이 죽어가는 지저분한 인생을 주께서 자기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재료로 사용을 한다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주께 쓰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 때문에 주님의 생명을 같이 공유하고 같이 살게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에요. 자기 있는 목숨가지고 살다가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예수님 십자가 끌어당기는 것, 이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경악스러울 거예요. ‘야, 이거 교회한테 속았구나.’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동화에 신데렐라가 있지요. 그 동화의 재미있는 장면이 뭐냐 하면, 언니한테 구박받던 신데렐라가 우연히 어떤 파티 장에 갔다가 파트너를 잘 만났어요. 왕자를 만나서 춤을 추다가 열두시 되기 전에 온다고 서둘러서 돌아오다가 신발 한 짝을 놔두고 왔습니다. 그래서 왕자가 남겨진 신발 한 짝을 가지고 동네방네 찾아다니면서 처녀들 마다 신발을 맞춰 보는데 그 대목에서 제일 가슴에 와 닿는 대목이 뭐냐, 발에 맞지도 않는 신발을 언니가 왕자하고 시집갈 수 있다는 그것 때문에 억지로 자기 발을 신발에 맞추려고 애를 쓴다는 그 대목입니다.
그 대목이 왜 중요한가 하면, 이 십자가복음은 영생주기로 합당한 사람에게만 맞는 신발이에요. 그런데 교회에서 신발이 안 맞는 사람이 억지로 신발 맞추려고 떼를 쓰는 거예요. 안되거든요, 그게! 그게 안돼요. 딱 그 사람을 위해서만 창세전에 만든 신발입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십자가 말고 다른 것에 더 신경 쓰고 욕심을 낸다면 그것은 언니입니다, 언니. 그것은 신데렐라 언니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줌마들이 운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니까 우는 거예요. 그게 사람 죽이는 도구니까.
그러면 평소 아줌마들이 십자가 말고 집에 있는 칼이나 감자 채 써는 도구나 그거 보고 엉엉 우는 아줌마들이 있었겠습니까? 없지요. 오이 썰면서 엉엉 웁니까? 물론 양파 깔 때는 울지만, 도마 같은 것 보고는 울지 않지요. 그 아줌마들이 도마보고는 안 우는데 십자가 보고는 왜 웁니까? 도마는 오이도 갈아서 팩도 붙이고 그래서 있는 자기를 살릴 수가 있잖아요. 이 아줌마는 뭐냐, 살리는 것은 웃고 나를 죽이는 것은 우는 오늘날 우리들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아줌마들이라는 말이지요. 십자가를 보고 우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 집 부엌에는 십자가가 없는데 저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있구나. 아이고, 죽어가는구나.’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신데렐라, 그야말로 십자가라는 신발이 딱 맞아떨어진 그 신데렐라 같은 성도는 집에 도마가 있고 집에 채 써는 도구가 있더라도, 한국축구가 4강에 들어간 그 기쁨보다 뭐가 더 좋습니까? 십자가라는 신발, 그것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사는 겁니다.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살아 있는 내가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죽이시는 분이 죽은 자를 어디에 보내느냐, 그 분이 결정하는 겁니다.
우리를 죽이시는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이라는 영역, 그런 공간을 마련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살아 있는 내가 ‘주님,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라는 말, 그 이야기를 하면 안돼요, 주께서 우리를 자기 죽음으로 죽이시는 분에 한해서만 예수 안이라는 것, 부활 안, 십자가 안이 유일하게 성도들이 가야 될 공간인 것을 그들만은 알려 주는 겁니다. 그것이 신발 신고 이제는 왕자와 함께 결혼해서 영원토록 잘 사는 거예요. 신랑 제대로 만나서. 자,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방금 제가 신데렐라 이야기했지요. 동생이 왕자와 먼저 결혼 했어요. 예를 들어 동화가 더 이야기가 길어져서 드라마가 연장되어서 왕자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동생도 결혼할 때가 되었어요. 그럴 때 언니들이 뭐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혹시 왕궁에서 파티 안 여나?’ 갈 때 신발 신고 가겠지요. 열한시 한 58분쯤이나 되어서 일부러 결혼 하고 싶은 왕자하고 춤추다가 ‘지금 가야 돼요. 더 이상 춤 못 춥니다.’ 하고 신발 한 짝 보란 듯이 찾기 쉽도록 던져 놓고 도망치겠지요. 그러면 동생왕자가 자기 형처럼 ‘이 신발 주인 누구십니까?’ 하게 되면 애초에 자기 신발 벗어 던져 놓은 것이니 자기 발에 딱 맞을 것이고 그러면 당연 결혼하겠지, 이런 방안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아이디어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 졌지요. 이 사람이 이래서 구원 받았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진다면 십자가 서로 지려고 난리 납니다. 구원받는 방식 없습니다. 그리고 용서받는 방식 없습니다. 그런 방식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완전히 사이비에요. 없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믿고자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것을 은혜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살려고 애쓰는 나에게 나의 것은 일체 들어가지 못한 세계가 천국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나의현재 있는 목숨마저 잃어버리게 만드시면서 죄 있는 그것을 예수님의 생명을 증거 하는 목숨으로 전환시키는 작용이 우리 속에 움직일 때 비로소 신데렐라입니다.
그 사람은 왕자가 가져온 신발을 신은 사람이에요. 바로 그런 사람이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을 사도바울은 찾아다닌 겁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기존 교회에서 사람들 끌어 모으는 방법이 구역예배 열어서 전부 다 자기 자랑 질을 하지요, 돌아가면서. ‘집사님은 이번 한 주간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이런 온갖 자랑 질을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개그우먼 신 보라처럼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 피 밖에 없다.’는 그것, 십자가 피만 자랑할 때, 교회 부흥되었다고 자랑하던 그 목사가 얼마나 낯 뜨겁겠습니까?
큰 교회 옆에 있는 산 무너질 때, 다 무너질 때 완전히 사라집니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꺼지더라도 이 십자가가 내 안에서 활동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죽어도 사는 유일한 성도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우리는 결과만 따먹으려고 했습니다. 과정은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그 과정 속에 들어가 있어서 우리를 통해서 제 2, 제 3의 십자가가 외부로 증거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몰랐습니다. 주여,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이지만 주님의 영생 때문에 새로 생긴 생명인 것을 알고 십자가만 자랑하고 복음만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