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15: 1- 6 (장로들의 전통)
Re..마 15: 1- 6 (장로들의 전통)
이름 : 이근호(IP:)
장로들의 전통
2004년 4월 1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5:1-6
15: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15: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15: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15: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15: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15: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예배 참석이란 하나님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알기 위해서 예배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있는 데서 있게 하는 자일 뿐 입니다.
사람들은 현재 있는 것을 더 크고 길게 팽창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있음을 그 안에 오직 인간의 솜씨와 자랑거리가 담겨 있을 뿐입니다. 즉 "내가 이렇게 했기에 오늘날 이런 것이라고 건졌다"라는 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과연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아드릴까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아담의 시대에는 900세 이상까지 살았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길게 잡아봤자 90세 삽니다. 90세 산 것도 대단히 복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아담이 볼 때는 90 평생은 너무나 짧게 보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산 것에 해당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90세를 산들, 900년을 산들 모두 죽기에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살아도 하나님이 만들어 넣어주신 것, 즉 '없는데서 있게 하신' 그 무엇이 들어있지 않는 한 멸망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무슨 업종에 종사하든지 간에 영생이 없는 자는 이미 죽어있는 채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없고 자기의 행함으로 만든 것만 쥐고 살아가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는 다수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반면에 하나님이 없는데서 만들어주신 것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누가복음 12:31-32에 보면,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는 너무나도 소수라서 그 소수에 해당되는 사람은 사실상 무서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소수라도 무서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다수의 편을 손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으냐'라는 쪽을 손들어 주십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이미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것이 기정 사실화된 상태에서 심판을 유보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보기에 적어도 이 도성에 의인 50명은 있지 않겠나 해서 그 의인 50명을 봐서라도 도성이 심판이 내리지 않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의인 50명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차츰 차츰 내려가서 결국 최소 단위인 10명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의로운 롯을 건진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눈초리가 누구를 향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영생이 없는 곳은 아무리 사람들이 모여 봤자 쓰레기 하치장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16:26의 말씀처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다수의 편에 설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소수자의 편이 되는 것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무엇이 옳으냐가 관권입니다.
거기에 비해 다수의 사람들은 그 어떤 무서움을 가지지 않는데 그것은 그들에게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현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 됩니다. 그 힘으로 그들은 법을 만듭니다. 그것이 관행이 되고 관례가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유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전'이라는 말은 '관례'라는 뜻입니다. 과거로부터 계속 진리처럼 수용되는 진리라는 겁니다.
만약이 이 관례를 거부하는 자가 나온다면 다수는 이런 소수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마저 이런 다수의 관례를 인정해 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도리어 이런 관례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관례를 거부하시는 이유는, 있는 데서 있게 하는 인간의 행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함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행함의 능력 밖에 없는 유대인들은 그 행함으로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서 행할 수 있는 규칙 제정으로 자기 행함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에게 용돈 드릴 돈으로 하나님에게 드리게 되면 그것으로 대체가 된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같은 수입으로 하나님에 대한 헌금과 부모 공경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만족스럽게 충당할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선 순위가 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령을 부리는 겁니다. 그리고 요령조차 관례라는 이름으로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행함에서는 그 정도밖에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한계 안에서만 요령을 부려보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전혀 새로움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하나님께 대한 드림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자기 행함의 능력에 맞추어서 조정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말씀을 능멸하는 행위입니다.
마태복음 19:16-19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부족한 바에 대해서 자꾸만 자기 능력으로 채우고 또 채워야 영생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청년의 소위 '율법 행하기'란 결국 하나님이 것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바가 됩니다. 결국 그는 발길을 돌리고 예수님과 헤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행함의 한계에 대해서 공박하십니다. 그리고 그 행함이란 반드시 있는 것을 더 있게 함으로서 '있음'에 대해서 인정받겠다는 의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생을 얻을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제공받게 되는 것일까요? 로마서 13:8-10에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숱하게 많은 율법도 '사랑'이라는 매듭 하나로 다 묶여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랑은 인간이 생산해 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함에서 나올 사랑도 아닙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의 행위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은,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 오직 예수님 홀로 다 행하심으로만 나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자신이 우선입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은 예수님뿐입니다. 그 목숨도 죄가 없는 목숨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사랑은, 인간이 율법을 지켜냄으로서 얻어낸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자라면 더 이상 법적인 인식 속으로 또다시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예를 들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보고서 즉각적으로 그것을 법적인 요소로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만약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법적인 요소로 만들어 버리면 다시 자신의 행함으로 들어서고 맙니다.
"내가 오늘은 몇 시간 동안 감사했을까?"하고 따져서 자신의 행함의 능력 측정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또다시 무시당하고 능멸을 당하게 되는 식입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소수의 사람에게 지금도 하나님은 주목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 내세우는 것은 모두 쓰레기로 여겨주시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을 드러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