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 철학 ]F.C. 코플스톤 저 박영도 역 이문출판사(
[ 중세 철학 ] F.C. 코플스톤 저 박영도 역 이문출판사(1988:대구)뭐든지 따져보고, 그 중에서도 확신이 가는 것만 골라 진리적 요소로 채택하려는 습성은 오늘날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서 보다 단단하게 뭉쳐둘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작업까지 스스로 반성해 볼 수는 없을까?다들 짧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에 먼저 숱하게 이런 작업을 했던 선배들의 노고를 참고로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전 세계와 우주를 신앙으로 해명하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각가지 개념들에 대해서 서양 중세의 선배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조성해 놓으신 세계 안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어떤 체제를 구성해 가면서 정립하는가 하는 문제였다.그 첫 번째 과정이, 전체를 하나로 묶는 보편론에 관한 것이었다.보편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의 중세 때의 최초의 해결은 소박한 실재론이었다. 보에시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주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성 또는 인간본성이라는 관념은, 온전히 상이한 인간들의 실체적인 유사점을 서로 비교하여 이 유사점을 따로 떼어내어, 즉 추상적으로 생각함으로써 결정된다. 즉 보편관념은 사유에 의해서 형성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비록 보편관념이 보편적인 것으로는 정신 밖에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정신 밖에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념론자( the ultra-realist)는 사유의 질서와 정신밖의 존재의 질서는 정확히 상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인간의 관념, 인간성이나 인간본성의 관념은 정신밖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실재에 상응하고 또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관념은 플라톤이 생각했듯이, 개별적인 인간으로부터 떠나서 있지 아니라고 개별적인 인간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개별적인 인간에는 단지 하나의 실체 내지 본성이 존재하는 셈이 된다.투르네의 오도(1113년에 사망)는 새로운 인간이 태어날 때 새로운 실체가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실체의 새로운 성질이 생겨날 뿐이라고 단정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이 견해는 모든 명사 또는 말에는 어떤 적극적인 존재가 상응하고 있다는 가정을 근거로 하고 있다.실념론은 오세르의 데미지우스(908년 사망),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제나 성 안셀무스(1109년 사망) 등에 의해서도 명백하게 주장되었다.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이러한 실념론은 철학상의 일원론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실체나 존재의 단일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도는 실체나 존재라는 말을 일의적(univocally)으로 사용한다면, 모든 실체는 마땅히 하나의 실체의 여러 양태가 될 것이며, 모든 존재는 하나의 존재의 여러 양태가 되기 때문이다.실념론자들은 논리적 질서와 실제적 질서와 평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에 현혹되어 있었다고도 사실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 스미스'라는 이름에는 하나의 일정된 것이 상응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성' 또는 '인간'과 같은 말에는 하나의 일정된 사물이나 하나의 존재하는 보편자가 상응하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모든 인간에는 통털어 하나의 실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투르네의 오도의 생각은, 어느 정도 신학적인 고찰에 그 원인이 있다. 이를테면, 영혼의 적극적인 감염으로서의 원죄에 관해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인간의 실체는 그 존재를 직접 하나님에게 힘입고 있다고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원죄를 구성하고 있는 적극적인 오점이나 감염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그는 단 하나의 인간실체 또는 본성이 아담의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서 죄에 감염되어 출생시에 유전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한 때 원죄의 교의를 설명하기 위해 일종의 '영혼출생설'로 기우려진 적이 있다.실념론의 반대자들은 자신들의 지도원리로서 개체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9세기에 오세르의 헤이리쿠스는 '흰 white' 또는 '흼 whiteness'과 같은 말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이존(離存)적인 실재를 지적하기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이 가리키는 것을 설명하려면, 휜 사람이나 휜 꽃과 같이 어떤 휜 대상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간단히 생각해서, 정신은 예컨대 개별적인 사람들을 함께 모아서 종개념을 형성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개념은 종들을 함께 모아서 형성된다. 정신 밖에 존재하는 것은 단지 개체만이다. 반(反)실념론의 입장을 한층 뚜렷하게 나타낸 것은 로세리누스(1120년 사망)이다. 즉 보편자는 단순한 말(flatus vocis-음성의 흐름)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성 안셀무스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그 주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유명론(nominalism)을 삼위일체론에 적용했기 때문이다.12세기부터, 이슬람 문화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유입되기 시작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 있어서 사물의 형상이나 본질을 추상하는 능동지성과, 이 형상을 개념이나 관념으로서 받아들이는 수동지성 또는 가능지성을 구별했다. 스콜라철학자들은 이 설을 이용하여, 인간이란, 능동지성과 수동지성(가능지성) 둘다 개별적인 인간 존재와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지체라고 보았다. 그란 이렇게 되면 인간의 사후에는 존속하는 개별적 지성이란 없는 것이 된다. 즉 개인의 불멸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만일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리스도 신체의 유일한 실체적 형상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아무런 유형성의 형상도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이의 그리스도의 신체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신체가 아닌 것이 된다.성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타고난 자연철학자이긴 하지만, 플라톤의 원형형상 또는 이데아를 거부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감각적 세계는 초월적 실재에 대해서 원형에 대한 모형과 같은 관계에 있다고 플라톤은 보고 있었다. 이것이 범형론 範型論 exemplarism이며, 범형론은 형이상학의 열쇠면서도 핵심이다. 만일 신적인 이데아가 없다면, 하나님은 단순히 운동의 목적인(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측에는 아무런 창조활동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조를 부정하고 그는 세계의 영원성을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리스에 의하면, 세계는 영원하며 그리고 어떠한 종(種)에도 시작은 없다. 일들은 정해진대로 정기적인 순환의 과정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섭리 작용도 없다. 인간의 경우, 지성은 인간으로부터 떠나 있는 원리로서 인간전체에는 단 하나의 지성밖에 없으며, 그 작용은 여러 가지 감각경험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감각적 표상(images)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개인의 불멸은 없다.사실 세계의 영원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논증하기에는 하나의 불합리한 개념이다. 예컨대 만일 세계가 영원으로부터 존재해 왔다고 한다면, 즉 시간에는 시작이 없었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이미 무한한 계열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 되므로, 이는 체계의 발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된다. 게다가 또 그것은 무한에다 더해갈 수 있는 것이 되므로 이것도 불합리하다. 성 보나벤투라는 신학과 철학을 본질적으로 구별했다. 신학이란 주어진 계시에서 출발하여 이를 이해하는데 이성을 사용하지만, 철학은 우리의 주변세계에서 출발하여 그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을 논해간다. 따라서 진정한 형이상학은 신학만의 권한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흔적, 또는 하나님의 그림자이지만, 이성적 피조물만은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모습(image of God)이다.그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의 상승이란, 그림자 또는 근소한 유사점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 모습에서 범형인 그 자체 즉 하나님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자연철학자에게 있어서 세계란 한갓 자연을 운동하는 자연으로서만 고찰할 뿐이기에 그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원동자로의 개념에 머문다.영혼의 신체의 형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을 토마스가 받아들였다. 인간의 신체를 인간의 신체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이성혼이며, 이는 인간의 생명활동이나 감각작용의 원리이다. 그러나 신체에 대한 영혼의 관계를 이와 같이 생각할 경우, 영혼의 불멸성에 관해서 중대한 문제가 생겨난다. 영혼이 본성적으로 신체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동물의 감각혼처럼, 영혼은 죽음과 함께 소멸할 수 밖에 없지 아니한가. 성 토마스는 이성혼의 신체의 형상일지라도 하나의 정신적 또는 비물질적인 형상이 아니면 안된다고 대답하고 있다. 이성혼이 물질을 초월해 있다는 것은, 그 활동을 들여다 봄으로써 알아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혼은 온갖 유형체들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시각능력이 색깔있는 대상의 지각에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어떤 한정된 영역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은 물질적인 것의 본질을 알 수 있고 게다가 자기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은 비물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비물질적 형상의 존재는 자신이 형상을 부여하는 질료에 본질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으로부터 신체에서 떠난 영혼은 정확이 말하면 '위격person'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보에시우스가 정의했듯이 위격(位格)이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이다. 신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실체인 인간의 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비물질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신체의 사후에도 존속한다. 모든 인간에 있어서 하나이면서 인간으로부터 떠나있는 능동지성만이 불명하는 것처럼 아베로에스에 의해서 해석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에 관해서 성토마스는 그 설을 경험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고하여 거부하고 있다. 한 사람의 감각 작용이 다른 사람의 감각작용과는 다르듯이, 한 사람의 정신작용은 다른 사람의 정신작용과 다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능동지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불멸이란 개인의 불멸인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적 정신에 기인하는 철학과의 결합은, 성 토마스의 도덕론에 있어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행복은 인간생활의 목적이며 행위의 선악은 이 목적과의 관계에 의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행복론과 목적론을 채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도덕생활에 있어서 선의 우위성을 받아들였다. 성 토마스가 행복을 인간생활의 목적, 즉 내세에서만 완전하게 얻어질 수 있는 선으로 이해했기는 하지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윤리학과 형이상학을 결합시켰던 것이다.도덕율은 하나님의 자의적인 선택이나 규정에 의한다는 생각은 아퀴나스의 생각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그의 입장은 오히려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영원으로부터 자신의 성신 속에 인간 본성의 이데아를 지니고 계셨다. 하나님은 여러 행위를 인간 본성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즉 이 본성의 가능성을 충분하게 전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을 위한 이러한 계획이 영원법이지만, 그러나 영원법은 하나님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인간본성은 하나님의 본질이 밖으로 반영되는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일단 주어지면, 그 본성의 가능성을 발전시킨데 필요한 어떤 행위들이 있는가하면, 그 발전과는 용납되지 않는 어떤 행위들도 있다. 따라서 도덕률은 궁극적으로 필연적이며 불변적인 하나님의 본질 그 자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님의 지성에 의해서 알아지고 시인되는 한해서 도덕률은 영원법이다. 하나님의 영원법은 자연법으로 반영되고, 자연법은 추구되어야할 선과 피해야할 악에 관한 인간의 실천이성의 명령 그 전체이다. 자연법은 직접으로는 인간이성 그 자체에 의해서 공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어떤 도덕적인 자율성을 누리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본성이 본질적으로 항상 동일하듯이, 자연법도 본질적으로 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적 도덕이 공포된다고 하여, 자연법이 자의적이거나 현재와는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성은 인간본성의 성찰을 통해서 법을 공포한다. 따라서 칸트의 말로 한다면, 도덕적 명령법은 단정적인 가언적 假言的(혹은 가설적 명제) hypothetical 명령법이다. 의무는 궁극목적의 달성에 필요한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한에서의 자유의지의 구속이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이 목적은, 의지가 그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이 목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를 해석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특성을 인간의 본성과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덕률은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본성에 의해서 규정된 필연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자연법에 관한 이 설은 실정법 즉 국가법에 관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실정법의 기능은 자연법을 규정하여 그 내용을 밝히고, 그것을 명확하게 하여 적용하고 형벌을 정함으로써 자연법을 실효성있게 하는 일이다. 국가법은 예컨대 살인을 규정하고 법의 준수에 필요한 형벌을 정해야 한다. 이는 국가법이 자연법의 위반 하나하나에 관한 법률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법은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있으며 그리고 개별적인 행위에 의한 자연법의 위반이 국가법에 의해서 심의되어 처벌되어야 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선을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국가에 의한 모든 법의 제정은 어쨌든 자연법과 조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이다. 만일 실정법이 자연법과 모순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법의 악용일 것이라고 성 토마스는 말하고 있다. 입법자에게는 자기만의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서만 법을 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은 내용에 있어서 자연법과 모순되지 않을지라도 양심상의 구속력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법은 국가법을 의미하지만, 성 토마스에 있어서 국가법은 법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법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의 영원법, 자연법, 신정법(계시된 법) 그리고 실정법을 포함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법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며 따라서 그것은 초월적인 기초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중세의 법개념은 영국의 프로테스탄트의 작가 리처드 후카(1553년-1600년)의 법철학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푸카를 통해서 적어도 인정법(人定法)의 도덕적 성격 및 그것의 자연법과의 관계에 관해서 존 로크에 영향을 끼쳤다.13세기 말에는,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라는 학자가 두각을 나타낸다. 그의 사상의 특색이란 바로 인간정신이 존재와 객관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확신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인식이 겅험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스코투스는 아퀴나스와 일치하고 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인 하나님의 특별한 조명설을 버리고 아퀴나스처럼 아리스텔레스의 보편 추상론이 생득관념이나 하나님의 특별한 조명을 요청하지 않고도 인간인식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정신은 개체들을 직접 또는 매개없이는 인식할 수 없다는 아퀴나스의 설을 그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의 지적 인식의 직접적 대상은, 개별화의 원리인 질료로부터 추상된 형상이며 그리고 보편개념을 통해서 인식되는 형상이다. 감각은 개체를 파악하지만, 정신은 그것을 표상이나 영상에서 나타내어지는 한해서 간접적으로만 파악하는데 불과하다. 개체 그 자체의 지적 직관이란 있을 수 없다. 스코투스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정신은 개체자체에 원초적인 직관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만일 인간이 미리 개체에 대한 지적직관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개체로부터 보편을 추상할 수 있게는가하고 그는 반문한다. 만일 정신이 추상한다면, 정신이 미리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추상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추상작용은 개체에 대한 이러한 지적 직관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정신쪽에 이러한 직관이 없다고 한다면, 추상적인 보편개념이 지니는 객관적인 관계와 근거를 보증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14세기에는 윌리암 오컴이 유명하다.오컴은 직관의 우위 또는 개체들의 직접적인 지각을 강조했다. 직관적으로 알아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것도 그 자체가 자연본성적으로 알아지지 않는다. 직관적 인식은 그 자체가 보증되어 있다. 이것이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의 필연적인 경험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라는 것은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만 확증 될 수 있을 뿐이다. 흔히 '보편'이라고 말되어지는 것은 개체들의 종류를 나타내는 기호인 대표적인 명사 또는 그저 이름에 불과하다. 이런 사상이 그를 유명론자 nominalist라고 불리게 한다.그는 또 철학적인 영혼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논증들에 의문을 지니고 있다. 엄밀한 철학적 논증이 문제되는 한에서, 형혼은 그 존재가 저절로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고, 그리고 용혼의 빗물질성과 불멸성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들로 결국 무의미한 논증이 되고 만다. t그리고 또 사람들의 행위를 칭한하거나 비난하는 습관을 보고서, 비록 우리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지라도, 인간이 자유의지를 누리고 있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다. 의지는 이성이 제시하는 행위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논증은 간단하게 얻어지지 않는다. 오컴은 논증 즉 필연적인 원리로부터의 필연적인 연역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서 엄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개별적 형이상학적 논증을 논증이 아니라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성을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본래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재 즉 무한하고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최고의 완전한 존재자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모두 신앙에 의해서만 알아진다는 것이다.예컨대 그는 하나님의 이데아에 관한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학설을 거부했다. 하나님의 이데아는 그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원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진 한 개별적인 인간에게만 해당된다. 이러한 의미로 '하나님의 이데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전통적인 학설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컴은 경험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보편의 문제에 있어서 온갖 형식의 실재론을 싫어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또 문제가 되는 것은, 헬라의 형이상학을 그리스도 신학에 도입함으로써 신학자들은 마치 하나님이 그 창조활동에 있어서 창조의 이데아 또는 원형에 의해서 인도되고 지배되는 것처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컴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와 전능을 제한하거나 제약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13세기 신학자-철학자들의 헬라 형이상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수성을 더럽혔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러한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것은 이국의 지배로부터 그리스도교 신학을 해방하는 일이다. 물론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추방된다면, 당연한 결과로서 신학과 철학은 분리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일이 드디어 오컴의 경우에서 생겨났던 것이다.오컴의 신학상의 전제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은 그의 윤리학에서이다. 자유란 인격의 고유한 특징이며, 무한한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의 전능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 의지는 도덕적 의무를 따르지만, 하나님 본인이 자기 의무를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도덕률을 부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지하셨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선이 된다. 예컨대 불륜은 악이지만, 그것이 악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불륜을 명령했다고 한다면 불륜조차 칭찬받을 만한 선이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심지어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여 하나님을 미워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오컴은 도덕적 의무를 약화시키거나 도덕률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자유와 전능을 들어높이고 하나님의 전능에 의한 논리적인 결과라고 생각한 것을 끄집어 내려는데 마음을 두고 있었다. 세계에 있어 필연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 경험적으로 검증된다는 절대적인 필연성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기독교 신학에 도입한다면 이는 기독교사상을 손상시키는 이교철학에 불과하다고 보았다.그는 일단 본질의 형이상학을 거부한 이상, 논증적이라고 생각된 것으로서의 실재학은 거의 명사, 전제, 정의 등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논증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실재학은 온전히 개념적인 영역안에 한정된다. 실재학에 있어서 삼단논법의 결론은 경험적으로 검증되겠지만, 그럴지라도 그 결론은 가끔 경험적으로 검증되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검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험적인 검증이 가능한 사실명제는 절대적으로 확실치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다.평가: 과연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진리에 대한 성실도에 준해서 결론이 날 문제는 아니다. 누구도 자신이 누구지에 대해서 무관심하면서 지내는 자는 없기에 모두들 나름대로 자기에게 충실하게 살아가는 중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자인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자신을 두고 그것이 곧 죄의 극치로 불 줄 아는 자이다. 어디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다 빠짐없이 철저하게 죽이시는 분이라는 점을 절감하며 사는 자이다.따라서 십자가에서 출발해서 십자가로 결론을 내리는 자가 진정 신자이며 그 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