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세계사] 클라이브 폰팅 저 이진아 역 그물코(서울&58;2003)
사람이 산다는 것이 곧 같이 망하는 코오스 인 것을 누가 감히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인간들의 살고자 하는 등살과 더불어 생태계는 역으로 인간의 목을 철저하게 죄고 있다. 원래 자연은 죽어도 같이 죽게 되어 있다. 인간만 살수 있는 그런 자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인류의 역사를 짧게 보면 진보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 진보, 진보의 연속이 모두가 멸망으로 이어져 당겨진 연쇄고리였다. 이 책은 그동안의 긴긴 인류 역사를 결산해 본 책이다. 갈수록 수렁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인류의 현 처지를 더 이상 부인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왜 처음부터 수렁이었는가?인간이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농업에 손 댈 수 밖에없는데 그런데 농업의 시작부터 생태계를 죽이는 행위이고 더나아가서 인류를 죽이는 짓이다. 농업이란 인간이 원하는 작물과 동물을 기를 인공 서식지를 만들기 위해 자연 생태계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 본래의 균형과 거기에 내재한 안정성은 파괴되었다. 이를테면 다양한 식물군과 영구적인 토양 보호막 대신의 집중적으로 소수의 작물이 일년 중 얼마 동안 토지를 덮게 된다. 토양은 전에 없이 바람과 비에 노출되어 자연 상태의 생태계에서보다 훨씬 심한 토양 침식이 일어나게 된다. 자연의 재순환 과정 또한 손상되어, 적절한 비옥도를 유지하려면 퇴비나 거름을 따로 주어야만 한다. 관계 농업은 강우량에 의존하는 건조지 농업보다 더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므로 더욱 붕괴를 촉진했다. 척박한 토양에 많은 물을 댄다는 것은 일부 작물을 자라게 할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토양에 나쁜 영향을 준다. 관개 시설을 통과한 물은 지하수맥이나 우물로 빠져, 이런 곳의 수위가 높아지면 토양이 물에 잠기게 된다. 물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 토양 안에 포함되어 있는 광물질 성분도 변하게 되어 토양 속 염분의 양이 늘어난다. 더운 지대에서는 토양의 수분이 빨리 증발해 버리기 때문에 , 결과적으로 토양의 염분이 계속 누적되면서 땅 위에 두꺼운 소금층을 이루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경까지 된다. 이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물을 너무 많이 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관개를 하고 밭을 충분히 휴경해 주는 것이다. 초기의 사회는 증가하는 사제, 지배자, 관리, 군인과 장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 데 힘썼다. 식량 생산이 어려워지고 작물 수확량이 감소하여 사회 내에 재분배할 식량이 줄어든다는 것은, 초기의 도시 국가나 제국의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의 염분화로 인해 생산성이 떨어지면 다른 땅에다 곡식을 재배한다. 늘어나는 인구와 점점 잦아지는 전쟁을 감당할 군대를 부양하기 위해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새로운 토지를 갈아야 하지만 아무리 관개 시설이 발달해도 경작지로 쓸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은 제한되어 있다. 도시 국가가 외부의 침략에 무너지는 시기는 토양의 염화가 전 지역에 퍼져 작물 수확이 감소되는 시기와 일치한다.1930년대 초반 소련에서는 정부가 도시에 우선적으로 식량을 공급하고, 또 공업화에 필요한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수출했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현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살펴보면 유사한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다.깊이 따져보면 기근의 원인은 인간과 식량의 관계가 농경이 출현한 시기부터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과거 수렵 채취인들에게 식량은 교역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내에서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주 농경 사회가 성립되면서 토지와 식량에 관한 소유권이라는 사고방식이 생겨났다. 이런 사회들은 또한 제한된 곡물 생산에 의존했기 때문에 실패의 가능성도 높았고 만일 실패하면 그 사회의 사회 빈곤층은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1315∼1317년 중세의 대기근에서 볼 수 있듯이 식량의 절대량도 부족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근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 즉 고대 사회의 기근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식량 분배가 불평등해서 기근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각지의 식량 가격에 대한 정보가 상인들 사이에 교환되기 시작하면 식량 분배의 문제는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식량을 취급하는 상인들은 상품을 시장에 내지 않고 가격이 더 오를 때까지 쌓아두거나, 좀더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는 지역에 가져다 팔았다. 그 결과 가격이 뛰어서 식량을 사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은 상인들을 향하게 되어 있었다.이러한 사회 불안을 우려하는 정부가 중요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식량 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도 로마 시대부터 근대 초기의 유럽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시장 개입이라는 것은 보통 공정 가격을 설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정부가 스스로 식량을 사들이거나, 상인들에게 식량을 시장에 공급하라고 강제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이런 정부의 개입은 오히려 상인으로 하여금 식량을 매점매석하도록 하는 역효과를 낳는 경우가 많았다.고대 사회뿐 아니라 최근 수세기 이전까지 세계 각지의 모든 사회는 작은 집단을 이루며 자급자족했다. 상품을 교역할 시장이 없는 상태에서 세속 지도자와 종교 엘리트들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장인과 예술가를 고용하거나 후원했다. 이러한 사회는 대개 농경 사회였고 어쩌다 교역이 이루어져도 주로 지배층을 위한 사치품에 국한 되어 있었다.중세 유럽의 봉건 사회에서 초기에는 토지를 팔고 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돈보다는 군사적인 봉사의 대가로 교환하거나 임대했다. 토지 시장은 수세기에 걸쳐서 매우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노동력 시장은 있었지만 자유 시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 시간과 임금, 도제 기간과 생산량 등 노동력을 조정하는 일은 주로 길드가 하는 것이었으며, 고용주도 노동자도 길드를 형성하고 있었다. 상인도 있었지만 그 역할은 미미했으며, 수요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각물품 사이의 정해진 관계에 의해 시장이 이루어졌으므로, 이익도 가격 차이가 아니라 물품의 회전에서 발생했다.1100년경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북부나 플앙드르 지방 등 보다 발전된 지역에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여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교역이 확대되었고 상인의 수가 늘어났으며, 은행이 발달했고 토지 시장도 꾸준히 증가했으며, 노동력도 사고 파는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교역은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노동력 시장도 임금이 제한되고 이동의 자유가 제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행위에는 사회적인 압력이 가해졌다.그러다가 18세기에 영국 등지에서 자유로운 초지, 노동, 자본 시장이 형성된다. 당시로서는 이것이 대단히 새로운 행동 양식이었으며, 가치 사회 조직의 혁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런 변화를 처음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왜 그런 변화가 필요한지 밝힌 사람은 애덤 스미스이다. 따라서 그를 근대 경제학의 시조라고들 한다. 그의 [국부론]은 영국에서 새로운 경제 조직법이 마련될 무렵인 1776년에 출판되었다.그는 생산자든 소비자든 모든 개인은 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좇아 행동하지만, 전체 사회에 가장 유익한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경쟁을 통해 조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란 지속적으로 투자가 행해져야 생산성이 더 커지며, 그에 따라 각 개인이 점점 더 부를 축적하는 등 전체적으로 점점 더 나아지고 있는 과정이라고 보았다.그 역시 18세기 유럽에 퍼져 있었던 믿음, 즉 인간 사회는 반드시 진보하게 되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물질적인 부를 낳는 것이 바로 사회가 좋아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이런 이런 주장을 한다면 여기 중요한 가치관들이 많이 빠져 있다고 반박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당시에는 이런 생각은 상당히 영향력이 컸으며 그후로도 지금까지 계속 영향을 미쳐 왔다. 애덤 스미스뿐아니라 리카도, 존 스투어트 밀 등도 상품 생산이 경제의 중심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경제학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된 출발점부터 이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생산의 조직, 즉 생산에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토지, 노동과 자본 등 )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연구하는데 집중했던 것이다.스미스의 이론, 즉 수용와 공급의 균형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어, 그 가격에 의해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경쟁적인 시장에 대한 이론이 실제에 있어서도 생산과 슈요을 맞추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 200년 동안 고전 경제학의 가설들이 서구 산업 사회를 풍미했다.하지만 고전 경제학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다. 이 점은 마르크스주의, 후생 경제학, 케인즈 학파와 급진적인 자유주의 경제학 등 좀더 현대적인 이론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이론은 자원의 고갈이라는 문제를 무시한 채 서로 경쟁하는 다양한 힘 사이에 어떻게 자연울 분배할 것인가 하는 부차적인 문제만을 다루었다.치명적인 결점은 지구의 자원을 자본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나무, 야생 동물, 광물질, 물과 토양을 매매하고 개발되어야 할 상품으로 보았다. 공기와 같은 것은 무한정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아예 시장 메커니즘의 고려 대상에 넣지도 않았다. 이 이론은 지구의 자원이 희귀할 뿐만 아니라 한정되어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간과했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전혀 고려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론에 기초한 경제 체계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자원을 가능한한 많이 써 버리도록 권했다.고전 경제학은 물질이나 에너지 자원이 고갈되지 않으며, 경제는 전반적으로 영원히 향상되어 갈 것으로 생각했다. 자원의 총공급량이 한정되어 있는 게 현실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어떤 물질이나 에너지 자연이든 아무리 써도 계속 공급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런 체계 안에서는 현재의 가격, 즉 경제 활동의 수준이 미래에 어떤 문제에 부딪치게 될지를 고려할 방법이 없다. 실제로 고전 경계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행동은 당장 자신에게 이윤이 얼마나 많이 남는지를 따져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권하고 있는데, 이런 행동에 후세를 고려할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연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소비한다는 것은 우리의 후손이 그것을 쓸 수 없다는 매우 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1930년대 등장한 케인즈 이론은 국가의 경제 활동 수준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정부가 경제에 있어서의 수요를 통제하여 완전 고용을 유지할 수 잇다는 것을 보여 주어 환영을 받았다. 새로운 경제 수준 측정법이란 국민총생산(GNP) 개념으로, 생산, 소비, 투지의 총량을 계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보통 어떤 사회의 경제가 얼마나 성공적인가 하는 것을 평가하는 데 GNP가 증가하는 속도를 본다.하지만 GNP를 정의하는 방식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 GNP는 경제 활동의 모든 면을 포괄하지 못하며, 그것을 산정하는 방식도 경제 활동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보여 준다. GNP는 한 경제 내에서 특정한 금전적인 흐름 만을 측정한다. 따라서 '지하 경제'는 포함되지 않고, 물물 교환이나 자족주의 농경, 가사 노동이나 자원 봉사와 같은 비금전적인 활동도 포함되지 않는다.GNP 측정은 또한 생산하는 과정 때문에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 즉 공해 유발, 교통 마비와 같은 문제나 주택 보급이 저하, 높은 범죄률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 항목은 가격을 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개의 경제 모델이나 가격 메커니즘에서는 '외부적인 것'의 범주로 취급해 버린다. GNP 개념은 앞으로의 계속적인 성장이라는 장기적인 관점은 고사하고, 한 시점에서 그 수준이 실제로 바람직한 것인지 혹은 지속적인 것인지조차 고려하지 않는다.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현재 제3세계로 알려진 국가들의 경제와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미국도 뒤늦게 출발하여 점점 더 그런 영향력을 발휘했다. 제3세계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자체 시장을 위해 자급 자족으로 식량을 재배해 왔으나 이때쯤에는 세계 경제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유럽과 유럽인들이 경영하는 식민지, 그리고 미국이었다.여러 지역에서 차례로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이런 과정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추구되었다. 제3세계 경제 개발의 실제 모습은 다른 나라를 위해서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정치적 통제, 경제적 압력, 투자, 시장의 힘 등이 혼합된 강력한 사회적 장치를 통해서 강제되고 관리되었다. 여기서 재배되는 작물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의 식단의 사치를 위한 것(설탕, 커피, 차, 코코아, 바나나)이거나, 이들 국가의 공장 산업을 유지하기 위한 것 (목화, 고무, 야자유)이었다. 이런 공장들을 가동하는 선진국에게 있어 개발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즉 다양한 공장들이 지어져서 점점 더 번창해지며 사람들의 소비 수준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종속적인 식민지 경제들은 몇 가지 상품, 어떤 경우에는 단일한 상품을 중점적으로 재배하는 형태로 재구성되었다. 다양한 농업은 점점 단일한 재배지로 바뀌었고 이는 환경, 특히 토양과 생물학적 다양성의 손상이라는 점에서 큰 피해를 주었다.'서구'라고 불리는 세계의 한 부분(유럽, 북아메리카, 백인 식민지)이 '개발'되어 온 과정과 '제 3세계'라고 불리는 여타 부분이 '개발 도상'으로 남겨지는 과정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다. 그들은 뗄래야 뗄 수 없게 얽혀있다. 유럽이 만들어 낸 세계 시장에서, 한 지역이 막대한 잉여 생산물과 천연 자연을 다른 지역으로부터 뽑아 쓸 수 있게 되었다. 서구가 독점하는 경제의 특징은 자본 집약적인 상품의 생산,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이윤 등이며, 한편 작물, 원재료, 광물 자원이 생산에 집중된 종속적인 경제는 낮은 자본의 집약도, 저임금, 저이윤을 특징으로 한다.종속된 식민지 경제도 개발되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거의 본국의 수요 때문에 생긴 것이다. 철도와 유통망이 형성되기는 했으나, 그것은 주로 내륙과 항구를 연결하는 수출용인 경우가 많았다. 각 지방간이나 서로 다른 정치적 통치를 받던 식민지간의 연결성이 거의 없었다.제 3세계의 정치적인 독립도 경제적인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경제는 공업국이 지배하는 세계 경제에 묵여 있었고, 대개 식민 당국이 결정한 경제 구조도 바꾸기가 힘들었다.몇몇 국가들은 이러한 덫을 피했다. 일본처럼 정치 경제적인 독립성을 유지했던 지역이나 한국과 대만처럼 유럽의 식민 지배를 모면했던 지역, 중동 지방의 산유국처럼 선진죽이 요구하는 막대한 자원과 적은 인구를 가진 지역, 홍콩이나 싱가포르처럼 중계 무역을 하던 국가들이다.독립 후에도 제3세계의 개발 모델은 공업화, 자유 시장, 국제 경쟁을 강조하는 서구의 모델에 기초한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인도나 브라질 같은 소수의 국가만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런 나라들에게도 분배의 불평등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제3세계 대부분의 국가들, 특히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국가들의 유일한 선택은, 소득과 수출을 늘리기 위해 상품 작물과 광물의 생산성을 늘리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선택의 문제점은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가격도 낮아지고 임금도 낮아지며, 소수의 상품에 의존함에 따라 취약성도 커져 경제적으로 더욱 불안정해진다는 것이었다.경제 개발을 위해 추진되었던 프로젝트 중에도 터무니없거나 그 지역에 오히려 악영향을 주는 것들이 많았지만, 어쨌던 잘 살아 보려고 개발 계획은 세우고 거기 필요한 자금을 선진국에서 빌린 경우에는 사정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집트나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에서는 19세기에 벌써 국가 채무를 구실로 외세에 점령당하거나, 채무를 갚기 위해 국가 수입을 내주어야 했다. 제3세계에서 이러한 발전에 의해 혜택을 받은 사람은 다수 대중이 아니라 선진 공업국에 밀착되어 있는 엘리트층이다.이러한 불균형한 발전의 결과는 선진 공업국과 제3세계 양자 모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세계 자원에 대한 정치적인 통제력을 통해 선진 선진 공업국은 자원의 압박없이 살 수 있었다. 자연은 즉시 공급되었고, 급증하는 인구와 소비의 급증을 감당하기 위한 식량이 수입되었기 때문에 물질적인 생활 수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그러나 이런 성취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제3세계 사람들이 착취, 가난, 인간적 고통이라는 형태로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었다.19세기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면서, 다른 작물보다도 식량을 재배하는 데 토지를 사용하게 되었고, 모피 동물이 대향 살육되면서 이러한 자연에도 압력이 가해졌다. 20세기에는 화학 물질로부터 인공 섬유를 만들어 내는 기술을 개발하므로써 전세계 인구에게 옷을 입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한 생산 기술에는 더 많은 자원과 에너지가 소비된다.이와마찬가지로 수요가 늘어나면서 물품이 부족해지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새로이 자연을 이용하는 현상은, 필기구와 같은 경우에도 나타난다. 먹을 식량을 얻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농업 생산성이 낮았던 중세유럽(중국도 마찬가지이다)에서는 동물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가축도 많이 키우지 못했다. 따라서 동물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나 송아지피지도 아주 조금밖에 없었다.필기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열등한 재질로 여겼던 나무 펄프로 만든 종이로 대체하게 되었다. 그 결과 더 많은 숲이 사라졌고 종이 생산량은 급속히 늘어났다. 이것은 유럽에서 나무가 부족해지자, 채굴하는 데 힘들고 운송과 사용이 어려워 열등한 연료로 여겼던 석탄을 때게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에너지 수요가 계속 더 증가하자 더욱 복잡한 공정을 필요로 하는 해저 석유 자원까지 개발하게 되었다.어떻게 보면 이러한 새로운 기술의 발명과 더욱 복잡한 생산 과정, 그리고 더 많은 자원을 이용하게 된 것을 진보라고 볼 수도 있다. 인류 사회가 인간의 재능과 능력만으로 도전을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그들의 욕구에 맞추어 환경을 제어하고 수정하는 능력이 늘어난 것이라고. 그러나 생태계의 시각으로 보면, 진보란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더 복잡하고 환경적으로 해로운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20세기, 특히 후반 수십 년 간의 정치, 사회, 문화를 돌이켜보면 개발에 대한 실망감이 강해지고 환경의 보호와 보전에로 관심이 높아지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환경 문제가 국내와 국제 정치에 반영되었고, 농업, 공법 규제, 공해와 개발 기금 등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영역의 정책에 대한 시민 운동이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의 흐름, '자연계'를 인간과는 별개의 세계로 보아 그것이 인간에게 개발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지난 200년 동안 서구인들의 기본 철학에 뿌리박혀 있는 사고 방식을 완전히 없애 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또한 공업화나 경제 성장이 환경 개선에 우선하는 것으로 보는 경제적인 발상법 역시 바꾸어 놓지는 못하고 있다.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의 증가나 시민 운동의 성장은 실제로 큰 변화를 유도하지 못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환경 파괴를 줄이기 위한 몇 가지 대책이 국내외에서 제기되었다. 산성비와 CFC 방출을 줄이려는 국제 회의들이 그 예다. 하지만 야생 보호 대책을 별개의 영역으로 취급한다거나, 어는 정도까지는 공해를 인정해 준다거나, '과학적인' 포경은 허용한다거나, 자원을 할당하지 않고 목표량을 세운다거나, 유기 농업에는 거의 지원을 하지 않으면서 집약 농업에는 더 많은 보조금을 댄다거나 하는 일련의 대책은 그 성격상 뭔가 새롭고 달라진 태도의 첫걸음이라기보다는, 기준의 경제 체계를 보호하려는 태도로 해석된다. 일부나마 성과도 있기도 하고(대도시에서의 석탄 매연 규제 등)그나마 없던 것보다는 상황이 나아졌다.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대책은 표면상의 것에 불과하다. 계속적인 인구 증가로 인한 강력한 요인, 식량을 증산하기 위한 더 많은 토지의 필요성, 세계 공업 팽창에 따르는 수요 등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대책의 결과는 전세계적으로 볼 때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전세계가 공업화를 향해 돌진해 나갈 것이라는 점을 명백하다. 농업 생산이 점점 커지고 차츰 집약적으로 되었듯이 공업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이처럼 인류는 계속해서 극복하기 힘든 과거를 미래의 세대에게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평가: 살고 싶어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우려도 어차피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개인이라면 그 개인의 노력으로 이 세상을 희망적인 세계로 치장한다는 것은 어떻게해도 사기다.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이 사기에 속아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