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5"12-16 (기적의 영속성)
Re..행 5:12-16 (기적의 영속성)
이름 : 이근호(IP:)
기적의 영속성
2004년 3월 3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5:12-16
5: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5: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5: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5: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5: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성경에서 기적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반깁니다. 그 기적의 혜택이 행여 현재 자신에게도 주어지지 않을까 기대해서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관성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관성에서 이탈하시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흔히 기적이라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일관성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적과 기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적으로 일하시는 겁니까?
히브리서 1:10-11에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당사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 견해로는 이제 이 창조 세계는 영원할 것이라고 짐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멸망해야 하며 옷과 같이 낡아져야 한다는 겁니다.
창조 세계는 결코 영존할 수 없고 그 대신 주님은 영존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은 영존하지도 않는 자연 세계에 미련 둘 것이 아니라 영존하시는 주님만을 의지하고 쳐다보면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기적을 발생시켰습니다. 마치 이 세상은 거대한 배와 같습니다. 그 선박 위에 우리들이 우연찮게 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손님에 불과합니다. 그 배를 직접 운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 큰배의 운명과 함께 우리의 운명도 같이 갑니다.
바로 우리가 탄 배는 결국 파선해야 될 배라는 겁니다. 그런데 흔히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취지를 거부하고 이왕 마주하게 된 이 자연 세계, 물질 세계에서 보다 오래 살고 많은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신에게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떼를 쓰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신 상태부터 하나님의 일관성있는 작업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대자연 속에서 나름대로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인간들의 기적관이란 이 기대하는 바를 쭉∼ 크게 늘이고 부풀어지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미련 없이 이 세계에서 손을 털고 그 대신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라는 겁니다. 따라서 진짜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기적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는 효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기 전에 자연 세계를 생각만 하면 매사에 하나님에 대한 불평으로 가득했는데 막상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보니 하나님에 대한 불평을 어디로 갔는지 싹 가시고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만 가득 찰 때,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또 있더란 말입니까!
구약에 나와있는 기적이란 이처럼 인간들이 요구하는 희망 사항을 들어주는 기적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늘 절망하게 만드는 상황을 유발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포부와 뜻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만 쳐다보며 살도록 조치한 기적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홍해 바다를 건널 때에는 사람들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고 이미 바다는 한 가운데로 갈라져서 가운데 길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초라한 지팡이가 아니라 화려한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마구 진격하려고 했지만 요단강 물은 까딱도 하지 않고 줄기차게 흐릅니다.
하필이면 그 때 강물이 범람하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요단강을 도저히 건널 수가 없음을 모든 이들이 통감했습니다. 바로 기적이란 이처럼 인간들이 낙담하고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자기가 예상한대로 일이 진척되리라는 기대를 아예 거두게 만듭니다.
성경에 좁은 길, 좁은 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좁은 문이라고 해서 첫 문을 통과할 때만 힘들고 나머지는 탄탄대로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 통과해서 여전히 좁은 길입니다. 영생에 들어갈 때까지 끝까지 좁은 길이요 찾는 이가 드문 길입니다. 외로운 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도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한 번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과거에 써먹은 방식이나 방법을 또 다시 써먹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 돌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에만 맡겼습니다.
그랬더니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인간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어 전혀 낯선 방식으로 무너졌습니다. 그 뒤에 조그마한 아이 성이 나오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제쳐두고 자기 방식으로 공격을 시도하다가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사람이란 기존의 자기 방식으로 고수하게 되면 그것이 굳어져서 멸망할 대상에서 슬그머니 빠지려는 심보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큰 배에서 내려 작은 보트에 따로 자기 세계 태워 영원하려는 의식에 해당됩니다. 당연히 파선되어야 되고 멸망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의 기적이란 우리의 것을 채우고 더 확장시키기 위한 기적이 아니라 있는 것 조차도 다 날라 간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한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적은 어떤 자에게만 기적으로 보이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17:14-20절에 보면,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변화산에 올라가 있을 동안 나머지 제자들이 어떤 간질병 들린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해서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꾸짖고 그 아이의 병을 낫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우리는 저 아이의 병을 못 고쳤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믿음 이야기를 끄집어내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과연 무엇이 믿음인가를 분명히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믿음이란 목표에 대한 자신들의 욕구불만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의 믿음입니다. 과연 욕구불만과 믿음이라는 것이 상호 결합될 수 있는 개념일까요?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을 위해 일하심을 믿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즉 산을 옮기는 것이 예수님의 사업이라면 주님에게는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함을 믿는 바가 믿음 인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이 자신의 포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자기 나름대로의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게 해주지 않고 다만 마귀가 그 뜻을 달성케 해 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인간의 마음 속에는 십자가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목표로 삼은 대상물이 들어 있는 것이 되니, 곧 악마가 원하는 사람으로 변모되어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에 보면, "십자가가 이미 눈 앞에 있는데 무엇을 유혹거리가 될 수 있느냐"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적이란 예수님이 하실 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숱한 기적과 능력들을 보았고 실제로 자신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제자들 마음 속에서는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 인생을 이득을 챙겨보겠다는 심보로 가득찼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그 어느 한 제자 할 것 없이 모두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신들이 예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7:22에 보면, 예수님께서 겨자씨 믿음을 언급하시고 난 뒤 분명히 자신은 사람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제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약속을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참된 믿음이란 이처럼 예수님이 하실 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기적이란 온갖 수모와 힘든 역경 속에서도 꾸준히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그 신앙과 사랑과 감사가 곧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죽을 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외부적으로 볼 때에 분명히 사도들이 기적을 행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기적의 혜택을 입고 나오는 사람들은 '주께로 나온다'고 14절에 나와있습니다. 만약 사도들에게 나온다면, 한 사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베푸는 대로 여러 사도에게 나와야 할 것입니다.
오순절날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모든 초점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관성에 모이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신 분이 모든 일을 일관성 있게 일을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란 곧 눈에 보이는 세계의 멸망과 오로지 예수님과 그의 세계만이 영원함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병이 나았지만 병이 나은 건강한 자기 육체를 의지하라고 병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존하시는 주께만 섬기기 위해 병 낫게 해줌을 이 사람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자기 일을 확대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흥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기적이란 이 세상에 아무 소리 없이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그 베일 뒤에 등장하시는 주님이 행하신 구원의 은총으로만 만족하고 충분함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런 기적을 잊지 마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인데 세상적인 것을 탐하다가 하나님의 사랑마저 모독하지 않도록 늘 주의를 받으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