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과 새 부대
53 새 술은 새 부대에제사를 원치 않고 자비를 원하심 (마 9장)지난 시간에 제자의 조건에 대해 물었을 때 진주가 제자의 조건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의 조건이 없는데 왜 제자로 부르시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참이스라엘을 찾으시는 원칙입니다. 즉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기 위함입니다.참 이스라엘이란 하늘에서 난 자들입니다. 영적 군사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은 거룩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쟁은 거룩한 전쟁입니다. 즉 비거룩을 향한 싸움이 있다는 겁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엡 6:12) 어둠의 권세와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소원인 거룩을 지켜낼 재간이 인간 어느 누구에게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둠의 권세에서 이스라엘도 역시 악한 자, 곧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시 14편) 거룩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의 의미는 계속 쭈욱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거 됩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해서인가요? 아닙니다. 절대로 이스라엘이 거룩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거합니까? 그러니깐요! 그러니까 그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먼저 거룩이란 지켜내어야 할 행함의 거룩이 아닙니다. 행하면 거룩해질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럼 무슨 수로 거룩해집니까? 구약에선 그 거룩과 비거룩이 구분, 구별되는 사건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애굽이 아무리 선함을 주장하여도 여호와의 언약이 일방적으로 독선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워지니 애굽은 자연히 강퍅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배운 아벨의 제사에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담을 그릇으로(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그릇, 믿음이란 이런 거다) 일방적으로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행함(선택)이 가인의 죄의 소원을 들추어내는 미끼가 되는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엑소더스, 빼내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바로의 강퍅을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열심이 곧 미끼인 이스라엘 미끼(그릇으로)로 인해 작용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잘 예배 드렸고, 누가 더 거룩하고, 누가 더 제사를 잘 드렸느냐 라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선에서 떠난 문제이기에, 모든 초점과 관심사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즉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 거룩함의 행위가, 일하심이, 어디를 향하여, 무엇을 목적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가를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보다 거룩하고 의로워서가 절대로 아닌, 여호와의 일방적인 낮아지심이 이스라엘 속에 함께 거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흘림 때문입니다. 그 흠없는 어린양은 애굽을 위해 흘려지거나 뿌려진바가 아닌,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뿌려진 겁니다. 왜요? 왜 어린양이 죽어야 합니까? 바로 그겁니다. 거룩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실려고 뿌려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애굽은 같이 거룩하지 않은데, 누군 용서의 피가 뿌려지고, 누군 용서의 피가 안 뿌려져서 강퍅함과 죄의 소원이 들추어지는 겁니까? 도대체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여기에 대해 우리는 함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 함구 할 수밖에 없다는이 자체가 은혜 받은 자 외에는, 하늘에서 난 자 외에는, 알 길이 없는 신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캬 그럼 누군 선택 받아 좋겠고, 누군 짤려서 억울하겠네 뭐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런 소리 교인들에게서 무지 많이 들었습니다.참 재미있게도 은혜 받은 자, 선택 받은 자, 하늘에서 난 자가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 정도로 대단한 자들일까요? 사실은 전혀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되도 않는 인간들이어서 더 짜증나는 식으로 말을 막 퍼붓습니다. ( 저런 인간들 보다 내가 왜 밀려야 하느냐 라는 식의 반응들입니다. 내가 저런 인간 보다 못한 게 뭐가 있냐?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못한 게 없기 때문이겠죠. 가인의 화냄은 바로 우리 모습입니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어중이떠중이들로만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왜냐고요? 자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자신에게서 의(義)를 발견 할 수 없어서, 나를 제발 떠나소서 간절히 부탁한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됨으로 비로소 자신의 죄가, 그 어두움 그 자체였던 죄인임을 실토하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대단한 자들은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반문한 자들입니다. 간이 배밖으로 나와도 한 참 나온 자들입니다. 창조주를 만나고서도 안타죽는것 자체로 죄인임을 고백하기는커녕, 그 앞에서 당당한 육의 자랑을 늘어놓는 겁니다.그래서 이 사람아 라고 너무 너무 몰라도 너무 너무 모르는 혀를 차면서 도통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안타까움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유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롬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롬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도통 관심사가 주의 일하심이 아니라, 자기 일에 몰두하고 집착한 모습 뿐입니다. 자기 구원, 자기 선택, 자기 믿음, 자기 행함 오로지 관심사는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이다 는 겁니다.(빌 2: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의 선택,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의 행함은 지금도 운동하고 움직이는데, 전혀 보이질 않으니 자기 일을 할 수 밖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이 하시는 일을 보라고 부르시는 겁니다. 제자의 조건은 제자로써 할 일을 감당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활동하시는 그 일을 증언하는, 목격자 일 뿐입니다. 왜요? 지금도 주님은 부지런히 부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이 끝났으니 이제 내가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지 가 아니라, 지금도 또 다시 부르시는 겁니다. 늘 찾아오심이 아니면, 늘 부르심이 아니면 우리는 각자 제 길로 가는, 각 자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기에 끝까지 참아주시며 끝까지 부르신 그 손짓한 그 손으로 절대로 놓치지 않으시고 사로잡아서 끌고 가시는 겁니다.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이 정도면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내세울 자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주님이 세리인 레위를 부르십니다. 그 레위는 예수님에 의해 이름이 바뀌어집니다. 마태입니다. 그 마태오는 지금 제자의 조건을 갖춘 자가 아닙니다. 지금 한 참 떠드는 일제청산의 매국노를 짜르지 않으면, 썩은 가지를 짤라 내지 않으면 한국은 미래가 없다고 외치는 이 마당에 마태도 똑같은 매국노로써 일본앞잡이, 로마 앞잡이 역할을 하는 자이기에 짤라도 당장 짤라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로마 앞잡이(유대를 짓밟고 있는)를 짜르기는커녕 오히려 부르십니다. 왜 일까요? 유대인들은 저 마테를 짜르고 싶어서 미워 죽을 판인데, 왜냐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버리고 저런 로마 앞잡이 짓을 하니, 하나님을 위해서 라도 마태를 미워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아 그런데 왜 예수님은 바로 그런 마태를 부르시는 겁니까? 왜 제자로 삼으시는 겁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보탬이 되는 능률적인 일과 합리적인 처사이기는커녕, 오히려 반대로 유대인이 가지는 세리 마태에 대한 감정에 더 열받게끔 휘발유를 끼어 얹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자를 제자로 부르시고 삼으시는 겁니까? 결국 그러고 보니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인간의 어두움의 정체가 들추어집니다. 죄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그 죄의 소원대로 늘 끊임없이 악을 찾아서 악을 이길려고 달려들고 있다는 겁니다. 세리 마태를 악으로 보고 그 악함을 늘 정죄하면서 자신의 선을 추구하는 것을 오히려 예수님이 등장하여서 그런 악으로 정죄 받는 자(죄인)를 부르시고, 의인인 유대인의 악의 정체를 둘추어내니 그들은 그들 소원대로 죄의 소원대로 죽음이라는 무기로 예수님을 이길려고 하는 겁니다.여기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는데 바로 두 선택 싸움입니다. 두 믿음 싸움입니다. 다른 곳이 아닌 이스라엘 유대 속에서 벌어지는 전투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싸우시고, 그 죽음을 승리로 이끌어 가시는가를 똑똑히 보여줄려고 증인자, 목격자, 증언자로써 부르시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할 일이 없습니다. 더 이상 자기 일이 없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써 부르셨다고 사람 낚는 자가 되는 수준 높은 그런 한 수 위의 업그레이드 된 자로써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그렇다면 유대 바리새인이랑 다를 바 없지요,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선교 하니까), 사람 낚는 어부를 낚으시는 그 멋진 사람 낚는 낚시꾼의 낚시 바늘의 미끼로 부르시는 겁니다. 미끼로 삼으시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 낚는 어부가 맞지요. 사람들은 미끼를 무는 것이 아니라, 어부를 물을려고 달려드니깐 요(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우리는 늘 사람 낚기 위해서 늘 죽어나는 미끼인 셈입니다. 바로 그래서 똑똑한 인간, 지혜로운 인간, 강한 인간 필요 없는 겁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의 지혜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똑똑한 인간, 지혜로운 인간, 강한 인간이 되고픈 데 걸림돌이 늘 있으니, 눈에 가시처럼 거슬리게 보이는 것입니다. 좀 더 나은 의(義), 좀 더 깊은 믿음, 좀 더 넓은 지혜로, 내게 달려오는 모든 것을 이기고픈 데, 뭐든지 붙잡고 다 이기고픈 데, 십자가의 지혜가 떡 가로막고 태클을 걸면서 넘어뜨리고 있으니, 이거 원 내세울 꺼리 하나 안 남기고 다 빼앗아 갈, 도둑질 해 갈 심뽀처럼 보이니, 그 앞에서 자랑할 자(이길려고 용쓰는 자) 없는 겁니다. 마치 환도뼈 부러진 야곱처럼 말이죠. 그럼 어떻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이겼을까요? 진짜로 이겨서 이긴 것일까요? 일방적으로 져주심 아닐까요? 지금 마태에게 거룩이 있어서, 의로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용서해주심처럼 말이죠. 그래서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참이스라엘은 오로지 용서하심만으로, 신들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그 신들을 이기는 것은 자신의 이김의 도구인 믿음 소망 사랑이 자신에게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져주심(대신 화목 제물 되심)인 용서함,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흘리신 그 십자가의 피 흘림, 용서라는 겁니다. 이 새로운 방식에 용서로써 새이스라엘을 모으시는 겁니다. 그 새로운 용서를 담을 그릇으로 용서의 세계를 펼치시는 겁니다.예수님은 자신의 일하심을 용서로써 자기 백성에게 일관되게 일하시고, 그 용서함을 받은 자는 그 용서만을(십자가만을 자랑) 외치면서 악한 세상에 내던져 집니다.주님의 일방적인 자비와 긍휼이 선포되어지는 이 순간에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매국노 하나님의 나라를 배반한 로마 앞잡이 세리 마태와 함께 먹고 마시는 저 예수를 곱게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이가 떨리고 치가 떨리는 치욕을 더 즐기는 자처럼 느껴 보여집니다. 오로지 관심사가 이 유대나라인 바리새인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은 건강하고 의인인 자들에게는 의사나 구원자가 필요 없음을 말씀하십니다.(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이스라엘 나라가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이어지는 하늘에서 난 자들 이듯이, 지금 예수님은 병든 자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다시 새롭게 하나님의 의(義)를 담을 그릇을 다시 모으시는 겁니다. 그 방식은 제사나 번제나 예배나 찬양이나 금식이나 전도나 믿음이나 봉사 충성이 아니라, 인간에게서는 도무지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 볼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하심만으로 태어난, 바로 긍휼입니다, 자비입니다. 용서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심입니다. 원수된 우리를 위해서 용서하기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용서만의 방식으로 담겨질 그릇을 찾으시는 겁니다.헌 부대에 새 술을 담을 수 없습니다. 헌 옷에 새 옷감을 붙이질 않습니다. 감당이 불감당입니다.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방식 속에서 무엇을 담고자 그런 새 그릇들을 찾고 계시는 겁니까? 바로 제사가 아닌 긍휼, 번제가 아닌 자비를 담을 그릇을 삼고자 부르시는 겁니다.우물가의 아낙네가 여러분 절 용서 해주시는 분이 나타났어요 라고 온 동네방네 외치며 용서의 목격함을 외치듯이, 용서의 증인들을 모으시는 겁니다.용서받은 주제에 뭘 또 끄집어내어서 자랑 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 반대로 막 살아도 되냐고요?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팔자입니다. 그럴 여유가 없거든요. 아니 여유를 안 주십니다. 그저 용서의 바다에서 그 용서의 폭풍우 속에서 철저하게 용서하심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외치도록 만드시니깐 요. 요나처럼. 용서의 사랑이 날마다 우리를 깔아 뭉게는 판인데, 살아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날마다 항복하는, 두 손 두 발 드는 기쁨을 누리기 바쁜데, 언제 막 살 여유가 생기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세리 마태처럼 용서 해줄실려고 작정하시면서 부르십니다. 그저 못난 우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더불어 용서의 세계를 값없이 주실려고 아무도 기대치도 원하지도 않았는데, 은혜를 주시고자 홀로 직접 내려오신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바로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하심 외에는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주님. 우리가 우리 배를 몰고가야하는 그런 편견을 버리도록 성령을 부어주소서. 날마다 내가 몰고 다니는 그런 배는 이제 버리고, 주님이 몰고 항해하시는 그 배에 오르도록, 주님이 선장 되시는 그 배에, 나의 선장 자리를 포기하는 자 되게 하소서. 주님이 항해자 되시어 우리를 폭풍우 있는 곳으로, 험한 물결 있는 곳으로 인도하심은 우리 속에 있는 죽음의 실체를 들추어내기 위함이니, 내 속에 있는 그런 먹보다도 더 검은 죄를 보고 이 죄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지 않으면, 죄 용서 받을길이 없었구나를 알 수 있도록 우리를 깊은 바다로 인도하시는 항해자인 줄 믿게 하소서. 주님이 잡으신 그 손에 끝까지놓지 말아 주소서. 주님이 베푸시는 긍휼과 자비가 아니면 이 깊은 바다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용서만을 구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항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