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5" 1- 6 (아나니아와 삽비라)
Re..행 5: 1- 6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름 : 이근호(IP:)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2004년 2월 25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5:1-6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참 죽는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과로사도 아니요, 차 사고도 아니라 헌금을 속여서 내었다고 죽은 사람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헌금을 속였다'라는 그 사실을 규정하는 원칙 자체도 인간이 어떻게 따로 규정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이 일요일 예배 시간에 헌금할 액수에 대해서 그 전날인 토요일 밤 10시 15분에 정해놓았다 칩시다. 그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 만원 헌금하라'고 지시 받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일요일날 현관문을 나갈 때, 이상스럽게 마음 속으로 4 만원은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칩시다.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안 죽기 위해 얼른 2 만원을 더 보태어 봉투에 넣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막상 예배 시작을 하고 보니 이상스럽게 8만원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이 올 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지시 받은 헌금 액수 결정 시기를 어느 걸로 잡아야 한단 말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헌금의 비율과 자신의 죽음을 직접 연결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헌금 액수를 속였다고 그 사람을 죽였다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하나님의 이미지는 무자비한 하나님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면, 성급하게 그 부부를 죽이는 일부터 나서실 것이 아니라 일단 "내일까지 처음 약속한 액수를 마저 채워라"라고 지시를 해서 말미를 주고 살려 두어서, 그 부부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인권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바람직한 인도하심이요 사랑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런 기회를 주시기는커녕, 그 날로 이 부부가 죽었으니, 만약 자식들이 집에 있다면 졸지에 자식들은 고아가 되거나 소년, 소녀 가장이 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무자비성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 헌금 액수에 관한 것이 주안점이 아니라, 교회 안과 교회 바깥에서 작용하는 원리 원칙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겁니다. 사람이란 죽음의 힘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죽음의 힘이 이미 인간을 장악하기에 그 죽음의 힘에 대항하고 그 힘을 극복되는 그 순간을 가지고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대를 갖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덮이는 그 날이 있기에, 단지 그 날짜를 지연시키든지 늦추기 위한 것을 목표로 삼아 부지런히 설치면서 있는 가진 목숨을 지탱하려고 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흔히들, 상부상조, 이웃 사랑을 외치지만 다급하면 자기 목숨부터 살리고 보는 겁니다. 심지어 순교적인 희생을 발휘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명예 안에다 자신의 이미지를 담기 마련입니다. 이 모든 일은 다 교회 밖에서 통용되는 삶의 원리, 원칙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교회 안에는 확연하게 다른 원리가 적용됩니다. 죽음의 힘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힘에 또 다른 종류가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죽음의 힘이 따로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죽음에서 나온 힘이 우리에게 닿으면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이 영생의 힘이 나오는 선을 따라 원천을 찾아가면 그곳은 곧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십자가 밑입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죽는 자만이 나와 함께 살 수 있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 달리 말씀드리면, "누구든지 좁은 길을 가는 자만이 영생의 세계에 이른다"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라는 죽음의 힘이 적용되는 곳은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 원리만 통용됩니다.
만약 이 원리를 무시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설사 장수하며 산다할지라도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라는 죽음의 힘이 교회 안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합니까? 헌금을 속이는 자는 찾는 쪽쪽 다 죽여버리는 그런 일을 하는 힘입니까? 이 힘은 헌금에게만 적용되는 힘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1-5절의 예를 들어 보면 분명해집니다. 거기에 보면,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처럼 난데없이 죽어버린 어떤 사나이가 나옵니다. 자... 그 사람은 어떤 차원에서 죽었는지를 살펴봅시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근친상간을 한 어떤 자가 하나님에 의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 사람은 분명히 지옥 갔을 것이라"고 짐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설명은 이런 해석을 완전히 뒤엎습니다. 몸은 비록 죽었지만 영은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즉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는 세상에서 적용되는 힘이 아니라 전혀 다른 힘이 적용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와 속죄의 힘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와 속죄의 힘이라는 것이 죄를 용납하는 식으로 등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사자를 죽여버리는 식으로 적용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당사자를 죽여버림으로서, 지금 사람을 제대로 죽이는 죽음의 힘의 근거가 바로 십자가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교회 안에 흐르는 원리, 원칙은 그 어떤 경우라도 죄인의 죄를 그냥 방치하거나 방관하는 힘이 아니라 죄를 적극적으로 용서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방향으로 계속 적용시켜 나갑니다.
이 원리가 계속 살아있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만약에 다음과 같은 교회에 다녔다면 결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우리 교회는 주님이 세운 교회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속이고 헌금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 교회를 세워주신 주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죽이십니다."라고 주장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안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그런 교회에서 대 환영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 원리로 세워지는 교회는 그 자체로 이미 주님의 교회 바깥에 존재라는 단체로 지옥 갈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교회에는 죽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심을 믿습니다."라는 교회 말입니다. 즉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한 교회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용서의 근거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교회 내에서 죄 용서의 취지와 정반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죽음에 넘겨주고 또한 그 자의 영은 예수님의 날에 구원됨을 소개함으로 말미암아 죄 용서의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이시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액수를 속여서 헌금한 것은, 교회말고 따로 자기 생명을 지탱한 세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그것이 가정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나에게 필요 없다"가 아니라 "교회가 필요하되 나의 가정보다는 덜 필요하다"고 본 그 관점은, 교회에 적용되는 십자가 죽음의 힘보다는, 내가 나 자신을 살리는 힘이 더 우선이라는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쉽게 말해서, 가치의 우선 순위에 있어, 자기 자신이 0순위에 그 다음에 가정이 1순위에 그 다음에 교회가 2순위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교회에 헌금하는 일 조차도 교회를 세우신 성령님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일이 됩니다.
만약에 내가 나 자신을 살리겠다는 식으로 교회를 0순위로 삼는다면 그 사람의 몸과 영은 모두다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세상 단체와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부로 교회를 0순위로 삼을 필요도 없이,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힘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 있더라도 십자가에서 나온 죄 용서의 힘에 의해 산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어디 있든지 교회 안에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따라서 교회 내는 헌금만이 헌금이 아니라 자기 가정을 위해 쓰여지는 돈도 헌금임을 부인해서는 아니 됩니다. 헌금을 교회 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돈을 내든지 아니 내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십자가에서 나온 은혜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곧 교회요 성도요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함이 늘 자기 위로 적용함을 그런 식으로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살길만 찾지 말게 하시고, 우리가 죽음의 힘에서 못 벗어남을 인정케 하옵소서. 그래서 십자가에서 나온 그 죄 용서함에 합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