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13:36-43 (가라지비유의 해석)
Re..마 13:36-43 (가라지비유의 해석)
이름 : 이근호(IP:)
가라지 비유의 해석
2004년 2월 1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36-43
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13: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 같이 세상끝에도 그러하리라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창세기 1장에 보면, 천지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있습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계속해 뭔가 있게 하셨습니다. 이 능력은 도무지 인간들이 행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들이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습니까?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감탄과 공경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자연을 꾸며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합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 인간에게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지 마시오. 우리는 당신의 로봇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자존심이 있다구요"라는 투로 나옵니다.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태어날부터 그런 심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 대해서 고마움과 사랑은 이해한다고 하면서, 단지 부모라는 이유 때문에 자식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을 자식된 자가 용납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왜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존재의 자기는 어쨌든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무엘하 22:2-3절을 봅시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여기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의 자리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기 존재의 자리를 박탈 당한 것입니다.
다윗이 일부로 스스로 자신을 갱신하기 위하여 노력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들을 계속 부여받게 됩니다. 마치 자기에게로 쏟아지는 화살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자기 딴에 분주하고 그 모든 하나님의 숙제들을 처리한다고 했지만 항상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불실함과 죄악들입니다. 즉 자신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본질은 다윗에게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즉 아무리해도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다소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애초부터 하나님에게 죄인이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다윗이 알았던 것은,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반석이고 요새시오, 구원자이심으로 이미 등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는 구원된다는 사실을 그는 고백합니다. 제사나 번제나 화목제 드림으로 구원되는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못난 다윗을 구원하시는 이 능력은 어디서 온 능력입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창조할 그 당시에만 적용되고 지금은 중단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의 능력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능력은 지금도 여전하십니다. 이 능력 말고 구원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천국의 아들'은 마땅히 자신이며, 자기처럼 믿지 않는다든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모두 가라지인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딱 자신을 지칭해서 쓰여진 말씀으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차원에서도, 교단이나 종교 차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교인들은 전부다 '천국의 아들'들이요, 불교 신자들은 가라지라고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나오는 사람은 천국의 아들들이요,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은 모두 악마가 뿌려놓은 가라지로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해석 자체가 아직도 여전히 '자기 존재 바탕'을 계속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즉 여호와가 자신의 반석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의 반석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입니다. 이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 존재의 자리를 압수당한 자만이 천국의 아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자리가 사라질까봐 안절부절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찾아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온갖 신학적 지식과, 성경 지식으로 자기 머리 위에 뒤집어 씌우면서 해결하려고 하고 자기 운명을 결정지우려고 합니다. 인간이 뭔가 미래에 대해서 기대를 하게 되면 그 때까지 아직 기간이 남아 있는 지금부터 초조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내일 일을 기약하면 오늘부터 걱정이 늘어지게 됩니다. '내일 그 일이 안 이루어질까봐'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리모콘에 의해 순간적으로 눈 앞에서 사라지는 T.V 드라마로 간주합니다. 드라마에 심취해 있을 때는 마치 현실처럼 배우들과 같이 울기도하고 같이 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이 와서 막상 그 리모콘에 손가락을 눌리는 순간 그 허구적 상황은 어디론가 없어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허구였던 것입니다. 실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도 모두들 자기 존재 바탕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드라마를 연출하고 제작하고 있습니다. 자기 본위로 자기 위주로 만드는 그 드라마 안에서 같이 울고 같이 웃기도 하지만 어느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리모콘을 눌려는 순간, 그 모든 허구는 허구로서 막을 닫고 남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라는 실제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나오는 천국의 아들이라든지, 가라지라는 대상은 순전히 예수님의 손에 달린 것이지 일방적으로 '우리 자신이라고' 우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달성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간단합니다. 즉 예수님 본인이 뿌려놓은 '의(義)의 씨앗'을 스스로 되찾아가는 식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의 씨앗을 세상을 뿌려놓으니 옆에 있는 악한 천사도 자신의 씨앗을 세상에 뿌려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의의 씨앗이고 악의 씨앗인지는 지상의 인간들은 알 길이 없는 거지요.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의 활동 여부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오로지 창조 능력에 준해서 이루어집니다. 없는데서 있게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능력으로만 구원하십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행함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전혀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숙제를 자신이 행하시는 것 뿐입니다. 그 숙제가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5: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 이 말씀을 누가 손수 이루어내시는 겁니까?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겨야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됨!'이라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모든 가라지와 악마의 유혹을 뚫은 가운데 나온 고백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 존재의 반석이요 요새이며 구원자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을 뒤엎고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실천력 행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작업이 세상에 드러날 때는 반드시 '잃었다가 다시 얻은' 형식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양 100 마리가 있었는데 목자는 그 중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비유입니다.
그 다음 비유는, 어떤 처녀가 동전을 잃어버렸는데, 단지 잃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밤 새도록 찾으려고 했고 과연 찾아서 다음 날 친구들과 잔치를 벌렸다는 비유입니다.
마지막 비유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의 관심사는, 늘 아버지 곁에 있어 아에 '잃어버렸음'이 성립할 수도 없는 아드렝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렸던 그 탕자가 되돌아 오기만을 고대하는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천국의 아들이 되고 싶다고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호응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존재만 최종 고수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은 당연히 지옥가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받은 업무를 수행하는 결과로서 천지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서 구원된 자만이 천국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이미 믿고 난 뒤에서 영원토록 지속될 능력입니다. 일단 구원받았다고 그 다음 부터는 그 사람 행위의 소관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도 창조능력이요 끝도 창조능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만이 반석이요, 요새시요, 구원자이심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