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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제발 떠나소서묻고답하기-

제발 떠나소서51 손을 놓는 자지난 주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물동이를 내던져버리는 이제 나의 갈급함이 끝나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그래서 물동이가 필요없는(무덤이 필요없는) 자가 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똑같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여인의 전도(그리스도를 만났다 라는 고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로 인함이 아닌, 그 여인에게 행한 주님의 영생수를 직접 주님으로부터 직접 공급받아 마심으로 드디어 함께 ! 그 함께함이, 그 사귐이, 예수님의 긍휼 때문에, 은혜 때문에 받게 됨을, 그야말로 광야 속의 영생수, 생명수가 넘치는 천국 그 자체였습니다. 살펴보왔습니다.(그러나 니고데모와 그의 동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영접하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죽일까 라는 살인의 그림자만 맴돌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예수님의 죽음(죽은 육신-주검-무덤-시체)만 남았지 그 이후로는 더 이상의 만남과 사귐은 없습니다.)오늘은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처음 만나는 장면을 통해 주님의 세계가 어떤한지 알아보고자 합니다.우리는 니고데모가 표적을 보고 주님을 직접 만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적당한 거리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닐 것이요 예수님에 대한 정보 자료를 수집할것이고,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이면 어떠한 소식이라도 귀기울여서 들을것입니다. 지금은 당장 니고데모도 거리를 두었고, 예수님도 맞이하여 주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할수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아주 대단한 신념입니다. 한번 자기가 포착한 것은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니고데모의 신앙에 포착된 인물입니다. 아니 보통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분임을 철통같이 믿고 있었고(도박하듯 50% 50% 반 반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한 표적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절대 나올수 없는 표적임을 그는 끝까지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지금은 예수님이 날 멀리했지만, 절대로 난 예수님을 놓치지 않을꺼야 라는 신념이 그에 대한 성경 기사에서 엿볼수 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밀어 붙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인한 행함으로 끝까지 밀어 붙이는 일관성을 지닌 자입니다.(바울의 과거 때의 사울 모습과 동일합니다)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성경공부 주제 - 믿음의 사람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 히 11:38>)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참여한 바 된 자들은 니고데모 식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세계에 참여된 자들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믿음이 무엇일까요?예수님이 선택한 자는 곧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제가 말한 주님의 선택은 자기 백성임을 말하지, 12제자를 선택함 속에 있던 가룟유다는 주님 백성도 아니요 믿음의 사람도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만남을 통해 그 믿음의 세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명백하게 밝혀집니다.누가복음 5장 1-11절 내용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뭐 우리가 잔득 기대하는 그런 영웅적인 믿음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아주 간단하게 베드로는 그냥 예수님이 잠시 자신의 배를 잠깐 빌려서 말씀을 전하는 선생으로 보았고,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칠려고 베드로의 배를 잠시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저 평범한 만남이요, 자연스러운 만남이요 뭐 특별한게 오고 가고 할 것 없이 일반적인 평이한 모습 뿐입니다. 문제는 지금 부터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렸을 때 부터입니다. 앞의 그냥 자연스럽고 평이한 그 둘 사이에 서로의 각자 할 일에만 충실하던, 예수님은 무리를 가르치는 일을 했고, 베드로는 어부로써의 역할만 하던 그 모습 속에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구체적으로 직접적으로 베드로 개인에게 선포되어집니다.(눅 5:4)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신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아라.' 하시자』구체적인 명령이 떨어집니다. 명확한 말씀이 선포 되어집니다. 누구에게요? 베드로에게요.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 하십니다.여기에 베드로는 이런 댓구를 합니다.(눅 5:5) 『시몬은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써 봤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한 번 더 그물을 쳐 보겠습니다.' 하고』예수님의 선포(명령) 앞에 베드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어부로써 당연한 주장입니다. 아 거기요? 거기 제가 밤새도록 그물을 쳐봤는데요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요? 하지만 선생님이 아직 이 깊은 바다 속 사정을 모르시니 한번 어떤가 보세요. 제가 어부이지만 뭐 선생님이 원하시니 해드리지요. 아까도 던졌는데, 좀전에 해봤는데 또 던지네 뭐 할수 없지(머리 긁적 긁적) 니고데모처럼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자신이 직접 찾아왔고, 거기서 잔뜩 배우는 자세와 낮추는 자세와 잔뜩 기대하는 모습 속에서의 자세와는 다르게 베드로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별기대없이 그렇다고 피할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그냥 담담하게 바다 사정을 모르는 선생으로 취급하면서별 기대없이 그냥 그물을 던집니다. 좀 전에도 아무것도 못 잡았듯이 지금도 빈 그물만 낚을 것이 뻔하다는 마음입니다. 표적 같은 것은 니고데모에게만 해당되지(믿음 좋은 바리새인, 그 맛으로 사는 당당한 거룩한자요 의인인 믿음의 대가들), 지금 베드로에게는 빈그물을 보며는 선생님도 내 속사정을 아시겠지 뭐 이런 담담한 마음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믿음요? 지금 베드로는 믿음을 바래서도 아니요, 또 순종하는 자세이기 보다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명령에 거부할 수 없어서, 어쩔수 없이 그 말씀에 피할수 없어서 그냥 그런 입장이니 별 기대없이 하는 행동입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일체 없었다는 겁니다.(눅 5:6) 『그물을 쳤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눅 5:7)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와 달라고 손짓하였다. 그들이 와서 함께 두 배에 고기를 가득 채우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분명 베드로는 몇 번 씩이나 없음 없음 없음을 확인했는데, 예수님의 선포로 인해 그물을 던진 것 뿐이었는데, 있음 있음 있음이 오히려 자신을 위협할 지경으로 덮쳐 버렸습니다.그물도 그 선포로 이루어진(무 → 유) 고기 앞에서 감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물 뿐만 아닙니다. 그 선포로 이루어진 믿음 앞에서 배로 가라앉을 판입니다. 위협이요 위기가 닥친 겁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 배에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떻게 됩니까? 고기 잡다가 폭풍을 만나 죽을 판이 아니라, 느닷없이 많은 고기가 그물에 잡히는 바람에 졸지에 타이타닉처럼 가라앉아 죽을 판입니다.그 평이(평등)하던 만남이 순식간에 한쪽이 한쪽을 덮쳐서 죽일려는 판국이 되었고, 그 속에서 한쪽은 그 한쪽에게 종속이 되어버립니다(샬롬).(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발 저를 떠나 주십시오.' 하였다.』베드로는 왜 갑자기 예수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까? 니고데모처럼 표적을 본 것 때문입니까?(성경에서 이 부분을 기적 또는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한적이 없음 아주 이상함. 누가 발견했으면 리플 달아주세요) 지금 표적이 문제가 아니라 베드로에게는 숨넘어갈 일입니다. 갑자기 순식간에 너무 놀란 일만 보니 그 심장이 남아날 리가 있겠습니까?방금 조금전의 모습처럼 둘이 그저 평이하고 평범한 만남이 되지 못하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달려와서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는가 말입니다? 아주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욱 더 베드로의 고백은 너무나 우리와는 동떨어진 고백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에이 그냥 해본 소리겠죠? 그죠? 그쵸 ! 설마 본심은 제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가 아니라, 속으로 심∼봤∼따∼∼를 외쳤겠죠. 드디어 인생 펴지는 구나. 아 이 넘치는 행운. 고생 끝 행복 시작 ! 늘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솔직한 자세가 이런 모습 아닙니까? 만약 그런 속내의 고백이었다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대하듯 하셨을 겁니다. 결국 베드로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런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아니 이제 예수님 뒤만 졸졸 따라만 다녀도 부와 명예와 거저 먹는 인생이요, 한턱 쏘는 인생은 따놓은 당상 아닙니까?(원래 바른 표현은 떼어 논 당상(당상관 벼슬 자리))아주 이상하고 아주 독특한 고백이 아닐수 없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이 일과 죄 와 무슨 연관이 있길래 갑자기 죄인이라는 의미가 튀어 나오는 겁니까? 도대체 죄가 될만한 것이 있었나요?(절래 절래), 죄인이라고 고백할 이유가 될만한 뭔가가 있나요?(절래 절래) 왜 갑자기 죄인이라는 말이 튀어 나와야 합니까? 마치 경찰 앞에 선 도둑처럼 제발 한번만 용서해달라는 분위기 아닙니까? 도둑 놈이야 도둑 질 했으니 그렇다 치지만 그래서 죄인이니 한번만 봐주세요. 제가 도망가도 잡지 말아주세요. 제발 제발. 이런 도둑의 입장이면 이해가 되지만 도둑처럼 죄도 안 지었는데 분위기는 마치 이런 분위기니 이것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주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현대어 성경사람은 자기 이해 범주 안에서만 익숙하기에 그 속에서의 평안만 누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 이해력에서 훨씬 벗어난 샬롬(평안)이 닥쳐오면 도리어 거부하고픈 마음이 생깁니다. 그 자체가 낫설고, 부담감이요, 피하고픈 것이요, 불안함이요, 위기요, 공포요, 죽음입니다. 내가 적당히 요리하고, 주물럭 거리고, 내 손에서 펼쳐지는 믿음의 세계가 나에겐 딱 안성맞춤식 믿음이요, 눈높이 믿음일진대, 지금 베드로 앞에 나타난 믿음은 나의 원초적인 속 깊은 내막까지 다 까발려 폭로하는, 그 앞에서는 홀라당 벗겨진 내 모습으로 나타나니 베드로는 제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 안 할수 가 없었던 겁니다.우리끼리 교회에서 성전에서 믿는 그 믿음들은 우리들끼리에선 잘 통하고, 먹혀들고, 그런대로 칭찬할 만한 요소 요소를 적당히 구비해 두면, 어느 누가 시비 걸 거리 없을 정도로 문안하게 잘 넘어갈만 합니다. 여기에 이의를 다는 자도 없고, 그야말로 금상첨화 좋은게 좋은 우리들의 신앙생활 아닙니까? 그런 좋은 문화 속에 왜 구지 죄인이라는 표현이 나올 필요가 있냐 말입니다. 그것도 지금 성화의 길에 들어선 마당에 빨리 의인 되기 위해 달려갈길 바쁜데 왜 과거의 구태의연한 힘빠지는 소리인 죄인이 왜 튀어 나옵니까?구태의연 : 새로운 변화에 적응 못하고 지진하게 남아있는 모습이나 행태를 말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 발상이다. 지금 새피조물이 되어 영화롭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성화의 길에서 열심히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심을 펼쳐야 할 마당에 왜 베드로는 도리어 나를 떠나소서 라고 외칩니까? 주님을 따라가도 모자랄 판 아닙니까? 니고데모처럼 열심히 따라가야지요. 지금 날 안받아주시더라도 언젠가는 받아주실 줄 믿고 따라가야지요. 안그런가요? 이게 믿음 아닌가요?그러나, 믿음 되시는 예수님을 그는 직접 만났고 그 분의 믿음 선포를 직접 대면하였고, 그 선포 되어지는 말씀 앞에서 펼쳐지는 운동력을 그는 직접 목격해서 보았습니다. 그 결과 딱 한 고백만 나옵니다. 다른 고백이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주여 제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 앞에서 모태신앙, 나도 성경 좀 압니다, 시편 외웁니다. 이런 것이 내세울 틈이 없는 겁니다. 사람들에게는 잘 먹혀 들어도 믿음 그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 앞에선 손 놓아야 할 입장인 겁니다. 처음부터 새로 받아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무슨 재간으로요? 자기 믿음은 거짓임을 들추어졌고, 이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판인데, 아무것도 없이 싹쓸이(셋팅) 당했는데. 주님에게 홀라당 다 빼앗겨 버림을 당했는데.그동안 자기를 지켜주고, 울타리가 되어주고, 보호막이 되어주고, 수호 천사가 되어주던 그 믿음이, 참 믿음 앞에선 찍 소리를 못하니 제발 떠나달라고 할수 밖에요.참 빛이 오니 그 동안 믿음 있노라 라고 어렴풋이 빛 흉내를 내던 그 환경 속에서, 다들 길들여진 그 속에서 겨우 바리새인이 존경받고 대우 받는 그들 삶 속에서, 그야말로 참 빛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비추어 버리니 어둠이 속 속 속 안 밝혀지는 것이 없는 겁니다.앞에서 배운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과거(죄 라는 남편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는)를 낱낱이 폭로 당한 그 여인은 이제 생명을 남편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무슨 재주로요? 여인에겐 없지요, 남편이 해야 할 소관이니 말이죠.똑같이 베드로도 낱낱이 자신의 정체를 비로소 참 빛이 옴으로 다 보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 네 그의 고백은 참빛이 비추어짐으로 비추임을 당해서 나온 성령으로 인한 고백입니다. 죄인이라는 고백은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올수 없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기적이지요.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정작 만군의 여호와를 만났을때는 그는 위기 그 자체 였습니다. 그 위기 속에 살아남을 재간이 없습니다. 직접 독대하고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사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자 이들이 이제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전 없다고 봅니다. 전혀 없나요? 네 없습니다. 구원은커녕 지금 죽을 판이요 심판 속에서 타 죽을 판입니다. 어디 여기서 구원 챙기기가 나올 수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가망 없습니다. 완전 무(無) 가 된 겁니다. 믿기는커녕 나를 떠나소서, 나 다 타죽게 되고, 나 다 홀라당 벗겨짐을 당하고, 나 다 손 놓게 되니 감당할 재간이 없는 겁니다. 유에서 무로 돌아가게 될 입장인 겁니다.(사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나의 실체, 자기 따나 믿는 다고 잔뜩 방어막을 쳐놓은 그 성(울타리)이 외부에서 비추어진 참 빛으로 와르르 무너졌을때에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고, 그 죄는 오로지 외부에서 그 성을 무너뜨린 자의 긍휼만이 나의 악을 제하여 줄수 있기에 나의 소관에서 떠난 문제입니다. 무너뜨린 자도 예수님이시오, 다시 일으켜 세우실 자도 예수님 뿐입니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험(인간이 자랑하거나 내세울 경험이 절대 아님)이 바로 신랑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자기 신부에게 자기 백성에게 직접 독대함으로 직접 만남과 사귐으로 나타나고 보이시고 격도록 하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흔적(자취)을 남기시는 겁니다. 바로 요나의 표적이요, 십자가의 지혜입니다.(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이제 예수님의 소관입니다. 믿음되시는 예수님 만이 부를 자격이 되지, 우리 믿음이 우리 스스로를 달음박질 하도록 하여 따라가거나 뒤쫓는 믿음이 아닙니다.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의 전적 권한 뿐입니다.(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또 말씀 선포를 하십니다. 그 선포 되어지는 말씀 앞에서 말씀대로 덮쳐 지는 겁니다. 베드로는 이제 피할 수 없는 길을 가는 겁니다. 전에는 자신의 믿음(거룩한성전 쌓기)에서 늘 속으며 피 할수 없이 살았듯이, 이제는 오히려 반대로 믿음되시는 예수님을 피 할 수 없는 예수님에게 몽땅 다 빼앗긴 운명 속에서 이제 마음껏 손에 쥔 건축도구를 놓고 주님 손에 이끌리어 질질질 끌려 다니는 겁니다. 베드로(반석)의 주춧돌은 이제 에수님이 된 겁니다.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그는 이제 두 손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된 말씀 앞에 이젠 그물도 아비도 자신도 놓고 갑니다. 이제 예수님이 선포된 말씀으로 정하신 운명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겁니다. 고기 낚는 베드로는 이제는 없습니다. 찾지 마세요 아무리 둘러 보아도 그런 고기 잡는 베드로는 사라져버렸고 이미 없어져 버렸고 죽었습니다. 고기 잡는 시몬은 이제 죽고, 사람 낚는 베드로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바로 이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믿음으로 덮쳐진 세계입니다.주님! 주님 앞에 선 우리들의 손엔 왜 이렇게 쓸데없는 것들을 잔뜩 움겨 쥐고 있는 지요. 건축한다고 나름대로 뚝딱뚝닥 만들어 보지만 그 성전을 짓는 다는 그 열심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우리는 주님을 버렸지만 주님은 우리의 머릿돌이 되심을 다시 자복하며 영접하게 하소서. 그 주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이제 더 이상 움켜 잡을 것이 없는, 손에 잡은 그물을 놓는 자가 되게,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아 주소서 예수님이름 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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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3,735건 중 13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485 묻고답하기 Re..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세요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3-27
484 묻고답하기 Re..이 말씀에 대해 자세히 설명부탁드립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3-27
483 묻고답하기 천국이 펼치는 시위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04-03-21
482 묻고답하기 하나님 나라가 파송하는 자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04-03-14
481 묻고답하기 황명순,김휘동,김도영님께 - 최고관리자 04-03-05
480 묻고답하기 Re..이 말씀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좀 부탁드립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3-04
479 묻고답하기 Re.."우리교회", 우리교회 다녀간 이야기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3-03
478 묻고답하기 "우리교회", 우리교회 다녀간 이야기 - 최고관리자 04-03-03
477 묻고답하기 질문입니다.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4-03-02
476 묻고답하기 새 술과 새 부대 - 최고관리자 04-02-29
475 묻고답하기 목사님께서 이렇게 설교하신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요? - 최고관리자 04-02-27
474 묻고답하기 제자의 조건 - 최고관리자 04-02-22
473 묻고답하기 Re..감사를 드림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2-21
472 묻고답하기 Re.. 하관 예배 시간 변경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2-20
471 묻고답하기 이광호 집사님 부친 소천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4-02-20
470 묻고답하기 Re..야고보서 1장 18절 말씀좀 야고보서 최고관리자 04-02-19
469 묻고답하기 Re..오후예배시간을 정확히 알아야죠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2-19
468 묻고답하기 Re..성령의 이름이 있나요?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2-18
467 묻고답하기 Re..어떻게 해야 좋은지요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2-16
466 묻고답하기 어떻게 해야 좋은지요 - 최고관리자 04-02-16
열람 ➜ 묻고답하기 제발 떠나소서 - 최고관리자 04-02-15
464 묻고답하기 Re..제도에 관해 질문드립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2-14
463 묻고답하기 제도에 관해 질문드립니다. - 최고관리자 04-02-14
462 묻고답하기 50 태양을 피하는 방법 - 최고관리자 04-02-07
461 묻고답하기 휴~ 어렵네요 - 최고관리자 0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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