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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한국 교회의 타락 경로강의-

한국 교회의 타락 경로Ⅰ. 서론한국 교회의 변천은 결코 교리의 논쟁을 통해서 진행되어 온 것이 아니다. 교리 논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은 주도권 싸움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그 결과로 지금에 와서 옛날보다 교리에 깊이가 한층 더 차원이 높은 신학과 내용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깐 교계 타락을 방비할 힘을 교회 자체가 지니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세속 권력과 결탁한 취약점이 있으며 이 취약점 때문에 오히려 진리 차원의 변화를 몹시 두려워한다. 교리 수호를 위한 외침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할 때만 구석진 곳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이러한 무관심과 연구의 결핍은 총체적으로 한국 교회를 세속 종교 수준으로 주저앉혔다.이러한 한국 교회의 타락의 경로에서 일정 유형의 교회 상의 변화를 거치게 되는데 이 변화는 개 교회가 설립해서 타락에 이르는 경로와 유사하게 되는 특징을 지닌다.Ⅱ. 본론본 연구자는 한국 교회가 현 타락의 모습을 보일 때까지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았다고 본다.1. 충동형 교회상 (1907-1915)2. 현실 비판형 교회상 (1915-1930 중반)3. 자파 세력 규합형 교회상 (1930-1945.8.15)4. 세속 권력 지향형 교회상 (1945 8.15-1970)5. 자파 세력 확장형 교회상 (1970- 현재)1. 충동형 교회상충동형 교회상이란 충동에 의해서 기존의 권위 밑에서 '뛰쳐나오는 형태'의 교회상을 뜻한다.1907년 1월 6일의 집회가 시발점이 되어 자신의 과거 모습에 대한 심각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식의 집회를 통해서 예수에 관한 소식은 여러모로 전달되었다.과거의 자신과 전혀 영속성이 새로운 자기 자신을 출발해 보려는 희망을 충족시켜 주는 곳은 오직 기독교 집회밖에 없었다.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불안감이 고취되어 왔고 자신들의 본질이 뿌리조차 사라진다는 위기 의식은 딴 곳에서 새로운 자아를 다듬어야 한다는 본능을 자극시킨다. 나라와 가족 사회에 운명을 걸고 살았던 그 당시 한민족은 자기들이 의지해 왔던 확고한 기반이 무너지자 한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 내면적으로 자기 반성을 통한 배출구를 찾았다. 자기가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합리적 초월성에 모든 것을 걸고 싶었다. 인간으로서 타고난 용기와 의지와 충동을 가지고 내면의 자기 혁신을 통해서 초월적 존재 앞에 귀의함으로서 자기 고유의 의미를 확인 받고 싶었다. 자아 상실의 위기에서 예수는 자신들에게 새로운 자아상을 전수했다.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여기 사는 이유에 대해서 예수는(예수의 영이라고 일컫는 성령은) 새로운 암시를 주었다. 소위 종교 지도자들은 한국에서의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의외로 받아들이면서도 새희망의 전개라는 쪽으로 차분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새희망을 세속 사회까지 변혁시킬 수 있는 힘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이미 비현실적 탐욕은 종교운동의 형태로 타락의 전철을 밟아 나간다.한편으로 전도에 미친 듯이 매진했는데 그들이 던지는 복음이 가시적인 모양새를 남기면서 후대까지 효력이 전달되기 위해 고정되고 정착된 '능력의 기관'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이 거기서 무슨 꿈을 꾸었던가?2. 현실 비판형 교회상일단 '예수의 사람'으로 자아를 정착시킨 신자들은 그동안 자기 자신을 괴롭혀 온 세력의 실상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일종의 분풀이라고 할까? 아니면 보복이라고 할까? 무지몽매했던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복수라고 할까? 그들은 이제 이 사회의 엘리트가 된 느낌을 가졌다. 자기들은 현 정치 상황과 사회를 제대로 알고 있다. 자기들은 계몽된 것이다. 지적 우월감은 여러 사회 전반에 간섭을 하게 된다. 일단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들어간다. 그래야 자신들의 충고가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움을 사회 전반에 번져 기독교밖에 있는 자들에게 깜짝 놀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전도의 핵심과 통한다고 여겼다. 기독교 안에는 이렇게 새로움이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이렇게 새세계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절도 있고 차분하고 무절제의 흔적이 말끔히 없어진 귀품있는 태도는 기존의 귀품자 계급인 양반 혈통 집안의 비위를 거슬리기에 충분했다. 그리하면서도 교회의 하부구조에서는 '예수 신비주의' 로 전의 대 부흥 사건을 재현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온갖 신비주의라는 신비주의는 다 동원되었다. 윤리적인 반성이 발생되는 것을 궁극적인 전도 실적 삼으면서 대부분이 '예수'라는 이름이 주는 뉘앙스는 1907년의 성공 사례를 맞는 내용과 연관되어 있다. 그 때 그 무아지경, 그 때 그 집단적 반성의 현상, 그 때 그들이 나타낸 충동적 '예수 사랑', 이런 것들을 못내 잊지 못하고 재현해 날려는 것이다. 신학도 서서히 정립되면서 논쟁 기운이 일었지만 어느 신학파든지 간에 교회의 힘을 가세시키는 신비주의 운동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 부흥 집회에 들먹이는 죄의 항목을 보면 주로 상식선에서 그리고 양심적으로 그 당시 통용되는 사회 윤리 체제 안에 들어 있는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살아온 죄책감과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예수는 세상으로부터의 구세주가 아니라 너무너무 세상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의 후회스러운 무지의 세계로부터의 구세주였다. 따라서 일단 다소의 반성 기간이 지나면 자기가 속해 있는 현 정치 현실에 눈을 돌린다. 이것은 곧 신앙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위대하게 되어 보려는 의지가 밑에 깔려 있다. 서양의 발전된 문화를 접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이 무지에 잠자고 있는 이 한국 땅에서 타인보다 앞 설 수 있는 멋진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을 민감하게 감지해 낸다. 또 서양 선교사는 이러한 신자들의 출세 의지를 모를 리 없다. 선교사 그들이 벌려 온 교육사업과 의료 사업과 구제 사업은 보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세력 하에 두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더 이상 회개나 윤리적인 반성 체험이라는 그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신자를 많이 확보하는 방안인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신앙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몽으로 이어지도록 유도한 것은 기독교 입문에 대한 문호를 보다 활짝 열어 타선교사나 타교단과 경쟁에서 우위에 점하려는 처신이다. 이것 또한 타락의 절차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수준이다.3. 자파 세력 규합형 교회상박애 사업과 사회사업에 교회가 주력하는 것을 우려한 목소리는 꾸준히 그동안 이어져 왔었다. 교회의 주된 사업은 복음 전달이지 사회 변혁이나 계몽 활동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개인이 점진적인 신앙성 숙도에 따라서 자율에 일임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침도 소위 네비우스 정책에 따라 교회 설립에 나섰던 초기 교회 지도자의 입장에서 무엇이 우선되어야 나오는 소리인가 하면은 어쨌든 꾸준한 헌금 유입과 교인 증가를 전재로 된 형편일 때 한한다. 만약 교회의 헌금이 그전 만큼 들어오지 않는다든지 교인이 이탈될 때는 필히 그 원인을 조사하게 되고 그리고 그 원인을 보다 근원적인데서 부터 손질을 해 보려는 것이 본능이다.대동아 전쟁 이후 일제는 발악한다. 덩달아 공산주의 사상도 같이 발악하면서 교회의 가치를 전면 부정한다. 일제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로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코 진리를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님을 교회는 정신을 차리고 감지해야 한다. 전 국민의 75%가 논졸 사람이었고 동시에 농촌 신자들의 이유 없는 십일조에 의해서 지탱했던 교회마다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여기서 교계는 힘과 권력의 무서움을 맛보았다. 앞으로 교회가 사는 길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런 순수한 걱정을 한 인사는 몇 안된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걱정한다. 그 동안 교회 때문에 내가 살았는데 교회가 외부의 힘에 의해 붕괴되면 나는 어떻게 살지? 그래 어떻게 하든 이 교단이라는 조직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지시켜야 돼! 그러면 이런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조직이 붕괴되지 않고 유지되나?이때부터 교회는 순수한 복음 정신의 사회 적용이라든지 새 피조물 창출에 몰두하기보다는 기존의 세력의 유지와 평안을 위한 뜻을 모으기 시작한다. 지금 와서 기존의 세력이 무너진다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이 기존의 세력을 유지, 번창하는데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게 된다.첫째, 현 세력에서 누가 가장 큰 영향력을 쥐고 있는가를 파악한다.둘째, 개인적 양심 운운하는 자는 권력의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사전에 가차없이 조직에서 제 거 한다.셋째, 타교단은 다 살아남는데 우리 교단만 죽을 수 없다.넷째, 세속 권력에 대한 아부와 협조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살아 남기기 위한 특별 방도라고 여기 면서 어쨌든 지금까지의 신앙 양심과 잘 유화 되도록 설득한다.다섯째, 그 설득도 개인적인 대화 식이 아니라 조직의 강권적이고 질서 차원의 권위로 시행한다.위와 같은 취지로 한국 교회는 교단 적으로 앞 다투어 신사 참배 및 군국주의에로의 헌신적인 협조를 선언하고 만다.이쯤 되면 하나님 나라는 교회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자기가 소속해 있는 집단의 안녕과 발전을 위하여 예수라도 언제든지 버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한국 교계의 핵이며 이 정신 자세는 이미 일제 말기에 교계 깊숙이 생리화 되어서 자리잡고 있다. 겉으로는 늘 예수 사랑만 외칠 것 같은 교회가 이런 식으로 타락한 것은 교회 성장을 목표로 한 신학을 했지(예를 들면 민중의 한 풀이와 연관된 부흥 운동이나 기도 운동 '진정한 자기 뜻 포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이나 주일날은 특이한 날이라는 인식과 십일조라는 강제적 헌금같이 정규적이고 고정된 종교 규칙 속에서 자동적으로 구원을 만들어 주려는 마술적인 시도 같은 것)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탄압이 왔을 때도 기뻐할 수 있는 신학을 교인들에게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이용도나 그 이후의 김익두의 부흥 운동 속에서 현실 타파의 정신이 전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신학은 자기를 부인하는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신격화하는 신학이었다. 병이 낫고 죽어서 좋은데 갈 수 있다는 신비 세계로의 도피라든지 곧 일제가 망한다는 예언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자아 도취적인 환상이지 결코 현실적인 신학은 아니었다.현실적인 신학과 환상의 차이는 항상 옳고 그름의 분명한 분별력에서 나와야 하지 자기의 이권과 연관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어야 한다.환상과 감각적인 위로로 겨우 겨우 교인들을 달래 주던 교계가 스스로 자기 밑천(?)이 떨어지면 그때서야 본색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그런 위기의 기간을 제공하신 것은 자기 반성할 기회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조차 반성은커녕 갈수록 조직화되고 조직의 질서와 권위에 호소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드디어 그것은 애초부터 교회가 아님을 이 민족에 스스로 공개한 셈이 된다.4. 세속 권력 지향형 교회상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권력의 공백이 찾아왔다. 그동안 자기네들에게 압박을 가해 오던 세력은 바다 건너 물러갔다. 새로 찾아온 세속 권력은 이 한국 땅에 존재하던 세력이 아니기에 모든 것이 어설프다. 이 어설픈 권력 조직 구조를 국내 사정에 밝은 인사가 이용하지 않으리요! 백성들은 정신적인 안정과 새로 들어서는 정부에 호응하는 백성으로 유화 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나서면서 권력에다 발을 들여놓는다. 정부 안정에 특급 공신으로 자처하면서 어떤 반대 급부를 노리는가? 그것은 권력의 맛이다. 그동안 타국의 권력 밑에서 아부하면서 세력을 전전긍긍 유지해 오던 세력들의 눈에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멋있는 뭉치인지를 절실하게 체험해 온 터이다. 그 전진 전능한 권력의 맛! 무엇이든지 내 손안에서 놀게 되는 권력의 맛! 이 반대급부를 노리면서 그들은 자기 세력들을 신속히 정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제시대때 상대적으로 박해를 받은 쪽은 박해를 했던 자들의 변질성을 공격하면서 자신들의 세력 규합의 빌미로 이용했고 반면에 일제 정권에 아부했던 자들은, 그나마도 기독교를 유지해 온 것은 자신들의 현명한 처세술 덕분이라고 자기 공로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사이다. 지금부터가 문제이다. 누가 기독교인 대통령의 눈에 드는가가 문제이다. 이것은 보다 많은 권력의 혜택을 자파 세력이 연결되고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겉으로 큰 세력임을 보여서 그것으로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또 이 작업을 위해서 보다 많은 자파 교직자를 배출해야 한다. 그래서 급조한 신학교가 여기저기서 세워지기 시작했다. 모두 다 유구한 전통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면서!역시 고위층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따라서 남한에서 투철한 반공주의자들은 역시 월남한 기독신자 중심이 된 세력이 가장 권력층에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들은 권력층의 보호를 받고 또 그들은 권력층이 무슨 짓을 해도 입을 다문다. 상대적으로 남쪽에서 일제와 대결했던 세력은 자기가 상대했던 일제의 가치 저하로 그 공로가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권력층에 선이 닿을 수 없었다. 또한 권력층은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로 부지되는 권력이었다. 미국은 한국 내의 교회 번창에 내심 마음 두고 있었다. 물론 타종교에 경쟁해서 말이다. 많은 미국 원조들이 교회라는 창구를 통해 전달시킴으로 한국민 전반에 걸쳐 교회 이미지를 좋게 심겨 주는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개인적으로 심적인 불안을 느껴 종교를 선정할 때 자기네들에게 호의적인 교회의 문을 열게 된다. 특히 6.25 동란을 거치면서 미국의 구호 사업이 고아나 어린이들에게도 큰 비중을 차지하자 한국민은 어릴 때 꿈이 여무는 시절에 분홍빛 장미처럼 느껴진 그 교회 내에서의 크리스마스 행사를 잊지 못한다. 인간이란 어릴 때 설정한 꿈을 향해 성장의 노선을 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릴 때 교회에서의 사랑은 커서도 잊혀지지 않는 고향 같은 것이다. 언젠가는 돌아오게 될 고향 말이다. 교회란 한국민 개개인에게 이상향 중에서도 가장 높은 천국의 자리를 일찍 감치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 낭만이 현세대에서 복음의 정신을 전반적으로 안개처럼 희석케 된 것이다. 이것이 또한 타락의 과정 가운데 하나이다. 이 비현실적인 꿈속의 천국, 얼마나 이때가 오기를 기다렸던가! 교회는 여유 있고 안정된 가정의 정신적 놀이터로 변했다. 거기에 사교가 있고 교제가 있고 웃음이 있고 나의 마음 깊숙한 스트레스를 풀어 줄 마음 맞는 이웃이 기다린다. 늘 오락적인 요소와 젊은 후세들에게는 음악과 유희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 있는 곳, 자! 이것이 과연 고난 속의 하나님의 나라인가 아니면 멋진 인간 나라인가?5. 자파 세력 확장형 교회상5.16때 혁명 정부는 미국의 제가를 받아 내었다. 앞으로의 군정에 있어 반공이라는 미국의 외교 정책의 핵심은 반 공산주의, 소련 세력 확장의 견제에 따른 역할과 중요한 방패 맞이로 자청하면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발전의 전기로 삼는다. 자급자족의 경제에서 수출 위주의 경제 정책은 생산된 물자를 한껏 소비해 줄 미국 시장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산업 시설 투자에 필요한 차관도 미국이 묵시적으로 배후 세력으로 작용했기에 원활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호조건을 이용하여 집중 투자에 의해 저 단가 물자의 생산이 국제 시장에서 보기 좋게 먹혀 들어갔고 한국의 낙관적인 경제 성장을 내다보고 보다 많은 외국자본이 국내 산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저 단가 정책에서 저임금 정책이 주된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재벌 주도형 경제 시책은 국민들에게 큰 것이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우리도 잘 먹고 잘 입고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부여했다. 즉 이제부터는 못 살면 죄이고 잘살면 선이 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노력은 곧 잘사는 길이며 잘사는 것이 선이 되니 노력이 곧 선이 되는 이 집단적 의식이 국민의 체험적으로 간직하게 되는 진리처럼 통용되었다. 물론 전 국민이 이런 선악의 개념을 가지도록 강요한 것은 정부의 홍보 덕분이다. 그리고 이 홍보가 계속 먹혀들 수 있게 된 것은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똑같은 지시와 암시가 공포 분위기 속에서 그리고 권력층에서 계속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이러한 경제 최고주의의 진리관을 놓치지 않고 종교사업화 시킨 세력이 갑자기 부상했다. 안일에 빠져 있다가 허를 질린 기존의 보수 세력들이 크게 당황했다. 이 신진세력이 어떻게 해서 대중들에게 잘 먹혀 들어갔나를 분석해 보니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고 각종 질환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교리를 사용했다는 점을 파악했다. 그동안 무사 안일하게 권력층의 무관심과 옛날 낭만적인 교회 의식으로 고정펜(?)을 확보하던 보수 세력에 비상이 걸렸다. 자기 세력 확장에 그동안 무심했다는 자기 반성을 한 것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이제는 권력층과 교류하기보다는 대중들이 원하고 있고 소원하고 잇는 바를 들어 줄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교리만 붙들 입장이 못되는 것이다. 우선 바른 교리 수호는 뒷전으로 하고 지금 대중들의 눈에 무슨 환상이 들어차 있는가를 조사했다. 그것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빌딩과 건설 붐과 산업 시설의 번창이었다. 바로 대중들은 바른 것 보다 큰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보수 세력들은 그 큰 것을 좋아하는 대중들의 환상에 발을 맞추어 보다 큰 교단이 되기 위해 신학교를 확충하고 신학생을 대폭적으로 늘렸다. 출신 신학생의 증가는 곧 자파 세력의 확충과 관련된다. 이 증가도 이제는 미친 듯이 각 세력끼리 경쟁적으로 일어난다. 동란 이후 교리 문제로 큰 갈림이 있었던 보수 교단도 이제는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큰 세력이 문제가 되었다.(큰 모임이 덜 위험스럽다는 취지 하에)어떻게 하면 좀더 대중들의 심리에 비위를 맞추어 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교회로 오게 할 수 있는가? 교회 성장학이 때를 맞추어서 등장하고 큰 것을 좋아하는 한국민에게 항상 대 규모 집회를 통해서 기독교 세력의 힘의 위대성과 우위를 확인시켜 주는 행사도 잊지 않고 여름과 부활절마다 일어났다. 상대적으로 정치의 정의, 경제의 불 균형을 언급하던 세력은 위축되게 된다. 그래서 그쪽 출신 목회자들도 막상 교회를 열어 놓고서는 얼치기 신비주의를 상품으로 제공하면서 교회 성장 주의로 치닫는다. 역시 큰게 힘이 되고 발언권도 있더라는 현실 생리에 적극적 맞추어 나가는 지금의 한국 교회의 상황, 그 배후에는 목회가 곧 밥벌이가 된다고 믿는 저질 목회관이 최대의 공헌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그런데 드디어 광주 사태 이후 정권의 성격도 국제 시류에 영향을 입어 서서히 변신하게 되자 성경으로 돌아가서 바른 진리를 탐구하는 세력들이 대학생을 통해 번지기 시작했다. 교리에 올라타고 한 평생 밥벌이로 목회 하려는 목회자들과는 달리 고개를 저으면서 성경의 바른 진리에서 자신의 영적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교회에 서서히 번지고 있다. 그들의 호기심을 옹호하기 위해 계속해서 외국 책이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자 사태는 더욱 더 거세진다.여기에 기존 세력들은 큰 예배당과 큰 돈이 모이는 경제적 안정성을 마지막 보류로 삼고 카르텔 형식으로 서서히 초교파적으로 규합하기 시작한다. 물론 각가지 명칭을 붙이고서.돈 없는 순진한 진리 추구파와 돈이 남아 주체를 못해 계속 부동산 쪽으로 돌리는 기존의 보수 세력의 갈등은, 보수 쪽이 선교라는 환상의 미끼를 던짐으로 진리 추구파의 비판의 예봉을 면해 보려고 애씀으로 일단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즉 선교비를 마련해서라도 교회는 무한정 커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 선교하게 한다는 것이다.얕은 성경 상식으로 공격을 노리는 진리 추구파는 비판의 표적을 놓쳐 버리고 허탈에 빠졌다. 그리고 곧 그들 또한 보수 세력의 전철 밟기 시작한다. 적당한 윤리와 양심 선에서 하나님 나라와 타협을 시도하고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타락이라고 보지 않고 안정된 것이라고 이해하려고 한다.이는 그들의 문자적 진리 탐구가 스스로 한계에 도달되었음을 의미한다.Ⅲ. 결론교회가 도대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그것은 진리가 어디에서 중지가 되었는가와 연관있다.한국의 전반적인 교회사는 마치 오늘날 한 개척 교회의 등장과 유지와 타락의 경로와 동일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부터 무엇을 위해 나섰느냐를 기지고 마지막이 된다. 왜냐하면 본질이란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명백하게 잘못되어 가는 한국 교회를 보면서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만큼 부흥, 발전되었다고 자찬하는 목소리는 분명 성경에 근거한 목소리는 못된다. 왜 성경의 진리대로 못 돌아가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예수님 앞에서 되돌아간 부자 청년에서 찾을 수 있다.오! 부자 교회된 타락한 한국 교회여!'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 다 쉬우니라'(마태복음 19:24)돈만 낸다고 선교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교하려는 교회 자체가 과연 '돈'을 전달하려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삶'을 전달하려는지 결정해서 만약 '그리스도의 삶'을 전달하는 선교가 되고자 하면 그 정신 하에 사는 자만 선교사를 보내어야 한다. 이 판단은 교인 각자가 해야 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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