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종류의 밭 2004년 1월 1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18-23
Re..마 13:18-23 (네 종류의 밭)
이름 : 이근호(IP:)
네 종류의 밭
2004년 1월 1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18-23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합격이란 참 좋은 경우를 말합니다. 대학 입시에 합격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합격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대한 합격입니다. 천국의 합격자는 어떻게해서 배출될까요?
우선 천국이 어떠하길래 모든 인간이 다 천국에 합격자가 될 수 없는가 하는 점부터 알아두셔야 합니다. 천국은 유대 나라가 먼저 학수고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옛날 다윗의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왕을 보내셔서 이 세상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리라는 희망과 소망을 그들은 한시도 포기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분명히 모르기에 그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주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웬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선지자의 외치는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3: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심인지 아니면 기대감인지 모르지만 세례 요한의 말에 일단 동의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를 대비해서 미리 죄까지 씻는 의식인 물세례를 선지자 세례 요한의 손에 맡겨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신다는 메시야의 몰골은 그들을 실망시키기에 넉넉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줄 선물 보따리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만 믿으라, 나만 따라오너라"라는 투였습니다. 물론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의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러나 그런 스캔들을 이르킨 자가 한 둘이 아니기에 과연 참된 선지나냐 메시야냐 하는 바는 율법에 정통한 성직자들의 유권해석에 달린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의 권위는 역시 여전히 유대 성직자 그룹에다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린 평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유대 성직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배겨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 당시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여지간 하면 예수라는 작자도 고집 그만 부리고 성직자들과 타협의 손을 잡아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그런 의사가 있었을까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로 나섭니다. '당신네들은 마귀 자손이요"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그 이상의 내용을 본 비유는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약속되어진 구원될 자는 오직 '남은 자'에 국한된다는 이 원리를 예수님을 유감없이 그 시대에 적용시키고자 하시는 겁니다.
'남은 자'란 이사야에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대부분이 구원의 자리에 탈락되어지는 현상을 두고 말합니다. 즉 천국문에서 서성이며 천국문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려진 천국문에 도리어 깔려서 멸망당하는 경우을 전제로 할 때만 비로소 '남은 자'라는 그룹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은 자'란 심판이 맹렬하게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집단입니다. 세례요한 천국을 운운할 때도 필히 심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성직자들을 보고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천국 가느니 차라리 길에 돌멩이가 천국간다"는 폭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길에 아무렇게나 무심하게 존재하는 돌멩이를 통해서 현재 성직자들의 구원탈락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다소나마 성직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미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한 발언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경우, 네 종류의 밭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시므로서, 애초에 구원될 그 어떤 기미조차 허락된 적이 없음을 강하게 시시하시는 겁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는, 그 씨를 받는 4 종류의 밭은 참으로 무심하게 그냥 존재해 있을 뿐입니다. 적극적 나설 하등의 여지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밭은, 자신이 어떤 밭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본인에게도 은폐되어 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천국의 씨앗이 떨어져봐야 자신이 어떤 종류의 속성이 지녔는지가 밝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밭의 특징입니다.
밭은 떨어진 씨에 의해서 그 결과를 그냥 보여주고 증거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밭의 성질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소개에 보면, 분명 밭은 나름대로 몸부림치고 애쓰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역한 인간의 본능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뭔가 이들은 누구로부터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첫째 밭은, 악한 자가 방문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가 왜 이들을 찾아옵니까?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 것의 가치를 악한 자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들에게 뿌려진 것이 악한 자의 운명을 절단낼 힘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방문한 유형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비록 악한 자의 방문을 그들이 짐작들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밭'입니다. 밭은 타인에 의해서 유린 당하면 당하는대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무능력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둘째의 유형도 마찬가지입니다. 돌밭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는 잠시 즐거웠으나 난데없이 그에게 환란과 핍박이 덮쳐지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그 환란을 이겨낼 만한 자력이 발동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그런 유형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왜 미리 환란이 쳐들어 온다든지 아니면, 아예 충분하게 즐거움의 시간을 가져서 그 즐거움을 나름대로 축적하려는 노력이 감행하려는 그런 시간적 여유도 없이 환란이 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기어이 그 자를 탈락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굽힐 수 없는 애씀이 있었기에 생겨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잠시라도 말씀으로 인한 즐거움을 주지를 말든지 해야지만 왜 맛만 잠시 보이시고 잘라내기는 단호하게 잘라내시는 겁니까? 그것은 천국의 씨란 인간들의 관리 수완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변에 참으로 이런 분들 많이 생겨납니다. 복음에 대해 반응이 갖게 되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지요, "됐구나 천국 고기 한 마리 낚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난데없이 본인이 감당 못할 환란과 핍박의 태풍과 지진이 덮쳐버리면, 언제 말씀이 남아 있었던가 하는 양으로 바짝 말라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을 주위에 보시거든 주께서 천국에 안넣어 주시려고 일부로 그런 일들을 실시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유형은,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버려서 결실치 못하는 유형이라고 예수님은 평가내리십니다. 환란과 핍박과는 반대성향을 지닌 방해물이지요. 일단 기분좋은 방해물입니다.
말씀을 듣고 갖는 것보다 더 기분좋은 내용물이기에 '유혹'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 유혹은 스스로 자신을 살려내어 보려는 것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를 유혹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당연한 태도처럼 인식들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십니다. 그런데 왜 살아야 합니까? 왜 꼭 살아남아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유도 없이, 목적도 없이 왜 살아남아야 합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우선입니다.
존재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은 거친 인생살이를 하면서 그저 일순간 스쳐지나가는 기분 전환용에 불과합니다. 한 예를 들면, 살기에 바쁜 일과 속에서 야외로 드리이브하는 와중에 순간 청초롭게 피어있는 들국화를 보았다고 칩시다.
참 아름답지요. 그 청순한 아름다움에 흠뻑취하고 싶지요. 새로운 신선한 세계에 몰입하고 싶은 유혹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바이어로부터 물건 주문 전화를 받는다면 황급히 차를 다시 도시쪽으로 몰게 됩니다. 아름답다고 여기고 꺾어놓은 들국화도 2Km도 못가서 창문 내리고 갈가에 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사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다급하고 심각스러운 문제가 또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좋고, 교회도 좋고 아름답지만 그런 것들은 인생이 한가로울 때나 찾는 멋진 장식거리에 불과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이요, 살아있기에 또 살아야 한다는 절갑함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기고 천국에 합격한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는 말입니다.
특히 젊은 분들에게 있어 인생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직 인생의 맛도 못하고 꽃봉오리도 채 피지 못했는데 죽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런 말씀 마세요"라고 나옵니다. 물론 연세많은 신 노인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이제 죽을 마당에 도달해서, 산다는 거 자체가 귀찮고 번거럽고, 시시하고, 부담이 되기에, 임종시에 자녀를 앉혀놓고 쉽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애들아. 너희들이 신앙생활 잘해라"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젊은 자식들은 은근히 불쾌하지요. "당신께서는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보았지만 아직 저희들은 제대로 맛도 못보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어쨌든 생활에 대한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으로 인해 정작 결실을 맺어야 될 씨는 그 밭에서는 죽어가게 됩니다. 외부에서 결실을 못맺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본인의 독한 생존 의지가 주어진 천국의 씨도 없어버리고 그 길도 지워버리고 뭉개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악마를 이기고, 환란과 핍박을 이기고, 재물의 유혹도 마다하고 생존에 개의치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자가 누가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남은 자'의 비밀이 나타나는 겁니다.
'남은 자'란 심판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현장에서만 나타나는 겁니다. 악마로 하여금 말씀을 빼앗게 하고, 환란이 들이닥치게 하고, 생활고로 인한 걱정과 돈의 유혹으로 심판을 감행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이런 것을 이길 위인이 없음을 확실히 해두는 겁니다.
남은 자란, '자기 행함'으로 구원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로 구원받을 자들입니다. 밭은 그 특성상 자력으로 자신의 성질과 속성을 수정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씨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를 보고 "자신이 옥토이구나" 라고 파악할 뿐입니다.
이 말은 곧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남게 되는 '남은 자' 가 따로 있다는 것이 이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로마서 11:5-7에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으로 심판 작업에 나서십니다. 이것이 곧 움직이는 천국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이 심판의 원리가 곧 우리들을 은혜로 구원하시는 원리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