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4" 1-4 (체포 된 사도)
Re..행 4: 1-4 (체포 된 사도)
이름 : 이근호(IP:)
체포 된 사도
2004년 1월 14일
본문 말씀 : 사도행전 4:1-4
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4: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4: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람들은 제각기 사건을 일으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파트에는 서로 다른 가정들이 서로 다른 인생을 갖고 살아갑니다. 밤에 보면, 어떤 가정은 오순도순 사는 반면에 그 윗층에 사는 가정은 어느날 큰 부부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모두 자기만의 사건들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사건들 가운데 어느 사건이 이 우주의 중심점에 해당되는 사건이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어느 분이 몸이 아프다면 그 가정이나 교회 내에서는 관심을 가져주지만 수백 Km 떨어진 외진 사람은 아무런 관심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각자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고 자기 일들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사건, 즉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체포되었다는 이 사건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요?
어떤 불신자가 높은 산에 등산가서 산 아래 도시를 내려다 본다고 칩시다. 그 도시 가운데서는 교회 나가는 사람도 있고, 절에 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 입장에서, 그들이 뭘 믿든, 무엇을 신봉하든 다 부질없는 짓거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 너희들이나 열심히 믿고 죽어서 좋은데 가거라. 그것도 좋∼은 취미생활이지. 그러나 위에서 이렇게 내려다 보니 인간들이 뭘 하든지 다 똑같다는 것을 너희들이 짐작이나 하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뭘하든 똑같습니다. 그런데 찬송가 268장 2절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 세상 구하려 주 돌아가신 것
나 증거하지 않으면 그 사랑 모르리"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그 똑같은 인간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등장했습니다. 즉 이로서 인간 세상에 진짜 중심점이 비로소 등장한 것이 됩니다. 인간의 모든 사건은 공평하게 똑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터지는 경우만은 특별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특별한 사건이 발생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의 사건이 바로 그 사건입니다. 사도가 체포된 이 사건은 그 당시 역사책에 나오지도 않는 사건입니다.
아마 오늘날에 일어나도 신문에 나지도 않을 시시한 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 가정마다 각자 중요한 사건들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건을 통해서 전달된다면 이 사건이야말로 그 순간 최고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둘로 짜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는 것과 둘째로는 그 소식을 당시 권세자들이 듣기 싫어했다는 겁니다. 듣기 싫어하는 것이 무어거리 중요한 내용이 될까요? 과연 우주의 중심이 될 정도로 중요한 내용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달케 하시고 그 복음 전달되는 현장의 주변상황까지 고려해서 복음의 내용으로 잡아넣습니다. 좀 더 구체적 전말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취지 안에서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13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죄인을 부르는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죄를 알려면 먼저 죄 지은 자가 있어야 겠지요. 그 자가 바로 아담입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범죄가 터지면 그 한가운데는 죄를 이르킨 범인이 있게 마련이고 형사 반장은 그 범인의 죄와 범인을 추적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조상 아담은 죄를 범했습니다. 곧 아담이 범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작업은, 아담의 죄가 어느 정도인가를 추적하는 일이겠지요. 그 추적의 대상이 결코 아담 당사자의 일생에서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뻗혀집니까?
바로 아담의 모든 후손까지 다 뻗혀집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그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추궁은 아담의 긴 꼬리에 해당되는 우리들에 심문이 필수적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우리의 죄를 지적하게 됩니까?
만약 태어나면서 유아들이나, 아니면 출생해서 한 번도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도 아담의 죄를 추궁받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것을 근거로해서 인간의 죄를 밝혀내십니까?
바로 여기에 십자가와 부활의 도가 요청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19에 보면,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오직 하나 십자가의 도를 그들 앞에 들이 댈 때 뿐입니다. 제가 처음 말씀드렸듯이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각가지 사건들을 접하게 됩니다. 뿐 만 아니라 자신도 사건을 만들어서 남들의 사건과 섞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누구의 사건이 더 특별하고, 누구의 사건이 더 못하다는 특별한 기준이 이 세상에서는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우선 각자 자신의 사건이 최우선적으로 중요시 여기고 거기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우는 그 순간에도 어떤 사람은 웃고 있습니다. 어떤 집안에서 장례식으로 치르는 그 순간에도 어떤 집안에서는 결혼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들의 일에 충실하려고 하고 그것으로 자기 인생을 삼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동원되어야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남들과의 경쟁에서 밑지지 않는 실력을 길려야 하고 힘을 모아야 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지혜요 총기가 인간 사회에서 우대받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일의 규칙은 바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원리입니다. 여기서 과연 문제는 '죄'가 뭐냐 하는 겁니다. 만약 총기가 넘치고 지혜가 넘치는 사람보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죄인이지요?"하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극구 부인할 것입니다.
"나의 이 지혜와 나의 이 총기로 인하여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깨끗하고 조심스럽게 살아왔는데 이제 날보고 죄인이라니 무슨 소리냐"하면서 펄쩍 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모습이 범인인 아담의 죄가 여전히 발휘되고 있는 광경입니다. 즉 아담의 죄가 뭔가 하면, 하나님 중심에서 보는 선과 악은 모르고 자기 지혜와 총기 중심으로 선과 악으로 규정하는 그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죄를 바로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도 제대로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보내어 제대로 죄를 들추어내는 기준을 던지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역할은 인간의 모든 지혜와 총명를 묵사발 만드는 겁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버티고 살아왔던 모든 것이 죄 덩어리에 불과함을 지적하는 하나님의 전도 내용입니다.
만약 어떤 이가 고백하기를, "그래, 지금까지 내가 헛살았구나 내가 천하의 죄인인줄도 모르고 그동안 나의 지혜와 총기를 믿고 버텨왔구나"라고 감탄하고 인정하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처럼 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도를 매우 싫어하고 거역하는 현상도 일어난다는 겁니다. 평소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으면서 인품이나 인격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겸손하고 온유한 심성을 드러내던 사람도, 이상스럽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의지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이 소식에 대해서 벌컥 화를 대면서 매우 싫어하는 기색을 역력히 보여주게 됩니다.
그동안 진짜 죄를 고이 고이 숨겨 왔다가 복음을 전하는 그 사건으로 인해 발각되어 버린 사례입니다. 바로 이러한 복음 사건만이 하나님보기기에 특별한 사건으로 간주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사례는 그당시 사도들 뿐만아니라 지금도 계속 됩니다.
그 현장 중앙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아는 성도를 세워 놓습니다. 물론 불신자들이 보기에 우리가 복음 전하는 사건이 시시한 전도 사건에 지나지 않는 일로 보겠지만, 아까 불렀던 찬송가 가사처럼, "이 세상 구하려 주 돌아가신 것, 나 증거하지 않으면 그 사랑 모르리"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무엇이 중요한 사건이지 무엇이 중요하지 않는 사건인지를 구분하며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원해서 우리가 살고 있고, 또 복음 사건이 우리 중심으로 터진다는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986-0172, 010-3511-0172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copyright ⓒ 우리교회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