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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43강-삼하19장16-19(살고자하는마음들)-2sa100822-(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사무엘하

043강-삼하19장16-19(살고자하는마음들)-2sa100822-(이 근호목사)

이름 : 이한례(IP:119.148.121.61)

043강-삼하19장16-19(살고자하는마음들)-2sa1008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9장 16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96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9:16-19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일천명이 저와 함께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 다섯과 종 스무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하여 요단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왕의 가족을 건네려 하며 왕의 선히 여기는대로 쓰게 하려하여 나룻배가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줄 아옵는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아멘

20절까지 보았습니다. 19장 뒤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길기 때문에 여기 짧게 한 가지 경우만 이야기 했는데, 사실은 다윗 왕이 다시 권력을 찾아서 내려올 때에, 여기에 세 종류 경우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방금 읽었던 ‘시므이’란 사람, 이 사람은 옛날에 다윗이 권력을 다 날려 보냈을 때, 빈 깡통 되었을 때에, “그래 니가 사울의 집안을 그렇게 힘들게 해놓고, 니가 잘 될 줄 알았느냐? 어, 이 저주받은 자야, 꼴좋다, 그래, 니 자식한테 그렇게 배반당해 기분 좋지? 닌 당해도 싸” 저주 받으라고 저주의 욕을 퍼부었던 그 작잡니다. 그 작자예요.

요런 경우 있고, 두 번째 경우는 그담에 24절에 ‘므비보셋’이란 사람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그동안 다윗의 혜택을 듬뿍 받았어요. 사울의 족속인데, 사울 집안인데, 전임 왕가에 속한데, 다른 사람은 다 죽여도 ‘므비보셋’은 다윗이 곱게 키웠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과 약속한 게 있어가지고, 요나단 아들이기 때문에 키워줬는데, 다윗이 어려움을 찾았을 때 전혀 보탬이 안됐어요. 와서 다윗이 어려울 때 양식도 주지 않고, 그냥 자기 집에 떡 앉아 있던 사람입니다. 와가지고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종이 속여가지고 내 먼저 후딱 가가지고 이렇습니다. 이제 왔으니까 이제 다시 복권 되었으니까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 라고 한 사람이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 이예요.

세 번째 사람은 31절에 나오는데, ‘바르실래’란 사람인데, 이 분은 노인네입니다. 연세가 많은 분이예요. 인생은 팔십 세라. 지금은 팔십 세 같으면 청춘이지만, 그 당시는, 노인네가 돌아가실 나인데, 이 사람이 다윗이 어려울 때에, 많이 도와줬어요.

저, 여자 분들이 남자하고 연애한다거나 결혼 말이 있을 때, 항상 묻는 것이 그거거든요.

내가 어려울 때, 남자 당신이 나를 어떻게 지켜줄 것인가 물어요. 그럼 남자는 짜증나는 거예요. 어렵지도 않은데, 어려운 상황이 발생되지도 않은걸, 일부러 만들어서 묻는단 말이죠. 물에 빠졌을 때, 엄마하고 내하고 둘 중에 누굴 건지겠냐? 그걸 자꾸 묻는데.... ㅎ

왜 물에 빠진 경우를 억지로 만들어 내는지, 남자는 짜증나 죽습니다. 하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입에 발린 “사랑한다, 좋아한다, 이쁘다, 뭐 그 소리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내가 아플 때, 어려울 때, 내가 힘들 때, 당신 내 곁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고, 나를 위로할 수 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면 어렵지 않은 경우에는 말 한마디 해주면 되죠. 근데 실제로 어려운 거하고, 말로 하는 거하고 다르죠. 어쨌든간에 여성은 사랑이란 말을 어떻게 담느냐하면, 내가 어려울 때, 내 몸이 아플 때, 외로울 때, 누가 나의 외로움을 들어 주냐 말이죠. 내가 힘들 때,

그것을 인간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다윗을 찾아온 세 사람 다 다윗에 대해서 다윗이 어려웠을 때 도와준 거예요.

그 첫 번째 사람 ‘시므이’란 사람은 어려울 때, 혹시나 해가지고 욕을 했던 사람이고, 권력을 회복하고 난 뒤에는, 가만히 보니 지가 불리하거든요. 지가 욕을 했으니까, 이제는 자기 모가지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사전에 또 대처한다고 와서 살살 빌면서, “제가 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한번 용서해 주세요. 라고 먼저 달라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 번째 ‘바르실래’ 라는 노인네께서는 그동안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다윗이 하는 말이 “나와 함께 남은여생을 호강하시며 살아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까, 그 ‘바르실래’라는 이 분이 하는 말이 ”이 나이에 호강은 무슨 호강, 그냥 고향에서 그냥 조용히 살랍니다. 그냥 6시 내 고향 거기서 나오고, 그냥 조용히 살지, 이 나이에 내가 서울 가가지고 아이고, 복잡한 데 갈 거 없다. 고만 내 혼자 살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도와 준 것은 도와 준거고, 도와 준 것에 대해서 꼭 구태여 댓가를 내가 받아 내겠다는 것은 그것은 다윗 왕의 위상에 맞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도와준 것 뿐이지, 제가 보상받기 위해서 그 일 한 게 아닙니다. 마땅히 도와 줘야 될 분이기 때문에 도와준 것뿐입니다. 라는 세 번째 경우가 나온다 말입니다.

세 번째 경우를 보면서 오늘 본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왕의 처분”입니다. 왕이 그 세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처분하느냐 하는 문제죠. 그런데 이 셋 중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됩니까? 라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이 셋 중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성경에서는 인간이 육신적인 행위와 그리고 언약을 갖고 있는 다윗과 육신적인 행위의 부딪힘이에요. 만남이죠. 만남 속에서 아, 이렇게 이렇게 나오시면 복을 받겠구나, 아, 이렇게 나오면 저주를 받겠구나. 하는 그 원리 원칙을 찾으려고 자꾸 시도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그렇지 않아요. 제가 신약을 읽어 드리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처신하나 해 보세요. 마태복음 21장 42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44절에 보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이게 신약입니다. 구약에서는 “다윗 왕이 계시다. 어려울 때 도와줘야지, 그래, 사람이 사랑이라는 것은 어려울 때 도와줘야지 사랑이지, 배부를 때 도와주는 것은 그건 흥정이고 동업이야. 그건 아니야” 라고 인간이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하지만, 구약은 사람이 움직이지만, 신약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분이 움직여요. 돌이 움직인다니까요. 돌이, 사람들이 “ 이거 돌맹이 아냐? 이거, 쓸데없는 돌맹이, 돌맹이가 왜 집안에 있어! 돌맹이 갖다버려!! 라고 사람들이 쓸모 짝 없다고 버린 돌이, 사람들이 일단 그 돌을 버려야 되고, 그 버린 돌이 스물스물 움직여가지고, 버린 돌이 우리머리를 탁 칠 때, 요게 신약입니다.

버리는 것은 구약이고, 버림받은 돌이 도로 우리에게, 버림받은 자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치는 것이 신약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방금 제가 어려운 말 했습니다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구약은 내가 움직여야 되고, 신약은 예수님이 움직여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가만있더라도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의 속내가 완전히 뒤집어지죠.

농사 질 때 쟁기 가지고 뭐합니까? 겉에 있는 흙을 안쪽에 집어넣고, 안쪽에 있는 흙을 겉에 놓잖아요. 이걸 뒤집잖아요. 뒤집어 놓잖아요. 마찬가지로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가만히 있는 우리에게 찾아와서, 말씀이 뒤집어 놓는 역할을 신약에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이 정답일까요? 신약이 정답일까요? 신약이 정답이죠. 구약은 그냥 문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문제만 발생시키지 해답은 없어요. 그 해답을 신약에서 찾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가서 있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가만히 있는 ‘시므이’, ‘므비보셋’, ‘바르실래’의 마음을 다윗 쪽에서 움직여서 그들의 속에 있는 마음을 뒤집어 놓았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 중에서 앞에 있는 두 사람은 권력 앞에서 “나는 살아야 되겠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살아남는 게 OK이다. 살아있는 게 중요하다. 이러는 겁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듣고 싶은 언어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래 너는 옳았어, 그래 너는 승리했어, 그래 너는 살만해, 그래 너는 복 받을만해, 너는 정당했어, 그런 이야기가 우리 귀에 들리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신약은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을 주는 게 아니고, ”사람에게 버림받은 돌이 널 찾아 갈 거야, 넌 아마 깨질걸.“ ㅎ

우리가 듣고 싶지도 않고, ”이런 소리가 들릴 줄이야“ 상상도 못한 소리가 우리에게 들립니다. 이게 신약 시대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 말씀을 제가 드린다면,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하는 얘기가 아니고 말씀이 있으니까 말씀이 여러분 귀에 어떻게 들리는가 보세요.

“홍수전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하다가 그들은 다 멸했다.”

여러분, 이 소리를 평소에 얼마나 듣고 싶어 하기를 학수고대 한 말씀입니까? 전혀 아니죠? 예? 우리 귀에 듣고 싶은 말은 뭐라고요? 빨리 해서 못 알아들었죠? 다시 할게요. “그러니까 너는 계속 살아 있어야 해, 너는 정당했어, 너의 인생은 괜찮은 인생이야, 그래 너는 옳았어, 그래 넌 늘 승리해야 돼, 그래, 내가졌어, 너가 이겼어, 라는 이야기, 그런 소리가 그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열심히 일합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서 ”그래 내가 살아있는 것은 이건 살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 살아있는 거야, 라고 하는데,

성경을 딱 펴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러다가 다 멸망했다” 이야깁니다. 우리가 듣고 싶지도 않고 그런 걸 듣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에요. 파리바게트 가게 열고 새로 개업하면서,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런 거 ’여호와는 목자시니......‘ 그런 거 하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다가 멸했다“ 이거 붙여놓으면, 누가 맥도날드 와가지고 먹고 싶어 하겠습니까? 예? 귀빈예식장에다가 떡 붙여놓고, ’복 받을 것이다‘ 뭐 이런 거 붙여 놓고, 여기서 결혼해라 해야지, ”장가가고 시집가다가 다 멸망했다“ 그걸 왜 귀빈예식장에다 웨딩 홀에다가 왜 붙여놓겠어요?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평소에 그걸 치워버린 겁니다.

오늘 여기 세 번째 노인네 말고, 노인네도 마찬가지지만, 첫 번째, 두 번째가 지금 다윗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권력 없었다. 이제는 권력 있다. 그렇다면 나의 처신은 ‘살아야 된다.’ 단지 생각하는 게 이것뿐이에요. 예? 권력이 없을 때는 무시했는데, “어? 그분 다시 권력을 쥘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네. 아이고, 그러면 이제는 내가 살살 빌어야지, 빌면 내 가족은 사니까”

이런 구약의 이 사건들이 오늘날 우리가 그냥 섞어가는 신약만 쳐다보면서 “예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그러한 엉터리 같은 우리의 속마음을 구약이 뒤집어버립니다. 쟁기로 갈아버립니다. “그냥 신약 오지 마, 구약 거쳐서 와, 구약 거쳐서 와, 니가 뭐 육신을 버리고 영적으로 온다고? 육신 거쳐서 와, 육신 거쳐서 와, 그냥 영적, 영적 하지 말고, 오란 말이야.” 육신 거치면 구약 통해서 오는 거예요.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요,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바후림은 지명 이름이고,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일천명이 저와 함께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 다섯과 종 스무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 그러니까 가족들을 총동원하는 거예요. 가족끼리 ‘총동원’ 자기(시므이) 아들딸에게, ” 옷도 빨리 입어, 신발 갈아 신고, 응?“ ”아버지 오늘 누구 만나는데요? 쉿! 오늘 주의해야 돼, 새로운 권력자야, 우리가 함부로 생각하면 안 돼, 이분을 만나서 그분의 태도가, 처분에 따라서 우리는 죽고 사는 거야. 정신 바짝 차려야 돼“ 라고 다윗 왕을 맞이하는 태도가 다윗 왕에게는 관심은 전혀 없고, 오직 우쨌든간에 귀에 들려오는 것, 왕의 소리에서 나오는 그 처벌의 말씀, ”그래 내 니 봐 줄께“라는 그 소리 ”그래 계속 살아, 그래 니가 이번에 한 행동은 옳은 행동이야, 니 행동은 바르게 했어, 옳게 했어, 그래 내 앞에 계속 살아.

그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게 어느 누구나 그 뿐입니다. 이게 육신 이예요. 그런데, 다윗은 크게 봅니다. 다윗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요. 사람들이 나를 버린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사건이 그 다윗 가정에서 터지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에, 아브라함의 육신은 둘로 쪼개지죠.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둘로 쪼개지고, 이삭도 육신이 둘로 쪼개집니다. 자기는 에서를 좋아했지만, 하나님은 야곱 쪽을 더 사랑해버립니다. 그러면 아버지 이삭의 체면은 날라 가 버리죠.

다윗은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것도 남의 나라한테 밟힌 게 아니고, 자기 사랑하는 아들에게 짓밟혔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 왕의 체면에서 말이 안서요. 하지만 다윗은 무엇을 알고 있냐하면, 그것이 바로 육신을 능가하는 육신을 꾸짖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실체!! 육신을 거쳐서 영의 세계에 들어와야 되는데, 우리의 육신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그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19절에 보면, 육신과 육신이라는 것이 어떤 내막을 갖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바로 이겁니다.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과 육신의 만남은 우리의 육신적인 ‘나불거림’ “살아야 되겠습니다. 잘 했다 해줘요. 하나님, 제대로 처신했다, 전에는 잘못했지만 회개하니까, 회개했다고 얘기해줘요. 저는 그 처분이 내가 기대하는 처분이기를 바랍니다. 라는 이 육신의 나불거림, 이런 모든 걸 막아버려요.

이런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함이라.’ 이들에게 있어 첫 번째 사람 두 번째 사람은 ‘시므이’도 ‘므비보셋’도 해당이 안 되는 겁니다. 왜 자꾸 입을 나불거리느냐 말에요. 처분에 맡겼으면, 죽이든지 살리든지 그러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자체가 다윗이 계시다는 자체가 주님이 찾아온 자체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고자 함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붙잡고자 함이거든요. 모든 입을 막고, 심판을 있게 함이라. 라는 기능을, 역할을 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걱정을 하면 안 된다니까요. 오늘 설교의 결론이 이상하게 끝나죠? 주님이 찾아왔기 때문에, “주님한테 나 이렇게 이야기 해가지고 어떻게 혜택 입어야지“ 라는 나불거림, 노림수 그런 것이 다 ”생뚱맞은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주님한테는 전혀 그런 뜻이 없는데, 우리가 괜히 주님에 대해 오해한 거예요. “주님 나쁜 짓 하면 때릴 거죠? 때릴 거죠? 때리지 마! 애가 성적 나쁘니까 통지표 내면서, ”엄마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괜히 지가 주눅 들어가지고 벌벌 떨고 있다 말이죠. 주님을 내가 생각하는 내 수중에서의 주님을 생각하다 보니까, 나쁜 짓하면 때리시고 착한 일하면 복 줄 거야. 그러면 회개해야지, 회개하면 과거의 죄도 없어지겠지, 그래 ‘시므이’처럼 그때는 몰라 뵈었는데 지금은 회개하니까 봐 주세요.”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신약에서 주님은요,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나불거림에 주님께서는 아무 대꾸도 안합니다. 그렇게 나불거리든지, 안 나불거리든지, 황감 없이 주께서 찾아가면, 주님 나름대로 목적이 따로 있습니다. 따로 있어요. “날씨가 더워서 교회 못 나왔습니다.” 주님은 “어쩌라구?” “다음 주일날 또 소방관 한다고 막히고 해가지고 못 나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니까 주님이 답답한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쉽게 갑시다.

치과 의사가 이빨이 어디가 시커먼지 알고 기계를 들이대니까, 환자가 붙잡고 벌벌 떨면서 “ 제가 양치 하루에 1번밖에 못 닦았어요. 치과 의사가 1번을 닦는 게 문제가 아니고, 닦달 내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아이고, 잇몸을 해야 하는데 맨 날 빛낸다고 어이 하면 좋노. 닦달 내는 게 아니고, 치료해 주겠다고 오는 거예요. 근데 어느 부위를 치료해야 될 것을 우리가 결정 하지 말고 우리는 입을 다물면 돼요. 치료하시겠다고 오는데, 우리가 치료한 부분을 잘 치료 했다고, ”아이고, 착하구나, 그래 치료해 줄게,“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a) 치료하면, 여(b) 치료합니다. 우리가 여(앞) 치료하면, 뒤 치료해요.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뭐냐 하면, 복음을 얘기하면, 복음 뒤에 뭐가 있는지 돌아보는 사람들 이예요. 여러분, 복음 뒤에 감추고 있습니까? 감추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돌아보지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고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리저리 둘러봐도 안보이고, 일어나고 밑, 위를 둘러봐도 안 보이고, 이유가 이미 신약에서 모든 입을 막고 심판 아래 두게 하심이라. 한 그 자체는 우리 경험상, 인생을 오래 산다고 해서 파악되는 게 아닙니다.

세 번째 ‘바르실래’ 이 사람처럼 그냥 처분에 맡기세요. 나 같은 인간은 뭐 왕께서 혜택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고향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 이예요. 내가 전에 왕 도와 준 것은 그게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도와준 것이지, 그거하고 내가 당신하고 관계없습니다. 그냥 하나님 일이기 때문에 도와 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자체가 자꾸 내 인생이니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하고, 회개하려고 하시는데, 그런 헛짓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냥 먹고 마시면 되고요. 장가가고 시집가면 되고, 또 안 가면 되고, 사고팔고 하다가 장사 그만두면 걷어치우면 되고, 걷어치우고 먹고 살다가 죽으면 되고....... 우리는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다 하면, “예” 그게 접니다. 하고 우리는 가만있으면 돼요. 그 다음에 그걸 치료하는 것은 ‘주님의 피’가 와서 치료하는 겁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는 자꾸 말씀을 맞출려고 하는 거예요. 말씀을, “아 이러면 안 되는구나, 그래 이 사람은 이렇게 나쁜 짓 했지만 나는 안 그래야지,” 안 그래야지, 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전혀 감동을 안 받습니다. “아이구, 훌륭하구나, 아이구 이게 진짜 내 자식이다. 회개하는구나, 그래도 아무 감동 안 받아요. 그래 회개를 해도 주께서 ‘입을 다물어,’ ‘회개하는 입도 다물어’ ‘입 다물어’ “모든 것을 심판아래 두게 하심이라”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우리로 하여금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심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 이것은 지금 우리하고 타협을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니 이리와 봐라, 내 뜻은 율법아래서는 의롭다 하는 게 없는데, 혹시 내가 빠진 거 있을지 모르니까 혹시 율법에서 의로운 거 있으면 내봐라. 이렇게 타협조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까불죠. 의롭다 함이 없다 하니까, ”전에 설교 잘 한 것은 의롭다 해 주세요.“내 때문에 설교해가지고 열댓 명 구원했는데, 그건 의롭다 해 주세요. 어떻게 고아원 방문하고 내 간 떼 주고 신장 떼 주고...자꾸 우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 니가 왜 그러는데? 왜, 그런 짓을 하는데? 왜, 자꾸 구약에서처럼,“ 왕이여 우리가 전에는 몰라 뵈었습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말이죠. 제가 마중 나가려 했는데, 시므이가 선수 쳐가지고 집에 있는 음식물이 흘러가지고, 왕한테 선심 받으려고 했는데, 사실은 날 속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합니까? 왜?

다윗은 자신 아들의 내분을 자기 육신의 깨짐을 보는 거예요. 지금 다윗 왕이 남들 얘기 할 쨉이 못됩니다. 본인 가정도 망가졌어요. 자기 아들 압살롬이 자기의 육신의 가정을 부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그것마저 하나님의 말씀이 쟁기로 자기 가문을 뒤엎듯이 하나의 언약적 과정으로 본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아가 짧은 인생이지만, 주께서 쟁기로 말씀이란 쟁기로 뒤엎는 과정으로 보자 이 말입니다. 자꾸 ‘다음에는 잘 할게요. 앞으로 잘 할게요.’ 하지 말고 “요런 건 잘한 거니까 잘한 거 칭찬해 주세요.‘ 하지 말고, 그냥 성경을 보니까, ’아. 우리 입을 대일밴드로 막아 놓았구나!‘ ”그래 ,그럼 우리 사는 건요? ’아, 먹는 거 입는 거구나, 사고팔고 하는 거구나,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애) 낳고 그러는 거구나, 그 거 뿐이구나, 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근거가 될 수가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왜?

중요한 것은 노아 홍수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했지만, 홍수를 기억한, 언약을 기억한 노아만이 방주에 들어갔듯이, ‘인자의 옴도 그러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인자의 옴도, 그리고 우리는 아! 주님께서 말씀대로 들어가시는구나! 근데 그걸 내가 왜 알았지? 하아. 미리 알려 줬구나.~ 미리, 기껏 해봐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기껏 하는 짓이 그것 밖에 할 것이 없구나, 근데 그 짓이 내 짓인데, 주께서 구원하는 것은 주께서 십자가 피로 용서함으로 구원 되는구나~~ 란 사실을 미리 땡겨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이렇게 보라고 하니까, 이 명령을 목사의 명령으로 듣고, 주님 명령으로 듣고 성경 봅니다. 보면서 항상 댓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죠. 성경 안 볼 때보다 볼 때가 수입이 더 늘어나기를 기다려요.

오늘 아침에 제가 산책을 이렇게 하는데 어떤 분이 고물 차를 타고 왔어요. 노인네가 육십 다섯쯤 됐는데, 서촌 가는 길, 파계사 가는 쪽으로 걸어가는데, 차를 딱 세우면서, “ 갓 바위가 어디로 갑니까?” 그래서 “ 쭉 바로 가시면, 막다른 길 나오면 왼쪽으로 가시면 나옵니다.” 라고 했어요. 그걸 이야기 하면서 제가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갓 바위를 가르쳐 주는 그런 공로, 그런 의로움이 있으나 없으나 관계없이 갓 바위 길은 아무 변동 사항이 없는 거예요. 내가 서천 저쪽에서 갓 바위 가는 길을 친절히 가르쳐 줬다고 해서 갓 바위 가는 동상이 꿈틀 거린다거나 감동 먹는다는 일이 없거든요. 여기 나무가 발이 흔들리는 것도..., 내가 친절하든 안 친절하든지 갓 바위 길은 그냥 뚫린 겁니다. 우리 성도가 할 것은 내가 이렇게 이것이 십자가 길이 구원이고, 십자가 피로 용서받으면, 이미 용서받아 천당 가게 돼 있어요. 하고 했다고 해서 보상이 될 수 없고, 내가 복을 받은 근거가 될 수 없다 이 말이죠. 왜, 길은 나와 있으니까.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으니까, 나의 피로, 화목제물로 너희 죄인이 의인 되었다고, 이미 여기 천당 가는 길이 나와 있거든요. 그럼 전에 이미 이야기 할 때 뿐이란 말이죠. 모든 입을 틀어막고 모든 사람은 죄인밖에 없는데,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의인 만들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해서 왜 저한테 보상이 와야 됩니까? 이건 말도 안 되죠. 그 뜻은 사람들은 교회 와서 뭘 하게 되면, 더 풍요하게 사는 것, ‘그래 난 살만해, 난 승리했어. 내게 들리고 싶은 것은, ’너는 이긴 거야, ‘너는 정당했어. 자꾸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듣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먹는 거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합니다. 언제까지? “굶어 죽을 때까지” 먹는 거 입는 거 족한 줄 알라, 굶어 죽을 때까지, 말 잘 들어야 되지, 죽을 때까지 먹는 거 입는 거 족한 줄 알라 이거에요.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입을 틀어막아요. 좀 더 살아야 될 텐데, 좀 더 잘 살아야 할 텐데, 이것은 주님의 계획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돌맹이, 사람들이 버린 분이 와서 말씀 들고, 우리(밭)를 쟁기로 뒤집어 엎어가지고 우리가 원치도 않는데, 우리 자체를 말씀이 토해내는 토양으로 바뀌게 하셔가지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나는 이렇게 못 사는데요. 성경에 보니까 천당 가는 길이 요래 나와 있네요.” 라고 그냥 소개 할 따름! 그 일을 다윗처럼 우리도 사용하시는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분명히 성경에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로 알라고 돼있지만, 엔간히 우리의 고집도 얼마나 센지 이왕이면 부자로 살고 싶습니다. 라는 그걸 듣고 싶은 축복의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 철딱서니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시고, 이런 것과 상관없이 구원해 주시니, 우리는 구원의 길을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043강-삼하19장16-19(살고자 하는 마음들)-2sa100822-(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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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6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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