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100219요일2장9절b ‘빛과 어두움 두 패로 나누는 종말(끝)’
안산100219요일2장9절b ‘빛과 어두움 두 패로 나누는 종말(끝)’
이름 : 박온정(IP:123.212.206.146)
안산100219요일2장9절b ‘빛과 어두움 두 패로 나누는 종말(끝)’
『공간의 끝과 시간의 끝』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죄 사함과 태초, 그리스도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고, 그때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분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건,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잖아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뭘 압니까?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자녀들이고 자녀에서 더 나아가면 뭐가되냐, 아비들...아비층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한 가정에서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알고, 한 가족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았다, 이런 뜻이 아니고 교회 내에서 젊은 층은 처음 입교하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알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하나님을 알지요. 합쳐서 태초에 계신분인데 이게, 아까 얘기했잖아요. 가려져있는 거예요. 가려져서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른다,입니다.
태초에 두 분에 의해서(이런 게 좀 어려워요), 태초에 두 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과 하나님과 하나님 아들, 성부 성자인데요, 또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가 만들어졌는데, 아까 뭐라했죠?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왜냐면 처음 태초에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의 복사판이죠. 성경에 “내 살과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에게 생명이 없다,”는 말이 나오죠. 이 말이 어렵기 때문에 설명하면 설명한 게 더 어려워져요.
쉽게 하려면 이렇게 하면 되요. ‘나는 이광수의 소설을 보면서 나는 이광수의 살과 피가 되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유명한 소설가 또 누구 있습니까? ‘나는 김동리 소설을 보면 김동리의 살과 피가 되는 것 같애’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나는 우리 아버지가 너무존경스러워서 나는 평생의 아버지의 살과 피로 살았어,’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의 복자판이다 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와 살이 내 속에 흐르는 것 같애’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전에는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영광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자존심,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예수님의 사람 된 것을, 예수님의 가족 된 것을 나는 영광으로 여겨.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형상대로 만든 거예요. 구분하기 십지요?
예수님 형상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 형상대로 만들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내 모든면을 장악하고 있고, 내 속에 살과 피처럼 흐르고 있어서,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이 말이죠. 그리스도가 내 뼈다귀가 되고 그리스도가 내 핏줄이 되고, 내 혈액이 되고 내 심장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나는 이제 못 산다, 라는 것을 느낄 때 그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형상으로 변화된 거예요. ‘그리스도 형상으로 변했다, 이 말은 어떤 곳을 뚫어도 살과 피가 나오듯이 어떤 곳을 찔러도 주님의 용서하심이 나오죠. 이렇게 긍휼하심, 용서하심이 나오죠.
요한일서 1장10절 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 참 재미있죠? 거짓말 안 하는 자는 말씀이 우리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아예 드러나 버린 거예요.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있어서 출렁출렁하면 뭐가 출렁거려요? 말씀이 출렁출렁거려요, 우리 안에서. 이게 하나님 형상이 출렁거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살과 피가 되었다 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유사한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너희가 내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니 정말 그러하다』남들은 사도의 말, 사람의 말 ‘너는 뭐 잘났어’ 이렇게 들리던데 어떻게 ‘너희들은 내 말 들을 때 내가 말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가? 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말씀 스스로 움직여서 너희 안에 파고들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윙~ 파리가 날아다니다가 파리를 잡으려는데 파리가 윙~ 목소리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파리가 알아서 내 속에 들어온 게 되잖아요. 그 파리가 말씀이라고 봅시다. 내가 말씀을 잡아서 집어넣은 게 아니고, 말씀이 알아서 내 속에 들어와서 내 안에서 말씀이 흐르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주여 우리 죄 지은 거 맞습니다’ 고백하는 거예요. 남들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 안의 말씀으로 대조해볼 때.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모습을 뭐라하냐면 우리를 하나님의 용기(容器), 우리를 말씀을 담는 그릇이라 되어 있고, 로마서에서는 이 세상에는 두 개의 그릇밖에 없다. 하나는 하나님의 긍휼을 담는 긍휼의 그릇이 있고,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담는 그릇. 인간에게는 두 개밖에 없다. 양과 염소,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 여기서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 모든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사람이 국회의원, 대통령, 판사 됐다고 그거 인생 끝나면 그것도 바로 끝납니다. 소용없어요. 그거는 자기 자존심의 그릇이죠. ‘나는 판사다!’ 그거 자존심의 그릇입니다.
판사가 되지 마라는 말이 아니라 판사가 되었더라도, 판사의 그릇이 되지 말고, 예수님의 그릇이 되야 되고 긍휼의 그릇이 돼야 되요. 그래야 판사 일을 해도 구원받지요. 자칫하면 피고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되요. 강도가 천국가니까. 강도를 재판한 판사가 지옥가고 강도는 천국가고 이런 일이 생긴다니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신 일로 되겠습니다.
자, 그다음에 14절 끝에 봅시다.『......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이것은 우리가 이기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뭐가 거하기 때문에? 말씀이 거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긴 거예요. 이상화 선수가(빙상) 500미터에서 금메달 땄잖아요. 이상화 선수와 똑 같은 마네킹을 만들어 달려보라 하세요, 못 달리잖아요. 껍데기를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속의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마귀는 우리 껍데기를 안 봅니다. 우리가 목사나 집사라 해서 마귀가 벌벌 떠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람 속에 말씀이 들어있으면 말씀보고 마귀가(8:18)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마귀를 보고 겁내지 말고,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을 보고 겁내야 되요. 말이 되는 말입니다.
적들이 왔다, 적들보고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 속에 우리를 장악하시는 예수님을 더 경외해야 되지, 예수님이 무서우면 세상은 안 무서워요. 목사도 안 무서워요. 예를 들어서, 송구영신예배쯤 되면 당회원들 단도리하죠? 자신들은 맛있는 거 다 사먹고 자기들은 아이들 유학 보내면서 목사들은 월급 안주면 되느냐고 협박 공갈하죠. 주의 종을 이렇게 소홀하게 대접하면 복 받을 걸 믿느냐, 너희는 저주받는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디모데전서에 보면 뭐라 했냐면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이렇게 되어 있죠? 만약에 당회원 가운데 딱 한 사람이라도 말씀에 젖어있는 사람 같으면, 목사가 그런 이야기할 때 뭘 보겠어요. 말씀을 보겠죠.‘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돈 사랑은 일만 악의 뿌리다’
그러면 뭐가 무섭습니까. 협박 공갈한 당회장이 무서운 게 아니고 뭐가 무섭습니까. 저주 받는다고 욕하는 목사 무서운 게 아니고 자기 속의 말씀이 무서울 때는 “목사님, 제가 알기로는 성도는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아는데 지금 목사님 굶습니까? 우리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면, 그걸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이해를 하고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목사의 도리가 아닙니까?” 라고 속에 있는 말씀대로 이야기를 하죠. 말씀대로 한다는 것은 뭐냐면, 나를 안 섬기면 저주 받는다는 목사가 무섭기 전에 뭐가 더 무섭습니까. 자기 속의 말씀이 더 무섭기 때문에 앞에 있는 목사는 안 무서운 거예요.
하나의 교인으로 보자 이 말이지요. 전도를 하자 이 말이지요. 양심있는 목사 같으면 ‘뭐, 쫌 더 올려달라 이거지요’ 그러면 교인은 이러죠, “목사님, 목사님 형편을 우리가 알고 목사님 말씀이 은혜로우면 목사님 올려달라는 말 안 해도 우리가 올려줍니다” “우리가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복음 전하라고, 복음 전하라고 올려줄 수도 있는데 목사가... 복음은 생각 않고 맨날 목사 권위만 생각하니까. 주고 싶어도 우리는 못 주는 거예요.” 왜, 우리 돈은 내돈이 아니고 주님 주신 돈이기 때문에. 복음 위해 쓰라는 돈이 목사 위해 쓰라는 돈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개혁주의가 이렇게 했으면 한국교회 타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교인들이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목사를 더 무서워해버리니까 같이 목사한테 놀아나고 사조직 되잖아요. 이런 오류를 우리가 주의해야 됩니다. (여기 교회는 그런 일 없겠지만...) 바로 제가 예로 든 것을 이제 알겠죠? 말씀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이 뭐냐, 악한 자를 이긴다 이 말이죠. 왜! 우리는 먼저 말씀에 굴복하니까! 말씀에 굴복한 사람이 어떻게 마귀한테 굴복하겠어요. 먼저 굴복해야 될 분께 굴복했으니까! 당당하게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그 다음에 우리가 굴복하기 힘든 게 있어요. 그게 바로 16절입니다. 15절에 보면『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이걸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까 첨에 제가 설명한 거예요. 세상의 육적인 것이 점선으로 내려오다 십자가에서 예수님 만났습니다. 구약의 약속의 땅은 뭐냐 하면, 양이 늘어나고, 소가 늘어나고, 흔히 말하는 축복이라는 것, 축복받는...자손이 잘되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안 되고,하는 그게 약속의 땅인데, 이 약속이 땅은 약속이 거하는 땅이에요. 다시 말해서 땅이 있다고 약속이 있는 게 아니고 약속을 바라볼 때만 그런 축복이 주어지고, 만약에 약속을 안 바라보면 이 땅이 무슨 땅이 되냐 하면 저주의 땅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멸망당했어요.
축복받은 땅에서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했어요. 그거는 뭐냐, 그들은 땅만 귀하게 여겼지, 약속은 내팽개쳐버린 거예요. 그런데 신약성경에 약속이 누굽니까. 이 약속이 누구예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승천했잖아요. 그러니까 승천하니까, 이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고 뭡니까? 악일뿐이죠. 이 땅의 것을 사랑치 말라, 진짜 사랑해 주는 분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위에 있어요. 올라갔어요. 그래서 성도는 이 안에 있으면서 핍박을 받죠.
그래서 옛날에는, 십자가 이전에는 축복이라고 여겼던 것이 위에 있고, 저주가 아래 있다면 신약의 십자가를 통해서는 땅의 축복이라는 것은 사실은 저주의 모습이고, 그 당시에 저주받은 것은 사실 축복이 되는 겁니다. 주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축복이 되는 겁니다. 이게 역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교회에서는 십자가를 통과 안 하니까, 땅의 축복이 축복인 줄 알고 십자가 말고 바로 가버려요. 바로 가버리니깐 교회가 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빌면 복 받은 줄 알고, 지성이면감천이라고, 무조건 빌고 갖다 바치면 복 받은 줄 알고 세상 복을 구하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요한일서 2장15절 들이대면 뭐라 하겠습니까. “목사님, 그렇게 해서 교회 부흥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옵니다.『세상 것에 현혹치 말라』‘이 세상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뿐이니 이 세상 것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없다,’ 이거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진정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나?” “예! ” “그렇다면 세상 것은 사랑하지 마라” 너희 사랑하는 하나님은 벌써 왔다가 이 땅에서 사랑을 베풀어주는 거예요. “ 거기 있지 말고 빨리 죽어서 빨리 나 있는 곳에 오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죽는 게 소원이었어요.
나의 소원은 하나밖에 없다. 죽는 게 소원이다. “주여! 불러주옵소서!” 주님께서 “ 안돼! ” “왜요?” “할 일 하고 와야지” 거기는 할 일 하고 와야지,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지금 가고 싶지만 안 가는 것은, 너희 때문에, 너희에게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한다 이것들아!” 마음 같으면 가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못 가게 말리는 거예요. 복음 전하라고!
얼마나 이게 자유롭습니까. 목사가 가장 시험받는 것이 옆에 있는 동기 목사는 교인 수가 많고, 자기는 교인 수가 적을 때 열등감을 느낍니다. 그때, “하나님이여! 왜 하필 나에게, 하나님이여! 신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한 인간이, 하필이면 왜! 나보다 더 나은 사모만나서 벤츠타고 다니는데, 저는 왜 이 모양입니까.” 할 때 하나님의 뜻은, 네가 정말 믿음이 있는지, 네가 정말 하나님 사랑하는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바로 세상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배치를 해 놓아요. 마치, 이스라엘 나라에게 이방나라를 배치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를 때는 그들이 저주받고, ‘저는 하나님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되면 복 받고‘ 하는 그런 장치를, 그런 장치 속에 똑 같이 우리 주변에 깔아 놓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임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원했으니, 하늘에서 주는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소원하며, 하늘에서 주는 상급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면 또 어떤 사람은 묻죠. ‘그러면 교육도 받지 말고, 아이들도 키우지 말고, 피아노도 가르치지 말고, 이 세상사는 걸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왜, 왜 그러느냐, 우리가 말씀을 읽잖아요. 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 말이죠.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우리가 전에 기도원에 가는 것 하며, 세상살이 하지 말까요?’ ‘아니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안에 말씀이 들어 있잖아요. 말씀이 방금 요한일서 2장15절,16절이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 주변에 죄성, -이건 우리의 옛 아담의 속성이 남아있잖아요 -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죄가 뭡니까? 세상을 좋아하는 게 죄잖아요.-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우리는 뭘 느껴야 하느냐 하면, 이런 나를(숨기면 안돼요)(위장하면 안되고), ‘나 이렇습니다,’ 하고 까발려요, 까발리면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이 충돌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되게 하고, 주님의 용서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합니다.
인간은 자기 행위 하려면 자기 의지를 발휘하겠죠. ‘말씀을 본다’ 자기 의지를 발휘하는데 의지 바깥에 주님의 의지가 있어요. 나는 이 말씀이 옳다고 여기는데, 주님은 나의 바깥에서 주님의 의지가 오니까, 어떤 게 맞아요? 주님이 옳지요. ‘아, 역시 또 내 욕심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하는 겁니다.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 돌본다, 착한일 했더니만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아! 내가 또 착한일 했다고 떠벌였구나, 이것이 나의 죄구나,’ 늘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고상하게 기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기도하시고, 응답은 말씀으로 응답 받아야 돼요. 내가 응답을 만들어내면 안돼요.(목사님의 이런 가르침 첨듣습니다-녹취자의 생각) 그러면 자기가 착한사람 돼요. 우리는 못된 사람 돼야 됩니다. 우리는 못된 살마 되어야 하고, 기도할 때 기복적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그런 인간에 대해서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서 일 하시기를, 이건 이 말씀에 어긋나고, 이 말씀은 이것에서 잘못이고, 라는 것을 알려주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열심히 복음 전하는데 왜 집안에 우환이 생깁니까.” 그러면 그걸 속일 필요 없어요. “하필이면 나에게!!” 항의하듯이 기도해야 돼요. 하게 되면, 주님께서 요한복음 5장을 알려주시면서,『너희가 경건치 않은 자를, 으시대는 자를, 죄인 된 자를 구하는 건 피 밖에 없다』예수님의 피의 효과를 다시 한번 일깨워줄 때에, ‘아, 내가 객기를 부렸구나 또,’ 평생 동안 매일같이 이게 벌어지는 거예요. 매일같이...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죠, ‘그냥 성질대로 그냥 사세요!’ 주께서 친히 다뤄야지 내가 만들어가는 고상한 나를 만들지 마세요!‘ 합니다. 자기가 고상해지면 주님이 구원자가 아니고 자기 잘난 체 하게 되요. 자기 믿음 좋은 것을 자랑하고 싶은, 최고가 되고 싶은,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뭐라 했습니까. 그걸,『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이라고 되어 있죠. 주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꺼리의 주인공을 누구로 삼습니까? <나>로 삼는 거예요 나!
그런데 요한일서 1장10절에 보면 우리는 범죄 한 자인데, 우리가 하나님 거론하면서 주인공이 누가됐다?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할 때!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마귀가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2장17절에 뭐라고 되어 있냐 하면,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고” 지나간다는 걸 다른 말로 하면, “빠져나간다”
사람에게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심판이 있지요. 그래서 장례식에 가끔 갑니다마는, 안 믿는 사람들 보면 갖잖아요. 죽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하고,-사실 죽는 것은 심각한 게 아닙니다.-그보다 더 중요한 건 뭡니까.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누구나 죽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심판이 있는데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었다고 그 난리치는 거예요. 죽었다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11:25』그래서 그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게 뭐냐 하면, 옮겨지는 것이 A영역이고 빠져나가는 것이 B영역이라면, A영역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거는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진짜 알려면 A영역에서 빠져나가서 정욕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지고 있는 B영역. 심판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인가, 이게 진짜모습입니다. 이걸【허구와 실재】라고 합니다.
실재는 주님 앞에 섰을 때가 실재지,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잘난 체 하는 건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사람들끼리. 그래서 저는 사람을, ‘남을 의식하지 마’ 라고 합니다. 이게 다 허구입니다. 그래서 같은 목사끼리 너무 열등의식을 갖지 말라고 하지요. ‘저 목사님은 교인 수 몇 명입니까? 30명 안되지요?’ 그런 열등의식 가질 필요가 없어요. 생활은 많이 불편하겠지만...
A영역에서 누가 잘났냐가 아닙니다. 부흥사들 보면 ‘너희교회 몇 명이냐, 올해 너희교회 예산 얼마냐, 우리는 이십억인데 너희는 삼십억이냐, 이렇게 자꾸 비교 시작해서 ’하나님의 훌륭한 종‘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훌륭한 종은 없어요. 그릇의 크고 작고 중요한 건 무엇이 담겨있느냐가 중요하지. 그릇 크다고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그릇 크면 허풍도 크게 마련이거든요.
그릇 크다고 양적으로 큰 것이지 질적으로 딴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쪽에는 질적으로 따져서 새로운 피조물인데, A라는 영역(눈에 보이는 세상) 말고 B라는 영역, 주님 앞에서의 내 모습이 어떠냐, 우리는 긍휼을 담은 그릇이 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너무 기죽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은 지나갔다. 빠져나오는 영역의 속도를 느껴야 합니다.
이걸 알려면 사진 찍어보면 압니다. 5년 전의 사진보면 그렇게 젊었어요. 나이가 60넘으면 사진 찍는 게 싫어요. 거울 보면 젊은데, 사진보면 기氣가 빠져가지고, ‘아니, 웬 노인네야?’ 놀래요. 송장에다가 허수아비 옷 입혀놓은 것처럼... 쉬지도 않고 빠져나갑니다. 빠져나가면서, 한 지점에서 ‘너는 어떤 인간이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이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지, 이 사망의 세계에서 뭔가 승부보고 쇼부낼라하면 안되죠.
그 다음에 2장 18절 아까 제가 마지막 때라 했지요? 끝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오시고난 뒤 끝났다. 다른 미래는 없다,입니다. 사도행전17장 한번 봅시다. 17장30절:『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예, 여기 보면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은 시대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허물치 아니했어요.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허물치 아니했는데, 묵인했다 이 말이지요?
31절에 보면, “이는 정하신 사람” 정하신 사람이 예수님이죠? 31절:『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이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32절에 뭐라 합니까?『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그러니까 우리 계획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 계획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때는 구원받고 안 받고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정하신 분이 따로 있어요. 누굽니까. 예수님이 결정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구원받고 안 받아들이면 우리는 지옥 가는 거예요. 제가 강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들이냐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그냥 묵인, 허물치 아니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간섭하겠다는 거예요. 문제 삼겠다는 겁니다. 왜 절에 가냐고, 왜 불도가 심하냐고 묻겠다는 거예요. 왜 바쁘다는 핑계대고 예수를 안 믿었느냐, 묻겠다는 겁니다. 왜! 기준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기관의 ‘쉼터’ 애들이 공부해서, 자기스스로 자립해서 나갈 수 있는 능력 실력을 기르면 그것으로 쉼터에서의 기능은 다 한 거예요. 부모노릇을 대신 해주는 겁니다. 성인되면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 되니까. 거기에서는 기준이 뭐냐 하면, 얼마나 자립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느냐, 그만한 기술과 기능을 익혔느냐, 어느 정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초적인 확률 자세한 확인, 이게 기준이죠.
만약에 그 힌트가 구원과 천국을 가늠하는 그런 힌트라면 졸업할 때 뭘 물어야 됩니까. ‘너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걸 물어야죠. 왜냐면 하나님 구원하는 방법은 정하신 사랑에 대한, 관해서 하는 문제기 때문에 ‘정하신 사람이 죽었다가 십자가 부활했는데 너는 그걸 믿느냐,’ 그건 우리나 선생님이 정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정한 거잖아요. 하나님이 정한 거잖아요. 그러면 교회는 뭡니까, 교회는 뭐하는 곳이에요? 교회 키우는 데가 아니죠. 뭐하는 뎁니까. 자기사람을 어디 넣어준다? 천국에 넣어줘야 할 길이 교회 아닙니까.
그러면 교회 기준이, 외쳐야 될 기준이 뭐밖에 없어요? ‘돈 벌었습니까?’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그걸 물어서는 안 되죠. 그럼 뭐라 합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목사가 그런 질문이 나와야지요.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그 이야기 나오면 안 되지요. 그런데 일반 사람에게 교회라 하는 것은『속죄양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 물어야 되는데 왜 목사가 목회에 방해된다고, 교회 안 큰다고, 왜 자꾸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을 빼버리고, 세상 고객들이 좋아하는, 그 스님들이 좋아하는 축복 축복을 왜 이야기하느냐 이 말이지요. 교회라는 이름으로 지옥가게 만든다 이 말이지요.
평생 살 것 아니잖아요. 결국은 빠져나가 죽잖아요. 50, 60, 70 빠져나가는 중입니다. 쉬지도 않고. 멈출 수가 없어요. 점점 늙어가요. 빠져나와서 A영역에서 B구역으로 주님 앞으로 나오는데, 기준은 누가 정했다? 주님이 정했지요. ‘정하신 사랑과 십자가 부활’ 이게 복음이잖아요. 복음을 위해서는 목사가 목에 칼이 들어오고 굶어죽는다 해도 뭘 전해야 되요. 복음만 전해서... 한번 죽고 또 죽을 거 아니잖아요. 천국 가서 또 봐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복음만 전해서, ‘내가 당신께 금이나 은을 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드립니다. 예수 이름.
‘분류작업, 죄, 우리는 죄인이고 거기서 구원할 자 예수님밖에 없다.’ 하는 그걸 전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목사의 도리 아닙니까. 목사의 도리예요. 이 직분이 얼마나 부러운지 사도바울은 천사도 부러워서, ‘아흐, 나 천사 안 할래, 나 복음 전할래,’ 천사는 심부름만 해야되잖아요. 심판할 땐 심판하고, 그런 직분을 받아 놓고, 세상에 이걸 돈에 팔아먹어요? 자기 자존심에 팔아먹어?
교인 수 몇 명 안 된다고 복음 때려치우고, 세상 것을 증거해요? 그러면 그것은 성령 받은 목사가 아니죠. 악마의 종이죠. 그런데 목사가 그러고 싶어도 사모들이 가만 두지를 않아요. 양식이 문제......방금 이야기한 것이 요한일서 2장18절에 나오죠?「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쭈욱 이야기한 게 적그리스도가 별게 아니라, 복음을, 복음 말고 다른 거 전하면 적그리스도라는데, 다른 게 뭐냐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 세상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죠.
적그리스도도 여기서는 뭐가 되냐 하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라,」이런 말이 있죠. 그것과 2장15, 16절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하는 것과,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것은 맥락이 같아요. 어떻게 같은 맥락이 되는가, 이게 궁금하지요. 이거 좀 어려운 거예요.
이게 조금 어려운 거니까 미리 기준을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5장6절,7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증거 하신 이가 셋인데 뭡니까.【성령과 물과 피라】이것이 예수님의 육신이 없이 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구원 받느냐 마느냐는 것이 세 가지인데 ‘성령과 물과 피’거든요. 성령과 물과 피라, 이게 뭐냐 하면,
뒤에다 ‘세례’를 붙이면 다 맞아요. 물세례, 피세례, 성령세례. 피세례를 마태복음에서는 뭐라하냐면 불세례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받은 세례가 있는데 무슨 세례냐’ 하니까 불세례가 남아 있다고 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 죽는 세례입니다.
처음에 물세례 받을 때는, 어디 갔느냐 하면 세례요한에게 물세례 받을 때 사람들 물세례 받았지요? 그 사람들은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죄인이지요. 쉽게 말해서 땟국이 질질 흐르는 더러운 물에 들어갔지요. 이 더러운 물에 예수님이 끼어들어갔지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말려요. “예수님같이 정한 분이 여기서 세례 받을 수 없습니다. 왜이러십니까” 말리니까, 이래야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죄인이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죄인의 땟국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죄가 없으신 분이 죄를 뒤집어 써야 되는 거예요. 항상 구원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가 있는 죄의 자리에 침범해서 우리 자리에 합류할 때,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자기 죄를 털고 구원받겠어요? 우리는 평생 지만 지을 뿐이죠. 자기 자존심만 챙기죠. 그런데 이 자존심이 있는데 우리 속에 말씀으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땟국물이 있는데 들어오죠. 그게 뭐냐 하면,【의】의 시작이에요. ‘의’ 의 시작. 주님께서 자신해서 죄인이 되셔서 이 죄 때문에 두 번째, 불세례 받아야 됩니다. 불세례는 뭐냐, 지옥불이에요. 지옥불.
지옥불이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는 겁니다. 저주를 받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불세례...지옥불을 뒤집어쓰는 거예요. 죄를 향하여 주어지는 아버지의 저주! 이것을 바로 예수님의 피라고 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불세례라고 했어요. 이 두 가지를 예수님이 받아버리시면 여기서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예수님 혼자 구원받겠습니까? 세 번째,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성령은 예수님을 위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한 택배직원이에요. 이것을 가지고 ‘보혜사’라고 합니다.
여러분 병원에 가면, 의사가 병 고치죠 물론. 의사의 말을 전달받아서 주사놓는 사람이 누굽니까. 간호사죠. 간호사가 바로 ‘보혜사’인 거죠. 일은 누가 하셨고? ‘이루었다’는 누가 다 이루었고? 예수님이 다 이루셨죠. 다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전달시키는 분은 누구? 성령께서. 성령은 다른 보혜사에 대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게 되면, 예수님의 구원이 예수님의 단독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편적 단속성斷續性이라고 합니다.
보편적 단속성은 2월27일날 여기, 서울의 방배동 백석대학교에서 1시부터 제가 논문발표를 합니다. “아무나 갈 수있습니까?” “만원씩만 내세요. 아무나 갈 수 있습니다”“ 방배동역 2번출구 토요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보편적 단속성’이란 것은 아버지가 어쨌든 한 사람이죠. 그 뒤로 줄줄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따라오는 것을 말합니다. ‘보편적인 단속성.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피가 아니고 우리 물도 아니고, 우리 세례도 아니에요. 피와 물과 성령은 예수님의 전 행적을 말하는 겁니다. 이걸 사람들이 풀지를 못해요. 피가...뭔지. 꼭 자기가 행해야 된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행하신 거예요.
물세례, 피세례, 그리고 성령세례, 성령세례 받은 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나눠주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자”라고 디어 있어요(요1:33).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랐는데, 성령이 임한 그분이 장차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분이니까 ‘너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인 줄 알아라’ 이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있으려면 예수님이 어떻게 와야 돼요. 귀신으로 오면 안 되고, 실제로 세례 받아야 되고, 실제로 십자가 저주를 받아야 되고, 실제로 성령을 줄 수 있는 분이어야지요. 그게 육신으로 오신 분이다,는 겁니다. 육신으로. 그냥 몸으로 오는 그걸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고, 이 세 가지의 기능을 하신 분으로서의 몸인 거예요.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왔다고 자기는 정통이라고 우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거는 잘못된 거고. 육신으로 온 이유가 바로 이 세 가지의 과정을 겪어야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인데,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 이런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여러분들이 도 닦으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22절 봅시다.『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해서 반듯이 아버지만 단독으로 있는 경우는 있다 없다? 반드시 아버지를 알려면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에게만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따로 있고 아들이 따로 있는 경우는 없다는 거예요.
25절에 봅시다. 25절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영원한 생명이 뭐냐 하면, 오래 사는 거요? 오래 사는 게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이란 수명 자체가 없는 거예요. 수명 자체가. 이게 어디 나오냐 하면, 변화산 올라갔잖아요. 거기 예수님이 계시죠? 엘리야 있었죠? 모세 있었죠. 모세가 오래 살았습니까, 엘리야가 오래 살았습니까. 이걸 묻는 자체가 잘못이죠. 왜냐하면
지상에서 있는 게 아니고 이미 지상에서 벗어나서 묵시세계 올라간 사람에게는, 엘리야나 모세나 다 같이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묵시적 인물 예수님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엘리야가 영원하고, 모세가 영원하고, 아브라함이 영원하다면, 예수님 후에 구원받으면 뭡니까. 지상에서는 우리가 수명이 있지만, 영원한 영생을 얻는 것, 이것이 뭐다? 약속이잖아요. 약속. 이게 약속인 거예요.
수명을 이야기하지 않은, 수명을 논할 필요가 없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 자체가, 이들은 예수님은 엘리야나 모세나 우리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예수님으로서 값을 올리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구원하는 자들 속에 있어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구원하는 자들 속에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처럼 이제는 그들과 하나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의 어린아이들 게임하다보면 옛날 어릴 때 했었는데, 작대기 꽂을 모래를 모아놓고 작대기 넘어뜨리는 게임 하죠? 작대기 밑에 받치는 모래가 뭐냐 하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뭘 세웁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세우고 예수그리스도에 연결된 것이 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하기 위해서는, 자기 백성들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함으로써 이것이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 언약백성으로 약속백성이 되는 거죠. 이 사람은 누가 키웠는가? 주님께서 키웠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뭐가 됐다? 가지가 됐다. 가지가 된 이유가 뭐냐면, 열매가 나무에 맺는 게 아닙니다. 가지 끝에 열매가 맺힘으로 말미암아 이 열매가 가지 덕분이 아니고 누구 덕분이다? 바로 이 나무덕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같은 가지가 있는 겁니다.
이 열매를 우리 열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누구열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열매라고 봐야 되요. 모든 공로를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나의 공로로 돌아오면 안 됩니다. 자기 공로로 돌아오면 시기와 질투와 분노가 생겨요. 하필이면 나에게!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불상사가? 우리는 통과하는 파이프인데, 관에 불과한데, 여기서 통과해서 뭐가 나왔는데 이 열매를... 우편배달부가 모든 소포를 자기꺼라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기는 전달해야 할 사람인데...하나의 목격자에 불과한데 자기가 그 사람을 구원한 것처럼 예수님이 구원한 것을 목사가 구원한 것처럼 행세하면 안 되지요. 목사는 하나의 목격자입니다.
주께서 집사님을 구원했는데 그걸 그냥 주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증인으로 집사님 옆에 목사가 서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죠. 그게 바로 영원한 생명이다. 요한일서 1장 봅시다. 1장1절:『태초로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예수님 때문에 아브라함과 모세가 살았다면 똑 같은 원칙으로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게 되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살려 주는 자 속에, 하나님이 살려내는 자의 속에만 예수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 말은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있다? 살아있다? 살아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약속 때문에 살아있는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은 겁니다.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릴 자라는 것을.
물론, 살아서 믿는 자가 살고, 죽어서 믿는 자도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그분은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라고 믿는 자가 성령 받은 자입니다.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죽은 지 나흘만에 걸어서 나왔잖아요. 사람들은 보고도 안 믿습니다. 그러니까,「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시고,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이게 무슨 작업? 분류작업... ‘잘난 체 하는 사람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는 나타내 보이시고... 어린아이 되면 안돼요. 나타났기 때문에 어린아이 되는 거지 어린아이처럼 행하면 안 되죠.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걸 알려주니까, 자기 행함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 이거 땡잡은 거지, 그 마음이 어린아이 같다는 거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받들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심으로서 우리가 회개한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이 더러운 죄 속에 우리 더러운 마음속에 주께서 말씀으로 임하셔서 영생이 우리 속에서 꽃피워지니 우리가 영생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고생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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