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9월 24일 에스겔 11:14 역사와 묵시와의 만남의 계시화
광주 9월 24일 에스겔 11:14 역사와 묵시와의 만남의 계시화
이름 : 관리자(IP:124.59.87.52)
100924 겔 11:14 역사와 묵시와의 만남의 계시화
관리자(IP:124.♡.87.52)
10-09-25 13:18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광주/광주100924a에스겔11장14절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광주/광주100924b에스겔11장14절b.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광주/광주100924a에스겔11장14절a.pdf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광주/광주100924b에스겔11장14절b.pdf
관리자(IP:124.♡.87.52)
10-10-06 07:37
광주100924a에스겔11장14절a
광주 강의(2010. 9. 24) 11-1
한 달 전에 강의를 했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네요. 에스겔 11장 24절을 봅시다. “주의 신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신의 이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보는 이상이 나를 떠난지라.”
하나님의 신이 수천 Km 떨어진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에스겔을 번쩍 들어서 갈대아에 내려놓은 거예요.
25절에 보면 “내가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로 고하니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은 공중부양을 한 거죠. 날아다닌 겁니다. 이런 경우가 사도행전에도 나오지요. 빌립 집사가 갑자기 광야로 가요. 거기서 이디오피아 내시와 만나죠. 이것이 뭔가 하면, 역사와 묵시의 만남이 그냥 이론이 아니고 실재로 역사 가운데서 역사와 묵시의 만남을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이렇게 하는가 하면, 이것이 바로 ‘계시’가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기서 ‘계시’에 대해서 잠시 말씀 드리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여기에 책상이 있고, 냉장고도 있고 식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둠 가운데 있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면 처음 여기 온 사람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촛불을 하나 쳤습니다. 그러면 이 촛불에 의해서 무엇이 드러납니까? 현재 배치되어 있는(존재하고 있는) 책상, 냉장고, 식탁이 비로소 드러나지요. 이것을 가지고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를 보통 ‘창조’라고 생각하는데, ‘창조’는 ‘계시’가 아닙니다. 이미 만들어진 것인데 이 만들어진 것이 어떤 계기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비로소 있는 처소와 모양이 밝혀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 촛불(빛)과 현재 존재하는 것들(이것을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하는데)이 모여서 이것이 세계를 이루는 겁니다. 창조 세계.
빛(촛불)이 개입되므로 말미암아 그동안 자기 위치를 몰랐던(내가 누군가를 몰랐던) 그것이 빛 때문에 확연하게 다 드러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빛이 함께 있다는 조건 하에 다 같이 하나님의 창조가 드러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뭐가 없습니다. 계시의 빛이 없지요. 베드로후서 1장에서는 이것을 ‘샛별’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 박사가 자기 나라에 있었는데 별이 떴지요. 이 별이 촛불 역할을 하는 거예요. 별의 움직임 따라 가보니까 예수님의 탄생과 만나지요. 그렇게 되니까 이것은 새로운 이들만의 세계, 세상이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그런데 보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계시를 안 봐요. 불신자들도 알 수 있는 그것이 계시라고 봐서 그것을 ‘자연 계시’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이 ‘자연 계시’라는 것은 빛의 계시를 모독하는 겁니다. 불신자들은 빛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을 봐도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요. 그러니 예수님의 빛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 머물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요한1서에서는 ‘어두움에 속했다.’고 하지요.
불신자들은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이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임의로 세상을 만들면 만들었지, 내가 어떤 요소처럼, 속성처럼, 부분처럼 어떤 전체의 일부로 소속되었다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 소속이 되면 지배를 받게 되니까 자율성과 창조성을 허락 받지 못해요. 나는 무조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되니까 어디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인간의 상태를 ‘어두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두움에 소속되면 어두움의 지배를 받는데, 이들의 특징은 빛을 계속 밀쳐내는 겁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빛을 미워한다.”고 했어요. 거부하고, 배척한다는 말이지요.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어두움에 속한 사람은 빛에 속한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동안 어떤 인간도 어둡다는 것을 몰랐는데 빛이 등장하니까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을 쓸 때는 빛이 등장할 때부터 써야겠지요. 그러면 “나는 빛으로 왔다.”고 할 때, 그 때 처음으로 ‘계시’라는 말을 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빛이 오기 전에 세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냥 어두움에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다 어두움에 속했지요. 그러면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도 어두움입니까? 어두움이죠. 왜냐? 빛 되신 분이 오기 전이니까 어두움이 되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이들과 마주치면서 빛을 내겠습니까, 어두움을 내겠습니까? 어두움을 내지요.
십계명을 지키면서 숨어 있던 어두움이 하나씩 돌출되겠지요. 용접할 때 불꽃이 튀는 것처럼 어두움이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방 나라는 그냥 잠자고 있고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의 법과 마주치면서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어두움들을 발생시키는 거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항상 어두운 방식으로 언약이 전개됩니다. 어두운 방식이 뭔가? 인간의 가능성이 많이 피어나는 것 같지만 갈수록 점점 인간의 가능성이 줄어들어서 사람이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이 되지요.
그러면 여기에서 함몰이 생깁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존재의 함몰’이라고 합니다. ‘함몰’과 비슷한 말이지만 같은 뜻이 아닌 것이 뭐냐 하면 ‘구멍’이란 말입니다. 구멍은 뚫어진 것이지만 함몰은 푹 꺼진 것을 말합니다.
구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면 여기에 같은 존재가 되었다가 푹 꺼져버려요. 이게 바로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에스겔 11장 이야기입니다. 함몰이 되니까 표면상의 세계와 푹 꺼진 세계와 차별이 생기는 겁니다. 표면상에서는 추석이라고 즐겁고 신나게 놀고 하지요.
우리 가족끼리 여행을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상당히 부러워해요. 보통의 경우에 가족끼리 여행을 안 합니다. 왜냐? 여행이란 가족을 피하는 것이 여행이거든요. 가족끼리 여행을 하면 가면서 싸우고 오면서 싸워서 가족끼리 가면 여행이 안 돼요. 왜? 가족이 몽땅 움직이는데 그것이 어떻게 여행입니까.
사람들은 유럽을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역사 그런 것 이야기 안 합니다. 그런 것은 그냥 슬쩍 보고 지나치고, 본 게임은 나이트클럽에서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해요. 그곳에서 낯선 이방 남자(혹은 여자)를 만나서 즐기는 거예요.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10시간 20시간 견디면서 멀리까지 가는 이유가 뭔가 하면, 낯선 이방 남자 - 이탈리아 남자 중에서는 추남이 없다고 하잖아요. 내가 본 사람들은 술이 취해서 얼굴이 뻘겋게 달았어요. -를 만나는 거예요.
여행은 나의 존재를 함몰시키는 것이 아니고, 함몰된 가정에서 드디어 벗어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지요. 남자는 총각 시절로 되돌아가고, 여자는 처녀 시절로 되돌아가서 그때의 짜릿했던, 누구에게 선택 받기를 원했던 그 꿈같은 시절을 되찾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행은 술과 자유 이 둘이 결합하는 겁니다. 술을 먹되 잔소리 안 듣고 자유롭게 먹는 것이 여행을 통해 기대하는 바인데, 만약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면 또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숙소에 늦게까지 안 오면 또 전화가 오고 할 것인데 여행의 즐거움이 있겠어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가족이 함께 여행을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굉장히 의아해 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고 그랬어요. 어떤 청년은 ‘나도 우리 아버지와 함께 여행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소리도 들었어요.
존재라는 것은 향상되고 비약하는 것이 존재의 본능입니다. 예전보다 더 맛있는 음식, 수입도 과거보다는 더 많이. 이것이 존재가 꿈꾸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존재를 상승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함몰되게 만들어요. 살아 있는 존재들은 살아 있는 존재들끼리 생명을 찬미하고 서로 투쟁하면서 생명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함몰된 사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었는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안 죽게 만들어요. 이게 에스겔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죽었는데 안 죽은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심판을 받았는데 전혀 심판이 아니고 그 자체가 구원이 되게 하시는 --
함몰되기 전 표면상으로 ‘하나님 잘 믿겠습니다. 교회에 충성하겠습니다.’라는 사람들은 아직 구원이 뭔지 몰라요. 본인이 함몰되어 봐야 ‘아, 내가 지상에서 구원 받겠다고 발버둥친 것이 하나의 오기였구나.’를 알게 돼요. 함몰된 사람이 함몰된 자리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어두움으로 보이는데, 반대로 세상에서 함몰된 자를 보면 함몰된 자와 그 자리가 어두움입니다.
제 여행기에 그런 말을 했지요. “젊은이들을 보니까 불쌍하다. 남은 생애를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천재가 아닌 것을 빨리 알아야 되고, 영웅이 아닌 것을 빨리 깨달아야 되고, 그냥 소리 소문 없이 왔다가 조용히 떠나면 된단 말이지요. 그런데 젊은이들은 꼭 자신이 튀려고 해요. 자기의 존재감을 자꾸 드러내려고 한단 말입니다. 왜? 자기는 빛이고 싶으니까. 나는 빛이고, 남에게 관심을 받고 싶은 거예요.
성경을 모르니까 자신을 빛으로 여기는데, 빛으로 여길 때의 특징이 뭔가 하면, 자기 자랑이고 자기 의로움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해서 자랑스럽습니다. 민박하는 사람 집의 식당에 여러 사람들을 교체해 가면서 같이 식사를 했는데, 대부분이 유학 온 학생들이에요. 여학생이 국제정세, 문화,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를 하는데, 한 여성은 38세로 디자인 회사에 근무하다가 사표 내고 미술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다고 유학 온 사람도 만났어요.
이게 뭐냐 하면, 어쨌든 나는 빛이고 싶고,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것이지요. 자기 하고 싶은 것이 뭔가 하면, 자기 자랑거리를 확보하는 거예요. 신에게 기도해서 축복을 받게 되면 내 자랑거리가 생기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밑천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밑천은 자기 착함, 의로움, 거룩 등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것이 있을 경우에 그 의를 담보로 해서 남이 아닌 나에게 신의 축복이 집중되도록 해서 나의 자랑거리가 생기고, 그렇게 되면 주목받는 인간, 빛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게 젊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함몰이 되어야 해요. 함몰은 절망이고 위기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신앙을 지킨다고 카타콤(지하 묘지)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왜 잘못인가 하면, 희망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들은 지금 순교하겠다는 각오를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오기입니다. 폭군이 교회를 탄압하고 해도 그냥 밥 먹고 살면 돼요. 그런데 따로 집단적으로 모여서 무덤 속에 들어가서 예배드린다고 난리를 치고 그러지 말고 그냥 평소대로 살면 돼요. 예비군 훈련 나오면 훈련 참석하고, 우상 섬기라고 하면 섬기면 되고 ---
주기철 목사는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나는 무엇무엇은 절대 안 하겠다.’는 것은 마치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주여, 나는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오기와 같은 종류입니다. 사람이 ‘나는 무엇을 하겠다. 안 하겠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이런 소리를 하는가 하면, 자기가 중립의 유치에 있을 때 그런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중립이 아니고 날 때부터 죄인이죠. 그러면 죄인 값을 하면 돼요. ‘하겠다, 안 하겠다.’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주여, 이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하고 가만히 있으면 돼요. 그러면 주님이 알아서 구원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가만히 있질 못해요. 태생이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에 어두움은 자신을 빛으로 착각해서 빛다운 행동을 하려고 해요.
요새 젊은이들이 자녀 이름을 지을 때 ‘김 빛나’ 이런 식으로 짓잖아요? 그냥 이름을 ‘김 어둠’이라고 지어도 괜찮단 말이지요.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구원은 우리하고 상관없습니다. 다만 구원의 능력이 오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구원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구덩이에 빠져서 자력으로 주께서 원하는 자리에 갈 수 없음을 압니다.
제가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바쁜 나를 여행하게 하셨는가?’ 이유를 몰랐는데 아우구스투스 백작 성에 가서 알게 되었어요.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구조적 범죄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농노들이, 요즘 시대 같으면 대모를 하겠지만 그들은 그냥 팔자려니, 운명이려니 하고 묵묵히 일해요. 우리나라에도 조선시대에 다 그랬잖아요.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나의 자리야.’ 라고 생각했지, 자기의 권리나 이런 것을 주장하지 않았어요.
하나의 구조에 속하게 되면, 이 구조가 ‘옳다, 그러다.’를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판단이 안 돼요. 그래서 여행을 해보란 말이지요. 그러면 ‘아하, 이동네 사람들이 잘못했구나.’ 우리 보기에는 분명히 잘못된 거예요. 어떻게 1시간 동안 줄 서있는 대열에서 담배를 피웁니까? 그것도 30대 여자가. 제가 화가 났습니다만 영어를 할 줄 몰라서 참았습니다.
사람이 성화된다고요?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가정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그 가족은 그 가정을 빛으로 보지만 다른 가정에서 보면 그 가정은 엉터리입니다. 우리나라는 명절에 제사를 지내면서 이것을 미풍양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추석 때 왜 죽은 사람들에게 절을 하고 음식을 차리고 하지?’
우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구조적으로 따라가는 거예요. 새댁이 시집을 가게 되면 처음에는 어렵게 교회 나오고 하지만 나중에는 자진해서 시댁의 종교에 맞춰 삽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내 사랑하는 남편이고, 그의 부모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 구조적 권력에서 어떤 사람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언어고, 언어는 곧 법이고 힘입니다. 그쪽에서 소통되는 말을 구사하지 않으면 그쪽에서 힘을 쓸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쪽 가정에서 나오는 그 힘을 인수받으려면 철저하게 그쪽의 사고방식을 모방해야 되고 수용해야 됩니다. 이것을 ‘전통’이라고 하지요.
‘전통’의 끝에는 반드시 ‘전설’이 있고, 전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을 이 사회는 ‘영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영웅’이 등장합니다. 그 전에 여러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들은 별 볼일 없어요. 영웅이 등장해서 땅을 확보하고, 권력을 확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인데, 여기에 하나님은 뭘 주십니까? 구약(메시아가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함몰, 푹 꺼지게 만들었어요. 꺼지니까 여기에 누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인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꺼진 세계를 가지고 에스겔 11장 16절에서는 ‘성소’라고 합니다. 한 번 읽어봅시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성소가 되리라.’고 했어요. 거룩한 장소가 되는 거예요. 자, 여기서부터 강의가 어려워집니다. ‘성소’가 집단입니까, 공간입니까? 공간이 되면 안 되지요. 그러면 그 장소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 되잖아요. 여기서 ‘잠간 성소가 되리라.’고 하니까 사람들의 집단과 동행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기 함몰 된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있는데, 여기에 누가 합세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합세하니까 불 가운데서 같이 춤을 췄어요.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단3:14)고 하면서 느부갓네살이 화가 나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불속에 던졌지요.
즉, 죽음의 세계로 몰아넣어 죽은 줄 알았더니 그곳에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같이 계신 거예요.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어서 죽음의 세계로 갔는데 거기에 주님이 계셨지요. 죽어서 믿는 자도 영원히 죽지 않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죽음에서 받아내게 되면 본인의 입장에서는 절망이고 위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절망을 ‘돈이 없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절망이 아니고 사람의 절망은 자기의 빛이 소멸될 때 절망이 옵니다. 자기 빛이 소멸되니까 자기 의가 없어요. 자기 의가 없으면 하나님께 가도 뭘 달라고 요청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여, 축복 주옵소서!” 라고 할 수가 없어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지요. 세리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이것을 받아내는 거예요. 이 절망. 자기 의가 없는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에 가지요. 왜? 그들은 자기 의를 가미할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받은 의, 하나님의 의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의로 하나님의 의를 가리니까 지옥 가지요.
방금 제가 신약의 누가복음을 이야기했지만 에스겔은 구약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누가복음은 쉽지만 구약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구약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빛, 자기 의로움 때문에 버티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버릴 리가 없다는 것 때문에 버림 받은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바로 에스겔입니다. 이게 바로 선지자입니다.
이 사람들이 함몰 된 자리, 심판의 자리에 가기 전에 먼저 간 무리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자기 약속의 땅을 버리게 만들고 추방되게 만드는 겁니다. 추방되니까 이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추방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추방된 자리가 혹이 똑 떨어져서 떨어진 이 자리가(에스겔 11장 16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떤 경험을 하는가 하면, 똑 떨어지는 경험을 해야 됩니다. 위기와 절망.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의 구원이 찾아오는 겁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찾아왔기 때문에 똑 떨어지게 만들어요. 가장 소중한 것이 사라져 버릴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생각한 나의 자랑거리와 소중한 것이 있으면 복음도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원래 성경의 복음은 어떠한 것보다 더 소중한 거예요. 지난 8월 에 하나교회에서 요한계시록을 강의하면서 이걸 말했어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그런지 어제 하나교회 물난리가 났어요. 온 천하 속에 하나교회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반대로 해 봅시다. 물난리가 나고 온 천하를 잃어도 귀중한 복음을 얻는다면 결과는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안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강제로 그들을 밀어 넣은 겁니다. 모든 것이 강제성입니다. 왜냐? 이것이 하나님의 구조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날 때부터 본의 아니게 부모가 전통적으로 형성해 놓은 구조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 가정이 저지른 범죄에 가담하게 됩니다.
히틀러 말고 2인자가 있어요. 500만 유대인을 학살한 사람. 유대인을 학살했던 수용소가 폴란드에도 있지만 독일 뮌헨에도 있어요. 이번 여행에서 제가 그곳을 가보려고 했는데 아내와 딸이 강력이 반대를 했습니다. 여행의 즐거운 분위기 버린다고.
그 2인자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 직무에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남이 하기 싫어하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안 거예요. 남이 하기 싫은 것을 알아서 먼저 해버리면 승진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보상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권력자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도 알았어요.
자기는 어릴 때부터 성실했고, 직장생활 하면서도 열심히 충성했고 그래서 자신이 출세한 것이 모델이 되어서 승진과 출세를 원하는 후배들이 자신의 걸어온 길을 따르도록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전쟁 후 재판에서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나는 히틀러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공직자로써 상관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당연한 도리 아닙니까? 당신(재판관)들은 안 그렇습니까? 당신들이 왜 나를 재판합니까? 상관이 재판하라고 하니까 재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신들이나 나나 똑같은 입장 아닙니까?”
(재판관의 질문) “그러면 억울하게 죽은 유대인 500만의 영혼은 누가 달랠 것인가?” 라는 물음에 “그 사람들은 내가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우연히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그들의 지도자는 권력이 없었을 뿐이고 나에게 명령한 지도자는 권력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그들 죽은 것은 히틀러한테 물어야지 나에게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라고 했어요.
이것은 박정희 시해할 때 김재규 편들었던 사람의 논리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변호사가 시키지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라고 하잖아요.
왜 사람들이 직장생활 하다가 그만 두고 미술사 공부한다고 유학을 가고 그러는지 아시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한 통속이 돼요. 그 구조에 속해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독자적인 자랑 거리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겁니다. ‘너는 00회사 직원이다.’라는 것을 회사 측에서도 세뇌를 시켰고, 기껏 내가 00회사에 직원이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그런 식으로 평생을 보낸다는 것이 화가 나는 거예요.
‘나도 이정도 경력과 능력이면 회사 차려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해서 사표 내고 나오는 거예요.
직장에서 ‘남이 하지 않은 일을 내가 먼저 하면 승진한다.’는 그 생각이 바로 유대인 500만을 죽인 겁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내 직무를 감당했을 뿐이라는 거예요. 연못에 개구리가 있느냐, 없느냐는 관계없어요. 그냥 연못에 돌을 던지라고 해서 돌을 던졌을 뿐인데 개구리가 돌에 맞아 죽은 거예요.
결국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는 좁아요. 반경 몇 Km 안 돼요. 자기가 충실했다는 것이 뭡니까? 결국 자기가 배우고 익히고 아는 지혜와 지식 범위 내에서 자기는 Best do it! 최선을 다 한 거죠. 나의 생존을 위한 최선이 상대방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된다는 말이지요.
부잣집에서 일하는 가정부가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식탁을 차리니까, 그 집 아들이 술 취해서 그 고급 요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 때 가난한 가정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지요. 그게 뭐냐 하면, 부잣집 아들은 자기 구조에서 배운 것이 뭐냐 하면, ‘네가 먹은 것은 네가 치워라.’는 것만 배운 거예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 지식과 지혜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습니까? 말씀을 주실 때, 이스라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니까 이 말씀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시도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걸 확장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함몰되도록 했어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곳으로 집어넣었어요.
출애굽 할 때 그들은 성공하는 줄 알았지요. 홍해가 갈라지고, 뒤따라오는 군대가 바다에 빠져 몰살하고 할 때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대우 하는 줄 알았지요. 하지만 그들이 당도한 곳은 애굽보다 훨씬 못한 광야였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너희 자신을 위한 세계는 하나님이 원하는 세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내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해 짜증 내지 말고, 내 것이 있어야겠다는 것 때문에 힘들었든 그 모든 노선이, 그 과정들이 몽땅 다 날아가면 안식을 누립니다. 나의 성공과 축복과 자존심을 내가 챙겨야 된다는 그 힘든 수고와 역경의 세월을 주께서는 몽땅 바꿔치기 하는데, 더 이상 그럴 필요 없는 세계와 바꿔치기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하게 되면, 에스겔 11장 16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소가 되면 이 공간 구조의 주도권은 어떤 스타일이 됩니까? 하나님 은혜의 힘으로 넉넉해 하고 만족하는 그런 스타일로 바뀌겠지요. 이 안에서의 싸움은, 내 것을 주장하는 세력과 주님의 것으로 족하다는 세력이 우리 내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겁니다.
에스겔 11장 1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그렇게 되어 있지요.
사람은 왜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까? 자기 것을 자기가 사수하기 위해서는 방어 자세를 취해야 되지요. 그러면 모든 신체가 다 긴장 상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드러운 마음이 되었다는 말은, 내가 더 이상 사수할 나의 것이 없는 거예요. 왜? 만약 다시 내 것을 쥐려 하면 또 절망하고 함몰 되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꼭 ‘내 것 없으면 남의 것은?’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는데, 내 것 없으면 남의 것도 없어요.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거예요. 우리는 내 것이 아니면 남에게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은혜 받았으니까 내 재산 교회 바치자고 하는데, 그냥 가지고 계세요. 왜냐? 하나님은 누구로부터 받는 분이 아닙니다.
왜 로마식 교회(천주교)가 그렇게 성전을 지었는가 하면, 바깥 공간과 안 공간의 차이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데, 왜 바깥과 차이나는 안을 굳이 만들어야 됩니까? 인간들은 뭔가 칸막이를 해 놓으면 그 안에 하나님에 오실 줄로 아는데, 칸막이 안에 들어오는 것은 개밖에 없습니다. 개만 들어가요. 하나님이 개입니까?
공간이 이렇게 넓은데, 칸막이를 해 놓으면 그 안은 좁은데 왜 그 안에 들어옵니까? 그 안은 좁은데. 그런데 사람들은 뿅하고 가지요. 왜? 그 공간을 가두어 놓으니까 신비해 보이는 겁니다. ‘야, 하나님이 여기 오시지 어디 오시겠어?’ 이렇게 된다니까. 그러나 밖에 나와 보세요. 밖이 훨씬 넓어요.
사람들이 산을 찾는 이유가, 내가 전부라고 여겼던 그 공간이나 사람들이 산 위에서 보니까 개미보다 더 적어요. 제가 알프스 산에 올라가서 보니까 하늘이 땅보다 넓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인간이 뭔가 바친다는 것, 하나님은 안 받습니다. 쾰른 대성당 안의 공기보다 바깥이 더 공기가 좋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예배드리지 말고 바깥 넓은 곳에서 예배드리면 돼요. 로마식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한국식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화려하고 크게 예배당을 왜 짓습니까? 나는 이해가 안 돼요.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않고, 친히 만민에게 생명과 만물을 주시는 분(행17:24-25)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 계시는 성전이라고 하면서 큰 건물을 짓느냔 말이지요.
로마에 가니까 전부 다 우상 건물로 가득 찼어요. 독일도 그렇지만 로마만큼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건물을 지어도 사람들이 안 오니까. 그래서 정말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민박집에서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세리도 살리시고 창기도 살리시는 거예요. 창기, 세리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의롭게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도 배고프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우리는 한계가 있으니까. 이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이걸 ‘성화되었다. 의롭다. 거룩하다.’라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내가 태어난 가정부터가 죄악인데, 내가 다니는 직장 자체가 범죄 하는데 그곳에 합세하지 않으면 직장에서 쫓겨나는데 이런 인간이 뭐가 의롭습니까? 인간은 절대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주께서 은혜 주셔서 내 힘으로 내 죄가 해결 안 된다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은 주님 만난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2010. 10. 5. 09:37 녹취 : 서경수)
관리자(IP:124.♡.87.52)
10-10-12 19:08
광주100924b에스겔11장14절b
광주 강의(2010. 9. 24) 11-2
두 번째 시간입니다.
11장 19절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른 마음을 주지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마음이 아니라 다른 마음입니다. 우리의 원래 마음은 어디서 흘러들어온 마음입니까? 부모의 마음이죠. 부모의 마음이 우리에게 흘러왔고, 이것을 우리는 혈육이라고 하지요. 부모의 마음은 그 위의 부모와 관련되어 있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마음을 준다는 말은, 이 새로운 마음에도 부모가 있어요.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것이 왔다면 새로운 마음은 다른 노선에 계셨던 분의 마음이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 부모는 각자 달라요. 그러나 결국 한 곳으로 모이는데, 아담의 마음이 계속 퍼져서 우리 부모의 마음을 이루었고, 그 마음을 우리가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우리에게 들어온 새로운 마음이 아담의 마음이 아니라면 어디서 온 것인가? 인간을 새로 만들어야죠. 일치된 마음을 가지려면 새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아담 외에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새롭게 사람을 만들어야 됩니다. 새롭다는 말을 하려면 기존의 아담과는 단절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논리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것이 있어요. 모든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왔다는 말은 개별자(개인)가 성립이 안 돼요. 이것을 중세철학까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근세철학에 와서 ‘인간이 개인이냐?’ 하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르트르, 라캉, 들뢰즈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철저히 밝혀졌습니다.
사르트르는 프랑스 철학자인데, 이 사람이 ‘돌멩이와 우리의 차이점이 뭔가?’ 할 때, “돌멩이는 반성하지 않지만 우리는 반성한다.”고 했어요. 반성한다는 것까지만 이야기했어요. 반성할 때 누구보고 반성하는지는 이야기를 안 했단 말이지요. 누구보고 반성하겠어요? 남보고 반성하지요. 여기서 ‘타인’이 등장합니다.
네비나스는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이 ‘타인’에서 굉장히 많은 힌트를 얻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갖고 있던 모든 ‘옳고 그름, 선과 악’ 이 모두는 누구를 본보고 판단하는가 하면, 주위 사람들 중에 자신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는 사람에 의해서 이것이 조작되어 형성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콜버그(Kohlberg)의 [도덕발달 이론]이 나오는데, ‘도덕발달 이론’은 ‘종교발달 이론’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심리적으로 인간의 도덕이 어떻게 발달되는가 하면, 원숭이는 4세가 되면 두뇌 발달이 완성되지만 사람은 20세가 되어야 완성된답니다. 그러면 20세 이전 청소년기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철저히 선과 악을 가르치면 선과 악을 아는데, 20세 되기 전에 나쁜 것을 보게 하면 이 아이는 이 구조가 그대로 굳어져서 자기가 하는 짓이 남에게 피해가 되고 나쁜 짓인 줄 구분을 못해요.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결손가정의 경우에는 이 역할이 부족하기 때문에 결손가정 자녀들은 양부모 가정의 자녀에 비해 문제가 있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증명되고 그런 학자들의 주장이 대세를 이룹니다.
가르친다는 말은 수학, 영어를 가르친다는 말이 아니고,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이야기할 때는 어떻게 하고, 남 앞에 행동할 때는 어떻게 하고, 남이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를 간파해야 되고, 그런 것을 ‘사회를 배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고 했지요.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이라는 이탈리아 학자가 있어요. ‘인간은 정치할 때 벌거벗은 류와 정치적 류를 가려내는 자체가 정치다.’라고 했습니다. 벌거벗은 류는 가난한 자, 무능한 자 이런 사람들을 왕따시키는 그 행위를 정치라고 보는 겁니다. 정치적 류는 건전한 사람, 괜찮은 사람, 우수한 사람들을 계속 뽑아 세워서 그것을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삼고, 그곳을 따라오도록 하는데, 못 따라오는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듯이 도태시켜서 잘라내는 그 행위를 이 안에 들어온 사람들로 하여금 배우게 해서, ‘언제든지 너도 내 말 안 들으면 저렇게 왕따 당하고 잘려나간다’는 것을 규제의 원칙으로 삼는 것이 정치라고 봅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뭔가? 전체주의입니다. 전체주의라는 말은, 전체가 있어야 개인의 생명이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전체주의의 대표적인 사람이 독일의 칼 슈미트(Carl Schmitt)라는 정치학자고, 이 사람이 히틀러를 동조했습니다. 이 사람은 독재가 되어야 나라 꼴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진중권’인데, 이 사람의 주장은 ‘당신이 만약 북한에 산다면 그런 소리 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해요. 당신과 같은 그런 주장을 북한에 가서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왜냐? 북한은 기본적으로 생존이 힘들어요. 그들은 그 생존이 힘든 상황을 절대적 신앙심(김일성 가문에 대한 충성)으로 버티고 있어요. 이런 미친 신념(종교) 없으면 못 견디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우리나라의 무속신앙(무당에게 무조건 목숨 바치는 신앙심) 때문에 그런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통일교와 여호와 증인. 뭔가 정신적으로 집결된 것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해도 듣기지 않아요.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주장에 의하면, 생존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투쟁이 벌어지는데, 그 투쟁은 ‘만인대 만인의 투쟁’입니다. 1:1로 투장하는 것이 아니고, 1:5로 투쟁하는 것도 아니고, 동서남북 다 투쟁입니다. 명절에 여러 형제들 모여보세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집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와 싸우고, 시어머니는 아들과 싸우고, 그러다 형제간에 싸우고, 그 자식들까지 가담해서 싸우고, 그야말로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집니다.
왜 이렇습니까? 생존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근본적으로 인간은 메슬로우의 [욕구이론]처럼, 기본적으로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이것 보장 못하면 인간의 어떤 종교, 신앙이라는 것 다 허망한 것입니다.
제가 쓴 여행기에 나오지요. ‘신(神)보다 현실이 더 세다.’ 현실이 내가 신봉하는 그 신보다 더 세요. 태풍이 불면 예배당 지붕이 달라갑니다. 그러면 예배고 기도고 없어요. 먹는 것, 입는 것을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광야에서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에서 확인됩니다. 사람은 먹는 것 없으면 못 살고, 그 다음은 명예, 그리고 권력. 이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행스럽게 여기세요. 못 벗어난다는 것을 제가 강조하는 이유가, 벗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처녀들 중에 이런 소리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결혼은 하기 싫은데 아기는 갖고 싶다.”고. 여자가 아기를 가지면 그 다음부터 여자는 끝났습니다. 아이가 왕입니다. 모든 것이 아이 위주로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여자의 인생은 없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되면 그것이 좋아요. 아이만 있다면 내가 없어져도 괜찮은 거예요. 왜냐? 나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다 옮겼기 때문에, 기대, 희망을 다 자식에게 일임했기에 자식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아요.
방금 한 이야기가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돈과 생존과 인기와 세상 권력에서 못 벗어나는데 이게 슬픈 조건이 아니에요. 이 조건 그대로 새로운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죽어도 죄에서 못 벗어난다.’와 똑 같은 조건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밑에는 ‘우리는 지옥에서 못 벗어난다.’ 위에는 ‘우리는 천국에서 못 벗어난다.’
이러한 사실이 좋기는 한데, 과연 내가 어디에 해당되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겠지요. 이 물음에 대해서 본문에서는 ‘일치된 마음’이라고 했어요. 일치된 마음을 주었다는 말은, 나만의 개성이 여기서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일치된 마음이 되려면, 첫째 시간에 ‘함몰’을 말하면서 어디에서 똑 떨어져야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똑 떨어진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이들의 일치된 마음이 뭔가 하면, ‘나도 옛날에 내 의, 내 잘남으로 버티다가 (감나무에서 감에 떨어지듯) 똑 떨어졌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내가 과연 때려죽여도 천국 가야 되고, 어떤 경우라도(마치 내가 이 몸 가지고 돈 좋아하고, 명예 좋아하고, 권력 좋아하는) 이 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최종적인 나의 몸은 주님의 축복과 사랑과 용서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는 그 문제에 있어서 제가 해답을 제시했잖아요.
그 해답이 뭡니까? 자신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고백합니다. 과거는 내 중심이었는데 지금은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즉 예수님 중심이 된 것이 공통점입니다. 전에는 내가 힘써야 겨우 사는 시절이었다면 현재는 내가 사나 죽으나 주님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중간에 똑 떨어지는 이러한 변화는 내 손에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압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변화가 없으면서, 이런 똑 떨어진 것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어요.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한데, 목사의 경우에도 굉장히 많아요. 지금도 그 사람들의 설교를 제가 듣고 있습니다. “안 떨어졌는데? 안 떨어졌어! 복음을 이용해서 목회 성공하려고 하네.”
교회가 있다는 것과 내가 목사라는 것이 뭘 방해합니까? 이것이 복음을 방해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정말 ‘일치된 마음’(겔11:19)에 해당되는 자입니다. 제가 독일에 여행가서 한윤범 목사님, 오용익 목사님이 우리교회에서 설교하는 것(네 번 설교) 다 들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설교를 잘 할 수 있을까?’ 저는 걱정이 되는 거예요. 아내는 좋다고 즐거워하고 있는데 나는 근심에 가득 찼어요.
한윤범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를 잘 하시는데 교회가 없어요. 교회가 없으면 뭐가 없습니까? 목사가 아니지요 뭐. 이 두 개가 없어요. 그런데도 복음이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보통 이 두 개가 없으면 삐쳐서 ‘나 교회 주세요. 나 목사노릇 하게 해 주세요.’ 이런 것이 나올 텐데, 이것 있으나 없으나 복음이 나온다는 것이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는 삶입니다.
그분은 과거에 ‘교회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나도 훌륭한 목사 되겠습니다.’ 라는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똑 떨어졌기 때문에, 현재 교회 없고 목사 없는 이 상태라도 복음으로 만족하는 것은 외부에서 강력한 성령의 개입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떨어진 사람은 어떠냐 하면,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면서 꼭 ‘그래서 교회 부흥해야 되고, 남들이 나를 목사라고 인정해 주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라는 것이 계속 남아 있어요. 이런 것이 계속 남아 있는 사람은 복음을 전해도 기쁘게 전하지를 않습니다.
제가 복음 안다는 사람과 24시간 같이 있어도 웃는 얼굴을 전혀 못 본 사람도 있어요. 웃지를 않아요. 한이 맺힌 사람 같았어요. 한 맺힌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죄를 몰라요. 맺힌 한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 가치가 주님의 복음 가치보다 더 우선하기 때문에 한 풀 생각을 하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안 나와요.
이것이 똑 떨어지게 되면, 이 안에서는 세상 온 천하보다도 복음을 알게 된 것을 더 기쁘게 여깁니다. 그래서 목사의 입장에서는 교회나 목사 이것이 똑 떨어지게, 어떻게 떨어지는가 하면, 교회가 위기를 맞게 되고 목사의 위기를 맞게 합니다. 쫓겨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담임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과 내 구원이 상관없고, 내 목사 노릇 하는 것과 내 구원이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 성도들은 쉽게 이해해요. 내 직장 생활과 내 구원이 상관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직장을 버리고 나올 필요도 없어요. 그냥 다니면 돼요. 왜?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상관이 없는데 자꾸 억지로 결부를 시킵니다. ‘이번 달 이렇게 소득이 많을 것을 보니까 내가 착한 일 해서 하나님이 복 주셨지.’ 라고 자꾸 연관을 시킵니다.
이것은 착각이고 환각입니다. 이미 팔이 잘렸는데 누가 팔 있는 위치를 스쳐 지나가면 몸을 움츠리고 아픔을 느끼는 것처럼.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지요. ‘아하, 맞다. 이것은 내 구원과 관계없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목사한테는 교회가 생계 수단이지만 일반 교인들에게는 자기 자존심이고 자기의 역사가 됩니다. 이것이 똑 떨어져야 돼요. 교회와 구원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이란 것은 이미 함몰된(선택된) 사람에게만 주께서 동행하셔서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시고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것이 에스겔 11장 14절부터 20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일치된 마음이 되려면, 여기에 100명, 1,000명이 있더라도 각 사람의 개성은 무시하고 일치된 마음, 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이 한 곳에서 성령이 쏟아지는데, 이렇게 하시는 분이 한 분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모든 것을 한 분에게 종속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냥 뿌려지는 것을 받아 챙기게 되면 ‘나는 10개 받았다. 나는 50개 받았다.’ 이렇게 될 텐데, 그것이 아니고 뿌려진 것을 받았으면 반드시 주신 분을 쳐다보도록 하십니다. 로마에 있는 어떤 역에서 제 딸이 이런 말을 했어요. ‘아프리카 사람 중에 두 종류가 있는데, 한 부류는 인상이 더럽고 흉악하게 생겨서 돈 뜯어내고, 또 한 부류는 아주 깔끔하게 생긴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앵벌이의 오야붕(대장)이다.’ 라고 해요. 자기 부하가 벌어온 것을 가지고 오야붕은 호의호식하고 있어서 그렇게 깔끔하고 품위도 있어 보이고 그렇답니다.
제가 여행을 가서 본 것은 ‘도시 삶은 본래적 기능’입니다. 여행을 다니면 많은 사람들이 도시의 유적지를 보지만 저는 ‘도시의 삶’을 봤어요. 로마라는 도시에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250만 됩니까? 어쨌든 ‘로마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이것을 살피는 것도 중요한 관광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콜로세움 앞에 화단의 잘 가꿔놓았는데, 그 화단을 타넘고 확 도망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들이 누구냐? 스리랑카에서 온 잡상인들이에요. 아주 조잡한 물건들을 길거리에서 팔고 있었는데 경찰이 단속을 나오니까 불법체류자여서 그런지 급하게 도망을 갔어요.
이것이 바로 로마의 진솔한 모습입니다.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밥 먹고 사는가? 관광이란 것은 그냥 슬쩍 보고 떠나면 끝이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돈을 벌어야 먹고 살잖아요. 그러면 그 도시에서 뭘 봐야 합니까? ‘내가 만약 로마 시민이라면 이곳에서 뭘 하면서 살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야지요.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진정한 여행이 돼요.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로마의 유적지를 보고 거리를 그냥 보고 지나가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내가 이곳에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란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산단 말이지요.
이처럼 성령(일치된 마음)을 받은 사람은 그 때부터 ‘나는 성령 받았으니까 이제 구원 받았다.’ 이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식으로 죄에서 벗어났는가?’ 그 여정에 대해서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스리랑카 사람이든, 로마 시민이든)들처럼 본래적 기능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사람인데 이 땅에 오셨다가 천국으로 갔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천국의 언어를 배워야 해요. 언어는 곧 법이요, 힘입니다.
성령 받았다면, 우리는 ‘이제 구원 받았다. 영생 얻었다. 끝이다. 내 갈 길로 가자.’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성령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일치된 마음’이란 결국 ‘일치된 언어’입니다. 그런데 이 언어는 누가 사용합니까? 예수님만 세상 보는 눈을 가졌고, 예수님만 세상을 듣는 귀를 가졌잖아요. 그 귀와 눈을 우리가 이제 일치된 마음으로 가져야 되는 그런 인생이 펼쳐집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일치된 마음을 우리가 정리해서 갖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시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정리하는 거예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서로 존경하자!’ 이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주께서 역사하셔서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 ~하라. ~하지 말라.’의 작업입니다.
제 지난 수요일 설교 들어보셨습니까? 선악과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은 우리가 죄인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만이 정결함을 드러내지요. 그러면 우리가 죄인 되면 될수록 상대적으로 주님은 더욱 정결하지요. 인간이 피조물로 만들어진 목적이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깨끗한 분은 지상에 다시는 없네.’ 하고 예수님을 주로 높이는데 우리가 동원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라. ~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치된 마음을 주는 거예요. 예수님과 일치된 마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 속에 있는 율법적(선악적)인 요소에 쳐들어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 내부에서 ‘~은 했고, ~은 안 했다.’는 것이 정죄되지요. 이것을 지속적으로 말씀으로 파고들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계속 죄가 누적되지요.
죄가 누적되면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점점 더 곤궁에 빠지지만 우리는 점점 더 기쁘지요.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은 어떤 말씀을 어겼지?’ 라고 하면서 살핍니다. 점점 더 기쁩니다. ‘~하라. ~하지 말라.’를 통해서 정말 더 기뻐지는 겁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말씀을 보는 순간, 우리가 일치된 마음이 아니라면 화가 나지요. ‘더 이상 어쩌란 말인데!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여기서 더 이상 어쩌라고?’ 이렇게 성질을 부리지요. 이렇게 되면 평소에 일치된 마음이 있다고 봤는데 그것이 아니었어요.
적어도 세리처럼 주님 앞에 나와서 “주여, 저는 죄입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주님이 늘 그렇게 이끄시지요. 그래서 십자가는 정과 욕심을 못 박는 장소입니다. 주일 설교에서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한 강도는 십자가 옆에 있지만 구원 받은 강도는 십자가가 남의 십자가가 아니고 자기에게 덮쳐왔어요.
오 목사님이 하나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예수님의 저주 받았음을 믿어라.”고 했잖아요. 자기 정과 욕심을 어떻게 한다? 못 박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일치된 마음을 갖게 하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 대신 죽음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이것을 수요일에 했는데, 1층 2층이 있다면, 만약 1층에 ‘주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거기에 장단 맞추려고 할 텐데, 그런데 1층에서 2층으로 옮기게 되면, 주님께서 이렇게 여러 가지 속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2층에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상세한 것을 수요일 설교했기 때문에 참조하시면 됩니다.
관리가 돼요. 관리 되면 관리 되는 그 현상을 한 마디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여러 가지 사건들이 주어지지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 반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와 자신의 잘남을 가지고 ‘나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없다.’ 혹은 ‘내가 잘났기 때문에 이런 복을 받은 거야. 너도 나처럼 하면 이런 복을 받아.’ 등등 어떤 쪽으로든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반응을 나타내면 이것이 나만의 개성이 되지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일치된 마음’이 아니죠. 하나의 개성입니다. 개성이 될 때 사건을 통해서 되면, 그 사건은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예수님과 일치된 마음을 주기 위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발생시킨 사건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 사건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벗어날 수 있어요? 못 벗어나지요. 그러면 매일같이 우리에게는 그날의 숙제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매일의 숙제는 우리 숙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숙제란 점에서 우리는 홀가분하단 말이지요. 특별히 우리가 뭘 하겠다는 것이 의미 없습니다. 그냥 우리는 주어진 것에 반응하다보면 하루 24시간이 다 가요.
‘오늘은 내가 뭘 할까?’ 하면서 가만히 있는 사람은 없어요. ‘뭘 할까? 심심한데 TV나 볼까.’ 하고 방에 갔는데 아내는 연속극을 보고 있어요. 나는 뉴스를 보려고 하는데 아내가 동의 안 해요. 그래서 다투게 되면 벌써 사건이 벌어졌지요. 그러면 ‘주여, 제가 보고 싶은 뉴스를 왜 못 보게 하십니까? 빨리 연속극 끝나게 하옵소서.’ 하면 그것이 일종의 반응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기도 안 하는 순간이 없어요. 늘 기도해요. 자기 뜻대로 되기를. 그런데 그 배후에 주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욕망, 아담 본래의 개성 발휘를 희석시키고, 완화시키기 위한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그 날은 우리가 인간 된 것 같지요. 그 후 또 우리는 우리의 개성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고, 그냥 살면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의 문제를 대신 해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을 느끼는 사람이 성령의 ‘일치된 마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았다는 말은 십자가가 계속 나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십자가의 삶이란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는 주님의 행위로만 증거 될 뿐입니다.
십자가의 삶이 뭔가? 거룩한 삶이 뭔가 하면, 주께서 나의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 외에 더 이상 거룩에 합당한 삶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십니다.’ 이 고백이 최고예요.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증거하는 것,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제가 이렇게 분명히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수심이 가득하고, 우수에 잠긴다면, 이것은 내 공들였던 개성이 날아가 버릴까봐 겁나서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주님과 일치된 마음을 주시면 그 마음 갖고 있으면 돼요. 주께서 “십자가 질게.” 하시면, 우리는 “고맙습니다. 십자가 아니면 구원 못 받습니다.” 이게 일치된 마음이거든요.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주옵소서.” “오냐, 그렇게 할게. 그것 때문에 내가 피 흘렸다.” 이것이 바로 일치된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에스겔에 예언된 하나님의 영원한 성소에 허용된 마음입니다. 이 언어와 이 법 외에는 다른 일체의 언어와 법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새 언약이란 것이 뭐냐 하면,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많은 사람에게 하나를 주기 위해서 하나로 나올 때 여기서 무엇이 병행되는가 하면, 이 모든 사람은 사라지고 여기서 예수님의 몸이 되는, 예수님의 몸이 되면 많은 사람이 지체가 될 수 있어도 그들의 개성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이름은 뭔가? 예수님의 이름이죠.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 몸에서 영이 나옵니다. 영이 나와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일치된 마음을 갖고 있는데, 여기 예수님의 몸이 그냥 살아 있는 체로 나왔다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이미 죽은 몸입니다.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래서 일치된 마음이 왜 죽고 난 뒤 부활하시고 오시는가 하면, 여기서 우리의 마음을 괜찮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여기 ‘우리’라는 것을 아예 없애버리고 예수님의 몸에 의한 ‘새로운 우리’를 창설하는 거예요. 군부대를 창설하고, 기업을 창설하는 것처럼 새롭게 창설해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의 성도는 뭡니까? 이들은 새로운 부대를 위한 소모품이죠. 그들이 모여서 예수님이 되고 예수님이 신약의 새로운 나라를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우리에게 있는 김씨, 이씨, 동양인, 서양인 이런 것은 날아가 버리고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았어요. 이제 우리는 조상 아담을 닮는 것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