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100219요일2장9절a ‘빛과 어두움 두 패로 나누는 종말(끝)’
안산100219요일2장9절a ‘빛과 어두움 두 패로 나누는 종말(끝)’
이름 : 박온정(IP:123.212.206.146)
안산100219요일2장9절a ‘빛과 어두움으로 두 패로 나누는 종말(끝)’
『공간의 끝과 시간의 끝』
요한일서 2장9절 할 차례입니다. 389페이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여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가운데 있고 그 어두움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이 대목부터 해 나갑니다.
‘제가 지난시간에 ‘어두움과 빛’이라 하는 빛과 어두움이 갈라지는 것이 언제 적이라고 했죠? 종말 때 갈라진다했죠. 세상이 마지막이 되면 이 세상 전부가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으로 이렇게 구분이 되는 겁니다. 세상 끝이 되면. 그전까지는 구분이 되지 않아요. 그전까지는, 어떤 사람은 남반구에 산다, 어떤 사람은 북반구에 산다, 미국 사람이다, 영국 사람이다, 이렇게 분류하는 방법이 있지만, 마지막 때 그런 인간적인 분류는 인정 안해줍니다. 오직 빛이면 빛이고 어두움이면 어두움이고, 뭐, 빛도 아니고 어두움도 아니고, 어중간한 경계가 없어요. 그걸 저는 오늘 강의 할 끝, 끝에 대해서 강의하겠습니다.
끝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공간의 끝이 있고, 또 하나는 시간의 끝이 있습니다. 공간의 끝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사도행전 1장8절에 나오죠. “네가 성령이 임하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사마리아와 땅 끝... 땅, 공간이잖아요.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이렇게 돼있어요. 사도행전 1장8절이잖아요. 제가 사도행전1장8절을 잠시 보게 되면 창세기 있고, 마태복음 있고, 사도행전 있고, 마지막에 요한계시록 있다, 이렇게 그렸지만 사실은 이렇게 그리면 안 되고, 창세기 있고, 그 다음에 마태복음, 신약부터 여기는 끝의 시대에 들어갑니다. 끝의 시대. 마태복음부터, 마태복음은 신약이니까, 신약이라 하는 것은 전부가 끝이에요.
저의 어떤 글에 보면「끝이 요동친다」는 말을 했어요. 끝이 ‘복장 친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는 단순하게 와서 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끝이 어디서 왔느냐하면 위에서 같이, 점선으로 와가지고(강의 현장 액션 모드) 만나죠.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맞죠? 다윗의 혈통으로 왔는데 다윗은 메시아가 아니고, 다윗의 혈통으로 왔는데, 위에서 점선 따라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되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하고 여기 지상의 나라와 만나는 지점이 바로, 마태복음 처음 시작 신약시대가 본론적으로 개최되는 그 지점입니다. 옛날 구약 때의 약속의 땅은 어딥니까? 가나안땅이죠. 이게 약속의 땅인데 예수님이 매치, 합류해가지고 약속을 끌고 가니까, 약속의 땅이 어딥니까. 천국이 되는 겁니다.(히11: )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우리는 다 객이요, 나그네요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서 너희를 기다리느니, 하늘에 있는지라.
그렇다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자기는 몰랐는데 자기 고향에 갔는데 가야될 곳은 점선(현장 액션모드)지점이죠. 모세 지점, 예레미야 지점, 지점들이 이제는 일치되어 이 지상에 내려앉아버리는 거예요. 내려앉아버리는 순간 위의 세계는 빛의 세계가 되고, 밑의 세계는 뭐가 되냐면 어두움의 세계가 있는데, 막상 만나보니까 ‘아! 어두움이 어둠이구나’ 라는 걸 아는 겁니다. 빛의 세계는 예수님이 몰고 온 거예요. 예수님이 몰고 와서 빛의 세계가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일서 2장9절하면서 빛과 어둠이 나뉘는 것은 언제다? 끝날 때다. 모든 것이 끝이 날 때 ‘너는 빛이야, 너는 어둠이야,’ 라고 판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내릴 수 없어요. 오늘 이거 상세히 해봅시다. 이거 중요하니까요.
예수님은 빛이죠.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그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은 빛이라, 그렇다면 세상은 빛이 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자신을 빛이라 여길까요 어둠이라 여길까요. 이스라엘 사람만 자기가 빛의 자녀라 여기고 다른 사람은 그냥 살아가는 거죠. 나는 인간이다. 나는 남자다, 여자다. 이러지「나는 어둠이야」라고 할 수는 없는거죠?
빛을 만나게 될 때에 어떤 현상이 나오냐면 여기서 역전, 거꾸로 뒤집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인간 속의 어둠이 시편51편에 보면 다윗이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이기 전까지는 다윗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놀랍게 다윗이 우리아 죽이고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뒤에 「나는 하나님 앞에 죄지었다」상당히 뻔뻔스럽죠. 우리아 집안에 미안해야 될 건데 뻔뻔스럽게 ‘나는 하나님께만 죄를 지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죄를 지음으로써 누굴 만났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죄를 짓기 전에는 나는 잘났다고 생각했는데 죄를 짓는 그 순간 본인은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걸 알았으니까, 죄지은 그걸로 인하여 뭐가 되냐면, 죄지은 그걸로 인하여 구원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제가 역전이라고 한 겁니다. 앞에서는 뭐냐면 ‘사람이 의로워져야 천국 가고 악하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되어 왔는데, 예수님을 만나고보니 이것자체가 착각이었고, 이것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나는 죄 안 지었으니까 좋은데 갈 거야,’ 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뒤바뀌어져야 돼요.
죄를 짓게 하는 것은 하나님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사이는 죄를 통해서 만나요. 죄를 안 지으려고 버티는 사람이 누구냐면 바리새인들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바리새인처럼 되지 못하면 천국 못간다,” 이 말은 너희들 인간적으로 죄 안지어서 구원받으려면 너희보다 최고의 선배가 있고 너희들보다 재주가 좋은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구다? 바리새인이다. 하지만 그 바리새인이 지옥 간다면 너희들 끝장 난거다. 여기 이 사람들은 그것이 어두움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자체 내에서 빛과 어두움을 따로 구분했어요.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구분할게요.)
끝이 되면 예수님이 빛이고 우리는 그 앞에서 모든 사람이 어둠이죠.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쪽이고 인간 쪽에서 빛과 어둠을 나누는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빛은 무엇이고 어둠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 당시에 보면, 율법을 지키면 빛이 되고, 율법을 어기면 어둠이 된다고 본 겁니다. 그럼 제가 문제하나 던질게요.
율법 열 개 중에서 다섯 개 지키면 뭐가 됩니까. 50퍼센트 빛이고 50퍼센트는 어둠이 되겠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뭐냐 하면, 어두움에서 빛으로 가는 방법은 자기가 자기 절제를 하고 자기관리해서 율법을 덜 지키면 어둠 쪽에서 땡기고, 율법을 많이 지키면 빛 쪽에서 땡긴다고 본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데 제가 사실 바리새인이라고 했지만 사람들 속에 있는 양심아라는 것은 뭘 따먹었기 때문에 생긴 겁니까. 양심을 조사해보면 선과 악이 있어요. 우리 조상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 양심이 생겨났습니다.
사모님께 하나 물어볼게요. 선악을 아는 양심을 갖고 있으면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선악을 아는 상태에서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따먹죠’ 못 따먹죠.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착하게 살면 영생의 나라, 생명나무의 나라, 천국에 간다고 우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거는 거짓말이에요.
선과 악, ‘양심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면 그건 끝나는 거예요. 이거는 구원 못 받는 겁니다. 근데 양심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면 다 구원 못 받는 거예요. 구원 못 받는 상태에서 그들은 빛과 어두움을 율법대로 지키면 빛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둡다, 이렇게 구분을 한 겁니다. 자, 이렇게 구분을 해놓으면 그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면, 예수님께서 인간세계에 들어오셨지요?
예수님은 오실 때도 빛인데, 예수님이 인간세계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믿습니다. 왜 못 믿냐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게 되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어야 하느냐 하면, 자기들이 생각하는 빛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경우에는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믿겠지요. ‘내가 보기에 예수 당신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야’ 라고 믿게 되겠는데, 인간들이 자기가 빛이라고 우겼던 기준에 맞추어보면 예수님은 뭐가 됩니까? 빛이 아니고 이단이에요 이단.
그래서 2장9절에 뭐라고 했냐면 그걸 ‘어둡다’고 된 거예요. 어둡다. 어두운 거예요. 뭐가 어둡다? 양심이 어두운 거예요. 인간의 양심이 어두운 거예요. ‘양심을 어둡게 사용하지 마라,’가 아니라 양심 자체가 어둡다니까요. 양심 자체가 어두우니까 양심을 빼버리면 뒤에 남는 게 뭡니까. 그냥 어둠다입니다. 양심 떼어버리면 뭐가 되요, 그냥 어두운 거예요. 인간은 그냥 어두운 거예요. 양심대로 살아서 예수 믿을 수 있느냐?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고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아니하면 예수를 믿을 수가 없고,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예수님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만약에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과연 성령이 와서 예수를 믿는 자가 되었다면, 그다음에 뭐를 부정하겠어요? 예수님이 빛이라면, 그 빛을 내 양심으로 믿을 수 없는 빛이라면, 그 양심은 결국 썩은 양심이죠. 그 썩은 양심은 무슨 양심이냐면 이게 바로,
요한복음 12장에 의하면 ‘자신의 영광을 위한 양심’입니다. 쉽게 해서, 자존심!
모든 양심은 자기 자존심을 위하여 양심을 부리고 양심을 활용하게 되어 있어요. 어떤 도둑넘이 들어왔다, 경찰에게 잡혔다. ‘도둑질을 왜 했어!’ 하면 ‘어릴 때부터 부모를 여의고...’ 이렇게 나오죠. ‘간난아이 우유값이 없어서...’ 이렇게 변명을 한다 말이죠.‘그래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죠.
만약에 다윗에게 성령이 오지 않고 양심만 남아 있었다면, ‘ 너 밧세바와 왜 간음했어,’ 물으면 ‘뒷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아는 왜 죽였어!’ ‘뭐, 장군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칠 수도...’ 이렇게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뭐라 하냐면, 우리아와 간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야...내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걸 처음 안 거예요.
내가 그동안 써먹던 양심이 고장난 엔진이에요. 고장난 엔진. 평생 고장난 양심을 가지고 어딜 간다? 감히, 천국을 들어가겠다고 버틴 거예요. 양심 굴려서... 바르게 살아서, 말씀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시도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 서니까 그것 자체가 「어둠」이었다. 그래서 행복한 다윗이 말하기를,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겁게 하옵소서” 주께서 꺾은 뼈가 누구냐면, 자기 손으로 죽은 우리아가 내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기쁨을 갖는 거지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 하면 성령받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얘기할 거예요.“목사님은 인간을 너무 부정적으로 봅니다” 이렇게 나쁘게 보지 마세요, 합니다만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신나죠. 어차피 고장난 양심인데 이 양심을 가지고 자기 자존심을 채울 필요도 없고, 자존심을 지탱할 필요도 없고, ‘내 자존심은 원래 나쁜 거다’ 팽개칠 수가 있다 그 말이죠. 이 말은 ‘자기 영광을 포기하며 사는 자,입니다.
자, 2장9절 설명합니다. 자기 영광을 포기한 것을 뭐라 하냐면, 「형제사랑」이라고 합니다. 쉽지요?^^* 이렇게 돌아서오니까 쉽지요? 형제 사랑이 뭐냐 하면, 누굴 만날 때 어떻게 만나자? 뭘 포기한다? 자기 영광, 내 자존심! 내 양심을 논하지 아니하고, ‘나 주님 앞에서 어둠입니다’ ‘나 주님 때문에 살았어요, 라고 나오면 그게 형제사랑이에요. 그게 형제 사랑입니다. 굉장히 쉽지요?
장로님이나 목사님 등 형제 만날 때, 목사가 장로 앞에서 “장로님! 저 목사지만 저 죄인이에요” 그것보다 훌륭한 장로 앞에서의 목사가 없어요. 장로님은 교인들 앞에서 “교인 여러분, 저 장로라고 하지만 저 죄인입니다” 세상에는 이것보다 더 훌륭한 형제 사랑이 없습니다. 꼭 장로티를 내고 목사티를 내니까 그때마다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영광? 자기 영광!
그래서 사람들이 ‘목사가 그러면 됩니까?’ 이러면 그 다음에 뭐가 나오냐면 양심이 나와요. “나는 ‘양심껏’ 이 교회에서 8년 동안 ‘양심껏’ 했습니다” “양심껏 살았던 이 목사를 대적하면 여러분 저주받죠”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져서 우리를 구원해놓고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그 앞에서 십자가를 가로막아버려요. 그러면 교인들이 어떻게 본 받을까요. 구원을 가로막는 거예요. 교회는 목사의 자존심 세우는데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자존심을 세워야지요. 주님의 영광이지, 장로영광, 목사영광, 집사영광 이것땜에 된게 아니거든요.
그러려면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이거예요. ‘나는 내 영광, 내 자존심 이거 쓰레기입니다. 모두 다 쓰레기고, 저는 벌써 이것 다 차버렸습니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누구를 대하면 그게 형제사랑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에 뭐라 하냐면,『눈멀지 않았다』형제를 사랑한 자는 눈이 멀지 않았고, 소경이 아니고, 형제를 미워하면 그게 뭐라하냐면 “소경”이라고 얘기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이렇게 빙빙 돌아서 설명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당신, 집사를 비워했잖아! 나쁜사람이야!’ 이러는 게 아니고, ‘당신은 그러니까 복음을 몰라, 눈이 멀었어! 당신 주님을 만나본 적이 없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느땐 이런 예를 들어요. ‘우리끼리 만나지 말고, 주님을 세우자,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를 통과해서 만나자’ 나는 잘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십자가를 통과하자마자 내가 죄인되어서 내가 앞에서고 집사님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부부사이도 이게 중요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둘 다 눈이 멀어버리면 둘 다 양심을 내세워요. ‘당신에게 시집와서 당신 내게 해준 게 뭐있어?’ 보통 여자들이 다 이렇게 말해요. 여자들이. ‘내가 당신 믿고 시집왔는데 지금까지 고생시키고 해준 게 뭐 있노?’ 이렇게 나오고, 남자는 말하기를, ‘그렇게 매일같이 잔소리 하니까 하는 일도 안 되지’ 이렇게 나옵니다.
‘나처럼 이렇게 가정에 헌신한사람 없다!’ ‘다른 사람은 새벽에 들어오지만 나는 밤 11시에는 들어오잖아!’ 이러는 둥. ‘남들은 열두시에 들어오는데 자신은 열한시에 들어온다’ 이렇게 말하는 양심은 스스로 자기 안에서 잘난 것, 선한 것과 나쁜 것을 따로 구분해서 ‘나는 나쁜 것도 있지만 뭐도 있다? 착한일 했잖아.’ 자꾸 양심을 내세울 때 그거는 생명나무와 관계없는 선악과 세상, 어두운, 눈먼 세상, 봉사들의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가운데 두게 되면, “여보, 내가 아무리 해줘도 당신에게 미안해! 이렇게 내게 과부한 여자를 주는 것은 이같은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야,” 이렇게 나올 것이고, “당신 같은 남자를 만난 것도 하나님께서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어!” 이러면 되죠. 그런데 이것도 한두 번만 써먹어야지 자꾸 써먹으면 여자가 뭐라한 줄 아십니까? “당신은 말만 해 말로만...돈은 안 벌어오고 말만 해!” 자주 써먹으면 안됩니다.
2장9절 해석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형제사랑이라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마음씨가 나쁜 게 아니라 눈이 멀었기 때문에, 형제사랑을 못하는 사람은 어둠에 속하고, 형제사랑을 하는 자는 그 사람은 눈이 떠졌기 때문에 빛에 속한다, 는 이야기가 바로 2장9절에서 11절까지 이야기였습니다.
그 다음에 12절을 봅시다. 13절, “아비들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14절) 성경 하나하나가 그냥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안 드러나잖아요. 두 가지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음이요(12절)’ 아... 어렵다! 사람이 무슨 죄가...죄를 지었으면 교도소 가야지 그의 이름으로 사함 받습니까? 아이 키우는 어무이들, 애가 잘못했으면 ‘똑바로 앉아! 손들고 있엇!’ 벌을 줘서 죄를 다스리는 법인데 ‘얘야, 주의 이름으로 용서한다’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용서가 됩니까? 이거는 두 번째 것부터 살펴봅시다, 어떻게 관계되는지...
성경에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 했지요? 예수 이름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무엇을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지요?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예수이름으로 구원받는데 어떤 경로로 구원 되느냐 이 말이지요. 여기서 일너 식이 됩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세계에 우리가 빨려들어가면 이게 구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내가 소지하는 걸로, 뚝 떼가지고 내가 소유하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거 소지해봐야 관리 안됩니다 우리는. 아침에 얻었다가 저녁에 다 쏟아버려요.
비싼 보석을 자기 집 강아지에게 줘봐야, 강아지가 그거 자랑 않습니다. 강아지는 먹든지 버리든지...보석을 강아지에게 줘봐야 의미 없는 것처럼 이 구원을 누가 관리 하냐면 인간이 관리하면 관리 안 됩니다. 인간은 구원보다 십억, 이십억 이런 게 더 좋아요. 돈을 더 좋아해요. 보세요, 교회 교인들 ‘예수님의 구원이 좋습니까? 이백억이 좋습니까?’ 물으면 이백억이 좋다해요.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건데 우리 손으로 관리가 안되요. 예수 믿다가 치매 걸려가지고 ‘예수가 누구고?’ 이런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심지어 치매 안 걸려도, ‘나는 교회는 다녔지만 믿음의 확신이 없어,’ 이런 사람 굉장히 많아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목사들이, 자꾸만 목사님들이 ‘구원을 주었으면 본인이 관리해야지,’ 자꾸 이러다보니까 자기가 치매 걸렸는데 구원받은 걸 어찌 압니까.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짐이되어 ‘목사님같이 구원받는다면 교회도 못 나오겠습니다.’ 그런 경우가 뭐냐면 아가씨가 처녀 때는 교회 나왔는데 나중에 불도가정으로 시집간 뒤에 제사를 한 달에 두 번 드려야 되니까 너무 힘들어져 ‘목사님 당분간 교회 못 나오겠습니다,’ 하는 경우 많아요. 우리교회도 있고 교회마다 그런 사람 많습니다.
구원을... 지금 이 안경이 구원이라면 ‘관리 하세요’ 하고서 주는 게 아니고 이건 미끼예요. 딱 주면 믿잖아요. 그 다음에 안경을 잡아 댕겨요. 붙잡혀서 가다 보니까 천국인 거예요. 주님께서 말씀의 미끼를...그 미끼가 뭐냐,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거예요. 자,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면, 아브라함의 첫 이름이 뭐죠? 아브람이죠? 아브람은 자기의 육적인 이름이에요.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덮쳐서 아브라함입니다. 아까는 안경이죠? 아브람이라는 육적인간에게 안경이 덮쳐 아브람을 잡아 댕기면 아브라함으로 딸려 가는 거예요.
야곱, 육적이름이죠? 그런데 야곱의 이름이 바뀌죠, 뭘로 바뀝니까? 이스라엘이죠. 야곱은 「속이는 자」 야곱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이루시는 분은 야곱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흰 돌이 있잖아요. 흰 돌에 무슨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무슨이름?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우리를 흰 돌로 삼고, 백석인데(그래서 백석대학?) 여기에 내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이 박혀버리고, 이제는 이근호라는 내 이름은 이거는 쓰레기고, 그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한 이름으로 살도록 잡아 댕기는데 가다보면 천국이라.
다시 얘기할게요. 「죄 사함」이 되는 것은 구원을 우리가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 명심해야 됩니다. 목사님들이... ‘여러분이 주신 구원을 관리 잘 해야지’ 이러면 참 힘들어서 못 살아요.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관리합니까. 헌금내야 돼, 전도해야 돼, 할 짓이 한둘이 아니라, 교회 봉사도 해야지, 너무너무 힘들어요. 자꾸 그렇게 행함으로 나가버리면 나중에 지친나머지 자포자기상태가 됩니다. ‘지금 아이 키우느라 바빠서 못 옵니다’ 이런 핑계거리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셈이 되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집에서나 어디서나 주님께서 완전함으로 백석으로, 하얀 돌로 삼으시고 거기에 우리이름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시고, 자기 이름을 박아놔버리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의 자존심 때문에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요.
그걸 지체라 해요. 우리의 몸의 지체. 우리가 예수님의 손가락 되고 발가락 됐습니까. 세상에 오른손 잡아 댕기는데 왼손 두고 갈 수가 없잖아요. 자기 지체니까 끌고 가기 위해서는 우리에 아무리 불도佛道가 심한 집안으로 시집가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안에서, 그 현장에서 예수님의 살아계심이 폭발하게 되어 있어요. 발산하게 되어 있다고요.
방금 쉽게 이야기했는데, 다시 말하면 예수 이름에는 분석해보니까(내가 분석한 게 아니라 천사가 분석합니다) 말하기를, 예수는 어떤 일을 하느냐? 첫 번째, 자기백성,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자기백성이 아니죠? 자기백성 따로 있죠. 이걸 가지고 뭐라 하냐면,「분리작업」예수님은 무슨 작업 한다고요? ‘분리작업’으로 양과 염소를, (여러분 염소 잘 아시죠?) 또는 알곡과 쭉정이를, 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이런 식으로 분리작업을 하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나라에 영국에 취직 안 될 때, 무슨 일 한 줄 알아요? 병아리 감별사, 굉장히 빠른 속도의, 솜씨가 좋아가지고 우리나라 사람 많이 데려갔대요. 암컷 수컷 분리하듯이 ‘이거는 내 자식 이거는 마귀자식’ 분류하는 거예요. 이게 본격적으로 어디 나오냐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두 종류의 이마가 있는데, 한 쪽은 어린양의 이름이 이마에 박힌 사람, 또 한 사람은 마귀, 짐승의 이름이 박힌 사람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은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고(어린양) 이 사람은 바로 행위 책에 기록된 사람, 어중간한, 중간지점이 없어요.
이 분류작업을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왔습니다. 예수님의 분류작업 할 때에 주의할 것은, 양과 염소니까, 목자로 왔거든요? 염소는 목자에 대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우리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16절: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보세요! 목자가 똑 같은 말을 했는데 구원받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되고, 망하는 사람에게는 악취가 되는 거예요 악취! (어휴, 냄새 드럽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똑 같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누가 누군 지 몰라요, 그런데 사도가 복음을 전하니까 어떤 사람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요?”
“행함이 아니고 그냥 공짜로 구원받아요?”
“세상에...공짜로 구원받는다는 거 첨 알았네!” 향기라고 춤추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세상에...인간이 착해야, 양심대로 살아야지, 염치가 있지 양심대로 살아야 천당을 가지! 나쁜짓 하고 어떻게 천당을 가!” 내게 부정적인 얘기 하지 말라는 식으로 ‘어휴 악취!’ 이런 사람이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것은 같은 자식이라도 장담 못해요. 부부사이라도 장담 못합니다. 남편은 향기인데 아내는 악취로 들리고 어떤 사람은,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는 남자는 좋아하는데 여자는 싫어하고. 어떤경우에는 여자는 좋아하는데 남자가 또 싫어하는 가정이 있고, 있어요. 그래서 부부가 같이 교회 나온다는 것은 복음을 알면 땡잡은 거예요. 더 이상 다른 복 찾지 마세요! 둘 다 눈이 뜨였다면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빨리 죽고싶다 였잖아요. 눈 떠버렸는데요뭐, 눈 떴으니까 이 세상이 시시해보이는데...하늘나라에 맨션 있는데 거기가 살지 뭐땀시 고생스럽게 이 땅에서 몸 아파가며 살겠습니까. 아픈 곳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좋지요. 부부가 아까처럼 예수님이 중간에 계셔서 ‘나 죄인이야, 나 죄인이야’ 이것도 행복이고, 십자가 보험 이것도 행복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축복을 주시면 몰라도, 보통 가정은 한사람은 아는데 한사람은 몰라서 핍박을 하고, 남자는 복음을 알고 사는데 여자 쪽에서 목사 시킨대로 않으면 저주받는다 해 싸고, 재산 다 갖다 바치고...(답답하고 신기한 인간들...녹취자)
어쨌든 예수님께서 무슨 작업? 분리작업... 양과 염소로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염소는 ‘어휴, 냄새야’ 하면서 ‘내 앞에서는 복음 이야기하지마라’ ‘사람은 행해서 구원받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 이런 식의...핍박을 하게 되죠, 이것이 분류작업입니다. 첫 번째는 예수란 두 번째, 자기 백성을 세 번째, 죄에서 구원해 내실 자가 되는 거예요. 두 번째에 대해서 해봅시다.
두 번째,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죄 지은 것을 죄 안 짓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우리가 죄 속에 있음을 눈을 뜨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발견케 하는 겁니다. 나이 60,70 되었다고 죄 안 짓는 게 아니고, 어린아이라고 죄 안 짓는 게 아닙니다. 항상 죄에서 태어났어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작품이라니까요. 어떤 통계에 보니까 3개월짜리 어린아이가 부모를 속인다는 사실을 심리학자는 조사해 냈어요. 3개월짜리가 설마, 어린 속일까 싶죠? 속인답니다. 울음을 가지고 속인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밖에 몰라요. 심지어 자궁 속에서까지 자기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마세요! (오늘 참 희한한 얘기한다, 쩝:) 죄에서 벗어날 생각 하지 마라니까요! 자기가 알아서 죄에서 벗어나면, 세 번째, 구원자가 왜 필요합니까. 자기가 기도 많이 해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십자가 피가 왜 필요합니까. 만약에 기도해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우리보고 ‘얘야, 기도 열심히 해라,’ ‘몇 시간요?’ ‘하루에 두 시간 하면 구원해줄게,’ 이렇게 되었을 거예요. 그게 아니고, ‘너 헌금 많이 해라이?’ 이것도 아니에요. ‘전도 천 명해라’ 이것도 아니고 뭡니까? “가만히 있어, 내 살과 내 피로 너를 구원해줄게” 이렇게 되어버리면 결국 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유가, 이 죄는 우리가 벗언라 수 있는 죄가 아니라, 우리가 멈추게할 수 있는 죄가 아니라, 아무리해도 우리가 멈출 수 없고,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죄를 ‘죄’라고 이야기 해준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분류작업을 하시는 분이고, 그 내용이 뭐냐, 우리는 아무리 성경대로 살아도 죄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 예수 믿고 천 년을 살아도 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세 번째가 ‘가만있거나 내가 건질 게’ 구원 작업 하러 오신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합동해서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예수님 피 흘리신 생색이 안나죠잉~-녹취자) 아니에요. 『죽은 자야 깨어 일어나라!』하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죽은 자여, 깨어 일어나라’ 한 가지 예로 들게요, 베드로가 예수님 십자가 전에는 율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물어요, “예수님, 우리에게 자꾸 용서하라시는데 우리가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아는 척 하면서 “일곱번 용서하면 됩니까?” 하죠?
얼마전에 방송에 보니까, 어떤 신부가 있는데 직업이 전에 의사였어요. 의사였는데 신부로 바꿔져 이디오피아를 갔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을 위하여 학교도 지어주고, 병도 물론 고쳐주고 하다가, 나이가 불과 48살인데 고국에 와서 조사해보니까, 대장암말기가 돼서 그 뒤 얼마 전에 죽었어요. 그러면 질문 다시 합니다. ‘예수님, 에티오피아에 가야 구원받습니까? 안 그러면 나이지리아에 가서 봉사해야 구원받습니까?’ 했더니 뭐라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네가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필리핀을 가도’ 구원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는 거예요.
착한 일 하신 분들이 주의할 것이 있어요. 주께서 시켰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 일은 내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 일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내 죄를 깨닫게 하려함이 아니라 ‘내 잘남을’ 내 영광을 위해서 그 일을 한다면, 그 일은 큰일 날 일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이 일을 열심히 한다, 그것조차도 내 구원받는 데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고 오히려, 주께서 내가 죄 아래 있음을 확인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구원자는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구원받을 이름은 예수이름밖에 없다!’ 그 이름 안에 세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야, 바로 이런 이해를 가져야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분류하러 오셨고, 우리를 그냥 죄인이라 깨닫게 하셨고, 그 죄인은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서만 구원한다, 는 이 세 가지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걸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뭐가 있어야 하느냐면, 성령이 오셔야 됩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한 가지만 오는 게 아니고 이 세 가지 삼종세트가 택배로 오는데, 택배비도 안 받고, 공짜로! 공짜로 오는데 이걸 『성령의 은사』라 합니다. ‘은사’라 하는 다른 말은 ‘선물’이에요.
성령의 은사가 오게 되면, 이 세 가지가 공짜로 다 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전체를 두 자로 뭐라 하냐면,『사랑』이라고 비로소 눈 뜨고 알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 받았다’ 누구한테? 주님께 사랑 받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내게 박혀있으면, 주의 이름이 우리 안에 박혀있기 때문에, 평생 동안 이 세 가지를 확인해가면서 우리를 살금살금 천국까지 끄집어 당깁니다. ‘내가 목사다 강의도 하고 설교도 한다’ ‘주여 이정도하면 괜찮죠?’ 하면, “이놈아 너는 끝까지 죄 속에 있어!” 깨닫게 할 때 얼마나 기쁜지요!!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옵소서!”(시51:8)
내가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또 어느 땐, ‘하나님 제가 날나서 양됐죠?’ 하면 또 얻어맞는 거예요. 주님께서, ‘너는 양으로 분류됐어’ ‘나도 주님 일에 많이 협조했으니 복주시옵소서’ “너는 죄인이야! 구원자는 나밖에 없어!” 우리는 예수 외에 자랑할 거리가 없다, 입니다. 어떤 교인이 와서 ‘목사님 훌륭하십니다’ 하면 ‘미쳤습니까, 십자가 지지도 않은 내게 왜 이럽니까’
예수님은 그래서 이 세 가지 분류작업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뭐가 됩니까? 분류작업이니까, 염소가 되고, 영원한 저주에 가담되는 거죠. 그럼 문제 냅니다. 예수님을 저주하면 염소 되죠? 목사를 저주하면 뭐가 됩니까? 저주 안 받죠뭐, 그런데 목사는 저주받는다고 사기를 치잖아요. ‘교인들이 아직 복음을 이해 못했구나’ 이러면 되는데, ‘감히 나에게 대적하다니...저주 받아라’ 이렇게 할 권한은 목사에게 없습니다. 목사가 자기 자존심, 자기 영광을 생각하면 안돼요.
오직, 목사가 그런 소리 듣거든, ‘아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생각하면 되는 거지, ‘이게 감히 나를 저주를 하다니’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고, 어떤 사람이 예수를 안 믿거든 당연한 줄 아시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아 선물 받았구나’ 하며 귀하게 여기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어가지고 자꾸 설교에 성깔을 넣다보니까 안 믿으면 혼자 뿔따구 내요. 그러면 안 되요.
분리작업을 누가 하십니까. 분리작업을 예수님이 하시는데, 자기가 열성이 있는데 말을 안 들어주니까, ‘내가 투자한 게 얼만데...’‘심방 간 게 여섯 번인데 교회를 안 나와?’ 하면서 악담을 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을 때, 우리 이름이 우리 죄를 토해냅니다. 우리 안에 죄가 들어있고, 바깥에는 하나님의 죄 사함, 다른 말로 세 가지 삼종세트 주님의 피로서, 이 죄를 은혜로 덮어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겁니다.
두 번째, 태초.-이거 하고 십분 쉽시다 - 태초에 계신 분이라 하셨는데 -이거 어려운 거예요.- 태초라 하는 건 세상 처음이잖아요. 원래, 세상 처음과 세상 끝이 같습니다. 왜냐하면, 시작했던 것이 돌아서 다시 오기 때문에. 층이 두 층이 되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밑의 층을 역사라 하고 위의 것은 영적인 층, 어려운 말로 『묵시 층』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 때에 예수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렸지요. 그 부분을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배후에는 뭐가 있냐면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형상의 특징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차단하고 숨기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볼 자가 있다 없다? 없어요!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상상을 했어요. 무슨 상상을 했냐면, 하나님이 여기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마귀가 지어낸 가짜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고 오직 누구라고 했습니까? 나를 보았거든, “예수님을 본 자가 아버지를 본 자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볼 수가 없고 하나님 형상 되시는 분만 만납니다.(출33장)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가서 누굴 봤습니까? 형상만 봤지요? 형상만 보고 뒤에는 감춰져 있지요. 예수님을 본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항상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 형상이지 하나님이 아니에요. 형상을 통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형상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거예요. 형상과 더불어서. 태초에 계신다고 했는데 태초에 창세전에 인간은 뭐였다?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형상과 사람 사이에는 두 가지 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선악과나무가 있었고, 또 하나는 생명나무도 있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생명나무라 하는 것은, 선악과나무 기능을 할 때만 생명나무가 어떤 나무인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전에는 생명나무가 어떤 나무인가 몰라요. 선악과를 따먹어주므로 말미암아 생명나무는 못 따먹는다는 거. 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악과나무를 심어놓은 거예요. 심어놓고 두 가지 나무를 다 심어놓은 거예요. 두 가지 나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아, 우리는 하나님 자체를 우리 힘으로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피조사계에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한 쪽을 건드리면 한 쪽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선악과나무가 사라지니까 생명나무가 우리 선에서 사라져버리는 거지요. 인간이 선악과나무 따먹은 이유가 뭡니까? 자기 힘으로 자기가 신이 되고자 했잖아요. 피조물은 피조물이지 신이 될 이유가 없고 필요가 없어요. 마귀가 와서 유혹을 하니까 따먹고, 신이 되는 양 하는 거예요. 그러나 생명나무 가는 길을 어떻게 했다? 차단시켰다. 아까 했던, 양심껏 산다고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다 말이지요. 차라리 양심이 없었으면... 양심이 살아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막혔습니다!』
아까 그걸 다시 하면, 태초에 계신분인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됐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우리에게 온 거예요. 두 분 다 같은 분입니다. 태초에 계신분과, 죄 사함 주신분과 같은 분이 되는 겁니다. 그 형상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산100219요일2장9절a.hwp (61.0K), Down: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