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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산100312요한일서2장27절b자유게시판요한일서

안산100312요한일서2장27절b

이름 : 박온정(IP:123.212.206.146)

안산100312요한일서2장27절b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지난 시간에 한 거 요약해보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27절 28절 29절의 말씀인데 지난 시간에 했던 그림을 하나 그리는데요,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 예수님의 출생이죠? 그다음에 십자가, 그다음에 뭡니까? 부활, 부활다음에 승천하시고 그다음에 성령으로 오셨지요?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뭘 약속했습니까. 강림... 재림을 약속했잖아요. 예수님 당시에서는 항상 이걸 우리가 그냥 보는... 주체가 살아있는, 우리의 자아가 살아있어 이것도 믿고 이것도 믿고, 이런 식이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 나름대로의 역사가 되어가지고 우리 나름대로의 인생이어서 예수님의 역사 따로 있고 예수님의 역사 따로 있으니까, 우리가 만약에 한 눈 판다면, 한 눈 판다는 게 뭐냐면 직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든지 사적으로 몸이 아팠다든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갑자기 뭘 잊어버립니까? 예수님의 일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 버리지요? 몸이 아픈데 이런 거 생각하게 되었냐, 이 말이지요. 가게 손님 왔는데 이거 생각 안 나지요?

이런 식으로 해서 구원 됩니까? 안 되지요. 주님을 수시로 안다면, 만약에 치매 걸리면 어떡해요. 나중에 나이 80넘어 치매 걸리면 옛날 교회 다닐 때 성경 공부한 거 어떻게 됩니까. 다 날아가 버리지요. 그런데 요한일서 같은 경우에는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했다 이 말이죠.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께서 너희를 가르친다 이 말은 역사가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의 공간 속에 다 같이 섞이면서 들어갈 때 우리 역사는 죄가 되고, 주님의 역사는 ‘의’가 되어서 함께 섞이게 되지요.

함께 섞이게 되면 예수님께서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의는 결국, 말씀의 성취, 말씀의 완료차원이 되는 겁니다. 말씀의 성취가 완료차원이 되기 때문에 이 안에, 이 공간 안에(동굴또는 목욕탕)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목욕탕 안의, 목욕탕 특징이 뭐냐 하면, 메아리가 잘 되어 울리죠. 첫 째 시간에 얘기한 공명하는 것.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이미 완료된 것. 내가 다 이루었다가 메아리로 울리면 뭐가 되냐 하면 성경 66권이 다 포함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강림이, 이쪽에서 보면 예수님의 강림이 아직 오시지 않은 게 되잖아요. 한 쪽에서는 강림하심이 분명하지요. 성령 오시고난 뒤에 우리가 강림을 기다리는 편이지만 한 쪽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한 공간 안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강림하시기 때문에 강림은 보나마나 당연하게 일어날 일이다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강림을 기다리지만 강림이라는 소식 자체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지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생각할 때, ‘ 너 낼 뭐할 건데?’ ‘낼 돼봐야 알지’ ‘그러면 모래는?’ ‘모래 돼봐야 알지’ 우리는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강림 같으면 이미 강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도 이미 강림이 되었다는 입장에서 우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되면 요한2서에 나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새의 자랑거리는 예수님의 재림하는 그 현장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 의미 없는 걸 재림할 때 그때 가서 포함되는 게 아니고 지금 강림은 안했지만 강림했다 치고 살아가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입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모른 것을 아까 뭐라 했습니까. 예를 들어서 햄버거, 햄버거라 하는 것은 야채, 소스, 고기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몽땅 들어있죠? 고기 따로 있고 야채 따로 있고 치즈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게 모아져 있는 것처럼 한꺼번에 되어 있으니까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주님의 강림이 계시니까 아무 문제 아니야’ 라고 위로가 되고,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주께서는 이보다 어려웠는데 감사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고, 또 여러 가지 세상에서 돈 문제로 사기를 당했을 때는 고린도전서에 보니까 ‘가진 자는 없는 것같이 하라,’ 하고 또 이혼을 했다할 것 같으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 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죠. 왜? 공명현상, 왕~왕~왕~ 그 울림으로 말씀이 완료상태기 때문에. 완벽하게 완료된 상태기 때문에 줄어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완료된 상태에 잇는 걸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다만, 아까 목사라 하는 것은 신체의 막으로 되어 있고 목사의 내부와 외부가 말씀의 공명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목사 외부의 말씀이 우리 안에 공명돼버리면 목사는 움직이는 말씀이 되겠지요. 움직이는 말씀을 밖으로 툭, 툭, 내 뱉으니까 그걸 가르치는 은사를 비치니까 듣는 자신도 그 말씀을 겪었기 때문에 동의하죠.

그러니까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같은 공간, 목욕탕이나 동굴 안에 같이 들어있기 때문에 동의를 하죠. '아멘~ 아멘~‘ 식으로 동의를 합니다. 이건 성령께서 가르치는 문제지 누가 와서 가르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누가 와서 가르치는 것은 언제? 구약 때 주님이 계시고 중간중간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에 침투할 때는 제사법을 통해서 침투했죠? 열두 지파가 움직일 때 언약궤, 제사법(날마다 양들이 죽어 나가는)에 의해서 이들이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제사법이 들어오게 되면, 죄인은, 죄인에 의해서 흠 없는 제물 때문에 죄인이 뭐가 되죠? 제물 때문에 의인되는 겁니다. ‘의’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거룩’ 거룩한 사람이 되면, 이 집단이 이방집단과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누가 승리합니까? 이스라엘이 승리하죠. 이스라엘의 승리라는 것은 외부 힘이 세고 안세고 의미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부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의롭게 되었는가, 거룩하게 되었는가, 하나님 하시는 이 제사에 의미를 두고 있다면 바깥의 적들은 허수아비죠.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이걸 제가 부산 강의에서 이걸 뭐라고 했냐면, 전봇대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라 했지요. 아바타 포스터...전봇대와 포스터가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무런 관계가 없지요? 아바타가 붙어있으니까 사람들이 전봇대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게 되지요? 이걸 뭐라하냐면 붙이심의 전쟁이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주님이 붙어서 보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이방인, 다른 전봇대가 이길 수 없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의 언약이 붙어있으니까요.

구원받는 걸 뭐보고 아냐면, 우리 이마에 새언약이 붙어 있으면 구원받고 아바타 붙어있으면 외국영화고, 한국 영화 포스터 붙어있으면 한국영화고, 우리 이마에 악마의 인이 붙어있으면 우리는 지옥 가는 거지요. 천국과 지옥 가는 것은 본인의 행함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소속을 보여주는 이마에 악마의 인을 붙였는가 아니면 주님의 언약의 인이 붙여졌는가 그걸로 결정나는 겁니다. 어차피 인간은 하나의 바탕, 도구에 불과하니까요. 그렇게 이해해 주시고요.

요한일서 2장27절 끝에 봅시다. “참되고 그릇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하죠. 주 안에 거하라,는 말은 아까 말했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잊지 말라는말이지요? 그냥 함께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완료된 것에 대해서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여기 28절에 보면 기죽을 필요 없는 걸 가지고 ‘담담해라, 했고 부끄러울 게 없다고 하는 거예요. 세상의 윤리 도덕에 대해서 기죽지 말라 이 말입니다. 윤리도덕으로 만약에 기죽는다면 우리와 함께 계신분에 대한 모독이죠.

그거는 따로 자기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자, 3장 봅시다. “보라 아버지께서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아버지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고” 요한일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쉬운 구절이 없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여긴 뭐라고 되어있냐 하면, 주님의 사랑이 임하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였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보통 자녀라 하는 것은 출생으로 결정하는 거 아닙니까.

아버지가 낳았으면 아버지의 자녀죠. 그러면 이건 사랑의 문제가 아니고 존재에 관한 문제라는 겁니다. 김길태, 친 부모가 따로 있겠지요. 존재로서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못 받았지요. 처음부터 사랑으로 태어나야 되는데, 모든 인간은 사랑을 받기 전에는 뭐가 되냐 하면, 종이 됩니다. 사랑의 종이 아닙니다. 사랑이었을 때는 자녀가 되지만 종에서는 율법아래종이 되는 겁니다.

율법이란 말 어렵죠? 율법이라는 말 어려우면 쉬운말로 고칩시다. 양심...모든 인간은 양심의 종이 되게 되어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용서 못한다 이 말이지요. 남은 용서해도 자기가 자기를 용서 못해요. 그래서 자살하고 그러죠. ‘나 같은 인간 살아 뭐하니’ 하면서요.아무리 나쁜놈들도 양심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한번 보세요. 성폭행범도 길 가다가 할머니가 넘어지면, (이걸 측은지심이라 하는데요,)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신호등도 잘 지켜요. 금연하라고 하면 금연 장소에서는 담배 안피웁니다. 히틀러 같은 경우에 수백 명을 죽였지요? 그런데 자신에게는 굉장히 엄격했어요. 그리고 천하 사람들이 자기 자식 못됐다 해도 자기 엄마는 영치금 넣어주고 찾아갑니다. 희한해요. 인간의 양심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본인은 그냥 종일뿐이에요. 그럼 뭐냐, 선악과를 지배한 그 힘이 인간을 종으로 삼아버려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는 악마의 차지가 되는 겁니다.

악마는 선악과를 가지고 인간을 종 부리듯이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따먹으려고 얼쩡거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이게, 어디서 감히!’ 따먹지 마라하는데 누가 배후에서 조종했습니까. 뱀이 조종했지요? 뱀이 조종함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훼손됐지요? 이로부터 전쟁이 일어나는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구분됨으로 말미암아 이미 전쟁이 벌어졌어요.

그 전쟁을 무시하면 안돼요. 선악과 양심이 있는데 양심가지고 하나님 잘 믿자. 이렇게 되어버리면 전쟁의 가치를 완전히 곡해하는 겁니다. 휴전선 있는데 북한에 아저씨 만나러간다고 손 놓고 가면 안돼요. 로버트박이라는 인간은 북한에 선교하러 가다가 너무 맞아서 정신병자 되어버렸어요.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배후 조종하는 자가 누굽니까. 뱀이잖아요.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는 이미 악마라는 주인이 자기 집에 가재도구를 이미 붙들어놓은 거예요. 냉장고가 알아서 밖에 못나가고, 가스렌지가 스스로 알아서 밖으로 탈출 못합니다. 이미 모든 가재도구는 이미 끝났어요. 집안에 있는 냉장고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강도가 들어와서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집소유로 되어있는 가재도구를 가지고 나갈 때만 가재도구는 악마의 집에서 탈출이 가능합니다. 그걸 가지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라 하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집주인을 묶어놓고 그 집에 임하는 가재도구를 가져가는 것처럼 하늘나라도 이와 같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너희들을 악마의 손에서 일방적으로 악마를 묶어놓고 너희들을 끄집어내어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식으로 합니다. 전리품 가져간다 하니 생각나는데요, 그 교수(개혁주의)는 어떻게 해서 여호와전쟁의 주체가 되는지 모르겠다, 합니다. 맨날 모르겠다 하니까요.

선악과는 이미 악마의 손에 넘어가버렸어요. 이미 넘어가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선악과 쪽으로 완벽을 기해도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지옥 가는데 생명나무가 이미 선악과 따먹은 것을 알고 이미 길은 천사를 통해서 차단을 시켜 놨어요. 차단을 시켜놓으면 그때부터 선악세계는 악마의 힘으로 완전히 굳혀지게 됩니다. 그걸 저의 논문에서 뭐라했어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땅을 적시게 되면 땅은 이질적이라서ㅡ이질적이라는 것도 못알아들어서 이질적이라하는 것은 땅의 법칙가지고 감당이 안 되는 것을 이질적이라 합니다, 라고 설명해 주었어요ㅡ

여기 짐승에서 올라온 그것이 인간적인 윤리도덕과 학문과 양심과 모든 이성적인 것으로도 악마를 이길 수 있습니까? 이기지 못해요. 이건 또 ‘무소유’인지 뭔지 법정이라는 분, 법정이라는 스님은 무소유주의가 죄인지를 몰라요. 무소유가 죄인지를 몰라요. 무소유가 종에서 아들 만나는 게 아닙니다. 아들 만나려면 성령이 임하여야 아들 되지, 여기서 도 닦아 봐야 율법이 쏴대면요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논문 발표할 때 깔데기 얘기했잖아요.(그 말도 못알아듣더군요) 성경 한 말씀이라도, 한 율법이라도 역사적 해석 보면 단어 하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 단어 하나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율법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어깁니다. 깔데기, 성경의 돌출부분을 통해서 다 쏟아지는 겁니다. 십계명의 ‘탐내지 마라’ 하는 걸 설명하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포함되는 거예요.

예레미야 선지자 말 해석하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기게 되요. 모든 말씀이 악마의 세계에 있는 율법에 의해서 우리는 뭐가 되냐면 종이 되게 되어 있어요. 율법에 의해서 어떤 것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전부 다...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3장 한번 봅시다. (로마서 3장 이야기도 논문에 나와 있습니다, 인간들 읽어보지도 않고) 3장4절에 다 같이 읽어 봅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 나오잖아요. 사람은 다 거짓되다, 거짓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짓되면 거짓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게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갈3:10)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 교회 오래 다니고 목사가 되기도 하지만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뭐냐 하면, ‘성경이야기가 다 틀리다거나 구라요, 인간이 지어낸 소설책이며 이걸(성경) 덮고도 사람들이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교회를 다녀야 되며, 성경을 왜 봐야 되는가, 라는 문제를 자신에게 던져보라 말이죠.’ 성경을 덮고도 절에 가도 부자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골치 아프게 성경 이걸 가지고 천당 가겠다고(읽어봐야 천당 가지도 못하지만)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는지...천당이 있기는 있는 것인지...성경에 천당 있다고 하지만 남들이 없다고 한다면 없는 거지. 이때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모든 성경의 핵심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거예요.

메시아가 왜 죽었을까요. “하나님은 참되시나 인간은 전부 다 거짓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은 거예요. “내가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했잖아요. 그래서 산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는 “너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이를 위하여 살게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것만 만약에 성령을 통해서 믿어진다면 세상사람들이 조금 잘 살고 으스대고 교회 안가는 것을 마치 자랑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보면 갖잖죠. ‘예수님이 죽었는데 왜 저 짓을 하고 있나, 하나님이 죽었는데 예수 안 믿는 것을 왜 저렇게 좋아할까, 저게 저주 받으려고 환장을 했지 지금...’

예수님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가 왔으되, 사람들은 그 생명나무를 죽여버렸어요. 질문 하나 할게요. ‘사람이 죽는 게 괴롭습니까? 안 죽는 게 괴롭습니까?’ ‘안 죽는 게 괴로워요’ 사람이 죽어도 안 죽게 되어있어요. 묻으면 죽잖아요. 죽으면 무덤가에서 불러 호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죽어도 죽으라고 밟아도 안죽어요. (아마 김길태 같으면 사형시켜주면 젤 좋을 거예요. 남들 욕하니까 욕먹기 싫어서 자살하면, 자살해보죠. 예수님 조금 기다려보죠. 김길태 이리와! 넌 지옥이야. )

사람이 답답한 것은 밟아도 밟아도 안 죽는다는 거예요. 사람이 죽는 것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인간이 누굴 죽였습니까? 자기를 죽인 자는 신을 죽였어요. 신을 죽인 자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유의지를 영원히 보장받으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어느놈이든 나에게 간섭하는 놈은 다 죽인다. 하나님마저 죽임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나를 죽일 자가 없지요. 그때 인간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자유인, 자유인이 되요. 대표적인 사람이 불교인들입니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 교회 가자하면 뭐라 하냐면 ‘난 자유인이기 때문에 교회 안 갑니다’(마치,자기가 영원히 이 땅에서 살 것처럼-녹취자) ‘난 누구한테 간접 받는 거 싫어합니다.’

그 말이 뭐냐 하면, ‘신은 이미 내가 알아서 죽여놨다. 신은 나에게 없는 존재다,’ 라는 거지요. 신을 없앰으로 말미암아 신은 자기에게 저주를 하죠. 심판을 하는데, 신을 죽여버리면 자기는 영원히 살지요. 그런데 문제는 영원히 사는 것이 자신에게는 고역입니다. 영원히 사는 게 문제예요. 영원히 산다는 것.

세상에서도 영원히 살고 싶고, 죽고 난 뒤에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모르지요. 하나님께서는, 원래 지옥이라는 걸 누가 가게 되어있냐면, 인간이 가는 곳이 아니고 원래는 누굴 가게하려는 거냐 하면, 악마를 보내기 위해서 지옥을 만들어놨다,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옛 뱀을 저주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유황불에 인간들이 참여하리라,(계20:2~4)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둘째 사망이라는 거죠.

지옥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악마도 영원하고, 악마의 인을 받은 사람들도 영원히 죽지 않고 계속 있어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나온 하나님의 선악과에 대한 보복이 되지요. ‘하나님은 보복 잘해요.’ 선악과 따먹지 마라,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죽으리라’ 죽으리라는 게 뭐냐 하면 소멸되는 게 아니고 저주 받는 거예요. 소멸되는 게 아니고 저주받는다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진짜 죽음은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죽음이라.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버림받는 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얼굴을 돌려버려서 더 이상 사랑과 자비를 주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가 없는 곳! 하나님의 예정이,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

부부싸움 할 때 남편된 입장에서 제일 괴로운 것은 여자가 달려드는 것이나 살림 깨는 것도(설마 사모님이?^^ -녹취자) 안 괴로운데, 여자가 눈 마주치지 않고 얼굴 돌려버릴 때 아!! 환장합니다. 그것도 일주일 이주일 가면 미치죠. 그땐 아무리 힘 센 남자도 (현장의 액션모드) ‘제발 말 좀 하자 말 좀 하자’ 여자가 눈물 흘릴 때는 대화의 채널이 있죠. 그러나 말 끊어버리면 끝나는 겁니다. 얼굴 돌려버릴 때. 밥 줄 때도 얼굴 돌리고 밥 내미는 등(목사님의 액션모드), 미치죠. 얼굴 돌려버릴 때... 그래서 시편에 뭐라했냐면, 하나님 우리에게 얼굴을 돌려주소서, 할 때 얼굴 돌려줄 때 사랑과 자비가 오는 거예요.

생명나무를 못 따먹으면 죽는 정도가 아니고 저주받은 거예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도 그것은 저주받은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오려면 사랑의 하나님이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뭐라고 했냐면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입힐 자에게 긍휼을’ 입히죠. 그렇다면 은혜와 긍휼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사람이 뭐냐 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왜 은혜와 긍휼입니까? 우리에게 ‘열심히 해’ ‘열심히 봉사해’ 왜 우리에게 열심히 행하라 하지 않으시고 왜 은혜와 사랑이냐 말이지요.

우리는 원래 자녀가 될 수 없어요.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의, 예수님만이 자녀가 되요.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공로에 힘입어서 은혜와 자비를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맏아들이 되는 겁니다. 이 공식...성령이 임해서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우리는 종에서 벗어나서 아들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한번 봅시다. 4장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면, 왜 그냥 성령 주시면 안됩니까? 그냥 아들이라하면 안됩니까? 왜 아들을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영을, 아들되게 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애초부터 아들 될 자격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없고, 예수님을 보내사 때가 되매 예수님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있는 자를 속량하시고, 예수님은 여자에게 나시고 율법아래 나시고, 여자에게 나시고 율법아래 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저주를, 율법을 다 이루어서. 다 이루었다는 공간을 마련해서, 율법을 다 이룬 그분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사...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 누구 아들입니까? 우리에게 힘했던 그분의 영이죠. 아들의 영이죠.

아들의 영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이 말이죠. 그때부터 우리는 진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요. 존재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우리는 이 땅에서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아들입니까 아닙니까. 아들 아니에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다, 라는 말은 기존의 다른 종교에서 이야기한 거고, 말도 안되는, 천주교에서 하는 소리고요.

기독교는...진짜 복음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영을 받아야 우리가 아버지의 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종은 몰라요. 종의 눈에 띄지 않는 숨어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아들 되겠다 하는 것은 , 그 하나님은 거짓말 하나님이에요. 엉터리 하나님, 우리가 지어낸 하나님이에요. 진짜 아들은 예수님의 영을 받을 때 예수님의 아버지로서의 아버지입니다. 따라서, 진짜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영을 보내지 않았으면 우리는 기존의 엉터리 우상 같은 하나님만 섬기고 있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의 영을 받아서 아버지라 할 수 있지,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해서, 기억속에 하나님 존재를, 신의 존재를 안다고해서 신이 그 신이 아니다,라는 거죠. 그 신과 같은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이건 잘못된 거예요. 잘못 되었고,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의 영을 받아야 알 수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아, 율법이란 것이,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말씀이 주어진 겁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영이 아니면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제가 갈라디아서 4장을 보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의 구절입니다. 10절입니다. “너희가 절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은 언젯적 신을 지키는 겁니까? 우리가 저주 받을 때, 율법의 저주아래 있을 때, 우리가 이것 지켜서 아들 되게 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쓸 때 지켰던 것은 뭡니까.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거지요?

이거 왜 지킵니까?『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 줄줄 알고 지킨 거예요. 이 사고방식이 뭐냐, 이 사고방식이 악마의 사고방식이에요.』저주스런 사고방식이죠. 왜 그러냐 하면, 그걸 지키게 되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남이 아니고 지킨 내가 주인공이잖아요. 그게 저주아래서 무슨 의미가 있냐 말이지요. 율법을 누가 지킵니까. 예수님... 율법을 예수님이 지키는데 우리는 누가 지킨다고 봅니까. 내가 지킨다고 보는 거지요. 말도 안 되게 내가 지킨다고 우기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도... 이런 나쁜놈(빌어먹을넘)이 어딨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극장에 영화 보러가서 값을 다 치웠는데 입장하면서 지갑을 열고

‘얼마입니까’

‘앞에서 다 치뤘습니다’

‘내가 내겠습니다’

이거 무슨...앞에 있는 분을 모독한다니까요. ‘내지 마세요, 앞에 돈 내신 분께 감사하세요’

날과 절기와 이런 것을 지키는 것은 (그 당시에 지키라고 강요한 사람이 있었어요) 왜냐면 날과 절기 이런 걸 지켜주어야 그걸 빌미로 해서 교회에 헌금하기 때문에 그래요. 특별헌금...교회에 돈 생기잖아요. 교회에 돈 많아지면 누가 좋습니까? 목사의 노후대책! 안정성이 들어가 있죠. 안정성이 들어가면 목사 주변에 뭐가 모입니까? 목사가 주체가 되면 바깥에 뭐가 모인다? 힘이 모이죠. 힘이 모이면 뭐가 되요. 이것은 자기의 힘은 소유가 되겠죠. 그러면 아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뭐가 된다? 은혜와 긍휼이죠.

힘 있는 놈이 무슨 은혜와 긍휼이 눈에 띕니까. 자기 힘으로 사는데. 은행 잔고에 수백억 있는데 수백억 가지고 살지 뭐땀시 아직도 은혜와 긍휼입니까. 은혜와 긍휼이 언제 느껴지쟈 하면 내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없는 정도가 아니고 법정스님도 아니고 나는 저주를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할 때 은혜와 자비가 그 사람에게 효력이 있는 거예요.

내가 하는 짓은 무엇을 해도 죄고, 저주만 유발시키는 죄 뿐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걸 왼 손이 아니까. 법 하나를 어기면 모든 법을 다 어기는 거예요. 세상에 기도할 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 하다는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가 언제 나오냐 하면, 그다음 끼니 때울 게 없을 때 나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때울 끼니꺼리가 없을 때 ‘또 살리는군요’ 감사기도 하지 다음 끼니 걱정 안해도 되는데 ‘오늘 안주면 외식하지’ 이렇게 되면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어떤 사람이 와서 ‘목사님, 집에 우환이 생겨서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나오게 되면 보통 목사 같으면 ‘잘좀 해보세요, 하나님이 갈라놓기 전에는 갈라서지 말라 했으니까 기도하면서 참으세요.’ 이렇게 하는 게 보통인데, 고린도전서 7장 펴놓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내 있는 자는...’ 이렇게 상담한다면 그 상담 누가 듣겠습니까. 삐져가지고 두 번 다시 교회 안나올 겁니다.

상담한다든지 뭐 한다, 이 말은 뭔가 ‘옛날처럼...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옛날 저주 안 받은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 이런 말 아닙니까. 세상에 저주 안 받은 상태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저주받아 마땅한 상태로 계속 왔어요. 그럼 누구 덕분인가, 하나님의 긍휼덕분에 살아왔는데, 이걸 자꾸 자기 노동의 덕분이고 머리 잘 굴리고 자기 믿음 좋아서 그렇고 기도 많이 해서 그렇고 헌금 많이 해서 그렇고 전부 자기 공로로 돌리는,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어딨습니까. 거기다 또 교회에서는 대항을 하죠 대항을. 부추기고 말입니다. 연말에 냉장고 주고 이럽니다. 지키지 마세요! 지키지 말고 성경 보세요!

성경 보게 되면, 내가 얼마나 추한인간인 것을 드러내는 깨끗한 거울입니다. 보면서 ‘세상에 내가 사는 게 은혜구나 내가 공짜로 사는 거구나’ 라는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녀가 더욱 더 자녀다운 생활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자녀가 될 때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 공포심이 사라져요. 이거 상당히 중요한 말이니 얘기를 좀 해야겠어요. 여러분 공포영화 있잖아요. 공포영화. 엽기영화, 괴기영화, 혐오스런 영화. 영화를 보게 되면 아주 흉측한 장면이 나오죠. 그게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인간 내부에 뭐가 있다고 하냐면, 인간내부에 공포심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면 이미 잠재되어있는 것이 현실화 될 때는, 면역주사를 맞게 되잖아요. 면역주사 맞으면 어떻게 되요? 독감주사를 맞으면 뭐가 생겨요. 면역성이 길러져서 적응력이 발생되죠.

안에 있는 공포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면서 그걸 봐버리면 어지간히 무서운 것은 면역이 되어가지고 무섭지 않은 거예요. 공포심을 끄집어내는 이런 걸 자주 보는 것은, 이미 인간 속에 알 수 없는 공포가 있다는 거예요. 공포가 있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죄의식에 시달리기 때문에 그렇죠. 죄의식이라는 것은(잘들어보세요) 죄의식은, ‘이것은 죄다,’ 라고 지적하는 어떤 기준이 있을 거 아닙니까?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있지요. 이 기준을 누가 만들어낸 줄 알아요? 하나님이 만들어주는 줄 알아요? 아닙니다. 누가 만들어준 겁니까? 이 도덕적 기준을 악마가 만들어준 거라고요.

악마가 윤리와 도덕을 만들어 집어넣어주니까 악마가 만들어준 그 기준에 자기가 죄의식에 삽니까 못삽니까. 못살잖아요. 못 사니까 자꾸만 위선적으로 변명을 하면서 평생을 사는 거죠. 천하 강도도 변명해요. 내가 강도질 하는 이것은 부모를 잘 만나서 그렇다는둥, 학교 선생님을 때려가지고 그때부터 비뚤어져서 그렇다는둥, 사회가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사회가 되어 내가 이렇게 되엇다는 둥 변명한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무섭다’

주님께서는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역사를 뭐라 하냐면 십자가를, 버림받은 십자가를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십자가가 죽어버리죠. 그러면 우리는, 주님 가신 그 십자가 지점이 바로 우리지점이에요. 우리는 주님 버림받을 때 하나님께 버림받은 게 마땅한 거예요. 적어봅시다. ‘우리는 버림받아 마땅하다!’ 버림받아 마땅한 애를, 길바닥의 애를 거둬서 길러내면, 걔는 원래부터 버림받았는데 밥 한 끼 들어가는 거, 옷 하나 입은 거, 전부 다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되잖아요. 그걸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공로로 보는 거예요.

그걸 십자가의 영, 양자의 영, 예수님의 영이 올때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율법을 치루었다는 것을 근거로해서, 거기서 나오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이유로 해서 이웃사랑은 우리에게 보너스 차원으로 주어지는, 길 잃은 부모없는 아이를 키우듯이 은혜를 주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안다 일 말이지요.

그렇다면 뭐가 사라집니까? ‘무서움’이 없죠. 왜 무서움이 없습니까. 악마가 만든 윤리도덕적 기준을 내가 갖고 있다는 그 자체,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착해진다는 것, 그것 자체가 죄예요. 아까 무소유가 죄라했지요? 사람이 무소유하면 천당갑니까? 인간은 무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세포 자체가 자기 것이 아니에요. 첨부터 무소유가 아니고 남의 거예요. 사람이 자기 것이 있는데 빼냈을 때 무소유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나는 무조건 비웠다’라니요. 원래 자기 것이 없는데 무엇을 비웁니까.

원래부터 자기 것이 아닌데 무슨 무소유가 되요? 법정이라는 사람은 원래 머리카락부터 누구 것인지를 몰라요. 누구 것인 줄을 모르니까 일시적으로 내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왕 내것 된 것 소유하지 않고 깨끗한 내 것 되어보겠다는 거예요. 이게 불교정신이거든요.

복음은 뭐냐 하면 원래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만드신 거거든요. 안 믿습니다. 왜 안 믿냐면 악마가 윤리 도덕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윤리도덕이 나를 착하게 만들거든요. 선악과니까. 선악과를 그냥 쥐고 있는 게 내게 습관화되어있고 이게 내 몸에 딱 맞는 거예요. 내 몸에. 선악과가.

내가 남에게 착하다는 소리 듣는 게 편하지, ‘나는 죄인중에 괴수다’ 이거는 영 취미에 안 맞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령, 십자가의 영이 오면, 십자가가 우리에게 꽂히게 되면, 관통하게 되면 피가 흐르죠. 예수님의 피가 흐르면, 이 피는 바로 너의 죄 때문에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걸 보여주는 예수님의 가치관의 피거든요. 그래서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 그 말이에요. 이미 피가 들어오면 예수님 버림받을 때 우리도 같이 버림받은 게 마땅하구나, 하는 걸 깨닫는다 이 말이지요.

버림받았다면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다,는 은혜가 되기 때문에 무슨 기준이 날아가버립니까? 악마가 심어준 윤리 도덕 기준이 내게는 불필요한 거예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뭐하지 말라 이런 게 있더라도 네가 사랑하면 그 모든 율법을 이루었느니라.

여러번 이런 말 합니다만, 부부사이에 남편이 아내를 지적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토커수준입니다. 완죤 미친놈 수준이에요. 퇴근해 와서 옷 휙, 던져놓고 ‘이 먼지좀 봐라 여자가 집구석에서 뭐했어,’ 이런눔은 정신병원에 가야돼요. 그러면 여자가 어떡해요? 여자가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따먹었기 때문에 남자를 이기는 방법이 뭐냐 하면, 깨끗하게 청소함으로 말미암아 남자를 이기려하는 거예요. 그 심뽀가. 그러면 여자는 청소를 깨끗이 하면서 안에 공포심이 있어요. 남편이 들어와서 지적받지 않으려는 공포심. 이게 바로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공포심입니다. 누가 나를 지적하지 않도록 사전에 완벽을 기하는데서 오는 공포심.

완벽은 기해야 되겠고, 완벽하지 않으면 변명거리라도 만들어야 되겠고. 그래서 누가 ‘당신 잘못했어!’ 하면 ‘그때 이러이러했다’ 라고 계속 변명해서 계속 자기 선을 선한대로 유지하려하는 그 심뽀(심보,의 표현극대화) 그걸 오늘날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심어주어요. 그러니까 목사는 악마지요. 당신 벌 받은 것은 십일조, 헌금 안해서 그렇고, 주일성수 안해서 그렇고 나쁜 짓하면 교회 몇 번 빠져서 그렇고, ‘신앙생활 똑바로 하면 복 받는다,고 이런식으로 계속 선악과 쪽으로 나가지요. 그래야 교회가 장사가 되니까 그러는 겁니다. (목사님(안산교회) 들으라고 이런 야그 하는 건 아니고요) 폭소!

날과 절기와 그런 거 하지 마라, 너는 아들이야! 아들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어떤 사랑을 주었는가만 알면 손 탁탁터세요. 이것이 우리 아버지가 은혜주신 분이다,라는 걸 알면 아들로서는 할 도리 다 한겁니다.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는 게 언제인지 알아요? 아버지가 주신 은혜 잊어버리면, 감사 잊어버리면 그게 아들(자녀)답지 못한 거예요.

요새 아이들...아무리 잘해줘도 소용없습니다. 지가 똑똑해서 잘 걷고 부모는 자기 재롱에 보너스 얻은 거고, 자기 가정이 화목했고, 잘된 것은 자기 탓이고 못된 것은 다 부모탓이고...그게 원수지 그게 자식입니까.(실감 실감-녹취자) 그런데 자식이라고 또 부모가 어떻게 합니까. 교도소 들어가면 영치금 넣어주고, 사식 넣어주고, 애지중지 하잖아요. 내자식 내새끼 하잖습니까.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들입장에서야 (종같으면 그런짓 않습니다) 내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발 여러분들이 자녀가 되었으면, 아버지가 나 같은 이런 못난 인간에게 큰 은혜를 주셨다, 상을 주셨다, 하나의 막처럼 온 몸에 품고 다니면, 그 사랑을 품고 다니면 남들이 보는 시선, 남들이 보는 논리, 이런 거 벗어나야 됩니다 이거. 윤리 도덕 이런 거에서 벗어나세요. 이거 못 벗어나면 제가 장담합니다. 지옥갑니다.

사랑도 모르기 때문에 속에 늘 공포심이 있어서, 요한일서에 나오죠? 사랑은 무엇을 내쫓는다?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은 심판의 불을 일으켜요. 마귀는 도사가 되어서 겁내면 겁낼수록 점점 더 겁나는 요인을 만들어버려요. ‘너 성경 석장 못읽었잖아 오늘 일 터질거야, 일 터졌잖아 봐라! 그러니까 오늘은 다섯장 읽어!’ 마귀는 자꾸 우리를 율법적으로 자꾸만 우리로 하여금 완벽하라 하고, 철저하라 하고, 성화해야 된다하고, 실수하면 안되고, 신자답게 빛과 소금 다 되어야하고, 성경말씀대로 다 지켜야 되고,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면 우리는 정신병자처럼 벌벌 떨면서 사는 거예요.

은혜가 어디 있으며, 긍휼이 어디 있으며, 불쌍히 여김이 어디 있으며, 그런 거 없는 겁니다. 벌벌 떠니까 이런 걸 감추기 위해서 나는 최집사보다 낫고 김집사보다 기도 오래했고, 우리교호에서 박집사보다는 사랑받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버티는 거예요. 꽃꽂이했고, 피아노 내가 갖다 바쳤고, 의자 내가 사다놨고, 목사 넥타이 내가 사주고, 이런 것으로 버티는 거예요. 얼마나 내세울 게 없으면 그런 걸로 버팁니까. 그래서 요한일서 한 번 봅시다.

요한일서 3장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사랑이라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은 뭐냐, 손으로 만진바고 눈으로 본바다 이 말이죠?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이렇게 나왔죠? 그렇다면 세상이 무슨 구조인가를 알아야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하면 안되죠. 그렇게 되면 페쇄된 자기 집단이 되고 말죠.

세상이라 하는 것은, 구약적으로 뭐냐면 새 언약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렇지요, 우리교회서도 다 압니다,’ 하거든요. 그러면 제가 묻지요. 예수님이 당신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이들은 그 다음부터는 뭐냐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매일같이 주는 것은 생각 않고 내가 교회 가서 섬기고 주님께 바치고 봉사하고, 이거만 자꾸 기억하는 거예요. 이거만 자꾸 기억하니까 세상은 예수님 없다 해놓고, 본인이 예수님을 자기 바깥에 세워두는 거예요. 예수님을.

예수님을 갖다 바치고 찬양 바치고 봉사하고, 주님이 직접 가정방문하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교인들은. 주님이 우리를 차지하는 걸 싫어하고, 주님은 멀찍이 시아버지처럼 세워놓고 갖다 바치고 엉기고 복주는 거 이거밖에 생각 않는다고요. 주님이 쳐들어오는 걸 제일 실어해요. 사랑주려고 주님이 찾아와도 싫다는 거예요. 왜냐면 자기 것이 날아가니까. 자기의 행함과 기도의 가치가 날아가니까. 옆사람은 30분 기도할 때 자기는 두 시간 했잖아요.

주님 사랑 주어버리면 30분 한 사람도 구원받고 두 시간 기도한 사람도 구원받는다면 미쳤다고 기도합니까. 이쪽은 십일조하고 저쪽은 십일조 안했는데 자기는 십일조 했는데 십일조 안한 사람도 천당 가고 십일조 한 자기도 천당 가면 그다음부터 미쳤다고 십일조합니까. 아까운 돈을 왜 냅니까. 이게 뭐냐, 자기로부터 자기가 계속 남고자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자기 힘으로 사는 겁니다.

여기서 자기 힘으로 살면 뭐가 생기냐 하면, 나쁜 짓하면 저주받고 착한일 하면 복받는다,는 이게 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이 뭐냐하면 ‘돈’이죠. 돈 떨어지면 저주받는 거고 돈 생기면(어떻게해서 돈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돈만생기면 이거는 복 받은 걸로 되요. 그러면 이건희는 천당 최고자리로 가겠네요. 정주영, 정몽준도. 복 받았으니까. 뭐가 축복이냐면, 나쁘다 좋다,의 자체가 내게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거. 나는 이미 나쁜놈이고, 그것도 천하의 나쁜놈인데 다만, 나를 이끌고 가시는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이끄시기 때문에 내가 자랑할 것은 ‘그래, 나 못났다, 그래도 주님 사랑 주는 걸 어떡해’ 주신다는데 어떡해 받아야지. 나는 받기 싫어도 주님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고요.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 이것이 이 세상의 어떤데도 굴하지 않고 기죽지 않은 거예요. 이게 바로 세상은, 힘으로 된 세상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의 노력해서 논리로 예수 믿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예수 믿은 것도 아니고, 교회에 열심히 충성해서 예수 믿은 것도 아니고, 웬 은혜인지 십자가의 예수님의 공로가 지옥 갈 우리는 건져낸다는 놀라운 사랑으로 다가오기에 그때부터 우리는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피조물이고 주님의 작품이고 주님이 손댔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손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산100312요일2장d27절b.hwp (70.0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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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6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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