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13:11-17 (비유에 대한 해석)
Re..마 13:11-17 (비유에 대한 해석)
이름 : 이근호(IP:)
비유에 대한 해석
2004년 1월 11일
마태복음 13:11-17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으심부터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뭐가 나올까요? 옛말에, '한국사람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할 때, 사람들은 잔뜩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서 나올 게 뭔가는 아예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얻을 것은 일단 챙겨보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원래 구경꾼들이 모여들 때는 이유없이 그냥 모여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한 소문이 들면, 그분이 직접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감안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라면 일단 갖고 보자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빼앗으려 오신 분입니다. 소위 믿음이라는 것을 빼앗으려 오신 분입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을 점검하려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믿음이 있는 자는 더욱 더 많이 받게 되고 천국에 대한 바른 믿음도 아니면서 믿음이 있다고 우기는 자는 그 엉터리 믿음까지 도로 폐기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빼앗길 수 밖에 없는 신앙을 소유한 자들입니까? 현대인들은 스스로 서려는 자들입니다. 교회와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배워서는 그 배운 지식으로 이제는 자기 손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지탱하려는 방도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저도 이제 복음에 대해서, 천국이 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습니다. 정말 이제부터는 제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신앙관과 천국관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바입니다.
지옥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 누구도 지옥에 들어갈 수 없듯이 천국도 같은 원리입니다. 마치 엄마의 손에 이끌리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어린 아이의 경우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한테 장담합니다. "엄마, 나 저 신호등의 신호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제 알아. 빨간불은 건너가지 말라는 것이고 파란 불은 건너가라는 신호래. 엄마 이제 나는 엄마 손목에 안잡혀도 나 힘으로 건너갈 것 같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갈 때까지 그 아이는 엄마에게 단단히 손목이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틈만 나면 자립하려고 하고 독립하고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을 본인이 책임지려고 합니다.
인간이 독자적으로 봐서 얼마나 선한가 악한가를 가지고 그 인간의 가치가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선함은 독자적인 자질이 아니라 누가 그 인간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가 여부와 그분과의 관계성 문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붙잡힌 바가 되지 않는 천국과 신앙은 하늘에서 원하시는 그 천국과 신앙이 전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천국의 비밀'입니다. 보통 천국이라고 우리가 연상하기에는 그냥 하늘에 존재해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제게 어릴 때 별명이 있습니다. '건들바위'입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건들건들 거린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집안 어른들 입장에서 저를 보기에 피곤했겠지요. 가만히 존재해 있어야지만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 저를 관찰할 수 있는데, 자꾸 건들거리니까 정확하게 저를 관찰할 수가 없는거지요.
즉 변화나 운동이 없이 그냥 마냥 동일한 상태도 정지되어 있다면 정확히 그 내막과 실체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참 변화도중에 있는 사물은 뭐가 뭔지 정확하게 포착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에 그냥 고정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 마당에서 옥상에 있는 물탱크를 쳐다보듯이 쳐다 봄의 대상으로 고정되어 있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런데 만약 그 물탱크가 미쳐 환장을 해서 옥상에 가만히 있지않고 갑가지 마당으로 내려와서 개집에도 들어갔다가, 헛간에서 굴려다니면서 온갖 것에 다 받혀서 유리창도 깨고, 정원의 꽃나무 가지도 부러지게 만들고, 안방을 진흙 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혼잡을 한껏 떨고 난 뒤 물탱크가 옥상 위에 도로 올라가면서 말하기를 "네들이 물탱크를 알아?"라고 한다면 아마 기가 찰 것입니다. 고정된 물탱크가 아니라 움직이는 물탱크를 사람들이 감히 상상치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물탱크가 사납게 부산을 떨고 돌아다녔으니 사람들의 뇌리 속에 물탱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이 천국이라는 것이 평소에 사람들이 생각한 그 '좋은 나라 이미지'로서의 천국이 아니라 한참 활동 중인 천국이라는 겁니다. 어떤 활동을 펼치는데요? 바로 사람들의 천국관을 헤집고 다니시면서 모조리 다 부숴놓는 그런 천국으로서의 활동을 뿜어내는 천국입니다.
즉 천국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의 완전품으로 다 만들어놓고서는 사람들 앞에서 세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 그 자체를 천국의 실상으로 받아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0-21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은 현재 인간들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상치도 못하는 참으로 약하고 쓸모없고 불편하고 귀찮기만 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왜 그 귀한 씨가 허비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알려줍니다.
즉 씨를 인간 세상의 죄악으로 인해 허비되고 손해보는 것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점을 보여주면서 등장하는 천국의 비밀에 대해 소개하시는 겁니다. 천국이 마치 이 땅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모습으로 등장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들이 적극적으로 천국을 탈환하기 위하여 악마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다는 그 현실성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은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 활동을 저지하고 있는 세력에 의해서 장악당하고 있는 형편인데 예수님의 비유는 이 세상 형편을 정죄하는 양상으로 우리 인간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에게 있어 최종 목표는 엄청난 수확입니다. 그런데 그 수확에 있어 땅의 그 어떠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달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관에 대해서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대처하려고 합니까?
인간들은 스스로의 귀와 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즉 악마의 시험과 유혹을 스스로 감시해 대처하고 천국의 씨앗을 안 빼앗기려고 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도 스스로의 인내성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의 그 많은 유혹도 스스로의 절제력으로 뿌리 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에 의해서 제거당하고 빼앗기게 될 수 밖에 없는 엉터리 믿음입니다. 천국의 활약상은 곧 예수님 혼자만의 활약상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엉터리 천국과 구원노력에 열중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의 헛된 노고에 대해서 사정없이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이사야 예언의 성취는 예수님 손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정죄할 수 있는 근거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비유를 들고 나왔고, 그것이 시발이 되어 결국에는 예수님의 자신의 목숨이 십자가에서 없어지는 경우로서 이 세상의 부질없음을 고발하려 합니다.
바로 이러한 활동 전체가 곧 천국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 16-17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눈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보고자했으며 무엇을 듣고자 했습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하나님의 참된 천국 활동을 보고자 했고 듣고자 했습니다. 인간들의 그동안 모든 수고를 무용지물을 만들어 버리는 그런 관점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아무런 희생도 없이 순전히 천국 자체의 활동으로 인해 천국이 드러나고 나타내는 그 현장을 보고자 했으며 듣고자 한 것입니다. 이 이사야 예언의 말씀은, '어떤 인간이 구원받느냐'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구원하느냐?'에 초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러 이러한 인간들이 구원된다'는 식으로 나오면, 너도 나도 그 인간 흉내내기에 분주할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쪽에서 출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허락만이 가능한 사항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허락'이 유효하려면 인간들 쪽에서 시도하는 모든 노력과 노고를 하나님께서 나서서 무(無로) 돌리고 차단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우리 인간이 죽든지 살든지 상관두지 않고 그저 옥토에 뿌리진 씨앗처럼 거대한 결실을 맺는 그러한 옥토의 위력을 볼 날을 선지자는 애타게 고대했습니다. 누가 옥토인지 아닌지를 천국의 씨가 떨어져 봐야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누가 옥토가 아닌지도 씨를 던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넘어질 자는 넘어지고 반항하고 대들자는 대들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 자체가 곧 천국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을 언제나 느낄 수 있음을 절실하게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