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기다리며
그날을 기다리며
이름 : 김 현수(IP:117.53.223.29)
인생의 마지막 고비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떤가 하는 생각에 글을 쓴다. 살아오면서 즐겁거나 기쁜 일은 별로 기억에 없다. 기억에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없다. 어려서 부모들이 이혼하므로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의 돌봄 없이 유교적인 강압속에서 자랐다. 어려서의 고통이 폐결핵으로 나타나서 오랫동안 고생한 기억이 난다.
학교생활도 별로 잘하지 못하고 공부도 안해서 실력도 없고 아버지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서 사는 바람에 나는 자연적으로 집을 떠나야했다. 오고 갈데도 없이 매끼를 어떻게 해결하나 하는게 일이었다.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없이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한심스러운 생활이다.
그 때부터 자살이라는 걸 늘 생각하고 살아왔다. 생각이 아니라 면도 할 때 면도 날이 피부를 벨때 처럼 섬듯하는 충동이 나타날 때가 많았다. 어쩌다 만난 여자로 부터 교회 이야기를 듣고 성경을 얻었다. 처음 읽을 때 마태복음이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왜 그 사람들이 안믿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는 처음 성경이라는 것을 읽는데도 다 믿어지는데.....읽으면서 혼자 많이 울었었다.
그리고 교회를 찾아갔다. 처음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다. 나는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인줄로만 알았다. 교회에서 처음으로 영생이라는 말을 들었고 예수님을 믿으면 죽지도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을 듣고 얼마나 놀라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내 지난날을 넉두리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 피곤과 고통의 연속이고 아무런 기쁨도 즐거움도 없고 위안이라면 복음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소망뿐인것이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이끌어가심을 믿는다. 이제는 찾는 이도 찾아갈 이도 아무도 없이 할 일도 없이 망막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오직 일이라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뿐이다. 몸 둘 곳도 언제 이곳을 비워줘야할지 막연하게 하루하루가 간다.
인생의 고통때문에 그날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능력도 없고 나이도 들어서 도무지 써먹을 때가 없다. 그날이 언제 오는지 그 것에만 생각이 집중된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살려두시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이며 오직 죄만 만드는 기계다.
주님의 은혜로 감사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그날을 기다리며 이 세상이 정말로 싫어진다. 눈물이 흐른느게 아니라 마음이 흐느낀다. 이 세상에 왜 있어야하는지 아무 것도 할 일도 삶을 지탱할 여유도 없으면서 무슨 연유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적도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오직 죄만 지은 인간이다.
김 현수(IP:117.♡.223.29)
10-09-15 08:58
십자가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을 몇번 보았다. 벌떼처럼 일어나서 공격들을 하던 그 욥의 친구들은 다 .어디갔나.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합2:20)때문인가? 남의 설교, 강의 갖다가 각색하고 침을 튀며 외쳐도 막상 전하여야 할때는 유규무언이다.바리새인들 처럼. 설교 해석이 어쩌니 저쩌니, 오직 주님께서만 아시고 주님만 일하신다.
박온정(IP:118.♡.50.20)
10-09-15 11:08
마음이 많이 상하셨나 봅니다.
얼마나 화가 많이 났으면 이렇게 화를 퍼내셨을까요.
어제 올리신 글을 읽고 내내 마음이 무겁고 아팠습니다.
뭐라고 위로를 드려야할까 생각해보지만 만족스럽지 못해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온라인상에서의 나눔은 완벽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더군요.
김현수 님, 오직 주님으로부터 위로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적 삶에 압도당하지 않을 사람이 없지요.
그러나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 껍데기의 삶이라 감안한다면
진리 외에는 부서뜨릴 것이 세상에는 없는 줄 압니다.
강구만(IP:121.♡.1.14)
10-09-15 13:52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당해 파산하고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엇습니다. 그는 아내를 병마에 보내고 자식은 가출해서 사고치고 지금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가산을 다 탕진하도록 복음만을 전했습니다.그랬더니 교인들이 하나 둘씩 줄어들어 급기야 자기 가족 밖에 단 한명의 교인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옛날 어느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빈민들을 위해 산을 개간하다가 다쳐서 평생 불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옛날 어는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졸음운전을 하다가 막 신혼여행을 다녀온 신혼부부를 즉사케 했습니다. 합의금이 없어 여태껏 교도소에 있습니다.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과연 이런 이야기가 공감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행복이 되는 이유는 동일한 복음속에 들어와 있는 자만의 특권이다. 십자가 복음이 자아속으로 들어 오게되면 복음이 자아를 삼키고 자아는 그 복음의 소중함을 위하여 이용당하는 인생을 살게된다. '복음을 자기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라고 시작해서 뒷부분에 그 어떤 종류의 인생역경을 덧 붙이더라도 앞의 구절, 즉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의 가치가 손상되거나 변질이 없어야 참된 성도다. 이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복음'과''자기목숨' 사이의 경중을 논해야 한다. 또한 왜 복음이 '나의목숨' '나의인생'에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는 지를 알아야 한다. 즉 무용지물인 복음이 아니라면 엉뚱한 가짜 복음을 믿고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그 복음을 사랑해야 진정 '자기목숨'을 위해 살지않는 성도임이 드러난다. 복음이란 예수님의 생명이고 '자기목숨'이란 나라는 인간의 목숨이다. (이근호 목사님의 '피'중에서)
이글을 옮겨 적으면서도 말씀이 활동하기 위한 현실을 고난이라는, 혹은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성도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 너무 싫고 아프지만 거부할 수 없는 주님의 낯선 사랑에 죄인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이진용(IP:117.♡.223.29)
10-09-15 20:49
욥의 친구들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처럼 정죄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죠. 말씀하신대로 주님만이 아시고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마귀도 일하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스스로 믿음이 없다는 자책은 안하셔도 됩니다. 우리중에 믿음이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붙잡아주지 않으시면 항상 마귀의 밥일뿐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성도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모세, 예례미아, 엘리아, 요나 등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한 사람들 아닙니까? 살면서 깜깜한 가운데 죽으려고 생각한 사람이 김현수씨뿐이 아닐겁니다. 저도 그런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때마다 같이 하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또한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오늘도 지나가고 있고 내일은 아직 안 왔습니다. 한 날의 근심은 그 날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김현수씨 혼자라는 생각이 오지도 않은 내일이 깜깜하게 보일뿐입니다. 혼자가 아니고 예수님과 같이 있다는 생각을 마귀가 잊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김현수씨께 가르치시고 알려주실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자신을 보지 마시고 같이 계신 예수님을 보십시다. 이 밤에 죽어도 천국입니다. 주님께서 믿음에 믿음을 더 하실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털고 일어나시고 식사 잘 챙겨드십시요. 주님의 은혜가 같이 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능우(IP:59.♡.102.148)
10-09-15 21:49
살려둔 이유는
삶으로 인한 고생과 복음으로 인한 고난 중에 성도라면 무엇을 자랑해야 할까요?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영광스럽게 생각 했습니다.
성도라면 주님 앞에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직 죄만 생산하는 기계임을 고백하며 실토하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하찮은 죄인에게 주께서 흘리신 피로 죄 사함을 주신 그 사랑에 감사하고
자랑하라고 살려 두신 것이지요.
아무리 어렵더라도 거지 나사로 만큼이야 하겠습니까?
아니 머리 둘 곳 없는 주님 만큼이야 하겠습니까?
본인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임이 믿어지신다면 영생을 얻은 마당에 자신의 어려웠던 삶이 뭐 대수겠습니까.
그 어려움을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되고 말씀이 믿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십니다.
우리는 형편 따라 마음가짐이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모습에도 개의치 않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 긍휼 속에서 말씀이 주시는 위로 속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고난이 장차 주어질 영광에 비하면 족히 비교 할 수가 없습니다.
생존의 불편 보다는 주님의 복음으로 기뻐하는 삶이 주어 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것이 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묻고 계시네요.
늘 마귀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부지런히 가로막고 있습니다.
구득영(IP:203.♡.97.248)
10-09-16 22:38
십자가 마을에 20년을 몸담은 사람은 20년을 공격받았고,
10년을 있은 사람은 10년을 공격받고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피 묻은 주님의 십자가가 더욱 더 선명하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함께 끌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