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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몸과 법의 관계성묻고답하기요한복음

몸과 법의 관계성

이름 : 박윤진(IP:210.182.130.40)

오늘 본문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2장 1절부터 8절까지(A)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 20절(B)입니다.

(A)에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마르다와 가룟유다가 대칭을 이루고 있고, (B)에서는 천국에 있는 자들(큰 자, 작은 자 불문)과 서리관(바리새인) 묶음이 율법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A)에 등장하는 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부족국가의 구성원들은 가난을 현대 자본주의의 구성원과는 다르게 인식했습니다. 개인 책임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책임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부유함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공동체 전체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칭찬받을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러한 구제가 사회의 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A)와 (B)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려면, (A) 본문의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칭찬하시면서 구제의 법을 완성하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뒤 이어 (B)를 읽으면 그 어떤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모두 성취될 것이며, 아무리 작은 율법도 모두 지키는 자가 바로 천국에서 큰 자라고 칭찬받는다고 결론납니다. 가룟유다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이지요. 구제하라는 율법까지 신경쓰고 있는 자이니까요.

그런데 사도요한은 가룟유다를 도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가룟유다는 타박하시면서 마르다의 행위가 자신의 장사를 위한 일이라며 두둔하시고 계십니다. 다른 성경예서는 매우 칭찬하시지요. 즉, 율법을 신경썼던(속으로 돈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가룟유다는 덜렁 예수님의 반대편에 위치하게 되는 겁니다.

(B) 본문을 통해 율법에 대한 행위의 정도를 단계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천국못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단계입니다. 그 위의 단계는 천국은 가지만 천국에서는 작다고 평가받는 단계이고, 가장 높은 단계는 천국에서조차 크다고 평가받는 단계입니다. 천국조차 율법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따라, 혹은 그 지킴과 못지킴의 양적 수준에 따라 서열화가 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오늘 두 개의 본문은 인간의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연결됩니다. 옛언약과 새 언약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몸과 법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다시 한번 목격됩니다.

몸과 법이 분리된 인간에게 있어서 법은 이미 깨어진 유리조각의 파편처럼 부수어진 상태로 왜곡 조작됩니다. 오늘 B본문(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성취되고 그 자체로 선하고 천국과 지옥을 구별하는 기준 역할을 하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 말씀과 비교해서 인간은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고 악하고 악합니다. 그러므로 그 지고지순한 하나님의 법을 그 악하디 악한 인간쪽에서 한 번 지켜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법의 파괴이며 조작인 것입니다. 즉, 죄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법은 죄를 깨닫기 위해 주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 자신속으로 하나님의 법을 끌어들여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법이 인간의 몸에 투사되면 죄가 꿈틀거리면서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위"라는 것입니다. 지금 법을 해석하고 있는 그 주체자의 몸으로 직접 법의 요구(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않는 행위)에 부응하면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도 맞설 수 있는 "자기 의"로 무장할 수 있다는 노림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지켜낸 대단한 몸이기에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도 그 생존을 주장할 수 있다는 논리이지요.

그러나 내 몸이 있는 이상, 즉 인간이 살아있는 이상은 법을 객체,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악한 주체가 선한 대상을 해석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죄가 튀어나오게 됩니다. 법과 분리되어 있는 몸은 결국 죄만 양산하는 기계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어떤 몸도 법과 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노출되는 순간,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고, 죽는 순간 몸이 사라져 버리기에 법만 남게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음만을 증명하는 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주신 다고 하시면서, 그 법은 몸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예레미야 31장 33절)

몸과 법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전제로 죄를 깨닫게 하던 옛언약은 이미 이스라엘에 의해 파기되었습니다. 그래서 몸과 법이 일치되어 법 자체가 되어버린 몸이 새 언약으로 등장합니다. 사실 파기된 옛언약은 법과 몸의 분리상태는 항상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즉 새언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사전광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은 법이 마음에 새겨져 그 몸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발생시키는 어떤 사건을 통해 따로 준비하신 어떤 몸 안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의 하나님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몸 안에서 하나님의 법과 육체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일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몸이 일체가 되었으니, 그 몸은 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의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몸이 말하고 행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한 인간의 몸으로 되어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말하고, 함께 걸은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 B(마태복음)로 돌아와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본문에서 바로 자신이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자이며, 새 언약의 담당자로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천국에서 작은 자, 큰 자 그리고 천국에 못가는 바리새인의 의를 새언약의 담당자가 직접 분류하고 계신 것이지요.

천국은 몸과 법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영역입니다. 몸과 법이 일치된 곳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 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몸과 법이 분리되지 않기에 율법을 좀 더 많이 지켰다, 적게 지켰다가 아예 원천 봉쇄되어 있습니다. 법을 좀더 많이 지켰다, 적게 지켰다라는 단계는 바로 천국못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수준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내 몸을 주체삼고 법을 대상 삼아 해석하고 메뉴얼화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방식으로는 그 어떤 몸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렇게 하는 순간 법은 깨어지고 왜곡되어 악한 몸에 적합한 허울좋은 가죽 옷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크고 작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천국에서의 크고 작음이 구별된다면 그 구별의 이유는 천국으로 불려들어온 자들의 어떠함은 아닐 것입니다.몸과 법이 일치되어 있는 영역에서 자신만의 몸뚱아리에서 뿜어져나오는 행위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천국에서 크고 작음의 구별을 하실 분이 따로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는 작은 자이고, 누구는 큰 자라는 은혜를 덧입혀주실 예수님의 결정권이 지배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는 말씀입니다. 즉, 천국은 예수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곳이기에 그 크고 작음의 원인을 인간에게서 찾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죠.

여기서 오늘 A본문(요한복음)을 다시 읽어봅시다. 마르다는 예수님이라는 영역, 천국에 포섭된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그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바쳤다는 그 행위 때문이 아니지요? 마르다는 단지 지금 자신 앞에 계신 그 분이 바로 몸과 법이 일치된 유일한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된 것입니다. 특별히 그가 바친 향유는 예수님께서 장차 자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자신의 몸안으로 불러들이실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장사됨(죽으심)과 연결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해 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해석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해석입니다.

새 언약의 성취자에게 부여된 새 계명, 즉 사랑이 어떻게 지켜지는 지를 똑똑히 보여주기 위한 그 몸을 위해 마르다는 향유를 붓는 죄를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습니다. 마르다는 가룟유다의 지적처럼 구제하라는 법에 충실할 수도 있습니다. 가룟유다의 말을 듣고 "아차!"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제하라는 법이 마르다와 분리되어 있는 이상, 그 법은 마르다로부터 죄를 유발할 뿐이지 그것을 지킬려는 마르다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의해 이미 법에 충실할 필요도, 아차 실수했구나를 인정할 필요도 없는 영역에 놓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마르다는 새언약의 담당자이신 예수님의 몸과 자신의 몸이 어떻게 하나가 될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면 그 뿐입니다. 마르다는 향유를 쏟아 붓지만 그 역시 죄입니다. 그 죄까지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은 바로 죽으심입니다. 대속입니다. 새계명의 완성입니다. 마르다의 행위(죄)는 예수님에 의해 '나의 장사됨(사랑)을 위하여'에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를 죽일 것이며, 그 살해현장에서 자신 또한 공범으로 발각될 처지이기에 마르다는 그 분앞에서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영원한 대제사장에 의해서 말씀의 검으로 난도질 당해야 함을 옥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연합되지 않는 자는 옛언약을 파기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예수님의 몸을 장난감삼아 이런 저런 모양으로 조작하는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계속 자신의 죄인됨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몸을 자신의 음식으로 삼았던 인간들의 욕정을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동시에 그 욕정까지 용서하신 새계명(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또한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오늘 두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밖에 없다는 성경 말씀이 다시 한번 응하게 되는 기적을 목격합니다.

김성환(IP:121.♡.115.15)

10-09-13 19:31

십자가 피를 두고 많은 경로를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그럼에도 인간(우리)과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댓글로 달아 봅니다.)

죄인인 한 여자(마르다?_요12장/마리아?)와 옥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즉 인간과 옥합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십자가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는 것으로 저는 보고 싶습니다.

옥합를 깨는 사건은 인간이 다루어야 할 성질과 속성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즉 복음을 인간이 나서서 다루고 관리하고 소지할 대상이 못됩니다.

왜 그런가하면 복음 즉 옥합을 깨져버리는 사건은 한 여자가 절대 예측할 수 없는 천국의 속내막이 약속대로 예수 발 앞에서 터져 버린 것입니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친히 나서서 아들의 장사를 위해 창세 전 언약대로 죄인인 한 여자를 말씀으로 뚫어버리고 창조해 낸 주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그냥 윤진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장사를 위해 동원된 하지만 십자가 피가 바로 이런 것이다란 것을 십자가 사건 전에 먼저 앞당겨서 보여준 들러리인 샘이죠.

한 마디로 이 여자는 말씀으로 먹힘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여자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속에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약속의 비밀을 주고 받는 현장을 단지 모를 뿐입니다(주님은 여자안에 일하시는 아버지하고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를 포함한 모든 군중들은 약속대로 발생된 '낯설음'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이 예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남녀가 은밀한 밀담을 나누는데 개와 돼지가 그냥 구경하는 격입니다.

여자나 제자들이나 가룟유다나 우리나 모두 그 현장속에 영으로 일하셨던 아버지와 아들간의 이야기를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고 나서 성령이 창세 전 예수안에 선택받기로 작정된 자에게 찾아 오심으로 그 때 그 사건을 십자가의 긍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는 여자가 자신에게 한 '것' 즉, 옥합을 깨뜨린 사건(물론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발생된 사건입니다)을 복음(예수의 죽음=장사)과 같은 동일한 선상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후 증거하라고 명합니다(물론 십자가 사건 전에 예수만 알고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마 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왜냐하면 그 옥합 사건은 십자가 사건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묵시세계에서 즉 십자가가 터져 버린 세계안에서 이미 발생된 십자가 복음의 사건으로 예수는 미리 보시고 간주해 버린 것입니다.

물론 한 여자는 예수가 자신에게 가룟유다에게 무슨 뜻으로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를 뿐입니다.

그냥 그 여자는 어떤 힘에 의해 끌여 온 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하나님이 주님의 말씀으로 작동시킨 약속에 떠밀려서 예수에게 옥합을 들고 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창세 전 성부와 성자가 한 언약의 약속대로 북치고 장구치고 괭꽈기까지 다 치고 흥겹게 즐거워 하시다고 마무리까지 다 종결짓는 모양새입니다.

이 창세 전 묵시의 세계를 고스란히 인간에게 양보도 한지 않은 채 약속대로 줄기차게 십자가 사건까지 밀고 가시고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셔서 또한 성도에게 양보하지 않으신 채 오로지 십자가 복음 즉 예수의 피만을 껍데기(죽은자,해골)같은 인생을 통해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서 옥합을 깨뜨리는 사건(여자가 한 것이 아님)는 여자와 아무 상관이 없음을 즉 죄도 의도 선도 악도 아무런 개입도 연관도 없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 사건 못지않게 베드로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늘 육신만 생각하다가 말씀에 그냥 삼킴당했습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는 창세 전 언약대로 십자가 사건만을 빛내는데 그냥 동원된 죽은 자일 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앞에서 한 신앙고백조차 자신이 고백하지 못하는 현실 그리고 자신이 감히 예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조차 자신의 고백으로 돌리지 못하는 현실이 한 여자의 현실이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베드로(이 땅에 살아야 할 이유도 목적도 없는 죄인)에게 긍휼로 떨어진 복(복음)이였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복은 베드로 자체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한 여자와 베드로와 우리는 그냥 죄로 저주받고 심판받아 마땅히 불못에 들어갈 인생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방적인 처분에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숨소리 조차 고르지 못할 마귀의 종과 자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창세 전 언약안에 주님의 피로 택한 약속의 자녀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약속 자체가 지닌 긍휼의 힘 때문에 그저 은혜(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할 때 우리가 늘 빠져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안에 죽었다 깨어나도 십자가 복음을 이용하고 늘 밀어낼 짐승입니다.

십자가 피는 십자가 사건 후에 임한 진리의 영이 증거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짐승과 방불한 우리는 성령이 십자가안에 이미 죽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그 짧은 순간 그저 한 여자와 베드로처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 방언(십자가 심판과 긍휼)을 말할 뿐입니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십자가 긍휼)을 말하며

(막 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인간이 아닌 십자가 복음이 감당 할 자체 사명)

십자가는 하나님만 아는 복음이고 하늘용어였습니다.
(이 댓글은 정답이 아닙니다. 오로지 십자가 피만이 정답입니다.)

강구만(IP:59.♡.197.138)

10-09-13 19:57

맞습니다 이곳은 정답을 게시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발각된 죄인의 고백을 토설한 자리 곧 피가 흥건한 골고다 입니다.

김영완(IP:218.♡.24.167)

10-09-14 00:33

믿음의 고백이 좀 어렵게? 느껴지네요. 저의 믿음의 분량이 적어서 인지?...솔직히 시간을 내어서 읽어야 할 고백은 좀 부담이 됨니다. 하지만 믿음의 고백을 듣고 나눌 것이 두고두고 넘치는 것은 감사한 일 임니다. 예수안에서의 믿음의 고백이든 설교든 또 듣는것이든 모든게 은사인것 같습니다. 어떤것도 버릴것 없이 넘치는 은혜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박윤진(IP:210.♡.130.40)

10-09-14 09:26

(김성환님의 의견)
인간과 옥합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십자가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는 것으로 저는 보고 싶습니다.
옥합를 깨는 사건은 인간이 다루어야 할 성질과 속성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 (제 추측으로는)김성환님은 옥합을 깨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라고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맞다면 저는 그에 반대합니다. 풍유(알레고리)의 해석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김성환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옥합을 깨는 사건(인간의 어떤 행동)을 하나님께서 벌이신 좋은 일이라고 간주하게 되면, 성화론자들이 줄곧 주장하는 바, 성령의 도움으로 인간의 어떤 행동들은 선한 일이 되고 맙니다.(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 김성환님이 그런 성화론자들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김성환님의 전체적인 글의 목적은 인간의 전적배제을 위한 복음의 은밀성이니까요)

제 글의 취지는 옥합을 깨는 여인조차 가룟유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와 여인은 모두 법과 분리된 몸이기에 그 어떤 짓을 해도 죄 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이 제 글의 취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듯 똑같은 죄인을 예수님께서 즉 천국을 다스리는 자께서 어느 누군가의 행위를 자신의 죽음과 임의로 연결시키고 계시기에 비로소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위 글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모임 때는 이 부분에 대한 보다 많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 옥합여인, 해석하는 나 이렇게 세 꼭지점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옥합여인을 끌어당기셨습니다. 예수님의 결정권이 핵심입니다. 예수님만이 주체입니다. 여인의 행동은 여전히 그저 죄(객체)입니다. 예수님때문에 용서받습니다,천국에 합류됩니다.

그래서 나는 여인의 행동을 정답이라고 간주합니다. 정답을 연구합니다. 정답을 연구하면서 그 여인의 행동(옥합깨기)를 기준으로 나를 조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정답에 끼워맞추기를 합니다.

정답에 자신을 짜맞추면서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처음 그 여인을 정답으로 포섭하신 온전한 주체(예수님)는 없어지고 그 정답이 아닌 여인의 행위가 마치 주체가 되어 나(해석자)를 객체삼아 조작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인 줄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유불문하고 나를 정답삼기 위해 내가 정답이라고 정해놓은 것에 의해 지배당합니다. 그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정리해보면, 여인은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정답으로 인정받은 여인을 탐구합니다. 이제 여인의 행동이 마치 정답처럼 해석자를 조작합니다.

천국의 결정권자가 어떤 죄는 용서(여인의 옥합깨는 행위)하고 동일한 그 결정권자가 어떤 죄는(법을 이야기 했던 가룟유다, 서기관, 바리새인) 처벌하시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많은 분들이 옥합을 깨는 사건이 죄던 아니면 십자가 사건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조작하신 일이던 결론이 십자가로 귀결되면 그만 아닌가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옥합을 깨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 배후에 하나님을 등장시켜야 합니까? 그보다 대단한 일이 인간세상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그 주체가 인간이라면 모두 단 한 글자(죄) 속에 쳐박아야 그것조차 용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 빛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시공간을 초월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공간을 초월한 죄때문입니다.십자가사건이 온 우주에 우뚝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온 우주 구석구석에 죄 아닌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의 입을 통하여 나오게 하실까요? 그냥 성령의 입으로 하시지요. 제가 말장난하는 것처럼 느껴지실지 몰라도, 인간의 입을 통해서 나와야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인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왜요? 원래 그 입의 주인이 죄였거든요.그런데 지금 주인이 바뀐 것을 알려면 바로 그 주둥이에서 십자가 고백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십자가를 자랑하는 행위는 죄 아닙니까? 죄 맞습니다. 이것을 증명하시는 분이 바로 지금 성도의 주인인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주인이 직접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십자가로 돌아가도록 조치하고 계십니다.

김성환(IP:121.♡.115.15)

10-09-14 10:57

이제 윤진님께서 댓글로 원래 처음에 의도했던 그리고 썼던 글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제 글의 취지는 옥합을 깨는 여인조차 가룟유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와 여인은 모두 법과 분리된 몸이기에 그 어떤 짓을 해도 죄 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이 제 글의 취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듯 똑같은 죄인을 예수님께서 즉 천국을 다스리는 자께서 어느 누군가의 행위를 자신의 죽음과 임의로 연결시키고 계시기에 비로소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 옥합여인, 해석하는 나 이렇게 세 꼭지점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옥합여인을 끌어당기셨습니다(인간은 감히 이 내막을 모르죠). 예수님의 결정권이 핵심입니다. 예수님만이 주체입니다. 여인의 행동은 여전히 그저 죄(객체)입니다. 예수님때문에 용서받습니다,천국에 합류됩니다.

(...)

처음 그 여인을 정답으로 포섭하신 온전한 주체(예수님)는 없어지고 그 정답이 아닌 여인의 행위가 마치 주체가 되어 나(해석자)를 객체삼아 조작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인 줄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유불문하고 나를 정답삼기 위해 내가 정답이라고 정해놓은 것에 의해 지배당합니다. 그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

네. 우리가 여기에 걸려 들었습니다.
우리의 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글은 쓴 뒤 자신의 생각속에서 잊어버리는 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인데 인간인지라 우리는 그리 되지 못합니다.

댓글을 올린 저의 요지는 단 하나입니다.

오로지 오직 예수만이 주체이시고 그리스도이시고 주님이십니다.(윤진님의 주장대로...)

우리는 늘 가짜로 원래 없었던 자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으면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박윤진(IP:210.♡.130.40)

10-09-14 11:03

우리는 늘 가짜로 원래 없었던 자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으면 합니다.
----> 주님께서 우리를 늘 가짜로 원래 없었던 자로 남도록 조치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남지 못하죠.^^

성재필(IP:112.♡.81.29)

10-10-12 09:08

고맙습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마치 우리서로 자기부인하기 경쟁(?)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더욱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주님만이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면류관을 벗어 던지는 작업을 보는 것 같습니다.그리고 "그뒤에 따라오는 자존심 챙기기는 지옥입니다."라는 메아리도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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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7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