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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요한계시록002강-100603b자유게시판요한계시록

서울강의-요한계시록002강-100603b

이름 : 오용익(IP:59.3.201.250)

서울강의-요한계시록002강-100603b(서울하나교회, 이 근호목사)

요한계시록에서 피를 중심으로 지상과 천상이 나누어지는데 지상에서 올라올 때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할까요?’라고 나오지만 위에서는 이 피를 통과했기 때문에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의 인간의 어떤 행함도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받지를 않고 천상에 있는 시간과 공간이 위에서 내려옵니다.

내려올 때 어떻게 내려오느냐 하면 사건이 되어서 뚝뚝 떨어지지요. 이것이 어려워요. 위로 올라갈 때는 시간과 공간이 뭉텅이로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잘 보일까, 이렇게 하는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마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다만 하나님께서 하실 때는 사건으로 떨어져요.

사건으로 떨어지게 되면 이 사건은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자기 시간과 공간으로 붙잡아버리면 이것은 누구한테 의미가 됩니까? 자기한테 의미가 되잖아요. 그래서 위에서 주어지는 사건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게 만드는 사건들로 와요.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내 것이 되지 않는 사건.

일곱 교회의 예를 들면 방금 해석한대로 일곱 교회를 해석하면 일곱 교회 해석은 끝나는 거예요. 굉장히 쉬워요. 일곱 교회가 이렇게 하나, 둘, 죽 있습니다. 이 일곱 교회에 무슨 사건이 주어지느냐 하면 피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건이 주어지지요.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일곱 교회는 일곱 교회의 죄들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이 죄들이 일곱 교회 본인들이 봤을 때는 ‘아이고, 잘못했어.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니까 우리 교회가 망하지. 우리는 벌 받은 거야.’라고 자기의미로 자기시간과 공간의 사건을 해석하는데 그 해석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자기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 어떤 오류라든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다든지, 간음한 여인이 있었다든지 이런 사건들 하나하나 전부 다가 ‘이미 다 이루었다.’를 보여주는 것으로 결합이 되어서 주님은 살아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되면 이미 끝난 거예요.

그걸로 행복하세요. 계시록 2장에서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은 잘 했는데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잊었다.’ 하니까 ‘우리는 첫 사랑을 잊지 맙시다. 첫사랑 회복운동을 합시다.’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맞습니다. 우리는 첫사랑을 잊어버려도 합당한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 에베소교회가 보여줄 죄 부분은 첫사랑을 잊어버림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지적을 했다는 것, 따라서 우리 에베소교회는 교회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왜냐고요? 그렇게 지적해주시는 진짜 교회가 엄연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그것을 쳐다보는 거예요.

‘우리교회는 첫사랑을 회복합시다.’ 하는데 첫사랑 회복하면 뭐합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뭘 하려고 한다면 그 의미가 천상의 시간공간이 이 지상에 사건화 되는 것이 아니고 자꾸 ‘내 교회, 내 교회, 다른 교회는 몰라도 내 교회 잘돼야 돼.’라고 자기중심으로 되돌아오잖아요. 어쨌든 내 교회는 있다는 거예요.

어쨌든 ‘이 교회는 내가 투자한 것이 있는 교회고, 그 때 부흥회 때 내가 잠시 미쳤었는지 몰라도 목돈을 냈는데 돈이 아까워서라도 다른 교회는 못가. 이교회 아니면 안 돼. 그 동안 십일조 낸 것 복리로 계산해보니 아까워서 다른 교회 못가. 목사를 갈아치우는 한이 있어도 나는 못가. 내 전세금 빼서 바친 이 교회를 내가 왜 떠나. 내가 나가려면 내가 낸 목돈 받아가지고 나가야 해.’

어떤 교회는 자기가 헌금한 것 받아가지고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교회지요. 일곱 교회는 하나님께서 지상의 교회가 필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델케이스로 나타난 교회에요. 마치 밧모 섬이 있다면 그 앞에 포진하듯이 터키의 밧모 섬 앞에 나란히 일곱 교회가 있어요. 다른 데는 교회가 없겠습니까?

사도요한은 천사와 하늘로 통하지요. 그걸 제가 통풍구라고 했습니다. 또는 환풍기라고 했지요. 뭔가 하늘과 유일하게 통하는 장소이고 앞에 포진된 교회는 이 지상의 교회들이고 일대 칠로 선보는 것 같아요. 이렇게 점박이처럼 있는 일곱 교회의 이것이 앞으로 모든 역사에 계속 사건화 된다는 거예요.

다만 각 교회는 각각 맡아야 될 죄에 대한, 전문적으로 죄지을 것이 따로 등장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아셔야 돼요. 내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 ‘내가 죄를 안 지을 수 있었는데 죄를 지었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짜 모르는 사람이에요. 사람이 죄를 안 짓고 싶다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항상 죄짓는 5분 대기조에요. 군에 안간 사람은 5분대기조라는 말이 뭔지 모르지요? 항상 대기된 상태에요. 2009년도에는 이 죄가 퍽 나오고 2010년에는 이 죄가 퍽 나오고 내년에는 또 무슨 죄가 나올지 몰라요. 아주 다채로워요. 인간 둘이 모이면 각자 지은 죄가 다 달라요. 일곱 모이면 부채 살처럼 다 달라요.

다음 주 토요일에 결혼식 주례를 해야 하는데 결혼이라 하는 것은 그동안 네가 지은 죄를 가지고 오고 또 내가 지은 죄를 가져와서, 부부가 아닌 상태에서는 그것을 깔 필요가 없는데 부부간에 그 패를 까는 거예요. 둘 다 패를 까서 ‘아, 이래서 네가 그 따위 노림수를 가지고 나를 꾀었구나.’ ‘그러면 당신의 패는?’ ‘네가 이런 노림수로 나를 가지고 놀다시피 해서 기어이 네 여자를 만들었구나.’ 패를 둘 다 까보는 겁니다.

남은 것은 언제 헤어지느냐 그것만 남았어요. 둘 다 그것만 남았는데 이게 하나님의 뜻인지 애 하나 낳아보세요. 애를 낳으면 그 다음부터 무게중심이 애에게 쏠리면서 애 때문에 헤어지지도 못하고 애만 쳐다보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가정에서의 해방은 곧 죄에서의 해방입니다. 가정에서 어떻게 해방되는가, 피로써 해방됩니다.

예수의 피를 만나면 여자를 만나고 남자를 만난 것이 하나의 사건인거예요. 누가 일으킨 사건입니까? 하늘에서 ‘너는 그 여자를 만나야 네 죄가 나오고 너는 그 남자를 만나야 네 죄가 나온다.’는 거예요. 그리고 ‘네 죄의 열매가 얼마나 못됐는지 사탄 같은 그런 새끼가 나오는지를 봐라.’ 하는 거예요.

어느 자식치고 부모 말 제대로 듣는 자식 봤습니까? 태어나자마자 부모 이용하는 것이 자식인데. 그 자식에게 사랑이니 정성이니 부모공경이니 해 봤자, 그 자식은 헤헤. 웃으면서 이리 이용해먹고 저리 이용해먹고 다 이용해 먹어요. 제가 아는 사람은 부부가 이혼한 사람이 있는데 이혼을 하니까 자식들이 휘파람을 부는 거예요.

오늘은 엄마한테 가서 용돈 타먹고 다음날은 아빠한테 가서 용돈 타내고 아주 신나요. 둘이 안 싸우니까 조용해서 좋고. 결손가정 애들이 문제가 많다고 하는데 그것은 애 문제지 영악한 애들한테 걸리면 그것도 좋은 장점이 될 수 있어요. 인간은 어쨌든 나밖에 몰라요. 그런 인간인줄 아시고 주께서 이미 해결을 다 지어놓고 그 다음에 그 피가 어떻게 구원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는 인간의 자기시간과 공간의 한계성 때문에 죽었거든요. ‘우리가 시간적으로 아는 메시야, 우리가 공간적으로 아는 메시아와 당신이 아는 메시야하고는 달라. 우리가 공간적으로 아는 메시야는 구름타고 오게 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메시야는 아직 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왔느냐, 하고 마귀가 이야기했잖아요.

이런 오해들로 인하여 진짜 메시아가 뭘 흘렸습니까? 피, 죽었지요. 그래서 이런 오해로 말미암아 피를 흘렸다면 다시 용서받은 입장에서 위에서 다시 피를 통해서 내려올 때는 이것을 지적하는 십자가 사건들이 터질 때 구원받은 사람은 이것을 지적받는 즐거움이 있는 거예요. 구원받는 사람은 뭘 해도 죄라고 지적받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지적할 때 뭘 가지고 지적하느냐, 말씀을 가지고 지적하지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것은 안 되는 거예요. 돈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이 세상을 왜 삽니까? 차라리 자살하고 말지요, 돈 때문에 사는 것인데. ‘네 이웃을’ 뭐 같이 사랑하라?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게 너무 상투적이잖아요. 이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아주 식상하지요.

이것을 모르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말을 약간 바꾸어 보면 이 말이 얼마나 지키기 힘든 말인지를 알게 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을 ‘네 이웃을, 네가 너를 예쁘게 단장하는 것처럼 네 이웃을 예쁘게 단장하라.’ 아침에 화장할 때 옆 사람 얼굴에 찍어 바릅니까? 아니잖아요. 내 얼굴에 찍어 바르지요.

내 얼굴에 찍어 바르고 밖에 나갔을 때 만약에 다른 여자가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갈 때는 집에 가서 화장을 고치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네 이웃을 네가 네 몸을 예쁘게 하는 것처럼 남도 예쁘게’ 할 수 있는 맘을 가진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보고 이것을 지키라고 하면 화장을 안 하면 안했지 남을 예쁘게 하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을 거예요.

어떤 성경말씀도 우리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예수님이 행하신 그 피가 왜 율법적으로도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느냐, 그것으로 예수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덜렁 자기 잘남을 확인하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처럼 율법에 자기 자리를 까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설교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율법에다 우리 자리를 깔아 버리면 율법에서 가시가 올라옵니다. 궁둥이 다 찔립니다. 율법은 막 쏘아대요. 율법에서 저주가 올라오는데 어디서 방석을 깔고 거기에 앉아 있습니까? ‘어이쿠 뜨거워라! 못 앉아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앉을 자리가 아니고 주님이 완성하신 주님이 오실자리인데 그 율법의 완성이 우리한테 올 때는 우리가 아는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을 보장하려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부수는 사건 사건들로 온다는 말입니다.

그게 요한계시록해석의 기본입니다. 항상 사건이에요. 사건인데 그 사건에 짝이 있어야 돼요. 그 짝이란 죄인인 우리와 단짝이 되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하나교회도 포함되고 우리교회도 포함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부담 없이 일곱 교회를 볼 수 있는 겁니다.

‘어제는 에베소 교회가 걸리더니만 오늘은 빌라델비아교회의이야기가 바로 우리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네. 아하, 라오디게아교회의 문제가 바로 우리 문제네.’ 항상 이 땅에서 교회라 하는 것은 ‘너는 교회 아니야. 너는 할 게 아무것도 없어. 주께서 사건으로 죄인들을 긁어모아서 하나교회든 우리교회든 만든 거야.’라고 하는 겁니다.

항상 죄인들을 모아서 이 교회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피를 통해서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지,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요.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그러면 피를 가지고 천상에 올라가는 이것이 왜 완성이 되는가? 밑에는 죄밖에 없으니까 미완성이고 피로 완성될 때 사건화 되어서 우리에게 십자가은혜가 주어지는데 이 완성이란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성전완성이에요.

8월에 레위기강의를 할 것인데 미리 당겨서 하면 ‘속죄제’라는 제사가 있는데 어떤 경우에 해당되느냐하면 사람이 무심코 지은 죄인데 나중에 성경에 맞추어 보니까 죄인 것을 알았을 때 그 때 회개하고 속죄제를 바칠 때 죄용서 되는 것을 속죄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속죄제도 소용없느냐 하면 고의라든지 뻔히 말씀을 알면서도 어길 경우에는 속죄제 아니라 무슨 제사도 소용이 없어요. 그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 정도로 무서워요.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고의가 되었던 고의 아니든 일괄해서 용서해주는 날이 7월 10일 대 속죄일입니다. 성전이 이렇게 생겼어요. 동쪽에 문을 내고 여기에 제단이 있고 안에 천막이 있는데 둘로 나뉘어요. 둘 사에 커튼이 쳐져 있어요. 바깥쪽 방(성소) 커튼 앞 가운데 향단이 있고 양쪽 측면에 등대와 떡 상이 있습니다. 제일 안쪽 깊숙한 방(지성소)에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7월 10일에 언약궤 위에 피가 뿌려집니다. 이 7월 10일을 기해서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일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언약을 믿는 사람 모두에게 용서가 되는 날이 와요. 그런데 7월 10일을 기해서 대제사장이 피를 뿌리는데 이것은 남이 하는 것이고 실제로 하나님 자신이 와서 피를 뿌리는 것이 아니고 이미 피가 발린 주님께서 그 성전 안을 돌아다니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일괄용서 받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그 성전 안에 그 촛대사이에 누가 다닙니까? 13절에 보면 아예 예수님이 촛대사이로, 성전 안을 돌아다니지요. 어떻게? 위의 피라는 입구를 통해서 하지요. 지상 같으면 7월 10일은 되는데 7월 9일은 됩니까, 안됩니까? 안돼요. 7월 8일도 안돼요. 꼭 7월 10일만 돼요.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 때문에 그런데 위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어진 처음이요 나중 되신 예수님께서 늘 돌아다니면 어떻게 됩니까? 지상에서 우리가 7월 10일이든 6월 4일이든 상관없이 고의든 고의 아니든 다 용서가 되는 거예요.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하니까 도무지 안 믿긴다는 눈빛들입니다.

피를 뿌릴 때는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완성되고 난 뒤에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이미 피를 흘리신 예수님 본인이, 인간이신 예수님 본인이 나서서 인간의 죄를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짐승 어린양이 아니고 돼지 피가 아니고 염소가 아니고 인간이 인간을 대신했기에 이것이 대리가 돼요. ‘대리’라는 것은 과장 밑의 그 대리가 아니고 ‘대리운전’에서 그 대리입니다.

대리했다는 말은 십자가에 개나 소나 오리가 올라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아들을 염소 피 대신 소 피 대신 양 피 대신 직접 자기 아들을 못 박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들취급 하는 거예요. 대신 때문에, 죄밖에 지을 줄 모르는 우리를, 어쨌든 내 것밖에 모르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취급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건이 있어요. 뭐냐, ‘성전 안에서.’

그러면 우리는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들어가지요. 우리는 이 지상에서 내 교회밖에 모르니까 못 들어가지요. 못 들어가는데 뭐가 일어납니까? 위에서 사건이 터지지요. 십자가사건이 터지면 그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피로 어린양의 피로 흰 옷 입고 등장하는 겁니다. 제가 너무 리얼하게 말했다고 ‘목사님, 소설하나 잘 쓰시네요.’ 이렇게 나오면 곤란합니다.

이게 소설인지 아닌지 확인해 봅시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짐승 사료 먹이는 깔때기 모양의 통로처럼 이미 완성된 것이 사건화 되어서 오는데 사건화 되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하나 안하나 상관없어요. 하나 안하나 죄인이기에. 그런데 사건화 될 때 위에 있는 성전이 위에서 내려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의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13-16)

이게 뭐냐 하면 에스겔 1장과 44장에 나오는데, 혹은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성전의 모습, 이미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그 성전의 완성된 모습으로 예수님이 그 안에 거니시는 겁니다. 그 안에 거니시면서 예수님의 피로 완성된 모든 효력을 사건화 시켜서 주게 되면 그 백성은 자기 죄를 알고 다시 한 번 십자가피의 완성됨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게 어린양의 피로 흰옷입고 종려나무 흔들며 천국 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되려면 이 성전의 기능을 알아야 돼요. 여기에 촛대가 있지요. 촛대를 그려보겠습니다. 촛대를 그려보면 왜 일곱 교회이어야 하는지가 등장합니다. 촛대가 가지가 일곱 개예요. 한 가지에서 나와서 중간에 한 가지 양쪽에 세 가지 총 일곱 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촛대가 한곳으로 모아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의 오른쪽 팔이 몇 개입니까? 하나지요. 그런데 손가락은 몇 개입니까? 다섯 개지요. 손가락을 일곱 개라고 보면 이 일곱이 손목을 통해서 하나로 모이는 겁니다. 이 하나가 되는 이것을 가지고 묶음이라고 합니다. 지난 오후설교에서 그 이야기를 했지요. 머리카락이 천개 만개 있어도 아가씨들이 일할 때 그 머리카락을 노랑고무줄로 묶어 버리면 그 묶고 난 뒤의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아니라 하나의 다발이지요.

이렇게 묶는 기능을 하는 것이 선지자고 제사장이고 왕이라는 말입니다. 의사나 판사나 직업이 여럿이 있지만 노랑 고무줄 가지고 묶어 버리면 이런 모든 차이와 차등은 없어지고 전부 다 누가 묶었느냐, 하는 것을 물어요. ‘누가 너를 묶었느냐, 누가 너를 위해서 피를 흘렸느냐, 너를 묶는 주님은 누구신가, 너의 메시아는 누구시냐?’ 이렇게 묶어주는 거예요.

교회라 하는 것은 일곱 개의 교회가 있지만 이 일곱 촛대에서 하나의 기둥으로 묶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1장 끝에 보면 일곱 교회를 누가 쥐고 있느냐, 주님의 오른손이 쥐고 있는 거예요. 왜 왼손이 아니고 오른손인가? 왼손과 오른손을 구분할 수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맞은편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오른쪽 왼쪽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 설명이 더 어렵지요? 왼쪽 오른쪽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은 피고가 아니고 판사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가운데 주심판사가 있고 오른쪽 왼쪽에 배석하는 판사가 있잖아요. 그러면 판사가 볼 때 ‘오른쪽은 양이니 천국가거라. 왼쪽은 염소이니 지옥가거라.’ 할 수 있는 입장은 누구에게만 해당된다? 하나님과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입장이지 우리는 같이 앉자고 할 입장이 못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오른손으로 구원한다는 것은 ‘너는 구원받아야 될 대상이지 네가 내 구원에 가담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구원한다는 말은 ‘너희는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는 존재야.’라는 뜻이에요. ‘네 쪽에 그냥 머물러 있어라. 네 쪽에서 이쪽으로 기어 올라오지 말고.’

그런데 보통 종교에서는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있어서 자기가 하나님을 골라요. ‘괜찮은 하나님이 어디 있지.’ 이런 식으로 자기가 오른편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른쪽이란 구원을 해주는 자리가 오른쪽이에요. 그러면 왼쪽에서 하면 지옥 가느냐, 하는데 오른쪽에서 구원해준다는 말은 왼쪽 오른쪽, 천국 지옥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결정을 해 놓았다는 그 증거로서 ‘오른쪽에서 우리를 구원했습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 6절에 나오지요. “여호와의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이것은 그냥 구원했다, 정도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깊이 나가서 ‘주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구원했기에 구원되었습니다. 알아서 구원해 주셨기에 구원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오른쪽입니다.

우리가 ‘주님, 구원해주소서. 주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우리 쪽에서 다가서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림으로 다시 그려보면 인간이 있고 하나님이 계신데 여기에 인간이 오른쪽에 있고 왼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아예 여기에서 빠져야 되지요. 빠지게 되면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그 순간 우리는 왼쪽과 오른쪽이 구분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구원 안 된 경우 같으면 우리가 주님에게 자꾸 거래를 시도해요. ‘얼마 바치면 구원해 주시렵니까?’ 이런 식으로 거래가 되고 ‘하나님도 내가 선택해서 믿는다.’ 이렇게 되지만 만약에 진짜 성령이 와서 구원을 받게 되면 우리는 이 윗자리에 있지 않고 이 밑에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피고석에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주님의 오른쪽, 이 왼쪽 오른쪽이 구분되는 쪽에서 ‘이 왼쪽 편에 속한 사람이라고 우리를 일방적으로 구원하셨군요.’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거예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태복음 25:31-33)

이것을 가지고 수동적이라고 하지요. 구원은 수동적으로 그냥 받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심판받을 대상이기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96편 13절,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항상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는 입장이지 우리가 판단할 입장이 아닙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뭐가 있으리라?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하는 것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항상 그것이 걸림이 되는 거예요. 뭐가 기분 나쁘냐 하면 사람은 누군가에게 판단 받는 것이 그렇게 기분 나쁜 거예요.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왜 나를 판단하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알아서 착해서 하나님을 믿어주면 하나님이 고맙다고 해야지. 다른 사람은 믿지도 않는데 내 양심과 인간성이 얼마나 고운지, 우리 집안사람들이 다 보살이고 절에 나가는데 내가 교회를 나가주니 하나님은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지.’라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본성을 우리는 숨길 수 없고 평생 가지고 갈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게 되면 ‘아, 우리가 그럴 처지가 아닌 것을, 일방적으로 구원당하는 처지인 것을, 왜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자꾸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그렇게 하루에도 수백 번씩 그렇게 하느냐.’ 합니다. 성경에 알면서 자주 잊는 구절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이 말씀을 들으면 죽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되는데 이상하게 뒤의 말은 안 들리고 앞의 말은 들려요. ‘부하게도 하시고’ 그 다음에는 뭡니까? ‘가난하게도 하시고’라는 말을 했으면 가난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복인 줄 알아야 되는데 꼭 가난에서 복으로 넘어서야 복 받은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우리가 주님의 피고석에 앉아 있는데 우리가 재판 석에 앉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막 시키는 거예요. ‘하나님, 이 사람 살려주고요, 나는 부자로 만들어주고요.’ 본인이 판사가 되고 좌우 배석판사가 되어서 혼자 설치는 거예요. 그러면 오른손이 안 보이는 겁니다. 오른편에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왼편과 오른편으로 갈라내는 가운데 오른편으로 선택했던 그 선택이 안 보이는 거예요.

우리는 재판자리의 그 맞은편에 있어야 하고 판단 받을 자리에 있어야 되지 우리가 건방지게 기어 올라가면 안 되는 겁니다. 계시록 1장 17절을 봅시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여기 오른손이 또 나오지요? 사도요한이 어떻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죽은 자같이 되었지요.

죽은 자같이 되었는데 무슨 손을 올린다? 오른손을 얹었지요. 그 오른손에 뭐가 있습니까?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그러니까 이미 성전에 피 뿌리는 것이 완성되었다는 말입니까, 완성이 안 되었다는 말입니까? 이미 완성 된 거예요.

우리는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냥 사건의 세트로 들어간 거예요. 어떤 세트? 주님을 찔러 죽이는 세트로 들어간 거예요. 우리 역할은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찔러죽이고 주님을 피해서 도망치는 그 역할을 했는데 영화는 이미 완성되었어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 이미 받았고 영화는 다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아직 상영이 안 된 필름이 남아 있는데 그게 주께서 구름타고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라고 했잖아요.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는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은 분이 에베소교회만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니면 버가모교회에도 그렇게 했겠습니까? 마찬가지인데 에베소교회는 일곱별을 붙잡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12절에 보면 “버가모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하지요.

그러니까 일곱 교회 앞에다 편지할 때마다 하나씩 비추는 예수님의 자기 모습을 다 모으고 모아서 하나로 묶어보면 아까 요한계시록의 성전 안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맞지요. 이 말은 뭡니까? 이미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를 일곱 교회보고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완성되었기에 찾아갔잖아.’ 그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너를 들볶기 위해서 ‘똑바로 하란 말이야.’ 하고 뭘 지시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너는 허접스러워. 하지만 나는 완성했어.’라는 완성의 입장에서 일곱 교회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네가 말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 교회가 어떤 교회냐 하면 지리적으로 공간적으로 촛대가 옮겨져야 되겠지요.

왜? 이 세상은 항상 ‘이것은 내 교회입니다.’ 할 때 항상 모든 시간적 공간적 한계가 어디에 의미가 쏟아진다? 내가 속해 있는 나 쪽으로 자꾸 의미가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내가 돈을 투자해서 내가 세운 교회입니다.’ 하면 촛대를 옮겨버리는 거예요. 옮기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따라가면 되지요. 따라가면 되잖아요. 얼마나 쉽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장로님들이 반대해서 다른 교회 갔어요. 가니까 그 교회 교인들이 섭섭해서 ‘아니 장로가 나가라고 했다고 해서 나갑니까? 계속 복음 전해주세요.’ 합니다. 그러면 목사 입장에서는 ‘당신이 따라 오면 되지요.’ 그게 뭐가 그리 어렵습니까? 사실은 그 분이 따라갈 수 없지요. 왜냐하면 그 교회에 투자한 것이 너무 많아서. 수십 년간 투자한 것을 복리로 계산하면 엄청나거든요.

투자한 것이 많아서 못 떠나는 거예요. 떠날 수가 없어요. 이 이야기를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져 버려요. 전부 다 뭔가 해당되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내가 뭘 오해했습니까? 촛대를 옮기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촛대를 옮기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교회라고 여긴 것이 교회가 아니었구나. 일방적으로 내가 돈을 투자했다고 이것을 교회라고 괜히 우겼구나.’ 그런데 그것을 고맙게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야.’ 라고 일깨워주신 은혜를, 항상 사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완성된 성전을 바라봐야 되겠지요.

그러면 이 성전에서 ‘일곱 촛대’ 할 때 이 7위 의미가 무엇인가? 아, 이것 정말 이해되도록 하기가 자신이 없는데 하여튼 해 봅시다. 왜 일곱인가? 이해가 잘 안되거든 그냥 넘어가세요. 쉽게 합시다. 여러분 보고 이 책을 그리라고 하면 이렇게 네모로 그리겠지요. 이것도 그리라고 하면 이렇게 그릴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시간을 그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리겠습니까?

시간을 한 번 그려보세요. 못 그리겠지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 중간에 인간의 형상 쪽으로 하나님께 올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중간에 시간을 집어넣어버렸어요. 시간을 집어넣고 이 시간을 가지고 인간에게 시간성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시간성을 어떻게 깨닫게 하느냐하면 시작과 끝을 줘버려요. 인간이 언제 시간이라 하는 것을 느끼는가하면 끝, 죽음, 종말, 시작과 종말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이 들어오는 겁니다. 오늘 염려는 언제 하라고요? ‘오늘 염려는 오늘 할 것이고 내일염려는 내일 하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의 주어진 날은 이틀이 아니고 하루지요. 그것이 야고보서 4장에 나오지요.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득을 보겠다.’ 하는 내용이 있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하는 기간을 5년쯤 잡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5년이라는 시간을 일방적으로 잡고 있었는데 이렇게 말씀하지요. ‘이 어리석은 자여, 너희들은 안개인줄 모르느냐.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해라. 어느 도시에 가서 이득을 보겠다 하지 말고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죽기도 하리니 이것이 옳다.’는 거예요. 전도서가 그러한데 항상 전도서의 주제는 1장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 하는 거지요. 헛되다는 말을 하기 위해 제일 마지막장에 뭐가 나옵니까? ‘청년들아’ 하면서 마지막 때에 뭐가 있다? ‘심판의 때를 생각해서 심판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이 시간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잡는 것이 다 헛되고 헛된 것이다.’라는 말이지요.

‘그냥 주께서 주신 은혜를 요구르트를 마시든지 빵을 먹든지 그냥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 말입니다. 요구르트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하여튼 ‘먹고 마시고 즐겨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 인생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으로 준 거예요. 무슨 사건이냐 하면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제한된 인생, 세월을 준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주님이 사건으로 준 시간인줄도 모르고 임의로 자기를 늘어뜨리는 자기만의 시간으로 그것을 일방적으로 인수인계 해버렸어요. 인수인계하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어긋나니까 잘라버린 겁니다. 무엇으로? 안식일을 가지고 잘라버리는 겁니다. 시간을 줬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시작과 끝을 줬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작과 끝을 우리는 요청한 적 없습니다. 여러분, 강물이 흐르면 흘렀던 물은 시간 지나면 다시 어떻게 됩니까? 밑으로 내려가지요. 그러면 강바닥은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강물이 흘러도 강바닥은 그대로 있지요. 이게 뭐냐? 우리 인생은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주님이 만드신 이 시작과 끝은 강바닥과 같아서 태정태세문단세……, 아무리 흘러가도 이 강바닥은 영원히 변치 않는 겁니다.

이 강바닥을 가지고 ‘영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위를 흘러가고 또 흘러가는 겁니다. 영원한 것은 이미 바닥을 장식하고 있어요. 제가 영원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을 영생이라고 하고 우리가 잘 아는 말로 이것을 가지고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이 시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이에요.

‘나는 시작이요 끝이다’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그림을 이렇게 그렸잖아요. 우리 가운데 시간이 있고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 주변에 뭐가 돌고 있다? 알파요 오메가 되시는 영원한 강바닥 같은 시간이 흐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여기 이 시간에 예수님의 이 시간에 포함이 돼야 돼요. 포함이 되어서 주님의 영원한 시간에 의해서 가담이 되어야 돼요.

7이라는 것, 8, 9가 없이 7이라는 그 자체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시작과 끝을 맺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시면 이 모든 것은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안식일로 다가왔지요. 안식일로 다가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보기 심히 좋았더라.’ 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요.

창세기 2장 3절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해서 안식일을 만들었지요. 안식일을 만들었다는 말은 창조가 완성되는 차원이 이미 만들어진 거예요. 그 안식일에 대해서 우리가 인간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해석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돼요. 우리는 항상 시간공간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안속지롱! 안식일 끝나면 또 일요일 되는걸!’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는 1, 2, 3, 4, 5, 6, 7 할 때 그 다음에 또 바로 1, 2, 3, 4, 5, 6, 7 이렇게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1, 2, 3, 4, 5, 6, 7 할 때, 그 다음의 7은 1이 되면서 1, 2, 3, 4, 5, 6, 7 이렇게(나란히 수평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7에서 새로운 1이 튀어나오고 2, 3, 4로 이어져서 전체로 볼 때 하나의 계단처럼 진행되는 그림)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할 때 항상 그 끝부분이 겹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본래 감추어진 비밀이에요. 시간을 통해서 올라가는 겁니다. 7이레, 62이레, 그 다음에 겹쳐서 1이레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면 1이레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로까지 전체를 다 커버하는 거예요. 사실은 7이레도 커버하지만. 시간을 이레라고 부르는 것은, 이 이레는 7년이 아닙니다.

7이레를 인간적인 시간으로 이해해서 7로 바꾸면 안돼요. 바꿔버리면 인간적인 시간과 공간속에서 우리가 해석한 것이 돼요. ‘이레’는 예수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7년에 묶여 있는 우리, 이 시간에 묶여 있는 우리를 주님의 시간대로 끌고 올라오는 주님의 손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손길인데 주님은 주님의 시간에 준해서 이끌어가기 때문에 그 주님의 시간을 가지고 ‘이레’라고 하는 겁니다. 7이레, 62이레, 1이레.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하는, 다른 말로 하면, 따라해 보세요, ‘사건’, 주의 사건입니다. ‘이미 다 이루었다, 는 사건가지고 미완성인 너희들을 그 이룸 속에 흡수통합 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것이 겹치게 되어 있어요. 1, 2, 3, 4 …… 7 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뭐가 나옵니까? 7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일곱 번째 인 속에 첫 번째 나팔이 튀어나온다니까요.

일곱 나팔 속에서 일곱 대접이 또 나와요. 그러고 난 뒤에 제일 마지막에 보면 모든 것을 끝장내지요. 이것은 층층으로 봐야 돼요. 1층, 2층, 3층 이렇게 층층으로 봐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이것을 가지고 인간들의 시간으로 봐요. 인간들의 시간은 과거 - 현재 - 미래,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옆으로 길게 이어간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이 1부터 시작해서 계속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사건은 그 사건 안에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사건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그 사건하나에 요한계시록 1장부터 22장까지 전체가 다 담겨서 사건이 퍽, 하고 터집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요. 계시록 2장 1절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일곱 촛대, 일곱별이 지리적으로 에베소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교회에도 해당되는 이야기고 시간적으로 에베소 교회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거예요.

왜? 잘 들어보세요. 일곱별을 쥐었다는 그 자체를 우리들이 깨닫게 하는 그것도 일곱 별 쥘 때 예상된 사건입니다. ‘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니 일곱별을 쥔 것이 맞구나.’ 하는 것이 우리에게 사건화 되어야 돼요. 마찬가지입니다. ‘아, 여섯 번째 사건의 인이 우리에게 터지는구나.’ 그런데 그 다음날 ‘이번에는 네 번째 대접에 관한 사건이 또 터졌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소를 키워보셨습니까? 사료통에서 모래시계처럼 사료가 나오잖아요. 계시록 2장 1절에서 이야기한 것이 사실은 에베소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요한계시록 1장부터 22장까지 다 쏟아지는 겁니다. 이 전체가 나올 때는 사건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 사건이 뭐냐, 피 사건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루었습니다.’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미 이루었기에 이런 사건들이 들이닥치는 겁니다. ‘예수님 피가 이루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건들이 너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일곱 교회냐 하면, 일곱 교회라 하는 이것은 인간이 뭘 해도 안 해도 상관없이 이미 완성된 촛대고 이미 완성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 촛대는 주님께서 성전을 거닐다가 ‘아이쿠, 촛대 하나 부러졌네.’ 이런 법은 없거든요.

촛대사이를 거니실 때는 촛대가 안정적으로 보존된다는 뜻이지 뭘 하다가 떨어뜨려서 ‘아이고, 하나 부러졌구나. 이제 여섯 개밖에 안 남았네.’ 이런 것은 없다는 말이지요. 이미 완성된 촛대의 모습으로 쥐고서 이 하나교회에 사건화 되어버리면 이 하나교회는 하나교회를 안 믿지요. 왜 하나교회를 안 믿어야 되느냐하면, 하나교회를 안 믿어야 하나교회를 다니는 나를 안 믿게 되는 겁니다.

나 때문에 교회가 되느니 마느니, 나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었느니 마느니, 이런 식의 나를 절대로 안 믿게 돼요. 그리고 이 교회 사람들이 모인 것은 하나하나가 주께서 보내신 사건이지요. 어떤 사건?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신 개인들의 모임이에요. ‘당신은 어떤 죄를 지어서 왔습니까?’ 이렇게 해야 된다니까요.

그 기능을 머리가 해요. 그래서 이렇게 됩니다. 머리에서 쏟아지는 완성된 것이 지체를 만들어요. 머리라는 것이 그런 기능입니다. 머리에서 쏟아져야 돼요. 이것은 찾아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에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지요. 그 다음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 다음에 뭡니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지요. 충만케 했다는 말은 여기에 흠이나 오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미흡한 것이 남아 있어요? 안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일곱이지요. 일곱! 일곱이라 함은 처음에 완성했을 때 ‘다 이루었느니라. 안식하셨다.’ 그 때 인간과 그 모든 것이 형상화되었지만 시간은 형상화가 안돼요. 인간이 시간을 형상화 못함으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의 창조 속에 갇힌 꼴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시간을 못 뚫고 나가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과 끝을 일곱으로 정해놓아 버렸어요.

그 완성된 것이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는 미흡함이 없습니다. 내가 좀 죄 더 지었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이 취소되거나 훼방되거나 모자란다든지 그런 것이 없어요. 처음에 교회 다닐 때 십일조를 해야 된다는 그것을 가지고 항상 십일조를 잘 내야 되겠다, 하면서 은혜 받을 생각은 안 들고 내가 십일조를 한다는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십일조를 내가 할 때 목사님이 나보고 얼마나 신앙 좋다고 할지, 그것만 신경 쓰면서 가다 보니까 길에 야바위꾼이 보이는 거예요. 해답이 다 보이면서 금방 머리가 굴러가지요. ‘십일조를 가지고 곱빼기로 돈을 따면 본전가지고 십일조 내고 나머지는 다 챙길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날 십일조 다 날렸어요.

십일조 못 내면 구원에 미흡합니까? 그때는 미흡하다고 여겼어요. 충만을 몰랐어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는 이 사실을, 에베소서 1장 22절, 23절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항상 신경 쓰는 것이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완벽하게 해야지.’ 자기 행함에 신경 쓰다 보니까 이 충만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내가 지금 십일조 날린 그것도 뭐다? 충만에서 나온 하나의 사건인거예요. ‘봐라, 네가 행한 것이 대단한 것이 뭐가 있다고?’ 그것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에요. 실수투성이, 못난이, 항상 자기 자식밖에 모르고 돈 버는 것밖에 모르는, 그런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 자체가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나오는 사건이기에 그것을 깨닫는 거예요.

만약에 마귀로부터 깨닫게 되면 ‘그래, 앞으로는 더 잘해야지.’ 그렇게 나옵니다.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미흡함을 남게 만들어요. 마귀는 우리를 벌벌 떨게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요.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고 하는데 두렵게 만들어서 ‘이제는 나만 믿어야지. 이제 예수도 안 믿을 거야. 이제는 신앙 좋은 나만 믿을 거야.’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마귀는 그렇게 합니다.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진짜 주께서 성령으로 준 사건이 되면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바보같이 또 내 행동을 바라보면서 미흡 했니, 모자랐느니……’ 원래부터 모자라는 인간인데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그럽니까? 큰 죄를 지었다고요? 안 그러면 큰 죄 없었습니까?

투표철만 되어 보세요. 큰 죄를 얼마나 짓는다고요. ‘이 사람 찍을까, 저 사람 찍을까? 이리 찍어도 큰 죄, 저렇게 찍어도 큰 죄, 안 해도 큰 죄.’ 월드컵 하는데 한국 팀을 응원해 보세요. 오늘 저녁에 스페인하고 하는데 해 보세요. 하나의 사건으로 매치시키는 것을 모르고 우리가 ‘한국 이겨라! 한국 이겨라!’ 하다가 만약에 져보세요.

지면 졌다고 기도가 부족했다고 탄식하고 이기면 기도 발 섰다고 좋아하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못 믿게 만들고 계속해서 자기 행함을 지향하도록 하고 자기위주로 보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마귀의 사건이지요. 그게 바로 에베소교회에 말하는 처음사랑을 잊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오늘이고 내일이고 이 요한계시록을 떠나지 마세요. 늘 보세요. 보시면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첫째, 아무것도 하지마라. 두 번째, 그래도 우리는 반드시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중심? 다 나 좋으라고 뭔가 하게 되어 있다. 세 번째, 그때마다 사건이 터져서 다시 한 번 이미 다 이루심을 바라보게 하신다.

그 사건이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늘 여러분에게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왠지 우리에게는 헛소리로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기 힘든데, 이렇게 궁핍한데, 주님이 우리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느냐고 짜증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그 죄 때문에 우리 주변에 피가 깔려 있다는 사실, 그 피로 말미암아,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서 천국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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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7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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