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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산100402요일3장2절b자유게시판요한일서

안산100402요일3장2절b

이름 : 박온정(IP:110.8.252.127)

안산100402요일3장2절b / 이근호 목사님

요한일서 3장4절에(3장3절은 이까 얘기했지만) 주께서 소망을 일방적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에 주께서 정해놓은 약속을 바라보는 것, 4절에서는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데, 4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말씀이 좀 이상하죠? 여기,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법을 어길 때 죄가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아는 사실은 그렇지요? 법이 먼저 있고 법을 우리가 위반했을 때 죄가 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구조에 의해서는 발길로 차버리는 게 있습니다. 말씀구조에 의하면 다 구원받을 수 없어요. 반드시 죄를 지어야 되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게 있는데 뭐냐면, 불법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성경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고, ‘불법 나오거든 아닌 걸로 아세요,’ 하고 통보하는 겁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빡쎄지만 여자들 안 갑니다, 남자들만 가지요. 여자한테 입영통지서 안 나오지요?

이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너 남자야 여자야’ 입영통지서를 통해 그냥 통보하는 거예요.

‘군대 와!’ 이 말은 ‘너 남자야’라는 말이고 아무리 기다려도 통지서가 안 오면 당신은 여자라는 뜻이에요. 불법이라는 것을 끄집어 낼 필요가 있는 거예요. 불법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그 다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뭐냐’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드시 악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말씀은 자진해서 부지런히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불법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불법이 있기에 세상이 불안전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불법이 횡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만한 분이 아니다, 라는 것도 잘못이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구조에 의해서는 불법은 나타나야 되고, 죄짓는 사람이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그거는 반드시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 게 나와 주어야 우리의 정체가 밝혀지니까. ‘아, 우리는 저쪽편이 아니구나,’라는 것이 자동적으로 밝혀지니까 그런 겁니다. 지키는 문제가 아니고, 필히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 항상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는가, 요한일서의 구조는 빛에서부터 사랑입니다. 빛에서부터 사랑이라고 하는데, 빛에 있어서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면, 외부적인 빛이 있고 내부적인 빛이 있습니다. 제가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봤냐 하면, 미술 역사에 대한 화보가 있는 두꺼운 책을 봤어요. 봤는데, 두 가지 작품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둘 다 예수님에 대한 그림이었는데 예수님그림이 있는데 하얗게 빛이 비치고, 그 옆에는 까맣게 처리한 그림이었어요. 또 한 그림이 있는데 포맷이 비슷합니다. 내부적으로 빛이 올라오고 다른 데는 어두운, 하나는 조명 빛이고 하나는 내부적으로 발생되는 빛이 비치는 걸 봤어요. 눈에 확 뜨였습니다. 요한일서를 보는 것 같았어요.(목사님 너무 문학적이시네요-녹취자)

요한일서 1장2절에 뭐라고 하셨냐 하면, 빛의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빛이라고 하면 왜 어려우냐면, 빛은 사물이 아니고 뚜렷한 대상이 없습니다. 그냥 분위기고 환경을 조성하는 거죠. 그는 빛의 구조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죄 없다할 사람이 없고 다 죄가 드러난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빛이 비치는 것은 여러분들이 사랑받는 사람인지 안 받는 사람인지 가려내기 위해서, 빛이 와서 가려낸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내부적인 빛과 외부적인 빛이라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것은 빛 되신 주님께서 오면 성도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항상 무엇을 의식할 수 있느냐 하면, ‘누가 나의 정체를 이렇게 밝혀줍니까?’ 라는 것을 늘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항들이 자꾸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는, 불법을 행하는 자는 세상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를 않습니다. 빛있는 사람과 빛없는 사람, 사랑받는 사람과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이 나누어진다는 이 자체에 대해서 완강하게 그것을 거부해요.

왜 그러냐면, 빛을 안 받아서 그래요 빛을. 제가 본 그 그림을 보면 사도바울이 거리에서 빛을 받아 떨어지는 장면도 나와요. (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작가인데) 사도바울이 빛을 받았을 때 강렬한 빛 때문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이 멀었죠. 외부적인 빛이 왔잖아요. 그것부터 갑자기 뭐가 생깁니까? 외부적인 빛이 내부적인 빛으로 장착되어 자기 내부가 밝혀지는 거예요. 내부에서 빛이 올라오는 거예요.

어쨌든, 외부든 내부든 간에 그 빛은 자신과 이질적인 것이고, 항상 자기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이 빛의 기능에 대해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약에 보면 (구약의 진행은 항상 시내산입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시간 위주가 아니라, 시간은 시내산의 공간에 종속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출애굽은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이 뭐냐 하면, 위에 있는 거룩이 아래로 내려온 겁니다. 위에 있는 거룩이 아래로 내려오게 되면 속된 것과 동행하는 거룩이 되요. 속된 것과 동행한다고 해서 거룩이 속俗과 섞이는 건 아닙니다.

뚜렷하게 구분되면서도 속된 것을 지배하는 거지요. 수직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지배하는 겁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수직적 세속의 공간에 역사적 공간이 종속됩니다. (이런 말이 참 어려워요)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신의 인생의 역사가 긴데 왜 깁니까, 하고 물으면 나는 거룩을 위해 살아 왔습니다, 이렇게 거룩이라는 공간을 담기 위하여 종속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종속이 되다 보면, 구약에서 있는 이 거룩이 여기에 들어오기 위해서, 첨에는 공간적으로 들어왔다가 나중에 모세 가문을 통해서(레위지파) 하나님이 만든 지시한 상자를 누가 포위하냐면, 레위지파가 둘러싸서 포위하고 그 곁의 열두 지파가 세 그룹으로 나누어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래서 지파가 몇 갭니까. (12곱하기1)열 세지파가 되는 거예요.

13지파인데 오병이어처럼 12더하기1이 아니고 열둘을 지배하는 하나. 그런데 레위지파는 땅이 없어요. 지상에 땅이 없어요. 땅 없는 자가 땅을 가진 자에게 땅을 땅답게, 축복의 땅답게 만들어내는 요소가 들어있는 겁니다. 이 구조가 구약의 구조며 모세 언약입니다.

주변부분이 핵심부분에 의해서 어떻게 혜택을 입고 있느냐, 그걸 보여주는,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구약이라면 신약이 그대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겁니다.

십자가마을에 들어가 보니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는데요, 사도행전에서 성만찬 떡을 뗀다는 것이, 떡을 뗀다는 장소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같은 장소입니까 다른 장소입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질문자체가 이상해요. 질문이 무엇인지... 그래서 답변하기를 ‘모두 같은 장소입니다’ 했어요. 여기서 성만찬 하나, 대구에서 하나 다 같은 장소입니다, 하는 거예요. 왜냐면 장소가 두 가지가 있는데 지리적 장소가 있고 영적 장소가 있어요.

영적 장소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동석할 때만 주님의 나라가 되는 거예요. 여기는 사람들끼리 모인 장소예요. 여기서 성만찬 해봐야 문화입니다 소용없어요. 모였다고 주님이 참석하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들끼리 기분 내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최면 거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의 살이요 이것은 피요. 백날 해 보세요 주님께서 명동성당 가는가... 주님이 거기 왜 갑니까. 주님이 호출할 때, 바로 그 내부적인 빛에 의해서 호출 받는 거예요.

‘너 죄인 맞잖아’ ‘맞습니다’ 주님이 호출할 때 그 순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거예요.

교인 백명 있다고 모두 호출된 게 아닙니다. 그 중에 5명만 호출당하는 사람 있으면 그 다섯명 가운데서 주께서 함께 계시고, 열 명이면 10명과 함께 계시니 백 명 다 함께 계시는 게 아닙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 가운데 누가 호출했으며 누가 동행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 나타날 때가 됐는데...’ 이랬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알아서 동행한 거예요. 그게 구약적 방법입니다.

거룩이 같이 동행해주면 그냥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뭐가 일어난다? 외적 빛과 내부적 빛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변화가 일어나면 그 빛의 주도권이 바뀌면서 자신은 속되다는 것을 느끼죠. 거룩한 것은 따로 있고 자신은 속된 것을 아는 것... 그런 식으로 동행하게 되면 어디서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구약에서는, 광야에서의 동행이라는 것이, 출애굽해서 약속의 땅으로 동행해 들어가게 되거든요.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 지리적 표현으로는 맞지요? 광야에서 들어갔으니까 여기가 안식의 땅이다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여기에 주님께서 늘 계시냐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이 약속의 땅에 안계시면 또 다시 이들은 여기에서 유리해야 되는 겁니다. 방황해야 되요. 그런데 주님의 거룩이 속됨과 동행이 되려면 여기에 반드시 뭐가 필요하게 되냐면, 하나님의 언약이 필요한데, 그 언약이 요한일서에서 뭐라고 하냐면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빛이 오게 되면 주님의 사랑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빛이 오면 사랑이 되지요? 사랑을 분해하면 우리는 죄인인데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랑으로 오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10절에 보면 이걸 화목제물이라 하고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물이니까 무슨 언약에 속하냐면 모세 언약에 속하지요. 모세 언약의 제사법에 속하지요? 제사법에 화목제물이 들어간다 이 말입니다.

다시 봅시다. 빛이 오게 되면 그냥 오는 게 아니고 반드시 동행하려고 오는데 동행함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죄인이 되고 용서받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랑과 죄인 사이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이 있지요. 화목제물 세울 때는 죄인과 주님의 사랑으로 되는 겁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면 노아 언약에 보면 (모세 언약은 노아 언약에서 나왔습니다)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냄새가 주님의 코에 들어가면 주님께서 그 죄를 일체 묻지 않겠다,하는 겁니다.

자, 질문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어째서 정결한 짐승을 태워 죽인 냄새(흠향)가 하나님의 코에 들어가면 왜 죄에 대해서 일체 묻지 않습니까? 무슨 근거에 의해서 그렇습니까?

제 질문 자체가 잘못 됐어요. 무슨 근거냐 하면 바로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란 거예요. 이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제사법이 정결한 짐승 중심으로, 정결한 짐승에서 냄새를 생산해내는, 냄새를 만들어내는 장치가 모세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노아 언약에서 두 가지가 있는데, 노아 언약은 더러운 짐승과 정결한 짐승으로 묘사된 게 뭐냐면 심판이었습니다. 심판을 어떻게 통과됐는가, 심판에서 어떻게 구조되었는가? (구원이라는 말 대신 구조) 심판에서 어떻게, 물에서 어떻게 건져냈는가 하는 것은, 더러운 짐승을 어떤 식으로 구원되었는가 이 말이에요. 정결한 짐승이 개입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라 했지요? 더러운 짐승과 이 정결한 짐승 원칙을 제도적으로 계속해서 정착시키고 포착시키기 위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 모세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장치가 히브리서에 보면 이걸 그림자, 모형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시내산 위에서 이 모형이 내려올 때 거룩이 내려온다는 말은, 더러운 짐승이 있었다고 했는데 모세 언약에서는 산 밑에 있는 것이 몽땅 다 더러운 것이 돼요. 몽땅 다! 더럽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돌판이 깨집니다. 돌판은 누가 깹니까. 모세가 깨지요. ‘너희들은 언약 받을 자격도 없어!’ 하고 깨버린 거예요. ‘너희들은 언약을 혜택 입을 인간도 안돼!’ 하고 깨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보고 언약했다는 것을 로버트슨이나 모든 구약시대를 다 이야기해요.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었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맺은 적 없습니다.

인간은 언약을 깨는 쪽으로서의 참여죠. 언약을 맺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고, 있는 언약도 깨는, 깨질 수밖에 없는 족속들이 인간이라는 거지요. 깨진 언약을 다시 원상복귀, 다시 회복하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세 언약의 완성 자가 따로 와야 돼요. 주께서 제사법 이야기 해놓고 그 다음에, 그걸 위해서 내 몸을 따로 준비했으니 그 분이 다윗 언약을 통해서 오신 분이다. 여기서부터 제사법이 뭘로 바뀌어야 되나면, 인격적 모습으로 바뀌어야 돼요. 왜냐면 우리는 제사법 해봐야 우리는 제사법도 깨질 판이니까. (아...이거 어렵다, 설명해야 된다)

제사법이 문장 아닙니까. 문장이 어떻게 사람 몸으로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건 제물에게서 나왔던 피와 기름을 어디에 발라요? 사람에게 발라서 제물화 시키거든요. 그건 왜그러냐 하면 율법에 대해서, 인간은 ‘율법에 대해서 아다,’ 이렇게 나와요. 두 번째 알면 뭐하냐 실천에 옮겨야지요. 실천에 옮기면 세 번째는 뭐냐면 자기들은 참 하나님과 언약이 맺어졌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안다’가 하나님께는 뭘로 바뀌어야 됩니까. 알기는 개뿔 알아? 너는 몰라!! 몰라가 되어버리면 안다는 것에서 실천에 옮겼다는 그 성경말씀이 뭐가 되죠?

이것도 죄가 되겠죠. 모른 상태에서 실컷 했다고 하니까. 세 번째, 이것은 뭡니까. 악마가 되겠지요. 참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가 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간들이 있어주어야 언약이 깨지게 되는 거예요.

깨진 언약을 복사해서 언약궤 안에 들어간 겁니다. 그때 받은 그 언약궤가 들어간 것이 아니고 사람 손에 깨진 그 언약을, 깨졌다는 것을 계속 굳혀버리는... “깼잖아! 깼잖아! 너희들할 말 없어!” 깼다는 것을, 깨진 사건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그 돌판을 언약궤에 담습니다. 그러면 언약 안에서 영원히 언약을 깬 사람이 되는 거겠지요. 얼마나 이걸 “즐겨 비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즐겁게 비참해지면 좋아요. 문제는 비참해지지 않으려니까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아까 오신 분도 즐겁게 비참해지면 좋은데...

사람이 ‘나는 무엇이냐’ 돼버리면... 비참해지면 자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즐겁게 비참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비참한 존재가 되는데, 우리는 싱글벙글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요한복음8장에서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 잡아왔잖아요. 주님께서 글씨를 쭈욱 씁니다. ‘어이,김 씨! 15년 전에 너 도박했잖아!’ 쭈욱 씁니다. 이거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나는 죄인일 수 없어!’ 라고 버티고 있는 그 숨어있던 죄를 주님은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쭈욱~ 글씨를 씁니다. ‘어이, 박 씨, 최 씨!’ 이양반이 뭔가를 쭈욱 쓰는 거 보니까 자신의 일기장을 쓰는 겁니다.

손에 돌을 놓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전율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죄 없는 사람 돌로 치기! 죄 없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문제는 그들이 도망갔다는 게 문제예요.

‘여기 죄 없는 사람 돌로 치기’ 하면 도망가지 말고 우리는 땅에서 ‘죄인 여기 있습니다’ 이래야 되요. 왜냐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 부르러 왔는데 (제가 아까 첫 시간에 뭐라 하던가요?) 나는 죄인이다,라는 걸 가지고 뭘로 대체한다? 나는 죄를 안다는 것으로 의를 삼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우리는, ‘주여 죄인 여기 있습니다. 딴데 가지 마세요, 제가 죄인입니다’ 하고 나와 줄 때 ‘나도 너를 정죄치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 구상이 목적이기 떄문에, 언약 구상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깨진 언약이 필요하고 “어느 놈이 깼냐,” 하면 “제가 깼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깨진 인간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는 언약을 지키려 하니까 이게 마귀라, 이게 바리새인인 거예요. 이런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 그렇게 즐거워요. 어떤 성경을 봐도 ‘즐겨 비참’해 질 수 있는만큼 이 땅의 승리자는 없습니다. 마귀요? 다 재미없어서 가버립니다. 자기가 비참해지겠다는데 어떡해요. 비참해지겠다는데...복을 안 받겠다는데 할 말 다 했지요. 비참해지겠다는데 뭘로 시비 겁니까. 복 주세요 복 주세요 하니까 마귀가 들끓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도, 사실 이보다 더 비참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봐줘서 이만큼 된 거예요. 덤으로 이만큼 사는 겁니다. 이보다 더 내려가도 우리는 할 말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린 자인데...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린 자를 언약 구성체로서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언약을 깨트린 자를 언약의 구성원으로 집어넣었을 때 바로 동행이라는 것입니다. 동행...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냥 동행한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부활한 분으로 동행하잖아요.

동행할 때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 했겠습니까. ‘나 옛날 그 예수다’ 이런 이야기한 게 아니고 ‘나는 널 위해서 죽었다가 이렇게 너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 그러면 두 제자들은 ‘즐겨 비참’해도 성화 없는 사람 되는 겁니다. 그게 진정한 동행입니다.

더 이상 우리 자신, 이미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려버린 입장이거든요. 이것은 창세기3장에 나오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이미 차단시켜 놨다는 그 일관성이 그대로 살아 있잖아요. ‘아, 안 되는구나 이미 끝장났구나,’ 그런데 주께서 언약을 계속 집어넣은 것은 창세가 3장21절의 말씀을, 그 취지를 역사로 쫘악 펼쳐버린 겁니다. 수직의 역사를 수평적으로 펼쳐버리면 왜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거룩이라는 것은 구원이 원래 목적이 아니고 주님께서 말씀구조가 너희들은 이미 저주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 중에서 구원 된다면 그건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줄 자에게 긍휼 주시는 거예요.

그걸 지난 수요일에 두 가지라고 했지요? 하나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고 하나는 소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거룩이 오게 되면 제물은 심판에서 축복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개입합니다. 거룩이 개입하게 될 때 우리는 뭐가 되냐면, 우리는 심판 받아 마땅한 자로 여겨서 마중을 나가는 것이 아니고 만나게 되어 있죠. ‘우리는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이 와중에서 거룩이 주어지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심판 받을 자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축복받을 사람으로 달라지느냐 경로가 과정에 담겨지게 되겠지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이 뭘 증거 하겠습니까. ‘나 구원받았다’가 증거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는 구원됐습니다,’를 증거 하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가 항상 붙어있어야 돼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했어요‘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은 지상에서 제물이 되는데 제물을 담당하는 사람을 제사장이라 하죠. 저의 저서 <교회를 넘어서>라는 책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을 몇 가지로 나눴죠. 심판과 긍휼은 제사장에 보여주는 심판과 긍휼, 그다음에 장소와 시간이 보여주는 심판과 긍휼입니다.

안식일에 뭐가 없습니까? 광야에서 안식일에 뭐가 없지요? 만나가 없지요. 그러면 다른 날의 차이가 뭐가 있습니까. 만나가 있지요. 만나가 있어야 사람들이 먹고 사니까. 다른 날에는 만나라도 있으니까 먹고 산다, 역시 먹을 것이 있어야 살아, 라는 날이라면 이날은 먹을 게 없는데도 살았네, 이렇게 되죠. 그러면 안식일의 의미는 뭐냐면 하나님께서 그전에 준 것은 양식으로서의 만나가 아니라 말씀으로서의 만나라는 겁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만나라는 양식을 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만나라는 양식이 안식일로 주는 떡이 아니기 때문에 만나가 양식측에 속하는 게 아니고 말씀측에 속하는 겁니다. (좀 어렵죠?)

‘먹고 살아야 교회도 나오지, 이러잖아요. 먹고 살 것 같으면 교회 나올 필요 없어요. 하지만 교회 나와서도 봉투에 5만원씩 넣어 일당 주게 되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무엇을 유지하게 되느냐 하면 역시 하나님도 배가 불러야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나온 그것 때문에 짤려버리면 역시 월급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피로 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다는 아니겠지만......다는 아니죠. 삐져가지고 교회에 안 나옵니다. (많아요, 우리교회에 그런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복음 아는 교회에 나오면 주께서 취직시켜줄 줄 알았는데 영 소식이 없거든요.

제가 어제저녁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요, 서울의 ‘길신교회’라고 굽은나무역이 있다는데요.(이런 역 이름 첨 들어봤어요) 4번 출구에 있는 교회인데 거기 부교역자로 있는 박승대 목사님 얘길 들어봤어요.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데, 복음만을 전할 때 -총신 비대위에서 데모한 사람인데- 사모님과 함께 만났는데요, 박목사님은 뭘 경험했느냐 하면 바로 힘의 무서움을 경험했답니다. -젊을 때...신학교 때... 데모해서 짤려가지고 10년만에 졸업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무엇을 경험했냐 하면, 힘의 무서움을 경험한 거예요. 힘의 무서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힘이 안 무서운 거예요. 면역주사를 맞은 거예요. (장시간 얘기했는데) 그분이 마지막에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복음을 전하는데 놀랍게도 당회장 목사 빼놓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은혜를 받는다는 거예요. 자기는 설교시간에 이럴 수가 없다는 거죠.

여러분은 제가 복음 전하는데 여러분은 왜 믿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에...복음을 믿다니요, 말이 안 됩니다. 여러분 오해 하신 거 아니에요? 다만 누가 미안하냐면, 당회장 목사만 미안하죠. 몇 번 압력을 하다가 나중에 포기 해버리더랍니다. 힘의 무서움이 다른 게 아니에요. 생존의 무서움이죠. 생존의 무서움을 경험한 것 같으면 다음부터는 생존이 안 무서운 거예요. 면역주사를 맞은 거예요. 그런데 생존의 무서움을 경험해보지 않은 것 같으면 계속 예수를 찾는데 어떤 예수냐 하면, 힘 달라는 예수예요. 계속 힘의 지배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무엇을 경험했냐면 죽음을 경험한 거예요. 사도바울의 눈이 가버리고 그야말로 죽게 된 것은, 초죽음 시킨 것은 내가 약해져야 될 만큼 주님은 센 거예요. 만약에 내가 강해버리면 누가 약해집니까. 주님은 별볼일 없는 사람이에요. 통장에 돈 많으면 뭐하러 교회 갑니까. 골프치기 바쁘고 돈쓰기 바쁜데...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조금 듣다 가버립니다. 여전히 힘의 구조가 힘의 무서움에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난 힘이 필요해요, 목사님 복음이 필요하지 않고 날 살려줄 힘이 필요해요’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반드시 화목제물을 경과해야 됩니다. 우리가 바로 힘을 좋아하는, 힘에 안절부절 못하는 이런 인간을 화목제물로 경과시켜버리면 우리는 힘의 무서움을 느끼는 거예요.

세상이라는 것은 추상이 아니고 세상은 그야말로 실제로 악마의 힘으로 작용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혹독하게 경험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힘에 의해서 비참하게 되어야 해요. 비참하게... ‘역시 힘은 세구나’ 복음, 복음 해도 복음이 힘한테는 촉도 못쓰는구나. 악마가 역시 예수 믿는다는 교회보다 역시 더 세고 믿음보다 더 세다는 것을 혹독하게 느껴져야 됩니다. 그걸 통과할 때 우리는 화목제물과 더불어서 화묵제물이 갔던 그 길을 같이 통과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다 떨어져나가요. 예수 믿고 천당 가려고 그렇게 애를 쓰다가 결국은 ‘당신은 나에게 힘이 되지 못했어요’ 라는 여운을 남기고 떠나버리죠.

소설가들이 기독교에 대한 글을 많이 쓰잖아요. 글을 쓸 때 100퍼센트가 뭐냐면 힘주는 기독교에요.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무소유가 자신에게 힘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불교계에 법정스님보다 더 무소유를 외치고 더 허접속에 살아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알아주지 않은 사람이 수백 명 됩니다. 그런데 왜 법정스님은 알아주느냐, 책이 히트쳤거든요. 그 책이 힘이 됐다는 거죠.

지금 복음 외치는 사람 있어요. 있습니다. 있어도 저처럼(이근호 목사) 유명하지 않으면 돈이 안 들어와요. 유명해도 돈이 안 들어오지만... 그런데 구원 받은 거 보면 유명한 칼뱅, 루터는 다 떨어지고, 유명하다는 사람 테레사수녀는 다 지옥 가 있고 누구신지 정말 생판 모르는 인간, 그야말로 알려지지 않은, 목회 3년 하다가 때려치운 그런 사람 그러다가 고물상하는 사람, 그런 사람 천당가야죠. 그런 사람 천당 가야되는 거예요.

다른 힘이죠 다른 힘! 나를 의롭게 하는 힘! 나를 의롭게 할 것이냐 생존케 할 것이냐, 그 사람입니다. 나를 생존케 해주는 힘이냐, 날마다 죄짓는 나를, 언약을 깨는 맨날 봐도 성경말씀을 깨는, 깨는 이것을 날마다 화목제물에 머물러있게 하사, 화목제물 안에 있게 하사 나를 살려내는 주님의 피의 의로움. 그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거는 본인만 압니다. 그거는 본인만 알아요.

그래서 그 사모님한테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사모님과 목사님 나이가 열여섯 살 차이가 납니다. 주위에서 땡잡았다고 난리 났습니다. 목사님이 꼬신 게 아니고, 사모님이 좋다고 해서 목사님은 난처해가지고 ‘당신과 결혼하면 욕 얻어먹습니다, 도둑넘이라 합니다’ 틀림없이 목사가 말 몇 마디 해가지고 20대 꼬셨다고 40대가 20대 꼬셨다고 욕합니다, 그러니까 나를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정말 이건 누가 봐도 욕합니다‘ 하면서 밀어내도 ’복사님 복음이 좋습니다,‘ 하면서 따라다닌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직도 복음이 좋습니까’ 하고 그 사모님께 물었어요. ‘우리 목사님 최곱니다’ ‘사모님, 목사님 복음 전할 때, 힘들 때, 목사님 설교 잘한다고 힘주세요, 힘주게 되면 목사님 힘이 나가지고 더 합니다,’ 목사님 가끔 이랬다네요.‘여보, 나는 진리보다, 복음 전하는 게 참 힘든데 이러다 짤리지 않을라나 모르겠다, 당회장과 몇 번 부딪혔는데 이러다 짤릴까 싶다’ 하니까 옆에서 사모가 하는 말이 ‘내가 먹여 살릴게 복음만 전해라’ 아...! 아직까지는 기계 잘 돌아 가요. 아직까지는 죽이 잘 맞아요.

이런 얘기 하면 목사님들 다 좋아합니다. 어디 그런 사모 없나? 나이는 16살 차이나고(교사거든요 그분이)교사해서 돈 벌어다 주고, 자기는 복음만 외치다가 쫓겨나갈 때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복음 전하다 쫓겨났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워요. 폼도 나고...그런 사람 없나?

미쳤나, 복음 전하다 쫓겨나더니 또 쫓겨나가나, 바가지 긁은 여자 말고. ‘내가 먹여 살릴 게 당신은 복음만 전해라’ 그런 사모 여기도 지금 두 사람 있습니다. 세 사람 있다 참, 희망사항...

화목제물에 합세하는 것, 그게 동행입니다. 동행...화목제물의 경과에 합세하는 것입니다.

그게 동행입니다. 동행... ‘화목제물 주세요’ 이게 아니라 ‘즐겨 비참’하게 만드는 거예요. 주님 가신 그 길을 주께서 제대로 끌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께서 끌고 간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끌고 가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어. 자기는 못한다고, 않고 싶어도 안 돼, 주께서 나를 거푸로 끌고 가는데 저항도 안돼요. 반항하고 싶어도 반항도 안 돼요. 주님께 잡힌바 되어서 끌고가는 방식으로만 끌고 갈 때 그것을 ‘내적 외적 빛’이라고 제가 아까 얘기했죠. 그것이 우리 안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했습니다.

5절 봅시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법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3장6절) 이런 말이 어려워서 설명하기 힘든데요, 자꾸 뭔가 원인과 결과를 의도적으로 바꿔버려요. 자꾸만 바꿔버려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를 믿게 하셨지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불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법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께서 밀어내야 된다니까요.

제가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 했지요? 자기는 바빠서 교회 못나오는 것을 우기는 것은 자기가 만든 법이고, 하나님 법에 의하면 ‘너는 오고 싶어도 내가 못 오게 했다’ 이러는 거예요. 이것이 말씀구조입니다. ‘저 사람 복음 전해도 안 나와!’ 그게 아니고 그 사람은 오고 싶어도 주께서 못 오게 막는다니까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 하게> 하신다니까요. 그 말씀을 성취시켜야 돼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못 믿기 때문에 주님을 못 믿는다,가 되지만 이게 영적으로 해석하면 주님께서 보지 못하게 해서 결국은 죄만 짓게 만들어, ’죄만지어서 지옥 가도록 조치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해요. ‘왜 이목사님은 해석을 그렇게 삐딱하게 합니까?’ 제가 답변한다면 화목제물에 동행하려면, 화목제물이라는 것을 들어보지도 못했고,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화목제물이 뭔지를 몰라요.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내가 주님을 사랑한 걸로 알고 있다니까요. 그러나 그건 율법에 대한 오해고, 교회에서 나온 실천이었고, 그것은 결국 우상을 만들어냈잖아요.

그런데 화목제물이 오신 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적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일방적으로 자기가 좋다고 우리는 사랑한 거예요. 사랑해서 보니까 불법적인 것...지옥가는 사람은 나와 똑같애, 자기는 잘났다고 하는데 주께서는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주께서는 저쪽은 밀어내고 이쪽은 받아들이고...누구 맘대로입니까? 오야맘대로지요뭐! 주님 맘대로예요.

여기 7절8절에 봅시다. “......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의를 행하는 자...’ 이렇게 나오니까 육적으로 해석하면, ‘계속해서 의를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새끼다.‘ 이 마라 아닙니까. 육적으로 해석하면...... 그 말에 여러분들이 얼마나 주눅들고 속아 넘어갑니까.

목사 자신도 못하면서... 자신도 안 되는 걸 교인들에게 얼마나 닦달냈습니까. ‘보세요! 성경대로 살아야 됩니다!’‘의를 행하지 않으면 여러분 마귀자식 됩니다’ 의를 행치 않아서 마귀자식이 된 게 아니고, ‘마귀자식이기 때문에 주님을 모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요한일서 이야기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왜 주님을 아느냐.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주님을 안 거예요. 주님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속에서 ‘주님의 의’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 의가 아닙니다! 주님의 의, 주님의 사랑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주님의 의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여기 보니까(미리 봅시다) 4장18절 봅시다.“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나니” 이것은 우리가 실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두려움이라 하는 것은(어느 철학자가 하는 말인데) 우리가 조작하는 게 아니고 환경이 조작해요. 우리가 낮선 동네, 낮선 상황, 낮선 사건은 항상 우리에게 무엇을 유발시키느냐 하면 두려움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그런데 두려움을 쫓아내는 것은 누구의 몫이냐 하면, 이미 완료가 되었을 때는 새로운 사태의 두려움이 오는 게 아니고, 낮선 사태 낮선 사건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에게 뭐가 생깁니까? 두려움이 생기죠. 이 두려움이 소멸되는 것은 이미 우리 자체가 완료된 상황, 사랑으로 완료된 상황에는 두려움이 없어지고 우리가 만약에 미완료라면 계속해서 우리는 두려움이 우리를 압박하게 되지요. 결국 그 사람 속에 뭐가 없다? 완료된 분이 동행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잖아요.

이 말은 화목제물, 사랑의 완성채 되는 ‘이미 너를 사랑했다, 끝!’ 완성채 안에 언약 깨트린 자로 포함이 안 돼 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포함이 안 되니까 언약을 지키려고 애를 쓸 것이고 애쓰면 애쓸수록 마귀가 뭘 합니까. 계속 두려움을 유발하니까, 결국은 실컷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심판받고... 주께서 동행을 안해주니 화목제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려고 애는 쓰는데, 주께서 ‘너 들어오면 안돼’ 막아버리니까 화목제물까지 못 들어가니 성경을 지키려고 애쓰는 거예요.

지키려고 애쓰다보니까 결국은 가룟유다처럼 자기 갈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요한일서 3장9절에서는 ‘그 사람들은 마귀에 속한 자다’라고 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다... 사실은 이것도 해석해야 됩니다.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왜 육적인 해석으로 바뀌어야 되냐면 요한일서 자체가 그걸 요구해요. 요한일서5장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는 것이 마지막 결론 대목이니까, 결론을 미리 댕겨서 2장에 박아넣고 3장에 박아넣고 4장에 박아 넣고 하자, 이 말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2장3장 해석하고 5장을 하니까 나중에 나와서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치 아니한다,’ 그 다음부터 해석이 난처하게 등장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죄 지어놓고 죄 안지었다고 우기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께 났기 때문에 죄 안 짓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나는 ~ ~이다’ 자기가 원인이 되어가지고 성경이라는 결과를 내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언약을 깨트린 자가 아니고 뭡니까? 우리는 언약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버려요.

언약을 지키는 사람 같으면요, 모세가 언약을 깨트릴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동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냥 말씀만 있으면 돼요. 주께서 동행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언약을 깨트리고 난 뒤에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우리와 동행시켰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안되니까! 우리가 언약을 못 지키니까 모세 동행하듯이 사람들은 눈에 모세만 동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세가 이미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그래, 내가 갈게’ 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합니다. 사람 눈에는 뭐만 보입니까. 모세만 보이는 거예요. 하지만 모세는 뭘 내세운다? 지팡이를 내세우지요. 남들이 보기엔 모세 지팡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지팡이의 모세’가 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모세가 지팡이를 든다고 생각한 거예요. 환장합니다.

남들 보기에 오병이어가 어린아이 도시락이지만 주님 보시기는 자기 도시락이죠. 내 도시락이라고요. 내 도시락이니까 보리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겁니다. 주님의 다섯 개의 질이 주님에게 나오기 때문에 동일한 질이 남은 12광주리도 같은 질이기 때문에 그것도 배부르다고 버리지 말고 다 모아라, 왜! 다 같이 오병이어에서 나오는 거니까.

오병이어가 많습니까. 12광주리가 많습니까? 12광주리가 많지요. 하지만 열 두 광주리가 어디에 예속된다? 보리떡 다섯 개에 예속된다...인간의 주체는 어디에 예속된다? 주님에게 예속되어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없으면 영생은 없다’는 요한복음6장이 갖춰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모든 사건들,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다 어디에 모읍니까? 예수님께 다 모은 거예요. 예수님만이 바로 하나님이고, 너희들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 죽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죽는 하나님...... 하지만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려내는 방식외에는 일체 다른 방식으로 구원한 적이 없어요. 다른 방식으로 구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 자에게 기죽지 말고 죽은 자의 말을 들어야 해요. 살았다 여기는 자들에게 기죽을 필요가 없어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8절에 봅시다. “마귀는 첨부터 범죄함이라” 이것도 설명하려면 한 시간 걸립니다. 마귀는 첨부터 범죄함이라 해서 인간의 죄가 여기에 개입 됩니까 안 됩니까. (아 어렵죠?) 인간의 죄가 개입 안되죠? 그러면 죄의 원천은 어디에요. 마귀죠!! (그런데 말을 잘해야 돼요)

죄의 원천이 마귀가 되면 인간은 죄에 대해 빠진셈이 된다, 하면 오해가 생겨요. 역사적으로 죄가 돌출된 것은 인간이 있어야 됩니다. 하지만 그 죄짓게 한 것은 악마가 돼야 되요.

그래서 벌을 내릴 때 인간만 벌 내리는 게 아니고, 인간과 더불어 벌 내리되 그 인간이, 죄 짓는 인간이 받는 벌은 인간을 위한 처소가 아니라 첨부터 마귀를 위해서 만든 처소에 인간이 합류하는 식으로 거기에 강화됩니다. 그게 뭐냐, 지옥의 유황불입니다. 유황불!!

인간을 벌주려 하면 사형제도만 있으면 돼요. 하지만 마귀는 사형제도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것은 영원한 지옥불이에요. 불을 영원히 지옥으로 해주어야 마귀는 영원히 저주받아요.

거기에 인간이 가담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참 불행하지요. 마땅히 우리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다 같이 그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저주받아야 되는데, 웬 은혠지 웬 사랑인지 영원히 예수님이 살던 장소, 우리의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이 살던 장소, 예수님을 위하여 꾸며놓은 그 예를 들어 아파트, 황송하게도 우리가 들어가서 영원히 같이 사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하여! 자기가 주되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되심을 위하여. 주의 속성, 심판하는 속성, 은혜주는 속성 그 여호와라는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온 우주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여기 다시 봅시다. 여기 다시 보면 ‘마귀는 첨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신 것은 (이거 질문하고 마치겠습니다) 마귀를 누가 상대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 상대해서 승리했지요? 그러면 됐잖아요. 그러면 우리에게 우리가 마귀인 것도 주님에 사로잡힌바 되면 주님의 힘이 오게 되면, 우리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에 의해서 마귀는 떠나는데, 마귀의 공격이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미완료로 남게 하는 거예요.

‘너 그거 안 된다, 예수 피 믿는다고 되는 게 아니야, 행해야 돼!’ 라고 미완료를 주어 조종하면 주께서는 뭐라 하냐면 이미 화목제물 안에 들어있으면 화목제물 자체가 화목이니까 화목하겠다고 피 흘렸잖아요. 용서하겠다고 피 흘렸는데 그 피를 누가 모독합니까. 마귀가 모독하죠. ‘그거 안돼, 인삼파스 붙였다고 되는 게 아니야,’ 맨날 이런소리 한다고요. 이미 피를 바른 피를 모독하겠다는 것이,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렸잖아요. 마귀와 아들 사이에는 피 싸움이에요. ‘피로 다 이루었다’ 마귀는 ‘웃기지마라’ 이거거든요. 웃기지 말라고 해도 본인은 알아요.

이제 우리는 죽었다는 것을 아는데 이 싸움에 우리가 끼어들면 우리가 다 이루었다와 정죄를 해야 됩니다. 네가 율법대로 살아서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내가 살리겠다고 피 흘렸는데... 피가 묻어있는데, 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누가 너를 혼동케 하고 두렵게 만드느냐 말이죠.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결국은 우리 신앙에 가장 방해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지요. 힘을 원하는 우리 자신... 그런데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면 그때마다 다시한번 원인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원인이 되었고 나는 주님의 생성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우리가 새삼 확인하는데도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즐겨 비참해져도 괜찮고, 거지 나사로가 되어도 괜찮고, 스데반집사처럼 돌에 맞아도 넉넉하다는 것을 그런 두려움이 없어지도록 사랑이 늘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산100402요일3장2절b.hwp (68.0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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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7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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