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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산100402요일3장2절a 자기정립vs죄와 말씀구조와 죽음자유게시판요한일서

안산100402요일3장2절a 자기정립vs죄와 말씀구조와 죽음

이름 : 박온정(IP:110.8.252.127)

안산100402요일3장2절a 자기정립vs죄와 말씀구조와 죽음/이근호 목사님

20104월2일 요한일서3장2절

요한일서 3장2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가 나타내심을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 아는 것은 그에 계심 그대로 볼 것임이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요한일서에서 나라는 것은 그냥 거울 봐가지고 나라는 것은 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를 봐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 계시면, 나라는 것은 내가 나를 봐서는 내가 나를 모르죠. 내가 나를 보면 ‘나’가 틀리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항상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가 누구를 봅니까, 내가 나를 보지요. 내가 나를 보고 '나는 이러이러하다‘라고 결정을 내는 겁니다. 내가 이러이러하다고 결정이 되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여기서 뭐냐 하면 기대와 소망이 발생되죠. ’나는 이러이러하다‘라고 하면 이거는 현재를 말하는 것이고, ’나는 이러이러했다‘라고 하면 과거를 얘기한 거겠죠? ’나는 이러이러하고 싶어‘라고 한다면 자기의 미래, 소망을 나타내겠죠. 기대와 소망...그래서 ’나는 이러이러하고 싶다‘하는 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항상 이런 식으로, ’자기정립‘이라고 하는데요, 나는 이런 인간이다, 하는 것을 자꾸 정립을 시키려하는 거예요, 자기정립을.

자기정립을 시도하게 되면 세 가지를 모르게 됩니다. 첫째는, 죄에 대해서 모르게 되요. 왜냐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죄’라는 것을 생각을 않게 됩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이 말씀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몰라요. ‘세상은 세상에서 나왔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세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말씀구조에서 세상이 나왔습니다. 자기 정립, ‘나는 무엇 무엇이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 여기에 몰입하게 되면, 첫째는 죄에 대해서 모르게 되고, 죄에 대해서 모르게 된다,가 무슨 뜻이냐하면 말씀구조에 의하면 인간은 죄인이게 되어 있죠? 인간은 죄인이죠? 말씀구조에서 인간은 죄인이라면, 말씀 자체가 가만히 있는 겁니까, 움직이는 겁니까. ㅡ어렵기 때문에 주고받고 합시다.ㅡ 말씀은 움직이죠? 말씀에 의한 인간의 죄 같으면, 말씀이 항상 우리를 쏘아대는데 ‘너는 이래서 죄인이야,’ 라는 것을 우리 허락도 안 받고 말씀 쪽에서 쏘아대겠죠.

그런데 우리는 ‘나는 무엇 무엇이다’ 여기에 이걸 고집해버리면,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오는 것을 버티려고 해요.(어렵죠?)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했다고 해서 더 이상 말씀이 내게 침투하지 못하도록 기피하고 말씀을 안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 ‘당신 십자가 압니까?’ 하면 ‘나 죄인인 거 알아요,’ 화내듯이 얘기합니다. 자기 죄인인거 아니까, 내 맘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는 거예요.

나는 죄인인 걸 안다, 는 그 자체로서 예를 들어 ‘나는 무엇 무엇이다’(여러분 오늘 좋은 거 배웁니다) 항상 나라고 할 때는요,(이거 상당히 중요합니다) ‘나는 ~이다’난 술어가 붙는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주체는 문법적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기호학적으로)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는 나다’ 이것도 술어잖아요. 술어라는 말은 풀이한다는 뜻이에요.‘나’는 주어이고 ‘나는 아름다워’ 했을 때 아름다워는 술어가 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보면 좋아’ 이러면 술어가 되는 겁니다. 나는 어쨌다고? ‘나는 죄인이다’ 이걸 자기정립이라 했죠? 이런 자기정립이 되어버리면 ‘나는 죄인이다’ 라는 말을 했던 그것으로서 더 이상 나는 죄인이다, 라고 하지 마라, 고 버티게 되는 그런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신학을 했다는 게, 개혁주의 신학을 했다는 게 자신에게 화가 되요. 아예, 구원을 가로막는 식이 되는 겁니다. 차라리 평신도 같으면 ‘날마다 말씀이 와서 나를 죄인이 지적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텐데 신학을 하게 되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잘 배웠습니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의 구조지 말씀의 구조가 아닌 거예요. 다시 할게요, 말씀의 구조는 그대로 있다? 살아있다? 살아 있다면 ‘나는 ~ ~이다’ 라고 굳히고 있어도, ‘나는 십자가 안다, 언약 안다,’ 뭐라고 굳혀도 그거와 상관없이 매일같이 말씀은 우리를 이러한 고백과 상관없이 ‘너는 죄인이다’고 움직여 쏘아대는, 벌떼처럼 쏘아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왜 그렇게 쏘아대느냐,‘나는 무엇이다’라는 식으로 버티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이 세상은 말씀구조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구조라는 것은 십게 말해서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 여기 있는데 왜 말씀만 있다 하느냐’고 우깁니까? 하는데 우리는 말씀에 의하면 하나의 질점입니다. 하나의 점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아닌 것 같죠. 나중에 화장터에 가서 불에 태워보면 한 줌의 뭐라 합니까. 재죠, 가루죠, 점이잖아요. 질점...점이 될 때 우리는 첨부터 점으로 만들어 놓고 말씀이 우리를 죽여서 우리로 하여금 점되게 합니다.

점은 면적도 없고 크기도 없잖아요. 점이라는 것은 어느 구조 안의 점이에요. 그 구조가 무슨 구조입니까? 말씀구조 아닙니까. 내 말 맞잖아요. 인간은 말씀구조 안에 있다니까요.

인간은 자기정립에 의해 살면, 첫째는 죄에 대해서 모르고, 두 번째는 세상이 말씀구조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한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목사는 자기 딴에는 말씀을 잘 가르치려고 애를 써요. 그런데 속마음은 딴 데가 있습니다. 어디가 있느냐 하면, 말씀대로 잘 양성된 건전한 교회, 이걸 내심 노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교인들은 그것을 눈치 못채죠. ‘우리 목사님은 말씀밖에 몰라’하겠지만 말씀밖에 모른 게 아니고, 말씀을 가르쳐서 뒤에 얻고자 하는 게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괜찮은 교회, 자기는 목사. 괜찮은 교회를 키우는 목사로서 ‘나는 괜찮은 교회를 키운 목사입니다’ 라는 술어가 달라요.‘나는 괜찮은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삽니다’를 뒤에 달고 있는 거예요.

교인들은 그걸 눈치 챌 수가 없습니다. 말씀 전하니까 ‘우리 교회 목사님 잘하고 있는데 왜 자꾸 비판적으로 이야기 합니까,’ 하는데 제가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어떤 교회가 있다, 어떤 목사가 있다. 그거는 하나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점에 불과하다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볼 때에 교회도 아무것도 아니고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관점이 어떤 관점이냐 하면 바로 말씀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게 보인다 말이지요.

만약에 말씀구조로 벗겨버리면 남는 것은 각 개별자만 남아요. 개별자... 각 개별자가 남으면 하나하나가 뭐냐면, 힘의 응축입니다. 개별자 하나하나가 방금 뭐라했습니까? 힘의 응축 이라했죠? 힘이 뭉쳐진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재산 50억 있다, 그러면 50억짜리 자아가 되고 한쪽은 10만 원짜리가 있다, 그러면 10만원짜리 자아가 되는 거예요. ‘나는 50억짜리 재산가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위에 뭐가 있느냐 하면, 말씀구조가 있어야 됩니다. 말씀구조가 있어야 되는데 말씀구조에 있지 아니하면, (관심사가 말씀에 있지 아니하면) 관심사가 타인에 있어요. 그래서 ‘나는 ~ 이다’에다 뭘 집어넣으려 하냐면 남이 갖고 있는 것을 집어넣으려 합니다. 사람이 갖고 있다는 것은 남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싶어해요.

여러분들이 자식 둘 이상 키울 때, 항상 엄마가 뭘 주면 아이들은 자기 것을 봐야 되는데 뭘 봅니까? 자기 것만 보면 되는데 형은 얼마나 가졌는가 봅니다. 같은 빵을 떼어줘도 형 쪽에 많이 가졌는가 슬며시 봐요. 세뱃돈 줘도 형은 얼마 받았는지 꼭 묻지요. 그래서 세뱃돈 줄때는 형부터 주지 말고 동생부터 먼저 주고 내보내야지 만약에 형 주고 난 뒤에 동생 주면 자기는 적게 받았다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비유 있지요? 10시에 온 사람, 열두시에 온 사람, 세시에 온 사람, 다섯 시에 온 사람... 농부를 불러내는데 품삯을 뭐부터 줍니까?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부터 주지요? 처음 온 사람 주고 보냈으면 아무런 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품삯을 주니까 아침부터 온 사람들은 얼마나 기대를 했겠습니까. 기대 나왔지요? 기대가 뭐라 했습니까? ‘나는 ~ ~ 이다’ 가 기대잖아요.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 받았으니까 나는 다섯 데나리온 받을 것이다, 라는 기대를 아침 10시에 온 농부가 갖고 있을 거잖아요. 그런데 다섯 데나리온이 아니고 한 데나리온 줬잖아요.

그러면 이 구조는 뭡니까. ‘나는 ~ 이다’는 천국에서 인정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절대로 ‘나는 ~ ~이다’는 인정받지 않아요. 이 땅에서는 개별적으로 그런 구조를 갖고 있더라도. 그런 구조를 가져야 개별자 노릇을 하더라도... 천국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한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나는 ~ ~이다’ 여기 비어있는 곳에 주는 것이 아니고 한 데나리온은 하나님의 말씀구조에 의해서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선물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선물입니다!! 나는 무엇 무엇이다에 집어넣을 수 없어요. 말씀구조가 우리를 덮쳐버리면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는 게 그대로 남아있는 게 아니고 뭉개져버립니다. 뭉개져버리고 ‘예수님은 ~ 이다’로 예수님 주어에 예수님은 술어로 바뀝니다. 나는 여기 들어가요.‘예수님은 나에게 선물을 주신 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나는 뭐냐 하면 소달구지죠. 내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 위에 실린 짐이 중요한 겁니다. 하나의 이런 식입니다.

인생을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내가 무엇이다가 아니라, 나는 주님께서 부리는 하나의 수레, 그릇, 도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의 주어는 항상 내 몫이 아니고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했다,’ 이렇게 됩니다. 나는 경유(經由)지점이에요. 왜! 하나의 질점이니까! 죽으면 하나의 흙으로 돌아가니까. 흙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요. ‘나는 흙인데도 불구하고 주의 십자가 피를 흘려서 나를 사람 되게 하셨다,’ 그 이야기가 나와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미래, 예수님의 시간인데 요한일서 3장2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말씀구조에서 나왔지요? 그다음에...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다, 이것은 우리가 무거 되고 싶다,와 관계없이 말씀구조에 의해서 우리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되느냐, 그 뒤에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대로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3장2절의 말씀입니다. 같은 성경구절을 봐도 ‘나는 뭐가 되고 싶다’가 되면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어요. 항상 성경을 볼 때는 예수님이 주어가 되신 말씀구조를 가지고 되는 겁니다.

그 목회자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그 목회자는 말씀을 이야기 하면서 항상 뭘 갖고 있냐면, 말씀으로 괜찮은 교회 하나 내가 잘 훈련한, ‘나는 괜찮은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다’ 에 있으면 이 사람은 말씀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소유의 교회가 되기 때문에 말씀을 (말씀만 가르친다 하지만) 그 말씀이 뭐냐 하면, 건성건성 말씀의 깊이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제가 언젠가 수요설교에 말씀드린 것 같은데) 말씀에는 층이 있어요. 피부니까 표면층, 여기에 층들이 있는데 표면층들은 육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표면층에서 나오는 두 가지 해석이 뭐냐 하면, (같은 해석이지만) 역사적 해석과 문법적 해석은 육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제가 개혁주의 논문 할 때 제일 마지막에 한 말이 ‘당신은 육적해석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역사적, 문법적 해석이에요. 이거는 왜냐 하면, 고린도후서5장에 보면 나는(사도바울) 전에는 육으로 예수를 알았다, 하는 것이 나오죠. 전에는 내가 예수님을 육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육에서 알던 그런 예수님이 아니고 영으로 예수님을 안다 했습니다. 이런 경우의 체험이 같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공통적인 현상이 되어야 합니다. 공통적인 현상...

영으로 해석을 하려면 자기정립이 와해 되어버려요. 부서져버려야 돼요. 주님이 오늘도 나를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이렇게 되어야지, 나는 예수님과 이런 거래를 하고 있다, 이러면 안돼요. 그래서 육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이...(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세상은 무슨 구조라했다? 말씀구조라 했다. 말씀은 정지됐다? 움직인다? 움직이죠. 말씀이 세상에 대해서 치게 되면 이 세상은 말씀 구조로 돼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육으로 되어 있다는 이 표피층의 의미는 날아가 버리고, 그 깊이 점점 더 다른 층이 나오죠. 층이 풀이면서 나올 때마다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낯선 사건들이 나옵니다. 자꾸 낯선 사건들이 나와요.

사실 새로운 사건이 아니고 이미 벌어진 사건인데 이 사건이 (제가 어렵다 했습니다요? 참으세요?) ‘나는 ~이다’는 이것을 내 쪽에서 원인을 갖고 여기 일어난 일을 내 쪽에서 만들어낸 결과로 본다면 이것이 바로 내 중심의 육적해석이거든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역시 성경을 열심히 보니까 땅 값이 오르는구만, 내가 사놓은 땅 값이 오른 것은 성경을 열심히 봤다, 내가 하는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결과가 나왔다고 본 거죠.

이 강의는 다음 주 경주에서 야고보 할 때 하려고 합니다만,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가 육적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볼 때에 바로 그런 육적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서 그걸 뭐라고 하냐 하면, 그걸 현실이라고 합니다. 제가 수십년 전에 설교를 하고 나니까 대구 대덕교회 어떤 장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근호 목사님은 이론은 잘 아는데 현실을 모른다,’ 이러더군요.

이 사람은 표피층에 있는 현실, 내가 육적으로 아는 현실을 현실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이 세상의 현실은 말씀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살아서 우리를 때리게 되면 무슨 층이 벗겨지겠습니까. 육적인 표피층이 떨어져 나가겠지요. 떨어져 나가면 내가 가진 것은 뭐가 되냐 하면 하나님이 원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가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남들 보기엔 이론이라고 하지만, 본인한테는 뭐가 되는 겁니까. 그게 더 현실이 되는 거예요. 다시한번 정리 해야 되겠지요? 자꾸 되풀이해서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제가 방정식으로 얘기했죠? ‘나는 ~이다’ 이걸 현재라 하고, ‘나는 ~ 이었다’ 이건 과거고, ‘나는 ~가 되고 싶다’ ‘나는 ~을 기대 한다’ 이거는 소망 또는 미래라 했지요? 이걸 자기정립이라 했죠. 이런 자기정립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육적인 해석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원인이 되어서 어떤 해석을 해버리면 그 현실은 나에게 필요한 것만 뽑아서 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세상은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지만, 사람들은 모든 사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관련된 것만 뽑아서 되는 거예요.

그 관련된 것을 뽑을 때 뭐와 관련된다 말합니까. ‘나는 ~가 되고 싶은데 아! 저거구나, 복 주시려고 이런 혜택을 주시네,’ 자기가 되고 싶은 게 있는 마당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거는 자기와 관련 있는 사건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뽑아 버려요.

서해안에 물에 빠져 죽은 병사하고 관련된 분들 계십니까? 이 자리에 없지요? 없으면 뉴스가 지루해지는 거예요. ‘뉴스 그만 해라~ 뉴스 40분에서 30분간 잡아먹는다. 이제 그만 해라,’ 이러죠. 만약에 동생이 거기에 빠져 죽었다. 한 총리(韓昇洙)재판한 거 그 뉴스만 나오길 기다리죠.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항상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 ~을 기대 한다’ ‘나는 ~ ~이 되고 싶다’ ‘나는~한 인간 되고 싶다’ 라는 것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인으로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용납하지 않지요. 오늘 공부한 요한일서3장2절이 용납하지 않지요. 요한일서3장2절은 ‘나는 ~~ 이 되고 싶다’는 것을 뭉개버리고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는 예수님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 됩니다. 그런 식으로 현실을, 그런 식으로 세상을 다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동생이 서해안에 빠져죽었다, 했을 때 다른 유족들은 실신하고 자빠지고 난리 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내 동생이 그만큼 살았다고 유일한 해석으로 믿는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의 관심사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물에 빠져 죽은 걔가 어디 가 있겠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어디에 가 있겠어요. 만약에 그 동생이 복음을 안다면 어디에 가 있겠습니까. 십자가 피를 믿는다면, 세상에서는 시켜주지 않은 제대를 하나님께서 강제로 이 세상 자체에서 제대를 시켜준 거예요. 실신...왜 합니까. 실신만 하나요, 뒤에 또 보상금 재판할 겁니다. 코스가 빤한 코스 아닙니까.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물에 빠지고 차에 받히기 전에 ‘나는 ~ 에 기대 한다’는 말씀에 의해서 얻어맞아야 됩니다. 이게 내가 원인이 아니라 누가 원인이다?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지금까지 이만큼 구성되어 왔다, 형성되어 왔다,는 주님이 주신 결과물로 은혜의 결과물로 받아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6장에 보면, 우리 자체가 영적 열매예요.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성도를 무시하지 마세요. 하나님에 의해서...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10장에 보면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품과 우상인 마귀가 만든 제품과 어떻게 까막눈일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죠. 내 속에, 하나님이 만들어진 그 속에, 인간이 만들었다고 여기는 것을 담아두지 마라, 왜!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이다. ‘육과 영이 어떻게 함께 하리요!’ 육과 영이 어떻게 함께 하리요, 이 말을 성화론 쪽으로 봐버리면 정말 아니올시다! 정말 아니올시다! 이거는 또 사시 현실을 ‘나는 ~이다’에 준해서 현실을 바로 보자는 거예요.

첨부터 새로 시작하네요. (그냥 넘어 갈까요?) 그래서 요한일서3장2절에 보면, 우리가 어떻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걱정할 사항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주님에 의한 결과물이라면 ‘나머지 미래는 확정되어 있다,’입니다. 어떻게 확정됐다 했습니까? 그분이 나타나시면 예수님처럼 우리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다’라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첫 번째는 죄에 대해서 모르고, 두 번째에는 말씀구조에서 모르고, 세 번째는 죽음을 모릅니다. (나는 ~ 이다, 라는 구조에 있을 때)

죽음을 모른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기독교란 무엇이냐면,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려내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은 자가 말하는 지시를 받아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죽은 자를 상대하지 않고 누구를 상대하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산 자를 의식하는 거예요.‘ 저 집사님이 어떻게 생각하나’ ‘저 장로님이 날 어떻게 생각하나’ ‘목사님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맨날 이웃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눈은 자꾸 산 자만 보이는데 정작 심판주는 항상 우리한테는 죽은 자로만 계셔요. 죽은 자로만...

그래서 왜 주님께서 죽은 자로 계시느냐 하면, 실상은 우리가 산 자가 아니고, 우리가 살았다고 우기지만 우리가 죽은 자고 진짜 살아있는 자는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죽어도 산 자)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가 죽은 자인데, 우리는, 예수님은 이미 2천년전에 죽어 없어진 분이고 현재 살아 있는 건 우리가 살아있다 하니까, 바뀌게 된 이 두 구역은 서로 의사소통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바뀌게 된 것을, 주께서 바꿔서 이야기 해버린 거예요. ‘그래! 내가 죽은 자 할께 너희 산 자 할래?’ ‘예, 산 자 하렵니다’ ‘그러면 내가 죽은 자 할게’ 너희는, 산 자는 죽은 자를 믿어야 산다는 겁니다. 주체자를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살고 죽는 주체가 분명하다. 주체자가 ‘너도 살고 나도 살고’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주체자가 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포기해야 됩니다.

우리 스스로 살고자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 사신 것에 우리는 도구가 되고 수단이 돼야 되요. 어떤 수단? 주님만이 살 수 있는 분입니다, 라고 믿으면 그 증거로 인하여, 그 지시로 인하여 그 사람이 사는 겁니다.

제가 요한일서 이야기 하면서 갑자기 왜 요한복음 이야기 하냐면, 요한일서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사랑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기 안을 비워 놔요. ‘나는 ~ 이다’고 ‘나는 사랑 받을 만하다’고 비워 놓는데 이 복식 자체가 없어져야 됩니다. 내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사랑은 나를 끌고 가는 사랑이다. 나를 포기하지 않은 사랑이에요.

‘나는 사랑 받았다’고 남에게 자랑할 수밖에 없는, 나를 포기 않는 그런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은 ‘나’는 주어고 술어는 뭡니까, ‘사랑 받은’이 술어가 되니까 이런 구조는 하늘나라에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침 10시에 일했습니다’ ‘나는 열두시에 일했습니다.’‘나는 세 시에 일했습니다’ 전혀 그거는 하늘나라와 관계가 없어요. ‘내가 일했습니다,가 아니라 ‘주여, 나는 일한 것도 없는데 왜 주십니까’를 주체를 내 쪽이 아니라 주시는 분으로 예수님으로 옮겨가야 되지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포도원 주인 이야기, 포도원 일꾼 뽑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죠. 전에는 육으로서 예수님을 알았지만 이제부터는 영으로 예수님을 안다, 우리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영적인 사람 하나가 육적인 사람 10명 안 부럽습니다. 한 쪽은 죽음의 영역에 있고 한 쪽은 생명의 영역에 있는데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층이 다른데요. 이거 하고 십분 쉽시다.

다시 얘기합니다, 말씀구조에는 맨 앞에 무슨 층이 있다? 표피층, 피부...이거는 문법적 해석, 역사적해석이 나오죠. 육적인 사람도 다 이해 되는 국어책! 국어책으로서의 성경입니다. 이게 이런 식으로 한다면, ‘나는 ~이 되련다,’ ‘나는 ~이 되겠다’ 이것이 예수님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뜯겨 나가면서 ‘나는~이다’로 보는 현실과 세상은 허망한 거예요. 앞뒤에 숨어있는, 주님이 주체가 되는 주님이 나를 살려서, 그 앞에서 나는 주님을 싣고 다니는 수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층. 이 층까지 내려가서 해석이 되어져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요한일서에서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라고 해야 되요. 나는 아무리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주님이 나를 사랑해서 나로 하여금,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의 표피층으로 나를 밀어 넣은 겁니다. 밀어 넣으니까 불신자들이 뭐라고 오해 하냐면, ‘네가 교회 충성하더니만 복 받았구만’ 이런 식의 육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뭡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주님께서 나를 밑에서부터 떠밀어내서 그런 거야’ 주님께서 떠밀어 낸 거예요.

엄마가 만약에, 이번에 배 깨졌을 때, 엄마하고 애들 함께 탔다면, 애는 선실에 있고 엄마는 갑판에 있다면 자기부터 살겠다는 엄마가 어딨겠습니까? ‘욱이야, 너는 살아야 돼,’ 하면서 아이를 살려 내겠지요. 욱이가 산다면, 나중에 기자회견 할 때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고 한다면 ‘엄마가 밀어 냈어요’ 하는 것처럼 주체가...주님이 지금도 말씀에 따라 약속 때문에, 약속의 생성물이니까... 약속이 원인이고 우리는 결과물이니까, 약속이 빚어낸 우리는 주님의 피부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밀어낸 표피층이 오늘날 우리는, 성도라는 돌출물로 등장하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산100402요일3장2절a 자기정립vs죄와 말씀구조와 죽음.hwp (50.0K), Down: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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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7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