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100709요일3장24절a.b
안산100709요일3장24절a.b
이름 : 박온정(IP:118.218.50.71)
안산100709요일3장24절a.
요한일서 3장24절,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인간은 변하지요, 변하는 우리가, 만약에 작년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했다면, 작년의 나 자신하고 올해 또 변하지요? 작년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했다, 하지만 그 사항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올해 나 자체가 변했다면, 그 변한 나를 내 안에 계시도록 해주는 우리 주님도 같이 변해야 될까요? 안 변해야 될까요? 질문이 어렵죠?
무슨 말인가 하면요, 예를 들어 이런 게 있지요, 남자가 “나는 당신을 사랑해,” 하면 여자가, “오늘만 그렇지?” “아니야, 나 내일도 사랑할거야,” “변함이 없어?”“그래, 변함이 없어.”오늘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고 했을 때, 그거는 “나는 오늘 같은 맘이라면 절대로 변하지 않아,” 그러면 오늘 결심했던 마음이 내일은 그 마음이 아니잖아요, 내일이면 내일의 내가 또 만들어지기 때문에, 낼 되면 또 여자가 묻기를...“당신 아직도 나를 사랑해?” “미쳤나, 내가 사랑하게.” “어제 얘기 했잖아,” “어제는 어제의 내가 아니잖아, 어제는 그랬었지, 하지만 오늘은 또 달라,” 이런다는 말이지요.어제 나에게 “당신 나 사랑해?” 묻던 그 여자는 어제의 그 여자가 아니야 너는.’ 어제 나에게 묻던 그 여자가 오늘은 아니라니까,‘ “너 변한 건 생각 않고, 자기는 변한 거 생각 않고 왜 나만 닦달하는 거야,” 라고 할 수 있다 그 말이지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문제는, 매일 같이 변하는 나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요지부동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나, 하는 그 문제입니다. 우린 날마다 달라지고, 어떻게 달라질지도 모르고, 해괴망측하게 달라질 수도 있는데, 왜 성경은 일관되게 주 안에 거하게 된다고 이야기 하냐, ‘그거는 우리의 달라짐과 같이 주님께서 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달라지지 않은 게 아니고, 우리 달라짐과 같이 더불어 달라지는데, 주님이 달라진다,하는 그것을 뭐라 하냐면,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 성령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바람’같다고 했지요? 성령은 한결같지만, 우리 역사속의, 우리 인간속의 성령은 한결 같은 모습이 아니에요.
성령은 이런 분이야, 한다면 그건 성령이 아닙니다. ‘왜냐면, 바람을 그릴 수 있는 그림은 없어요.’ 바람 불어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건 그릴 수 있지만, 바람 자체를 그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바람 부는 현상을 그리라면, 오늘은 가지가 왼쪽으로 흔들리는 그림을 ‘찰칵, 하고 사진 찍을 수 있고, 낼 되면 또 오른쪽으로 흔들리면 ’찰칵, 되지요.그러면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성령이 임한 사람이 왜 자꾸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으로 헷갈리는 거야,” “어느 쪽이야, 분명히 해,” 그러면 뭐라 하겠습니까, “성령이 원래 그래, 바람 불면 원래 그래.”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내가 성령 받아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거는 큰 오산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잡은 성령 자체가 달라진다면 우리도 달라져야 같이 하나 되는 겁니다. 한쪽은 달라지는데 한쪽은 안 달라지면, 둘 중에 하나가 결국, 가짜라는 뜻이지요.
성령은 늘 변합니다. 왜 변하냐 하면, 인간이 늘 변하기 때문에. 늘 인간이 변해요. 왜 인간이 늘 변하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변해야 될 시간과 공간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변한다면 당연히 인간도 변해야 됩니다. 개 키워보시면 아시겠지만, 개도 늙어가고, 늙어가는 개가 주인보고 뭐라 하냐면, “남 이야기 하지 마세요, 주인님 당신도 늙어 갑니다.” 같이 늙어가죠. 같이 늙어간다는 것은, 성령께서 이 세상을 고정적으로, 그대로 두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계획대로 변천을 일으키면서 세상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이나, 도 닦는 사람들, 노자, 장자, 동양철학 서양 사람들은 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확고하고 이렇게 우수하며 이렇게 도를 깨우쳤다,” 하고 고함지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도를 깨우쳤다, 하는 건 어제 깨우친 거지요.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에요. 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이고 싶지요. ’왜!‘ 달리 다른 소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믿지 않고 예수님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하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래서 기껏 찾는 것이 ‘주체’라는 거예요. ‘주체 불멸설’ 어제의 내가 바로 오늘의 나다. 오늘 나를 찾으면서 어제의 나,로 자꾸 연결시키고 싶은 거예요.
그건 본인 마음이고, 본인의 소망이고, 주위 식구들도 압니다.“아버지 달라셨습니다, 아버지 달라졌어요.” “무슨소리야, 일관되게 어제의 그 아버지야,” “아닙니다, 아버지는 몰라요. 아버지가 벌써 옛날의 아버지 아닙니다.”옛날의 아버지는 이만한 거 가지고 성질 안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치매 있는 것 같아요. 많이 달라졌습니다. 현대 철학은 그걸 발견했어요.인간의 자아는 달라지고 싶지 않다고 소망할지라도, 인간의 몸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현대의학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발견한 게 뭐냐면, 아무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싶어도 몸 아프면 모두 헛방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세상이 아름답더라도, 이빨만 앓아버려도 세상은 살기 싫어집니다, 꼴보기 싫어요. 아무리 귀여운 손자라도 자기 몸 아프면,
손자고 뭐고 다 귀찮아요. “가라, 가라, 병원 찾아오지 말고 가만 놔둬라, 다 귀찮다.” “아버님 귀여운 손자에게...”“재롱이고 뭐고 귀찮다니까.” “간병인 두고 오지 마라, 며느리고 자식이고 다 소용없다, 간병인 내가 돈 모은 걸로 댈테니까, 아예, 아버지 없다 생각하고 오지마라,” “오면 귀찮다, 알랑방구 뀌는 것도 귀찮고, 위선 떠는 것도 귀찮고, 유산 받으려고 오는 것도 귀찮고, 가라, 내 돈은 나 아픈데 털어 쓰고 갈 테니까 기대하지 말고 가라”‘ㅋ ㅋ ㅋ
다시 이야기 할게요, 성경 해석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그동안 오류가 있었습니다. 내가 어떡하면 안 변합니까,를 그걸 노리면서 성경해석을 본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안 변할 수 있습니까. ‘너는 변해!’ ‘아뇨, 나 고집 세거든요? 절대로 우리의 신앙은 변하지 않습니다.’ ‘안 변하려고 안변하는 거 붙잡으면 저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도 변하는데?’ ‘나도(하나님) 변하는데?’ ㅋ ㅋ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이 복음이요 묵시 세계에서는 다 이루었습니다.
완료 상태에요, 다시 말해서, 변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묵시가 역사에 침투하는 그 순간부터 역사가 묵시를 붙잡을 수가 없어요., 왜? 변하는 묵시기 때문에... 왜 변하는 묵시일까요? 사람 자체가 날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달라지는 인간에게 하나같이 보인다면, 그거는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는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가고 싶은데, 저와 여러분들의 그림자가, “선풍기 있는데로 갑시다 ” 하는 거예요. “주인님 혼자 가세요, 나는 시원하게...” 이런 아이디어가,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가 인간 속에 있어요.
“난 20대 젊은 모습 갖고 싶어,” “미쳤나, 몸이 60인데 무슨 20대야,” “아니야, 아직도 20대야.” 여성들에게는 항상 그런 게 굉장히 많아요. 절대로 몇 학년 몇 반이라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계속해서 뭔가 붙잡으려고 해요, 옛날 좋았던 그거, 좋았던 그걸. 그러나 성령님은 아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네가 존재하는 순간 남에게 피해 준다는 거.’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주고 본인도 남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줘요,‘ 내가 사랑을 해줬는데 미움으로 갚을 때 그 자식이 미워져요. 자식을 잘 키웠는데 자식이 부모의 은덕을 모르고 좋아하는 여자 친구 남자 친구에게 푹 빠져 있을 때, 질투적인, 미운 거예요.
밉다는 것은, 결국 자식이라 하는 것은, 나는 이런 경우에만 밉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자식을 둔 거예요. “내 사랑을 감히 못 알아보다니,” “내가 준 사랑의 그 정도만큼 그 분량만큼 그것을 온전히 네가 일치되게 느끼지 못하다니, 이 괘씸한 자” 결국은 뭐냐면,.. 어렵게 가봅시다 이왕. 남이 나를 정한다, 정한다는 말은 규정한다. 남이 나를 규정해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규정하면 백날 해봐야, 착각입니다.
가을에 단풍이 들어서 차를 타고 가면서 “단풍이 너무 아름답다!” 하고 있는데, 뭐가 “빵빵~!” 합니다. “뭐야?” “신호 떨어졌어요, 빨리 가세요.” 합니다. 갑자기 단풍을 보는 순간, 20년 전 아름다웠던 기억을 하는 순간, 현실에서 착각으로 잠시 벗어나 보는 거예요. 현실은 지금 사거리에서 신호 받아 빨리 가야될 입장인데, 괜찮은 음악 나오고, 단풍 지니까 지금 내가 운전하고 있는지,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시고 있는지, 잠시 분간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로 받잖아요? 하나님 은혜 받아, ‘여기가 천국이니...’ 하고 있는데. ‘엄마, 밥해~!’ 하잖아요. 천국 맞아요, 우리가 예수님 믿는 백성 맞는데, 현실은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니까요 현실은. 현실은 천국만 즐기고 성경만 즐길 것이 아니라 밥을 할 때는 밥을 해야 되고, 청소 할 때는 청소해야 되고, 택배 올 때는 집을 못 비우고, 택배 오면 갑자기 분주해지고, 답장해야 되고, 은혜 받고 싶은데 왜 그리 할 일이 많은지...‘
이게, 그 많은 변화까지 주님의 일관된 손에 고정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어떤 변화라도 하나의 확고한 ‘다 이루심’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게 어떤 변화든... 변하는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변하는 환경과 더불어 같이 변해도 주님 안에서 무관한, 상관없다고 믿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나는 안 변해야 돼,” “나는 안 변해야 돼,” 이거는 마귀의 시험든 거예요. 오뚜기는 발로 차버려도 괜찮잖아요. 백번 차도 일어나고, 천 번을 차도 다시 일어나는 겁니다.
성경말씀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타락하고 싶어도 이미 타락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타락하고 싶어도 타락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면, 어떤 자가 지옥 간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얘기할게요. 우리가 아무리 타락하고 싶어도 타락이 안 되는 이유는 ...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에 의하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 그걸 멸망 받을 사람... ‘어제, 서경수 목사님 본문에도 나왔어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거기서 뭘 놓치고 있냐면, 멸망하는 자가 십자가 때문에 새롭게 발생된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 점잖은 사람이고 전부다 훌륭한 사람이고 괜찮은 사람인데, 운전하면서 ’멸망했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같은 인간인 줄 알았더니만 멸망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 받은 자가 아니고,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불러주는 자와 멸망 받는 자,로 이렇게 연결되는 거예요.
멸망 받는 자와 안 받는 자가 연결되는 게 아니고, 멸망 받은 자와 안 받은 자, 하면 전부 멸망 안 받으려할 거 아닙니까. 그게 또 자기가 멸망 안 받기 위해 용을 써도 안 되요.그게 아니고, 멸망하는 자 있고, 그 다음에 불러줘야 멸망이 안 되는 거예요. 멸망이...... 이것은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일단 없다고 치고, 십자가 앞에 사람 한 명도 없어요. 십자가가 발생되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기준에서 멸망 받아야 될, 십자가를 어리석게 봐야 될 사람들이, 무리가 탄생하는 거고, 없는데서 십자가 능력으로 새롭게 불러 준 사람 한 무리가 등장해야 되요. 그러면, 십자가 언제 졌느냐, 십자가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가?
그렇게 되면, 십자가가 2천 년 전의 사건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십자가 계획이 마련되어 있지요, 2천 년 전에 일어날 십자가가 되풀이해서 일어났다면 서기 100년 서기 200년 되풀이해서 십자가가 일어나 주어야 거기서 새롭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등장하는 것처럼...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십자가 사건이 2천 년 전 사건이 아니고 100년 후에 또 성령께서 십자가를 주시면 100년 후에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생길 게 아닙니까. 그러면 200년 후에 또 생기겠지요. 그거 이해 되지죠?
거꾸로 가봅시다 거꾸로. 거꾸로 가면, 500년 전에 십자가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생기죠. 예레미야나 엘리야... 계속 가보자고요 창세전까지. 그러면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되었고, 에서는 미워하고, 맞잖아요.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작정된 그 순간에 이미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십자가가 역사속의 사건인 동시에 역사와 상관없는, 전 역사를 다 통제할 수 있는, 역사를 다 덮고 있는, 다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변하지 않는 거예요. 제가 하나교회에서 한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할게요.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얘기하면 아마 기억이 나실 겁니다.’ 예수님을 ‘알파요 오메가‘라 했잖아요. 나는 시작이요 나중이다. 나중이라는 건 세상 끝이다,죠? 이걸 막대라고 봅시다, 막대자석... 막대자석인데 막대자석에 쇠가 붙을 때 앞부분만 붙을까요? 아니면 중간에도 붙을까요? 중간에도 붙지요? 그러면 끝부분, 4/3 지점에도 붙을까요, 끝만 붙을까요? 다 붙지요? 그러면 여기 쇠가 있다면, 막대자석이라면 앞부분에도 쇠를 당기는 속성이 있지요?
첨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지요. 이것을(분필 또는 묵펜) 자석의 속성이라고 보자 말이지요. 그러면 창세전에도 이런 것이 발휘될 것이고, 창세기 후에 100년에도 발휘될 것이고, 그러면 지금 2010년이니까, 마지막 2200년에 멸망한다면 발휘될 것이죠?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 속성이 역사속에서 툭, 튀어나온 게 뭐냐면 십자가에요, 왜냐면, 그분이 다 이루었다,했으니까.
제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걸 그대로,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했다 이말이지요.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 언제 돌아갔습니까. 또 십자가 얘기 했다 말이지요. 아브라함이 이삭 바쳐서 십자가 이야기고, 출애굽기의 어린양의 피 발라라, 하는 요한복음 이야기도 십자가이야기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십자가이야기가 결국은, 모든 전 역사를 다 털어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커버한다는 말은 막대자석은 고정되어 있지만 역사가 변화되고, 변화되고, 흘러가고, 흘러가고, 흘러가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죄와 의가 충돌되어 계속 얼켜야 되니까, 얼키고 설켜야 되니까,
여기서 어떤 인생은 살아나야 되고, 어떤 사람은 죽어야 되고, 여리고성은 무너져야 되고, 홍해는 갈라져야 되고, 변하잖아요, 하지만 이 변화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변화예요 확정된 변화. 변화의 양태는 달라도 속성은 어때요? 일괄적이다, 속성은 하나같이 변함이 없다 이말이지요 속성은...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태어났으면...할 거 없어요. 2천 년 뒤에 태어나도 십자가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 당시에 태어나 예수님 손 만졌다고 뭐,‘ 떠밀렸다고 더 은혜 받는 거 아닙니다. ’에구,‘ 나도 삭개오처럼 키 작아 나무에 올라갔음 좋겠다, 예수님 지나갈 때 올라가면 되겠다, 이런 걱정할 필요 없어요, 키 안 작아도 괜찮아요. 세리 아니라도 괜찮고, 예수님 집안에 오셔서 대접 안해도 괜찮아요. 예수님의 피 믿으면 그 속성이 그 속성이니까! 삭개오처럼 ‘네 집에 오늘 구원이 이르리라,’는 말 듣습니다.
사도바울 앞에서 복음 믿은 사람은 다 삭개오예요, 다 세리고, 다 창기요, 다 구원 받은 사람이예요.열 두 사도가 색깔이 다 다르더라도, 그들이 외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 밖에 없어요.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가 사도바울이 피박줬잖아요.후배가 선배에게 피박주고 대단하죠, ‘기강 잘 서겠다 참,’‘‘사도 내 질서가 엉망이다,’ ‘교회 내 질서도 엄격한데, 사도세계 질서는 엉망이네요,’ 후배가 선배에게 면박주고 바로 얼굴 앞에서 ‘그건 복음 아니거든?’ 했다 말이죠. ‘무슨 율법이고, 무슨 할례를 행해!‘ ’왜이러십니까 베드로 양반, 왜 이래요?‘ ‘주님께 헛된 죽음 만들려고 하십니까?’ 마구 나무라죠? 베드로가 잘못 됐다, 이겁니다.나중에 베드로가 칭찬하기를...
사도 바울의 편지 함부로 풀면 안 된다, 그거 영적인 편지다,‘ 속성을 놓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속성을 봐야 될 걸 나의 속성을 믿으니까 마귀의 시험 드는 거예요. ‘에구,,목사님 저는 아침 다르고 점심 다르고...‘ ‘네가 원래 달라, 원래 달라...’ 중요한 것은 우리만 날마다 달라지는 게 아니고 성령도 우리의 보조를 맞춰서 같이 속성을 늘 보도록, 죄에대해서, 의에 대해서, 늘 책망하면서 늘 보듬어준다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타락해도 성령께서 찾아오십니다. ‘그 정도로 성령은 변신에 강해요!!’ 성령께서는 변신에 강합니다. 어떤 때는 소년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아버지 가장의 모습으로! 십자가 복음을 들이대는 겁니다. 어린애가 지나가면서 십자가 얘기를 할 때 그것이 새롭게 들려지고, 어떤 할머니가 찬송가 부르면 늘 아는 찬송가지만, 찬송가 듣고 성령의 역사가 되어, 내 마음에 다시한번 주님의 속성 때문에 구원 받았지, 내가 완벽하고 내가 흔들림이 없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흔들림이 도리어, 흔들리지 않은 주님을 증거하는 셈이지요.그럴 때 히브리서6장의 말씀, 하늘로서 비춤을 얻고, 비로소 해결 되는 것입니다.성령의 하나님 비춤을 얻고, 할 때 성령을 소유하려 하면 반듯이 타락합니다.
주님께서는 진짜 성령의 뜻은, 나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멸망 받은 자와 부르심을 받은 자, 주님 좋으라고 내가 호출되었다는 걸 아는 자라면, 나의 행동의 정확함을 믿다가는, 이건 마귀의...백번 타락합니다. 술 끊었다, 술 끊었다, 몇 년째예요, 십년 째, 다음 날 죽은 걸로 끝나는 거예요. 담배 끊은다고 몇 년 째, 오 년 째, 그 다음날로 끝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걸 붙잡지 말고, 내가 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붙들림 당할 때, 그 사람은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주님을 증거하는 삶으로 가는 겁니다.
성령을 한번 받았다고 좋다고 그걸 소유해 돌아다니면 그 소유로 끝난 겁니다.나의 구원론을 위한 성령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반듯이 예수님을 위한 성령이지, 나 구원하라고 주는 성령은 없어요. 나는 구원 되지 말아야 되고, 이미 구원 되신, 예수님의 변함없는 속 안에 있을 때만 예수님의 구원이 나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나의 구원은 포기 하세요. 주님의 구원이 나를 덮칠 때 그것이 바로 나의 구원입니다.주님의 구원... 그러면 주님이 어떻게 구원 하는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가지고, 우리의 관심사로 하여금, 예수님의 다 이루심에 관심 두며 살게 만들죠. ‘자, 지금까지는 여러분 다 아신다고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해 봅시다.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한 줄 우리가 알지요. ‘이제부터는 어렵습니다, 정신 반짝 차려야해요.’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성령이 인간에게 먼저 왔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 먼저 왔습니까.
예수님께 먼저 왔지요? 성신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 준 거니까. 신약에 성령께서 오신 것은 예수님께 먼저 왔다 말이지요. 그러면 누구는 배제되느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물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세례는 못 받았거든요.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는 것도 있고, 오순절 날 성령 오셔가지고 부어준 거 있잖아요, 성령세롄데...
결국, 성령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배제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독점적으로 잡았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일을 하실 때는, 예수님께 왔다는 그 정보, 그 내용을 취소 않고, 그걸 듬뿍 담게 되겠지요.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 영>이라고 합니다.자... 그런데, 예수님께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저거는 좋은 거다, 저거는 나쁜 거다, 우리가 판단하잖아요. 그 판단은 성령의 눈으로 보면 값어치도 없어요.
그 판단은 성령이 임한 분, 예수님이 저거는 나쁜 거야, 저거는 옳은 거야, 판단해 줄 때 비로소, 판단이 되고, 그것을 듬뿍, 성령께서 그 내용을 담았지요. 그렇다면 누구한테나 성령이 오게 되면, 뭘 보게 되느냐 하면, 내 눈에 보기에 저게 옳고 저건 나쁘다 하는 것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 논리에 의하면. 예,‘ 포기 해야되요. 우리가 판단을 하게 되면, (이게 어려운데) 내 안에 내가 있는 셈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입니다. 우리가, 내가 누구를 판단한다 할 때 그 판단과 그 자리는, 내가 판단한다면 이 자리가 나의 자리가 됩니다. 만약에 이 자리가 주님의 자리가 된다면, 내 판단을 제치고 누구 판단이 나옵니까? 예수님의 판단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아까, 전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성령 받을 때 그 누구도 예수님의 뜻을 알았다? 몰랐다? 예수님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지요? 우리는 모르는데 예수님은 안다는 것이 성령 받고 난 뒤에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이런게 어려운데, ‘왜 우리는 모르냐,’ 성령 받으면, 예수님을 보니까, 우리는 우리 혼자 있다고 여겼거든요. 태어날 때부터...아무리 만져봐도 내 팔뚝이고 우리 거였는데, 예수님 보니까, 마귀자리였어요. 우리 자리가 아예,‘ 없었어요. 이거는 성령 받은 예수님 눈에만 띄는 겁니다.
우리 자리는 없고, 마귀 자립니다. 예수 안 믿는 가정 있으면, 예수 안 믿는 가족은, 자기 자리라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시아버지가, 얘야, 교회 가더라도 너는 제사 드려야지, 제사 드려야지, 한다 이말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저 시아버지는 자기 뜻에 의해서 평생 제사를 들여야 집안이 잘 되는 모양이다, 하는데, 진짜 성령 받으면, 우리 시아버지 자리는 자기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 마귀가 시킨다, 이렇게 나와요. 왜냐면, 예수님이 그런 해석을 가졌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몽땅 그 내용을 가지고 알려주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노인네가, 우리 집안의 어떤 노인네도 그렇고 할머니도 그렇고, “너는 교회 간다는 걸 내가 들었다마는, 가거라 교회는, 가러라마는, 이 제사만큼은 양보 없다, 우리 집안에서는 양보 없다,” 하잖아요.
그러면 시어머니께 물어요. “어머니 제사 왜 드려야 되는데요?” “제사 안 드리면 우리 집안 망한다,” 이러거든요. “망하는 증거가 있습니까?” “어,어...어른에게 말대답하는 거 봐,” 하면서 억지로 나가는 거예요. 어른에게 말대꾸 한다고. “어디서 시집온 며느리가 시어머니 이야기에 따지냐,”
제사가 없으면 두려움, 공포, 이런 겁니다. 우리 요한일서 한번 했잖아요. ‘사랑이 없으면 주름이 생긴다고.’ 사랑은 뭘 덮나니? ‘모든 심판과 두려움을 덮나니’ 사랑이 없으면, 뭔가 받은 사랑이 없으면, 긍휼과 자비가 없으면, 항상 그 자리는 뭘로 출렁출렁 거린다? 걱정 근심과 두려움과 공포와 초조와 불안으로 항상 철벅철벅해요. 둘째가 잘되면 셋째가 걱정되고, 항상 절벅절벅...걱정이 늘어나요.
그 말이 뭐냐 하면, 항상 내 자리가 걱정 근심 떠날 날 없는 마귀가 가져다 준 더러운 자리예요. 그래서 그걸, 마귀가, 조상숭배 했다는, 조상에게 뭔가 정성을 다했다는 거예요. 정성을 다 했을 때 정성 덕분에 기분상 뭔가, 두려움도... 조상님께서 뭔가 봐주겠지,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예수 믿는 며느리 들어갔는데, 교회 가지마라 하는데, 교회 가지마라 고 말렸던 며느리 때문에 사업이 잘되고 불치병 앓은 시아버지 병이 낫고 하면, ‘야..네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있구나,’ 하잖아요. 그래, ‘네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있구나,’ 해도 문제예요. 그것도 신앙 아닙니다. 잘됐구나, 한다는 말 자체가 여전히 주님이 보는 세상관이 아니고, 여전히 못 되었을 경우에는 교회 못 가게 한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두려움이 있는 거예요.
나 있는 자리가 마귀 자리라는 생각은 않고, ‘나를 괜찮게 해주는 신이라면 섬길 용의가 있다!‘ 자기 자리를 포기 못한다는 것은 교회 가서 잘되어도 마찬가지로 그 자리는 마귀자리예요. 그래서 오늘 날 교회는 마귀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겁니다. 악마가 돼지 잡아줘가지고 교회 세워주면 되겠네요. 가만 생각하니, 말이 괜찮은 말이네요. 구약 성경에 나옵니다. 악마의 터 위에!! 산당! <더러운 우상 숭배 터> 위에 예루살렘에 세워지는 거예요.그러니까 계속 망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거기 계시지 않고. ‘여러분, 우리 교회 짓고 집안 다 망합시다. 이런 사람은 없잖아요. <돈 내서 교회 잘 지으면 집안 잘 되게 해 주십니다> <ㅡ 목사님 농담
그렇다면 어려운 거 다시 해봅시다.오늘 어려운 거해서 죄송합니다만, 먼저 어려운 거 해 드리고 나가겠습니다.마귀자리에 있는 인간을, 마태복음에서(12장28절)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이제 않습니다.가구를 빼내듯이 하는 거예요. 가구가 우리를, 악마가 쥐고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서 우리를 가구 빼가듯이 빼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할 때 마귀 자리를 나의 자리로 바꿔주잖아요.이게 마귀 자리거든? 이거는 내 자리, 이러거든요?두 개의 안목을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예수님이 보는 새롭게 보는 이 자리를 마귀 자리로 봤던 자리를 성령께서 오면 그대로 인수받게 되지요.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있는 자리는 뭐도 알고 뭐도 안다? 마귀 자리가 어떤 것인 줄을 알고 그리고 주님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아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만약에 하나 물어봅시다. 마귀 자리가 없으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일이 없지요. 그렇잖아요, 지옥 갈 사람이 없으면 천국 갈 사람도 없습니다.시소 알지요? 시소가 공중에 뜨려면 어떻게 뜹니까, 누가 반대편에서 눌러줘야 뜨잖아요.누가 지옥 가는 그 힘으로 우리는 천국으로 튕기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 가잖아요? 누가 하나 지옥 갔어요. 공짜 없습니다. 지옥 가 줌으로써 튕겨 나오는 거예요. 인간은 상상도 못할 아이디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등장하면 졸지에 뭐가 생긴다? 멸망 받을 자가 생기고, 보조 맞춰서 누가 생긴다?부름 받은 사람 하나가 생기는 거예요.멸망 받은 자와 부름 받은 자 둘 외에는 없어요.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 태어난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한쪽은 멸망 받아야 되고, 한 쪽은 부름 받아야 되고. 두 종류니까 세상 사람들 수십억 되어도 그걸 다 제거 해버리고 단 두 사람만 남겨둡시다. 두 사람만 남겨둔다는 말이 창세기 4장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잖아요.
두 사람 맞잖아요, 두 사람... 창세기4장에 나옵니다. 누굽니까, 가인과 아벨밖에 없어요.가인이냐 아벨이냐 둘 밖에 없어요. 서로가 서로를 정하는 겁니다. ‘네가 있으면 내 신분이 결정됐고, 내가 있으면 네 운명이 결정된 거예요. “너 지옥가나? 감사합니다, 나 천국갈게요.” 이런 뜻이다 이말이지요.어떤 목사가 이런 소리 하면 우리가 구원 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비율이 5:5라는 뜻은 아니에요. 예,; 노아 홍수 때 인구수가 몇 백만 되어도 갈 사람은 몇 명입니까. 8명이예요. ‘0.000001퍼센트도 안 되요 이건. 하지만, 두 종류의 숫자가 문제가 아니에요.
파리가 구더기 천만마리 낳는다 해서 그 중에 인간이 태어나는 건 아니잖아요.구더기가 새끼 까도 구더기고, 구더기 많은데 구더기 무시하지 말자, 이런 거 없어요.백날 까봐야, ‘여기 구더기 있네,’ 하지 ‘구더기님 계시네, 이런 소리 않잖아요.’^^그러나 사람은 달랑 세 사람 있어도 무시 못 하잖아요.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예수님 십자가 다릴 때 양쪽에 십자가 몇 개 였습니까. 두 개지요.그런데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이 막대자석의 최종 속성이잖아요.두 강도가 다 지옥 갔습니까?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한 쪽은 낙원에 가고 한 쪽은 지옥에 갔잖아요. 결국 십자가 전경, 그 사건은 인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드라마의 진수, 모든 창세전의 계획,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옆에 있는 강도를 구원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그만한 권한이 있고, 내 죄 사하는 권세를 나는 가졌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그냥 배치물로 필요해서 서로 다른 길을 가야 될 피조물 둘이 한 짝, 세트를 이뤘어요. 셋 세트가 된 거지요. 햄버거, 콜라, 감자 튀김처럼요.^^
햄버거 종합세트처럼 짝이 맞춰져야 되요. 예수님과 우리하고 지옥 가는 사람들.(짝, 찾으세요, 지옥 가는 사람 찾아봅시다)(나 천국 보내기 위해서 지옥 갈 사람들 ㅜㅜ)(찾아보세요, 많이 있을 겁니다.)다들 많이 갖고 있어요. 숫자를 따지지 말고. 그런류의 사람들 있을 겁니다.(고맙다고 악수하세요.ㅋ ㅋ ㅋ)
가룟유다가 없으면 예수님이 올라가지를 않아요. 가룟유다가 마귀 아닙니까, 가룟유다 도움으로 예수님이 튕겨 올라가는 거예요. 마귀가 예수님을 팔아먹어야 됩니다.
우리의 자리, 우리의 자리가 바로 예수님을 파는 자리지요.어제 서경수 목사님 잘 지적했듯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예수님 죽으신 것이 죄인으로 죽은 겁니다. 의인으로 죽은 겁니다.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하지만, 본인은 죄 없고, 하나님은 죄 있다하고,그 죄는 어디서 올라오고 어디서 맡은 거예요? 구원 받을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죄를 졌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첨에는 깨끗하게 했는데 어쩌다보니 죄를 지어가지고 죄 짓고 난 뒤에어쩌다보니 죄지어 가지고, 죄짓고 난 뒤에 ‘에구~ 용서해줘야 되겠구나’ 해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줄까, 내가 대신 돌아가실게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중간에 모의해가지고 계획 잡아서 하지는 않았다 말이지요.
첨부터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죄지어야 될 사람들이 첨부터 작정해 태어나야 했어요.그러니까 침례교와 같은 경우에는 잘못된 거지요.예수님이 좋은 분인데 우리가 죄지으니까, 우리를 용서해주기 위해 좋은 분이 아니고, 첨부터 예수님은 피 흘려서, 자신의 피 흘려야 주가 되요, 피 안 흘리면 주가 안 되기 때문에주 되심을 위해서 피를 흘려야 되고, 피 흘리기 위해서는 피 흘리게끔 죄가 죄지은 인간들이 세트로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신학은 예수님의 피를 예정했다고 보지 않고 그냥 예수님이 예정 되었다 이래요. 피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존재 중심인 거지요.존재 중심인 것 같으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이 될 뿐이죠, 모델...맨날 모델 해보세요. 예수님을 오해하죠. 안보니까 자기 맘대로 상상하죠, 실제로는 예수님 피 얘기 한 사람을 핍박해놓고 자기는 예수님을 대게 사랑한다고 해요.소자한테 잘못한 것이 곧 나에게 잘못한 것인데 예수님의 피 복음을 증거한 사람을 그렇게 미워해놓고 자기는 주여, 주여, 하고 있다고요. 무슨 주가 그런 주가...ㅋ ㅋ 주님의 말씀은 거부하고 무슨 엉뚱한 주를 제조해가지고 섬겨요, 그런 우상을 섬기면서... 자기 과신이죠.
다시 한번 첨부터 해봅시다.예수그리스도께서, 첨부터 죄인으로서 죽어야만 주가 되심을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의인이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요인도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어요. 따라서, 죄인이 등장해야 되고, 등장된 죄인을 위해서 피를 흘려 줄 때 비로소, 주께서 ‘다 이루었다’가 되는거에요. 예수님이 세 살 때 다 이루었다가 아닙니다.일곱 살 때 다 이루었다가 아닙니다.성전이 우리 아버지 집이다, 할 때 다 이룬 게 아니에요.물 흐려놓고 다 이룬 게 아닙니다. 병 고쳐놓고 다 이룬 게 아니에요.병 고쳐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 이초석이나 요새 은사주의 그 사람들이 맞는 말이에요.그 사람들에게 기적을 원하면 물 흐려 보라하세요.물 흐린 거 심하다 싶으면 독사 한 백 마리 그들 집에 다 풀어보세요.백군데 물려가지고 퉁퉁 부어가지고 한번 있어 봐요,독을 물릴지라도 해를 입지 않은지 한번 해보란 말이지요.
십자가가 뭐냐 하며는요, 네가 죽어도 사는 이유가 ‘너는 원래 죽은 몸이거든? 살았는데 뱀 물려갖고 죽어서, 죽어서 낫는 게 아니고 원래 죽은 놈이 죽어가지고 죽어가는 거예요. 뱀 물려 죽든 뭐에 죽든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살려낸다는 겁니다.‘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살려내는 거예요.
산다는 기준은 천국 기준이어야지 이 땅에서 산다는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그거는악마에 자리에 있을 때, 우리가 죽기 싫어할 때, 우리가 망상에 사로 잡혀서 죽고 살고 하던 그 시절이고, 성령 받았던 예수님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성령 받을 즈음에 알았던 모든 것이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지게 되면, ‘아하,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지금 죽은 거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지금 죽어도 사는구나!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과장이나 오버한 게 아니고, 이게 실재구나 실재, 라는 것을 느끼죠.
네가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는 거... 잠잘 수는 있어요, 잠잘 수는...오랫동안... 무덤 속에서 잠잘 수는 있고 화장되어 잠잘 수는 있는데, 죽는 일은 없다 이 말이지요. 왜냐면, 산자의 하나님, 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손대서 죽은 자가 없다, 이 말이거든요.
살아있는 하나님이니까, 살아있는 하나님이 손대면 이 물도 살아버려요. 여러분 물이 산다니까 이상한가요? 여러분, 물보다 해골이 살기 힘들어요. 해골도 살면...인간이야 75퍼센트가 물이니까.항상 성경을 해석할 때 내적을 가미해버리니까 예수님을 이용하려 하는 거예요.‘이케요? 저케요?’ 참하게 믿어보려고. 참하게 믿는 것은 필요 없습니다.성령이 오게 되면, 참하게 믿든 안 믿든간에, 성령이 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 받은 거예요. 주님이 관리하기 때문에요.
그러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는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되는가? 방금 얘기 했습니다.예수 안에서 살게 된다. 예수 안에서 살게 된다, 그 말은 뭐냐, 가만있는 것이냐.인간은 가만 못 있다했죠? 어떤 변화가 일어나죠? 그 변화를 가지고 뭐라하냐면 23절에 봅시다, “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우리에게 예수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변화하는데, 그 변화 자체를 뭐라 하냐면, 그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놀이동산에 보면 빙빙 도는 타는 거 있죠, 그거 고정되어 있습니까, 변화됩니까? 변화되지요? 미국 갔다, 한국 가면 변화됐잖아요. 변화돼도 주님은 한결 같죠.
이게 바로, 예수 믿고 난 뒤에 뭐 할 거냐, 주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은 줄이 “어디를 가도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이 관계가 안 끊어짐을 아느냐, 이말입니다. 이미 주신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이 사랑인 것이네가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