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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0안산/안산100813요일4장3절a.b.자유게시판요한일서

2010안산/안산100813요일4장3절a.b.

이름 : 박온정(IP:118.218.50.71)

100813 요일 4:3

신학강의/2010안산/안산100813요일4장3절a.

요한일서 4장3절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요한일서 4장입니다. 요한일서 4장...

요한일서 4장에 보면, 4장3절,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내가 4장 3절 한 문장을 읽었거든요? 한 문장을 읽었는데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용어 예수, 그 다음에 영, 하나님, 그리고 적그리스도, ‘이게 신문지상에 나오는 단어입니까? 신문지상에 안 나오죠, 방송에 안 나오잖아요.’

이걸 우리가 보통 쓰는 용어를 이미 경험한 것에서 나왔다고 보는 겁니다. 경험론적이라고 보는데 철학에서는. 경험되는 것이, 경험된 것이 하나의 단어가 되는 겁니다. 경험 된 것이 단어가 되기 때문에 경험되지 않는 것은 단어로서는 가치가 없는 겁니다. 가치가 없다는 말은 우리 인간 세계에서 ‘입 떼지 마라, ’거기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마, ‘너도 경험하고 나도 경험하고 다 같이 경험한 것만 우리 이야기 해, 라는 이것이 보편적인 상식에 해당됩니다. 이게 맞는 이야기처럼 들리곤 하지요? 여기에 의자라든지 마이크, 국가, 사랑, 그리고 축구, 이런 것은 어떻게 됩니까. ’전부 다 우리가 경험한 거잖아요. 그리고 미움 이런 것도 경험한 거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되는데 방금 제가 읽었던 요한일서 4장 3절은 뭐냐 하면 적그리스도, 영, 하나님, 예수, 지금 예수가 어느 동네에 사십니까? 어느 동네에 안 살잖아요. 이것도 경험될 수 없잖아요. 결국 이것은 성경이라는 것으로서 이렇게 요한일서 4장 3절에서 해 놓아도 우리가 받아들이기는 경험적인 단어로 이걸 바꾸어서 이야기 하면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은 반칙이 되는 겁니다. 이 사회에서. ‘성경 이야기 요한일서 4장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라고 구박을 주고 나무라고, 책망하고 그런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시간에 요한일서 4장 3절 같은 것은 요즘 교회에서는 반칙이 되지요.

당회장 목사가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해서 어쩌고저쩌고 이웃사랑에 대해서 선교라는, 교회 부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철딱서니 없는 부교역자가 요한일서 4장3절을 하면서 적그리스도가 어떻고 영이 어떻고 하면 ‘저 목사는 안 되겠다, 저 목사는 목회 끝났다. 일반 사람들이 경험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곳 이야기를 하니까 ’저 사람은 끝났어. 그 대신 여러분 이웃사랑 하시면 사람들이 ‘사랑’이라면 경험되니까, 이웃사랑 하시면 교회가 하는 것이 이웃사랑이니까 도와주시면 교회로 옵니다.

이러면 이게 설교 값을 하고 설교하게 되는데 적그리스도 어떻고 여러분 올바른 영을 아십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우리와 이야기하지 말자, 이야기를 뚝 끊어버립니다. 성경 자체가 오늘 이 시대에 위기입니다. 성경 자체를 이 시대가 밀어 내친다는 것에서 성경이 위기고 성경을 보고도 모른 척 할까 싶어서 위기고, 세상이 성경을 밀어냄으로 말미암아 세상 자체가 드디어 자기의 본색을 들통냈다. 는 점에서 이 세상은 멸망 직전에 위기고 그런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깁니다. 성경 이야기 하지 말자는 그것 자체가 위기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에서 경험된 이야기는 뭐냐, 그냥 교회에서 경험되는 것은 그냥 교회죠 교회. 교회를 분리해 보면 일단 부동산이 있어야 되요, 토지가 있어야 되고, 건물이 있어야 되고, 간판이 있어야 되고, 간판이라는 것은 프랜차이즈 어느 노회에 속했는가, ‘예를 들면 맥시카나냐, 처갓집 통닭이냐 뭐,‘그런 거예요,’ 어느 프랜차이즈를 사용하고 있느냐 커피도 있죠, 커피 말고 롯데리아냐 아니면 딴 거 뭐냐, 프랜차이즈 CGV냐 이런 거 나오듯이 간판, 부동산 있어야 되고, 토지 있어야 되고, 건물 있어야 되고, 시설 있어야 되고 교인 있어야 되고 그러면 설교는 뭡니까. 부동산은 경험 된 거죠? 건물 경험 된 거죠? 간판 경험 된 거죠? 시설, 교인 다 경험 된 거죠. 경험 된 것을 설교하면 그것을 설교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모이면 그게 바로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적그리스도가 어떠니 영이 어떠니, 그 이야기를 왜 하냐 이 말이죠. 사도 요한을 이 자리에 세워 놓으면요, 교회 강단에 세워 놓으면 그 교회 끝난 거예요. 100명 나오다 한 달 지나면 댓명 나오고, 대여섯 명 나오는 것도 복음 좋아서 찾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자기 이름으로 하려고 이것 노리고 남아 있는 거예요. 마지막 장로는 내가 돈 제일 많이 냈다 해서, 교회 차지해 노래방으로 전환 시키려고, 교회가 없으면 노래방 전환 되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성경 말씀이 체험되지 않는다면 백날 그 단어를 외우고 남발해봐야 그것은 하나님께 먹히지 않습니다. 자기 구원에 도움도 안 되고 먹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위험해요. 교회가 아주 위험한 곳이에요. 교회 안 다니고 집에서 성경 보면 이것이 실제 그렇다 하고 성경만 쳐다 볼 건데 막상 성경만 보다가 교회 가게 되면 성경 이야기 안 나오고 부동산, 건물, 간판, 시설 교회, 토지 이런 거 나오니까 성경이야기 이걸 몰라도 구원 받는 거구나, 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 거예요. 제가 오다 보니까 ‘교회가 축복의 통로입니다’라는 팻말을 해 놨어요. ‘교회가 축복의 통롭니다’

그러면 축복은 뭡니까. 성경의 축복은 순교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교회가 돈을 버는 것이 축복이에요. 가난한 동네 부곡동에, 돈을 버는 게 축복이에요. 교회가 한두 군데 아니니까, 교회가 경쟁해야 되니까. 맞은편도 교회고 여기도 교회가 있으니까, 여기다 돈 좀 들여 ‘교회는 축복의 방주입니다’ 갖다 붙여 보세요. 돈 몇 만원 들여서 붙여 보라 말이지요. 손들고 온다 말입니다. 왜 오겠어요. ‘적그리스도의 영을 주의 하라’ 이러면 안 온다 그 말이지요. 사람들이 교회를 왜 오겠어요. 진짜 믿는 사람은 교회 가면 정말 위험하고 점점 더 주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고 십자가 복음과 멀어져 나중에는 이런 식대로 따라가면 구원 되리라고 여겼던 그 자체가 이미 엄청난 낭떠러지에 떨어진 거지요.

그렇지 않고 이런 성경 내용을 모르고 그냥 교회 가서 복 받으라는 사람한테는 역시 성경 이야기 하면 또 그들이 못 알아듣고 이쪽이 하면 못 알아듣고 저쪽 이야기도 못 알아듣고.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성경말씀은 교회 생활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요. 교회 생활 열심히 하고 충성하는 거지 결코 신앙생활에 대체할 수 없고 그냥 단순하게 성경말씀의 단어 하나하나가 나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속의 이것이, 내 속의 말씀이 살아 움직여야 됩니다. ‘며칠 전 수요일에 설교할 때 얘기 했거든요, 사람 속에는 두 가지의 샘물이 있다. 하나는 계속 샘이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계속 샘물이, 영생수가 나오는 그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건 고장 나지 않은 분수지요. 그런데 연못 폼은 있는데 샘물이 고여서 썩었어요. 십년 전에 은혜 받은 거 그대로 갖고 있는 거예요. 이게 오줌인지 분수인지 분간 안 되는 더러운 물을 온갖 기생충 다 끓는 그 더러운 물로 해놓고, 샘솟지 않은 물이라고 해 놓고, 남들 앞에서는 십년 전에 기도원에서 은혜 받았다고 맨날 그것만 자랑하는 거예요.

오늘 샘솟는 거 내놔보라 하면 없어요. 관이 고장 났어요. 수도관이 벌써 단수돼가지고 고장나버린 거예요. 물이 솟구쳐 올라와야 되는데 생수는 안 올라오고 옛날 추억만 댑다 자랑하는, 그런 것은 참 위험하지요. 그래서 제가 강의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로 이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은 거예요. 성경 말씀은 이게 성경 문자로만 그냥 굳어 있어서는 안 되고, 옛날 신화에 펄펄 나오는 요정처럼 요정이 춤추면서 하얀 날개 치듯 날아가지고, 우리에게 진솔하게 그대로 성경말씀을 전해 줄 때, 그것이 위험하지 않는 신자입니다.

그러면 신학자들은 어떠냐, 신학자들은, 신학자들이야기를 하는데 참고로 다음 계획은요, 다음 겨울 수련회를 <70이레에 관한 논문>을 풀이하는데 아홉 시간 열 시간을 보낼 셈이에요. 다음 수련회 때 마음은 70이레가 어렵고 오해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70이레 논문 쓸 때 그 안에 담겨 있는 사상과 그게 뭐냐를 풀이하고 싶어요. 그때 이야기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신학, 대표적인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왜 개혁주의 신학이 모든 신학의 대표적인가 하면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것은 미완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신학으로 완료 되었습니다,가 아니라 아주 겸손해 보이는, 정말 겸손하게도 ‘우리 신학은 계속해서 추가적인 정보를 환영합니다. 더 연구하신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현재 있는 신학에다 더 보태서 더 새로운 것을 보태시면 완벽에 더 완벽을 기하는 멋진 세상이 됩니다. 우리는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는 게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상당히 겸손해 보이지요?.

하지만 성경을 조금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신학이냐 이게 바로 바리새인 신학이다, 누적된 것에 쌓아서 더 완전을 기하는 겁니다. 누적에다가 누적된 것에. 수천 년 전에 내려오면서 쌓였던 것에 인간의 지혜에 지혜를 더해서 완벽을 기하면 하나님도 뿅 간다. 메시아도 와도 뿅 갈거다, 라고 했던 신학이 서기관과 율법사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들의 일치된 견해였습니다. 약간 강조점은 다르지만 일치된 견해였어요. ‘전통을 무시하지 마라,’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네 속에서 더 더러운 것이 난다, ’네 속에서’ ‘네 속에서’ 성경말씀을 체험이라고 하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해골이라고 했어요. 해골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이 말씀이 진짜 요정이란 사람과 해골이란 사람과 예쁜 천국 지팡이 하나 들고 공중부양 하면서 ‘성경은 해골입니다. 성경은 해골입니다, 저는 사라집니다.’ 하고 저 뒤에 사라질 때, 사라지고 난 뒤에 케이블 티브이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하는 거 볼 때 우리는 뭘로 봐야되요,

‘서울 해골 선, 미스 해골로 봐야 되요, 비키니는 비키니 해골이고 드레스면 드레스 해골이라야 되요. 그거 한 2초갑니다. 2초 지나고 나면 ‘부러워라, 아이고 부러워라 어떻게 저 살을 뺏을까, 세상에 똥배도 하나도 없이 어떻게 몸관리를 했으면, 어느 미장원에서 관리해서 저리 되나 부러워 미쳐요. 요정이 날아와서 예수님 하신 말씀에 ’인간은 해골이라‘고 한 것을 깜박 잊어버렸어요.

제복을 입었다. 군인이나 경찰 이런 제복, 공무원이 제복을 입었으면 옷이 그 사람의 힘을 말해 주거든요. 그런데 요정이란 사람이 ’인간은 해골이다‘ 하면 그 사람은 뭡니까, 제복 속에 있는 해골. 동시에 ’제복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입니다. 대통령이라는 것은 하나의 해골이에요. 하나님께서 세워준 청와대에 박아 놓은 해골이에요.

KBS, MBC 아나운서는 앵커 하라고 박아 놓은 해골이에요. 의미 없는 거에요. 그런데 개혁주의 신학은 그렇게 보면 안 되고, 그걸 뭐라하냐면 신화를 뭔가로 바꿔요. 역사로 바꿔요, 역사로 바꾸어서 역사에 찬란한 역사적 유산을 이어 받자, 이어 받았어요. 역사적 찬란한 유산을 이어 받자, 이렇게 나와요. 개혁주의 신학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아까 말한 요정이야기도 신화거든요? 사실은 요정이겠습니까 성령이겠지요.

그런데 성령을 쉽게 한다는 게 요정이라고 했고 그 신화를 뭘로 바꿔야 이해된다? 역사로 바꿔야 이해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찬란한 역사 위에서 자아를 구축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이해가 되려면 모든 성경을 뭘로 바꿔야 된다고 생각한 겁니까? 역사의 업적으로 바꿔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역사의 업적으로! 그러면 뭘 긍정하느냐, 역사를 긍정해야 되요. 역사를 긍정한다는 건 역사의 주체를 긍정하는 겁니다. 만약에 십자가 마을의 오랜 역사에 포함되는데 도대체 십자가마을의 주체가 누구야, 아, 영광스러워라. 이렇게 되어야 십자가마을이 유지된다는 거예요.

어떤 교회에서 우리교회에 이만큼 교인 숫자가 많아진 것은 누구야, 누가 그렇게 했어. 그분은 영웅이 되야 되죠. 아까 이야기한, 요정이란 사람이 와서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우리를 해골이라고 규정한 성경말씀을 완전히 신화 취급하고 무시해버려요. 그러니까, 항상 집안 잘 될 때, 뭔가 일이 잘 될 때 주의해야 됩니다. 우리는 뭐가 잘 됐다 하면 우리는 그것을 역사화 시킬 만만의 마음 준비가 되어 있어요. 역사! 아 주께서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구나. 그러면 이 가치를 낼까지 끌어 가볼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시냐면 오늘의 오늘치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내일치 내일의 나는 내일분의 나를 하나님께서 또 만드세요.

‘오늘밤 네 영혼 데려가면 그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이 말씀이 나오고 그 다음에 또 요정이 나와서 뭐라 하냐면 ’하루 염려는 그날 할 것이고 내일 염려는 미리 땡겨서 하지 마라 이 건방진 놈아! 내일 네가 있을지 없을지 네가 모른 주제에 네가 만약 어떤 동질성을 유지해 가지고 오늘의 네가 낼까지 간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어제 살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어제 살았던 것은 어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나고, 오늘은 어제의 나와 달라요. 오늘의 나는 하나님이 이 꼬라지로 만드신 거예요.

죄송하지만 하루치 늙었습니다. 세포가 하루치 늙었어요. 온 천지가 늙어갑니다. 모레 되면 또 하루치 늙어요. 노인들이 사진 찍기 싫어하는 이유를 여러분이 아셔야 됩니다. 분명히 자기는 어제하고 오늘은 달라졌다 다르다. 작년과 올해가 다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누가 사진을 찍어 보여주니까, 어떤 영감쟁이가 떡 앉아 있어요. 어, 웬 영감쟁이야, 자기는 아직도 30대 그 인상을 지울 길이 없어요. 왜? 동질성이에요, 동질성. 동질성을 유지해 왔으니까요. 그래서 주민등록 사진을 못 바꿔요. 너무 겁나가지고. 너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80넘으면 사진 찍지 마라 제발, 사진 찍지 마라, 해골밖에 안 남은 걸 왜 찍냐! 이제 80넘어서 성경에서 말씀한 해골! 이렇게 나와요.

부부간에 서로 사랑해 보려는 것은 바로, 과거에 ‘네가 날 처음 사랑했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지금까지 유효하게 인정해 달라, 그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그건 무리한 요구죠. 왜냐하면 과거에 사랑했던 사랑은 내가 아니고 그때의 나였고. 지금의 나는 또 다른 주께서 만들어준 또 나기 때문에 과거를 근거로 해서 이렇게 되느냐 하고 책임감 물으면 안돼요.

이 강의 하면서 첫 번째 중요한 것은, 이런 이야기는 늘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제발 무책임하세요! 제발 무책임하세요! 무책임해야 마귀의 시험이 안 듭니다. 제발 자기 인생에 대해서 또 남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마세요. 이것 책임지면 마귀에게 발목 잡힙니다. 왜 무책임해야 된다고 하냐면, 책임지는 분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지는 분이 따로 있는데 왜 건방지게 지가 왜 지 인생을 책임집니까.’ ‘아이고,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 아내로서 최소한 이건 책임져야지, 그러지 마세요. 예, 빨리 고치세요. 마귀시험에 지옥 갈라 하면 그따위 사고방식 가져요 지옥가려면. 주님께서 나를 구원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는 나 혼자 자립할 수 있으니까 스스로 내 인생을 살겠다, 이게 바로 마귀의 시험입니다.

주께서 진짜 성령 받으면 요정 오고 성령 받으면, 하루하루 도대체 내가 책임질 구석은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요. 그냥 그걸 가지고 맡긴다는 거예요. 맡긴다, 이게 믿음입니다. 이번에 수련회할 때 아브라함 언약이 뭐라 했습니까. 그냥 난데없이 덮치는 거예요. 덮치니까 아브라함은 덮친대로 살고, ‘덮쳤으니까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이게 믿음이에요. 이 믿음으로 의인돼요, 구원 받는 겁니다. 제발, 무책임! 이름 지을 때 김무책임, 박무책임, 이 무책임. 이런 무책임한 이름을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낳고 이름을 뭐라 했습니까. 이삭이죠. 그 뜻이 무책임이었어요. 웃음이거든요. 농담이예요 농담. 일체의 이삭의 아버지나 엄마로서는 내가 책임질게 있다 없다? 일체 없는 거예요 이거는. 왜 약속의 자녀는 약속이 책임지지 우리가 책임지지 않는 거예요. 이게, 오늘 강의 핵심이 되는 겁니다. 여기 성경에 나온 요한일서 4장3절의 핵심은 ‘언약’이예요 언약. 언약으로 책임질 문제라는 겁니다. 언약을...

언약인데 인간들은 자기가 신화에서 뭐로 바꾼다고 했습니까? 한번 주고받고 합시다. 기억나도록. 신화에서 인간은 자꾸 뭘 바꾼다고요? 역사를 바꾸죠. 성경을 볼 때 이 단어가 하나님의 영적 단언데 우리는 이걸 뭘로 보냐면 하나님 이거 알아서 나의 역사가 얼마나 찬란한, 남들 보기에 책임감 있는, 찬란한 신사답고 숙녀다운, 훌륭한 인격자로서 책임성 있는 그런 역사적인 인물이 되겠습니까, 라는 의도를 은근히 품고 보게 되는 거예요.

적그리스도, 주여 저는 적그리스도를 안 믿습니다, 라는 식으로. 그거 안 믿었으면 뭐할 건데, 안 믿어서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따라가지 않아 누가 좋은데, 본인이 좋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신화를 신화 자체를 믿어지는 게 아니고 자꾸 역사로 번역해서 반칙을 저질러 가면서 이런 식으로 자기 유리한 쪽으로, 역시 나라는 이스라엘 역사는 남들보다 뛰어난 역사를 가졌다. 나는 훌륭한 세월을 보냈다. 나는 역시 훌륭해, 라는 생각을 갖고 싶어서 아주 그런 얍삽한 짓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해석의 방법은, 당신은 신화에서 역사를 끊어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신화로 보이는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언약성취로! 언약은 지금도 안 죽었다 이 말입니다. 언약도 지금 살아있다 이 말이죠? ‘인간아 너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언약대로 일해!’ 자꾸 네 눈에는 네가 노동하는 것 밖에 안보이지! 내가 일한다, 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헤겔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습니다. 헤겔이란 사람이 철학자인데 갑자기 헤겔이라는 철학자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이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이것을 어떻게 역사화 시킬 수 있는가 아이디어를 끄집어 낸 사람입니다.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어떤 신학도 칸트, 헤겔 이정도 되면 어떤 신학자도 그 사람의 범위를 못 벗어나요. 너무나 뛰어난 철학자기 때문에요. 하나님의 뜻을 인간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헤겔, 칸트한테 물어라 말이죠. 시시하게 신학 좋아하지 말고 신학 해봐야 그 수준 그 낮은 수준밖에 안되니까. 그 정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다시 할게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역사화 시켜서 인간들이 감 잡을 수 있는, 인간들이 경험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뜻으로 우리가 잡아낼 수 있느냐를 연구한 사람이 헤겔이다, 그 철학이 칸트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서양철학이 단순히 서양철학이 아닙니다. 동양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인간이 인간답게 버틸 수 있느냐,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 그겁니다.

자,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연구를 해보니까 문제점이 등장했어요. 뭐냐하면, 인간의 ‘나’ 인간의 자아라는 것이 반듯이 비자아를 염두에 두고 자아로 되돌아오더라,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제가 말 하니까 상당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요? 그러면 쉽게 하기 위해서 단어 하나 집어넣겠습니다. 경계가 없으면 개체도 없다. 이건 약간 이해되시겠습니까. ‘경계 없으면’...

여기 바나나 우유가 있는데, 이것은 옥수수 수염차예요. 이게 섞여 있으면 는 바나나인지 구분 안 되죠. 여기에 통이 있으면 통으로 구분 지으니깐 여기서 여기까지는 바나나우유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옥수수 수염차지요. 이 사이를 뭐라 하냐면 ‘경계’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사물에만, 물건에만 경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뛰어난 천재지요? 인간이 남을 볼 때도 저 사람 것은 여기까지, 이 사람은 여기까지, 라고 경계가 있을 때만 ‘나’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몸만 두고 하는 게 아닙니다. 몸이야 쉽지요. 저 사람의 영향력은 여기까지, 나의 영향력은 여기까지 경계 칠 때 나는 ‘나’로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쉬운 예로, 교회를 예를 들어봅시다. 교회서 목사가 헌금하라 해서 주의 사람, 주의 종 말을 안 들으면 지옥 간 줄 알고 헌금했다 말입니다. 십일조하래서 십일조 해, 감사하면 감사헌금 해,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심방 와서 하는 말이, ‘이번에 교회 건축, 교회 교육관 짓는데 이번에 목돈 내 놓으세요, 하니까 처음엔 목사 시키는대로 할 때는 나란 게 없어요, 왜냐면 나의, 나는 누구의 그림자가 덮었냐면, 목사의 그림자가, 목사의 카리스마 그림자가 이미 나를 덮었기 때문에 저쪽에서 내라하면 다 내는 거예요. 예, 군말 없고, 내는 게 주의 뜻인 줄 알고. 그런데 내다보니까, 뭔가 모르게 이거는 너무 심했다 생각이 들지요. 그게 뭐냐. 그게 뭡니까, ’경계... 당신은 십일조, 감사헌금까지만 경계 긋고, 그다음에 교육관 짓는데 돈을 내고 안내고는 내가 알아서 한다, 할 때 그때 뭐가 발생된다, 자아가 발생된다, 라고 헤겔이 얘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제가 아까 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데 중요한 건 못집어 내는데, 하나님의 뜻 하면, 순종! 우리는 무조건 순종! 하잖아요. 그런데 어디까지 순종할 겁니까. 예? 어디까지. 온유 하라! 순종. 이웃사랑 하라! 순종하지요. ‘천하 자식이라도 나보다 사랑하지 마라, 그거 순종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아비가 죽었는데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례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장례식 치르지 마라,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는 거예요. 이웃에게 도와줘라, 그건 되지요. 이웃을 위해 네 목숨을 바쳐라, 그거는 곤란하다 말이죠. ‘네 신장하나 떼줘라, 이건 해요. 오기 있는 사람은 한다고! 예? 그게 아니고 저사람 살리기 위해서 너 죽어! 이건 안된다 말이죠. 왜, 그때 ‘경계...’ 자아가 발생된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사람은 주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순종 안되는 거예요. 그걸 헤겔이 발견한 겁니다. 역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자아를 생각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뜻은 날아가 버렸다, 끝났다. 자아의 자기만의 영역이 있는 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얘기했잖아요, 사람이 어떤 말씀을 지킬 때, 자기한테 유리하냐 불리하냐 따져보고 지킨다는 거죠. ‘그게 무슨 지키는 겁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 지킬 때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이번 수련회할 때 초반에 그렇게 얘기했거든요. 레위기를 펴 놓고 ’하나님, 레위기 이제 우리 공부합니다. 공부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말씀대로 지키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자, 어떤 말씀인가 하면, 주님께서 이래요, ‘놀고 있네, 놀고 있네. ‘어이, 레위기 지킬래? ’예, 지키겠습니다. 주님 옆에 있다가 ‘레위기 내가 지킬 건데 내가 지킬 건데 네가 왜 지켜 이걸. 내가 이야기 했지요, ’아브라함 언약’이 뭡니까. 지킬 법이 없죠, 지킬 게 없는데 레위기 법 줬잖아요. 지킬 법이 없으면 안 지키면 되는데. 왜 지킬 법이 없다 해놓고 왜 레위기를 주느냐, 이말이죠.

‘그걸 내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 시간에 목 쉴뻔 했어요. 막 세게 했는데, ’그 해답이 풀렸습니까?, 듣고 보니 또 다 잊어버렸죠. 그렇게 질문하니까, 해답이 뭐더라?

아브라함의 특징은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너는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해 너는 종이다,는 거지요. 우리는 아브라함 언약에 나타날 그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 주가 되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똘마니로 일찌감치 뽑힌 사람이에요. ‘나라를 위해서 군인을 뽑지, 군이 쫄병 섬기기 위해서 군대 오라 하지는 않잖아요. ‘군에 가는 이유가 뭡니까. ’네는 나라에 대해서 쫄따구 되라고, 소모품 되라고 군대 보내잖아요, 소모품. 훈련시켜가지고. 머리 다 깎아버리고 나라와 네 한 몸 바치라고 한 거 아닙니까.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의 나라, 우리는 주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뽑힌 군삽니다. 이스라엘은 군대예요. 군사예요, 영적 싸움을 하는 거예요.

그걸, 교회 와서, 복주는 통로라고, ‘복주세요! 우리 애가 아픈데 병 낫게... 어디 가게 점포 하나 생겨가지고 복주는 점포 하나, 점꽤 쳐주는 점집으로 여겨요, 교회가... 그게 아니고, 언약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하나의, 예수님만 주가 되시면 우리는 박수부대예요 박수부대. ‘여호사밧‘이라는 왕은요, 박수부대 해가지고 승리했어요. 성경에 나와요. 딴 거 물어볼 것도 없어요. 찬양대 하니까 적들이 물러갔습니다. 여리고성 갈 때 어떻게 싸웠습니까. 기관단총에다가 대포 동원해 돌았습니까? 뭐했습니까. 박수치면서 찬양하면서 노래 부르면서 돌았어요!, 여리고성에 있는 사람이 완전히 미쳤다고 봤어요. 예. 전쟁할거냐 노래방 놀러왔느냐, 놀러왔는지 전쟁하는지 분간이 안 되는 거예요.

그때 여리고성 맨 앞에 나팔 부는 사람이 양각나팔 불렀어요. 양각나팔은 수양 양각나팔은 언제 부냐, 우리가 레위기 할 때 나오긴 나왔는데 언급 안 했습니다만. 양각나팔은 언제 부르느냐면, 희년 때 불러요 희년. 예, 7곱하기7 +1, 7×7=49 +1, 오십년 때, 전부다 내가 처음에 배치한 제자리로 돌아 갓! 이거거든요. 뺏고 안 뺏고 없이,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값없이 은혜 줬던, 은혜의 긍휼 입었던 긍휼 입은 자리로 되돌아 갓! 이게 50년이에요. 그게 안식이에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없게 모든 사람 동등하게 각자 주어진 제자리로 돌아 갓! 하는 그게 50년입니다. 희년이에요. 이게 희년입니다. 갈 때 나팔 불어요, 나팔 ‘ 빰빠바~ 빰빠바~, 돌아가~ 돌아가~ 이 뜻이에요. 빰빠바~빰빠바~ 빨리 돌아가, 돌아가, 제자리 찾아 가, 이 뜻이에요.

희년은 이미 승리했어! 이미 승리했어, 다른 말로 하면 이미 구원되었어, 이미 구원의 자리를 각자 차고 있음! ‘극장에 가서 있죠, J- K-6번 있잖아요, ‘각자 자리 있잖아요. 예, ’고속버스에 각자 자리 있잖아요. 15번 17 있잖아요.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자기자리 확보했음! 하고 부르는 게 양각나팔 부는 겁니다. 희년!

그래서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책을 펴 놓으면, 이사야 딱, 펴 놓을 때 제목이 뭐냐면, 내가 희년의 나팔을 불러 왔다,는 그 대목에 책을 딱 펴 놓습니다. 바로 이 희년 나팔 불고 구원을 하기 위해서는 ’너희들 제자리로 다 돌아가, ’모든 사람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죄인의 자리로 되돌아 갓!, ’내가 그 죄인의 자리로 돌아간 사람에 한해서 내가 무상의 용서와 그리고 자비와 의롭게 해주겠다, 해서 주께서 희년을 펴 놓고 온 거예요.

희년이 왔으니 가난한 자가 복음을 얻고, 소위, 갇혔다는 것은( )돌려보내고 가난한 자는 구원을 받고, 이게 누가복음2장에 나왔죠? 누가복음 1장 끝에 보면 마리아 성경은 전부다 연관되어 있습니다. 연관되어 있는데 그 모든 연관된 것이, 인간의 ‘자아‘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그거는 용납이 안됩니다. 제가 헤겔 이야기를 한 것은 인간의 자아는 어떡한다, 성경말씀 지킨다, 못지킨다? 자아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경계‘를 짓기 때문에 못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몸에서 나온 ‘자아‘ 말고, 언약, 언약이 뭐냐하면 우리가 지키는 약속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지금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복음해도, 이걸 자꾸 지킨다고 헛짓 하는데, 언약은 몸입니다, 무슨 몸이냐 하면 마지막 아담, 누구예요? 예수님의 몸이 언약이에요. 그 몸은 누구의 몸에 비교하라고? 우리 몸과 비교하라고! 우리 몸에서 나온 자아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자아가, 어느 쪽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이루셨던 분이냐,를 보라는 거예요.

언약을 맞이하면, 무책임해져요! 우리가 무책임해진다니까요. 언약은 즐거움 가운데, 아주 기쁨 가운데 무책임해져버려요. ‘사람이 왜 그럴 수 있냐? ‘그럴 수 있어요.’양심이 있지,‘저 양심 없거든요?, ’양심 나 모르거든요? 마귀가, 양심이 남아있는 마귀를 자기 몸에 꿀 발라놓고 벌보고 날아오라는 것과 똑 같은 말이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벌이 꿀보고 오는데,

자기 의,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가, 역시 사람은 책임성 있게 살아야 해, 그래도 내가 이 사회에서 포지션이 있는데! 레벨이 있는데! 내가 그래도 인텔린데! 내가 뭐, 유지인데! ‘해골입니다!’ 유지고 뭐고 간에 해골이에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주께서 원하는 것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그렇게 책임성 강조하는 의인을 찾으러 온 게 아닙니다. ‘나중에 무책임성으로 가보면 나중에 알아요. 우리가 인생 하루하루 한 시간 버티는 것이,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내 책임감과 내 양심으로 버텨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주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빼앗겼을 때.’

지난 주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빼앗는 것이다!, 수련회에서 할 때요, 1, 2, 3번 할 때 보물을 하나님께 쌓아 두라, 어떻게 쌓아두냐, 1,2,3번 했지요? 결론은 정답이 뭐였습니까. ’그냥 쥐고 있어!, 이것이 정답이었잖아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바뀌어야 되요 인간 자체가. 인간 자체가 바뀌어야. ‘여기 있는 것을 교회 갖다 준다고 해서 주님께 바치는 게 아니에요.

현재 갖고 있는 것이, ‘내가 이 바나나우유를 갖고 있다, 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갖고 있더라도 내가 갖고 있는 나 자체가 누가 갖고 있다? 주님이 또 바나나우유를 갖고 있는 ’나 자체‘를 갖고 있어버리면 내가 바나나우유를 갖는다는 것은 의미 없이 주께서 이런 포즈를, 이런 포즈를 취하게 만들었다 이말이죠 포즈를.

만약에 재산이 한 이백억 된다면, 그것은 내가 이백억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백억 갖고 있으라는 포즈를 취한 거예요. 우리는 그 포즈가 부럽지만. ‘우리는 돈 2천원짜리 포즈하지만. 주님이 어떤 사람은 오백억짜리 포즈 취하라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병든 부모를 포즈로 취한 사람이 있고, 어떤 부모는 한 달에 생활비를 천만 원씩 줘가지고 ‘나는 너한테 보태주니까 즐겁다, 해가면서, 자식들 공납금 다 대주고 이런 부모도 있는 반면에, 어떤 부모든 간에 자기가 자기 소유로서 자랑할 게 못되, 우리 몸은 큰 포즈를 취하는 것 자체가 우리한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는 심는 자도 아무것도 아닌 자요, 뿌린 자도 아무것도 아니라 했잖아요. 아무것도 아니고 포즈는 어떤 포즈냐는 건 아무것도 아니고, 자라게 하신 것은 누가 한다? 주께서 자라게 하신다. 그런 것을 쓸데없이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부러워하거나 할 게 없다 그 말이죠. 하나의 해골한테 평생 그 짓 하라고 시켰을 뿐이니까. 그래서 저 아까 얘기했지만 인간에게서 자아가 나오게 되면, 자아가 나왔을 때 자아는 항상 뭘 끌어온다? ‘비자아’를 끌고 들어가기 때문에 헤겔이 뭐라하냐면, 이게 너무나 일방적이다 말이죠 일방적. ‘이 말뜻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타를 조금 배운 사람은, 기타를 배운 사람은, 어떤 가수가 기타치고 나오면 다른 사람은, 기타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의 입을 보고 음을 소리로 듣지만, 기타를 조금 배운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의 딴 거는 안봐요, 그 사람의 손놀림을 봐요. 그러면 그 ‘기타를 좀 배워가지고 어떻게 잘 쳐볼까, 싶은 사람한테는, ’그 사람에 있어서 비자아가 뭡니까, 노래 부르는 가수 전체가 아니고 그중에서 뭘 골라낸다? 자기가 기타치고 싶으니까 기타치는 손 모양 보고 그걸 따라 해서 그와 똑같은 기타 연주할 수 있는 그것만 보겠지요. 골라 잡겠지요. 그게 바로 뭐냐하면, 선별이에요 선별. 그러니까 어떤 자아가 있다고 다 ‘비자아’가 다 비자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구석만 골라서 그 사람과 대결하고 비교에 들어가는 거예요, 예.

‘남녀공학에서, 남녀공학 학교에서 남자가 여자 부러워하고 여자가 남자 안 부러워해요,’ 하지만, 지들끼리는 부러워하는 거예요. 예? 키 작은 남학생이 키 큰 남학생을 보고 부러워하는 거예요. 그리고 못생긴 여학생은 잘 생긴 이쁜 여학생한테 시기를 느끼고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 이말이지요.

이게 뭡니까, ‘비자아’ 라 하는 것은 자아가 이미 결정하고 들어가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한다 말이지요. 헤겔은 이것을 뭐라 하냐면 ‘욕구’라고 해요 욕구. 우리 상식은 그렇잖아요, ‘욕구가 세면 욕구를 채우면 되잖아, 하잖아요. 욕구를 채우면 만족하는데, 헤겔은 얼마나 머리 좋은지...

’잘 들어봐요.‘ 욕구가 채워져 버리면 뭐가 날아가 버려요? 욕구가 없어지잖아요. ‘욕구가 없어지면 뭐가 없어요? 자아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욕구를 채우되, 어떻게 채우냐 하면, 욕구가 다 안 채워지게 만드는 방법으로 욕구를 하다 보니까, 어느날 채우다 보면, ‘나 기타 재미없어, ’이제 나는 축구 할거야, 하고 다른 욕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지금, 헤겔 뒤에 나오는 철학자들은 그 헤겔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뭐냐하면, 인간의 몸에서 자아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아’라는 것이 몸을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바꾸는 걸 보니까, ‘이쯤은 됐고, 이제 다른 것을 해볼까?’ ‘에이, 꽃꽂이도 귀찮고 지점토 해볼까, 바꾸는 이유를 보니까, 이거는 자아가 인간의 몸을 관장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알 수 없는 욕망이 자아를 가지고 놀고 농락하더라, 라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라캉‘이라는 사람입니다. 라캉, 들뢰즈, 그 뒤의 사람들입니다.

이걸 헤겔 공부를 다 해보니까. 사람은... 어린애들, 자녀들 다 키우고 하잖아요.’엄마, 휴대폰만 사주면 아무것도 사달라고 하지 않을게, 하잖아요.‘ 진짜 엄마는 그걸 곧이듣고 사줬다? 며칠 가다가 툭,깨버리고 재미없다고 안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깐 그런 것을 헤겔은 발견한 거지요. ’아... 내가 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고 욕망이 농락한다, 마귀가 인간을 농락하기 때문에 이걸 예수님께서 아시고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너와 너희를 농락하고 있어,’ 하지만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너는 여전히 네 몸보다도 예수님 몸이 하신 일에 모든 것을 맡기는, 하루하루가 되어가고 있단다.고 성경에서 이야기 하지요. 이걸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면, 그 하루하루를 맡기면서 ‘어떤 계획으로,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무슨 목적이 있어서 우리를 하루하루를 만들어 내십니까, 라고 할 때 오늘 본문을 이제 들어가는 거예요. 예, 이제 들어갑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아...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한 번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면요, 하나님께서 그냥 이런 걸 모르고, 방금 이런 강의를 안 듣고, ’하나님 사랑하는 자들아 영들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걸 시험하라, 만은 거짓은 어떻고 저떻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을..'이렇게 할 때, 우리는 이걸 자꾸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다 신환데, 이걸 나 중심의 역사로 만들어서 이걸 지킨 내가 책임감있게 지키면 나는 구원 받는다,‘ 이런 나의 역사만 고수하기 위해서 했는데 ’이렇게 강의를 쭈욱 듣고 보니까, 나라는 것은 마귀가 농락하고 있고, 농락한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식의, 내 구원 위주로, 하나님은 내 구원 위주가 아닌데, 주님의 애씀이 ‘주 되심,인데. 마귀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네가 구원 받아야지, 나쁜 짓 하지 말란 말야, 책임감 있게 놀아야지, 성경말씀 지켜야지 하는 식으로, ‘너 구원’‘너 구원’ 자꾸만 구원쪽으로 해대니까 그게 바로 모든 영들이 다 하나님께 온 게 아니고, 악마의 영이 있다는 게 납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납득이 되는 기준은 뭐냐, 기준은 오늘 본문을 보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몸이 어떤식으로 일을 하시는가? 그게 진짜배기 영이다, 그게 영적이고 진짜배기 영이지 다른 것은 영이 아니다는 거지요.

결론을 맺어봅시다 결론을...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한일서 4장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됐습니다, 예...‘ 사랑은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지요? 사랑해주는 분, 해주는 분이 있고, ’그다음 어떻게요? 사랑 받는 자가 있지요.‘ 이게 있을 때 사랑이 형성되잖아요. 사랑해 주시는 분과 사랑 받는 자, 그러면, 모든 영들이 다 선한 영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 아니고 악마에게서 온 영이 있다고 했잖아요? 모든 선지자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그 기준을 요한일서4장7절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사랑으로 하잖아요, 사랑으로. 그러면 사랑은 뭘 해준다? ’사랑해 주시는 분과 사랑 받는 자,가 있어야 되죠, 세트가 있어야겠죠.

그러면 사랑 받는 자가 해야 될 일이 뭐죠? 유치원생도 안다, 사랑 받는 자가 해야 될 일이 뭡니까? 사랑 받으면 되고, 사랑해주시는 분의 일은 뭡니까? 사랑해 주시면 되는 거고. 그게 한 세트가 되면 뭐가 구현된다? 사랑이 성취된다.

이 세트가 우리가 사랑받는 자로 들어갑시다. 이야기 끝난 거예요, 여기에 무책임 책임성이고 없어요, 여기서 이야기 끝난 거예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거든요,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죄인을 불러서 뭐할 겁니까. 죄인 불러가지고 교회 세울 거요? 뭐할라고, 죄인은 이 세트 중에서 어디로 들어갑니까, 사랑받는 자에 들어는 거예요,

사랑 받는 자. 사랑 받는 자 중에서 긍휼... 사랑해 주시는 분이 돋보이는 방법은, 이쪽에서 인간이 주님을 사랑할 수 없어야 되요. 철저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이어야 됩니다. 이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원칙이에요. 이 원칙이 납득이 안 되더라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이게 우리 상식과도 안 맞고 우리 양심과 반대가 되고 이거는 터무니없이 보이고, 이게 말도 안 되게 보이더라도, 괜히 성경에서 우리 역사를 양심의 역사로 만들지 마시고, 이걸 가지고 우릴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지 마시고,.. 이런 거예요, 이 사태가 지금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이에요. 세리와 창기가 찾는 현실이에요. 요한일서를 보면서 ‘참 어렵다, 해석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다.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성경에 있으니 알긴 알아야겠고, 도대체 내막을 모르겠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 내막 아는데 필요한 것은 뭐냐면, 우리의 자아상입니다. 못되먹은 우리의 자아상은 항상 누구 위주예요, 항상 내 위주잖아요.

이 못 되어 먹고... 적그리스도, 마귀에 속한 자, 마귀에 농락당한 우리, 이런 나쁜 역할들이 있어줘야 뭐가 뜬다? ’진짜 사랑이 뭔가,가 뜨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주께서 해 둔 배치예요 배치! 불신자들, 복음 반대한 자들, 이단들, 교회 위주로 사는 목사들, 주께서 전부 다 적절하게 필요해서 배치된 구조물입니다 구조물. 구조물이에요.

‘아, 저게 아니구나, 저런 건 아니야.’ ‘그럴듯해 보이는데 아니야, 예, ’성경대로 지켜서 구원 받읍시다!’ 레위기 공부 왜합니까, 레위기 공부 왜했어요. 레위기 공부 폼으로 했어요? 레위기대로 지켜야지요.‘이렇게 나오거든요.’네가 제사장 해, 제사장 옷 입혀줄게,‘ ’제사장 옷 벌건 옷이에요 벌건 옷.’ 벌건 옷에다가 아침에 벌건 피 발라 가지고, 양 잡아다 피 한번 뿌려 보고...

이게 엽기 영화예요, 드라큘라에 나올 영화 아닙니까. 피 바르고, 기름해가지고 기름 처바르고, 집에다 처발라 보고 번들번들 해가지고, ‘즈그집에 지성소 하나 만들어가지고,..천주교 신자들은 잘 만들데, 마리아상 놓고, 다른 장소에서 기도 안 되고, 그 장소 와야 기도 됩니다. 지가 지한테 완전한 올무, 농락당하는 거예요. 그거는 지가 만든 장소에, 지가 만든 시공간에 지가 농락당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어떤 사람의 책임감, 내가 주의 할 도리를 다 했다, 하는 책임감. 그 책임감이 깨져버리면 이 구조가 깨져버려요. 사랑이 들어올 틈이 없다니까요 사랑이...’너 잘났는데 왜 사랑은...‘ 사랑해 주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사랑 받는 자가 아니고...

십분 쉽시다.

신학강의/2010안산/안산100813요일4장3절b.

둘째 시간 시작 하겠습니다. 첫 째 시간 끝에 언약의 몸과 그리고 예수님의 몸이 등장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못할 게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몸을 갖고 오셨을까, 하늘에서 꽥, 하고 고함지르고 ‘비 내려!’ ‘바다야 잠잠하라, 하늘에서도 할 수 있잖아요.

‘산은 부서져라!’ 하나님 뜻을 말씀대로 하시면 말씀대로 다 될 텐데, ‘마귀야 너는 지옥가거라, 하시면 충분히 될 텐데, 왜 몸을 입고 오셨는가? 하는 그 문제입니다.

’이거 얘기할 수 있는, 이거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신학자가 대제가 보기엔 없어요.’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오셨다, 라는 말은 누구나 하는데, 교회 처음 나온 사람도 하는데, 왜 몸이 오시지 않으면 일이 안 되느냐, 일이 틀어지느냐,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이 몸으로 오셔야 하나님다우냐, 그 이유에 대해서 그것을 밝힐 수 있는 신학은 현재로서는 그러한 신학이 안 나왔다고 봐요, 그렇게 봅니다.

왜 하나님이 몸이 아니라도 하나님다운데 충분히 하나님다운데, 왜 사람이 되셔야 하나님이 되는지를 그 이유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래 있고, 하나님이 이래 있으면 하나님께서 말씀 할 수 있어요, 우리 수준에 뭐가 둘러싸여 있느냐 하면, 악한 영이, 악한 영이 둘러싸여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몸을 왔다는 것은 바꿔치기 할 필요, 바꿔치기.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셔 놓고 주 예수님을 뭐라하냐면,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 놓고 예수님을 로마서에 뭐라고 하냐면, 제2의 아담 그리고 마지막 아담, 이렇게 두 번 째 아담 이렇게 했다고요, 이 말은 뭐냐면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을 포기 못했다는 겁니다.

’네가 선악과 따먹었으니 에라, 죽어라!‘ 하고 ’나 인간 없이 살래, 인간 없이 살래.‘ 인간 필요 없어, 인간 괜히 만들어놨어, 나 인간 없이 할래,’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집에 강아지 있어가지고, 강아지 있어서 전염병 돌아서 자기 자식이 죽었다 합시다, 하면 강아지 키우겠습니까? 그다음에 자기 차롄데. 강아지가 전염병 들어 사람이 죽었다면 안 되잖아요.

그처럼, ‘에이 안 돼, 두 번 다시 난 사람 안 키우겠어, 이럴 수도 있는 문젠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두 번 째 아담, 마지막 아담으로 보내셨다 이말이지요. 이 말이 뭐냐면, 이 아담을 계승하고, 아담을 계승하고 이것을 뜯어 고치고 수리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왜그러냐면 아담을 죽여야 되요, 아담을 죽이고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을 이 자리를 차지하게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언약을 완성하겠다, 이런 뜻을 갖고 계시거든요. 결국 뭡니까, 교체지요 교체. 이번 수련회 때 했지요? 인큐베이터 해가지고 이야기 했잖아요. 여기서 줄만큼 뛰어 나온다고, 기억나십니까? 실선으로 나타난다 했잖아요. 교체, 바꿔치기 한다는.

그러면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오신 것은 바꿔치기 한 것이다. 그런데 제가 질문하기를, ’바꿔치기 할 거 뭐있나, 바꿔치기 하려면 귀찮은데 인간 자체를 없애버리고, 천사하고 그냥 노시지 왜 바꿔치기 하느냐, ‘ 이 아담의 몸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요. ’인간이... 인간이 아까운 게 아니에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하나님의 형상이 아까운 거예요 그거. 그것은, 왜 그것을 포기 못하느냐 하면, 처음 창조할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그당시에는 몰랐지요, 나중에 신약에 보니까, 형상이 누구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위주로 세상을 배치를 하고 구조를 만들어 놨는데, 그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사람이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걸, 새로운 피조물로 바꿔치기 해서, 아들을 주 라고 섬기는 것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 중심으로 만든 창조원리에 부합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 되심’ 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창조를 처음부터 그런 계획으로 그 목적을 가지고 천지 창조를 하셨다, 이 말입니다. 모든 것을 주로 만드시기 위해서, 심지어 창세전부터 계획한 거예요. 창세전부터. 창세기 창, 자가 있기 전부터 하나님 계획이 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주, 라고 등극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시간관계상 자세하게 못한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오른 쪽 이야기를 약간만 언급했어요. ‘왜 문둥병이 오른 귓불에다가, 오른 쪽 엄지발가락 엄지손가락에다, 왜 오른쪽에다가 피를 바르냐 그 말이지요. 문둥병은 먼저 기름부터 바르고 피 바르고 그러죠, 속죄소에서는 제사장에게 기름 바르고 피 바르고, 이쪽에서는 문둥병자에게 피 바르고 기름 바르고, 순서가 바뀌게 되어 있지요? 왜 오른쪽에 하느냐 하면, 그게, 문둥병자가 문둥병 걸렸다가 낫는 그 절차나, 인간인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만나고 있어도 멀쩡하게 살아서 지성소에서 활동하는 그 모든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님이 인간에게 이런 식으로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타나는 피조물이다 이말이죠. 오늘날 우리하고 같은 입장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치, 우리는 내가 원하는 하루를 살고 있지만 주께서는 우리 하루하루를 통해서 예수님의 형상,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루를 새롭게 조작하고, 만들어 가고 인도해 나가시거든요. 나중에 잘 때쯤 되면 내가 하는 것 모든 것이 죄가 되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서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순간순간을 주는 것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영광 위해서 죽겠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내고 인도 하시는 거예요. 항상 목적이 예수님의 ’주‘ 되심입니다. ’다 이루었다‘ 주심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가훈이나 교훈 할 때 젤 좋은 가훈은 이거다 싶어요, ’다 이루었다‘ 일단 짧고, 짧잖아요, 네 자 아닙니까? ’하면 된다‘도 네 자 지만...’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얼마나 좋은 가훈입니까. ’이마에다가 문신을 하고 싶어요,‘ 다 이루었다’

제가 왜 하나님이 사람인가는 다 이야기 했잖아요. 첫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 바깥에 뭐가 있다? 악한 영이 있다, 인간을 첨부터 만들 때 영적 존재로 만든 거예요. 인간은 이걸 몰라요. 그냥 따먹고 싶은 건 따먹으면 되고, 에덴동산에서 놀고 싶으면 놀면 되고, 벌거벗고 돌아댕기는 것은 알지만, 인간은 몰랐죠. 나란 인간이 사실은 영적과 관련된 자체로 낳아야 되는 그런 존재인지를 몰랐죠. 영적권. 하지만 개, 돼지는 그렇지 않아요, 육적이에요. 하지만 인간은 영과 육 사이에 중간 매체로서 등장한 겁니다.

악마가 뱀 속에 들어가서 우리를 유혹할 때, 악마란 건 영적이잖아요. 할 때, 뱀을 꼬시는 것도 아니고, 미꾸라지를 꼬시는 것도 아니에요, 바로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은 누구에게 해요, 인간보고 이야기 한 거예요 인간보고. 하나님께서 계명을 줄 때, ‘선악과 따먹으면 안 된다’ 계명을 줄 때 뱀이나 나비 보고 준 게 아니잖아요. 누구보고 줬습니까, 사람보고 준 거예요. 만물의 영장이라서가 아니라 인간만이 영적권, 영적 존재로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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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7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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