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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 8월 26일 사도행전 16강(행 8:32), 마태복음 7강(마 6: 9)강의전도서

대전 8월 26일 사도행전 16강(행 8:32), 마태복음 7강(마 6: 9)

이름 : 관리자(IP:124.59.87.52)

100826 사도행전 16강, 마태복음 7강

관리자(IP:124.♡.87.52)

10-08-2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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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5.8)

10-11-18 22:38

대전100826a행8장32절

2010-11-18 11:44:31 녹취 : 이미아

사도행전 8장 32절 할 차례입니다. 8장의 내용은 성령받은 빌립집사님이 어떻게 설교를 했는가? 그냥 빌립집사님이 아니고 성령받은 빌립집사님이 어떻게 설교 했는지. 얼마전에 질문을 받았는데 성령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의 차이가 뭐냐? 신학을 하든 목회를 하든 일반 집에서 노는 사람이라도 성령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은 유혹이 교회내의 사람들을 둘로 구분하려는 그런 유혹을 받죠. "아, 우리교회 이 사람은 정말 성령 받았어." 아, 저 사람은 아닌 것 같애. 육에 속한 것 같애" 이렇게 교회에 있는 사람들 가지고 구분할려고 하는 반면에 성경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별로 못만나 봤어요. 성경속으로....,

성경에서 성령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이 분명 나오는데 성경 말고 교회를 자꾸 염두에 두는 겁니다. 그러면 반칙 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실 때 성경 주셨죠? 이것은 상식중의 상식이잖아요. 누구나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뭔가 질문을 해보면 하나님의 계시주신 계시가 성경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교회쪽으로 가요. 교회 또는 믿는 가정.

그냥 가정이 아니고 믿는 가정이거든요. 이 말이 굉장히 재미있어요. 가정이 믿음의 내용이 될 수가 없어요.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임은 그것을 가정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죠. 이것도 또한 상식이죠. 제가 이야기하면 상식을 자꾸 아니라고 하는데. 예수믿는 사람을 교회라고 하지 가정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정이라는 말을 할려면 무엇과 상관이 없느냐면 옆에 형용사 '믿는'이라는 말이 붙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맛있는 기관차' 기관차는 용도가 철로를 다니는 운송수단이지. 맛있다, 맛없다 하고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성질좋은 지도책' 말이 안되거든요. 이것이 말이 안 되듯이 '믿는 가정'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기독교 150년,200년 역사에 이것이 얼마나 말이 되는 것처럼 쓰여져 왔습니까?

우리 식구가 세식구인데 세식구 다 믿어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정이라고 해버리면 어떤 오류가 범해지느냐면 그 오류를 제가 논리적으로 설명 할테니까 논리가 어디가 틀렸는지 한번 따져 보세요. 교회는 그냥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무슨 사건이 있어야 하냐면 믿는 형식이 교회가 되야 되거든요.

그런데 믿는 가정이 되어 버리면 여기 네식구 가운데 세식구는 믿고 한식구는 안 믿으면 그냥 세사람은 교회되면 되고 한사람은 교회 아니면 되는데 믿는 가정이라는 용어를 쓰는 취지가 뭐냐하면 억지로 이 한사람을 세사람 되게 해서 교회보다도 믿는 가정에 푹 빠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믿는 가정이 좋아. 나는 교회가 되기 싫어. 그리스도 몸되는 것 싫고. 같은 자식, 혈육이니까 믿는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재아하고 재원이 있는데 재원이는 믿고 재아는 안 믿는다. 예를 들자면. 엄마는 우리집에 마귀하나 있구나 이러면 편한데 왜냐하면 교회라는 것은 교회있습니다 한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고 교회가 될려면 반드시 성령께서 믿음을 주셔서 교회가 되는데 관심이, 여기 중요한 이야기 나옵니다. 믿음을 줘서 교회되게 하는 것은 교회가 이 지상의 어떤 가정의 형태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썰매, 썰매에 실려서 그대로 어디로 가느냐면 믿음 주신 곳으로 가요.

믿음이 어디에서 옵니까? 천국에서 오죠. 믿음줘서 교회 만들어 천국간다 이 말이죠. 여기 사람들 있고 가정이 있고 몇 층 마파트가 있든 관계없이 믿음줘서 교회만들어 가버린다 말입니다. 여기 남겨진, 뽑힌사람 말고 안 뽑힌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안 뽑힌 사람들은 교회가 싫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안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이 안 주어진 것을, 세식구는 교회가는데 한식구가 믿음이 안 주어졌단 말입니다. 그러면 손짓하면서 빠이빠이하면 되요. 빠이빠이를 차마 못하는 거예요. 저 인간 어쨌든 간에 건져내야 하는 거예요. 철야를 하든지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든지 작심하고 기도를 하든지. 어떻게 자리를 바꿀수 있는 대책이 되면 차라리 내가 지옥 가버리고 저아이를 천국에 한번 넣어볼까? 하는 그러한 모성애가 발휘가 되는 거죠.

믿음은 모성애하고 바꿀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오게 되면, 모든 사람은 행함 안에서 살거든요. 그 행함안에 모성애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모성애, 이웃사랑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런데 믿음이 와버리면 그건 아니거든. 그건 일체 어디에 합당치 않다? 천국에는 합당치 않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성애는 극락에나 합당한 겁니다. 불교도 모성애를 강조하니까.

그러나 천국에는 현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것, 모성애나 이웃사랑이나 어떤 신앙이나 건전한 것을 추려서 건전한 쪽이 양이 많은 사람쪽은 교회되게 해서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생판, 너무나 낯설어요. 미처 믿음이 오게 되면 모든 행함은 믿음 앞에서 입을 틀어막고 저주아래 있는 행함이라고 로마서 3장 19절에 말씀처럼 들통내기 때문에 너무나 생소한, 낯선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적당하게 양보하고 뒷거래하고 할 입장이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이 믿음이 어디서 온다고 했습니까? 언약에서 오죠. 언약은 무슨 언약 했습니까? 아브라함 언약. 아브라함 언약의 위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뒤에 나오는 언약이 레위기 모세언약 했죠? 모세언약이 모세 언약으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행함이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모세 언약을 통해서 다 보여줍니다. 그러면 그렇게 저주를 된통 받게 되면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것에서는 그 어떤 인간의 행함도 거기에다 섞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안 섞이는 겁니다.

모성애고 뭐고 저 아이를 위해서 대신 지옥가고 천국자리는 저 아이가 가고 하는 인간의 아이디어는, 생각들은 일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이 얼마나 대단한지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엘리야 때. 엘리야 편에 몇 명 있었습니까? 남은 자 칠천명이 있었지만 막상 자기 혼자밖에 없었죠.

그 다음에 엘리야하고 한판 붙은 사건이 바알 선지자 450명하고 아세라 선지자 400명하고 토탈 850명이었죠. 1대 850. 숫자 같으면 이거 한자고 세자고 간단한거 같지만 만약에 학교 운동장에 한번 모여보세요. 저는 목사들 강의할 때 학교 운동장에 모이라고 하고 노회 가보라고 해요. 총회 850명 왔는데 다 거짓 선지자고 달랑 1명 참된 선지자라고 할 때 그 마이크 주겠습니까?

강단에 섰던 그 위대하신 분들하고 아래 쪽에 있는 모든, 얼추 총회하면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하면 850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총회할 때큰 교회에서 하지 작은교회에서는 총회도 못합니다. 전국에 있는 목사, 장로 다 옵니다. 왜 사람들이 거기를 가느냐? 일당주거든요. 일당주고 호텔에 재워주고 차비주고 이름내고. 그것도 한번 간 사람이 다음에 또 갈라고 합니다. 순서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기를 쓰고 너 몸 아프니까 가지마. 내가 대신 갈께. 니는 가도 발언도 못해. 그것도 장로들끼리 암투가 대단합니다.

어찌되었든지 1대 850명 했는데 여기서 엘리야가 뭐라고 했냐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을 부르짖어요. 부르짖을 때 그냥 부르짖는 것이 아니고 돌로 쌓고 여기다 황소 해놓고 여기에다 물을 부은 거예요. 불이 떨어져야 하는데 물을 부어요. 원래 불은 물과 상극이잖아요. 그런데 불이 떨어지니까 불세기가 얼마나 센지 고랑에 있는 물까지 다 핧아 버리고 황소를 태운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의 행함이라고 하는데 행함이 아니고 반드시 행함과 믿음의 차이는 행함은 인간의 육신에서 나오지만 믿음은 반드시 언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되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이 땅에 살려두었다는 것을 알아요. 만약에 엘리야의 행함이라고 한다면 행함은 인간의 육에서 나오죠? 그러면 우리는 매일같이 엘리야처럼 돌 쌓아 놓고 황소하면 돈 많이 드니까 계란이라도 올려놓고 거기에 물 뿌리고 아침 9시 되어서 비오는가 봐야 됩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죠? 어떤 전도사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바친 것을 보고 자기도 믿음 좋다고 기도원에서 은혜받고 난 뒤에 자기 자식을 그냥 바쳤어요. 재아 재원이를 바쳤어요. 아버지 믿음하기 위해서 희생물 된 거예요. 이것이 뭐냐하면 아브라함을 행함으로 보면 전부다 육신에서 나오는데 육신에서 나오는 것과 언약에서 나오는 것을 그 사람은 구분을 못한 거예요. 누가 뭐 이야기해준 사람이 없었겠죠. 똑같이 흉내낼 수 있는 것은 전부다 행함입니다.

기도원에서 기도하면 은혜받는다. 앞자리 앉으면 은혜받는다. 똑같이 하는 것. 전부다 행함에서 나온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생소해야 되요. 생소한데 또 생소한 것을 자기가 창작해서 해버리면 그것이 행함이 되버리는 겁니다. 항상 가만히 있더라도 풀잎하나, 나뭇잎하나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으로 믿어지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어지는 겁니다.

전에는 밥을 할 때는 잘되고 못되고 생각하지만 밥하는 가운데 문득 주께서 다시 오신다 이것이 생각나면 요새말로 하면 두 파출부가 밥을 하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둘 것이다. 세상에 파출부로 오든 두 사람이 어떤 잔치집 식당에서 일하든 언제 그것 생각합니까? "시간 되었다. 빨리 빨리 반찬 준비 되었나?" 이런 것 생각하지. "아이구 해봐야 나는 데려가고 당신은 남겨둔다." 이것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날 문득 그것이 생각날 수 있어요.

그것이 바로 말씀이 그 순간에 그 사람을 때려 버립니다. 그 사람은 상상도 못한, 갑자기 생각이 퍼뜩 떠오릅니다. 밥하는 것도 의미없이 데려갈 사람은 데려가고 남겨둘 사람은 남겨둔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새언약에서 나온 거예요. 그 새언약이 생각나는 거예요.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밥하면서도 증거되는 것이 뭐냐면 밥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마지막 기준점이 되는 것이 증거되겠죠. 속으로 할 수도 있고, 마음속으로 느낄수도 있고. 또 누구 만나서 이야기 하면 증거되고. 그래가지고 옆에 있는 사람이 "아, 나도 믿어 볼께." 그렇게 한 전도는 자기가 전도라는 행함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전도가 되니까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이 재미가 나서 간증거리 멋지다 해서 똑같이 행동을 하는 거예요. 또 그사람이 보고 "그래 밥해도 소용없어 데려가야지." 하면 그게 또 행함이 되요. "주여 전에 한끗 올렸잖아요." 똑같은 것 해서 똑같이 하겠습니다. 이게 또 행함이 된다구요. 육신에서 나오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사시면 주께서 예상못한 일들이, 자꾸 애를 키우든지 사업을 하든지 목회를 하든지 뭘 하든지 문득문득 자꾸 떠오르게 되어 있어요. 그게 지금 우리가 언약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행하신 거예요. 언약이 행하신 결과를,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할 때는 믿음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수동으로 바껴요. 피동이 되어 버립니다. 현재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교인들의 피동을 아주 겁내요. 이제는 예수믿고 당신들이 주체가 되어서 해봐라 이렇게 이야기 해요.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행함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에 자기 성과와 누적된 마일리지가 쌓이고. 뭐 이거는 바알과 아세라 집단이 되는 겁니다.

밤새도록 치고 전에는 이래도 효과 받는데 왜 안 됩니까? 더 심하게 자기를 칠까요? 이런식으로 하는데 다시 한번 정리합시다. 항상 하나님의 언약에는 주인공은 우리에게 주질 않았습니다. 칼자루를 우리한테 준 일이 없어요. 넘겨준 적이 없고 성령이 받게 되면 믿음이 오게 되는데 믿음이 온다는 것은 칼자루 쥔 분이 우리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피동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말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해요. "목사님. 말씀에 24시간, 늘 은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생각하는데 24시간 늘 은혜가 될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욕심을 안 내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때는 눈물날 정도로 은혜받아서 말씀을 보는데 한 2초, 5초 지나고 난 뒤에, 국지성 소나기처럼 한번 따르고 난 뒤에는 또 내 행함에 대한 댓가는 뭐였지? 하면서 짜증이 나는 거예요. 왜 내가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원하는 것을 안 주는 거야? 또 이렇게 맹탕으로 내 행함에 대한 댓가, 인간의 행함은 반드시 댓가를 찾게 되어 있으니까. 내 행함에 대한 보상, 내 의로움을 찾는 거예요.

그래서 본인이 짜증난다 24시간 오래 길었으면 좋겠다 하는데 그 분은 뭘 모르냐면 23시간 은혜받는다면 23시간 끝자락에 허무가 찾아 오는 거예요. 5초 은혜받고 허무가 찾아오는거나 23시간 은혜받다가 다시 돌아가는거나 그거 별 도움 안 됩니다. 23시간 은혜받았다고 그걸 또 자랑할 수 있어요. 그런 것 조차도, 소나기 오는 것 조차도 주님이 알아서 주시는 겁니다.

욥기에 보면 나와요. 소나기 오고 안 오고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서 인간적인 스데반을 주체로 봐버리면 전부다 거짓말이 되버립니다. 주께서 주체가 되셔서 스데반 집사를 어떻게 다루었느냐 또 오늘 본문을 보면 빌립 집사를 어떻게 다루었느냐를 보게 되면 신앙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 주체를, 행함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의 행하심만, 곧 믿음의 현상이 불거져서 툭툭툭 떨어지죠.

여러분 일본에 온천에 가보면 여기뽀글거리다 갑자기 저기 뽀글뽀글하죠. 우발적으로 하죠.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24시간 은혜받는 것이 아니라 불쑥 불거져요.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빈틈없이 다 잘 진행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주제가 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할 때는 반드시 이런 우발성의 공통점이 있어요. 왜냐하면 여기 우발적인 것을 판단할 때, 저건 주의 일이다 라는 것을 판단할 때 판단하는 것을 누가 정합니까? 내가 정하고 싶은 충동이 많이 일어나요.

그렇게 은혜받은 것이 많이 있어줘야 마치 꽃다발 있듯이 백합 안개 장미 모으면 이것이 흩어져 있을 때는 그냥 백합 장미 안개 있는데 이것을 모아보면 누구를 아름답게 하는 거예요? 그것을 줏어 모아서 조화를 이루게 했던 내가 아름답잖아요. 사람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내 아름다움, 내가 이만큼 믿음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꽃들을 모으는 경향이 있어요. 그 꽃들을 모았을 때 제대로 같은, 공통적인 일치되는 속성을 뽑아서 모았느냐 아니면 평소에 내가 기대했던 것이니까 옳다구나 하고 일방적으로 모았는지. 그런것도 오늘 본문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을 그냥 보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하게 되면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저는 뭘 보느냐면 앞에 이야기 한 사건하고 중간에 이야기 한 사건과 끝에 이야기 한 사건하고 공통점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성령받은 빌립 집사하고 사건이 일치되는가를 한번 봐요. 대부분 잘 일치가 안 되는 것 같아요. 일치가 안 되고 도대체 뭐냐하면 자신이 믿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일방적인 조치인 것 같아요. 32절 봅시다.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사건의 일치점은 항상 성경대로 되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데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는 그 사건을 가지고 어디로 가져가느냐면 성경으로 가져가요. 성경으로 가져가서 저 사건이 성경 안에서 예언된 사건인지 아니면 성경안에 예언되지 않은 사건인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이 말입니다. 그것을 제가 이야기 하는 겁니다.

애가 아픈데 기도해서 나았다. 그 사건이 "하나님 살아 계시는구나! 너무 기분좋다." 본인 기분 좋은 것은 좋은데 성경에 애 병 걸리면 낫는다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성경대로 되게 되면 그와 같은 이야기가 또 다시 벌어져요. 왜냐하면 모든것이 성경대로 되니까. 그런데 성경대로 안 되게 되면 어떤 두려움이 생기느냐면 만약에 그 애가 또 아프게 되면 이번에는 나았는데 다음번에 안 낫게 되면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믿어야 될거냐? 아니면 안 믿어야 될거냐? 불안감이 생겨요.

전번에 기도해서 애 병이 나았는데 이번에는 기도해서 병이 안 낫게 되었을 때에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이게 확정짓게 되는데 불안해지는 거예요. 불안을 유발한다는 자체가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여기 참 어렵죠? 뭔가 불안해졌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을 가졌다 확신해도 여전히 그 주변에는 무슨 여지가 있습니까? 근데 이 확신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본인이 사고 실험을 하는 거예요.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저한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목사님. 제가 분명히 믿습니다. 확신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이 나온다면?"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 여지를 주는 것은 선물이 아니예요. 인셉트라는 영화 봤습니까? 어느 집에서 냉장고 줬잖아요? 냉장고 받으면 선물이기 때문에 선물은 그 자체로 완전한 거예요. 그런데 냉장고 문을 딱 열면서 어느정도 의심하냐면 이게 만약에 냉장고가 아니라면? 열어보니까 냉장고다 냉장고 냉장고 했는데 전기 코드가 빠져서 얼음이 얼지 않는다면? 만약에 오늘 밤에 도둑 들어서 가져간다면? 그러니까 선물준 사람이 화가나서 니 소원대로 되리라.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써놨죠? 인간은 진리를 그렇게 싫어했더니만 소원대로 되잖아요. 진리가 전혀 안 보이는 지옥에 가고. 이 땅에 어렵게 살면서도 진리를 원하니까 소원대로 진리만 충만한 천국에 가고. 천국 지옥은 아주 공평하게 평소에 사람들이 살면서 너 뭐 원하노? 진리요. 그래 천국. 니 뭐 원하노? 생존이요. 그래 지옥가거라. 얼마나 공평합니까? 여기에 말씀대로 된다는 것은 지금 빌립 집사가 자기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만나는 거예요. 만남이예요. 만남을 빌립 집사는 성령께서 저 사람을 만나게 했다는 거예요.

그럼 질문하나 들어 갑니다. 그럼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성령께서 만나게 해주신 거예요? 우리 신직수 전도사님?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전부 성령께서 만나게 해주신 거예요? 예. 아이구 정답나올 줄 몰랐는데 정답이네. 이건 예상치도 못한 우발적 사건이니 성령의 역사네. 보통 사람들은 저 사람은 여호와 증인이니까 아니고 구분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판단할 때는 기준이 이건 돈 때문에 찾아 온 사람이니까 성령과 관계없어. 하지만 어느 순간 성령이 찾아 오면 과거까지 소급해서 들어 갑니다. 소급해서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 때 돈 받을려고 온 사람인지, 옆에서 시끄럽다고 우왁스런 아저씨가 내려오든지, 도둑놈이 창문열고 들어오든지. 모든 것은 성령께서 다 하신 거예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겁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하냐면 앞으로 만날 사람이 있잖아요. 사기꾼, 도둑놈들 앞으로 만날 사람도 다 누가 보낸다? 성령께서 하시는 거예요. 만약에 목회를 하신다면 목회해서 교회 온 사람도 성령께서. 왔다가 간 사람도 성령께서. 왔다 갔다가 다시 온 사람도 성령께서. 왔다가 갔다가 다시 왔다가 다시 또 간 사람도 성령께서.

어떤 내가 아는 사람이 애가 죽었어요. 애를 또 낳았어요. 왜 죽였을까? 왜 하나님께서 비참하게 죽였을까? 내가 엄마라도 참 가슴 아프겠어요. 하지만 그런 모성애 있잖아요. 이건 인간적인 심을수 있는 태워 담을 수 없는. 이번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생명이라든지 생존이라든지 이건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나오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자체가 처벌이라고. 인간의 모성애. 자식에 대한 애틋함. 이 모든 것까지라도 하나님과 선물과 바꾸지 마세요. 성령께서 일하셨다는 언약을 통해 내려온 진실성과 바꾸지 마세요.

빌립은 이 만남을 통해서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찾아 온 거예요.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말씀이 찾아 온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성령이 보내신 사람 아닌 사람이 없고. 그 사람들이 올 때 본인은 모르지만 그 사람들 어깨위에, 머리위에 전부다 말씀 조각조각을 걸치고 만나는 거예요. 만날 때 내가 만나면 안 됩니다. 내가 만나면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만날 때 나는 뭐가 되요? 나는 누구 집안의 혈통이 아니고 장씨집안, 이씨집안이 아니고 나는 하나의 말씀의 사람으로 만나죠. 그러면 우리의 만남은 말씀과 말씀의 만남입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이런 명곡이 있어요. 말씀과 말씀의 만남이예요. 애를 키운다. 말씀과 말씀의 만남이예요. 애는 지맘대로 살잖아요. 그러니까 레위기 말씀이 맞잖아요? 똥싸고 뭐하고 잘해주는 것은 모르고 못한거만 땡깡부리고. 바로 우리 과거의 모습이고 우리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까?

말씀이 오는데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내시하고 빌립이죠. 말씀을 펴 놓았는데 보는 눈이 내시는 자기로부터 해석해서 자기로 돌아오고 이런 해석을 하고 있고. 육신적이죠. 빌립은 자기도 말씀이죠. 말씀에 의해서 말씀을 보고 다시 말씀 쪽으로 가는 그런 해석을 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내시가 해석을 못하고 있어요. 해석을 못한 말씀이 뭐냐? 32~33절입니다.

32절.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절.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 했죠? 생명에 두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두 종류가 뭡니까? 창세기 4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아이을 낳았는데 첫 아이가 가인이죠? 가인의 뜻이 생명을 얻었다고 본 거예요. 여자가 생명의 어미니까. 내가 생명의 어미니까 내가 낳은 새끼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생명으로 본 거예요. 가인을 생명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생명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가인의 노선이 아니고 아벨이었어요. 아벨은 허무라는 뜻이거든요.

어? 가인 얻었으면 생명 얻은건데. 하나님은 뭐냐면 인간에게 어떤 행함을 해놓고 뭐라고 계속 치는거예요. "행했나?" "행했습니다" "그게 아니거든" 이래요. 그건 뭡니까? 숨겨진 생명이 나오는데. 아벨 자체는 생명이 아니예요. 그런데 가인이 죄를 짓고 아벨을 쳐야 되요. 이 치는 과정 속에서 튀어 나오는 것이 뭐냐면 숨겨진 생명의 피라는 노선이 나와요.

이 숨겨진 노선 따라서 스가랴 선지자가 있고 이 노선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들이 아벨도 죽이고 사갸랴도 죽이고 그 다음은 나지? 그래 날 죽여라"(마23:35). 예수님의 노선이 그 노선이예요. 아벨- 스가랴- 예수님.

그러면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생명은 숨겨져 있다. 그 숨겨진 생명을 파내는 것에 누가 필요하다? 자칭 자기들의 목숨이 생명이고 목숨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뭘 밀쳐야 되겠습니까? 말씀대로 사는, 언약이 있는 엘리야 같은 사람들을 밀쳐야 되요. 엘리야같은 사람들을 밀칠 때 파열되고 깨지면서 등장되는 것이 피가 나오죠. 그 피가 바로 성령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이 옛언약이고 피가 생명이라 하는 것은 새언약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는 자들은 생명이 없느니라"(요6장). 너희들이 생명 얻기 위해서 밥을 먹지?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생명이 아니거든요. 밥먹어 봐야 육신, 너희들이 나를 찾아 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래서 제가 생존이냐? 진리냐?를 이야기 한 거예요. 우리는 곧 생존도 되면서 생명이기를 원하지만 그런 수는 성령받은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그래서 빌립 집사는 거기서 생명을 끄집어내 주는 겁니다. 당신은 생명이 없고 생존밖에 없기 때문에. 책을 보고 있는 눈, 세포활동 하잖아요. 그것을 생존이라고 보는데. 그것을 뭘로 바꾸어 줍니까? "너가 아는 생명은 생존에 불과하다." 거기서 생명을 바꾸는 작업은 말씀에 대해서, 말씀에 힘입어, 말씀이 덮친 빌립 집사가 말씀으로 내시한테 알려주는 겁니다.

이것이 빌립이 성령받은 일이라면 오늘날 남의 이야기가 되지 않죠. 누구 이야기 겠어요.우리 이야기 입니다. 재아, 재원이 잘 들어 보세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 생존을 뭐로 바꾼다? 생존을 위해서 살지 않고 숨겨진 생명을,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 바꾸는 거예요. 피아노를 하든지 어떤 연주를 하든지 간에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숨겨진 피를 보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생명의 취지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한 남자가 죽은 거예요. 생명은 한 남자가 죽은 겁니다. 그런데 한 남자라고 부정관사를 했지만 사실은 그 남자예요. 저 남자도 아니고 이 남자도 아니고 바로 그 남자가 죽은 거예요. 성령께서 빌립에게 말씀을 줄 때 모든 성경 해석을 그 남자, 한 남자에 죽었다에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그게 바로 천국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요, 구멍이기 때문입니다. 다른데는 없습니다.

한 남자가 죽었다에 대한 다른 생각들을 나열해 볼테니까.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복음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한번 느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자식이 몸이 아픈데 제가 기도할테니 자식이 속히 낫게 해주옵소서" 기도합니다. 굉장히 믿음이 좋아 보이죠. 이 문장안에 자식이 아픔- 내가 기도함- 하나님 응답. 이 세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 세가지 구성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한 남자가 죽은 것이 빠져있죠.

자식은 어디에 속합니까? 내게 속해있죠. 이 세 문장을 둘로 한번 줄여 봅시다. 자식은 내게 속했으니까 내 자식이니까 날라가 버리고. 내 자식을 위해서 내가 기도하오니 주께서는 응답해 주소서. 내가 기도하오니 행함이죠. 빼버리고 남는 건 하나님하고 나죠. 이게 흔히 말하는 기독교라고 하죠. 그럼 기독교가 뭐가 됩니까? 기독교는 뭐다? 이단이죠.

나로 출발하지 않는 기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기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삼위일체가 이런건데...모든 수천년 기독교 책들이 다 요 범주안에서 왔다갔다 회자되고 논의되는데. 또 그게 우리의 품성에 아침부터 눈만 뜨면 딱 맞죠? 어떻게 그렇게 딱 맞을 수가 없어요. 집사님 한 달 어떻게 살았습니까? 참 힘들었죠. 그런데 그 안에 뭐가 빠졌습니까? 한 남자가 죽은 것이 빠져 버렸어요. 부도나서 참 힘들었죠?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 안에 한 남자가 죽은 그것이 빠져 버렸어요.

교회에서 날 미워해서 미치겠어요. 그런데 교회라는 말도 죄가 되요. 그 교회가 남의 교회가 아니고 내 교회니까. 교회라는 문장을 지워버리면 내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하나님 찾는다. 하나님 내가 힘들었어요. 내가 힘든 만큼 보상이 되어서, 상쇄가 되어서 원상복귀 해달라는 겁니다. 제가 오면서 장로님하고 이야기 했어요. 젊은애들이 자꾸 꿈을 찾아서 시도하는데, 꿈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개꿈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본질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예요.

꿈이 아니고 내가 어떤 멋진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내 원천이, 본질이 뭐냐? 여기에 관심이 있어야 해요. 피아노를 하고 바이올린을 하면서 내 자신을 찾아보는 거예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도대체 내가 이 짓을 왜 하는지. 바이올린을 하고 피아노를 왜 하는지.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께서 이 일을 하게 하시는지. 그것을 보자 이 말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영화에 보면 이런 노래가 있어요. 산이란 산은 모조리 다 오르고 개울은 모두다 건너세요. 오솔길을 만나면 따라가고. 왔던 길을 가면 돌아서고. 무지개가 있거든 다 따라가세요. 그 뒤에 당신의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게 바로 줄리앤드류스, 마리아가 애들하고 헤어지고 트랩대장하고 삐져서 수녀원에 다시 보내면서 너는 너 꿈을 찾아가라 하고 보내는 거예요. 마지막에 알프스를 넘어가는 거예요. 라라라라 라라라 애들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가는 대목이 나와요.

그런데 꿈은, 항상 여분의 꿈을, 자체적인 꿈을 생산해 가지고.. 욕망은 만족스러우면 안 되요. 욕망이 만족스러우면 욕망이 화를내요. 욕망은 욕망이 계속 남아 있어야 욕망 다와요. 욕망에 만족하면 안 되요. 욕망 값을 해야 되요. 계속해서 욕망을 만들어 내야 되고. 결국은 자기가 욕망에 놀아났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농락당한 겁니다.

성경의 모든 해석은 계속해서 우리가 욕망을 부리든지 아니면 욕망이 없든지 꿈을 얻든지 꿈을 잃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관심사는 뭐냐? 한 남자가 죽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이루심은 우리의 육신과 관련했던 구약, 옛언약과는 결별해 버리고 우리 대신 따로 한 몸을 준비하셔서 그 몸에다 우리가 못지켰던 모든 무거운 짐을 옮겨 실어 버립니다. 한트럭와서 옮겨 실어 버리면 주께서 친히 준비하신 몸을 통해서 모든 거룩과 축복과 의로움이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렇게 성경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새언약의 진수입니다. 여러번 해서 다 아신다 싶어서 제가 찾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죄를 계속 생각나게 하는 제사를 했는데, 이는 왜 제사를 드리냐면 피를 얻어내기 위해서 했는데 그 피는 염소나 황소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제사나 제물을 원치않고 나를 위하여 오직 한 몸을,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누구 몸을? 한 몸을. 그 한 몸이 한 남자잖아요.

경주이씨도 아니고 안동권씨도 아니고 그것은 바로 멜기세덱의 족보를 딴 한 남자가 오셔서 그 남자가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율법이라는 것은 다 없는 거예요. 레위기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약속이 오게 되면 레위기는 이래서 인간의 율법지키는 행함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야. 왜 한 남자때문에. 그렇게 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뒤에 언약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림 그릴 때 하나의 사발처럼 그렸잖아요. 하나님의 역사위에 아브라함의 언약이 오면 430년 후에 모세언약이 오고 잠시 접촉하고 다시 가버렸잖아요. 묵시가 역사속에 진입하고 역사의 한계성을 드러내면서 다시 어디로 간다? 묵시로 가버리는 세계. 역사가 아니고 묵시. 그러면 이 하나님 원칙은 묵시 대신에 하나님과 예수님 둘 만이 의논했던,창세전에 의논했던 것을. 역사라는 것으로 미리 깔아 놓고 그 깔린 것에다 이 뜻을 두 종류로, 선과악으로 나누어지게 하는 뜻으로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가버렸죠.

그로 인하여 두 사람이 밥을 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고.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두고. 이런 현상이 위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꿈을 꾼다든지 내 기도에 응답이 없나 걱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완제품을 갖고, 선물로 받은 완제품을 받고 보따리 풀지도 않고 방에다 그대로 두고 보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그것을 풀면 온갖 천국의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양선이 막 쏟아지는데. 그 꿀단지는 뚜껑도 안 열고 떡하니 해놓고 혼자 울면서.. 가족끼리 엉엉 울면서 우리 죽어 버리자. 자살해 버릴까? 엄마 니 때문에 못살겠다. 나 죽어 버릴거야. 나는 엄마 때문에 못살겠어요. 나 가출해 버릴거야 하고 있고. 목사는 개척교회 안 된다고 울고불고 하고 있고. 주여 새벽제단만, 요새 무슨 제단이 있습니까? 무슨 제사드릴 일 있다고. 새벽제단마다 이렇게 쌓고 온 손님들 시끄럽다고 다 가버리고. 그것도 안 되니까 십자가 붙잡고 흔드니까 완전히 무당흔드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막 흔들면 십자가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지 몸이 신내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 남자가 죽었는데. 이 무슨 무당짓은 다 하고 있어요. 그것을 교회에서 하니까 뭣도 모르는 교인들은 저렇게 신내림 받아야 성령받은 줄 알고. 같이 주여 주여 하면서 더운데 온 땀을 내면서. 한쪽은 엎어지고 자빠지고 랄라라 하면서 방언해대고. 할렐루야 엎어져서 랄라라 해보고. 해보니 되니까 또 은혜받았다고 손들고 나오고. 아이구..무슨 황당한..중국 무협지에도 이런것이 없어요.

그게 숨겨져 있던 인간의 악마성입니다. 인간의 악마성이란 예수님 홀로 이루신, 예수님 홀로 이루심에 대한 반발이고 저항입니다. 그 저항의 힘들이 모여서 자아를 구성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받은 사람을, 사도바울처럼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한 남자를 죽였다는 이 앞에서 고백을 하게 해서 고스란히 자아가 깨지면서 깨질 때마다 펄럭이면서 그 속에서 신에 대한 저항과 반발, 반항심, 하나님에 대한 욕설 짜증 불평..육신의 열매가 다 발각되면서 도출되죠.

육신의 열매가 발각되면 "이게 바로 죄입니다." 하고 나온다면 그게 바로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화평 형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뭘 거칩니까? 육신의 열매를 어디서? 십자가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과정을 통해서 저쪽에서 뭐가 나와요? 온유와 화평이 튀어 나와요. 여기 쌀가루 집어 넣으면 저쪽에서 떡가래 나오죠. 중간에 뭐가 있어야 됩니까?

변환기. 그것을 바꾸어 주는 것이 있어야 되요. 직류를 교류로 바꾸어 주는 트랜스처럼..십자가가 앞에 우리는 죄를 갖고 들어 가세요. 십자가 통과하면서 우리는 "세상에 쓸데없는 걱정했습니다." 온유와 화평과 자유와 사랑. 더이상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즐거워하며 사랑은 온유하며 그것이 나오는 겁니다. 한 3초 나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낄 때 그것이 오래 갔으면 좋겠는데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그렇게 다루시는. 내시가 계속 기뻐했다는 것이 없어요. 또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내시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빌립도 늘 좋아한 것이 아니고 빌립도 구원받은 사람으로 주께서 늘 다루시고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124.♡.85.8)

10-12-03 14:53

대전100826b마태복음7강

2010-12-02 12:02:49 녹취 : 송재원

마태복음 6장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라 은밀한 중에 보신다. 7절. 이방이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 8절. 너희는 저희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기도를 합니까? "너가 태어나서 하고 싶은 기도 있잖아?" 예. 있습니다." "그거 아니거든." 이게 남의 이야기 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예요. 인간이 저 본받지 마라고 했던 그 사람이나 우리나 태어날 때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들이 기도를 열심히 어떻게 했던지 간에 사실은 우리가 평소에 했던 것을 그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겁니다. 보통 이 대목에 기도 대목을 설교할라치면 목사가 교인의 기를 팍 죽이고 들어가요. "여러분들이 간절히 목숨바쳐서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 라고 물어요. 그러면 전부다 유구무언이죠. 교인들은. "적어도 기도라는 것이 뭔지 알려면 목숨 내놓고 광야에서 철야하며 기도해본 적이 있어야지 안 그러면 이 대목은 여러분한테 너무 격조가 높은 겁니다."

이 말을 운으로 떼는 이유가 뭘까요? 이 목사는 너희들하고 격이 다르다 이 말이죠. 그걸 줄이면 까불지마라예요. 그런 느낌을 못느끼나요? 케이블 TV에 목사들 설교할 때 "까불지마라 어디 아마추어가 프로한테." 이런 느낌 못받았습니까? 저만 그것을 느끼나 본데. 아까 한 것처럼 한 남자가 죽었는데. 한 남자가 죽었다는 것을 도외시해 버리면 까불지마라. 아마추어, 프로 이 사이에 계급이 발생돼버려요. 여기는 한 남자가 죽었는데..잠깐 설명할께요. 한 남자가 죽었다는 것은 새언약. 그러면 그전에 새언약이 오기전에 모든 인간은 구약언약, 율법속에 저주아래 있죠.

저주아래 있는 인간들끼리 격조가 높네, 낮네 저기들끼리 까불지마라가 성립이 될까요? 안될까요? 안 돼죠. 자기들끼리 도토리 키재기 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쑥 뭘 집어넣습니까? 한 남자를 죽였다 이 말이죠. 다른 노선에 와 버린 거예요.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이쪽에서는 영생되지 못할 짓들을 한거예요. 영생과 관계없고, 유사영생. 영생처럼 보이는 유사천국, 유사복음. 비슷하게 보이는 성스러움. 지금도 이 동네는 아주 요란스러워요.

누가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가? 아주 대단합니다. 최고 1등급 한우고기처럼. 여기도 1등급 성도, 2등급 성도. 쭉 있어요. 그 유명한 존밀턴의 천로역정이 얼마나 큰 기여를 했습니까? 나는 천로역정하고 불교의 회심곡하고 차이점을 모르겠습니다. 전부다 옛언약속에 있는 겁니다. 이거는 행함이예요. 한 남자가 죽었다는 것은 성령의 믿음으로 받아야..집안에 한 남자가 죽었다고 새겨 놓으세요. 새언약을. 옛언약속에도 지성소가 있어요. 지성소안에 텅텅 비어 있지만 그 안에 율법이 있고 율법의 피가 있고 또 피로서 율법을 카바하는 거예요. 카바, 덮는 것. 가리워지는 것.

가리워지는 그것이 그들에게 모든 죄를, 7월10일 대속죄일. 요충.회충.십이지장충 단 한 방에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모든 죄를 용서하는데, 그 근거는 내 백성이라는 겁니다. 단지 너희들이 내 백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 용서한다는 겁니다. 그 지성소에 있는 그 피와 죄가 이것이 사람으로 구체화 될 때 한 남자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키가 몇 센티냐? 인물이 뭐냐? 성형수술했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기능을 하느냐? 지성소의 기능을 하시면 그 분이 바로 메시야입니다.

대제사장도 되시고, 제물도 되시고, 성전도 되시고. 제사 자체가 인격화. 제사 자체가 움직이는 제사. 그 분이 토하는 말씀하는 모든 것이 피에서 쏟아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 산상설교도 해석을 할려면 어디까지 들어가야 하느냐면 지성소되시는 피까지 들어가서 피에서 다시 밖으로 튀어 나오면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 해석입니다. 그런 해석을 지금까지 저는 본적이 없어요. 뭐 유대교가 어떻니, 성경은 모든 해석은 피로 접근해서 피를 듬뿍 담고 데려가는 겁니다.

육신에서 육신의 열매를 가지고 그 다음 어디에 가야 합니까? 십자가에. 육신의 열매가 어디에서 나왔느냐면, 정과 욕심에서 나왔거든요. 육신의 열매라는 것은 다 드림(dream), 꿈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 꿈을 정과 욕심과 십자가에 다 못박아 버리면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은 내 꿈이 아니고 누구 꿈입니까? 예수님의 약속이 나오죠. 그 약속은 미흡함이 없죠. 그래서 그 약속속에 있는 사람은 온유하고 화평하고 자비롭고 이렇다 말입니다. 비록 시간은 짧지만. 몇 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기도를 오래했다고 하지만 오래 기도한 것도 저주아래 있고. 짧게 기도한 것도 저주아래 있고. 옛언약 아래서 어떤 기도도 다 저주아래 있는 겁니다. 6장8절 봅시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저희라는 말은 저쪽사람들, 강 건너 경계밖에 있는 저쪽사람들이겠죠. 여기서 잠시 불교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불교의 특징은 경계가 없다는 것.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 너와 나를 인정하지 않고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경계를 인정해 버리면 대상이 되어 버리니까 경계의 대상이 있어 버리면 자기 피해가 되니까.

모든 것은 하나로 흘러간다는 것이죠. 비올 때 냇가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때는 구분되서 흘러간 그 모든 쓰레기가 굽이치는 그 흙탕물 속에 엉켜서 가죠. 냉장고, 스치로폴이든지. 밖에 스치로풀은 물살이 약할 때는 가에 붙어서 겨우 따라가잖아요. 큰 물나면 몽땅 쓸어서 나가죠. 그처럼 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것을 같이 쓸어서 나가기 때문에 너나가 없다는 겁니다. 굉장히 유식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단박 뭐라고 합니까? 저희라고 하죠. 누가 저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너희에서만 저희가 발생되잖아요. 저희가 있다는 말은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을 따로 꼬불쳐 놓았다. 따로 장만해 놓았다 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한번 봅시다. 제가 시간이 없어도 이 구절을 찾아보는 이유는 중요하고 함축이 되는 귀절이예요. 내용들이 압축이 되는 구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구절들은 해석이 난해하니 해석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거기까지 보면 지금 몸이 몹시 아프다든지, 가정이 어려워 생활비가 떨어질 때 "하나님이여 못살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면 "하나님 생활비가 똑 떨어졌습니다. 옛날 엘리야 때기도하면 참기름 빈병마다 채워지고 어떻게 풍성한 혜택 받을 수 없겠습니까?" 라고 하면 방금 읽었던 구절을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면 우리 모습 여기인데 우리는 우리 자취를 감추고 내 주변에 있는 것을 기도해요. 지금 내 몸이 생존인데, 생존을 자꾸 생명이라고 보죠. 아까 했죠? 아담과 하와가 아기를 낳고 얻었다 했잖아요? 얻은 것이 가인이죠.

그런데 얻은 것이 사실은, 너가 잃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주어진 거예요. 진짜 얻을 것은 가인을 얻지 말고 아벨의 피를 얻어야 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 미리 가짜배기 생명, 가인을 준 겁니다. 이 가짜라 했지만 누가 해당돼요? 이근호도 해당되고 여러분도 다 해당돼죠. 진짜는 누구밖에 없으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내 아버지 내 아버지. 내 아버지가 될 경우에만 너희 아버지가 된다. 저희들은 뭐가 없다? 내 아버지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 아버지가. 저희들은 뭘 찾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찾죠.

이 하나님 어디서 나온 하나님이냐면 예수님이 와서 너희와 저희를 구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희의 하나님이죠. 예수님이 오게되면 일방적으로 저희와 너희를 구분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찾는 하나님이 뭐냐하면 예수님 와서 너희와 저희를 구분하는 것이 아닌, 내가 여기 있음 자체를, 나는 나로 보고. 우리로 보고. 우리들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한국교회 아닙니까?

아, 예수 안 믿고 교회 믿잖아요. 교회가 목사 생존이 되니까. 생존마당이고. 그리고 교인은 교회를 통해서 천국간다하니까. 그런데 우리는 성령받고 보니까 천국과 통하는 것은 한 남자가 죽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얼마나 좋은줄 모르겠어요. 왜? 뭐가 아니다라는 것을 응용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니까. 다시 묻습니다. 천국과 지상이 통하는 것은 뭐 밖에 없습니까? 한 남자가 죽아어서 흘린 피밖에 없습니다. 피는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행함인데 주님의 행함을 믿음이라고 했죠.

그 믿음이 어디서 나온다? 언약에서 나온다고 했죠. 언약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산상설교의 기도의 내용이 그대로 다 나와요. 어쨌든간에 하나님의 뜻은 저희를 구분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뭡니까? "저희에 들어가게 마시고 너희에 들어가게 하세요." 또 이런 생각 하잖아요. 이것이 정과 욕심이라. 우리가 너희라고 하면 안 돼요. 예수님이 너희, 지금 앉아 있는 "어이, 너희." 하시면 너희가 되고. 그러면 그걸 받고 "나보고 너희래" 하고 까부는 사람 없어요.

"누구십니까? 저를 너희라고 하신 분이?" 라고 방향이, "내가 이야기 할께 너는 일방적으로 저희가 아니고 너희야" 하면 "누구십니까? 저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 잘 믿고 있는데.." 내가 너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님이 비로서 와야 너희는 니가 아는, 저희와 너희의 구분이 다 깨어져 버리고 내가 정해주는 너희와 저희가 새롭게 정립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기도의 내용에 그대로 다 나옵니다. 그러니까 피를 통해서 해석하지 않으면, 주기도문은 교회 좀 다니면 다 외워요. 유치원 애들도 외워요. 외우면 뭐해요? 해석을 못하는데.

그리고 미리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이 주기도문 응답을 누가 하신줄 알아요? 우리가 못합니다. 이 기도의 응답은 이 기도 내용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응답해서 이렇게 되면 우리는 차후적으로 "아하, 예수님이 주기도문 응답해서 우리에게 이런 사건이 우리 가정에 일어났구나! 아 내 신상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다 주기도문대로 딱 맞아 떨어진 것이구나!" 이것을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체험화 시키는 겁니다. 그 주체는 우리가 아니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쉽게 생각합시다. 예수님께서 한마디 딱 던지는 것은 우리보고 받아 적어서 숙제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 이대로 벌이시는구나 !"이것이 얼마나 편합니까? 우리에게 무슨 구원증이 필요해요? 남아일언중천금 해가지고 자기 집 하나 잘 지킨다 하는데, 세상에 이것은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기만. 인간은요,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은 남아일언중천금이 아니예요. "너희들은 도무지 니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니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그것이 우리한테 해당이 됩니다.

우리는 도무지 우리가 말을 해놓고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우리가 다 몰라요. 아까 장로님하고 오면서 이야기 했는데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저기 보니까 벌판이 있는거예요. 벌판에서 벌레들이 싸우는 소리가 차타고 가고 있는 우리 귀에 들립니까? 안 들립니까? 안 들리죠. 안 들린다면, 그러면 벌판에서 싸우고 있는 벌레들이 소리를 안 내고 있습니까? 소리를 내고 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헤르쯔를 낮게 해가지고 쓸데없는, 인간 육신과 상관없는 소리는 안 들리게 하고 더 큰 소리, 지금도 별이 충돌하는 소리는 안 들리잖아요.

성경은 뭐가 되야 돼요? "침묵의 소리" 보이지 않는 소리가 세계로 시간따라 계속 흘러가고 있죠. 그런데 우리는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그들은 듣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많고 큰 거예요. 우리는 주기도문 기도대로 매일같이 은혜를 공급받고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와 지키심과 보호받고 있고 복음을 위해서지만. 복음을 위해서 줬지만 우리는 그것을 골라잡고 있습니다. 내 욕망과 육신의 정욕에 부합된 것만 응답을 하고 거기에 부합되지 않으면 하나님한테 삐지는 거예요. 삐지기 일쑤다 이 말이죠.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우리는 감사할 것만 골라 담아요. 마치 뷔페식당 온 것처럼. 서점에서 책 고를 때 다 사는 것이 아니고 읽고 싶은 책만 사는 것처럼. 이렇게 못된 인간들이 뭘 복을 달라고 입을 놀립니까? 차라리 침묵의 소리가 더 큰데. 그 침묵의 소리는 노아언약 따라서 움직입니다. 노아언약에서 우리가 원한다고 가을에서 봄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가을에서 겨울로...이 모든 것이 약속에 의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보고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보고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보고 약속했고 예수님은 그 약속을 이루었고 그 약속 덕분에우리는 믿음이 찾아왔고 주님이 찾아왔고 성령때문에 찾아 보니까 이미 우리는 창세전에 예정된 채로 이 땅에서 그 보이지 않는 진리, 숨어있는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라고 이 땅에서 각자각자 서로 다양한 삶을 살도록 인생을 그렇게 조치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께 말미암고 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롬11:36).

어떤 사람은 목사 안 됐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사의 계명, 이런 계명은 일방적으로 내가 조립한, 아무것도 모르면서 기껏 들었던 풍월 가지고 대충 짜맞추기 해서 목사가 된 거예요. 그런 것 때문에 마음 졸였다면 얼마나 일방적인 걱정, 근심이예요. 정말 우리가 걱정, 근심 제대로 안 할수가 있다면 죽기 전에 0.5초전. 눈 감기전에 늘어지고 그 순간 때 왜 우리가 기쁘냐면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 놓아요. 나는 좋아서 내려 놓는데 시끄럽게 울기 시작하네. "아버지. 이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여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난리라. 본인은 편히 쉬러 가는데. 약속대로.

여러분 육신 없으면 온유와 화평 자비가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어요. 모든 육신의 열매라고요. 열매 어디서 나와요? 육신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온다고요. 육신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옵니다. 육신의 열매니까 육신이 있어야 그것이 생존이고 그 생존을 자꾸 생명으로 해석하고 생명이 오게되면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낍니다. 어떤 학자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행동은 배후에 공포가 있는데 그 공포는 뭐냐? 죽음이 언제 들이닥치냐 하는 겁내는 그 공포가 그 사람을 심리와 모든 정신상태를 결정한다고 했어요.

무서워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높은 산에 가면 잠시 기분이 좋은 이유는 넓은 산에 가니까 잠시 잊어버리고 내가 산다는 이유가 의미가 있거든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내가 죽고 사는게 갑자기 왜소해 지는 겁니다. 그런데 산에 내려오면 그 다음부터는 회비 얼마고 하면 또 뭐합니까? 또 시작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육신을 버리는 순간, 이 제대 날짜요 이거 아무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날짜 정말 이거 복입니다. 그런 장례식에 가야 너의 본질이 보인다는 말이 그래서 전도서에서 나온 겁니다.

자, 방금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0.5초의 순간입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그럼 무슨 기도할까요? 1초도 안되서 죽는데 무슨 기도할까요? 자식? 자식 맡겨야죠. 하나님한테. 왜냐하면 내 육신 떠나면 내 육신의 자식이니까 이미 남아 있는 자에게 단독했지만 하나님한테 단독으로 맡겨야죠. "하나님이여 내가 가는 천국에 이 자식들도 육신이 떠나기 전에 오게 하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면류관 받은 것도 그냥 하나님이 쓰셔야 합니다" 하죠.

그 기도를 지금 0.5초라고 생각하지만 말고 한 50년 지나서 그 0.5초를 길게 한번 늘어뜨려 보자는 말이죠. 그럴 때 자식에게 "아이구 이놈 자식 공부는 왜 그렇게 못하냐?" 그게 아니라 "공부보다도 너의 생명이, 생존보다도 우선이다." 라고 해야죠. 물론 그 애가 오해해서 농땡이 부리죠. "우리 엄마는 공부하라는 소리 안해. 난 이제부터 생존보다 생명이 우선이다." 라고 난오겠지만.

주기도문에서 기도의 내용은 어떻게 해석하느냐면 기도의 응답으로부터 소급해서 주기도문을 해석해 줘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응답은 어디서 이루어졌죠? 십자가에서. 왜? 다 이루어졌다고 했으니까. 모든 것이 십자가의 새언약에서. 주기도문 하신 이유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게 함이라. 이루기 위해서는 주기도문은 여기서 완성이 되면 안 되고 미완료로 남아 있어야 되죠.

이쪽 십자가에서 다 완성되잖아요. 그러면 주기도문 자체가 완성되면 안 돼죠. 기존내에서는. 이런저런 점에서는 완성되어야 됩니다 라는 문제지로서의 역할을 해야 되겠죠. 그래서 주기도문을 한번 외워보세요. 외워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럼 그것 안 지키면 지옥갑니까?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주기도문을 하나의 문제지로 우리가 보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다 이루신 문제지를 우리한테 보이느냐 하는데, 산상설교 자체가 율법적 기능이예요. 레위기다 이 말입니다. 레위기가 뭐예요? 하라, 하지마라 잖아요. 왜 자꾸 우리보고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줄 뻔히 알면서도 하라, 하지마라를 왜 하셨을까요? 그게 뭐냐하면 예수님이 하는 것과 너희들이 하는 것에 격차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구제할 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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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7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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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