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강-눅7장24-28(천국의 작은자)-luk100808
039강-눅7장24-28(천국의 작은자)-luk100808
이름 : 오용익(IP:59.3.201.250)
039강-눅7장24-30(천국의 작은 자)-luk1008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7장 24절에서 30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7:24-30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소개를 했습니다. 세례요한을 소개하면서 세례요한이 어디에 사는 분이냐, 라는 것을 두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세례요한이 광야에 사는 분이냐, 또 하나는 세례요한이 왕궁에 사는 분이라고 여기고 세례요한을 봤느냐,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을 잘 따르면 왕궁에 사는 사람들처럼 잘 먹고 잘 살고 사치하면서 살 수 있는 길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하면서 세례요한에게 나갔더냐? 아니면 세례요한을 보는 것이 광야에서 아무 의미 없이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와도 같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그런 쪽의 사람인가, 라고 묻는 겁니다.
광야든 왕궁이든 둘 다 이 지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지상에 소리 없이 갈대처럼 사라지는, 살아도 별 가치 없는 식으로 사는 쪽과, 그렇지 않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면서 ‘이왕 사는 것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평소의 우리 내부의 욕망이 항상 노리고 있는 왕궁의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사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왕궁에 사는 사람들, 요새말로 하면 재벌인데, 그 재벌에 대해서 겉으로는 틱틱 거리면서 ‘돈 많은 것이 다가 아니고 그게 행복이 아니야. 정 몽헌 회장은 자살했잖아.’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혹시 우리의 가까운 인척이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재벌이 된다면 동네방네 떠들고 자랑하게 될 것이고 만약 교회에서 누군가가 그런 일이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교회 집사님에게 복을 주셨기에 그 다음 차례는 바로 내 차례가 아닌가.’라고 전부 다 그것을 복의 조짐으로 보고 그것을 일종의 기도의 업적이요 하나님께서 내 신앙에 감읍한 보상의 하나인 것으로 보지 않았느냐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둘 다 오산입니다. 갈대라는 것은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고 살다 살다 안 되면 연탄불 피워놓고 자살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왕궁에 있는 사람 쪽이라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은근히 기대했고 그것이 사람 사는 최종 목적인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세례요한과 연결된 것은 27절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내 앞서서 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내 앞서서 왔기에 세례요한 본 것으로 인생 결정짓지 말고 세례요한의 뒤에 연결된 분을 만나야 되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 본인’이라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인생 허무하게 끝났다고 해서 ‘세례요한은 반짝 선지자고 반짝이 영웅이네. 저렇게 살면 세상에 그 이름이 기억되는 줄 알았더니만 별것이 없네. 저렇게 맥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어. 옳은 소리 한다고 해서 세상 바뀌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면서 세상이 옳은 소리에 꿈쩍도 안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고 경험하면서 그냥 돌아설 것이 아닙니다.
그 세례요한이 그냥 서 있을 적에는 뒤에 계신 분이 안보이다가 수그리, 하는 식으로 앞에 있는 세례요한이 고개를 숙일 때 비로소 짜잔, 하고 등장하는 그분, 바로 그 분을 만나야 하는데, 세례요한을 등을 푹 집고 넘어서 그 뒤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광야에 나갔던 것은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허무하게 인생은 끝나는 거야.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야.’ 하는 이런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왕궁에 있는 이것도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 둘이 다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면 예수님과 인간의 힘으로 만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세례요한이 쌍끌이어선처럼 양쪽을 좍 잡아당길 때 사람들이 익히 아는 두 가지 노선, ‘인생살이 잘하면 성공이고 성공 못하면 자살할 정도로 허무한 것이다.’ 이 두 노선밖에 없는 그것을 끌고 왔을 때 세례요한 자리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성령 세례 받은 것이 아니에요. 세례요한에게서 세례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세례 따로 있고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세례로 따로 있어요. 교회 출석한지 6개월 된 뒤에 학습 받고 그 뒤에 다시 6개월 지나서 물세례 받는다고 천국가는 법 없습니다.
모태부터 세례 받았다는 모태의 신앙? 그런 것은 다 거짓이고 사기입니다. 유아세례, 그런 것은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괜히 찝찝하니까 엄마들이 전통적으로 유아세례를 다 받으니까 자기애도 들이미는 거예요. 목사는 거기에 물을 뿌리지요. 심리적으로 기분상 우리 애가 언약의 백성이 된 듯 느낌이 들지만 주님은 끄떡도 안합니다.
세례요한이 양쪽으로 쌍끌이 어선 끌 듯 끄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대단한 인물이다. 여자 중에서 태어난 인물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위대한 인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아무리 포기하고 또 포기해도 세례요한의 법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거예요.
CF에 이런 것이 있어요. 장 동건이라는 배우가 광고모델로 나오는데 화면에 자막이 떠요. ‘따라하지 마세요.’ 무슨 내용이냐 하면 지프를 몰고 60도 이상 되는 언덕을 올라가버려요. 그런 흉내 낸다고 차 뒤집히는 사람이 한 둘 아닐 거예요. 그 가파른 언덕 아무도 못 올라갑니다. 그처럼 우리가 아무리 엔진 성능 좋다고 붕붕 거리면서 그 세례요한을 흉내 내려고 해봐야 차 뒤집어집니다.
신학도 하고 목회경력도 된다고 우기는 사람들, 개혁주의 신학 붙잡고 역사적, 문법적 성경해석으로 정통신학을 한다고 자부하면서 ‘전혀 이단이 아닙니다. 안심 푹 놓고 믿어도 됩니다.’ 라고 하는 목사들이 설교를 들어보면 이겁니다. ‘착하게 살자.’입니다. 성질 같아서는 성경책으로 뒤통수를 쳐버렸으면 싶어요.
여러분, 조직사회에서 착하게 산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대학교 다닐 적에 혼자 자취할때는 착하게 사는 것 같지요. 남들 다 방 더럽게 쓰는데 혼자 원룸청소 성실하게 할 때에, 남들 방세 떼어먹고 도망갈 때에 매 월 15일에 내는 방세 꼬박꼬박 낼 때는 본인이 착하게 보이지요. 자취생활 하면서 공무원시험 준비하고 취업 준비할 때는 착하게 보이지요.
왜? 착해야 공무원시험 50:1의 경쟁을 뚫어서 취직시켜 줄줄 알고서. 착하게 사는 것이 누적이 되면 그 어려운 시험도 합격할 줄 알고 착하게 살지요. 조직사회에 들어가 보세요. 조직적으로 범죄 하는데서는 자기 혼자 못 빠집니다. 빠질 수가 없어요. 착하게 사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60도 경사를 차로 올라가면 차 뒤집어집니다. 세례요한 흉내 내려다가 차 뒤집어져요.
예수님 말씀에 사람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요한만한 이가 없다고 하면 그냥 없는 줄 아세요. 여러분들이 이 성경말씀을 이렇게 적용시키면 말씀 그대로 지킨 거예요. 이제부터 말씀 지키는 것 이야기할게요. 간단한 겁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낳은 자가 없다.’고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말씀을 지키느냐 하면, 살아가는 모든 행세가 세례요한 앞에서 턱도 못되는구나, 그것을 확인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 지키기 참 쉽지요? ‘아,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구나.’ 하면 말씀 지키는 것이 쉬워요.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왜 이 말씀이 나로 하여금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천하의 죄인으로 만드는가, 그것을 찾아내시면 그것이 말씀 지키는 겁니다. 여러분, 말씀 지키면서 삽시다. 철저하게 말씀 지키면서 삽시다. 왜 우리가 세례요한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지.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니까 자기가 세례요한보다 나은 줄 알고 있어요. 천국 갔으니까 세례요한보다 훌륭하지 않겠느냐 합니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의 작은 자, 천국의 소자가 우리가 갈 수 있는 천국도 아니고, 우리의 힘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그런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것은 엄청나게 오해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도 세례요한같이 될 수가 없는 이유가‘광야에 가서 세례요한 흉내만 내 봤자 너는 하나의 갈대만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헛되고 헛되구나.’ 그것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거예요. 인간이 갈대로 허무하게 가지 않으면 기껏 가는 곳이 왕궁밖에는 없어요.
지금부터 왕궁이라는 것이 왜 사치스럽고 왜 왕궁이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힘을 집중하는 식으로 살아가요. 시간이 된다면 과학에서 말하는 천지창조인 빅뱅이론부터 시작해서 성운의 발생과 태양계의 발생과 지구의 발생과정, 원생동물의 시작부터 포유류에서 유인원에서부터 현생인류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만 지금은 시간상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그 이야기를 두 세간 걸쳐서 한다면 그 핵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집중하지 않으면 존재가 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집중이에요. 어제 제가 쓴 글 “우주의 구조”라는 글을 다시 한 번 봤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우주에서 어떻게 중력이 발생하는가, 힉스장은 어떻게 발생되며 그 힉스장에서 중력이 어떻게 발생되는가, 어떻게 잡아당기는 중력이 미는 중력으로 바뀌는가.’ 이런 이론들이 초끈이론에 이르기까지 가설로 죽 나와 있습니다.
그 모든 이론을 아무리 펼쳐도 핵심은 하나입니다. 모든 힘을 자기중심으로 집중, 끌어 모으는 식으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집중에서 마지막 집중이 뭐냐, 왕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나 우리 일가친척이 왕궁에 못 있어서 한이 맺혔어요. 사람이 한이 맺히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집중이 안돼서 한이 맺혀요.
교회 와서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주여, 주여!’ 소리 내서 남의기도 다 훼방 놓으면서 ‘너는 기도하지 마. 나만 기도할게.’하면서 기도하는 그 모든 것은 힘의 집중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아직도 힘이 덜 모였다는 겁니다. 종친회 모이는 것도 집중이고 교회에서 수련회 모이는 것도 집중이고 세상 각종 단합대회도 집중이고 동창회도 집중입니다. 시댁 칠순이니 팔순잔치도 다 집중입니다.
그 집중중의 집중의 최고정점에 내가 신이 되고 왕이 되는 겁니다. 그 집중중의 집중의 맛을 보면 두 번 다시 그 힘을 포기할 사람이 없습니다. 대통령 해본 사람들 전부 다 아쉬워 미칩니다. 몇 년 해먹고 마는 것이 그렇게 안타까워요. 김정일처럼 되었으면 좋겠지요. 죽을 때까지 뇌경색에 걸려서 죽기까지 해먹다가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그대로 이양해서 대대로 또 해먹고 싶겠지요.
과학이 그것을 뒷받침 해주지요. ‘집중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존재하는 것은 뭐든지 심지어 집중하는 그것이 자연의 뜻이며 그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과학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과학을 가르치고 발전시킨 서구가 과학을 모르는 동양을 삼켜서 대부분의 동양은 후진국이 되고 서양은 대부분 선진국이 되었잖아요.
G 20개 회원국 중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다 서방국가들이잖아요. 과학에서는 그것이 바로, 집중하는 힘이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파괴요 해체요 소멸이요 무너짐입니다. 무너진 것이 복이라는 거예요. 무너져야 된다는 거예요. 무너질 때 비로소 눈이 뜨인다는 겁니다.
내가 하는 방향은 뭐든지 힘을 모으고 또 모으는 식으로 해야 산다고 여겼는데 하나님은 부수고부수고 계속 부수는 거예요. 그래서 과학을 다시 봤지요. 보니까 과학이 잘못되고 있어요. 태양이 어떻게 뭉쳐졌는가를 이야기하지 태양이 어떻게 파괴되는가를 좋게 보는 과학은 없습니다. 왜, 과학은 돈이 되어야 하고 경제적으로 가치가 있어야 하고 효과를 봐야 하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은 과학이지만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집중이지만 우리는 해체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집중하는 것은 암세포밖에 없어요. 자연세포는 다 늙어 죽는 겁니다. 늙어서 죽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습니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그동안 내가 눈에 허깨비가 씌어서 착각과 착각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음을 깨닫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비로소 죽음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가 되었을 때 ‘아, 사는 것이 죽음으로 이끄는 과정이 산다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압니다. 그 앞에서 모든 것은 다 밝혀져요. 세례요한은 죽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죽음을 통해서 수그리가 돼요. 죽음을 통해서 자기를 수그릴 수가 있습니다.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에 살려고 하는 이 세상의 어떤 남자보다 더 위대한 남자에요.
모든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살려고 설칩니다. 살려고 할 때는 힘을 집중해야 살 수 있으니까 쌍둥이 형제라도 서로 밀치지요. 성경을 그런 식으로 보면 풀립니다. 에서와 야곱이 싸우는 이유가 뭡니까? ‘형, 형이 형 해. 나는 죽을게.’ 이렇게 해서 싸우는 법이 없어요. 형은 죽고 내가 형 되고, 동생은 죽고 내가 혼자 아버지 재산 다 차지하고, 이것이 다 집중이에요.
그런 것을 꼬집고 그런 것이 비정상임을 나무라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데 우리는 살려고 하는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성경을 빌미로 해서 더욱 더 집중에 매진하면서 그것을 복 인양 이해하고 싶어서 환장한 겁니다. 그 끝에는 ‘나도 왕이 되어서 살아보자. 나도 왕으로 군림해보자.’는 겁니다.
교회 오려고 전부 다 거지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니거든요. 다 복을 받아서 왕궁의 왕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게라도 살아보겠다고 착하게 살아서 복 받겠다고 교회에 오시는데 교회는 해체입니다. 죽음이 진리라는 것을 이야기해줘요. 그렇게 해체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해서 세례요한이 예수님과 관련된 채 태어남을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않은 인생이라면 그것은 살아도 소용없는 인생을 산 것, 헛산 것, 백날 살아도 망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이 ‘내가 내 뒤에 있는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태어났지 날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자신 있게 이야기한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는 힘을 끌어 모아야 되지만 세례요한은 자기 자리가 이미 고정되었어요.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고정된 자기 자리를 갖고 있었어요. 지정된 자리를 갖고 있을 때 좋은 점이 뭐냐, 아무리 인생에서 세월이 흘러도 멈춰져 있다는 거예요. 세월이 멈춘 인생입니다. 세월이 멈춰져 있으면 내가 더 잘 살기 위해서 힘을 끌어 모아도 이 고정된 자리는 결국 멈춰져 있는 자리에요.
결국 이것은 나만 위해서 천 날 만날 시간을 끌어봐야 소용없어요. 그 자리는 멈춰진 상태에서 그 질이 변동이 없이 아무리 기회를 줘도 망할 자리라는 말입니다. 말이 갑자기 어렵게 되어서 이해가 안 되시는데 쉽게 해 봅시다. 돌아다니면서 물건 파는 상인들 보면 대전 찍고 부산 찍고 광주 찍고 계속 돌아다니잖아요.
돌아다니면서 힘을 집중하잖아요. 그처럼 돌아다니지는 않더라도 우리 머리는 아침에 깨자마자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짜는 거예요. 어떤 변화를 계속 모색하는 거예요. ‘내가 이 직장에 있다가 퇴직하면 그 다음에는 뭘 하면 되고’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추구하면서 어디 가서 힘을 더 축적할 수 있을까를 모색하잖아요.
비록 한 자리에 있더라도 생각은 변화무쌍한 생각을 한다 그 말이지요. 세례요한은 너무 어렵습니까? 그러면 더 쉬운 것으로 합시다. 세례요한 말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자기 자리가 ‘십자가 안’이라고 봤어요. ‘그리스도 안, 예수 안, 십자가안’이라고 자기자리를 봤어요. 자신은 십자가안에 이미 고정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가 되느냐 하면, 세상을 볼 때 모든 것이 멈춰진 상태로 보는 거예요. 서울 대전 부산 찍고 돌아다녀도 멈춰진 인생이라!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이것이 수련회 때 한 이야기인데 우리 인간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죽음의 세포가 품어내는 독가스에 의해서 그냥 그 자리에서 허물어질 뿐이고 해체되고 무너지는 거예요.
원래 자리가 우리를 무너지게 만드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보게 되면 멈춰져 있는 거예요. 뭘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어도 멈춰져 있는 것이고 그런 것들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그 자리가 결정하지 그 껍데기가 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멈춰져 있다는 것은 그겁니다. 내 자리에서 세상과 모든 시작과 끝을 다 아는 책이 없습니까, 라는 물음과 같은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시작과 끝을 한꺼번에 아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을 읽고 그 시작과 끝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인생은 그걸로 스톱된 거예요. 다 알았으니까. 그게 바로 사도바울의 인생이었습니다.
시작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창세기에 나오지요. 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잖아요. 시작과 끝을 다 알아버렸잖아요. 그 자리는 예수님 안에서 멈춰진 자리가 되고 멈춰진 자리는 쓸데없이 힘을 모으려고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 거예요. 시나리오 짜고 소설을 쓸 필요가 없다니까요.
제가 문학을 안 좋아하고 작가들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자꾸 인생을 펼쳐놓으려고 해요. 전에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을 쓰신 유홍준이라는 분이 있지요. 그 책이 하도 유명한 책이라도 제가 읽어봤어요.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설명이 참 많이 달려 있어요. 직접 가봤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돌멩이 조각들인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제가 드라마작가들이나 이런 분들이 미운 이유는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 안에 뭔가 의미 있는 것이 들어 있는 줄 알고 자꾸 의미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의 자리가 이것이라고 아는 것은 죽을 때 비로소 아는 거예요. 죽음이 거창하면 전쟁으로 바꾸어서 이해해 봅시다.
TV채널이 두 개가 나오는데 한 채널은 6.25때 북한이 쳐들어와서 서울은 함락 직전에 있어서 모든 것이 아슬아슬한 위기상황이 돼서 서울시민들이 피난을 갈 거냐 말거냐의 갈등상황에 놓여 있는 영화가 나오고 있다고 합시다. 다른 채널 하나는 한 모델이 나와서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이 2천만 원짜리냐 3천만 원짜리냐, 그걸 뽐내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인민군에게 잡혀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에 학교고 직장이고 다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가야 되는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그 옆의 채널 ‘지금 이 옷이 2천만 원짜리인가, 3천만 원짜리인가’ 이런 것을 묻겠습니까? 제가 든 예가 너무 황당했습니까? 피난을 가는 와중에 매니큐어 칠하겠느냐 그 말이지요.
그렇다면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이겠습니까? 저쪽에서는 여유만만 심심해서 미치고 돈을 다 못써서 환장하고 돈 쓰는 것을 티내고 싶고 돈 남아돌아서 처치를 못해서 남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환장해 있는 그런 류, 희희낙락거리는 류가 있습니다. 다른 한쪽은 일가친척과 혈육마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사랑하는 하나뿐인 아들은 적의 탱크에 깔려 죽어버렸다는 소식이 들리고 남편은 철사 줄로 꽁꽁 묶여서 끌려가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남은 어린 자식 들쳐 업고 도망가는 입장을 그 앞의 유와 비교해 보세요.
어느 것이 인생의 진실입니까? 성경은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원하는 환상과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을 원해요. 그 죽음의 자리가 광야입니다. 그 광야로 가서 세례요한이 사라졌어요. 어디로 사라졌느냐 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바로 예수님이고, 하늘나라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자리는 남들 보기에 비참한 자리지만 그 자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게 네 자리야, 라고 딱 지정해 놓은 자리예요. 그래서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 세례요한보다 위대한 남자는 없는 겁니다. 그 자리가 말해줍니다. 그 자리, 예수님과 연결된 자리, 예수님과 연결된 자리가 말해주는 거예요.
우리가 죽고 난 죽음의 자리라면 그것은 허무로 끝납니다. 지난 여름수련회의 주제가 ‘종말의 종말’이라고 했지요. 종말의 종말이라는 제목을 보고 이해한 사람이 별로 없었을 거예요. 첫 번째 종말은 뭐냐, 인간의 종말이에요. 인간의 종말은 불교도 기독교도 천주교도 이슬람교도 다 이야기해요.
‘사람은 헛되자. 죽으면 그만이다. 바르게 살자. 죽으면 좋은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이야기, 그런 인간이 아는 종말은 그냥 여기서 사는 것이 힘드니까 예수 믿고 천국 가서 편하게 살아보자는 자기편의주의, 자기이기주의, ‘설마 하나님이 날 버리실까, 날 영접하시게지. 그래, 종교는 소망이야.’ 하고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소망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서 못다 이룬 소망을 하늘나라에서 이루기 위한 소망의 연장으로서의 종말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종말이 아닙니다. 진짜 종말은 그 뒤에 나오는 종말, ‘하나님도 죽었다.’는 거예요. 만약 제가 어떤 집사님을 붙들고서 ‘나는 집사님 아니면 못 산다.’고 하면서 붙든다고 합시다. 내가 쫄딱 망했어요. 하지만 안심 푹 놓는 거예요. ‘나는 평생토록 나 안 믿었어. 나는 집사님을 믿었어.’ 했는데 몽땅 망해버렸다는 말이지요.
이게 ‘종말의 종말’이에요.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믿는 하나님마저 죽어버렸다면 더 이상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마저 내가 정할 수 없는 자리가 우리 인간으로 태어난 그 자리였습니다. 힘드니까 뭔가 상상해서 좋은 자리가 있으면 그리로 옮겨가야지, 라고 생각했고 의도했던 것도 다 추상이며 관념이었고 헛방믿음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갈 수 있는 길은 이미 차단되어버렸습니다. 지프 타고 세례요한처럼 가 봐야 뒤집어져요. 그 뒤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례요한을 통과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데 세례요한 통과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나자빠지는 입장이에요. 그 다음에 구원하고 안하고는 누구 소관이냐 하면 그것은 순전히 예수님 소관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능력으로 온 사람 같으면, 부활의 영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면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이것은 다 같이 합창해서 아멘, 해야 됩니다. 이런 뜻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가 아니라 그 말이죠.
내가 예수 믿어주니까 ‘아, 믿음 있구나.’ 해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은 아직도 날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예요. 그것은 하나의 욕심입니다. 믿음이라는 허울 좋은 하나의 욕심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지금까지 천주교 200년 역사, 기독교 100년 역사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예수 믿으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고 구원이고 뭐고 다 나 좋으라고 하는 것밖에는 안돼요. 이것은 이기주의입니다. 제가 이기주의에 대해서 글 하나 썼지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이기주의를 그대로 가지고 천국 가니까 자기는 천국 갔는데 그 다음에 그 엄마가 자기 딸이 천국에 못 온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 삐지는 거예요.
천국에 왔는데 자기 딸이 없다면 자기가 사랑하는 딸과 함께 지옥 가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그 사람은 불교식 기독교에요. 기독교가 아니고 불교에요. 불교가 뭔가 하면 이런 거예요. 지옥 간 엄마가 안타까워서 파 붙들고 올라오라고 파를 내려줬는데 그거 붙들고 올라오다가 떨어졌다는 식입니다. 그런 것이 불경에 나와요.
불교가 좋은 점은 기껏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불교라는 절벽을 능가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와 복음의 차이점이 뭡니까? 우리는 기독교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는데 그 차이점은 복음은 우리를 저주한다는 거예요.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를 ‘이게 어디서 구원을 받아. 이 주제파악도 못하는 것이 구원을 받아?’라고 나무라고 저주한다는 거예요.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를 저주할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주여, 누구십니까?’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구원받고자 애쓰는 저를 왜 저주하십니까? 그렇게 하시는 이는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거든요.
목회하고 설교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제가 느낀 점은 ‘목사님, 바쁘신데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주로 이런 거예요. ‘목사님, 참 살기 힘든데 이 괴로운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누굴 믿어야 됩니까?’ 그런 질문은 수천 번 들었어요.
‘이 괴로운 나를 이제는 그만 슬퍼하게 하고 죽어서라도 좋은 천국에서 가족과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서 우리 가정과 내가 아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뭘 믿어야 됩니까? 이제 부처를 포기하고 예수를 믿으면 그런 행복이 주어집니까?’라고 하는데 자기 행복과 자기 기쁨을 포기하고 순전히 하나님의 기쁨을 생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저도 마찬가지일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세례요한에 미치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60도 경사면을 못 라갑니다. 뒤집어 버려요. 20년 믿어도 ‘에라’ 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요. 나이 70되고 80되고 90되도록 믿어봐야 도로 제자리로 돌아와요. ‘20년 믿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 자리로 돌아와요.
‘교회에 그만큼 돈 가져다 바쳤는데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항상 내 자리로 돌아와요. 그런데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면 ‘믿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이것이 인간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네가 처음부터 네 기쁨을 포기하고 내 기쁨 위주로 살아가는 존재 맞느냐.’를 묻는 거예요.
‘네가 지금 믿고자 하는 것이 너 좋으라고 믿는 거냐, 나 좋으라고 믿는 거냐. 숨기지 말고 우리 똑바로 하자.’ 그 말이죠.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면 그 사람이 믿음이 있으나 없으나 목적은 뭡니까? ‘아,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해서 환장했어.’ 그런 사람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해서 환장한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의 괴로움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기쁘게 못한데서 한이지 자기가 자기를 기쁘게 못해서 한이 맺히는 법은 없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대체 세상일을 고민한다는 이것이 과분한 것이 아니에요? 걱정한다는 이것이 주제넘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만 생각하는 인간이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고민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것뿐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기도라는 것을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수련회 때 이야기한 것인데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스타트랙이라는 영화에 보면 공간이동을 합니다. 이쪽에 사람이 하나 있고 이쪽에도 있는데 이쪽에서 이쪽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거예요. 순간이동이라고 해서 이쪽에 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다른 쪽으로 사람이 튀어나오는데 성경은 같은 사람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이쪽을 소멸시키고 소멸시키는 양만큼 예수 그리스도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강탈해 가버려요. 그것도 난데없고 나는 나쁜 짓을 한 것도 없고 아무 이유도 없이 내가 그리워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나는 저것을 잃으면 자살할거야, 라고 마음속에 딱 골라잡아놓은 그것을 사기를 당하든지 해서 몽땅 가져가 버려요. 가져간 그 빈자리만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많이 가져가면 많이 나타나요. 많이 빼앗기면 많이 나타납니다. 나중에 죽을 때 다 빼앗기면 오직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심이 나타납니다. 그 빼앗기는 자리가 사도바울처럼 이기 그리스도 안에서 멈춰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의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매일같이 빼앗겨야 됩니다.
보통 사람은 심보가 이래요. 어제 믿음 같으면 어제 믿는 신앙가지고 오늘도 써먹으려고 합니다. 어제 믿음 좋았으니까 오늘도 그 믿음 쓰면 아마 복 줄걸, 자꾸 어제 믿음을 내가 집중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힘으로 가지려고 하는데 빼앗기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빼앗기는 것이 믿음이라면 ‘주여, 어제는 그것을 빼앗겼는데 오늘은 또 무엇을 빼앗아 가시렵니까? 제발 몽땅 다 빼앗아가서 지금쯤 낙원에 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몸 자체를 주께서 빼앗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안 빼앗아가니까 자꾸 나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돼요. 내가 나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돼요. 개척교회 하면서 ‘이게 뭐야. 한 2천명은 돼야 하는데. 그래야 내가 기쁜데.’ 직장생활하면서 ‘아직도 전세가 뭐냐, 너른 50평 아파트에 살아야 내가 기쁜데.’ 아직도 내 육신이 그대로 있으니까 생각하는 것이 내 기쁨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애가 남보다 더 공부를 잘해야 될 텐데, 우리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야 될 텐데. 나는 몸이 안 아프고 늘 건강해서, 아니 아예 더 젊어져서 20대를 회복해야 될 텐데.’ 내 육신이 있으니까 내 기쁜 것만 생각하면서 소설 쓰고 드라마를 써요. 내가 성공하는 비법, 당뇨에 걸리지 않는 방법, 뱃살 빼는 방법, 얼굴을 세련되게 보이는 방법, 야구게임에서 누가 누구를 이겼더라, 내가 좋아하는 그 선수는 지금 뭐하고 있는지, 다음 월드컵에서도 잘해야 하는데 다음 감독은 누가 될 것인지, 전부 다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에요.
그럴 때마다 내가 믿던 팀이 져버리고, 월드컵 대표팀은 16강은커녕 예선탈락 해버리고, 내 자식의 성적이 10등이나 아래로 미끄러지고, 계약하겠다고 했던 바이어가 계약 펑크 내 버리고, 양해각서 받은 것은 다 날아가 버리고, 뭔가 이렇게 빼앗길 때, 잃어버릴 때 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이미 주님의 자리이고 십자가안인 것을, 세상은 부산 광주 대전 내가 돌아다닐 필요 없이 어떻게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살아도 예수님의 자리가 아닌 그들은 망하는데, 무너져야 할 세상인데 그 무너져야 할 세상을 왜 그리 부러워하는지요!
세상 천장은 지금 내려앉았어요. 더 내려앉고 있습니다. 점점 더 무게 있게 내려앉고 있는 세상은 눈에 안보이고, 시커멓게 내려앉는 세상은 안보이고 거기서 쥐새끼처럼 돌아다니면서 돈 좀 벌었다 하는 그것은 되게 부러워하는 것, 그것은 세상 탓 할 것이 아니라 내 육신이 아직 남아 있는 탓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육신을 남겨준 이유가 뭐냐, ‘너는 백날 해도 못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의 작은 자’란 뭐냐? 그야말로 천국의 ‘작은 자’에요. ‘작은 자’, 어린애, 소자, 작은 자예요. 마태복음 11장 25절에 보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미 계시를 줄 때 우리가 어른인체 하고 우리가 잘난 체하고 왕궁에 살고 싶어 할 때 처음부터 성경말씀은 ‘너는 어린아이가 되어라.’라고 계시를 던져주는 거예요. ‘오늘도 이 편지 받고 어린아이가 되어라. 어린아이가 되어라. 이 예수님한테 붙어있는 어린아이가 우리가 힘으로 능가할 수 없는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하다.’ 왜, 주님께서 직접 관리하시고 말씀의 작품으로 만들어낸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솜씨입니다.
갈라먹고 강탈당하고 빼앗기는 것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어린아이 같은 그런 영혼이 아니면, 그런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들 겁니다. 하지만 진짜 어린아이는 뭔가 내 뜻대로 안되고 빼앗길 때 ‘아,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 자리에 이미 틀을 잡아놨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보다 위대한 천국의 소자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례요한을 부러워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비참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은 사람, 하지만 세례요한에게 붙어 있던 사람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면 천국이요 예수님께서 은혜주지 아니하면, 계시주지 아니하면 지옥인 것을, 우리가 그것을 따질 없이 그저 받는 입장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서 내 뜻대로 나를 기쁘게 하면서 살던 생활과 주님 기쁘게 하는 생활과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평생 동안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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