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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0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 : 레위기 - 종말의 종말강의레위기

2010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 : 레위기 - 종말의 종말

이름 : 관리자(IP:220.81.136.209)

2010 여름 수련회 : 레위기 (종말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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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136.209)

10-08-01 18:38

종말의 종말 (레위기)

십자가마을 2010 여름수련회 레위기 종말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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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136.209)

10-08-02 08:43

2010년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

레 위 기

주제 : 레 위 기
강사 : 이근호 목사
일시 : 8 월 1 - 3일
장소 : 경북 성주군 가야산 호텔(054-931-7771)

2010년 여름 수련회 강의안 (레 위 기)

2010-06-30 11:31:49 이름 : 이근호

Ⅰ

삶의 자리와 장치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해답이요 계시의 결과로 존재한다. 주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논하는 주체가 아니다. 사람이 성경을 본다든지 속으로 하나님에게 질의하는 것은 본인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자리를 드러내는 것이 된다. 평소에 인간의 자리를 깔고 살아간다. 자신의 몸이 하나이듯이 자신의 자리도 하나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오해다.

예를 들면, 철수가 말하기를 “땅거미가 지고 있다” 또는 “모든 결과는 그 원인을 가진다”라고 말을 했을 때, 우리는 철수가 이 두 가지 발언의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그의 자리는 하나만이라고 본인이 장악하고 있는 입장이 아니라 수시로 그 자리가 뿜어내는 다양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만들어 준 공간 속에 인간이 ‘자신만의 자리다“고 우기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고정된 덩어리로 머물지 않고 양파껍질처럼 지속적으로 뜯겨지면서 계시를 보여주게 된다. 고정적으로 붙들고 싶어도 말씀 앞에서는 실패한다. 따라서 만남이 성사되는 경우에 있어 성도는 하나님께 어찌해서 이런 해답이 주어졌느냐 물으면서 역으로 살펴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만남을 진행하는데 있어 애초부터 두 개의 장치를 마련하셨다. 이 두 장치는 모두 인간에게 딜레마를 안겨준다.

1. 생명나무라는 장치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2. 선악과라는 장치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이 딜레마 배경 하에 인간을 만드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다. 이 창조과정에서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해석을 드러내실까?

3. 성경 해석

구약 시절과 신약 시절의 성경해석의 차이를 보인다.

(1) 구 약

‘나를 위한 나’를 세우기 위한 해석이 가동된다. 결코 나를 제거하기 위한 해석이 나올 수 없다. 주어진 말씀을 보고서 현재 자신을 그 말씀이 요구하는 자신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진다.

(2) 신 약

나 말고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나’를 발굴해서 드러내기 위한 해석이 가동된다. 이 ‘숨겨놓은 나’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있기에 예수님의 작업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그와 동시에 ‘나를 위한 나’는 끊임없이 제거되어야 한다.

이런 차이는 선악과 / 생명나무의 존재로 인한 차이이기에 인간의 몸은 이 나무들과 관련된 말씀이 튀겨져 나오는 그릇으로 구성되어 버렸다. 마치 드럼 북 위에 물을 붓고 막대기를 맹렬하게 난타하면 그 표면에 물방울이 사정없이 튀듯이 인간의 몸도 끊임없이 말씀이 튀어나오는데 이것 외에 다른 용도는 없다.

인간의 몸은 말씀으로 하나하나 분해가 된다는 말이다. 의학적으로 보면, 근육 따로, 뼈 따로 되겠지만, 실은 모두 흙뭉치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그 흙을 가지고 말씀의 진리됨을 드러내려 하신다. 인간은 없다는 말이다. 단지 선악과/생명나무를 설명하는 그 와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조형물로 등장한다. 쥐포를 찢으면서 먹게 되면 그 현장에는 결국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듯이, 인간도 말씀으로 쪽쪽 찢어 분해하면 인간은 사라지고 거기에는 말씀 구조와 관계성들만 남는다.

마치 불가마 속에서 자신이 만든 흙토기가 맹렬히 태운다고 해서 토기장이가 섭섭해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옥과 저주의 맹렬한 불로 태우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손상이 가는 일은 없다. 그저 모든 것이 말씀대로 진행될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말씀의 튀김 속으로 사라지고 난 뒤 그 말씀의 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Ⅱ

1. 움직이는 시내산

출애굽에는 목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누구를 만나야했다. 애굽에서 자신들이 호출시킨 그 분이시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자기만의 목표나 목적은 제거된다. 오로지 언약의 하나님의 언약 성취만을 위하여 동원될 일꾼들이다. 시내산에서 제시한 하나님의 목적은 ‘거룩’이었다. 이 거룩이 이스라엘 속에 합세하신다. 이는 곧 시내산이 통째로 이스라엘에 삽입되는 것과 같은 형편이다.

그런데 시내산의 삽입 와중에서 돌판은 깨어졌다. 이는 곧 저주가 기정사실화되었다는 말이다. 인간편에서 이 일방적 거룩의 침투에 대해서 인간은 군말할 입장이 못된다는 뜻이다. 저주가 계속 주어져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이 이스라엘이요 곧 인간세상이다. 단지 이스라엘은 언약을 증거하는 사명 때문에 언약의 위력 덕분으로 날마다 거룩과 동행하면서 언약증거라는 조건 하에서 축복받으면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거룩(언약)을 버리는 날, 그들은 여지없이 언약대로 저주받는다. 이로서 축복 중에서도 거룩의 위상은 살아있게 되면 저주 속에서 거룩의 위상은 살아있게 된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은 어떤 양상으로 계속 생산해내시는가? 그것이 바로 ‘피흘림 사건’으로 드러난다.

2. 레위기의 전체 구조

레위기는 ‘피’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을 정점으로(16장 대속죄일 상황) 양쪽에 제사법(1장-15장)과 성결법(17-27장)을 배치해놓았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과 동거, 동행하는 형편에서 도출되는 거룩은 오로지 ‘피’로만 가능하다. 다른 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이는 온 우주가 ‘피흘리신 분 중심’으로 자리매김 하시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오직 ‘피’를 통해서다. 다른 우회로는 없다.

‘피’ 안에서 인간도 죽고 하나님도 죽었다. 드러나는 것은 피흘리고 죽으신 하나님만을 위한 우주 뿐이다. 다른 세계관은 환상에 불과하다. 생명은 피에 있다.(17:11) 하나님의 피만이 생명인 것을 고백하고 그 피를 섬기는 것이 교회(행 20:28)요 이스라엘이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자기 소유이신 이스라엘 안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담아놓은 책이다. 이는 소유성이 피 안에서의 교제성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보이는 피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제하므로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나타내고자 하신다. 따라서 피를 발생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없고 교회라 할 수 없다. 피의 의미를 위해 교회가 있는 것이지 교회를 위하여 피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발생된 피는 인간으로서 하여금 ‘언약 위반자’로 몰아세운다. 피를 유발케 한 그 죄를 근원적으로 추적하시는 것이다. 이로서 피를 모르면 죄도 모르게 되어있다. 피를 만나야 죄가 드러나고 알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늘 피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언약 백성의 운명이다.

3. 거룩의 생산

모세 언약에 의해서 거룩한 장소인 성전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고서도 일에 종사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희생 제물의 대리 죽음의 원칙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성소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는 제사장뿐이다. 방금 성소 안으로 산 채로 걸어 들어 왔지만 실은 짐승의 죽음을 바탕으로 해서이다. 그렇다면 대리 죽음을 근거로 해서, 대리 죽음에 둘러싸인 채 존재하는 자들이 제사장들이다.

이 제사장에 의해서 다음 5 가지의 제사가 행해진다.

(1) 번 제

향기로운 제사이다.(1:9,13,17) 생명을 태워서 내는 향내다. 생명 유무는 피 유무로 따진다. 따라서 제단이 필요하며 피가 나오지 않는 식물성 예물은 번제 제물에 해당되지 않는다. ‘생명은 피에 있다’는 말씀은(17:11) 의도적으로 ‘다 태워진(다 바쳐진) 생명체’로서만이 표현할 수 있다는 경우를 염두에 둔 말씀이다. 따라서 생명은 필히 제단과 결부된다. 이런 점에서 소제(식물성 예물로 드리는 제사)와는 차이난다. 그리고 제물의 일부만 태우는 소제나 화목제와도 차이나고 또한 제단이 아닌 진 밖에는 모두 불사르는 속죄제와도 차이난다. 제사장이 입맛 다실 고기는 이 제사에서는 얻을 수 없다. 제물은 주로 수컷이지만 암컷도 있다. 짐승은 소와 염소와 양이라는 등급을 갖는다.

(2) 소 제

피 없는 제사다. 그래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내 나는 제사다.(2:2,9) 짐승 제사에 곁들여지는 보조적 제사다. 예물은 고운 가루로 만들어서 드려야 합니다.(2:1) 따라서 곡식이 주재료다. 그것도 처음 익은 곡식 열매이어야 한다. 제물의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그 가족의 몫으로 돌아간다.(2:3,10,12-13) 하지만 꿀과 누룩은 금물이다. 제물을 발효시키기 때문에 순수성이 떨어진다. 소금을 필히 쳐야 한다. 동물성 기름은 배제되고 식물성 기름과 유향을 섞여야 한다.

특별히 제사장 자체가 드리는 소제가 따로 있는데, 절반은 아침에, 잘반은 저녁에 드린다.(5:11/6:19-23/민 5;15/출 16:36) 이 소제는 속죄제와 같은 성격이 있어서 제사장이 전혀 먹을 수 없고 온전히 드려져야 한다.

(3) 화 목 제

자원하면 아무도 드릴 수 있다.(3:17/7:11/17:5) 불이 필요한 제사로서 하나님께 향내나는 제사가 된다.(3:11,16) 제물의 일부만 하나님께 바쳐지는데 주로 짐승의 내장과 기름과 피이다. 피는 제단에 뿌려지고 고기는 제단에서 불 태워진다. 나머지 중의 한 몫은 제사장 몫이 되는데 ‘흔든 가슴살’과 ‘오른편 뒷다리 근육’이다. 또한 남아 있는 부분은 제물을 드리는 자에게 되돌려진다. 서원을 위한 화목제물이었다면 하루 더 연장해서 고기를 남겨둘 수가 있다. 그러나 3일 째까지는 안된다.

화목제의 짐승 제물에는 암, 수 구별이 없다. 짐승제물과 더불어 무교병(누룩이 들어있지 않는 떡)과 유교병(누룩으로 부풀러진 떡)과 과자를 같이 드리도록 되어 있다.

(4) 속 죄 제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무의식중에 위반했을 때 드리는 제사다.(4:13,22) 고의로 범죄한 죄에 대해서는 자복하면 경감되어 용서받을 수 있다(5:3-4) 경범죄는 중인, 사체, 부정, 맹세에 관한 허물들이다. 그러나 고의로 범죄한 중범죄는 용서가 안된다. (20장에 목록이 나와 있음. 몰렉제사, 신접한 자나 박수의 추종, 부모에 대한 저주, 동성애, 각종 불법성교, 수간 등) 이처럼 고의로 범죄한 중범죄를 용서할 제사는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를 모독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고의로 범죄하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추방된다(민 15:30-31) 곧 비언약적인 이방인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속건제와 차이점은, 속죄제는 하나님에게 지은 죄를 용서받은 것이요, 속건제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의 기구들을 잘못 다루었든지 아니면 이웃에게 범죄하거나 손해를 입힌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고자 하는 제사다

속죄제물은 진 밖에서 태워진다.(4:11-12) 번제는 짐승의 가죽만큼은 태우지 않으나(1:6) 속죄제에서는 짐승의 가죽마저 다 태운다. 대상에 따라 짐승 제물의 등급이 매겨져 있다. 제사장의 죄를 위해서는 수송아지가 동원된다.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해서도 역시 수송아지다. 족장의 예물은 흠없는 수염소이며 일반 백성의 예물로서는 흠 없는 암염소이다. 하지만 형편에 따라 암염소가 부담이 되면 암양으로도 할 수 있고 그것마저 부담되면 산 비둘기나 집비둘기로서도 가능하다. 이것도 부담되면 고운 가루과 기름과 유향을 드리면 된다.(5:11- 13)

소제에는 제물에 안수하지 않지만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제, 속건제에는 제물에 안수를 한다. 피는 휘장에 뿌리는데 이는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는 화목제나 번제와 차이난다.(1:5,11,15) 또 회막 안에 들어있는 향단 뿔에 이 피를 바른다.(4:5-7) 생축의 기름과 콩팥은 번제단 위에서 불태우고(4:8-10), 나머지 가죽과 내장은 정결한 곳에서 불사른다.

(5) 속 건 제

하나님과 사람에게 물질적 보상 차원에서 실시하는 제사다. 그 보상은 피해액수의 20%를 더 추가한다.(5:15) 역시 부지중에 범죄한 죄에 대해서만 해당된다. 자기 죄를 일단 시인해야 하는데 긴가 민가하는 것도 속건제 사항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서는 범한 죄를, 예를 들면 속죄제의 고기를 모르고 먹어서 나중에 알게 되었거나,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때, 제사장이 아닌 보통 사람이 회막 안 진설병을 먹었을 때가 이에 해당되는데 제물을 수양으로 한다. 이 때 범과한 성물의 20%를 따로 내어야 한다. 타인의 물건이나 재산에 손해를 입힐 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남의 물건을 맡아서 분실했거나 도적질 했을 경우나 저당 잡았다가 분실했거나 거짓 맹세를 한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역시 20%을 더 얹어서 보상해야 한다.(6:1-7) 제사 절차는 속죄제와 같다.

질병을 당했다가 낫게 될 경우나(14:1-15:2) 성별된 나실인으로 구별되었다가 다시 그 몸을 더렵혔을 경우에도 속건제를 드린다.(16:12)

(6) 대속죄일 제사

두 마리의 염소를 뽑는다. 한 마리의 염소는 여호와를 위하여, 다른 염소는 아사셀을 위함이다. 아사셀 염소는 이스라엘의 죄를 짐 지고 거룩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멀리 떠나는 역할을 한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속죄제를 드리게 된다. 그 다음 대제사장과 그 가족을 위하여 수송아지를 가지고 속죄제를 드리게 된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향을 피워서 연기를 만들어 내어 속죄소, 즉 증거궤를 흐릿하게 가려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대제사장은 죽는다.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7번 뿌린다.

또 백성을 위한 염소를 드려서 속죄제를 올린다. 피 뿌림은 수송아지 경우와 같다. 그 이후에 수송아지 피와 염소의 피를 제단의 모퉁이 뿔 위에 주위에 바른다.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 7번 뿌려서 이스라엘의 부정에서 제단을 성결케 한다.

그 뒤 대제사장은 살아있는 한 마리의 염소 머리에 안수하면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고하고 미리 정해놓은 사람에게 시켜서 그 염소를 광야로 보낸다. 아사셀 염소를 보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고 난 뒤에서 진 안으로 도로 돌아올 수 있다. 속죄제의 제물의 가죽과 고기와 똥은 밖에 내어져 불사르게 되고 여기에 종사한 사람은 그의 몸을 씻어야 다시 진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

4. 거룩의 적용 - 씨와 땅을 위하여

언약백성의 씨 보존은 이스라엘에게 권한 있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거룩의 반복만이 씨(핏줄)를 씨답게 할 수 있다. 이 씨가 이어지는 것을 ‘생명’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행한 이삭 바치는 제사 안에는 ‘대적의 성문’을 여는 능력이 있어 씨와 땅의 보존을 위하여 필요한 효과를 보여준다.(창 22:17) 땅의 보존도 이스라엘에게 권한이 있지 않다. 거룩이 반복될 때만 땅은 씨(핏줄)를 위해 필요한 환경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씨의 거룩과 땅의 거룩의 훼손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 이스라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한 개인의 개별적인 거룩이 집단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도 그 거룩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즉 개인별로, 집안별로, 가문별로, 지파별로 계속 그 덩치가 커지면서도 거룩성의 결집에서 이탈되지 않아야 한다.

마치 여러 가지 물건을 한 사람의 손에 잡혀 이동이 가능하게끔 고리와 손잡이를 만들어 묶는 것처럼 각 사람의 거룩들이 일관된 성격을 보여주는 오직 하나의 거룩에 예속된 형식을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 집결된 거룩은 오직 언약에서만 나온다. 그래서 언약적인 혈통, 언약적인 땅 만이 언약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거룩에 위배된 비언약적 행태들이 개인별로 혹은 하부조직 조직에서 발생이 됩니다. 전체 언약 유지를 위하여 그 썩어진 비언약적 거룩은 떼어버려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서의 탈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땅과 씨에서의 추방이다. 추방의 방식은 사형, 끊어짐, 자녀없음으로 나타난다.

거룩한 땅이나 혈통으로부터 내뱉어짐의 경우는, 몰렉 희생제사, 혼백 부름과 마법, 부모 저주, 이웃의 아내와의 성행위, 가족 간의 성행위, 동성 간의 성행위, 짐승 간의 성행위, 월경하는 여인과의 성행위 등이다. 즉 이스라엘에게 있어 인간의 혈통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몸의 만족도와 자연적인 본능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혈통 보존을 위한 성행위에 있어 여자 배우자의 몸은 남성 배우자의 몸으로 통합된 것으로 취급받는다. 그렇지 아니하고 이 점이 혼란스러운 가족 단위는 거룩을 품지 않는 가족이 되어서 가문, 혹은 지파라는 상위 집합체로부터 비거룩에서는 징벌로서 제거 당하게 된다. 사전에 이스라엘 거룩의 단일성을 훼손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시키기 위함이다. 근친상간 금지를 통해서 오직 ‘하나됨’이라는 양식으로 거룩을 뭉쳐 보이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지속적인 분류작업이 상위 계층에서 주어지는 단일적인 거룩성에 기준해서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가난이라는 이유 때문에 땅을 팔았더라도 그 땅의 소유권을 다시 되돌려 줄 수 있는 자격자(나 대신 나의 토지를 다시 찾아주는 것)는 같은 가문(근족, 혹은 집안)에만 해당된다.(구속救贖의 의미) 친족이 이런 구속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면 그 땅의 언약의 땅이 되지 못하고, 언약의 땅은 언약이 아닌 자를 거부하는 속성을 발휘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죽음을 배척할 수 있는 생명의 진수를 언약적 거룩 속에서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생명이 누락이나 결핍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 관계를 성사시키는 생명의 반대 세력을 의미한다.

레위기 10:10에 보면,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holy / common과 unclean / clean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속된 것(common)을 둘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이다. 곧 정한 것(clean)과 부정한 것(unclean)이 바로 그것이다.

정한 것은 성별되는(sanctify) 과정을 거쳐 거룩하게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부정한 것은 성별될 수 없고 그저 정한 상태가 될 뿐이다. 예를 들면, 레위기 18장에 나오는 ‘가족 내 여성관의 성관계 금지 목록’은 부정한 것에 해당되며 그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그의 아내 뿐이다. 또한 이 관계만이 부정되더라도 다시 속함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금지규정을 어긴 경우에는 다시 속할 수 없고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제거 대상을 위한 구분이다. 즉 거룩하지 않는 모든 것은 골라 내어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땅에서 함께 동거가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접촉 정도가 아니라 인간 몸 자체에서 직접적인 부정이 더 심각한 부정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가 함께 드려지는 경우도 있다. (12:6/15:15) 죄의 경중에 따라 제사의 요구와 요건이 달라진다. 이것은 제사의 등급과도 관련있다.

5. 제사장의 거룩성

거룩이란 ‘분리’와 ‘완전무결’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만족해야 한다. 이러한 속성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격적인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면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공간이 분리란 , 진(camp)의 안과 밖, 진 안의 성소와 그 외의 공간을 구분하는 것이다. 악성 피부병을 앓는 자는 진 밖으로 나가서 머물러야 한다.

시간의 분리란, 일반적인 시간과 거룩한 시간의 분리다. 안식일과 대속죄일과 무교절(23:4-8), 두 번째 곡식 바치는 절기(23:15-22), 초막절(23:33-36) 등의 거룩한 모임을 여는 절기에도 생업을 돕는 일을 할 수 없다.

신분상 제사장과 일반인과의 분리도 성립된다. 제사장은 오로지 가까운 가족의 시신만 만질 수 있다.(21:2-4) 그러나 대제사장은 제사장과는 달리 일체의 시신에 가까이 할 수 없다. 심지어 부모가 죽더라도(21:10-11). 또한 대제사장은 절대로 성소를 떠나서는 아니된다.(21:12). 대제사장은 처녀만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ㅎ다.(21:13-14) 제사장에 대해서는 이혼한 여자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나 그리고 창녀와는 결혼을 금지하지만 과부에의 혼인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21:7-8)

과연 제사장에 있어서 거룩은 무엇이며 안수의 의미는 무엇인가? 제사장의 거룩은 개인적인 선한 의지력에서 자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덧입혀진다.(출 28:3-4) 하지만 거룩한 옷만 걸친다고 해서 그들이 계속 거룩한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제사장들이 타민족간의 전쟁이나 내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성소 안에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해되는 경우들을 소개해 놓고 있다. 즉 거룩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자는 이 거룩한 공간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1-2)

제사장의 작업이 거룩 안에서 이루어지는가 아니한가 하는 점은, 제단에서 제물을 불사르는 제단 불의 취지와 부합되는가에 달려 있다. 제사장을 거룩 되게 만들었던 모든 제물의 피와 기름도 일단 제단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불손에 거쳐 간 희생 제물의 피와 기름이어야 한다. 실제로 아론과 모세 사이에서 속죄제에 대한 규정 해석을 놓고 다른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다. 모세의 의견에 의하면, 일반인들이 드리는 속죄 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6:17,26) 하지만 제사장이 드리는 속죄 제물은 먹어서는 안 된다.( 4:11-12/8:17) 모세는, 제사장들이 속죄 제물의 고기를 먹지 않고 그냥 불에 다 태운 것 때문에 화를 내었다(10:16-18) 그 때에 아론이 이런 대꾸를 한다.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10:19-20) 즉 아론은 제물에 대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가 아니 받으시는가에 대한 기준이, 모세가 주장하는 것처럼 속죄 제물의 고기의 먹고 안 먹고 우선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에 의해 심판의 불을 받고 죽어 버린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마침 오늘 자신들의 죄를 씻는 행위로 속죄제와 번제를 먼저 드렸던 적이 있다.(9:8-21) 모세가 명한 그대로 시행했다. 하나님도 이 속죄제와 번제에 대한 만족스럽다는 표시로 제단에서 불이 나와 그 제물을 흠향하셨다.(레 9: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답과 아비후는 죽고 말았다. 이와 같은 원칙에 입각해 볼 때에 아론이 규정대로 속죄 제물의 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행위만을 가지고 아론 자신을 선하게 볼 리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함은 보다 더 근본적인 규정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속죄제물의 고기를 먹고 안 먹고 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죄제물이 제단에서의 어떤 경로를 밟아서 죄 씻는 법으로 규정화 되었느냐를 봐야 한다. 제사장이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거룩한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지속적으로 제단 위에 있는 희생 제물을 태우는 그 하나님의 의도와 같은 정신 속에 계속 놓여 있어야 한다. 이로서 모든 희생 제물들이 반드시 제사장의 손을 거치게 되어 있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출산 후에 여인이 드리는 제물은 제외하고) 이 사실은, 제물이 지향하는 바가 제사장의 운명 안에서 집결이 된다.

도대체 제물의 규정들은 어떤 차원에서 실시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의 반복성과 현재성에 있다.

6. 심판 속에서 긍휼

(1) 성 소

이스라엘 진영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성소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진리의 장이다. 모든 성스러움은 여기서부터 흐른다. 이 장소에 있는 거룩의 충만이 이스라엘 전역에 넘쳐나는 원천 구실을 한다. 이 지역이 금지된 구획인데 거룩에 의해 독점된 장소이다. 이로서 성과 속을 분명히 구분하겠다는 것이다. 감히 들여다보거나 접근해서는 안 될 장소다. ‘만남의 장소’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성전세’로 충당된다.(출 30:12-16) 부한 자라고 더 내는 것도 아니요 가난한 자라도 덜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세는 ‘목숨 값’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어떤 존재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모두다 일반이다.

하나님과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만남에는 인간의 죽을 목숨과 하나님의 거룩과의 만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산 채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목숨 값을 지불한 덕택이다. 이 ‘목숨 값’이 회막과 성전을 지탱케한다는 것은 속전의 지닌 구원 지시성과 회막(성전)의 기능과 상호 관련 있음을 알려준다.

17:3-4에 보면,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양이나 염소를 진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 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라고 되어 있다.

가축을 잡을 때 회막문을 일단 거쳐야 된다는 것이다. 회막문을 물론 이스라엘 전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모세’의 만남 안으로 지속적으로 예속시키려는 것이다.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출 29:43) 하나님은 모세를 회막에서 부르시고 또한 거기서 만나셨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레 1:1)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단 한 통로로 굳혀진 있는 상태이다. 회막에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기 때문이다.(출 20:24) 인간의 모든 이름으로 거부하고자 하시는 바로 그 이름이다. 따라서 이 공간에서의 피흘림을 하나님의 철저하게 단죄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땅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오직 한 공간에서만 생겨나는 ‘피’를 주목하게 하신다. 생명은 바로 그 피에 준해서 제공된다.(17:9-11)

심판의 장소는, 심판을 드러내는 증거물이 있으며 긍휼의 장소도 긍휼의 증거물이 있다. 그런데 이 심판의 장소와 긍휼의 장소가 같은 성막 내에서도 구분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곧 지성소와 성소의 구분과 또 성소와 제단 뜰 사이의 구분이다. 이 거룩의 구분은 누가 어디까지 들어 갈 수 있느냐로 측정된다. 지성소는 다수의 사람들이 드나들도록 되어 있는 곳이 아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는 점과 오직 대제사장 한 사람이, 그것도 지정된 날짜, (대속죄일) 그 한 날에게만 지성소 안에서의 대면을 허락했다는 것은, 1년 내내 모든 성막의 활동도 오직 대제사장이라는 한 사람을 겨냥하고 대속죄일이라는 한 날의 가치를 향해 전개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단 뜰은 제물의 희생으로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경험하는 곳이다. 거기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활동한다. 하지만 긍휼을 인가 받는 장소는 오직 지성소뿐이며 그것도 대제사장 한 사람에 의해서 일을 치러져야 될 곳이다. 이것은 타 제사장이나 레위인과의 차별성을 극도로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심판은 보편적이지만 긍휼은 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역할로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의 자리는, 심판과 긍휼의 원칙이 작용하고 성과 속이 만나는 지점이다. 출애굽기 20:24는 이점을 제사로 표현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2) 제사장과 도피성

제사장은 어떻게 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는가? 그것은 언약과의 만남 때문이다. 즉 희생 제물 때문이다. 희생 제물의 피가 제사장의 옷과 몸에 직접 바르게 되어 있다. 제단도 희생 제물의 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된다.(출 29:19-25) 피란 생명을 뜻한다. 피는 생명과 일체이다.(17:10-14) 제사장이 희생 제물의 피를 입어 거룩하게(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은 희생 제물 자체의 거룩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제사를 드림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거룩한 사람에 의해서 희생 제물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비록 백성들의 신체나 옷에 희생 제물의 피가 묻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 없다고 간주하는 것은 제사장이 백성들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정리되어야 한다.

첫째, 백성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꼭 거룩한 인물인 제사장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제사장 자신의 죄를 씻는 제사장은 누구인가?

둘째, 백성들이 제사장처럼 직접 옷이나 신체의 일부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거룩한 백성이 된다면 왜 제사장도 같은 백성의 일원으로서 직접 신체에 피를 묻히고 옷에 묻혀야 거룩한 사람이 되는가?

위의 두 가지 물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지는 제도가 바로 도피성 제도이다. 부지중에 사람을 죽여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된 자가 보호를 받는 제도이다. 그에게 사적인 복수를 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그가 제사장이 상주하는 도피성에서 제사장과 함께 거주하기 때문이다.(민 35:22-28) 도피성이란 제사장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하나님으로 인해 우연히 발생된 살인사건은, 비록 그 와중에서 한 사람의 생명이 억울하게 하나 죽었지만 이 억울한 생명의 희생은, 역설적으로 살인자 생명의 보호라는 측면으로 하나님의 일은 계속 이어지는데 이 와중에서 ‘제사장과 더불어 있음’이 가져다 주는 대리 징벌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살인자 죽임’이 ‘제사장 죽임’으로 대리 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은 오로지 인간 자체의 정의성에 맡길 수 없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자비 행위에만 그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제사장 언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바는 이스라엘의 모든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관리되는 대상임을 천명하고 그 ‘살려주심’에 의한 거룩을 위한 ‘살려주심’임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이 사실에는 ‘대신 속죄’가 핵심이 되어 있다. 진정 모든 백성이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그들을 대신 하는 지파가 존재하고 그 지파가 또한 직접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그런 관계 안에서 수립하도록 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 이라 처음 난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민 3:11-13)

Ⅲ

하나님의 거룩 앞에 인간은 거룩하지 못한 존재로 드러난다. 따라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죄가 된다. 거룩하지도 못하는 자기가 의식되면 모든 행함의 방향이 자기 위주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본인이 해 낼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되고 따로 분류해 놓게 된다. 그것이 온전한 섬김에 방해물을 만들어낸다. 하나님의 거룩은 이런 자아를 계속 처단한다.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속죄가 꼭 필요할까? 그냥 말로서 “용서한다”라고 하면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참으로 속죄가 성사되었다면 남은 죄가 없고 남은 저주도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아예 인간은 방치해 두어도 여전히 죄가 나올 수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죄가 쏟아져도 무시하겠다는 말인지 어느 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속죄 이후에 죄가 여전히 나온다면 이는 속죄 기능에 한계가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즉 속죄 능력 자체가 바닥을 드러내었다는 식으로 단언해도 무방한가?

속죄 능력이 인정한다면 그 이후에 ‘∼하라, 혹은 ∼하지 말라’라는 명령과 권면이 거론 자체가 의미없는 것이 아닌가? 새삼스럽게 명령을 하시려고 한다면 ‘무슨 죄를 지어도 속죄했다’라는 단서가 무색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

거룩이 성사되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을 위한 거룩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거룩이 오직 예수님의 피에만 근거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성도를 죄인으로 혹은 의인으로 다루신다. 이 점을 가지고 마치 “우리 성도는 죄인도 되고 의인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피를 위하여 쓰여지는 입장이 바로 피조물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원수 된 자, 경건치 못한 자, 죄인 된 자를 통해서 예수님은 피를 흘려야 했고 그들을 의인되게 하기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8-11)

그래서 피가 성도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이 피 안에서 살게 된다. 성도를 위하여 피가 생긴 것이 아니라 피를 위하여 성도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성도의 복은 이 피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체가 피에 잠그는 것이 복이다.

김대식(IP:124.♡.87.52)

10-08-12 22:47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100801레위기1강종말의종말a

2010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레위기[종말의 종말] 1강

(강의 : 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모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이 이 말씀 속에 있사오니 이 말씀 속에 들어가서 헤엄칠 수 있고 그것이 우리를 살려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번에 우리가 수련회에서 할 것이 레위기인데 창세기, 출애굽기 그 다음에 레위기 나오죠. 레위기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생중계됩니까? 레위기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전에 뭐가 있었다는 겁니다. 창세기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출애굽기 있고 그 다음에 레위기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쑥 레위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레위기에 들어갈 때 그전에 뭐가 있었느냐? 멀리까지 갈 건 없고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게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레위기보다 먼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여기서 뭐가 툭 튀어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온 거예요. 그것도 먼저 아브라함이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고, 불러내셨고 거기다 약속 주니까 아브라함이 믿게 되어서 믿은 결과로 의가 나온다는 거예요.

여기는 뭐가 없느냐 하면, 행함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인간이 행했다는 게 없다 이 말이죠. 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4장이나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의롭지 않았다. 행함이 없다는 거예요. 행함이 없다는 말은,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데 법이라는 걸 거치지 않고 의가 나와 버린 거예요. 뭘 지킨다는 말입니까? 법이 없는데. 하늘나라 가는데 그냥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의가 나왔단 말이죠. 여기에 우리가 어떤 걸 지키면 의가 생겨서 구원받습니까? 하는 우리 쪽에서 뭔가 시도하려고 하니까 우리 쪽에 시도할 게 없어요.

없다는 말은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법이 없이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은 거예요. 하라, 하지 마라 없이 구원받은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레위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이 주셨던 아브라함의 언약의 특징입니다. 뭘 지킵니까? 지킬 게 있어야 지키죠. 법이 있어야 지키지, 줘야 지키지. 없는데. 그 뒤에 레위기 나온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레위기가 그전에 있었던 아브라함 언약의 구조를 이걸 망칠 것인가? 이걸 취소시킬 것인가? 이걸 부셔버릴 것인가? 이제 궁금하단 말이죠. 레위기는 법이 주어져 있고, 그 앞서 있는 언약에는 지킬 법이 아예 없고. 우리 보고 어떡하란 말이에요. 지키란 말이지, 법이 없다는 말이지. 어느 쪽이 우선인지 도대체 정리가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믿음으로 갑시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그냥 갈게요.’ ‘그래?’ ‘그러니까 레위기 법 준 것 취소하세요. 괜히 있어봐야 신경 써지니까 법 없이 합시다.’ 이래 나올 수도 있고. 아브라함 믿음 줘 놓고 뒤에 법이 주어지니까, ‘그렇다면 이 법을 다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앞에 있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되었다는 그 약 올리는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치시던지. 괜히 남 약 올려놓고 뒤에 법주고 헷갈리게 만들고. 그럴 필요 뭐가 있느냐?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과 430년 뒤에 주어진 법이라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을 취소시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언약을 분명하게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대전강의에서 제 나름대로 쉽게 표현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게 리모컨이라면 티비가 있단 말이죠. 리모컨을 누르니 티비가 나왔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누른 건 행함으로 말미암아 티비가 나왔다고 오해를 하기 마련인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이것과 상관없이 티비가 나오는 거예요. 행함 관계없이 이것 눌러야 나온다는 그런 법적인 요청 없이 그냥 티비가 불쑥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리모컨 뭐가 필요합니까? 하나님 아쉬울 때 마음대로 티비가 열리든지 하세요. 영상이 나오고 안 나오고를 하나님 마음대로 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리모컨을 누르게 하는 거예요. ‘그것 봐. 화면 나오는 건 네가 누르는 것과 상관없지.’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대충 이제 감이 오십니까?

아브라함 언약을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아브라함 언약을 살리고, 살려주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하느냐? 법 지키는 것 상관없어, 상관없어. 이게 저쪽을 살리는 거예요. 거짓말 같이 안 느껴집니까, 이 말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천당이야? 아무개 명단해서 천국 보내면 될 텐데 왜 법이란 것을 지킴과 무관하면서 이걸 지키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우리 내부에 이미 법적인 요소가 있기 그래요. 우리 내부가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법적인 요소가 있어서 우리는 내부를 까바리고 그걸 토해내면서 천국에 몰입하도록, 거기에 빠져 들어가도록, 거기에 반해버리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내부에 뭐가 있느냐 하는 것은 꼬챙이로 우리 배를 쑤시면 돼요. 쑤시면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행함으로 구원받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행했으니까 나는 의로운 사람 맞아.’ 그런 선악적인 요소가 똥처럼 가득 차있는 거예요. 그러면 팍 쑤시는 거예요. ‘이런 게 들어 있잖아. 그러니까 천국 가는 것이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오류가 자꾸 나오잖아.’라는 것은 폭로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은 너의 행함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야.’라고 대조하면서 대비하면서 가는 겁니다.

이 대비를 어렵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 몸의 대비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레위기를 ‘너’라는 몸으로 봤을 때 그때 인상과 느낌과 우리 말고 예수님께서 레위기를 보면서 웃으면서 ‘이 이야기네.’ 하고 예수님께서 레위기를 살피면서 보는 그런 인상과 같을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레위기를 보면서 ‘인간들 레위기 보고 오해 많이 하겠네. 이 레위기 나보고 이야기하는 걸 인간들은 자기 딴에 선악과 따먹어서 전부다 자기가 지키는 용도로 가져갈 것 아니야. 수고해. 해서 어떻게 그게 멸망되고 어떻게 그게 저주가 되는데 나중에 혹독하게 느낄 거야.’ 이렇게 한다 말이에요.

그 일을 단군의 자손에게 시킨 게 아니고 그 일을 이스라엘에게 시켰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상당히 특이한 민족이에요. 굉장히 특이한 민족입니다. 어떤 점에서 특이하냐 하면, 인간이 이 정도로 죄의 굴레에 빠져있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민족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의 하신 모든 것을 이 정도로 곡해하고 오해할 지경이다.’라는 것을 전 인류를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유대나라 민족이 뭘 지키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첨병으로 거기에 쓰여지죠. 고린도전서 2장에서 십자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은밀한’, 다른 말로 내밀한. 더 쉬운 말로 감추어진 것.

은밀하게 감추어져서 아무리 인간들이 온 인류가 달려들어도 꼭꼭 숨겨놓고 들키지 않는 은밀함.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것, 그걸 십자가라 합니다. 이 은밀한 것을 잠시 맛 보여주면, 그때야 ‘야 이게 십자가구나.’ 알게 되고, 맛 보여주지도 않는데 저희끼리 십자가라고 돌아다니는 가짜가 되는 거예요.

뭐 고난 받는 것이 십자가다, 어떻다 하는데 그것은 불교의 도 닦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소리고, 십자가라 하는 것은 고난 받고 이것과 상관없이 그냥 내밀한, 은밀한 것을 이렇게 살짝 알려주면 비로소 아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알려주는 사람에게만 맛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십자가라고 고린도전서에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우리 수련회 교재제목을 [종말의 종말]이라 했죠. 김재성 집사님 오셨습니까? 왜 묻는가 하면, 이렇게 예쁘게 작품으로 따로 만들어놨어요. 강사용으로. 이거 했다고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이 제목을 단 이유가 인간들이 종말은 자기의 죽음이라는 여기까지가 한계에요. 내가 죽는 것이 종말의 끝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죽게 되면 그동안 의미 있던 것도 다 사라지죠. 내가 믿는 하나님도 내가 사라짐으로서 하나님도 같이 사라지고. 내가 좋아하는 부동산, 동산, 사랑하는 가족들 내가 죽으면 다 의미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꺼져버리면 동시에 세상도 꺼져버리는 거예요. 다 없어지는 거예요. 있더라도 나하고 상관없습니다. 주인장이 죽으니까 보고 있는 내가 죽으니까 있으나마나 나하고 상관없지요.

그래서 종말이라는 것은 사람의 종말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 은밀한 종말이 아니에요. 진짜 종말은 여기에다 뭘 플러스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종말이란 거예요. 하나님의 종말이라면 하나님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죽으심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서 새삼 해석하겠다는 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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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47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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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