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은혜 (새순교회에서 퍼온 이능우 집사님 글입니다)
주님의은혜 (새순교회에서 퍼온 이능우 집사님 글입니다)
이름 : 강구만(IP:211.224.68.54)
주님의 은혜
불볕 같이 따가운 햇볕의 열기가 기승을 부리는 이때
가야산 계곡에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소리가 이 무더운 날씨에 왠지 기다려지네요.
비단 계곡에 흐르는 차가운 물 뿐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을 더욱 시원케 할 복음의 메아리가 더 기다려지는 것이 아닐련지.
이 무더위와 세상 삶에 찌던 마음을 잠시나마 주님의 피로서 거저 주시는 영생의 말씀에 푹 잠기고 훌훌 털어버리고 싶을 뿐입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는 없고 한시도 잠잠히 있지 못하고 나부대는 인간의 근성.
가만있으면 허전하고 뭔가도 모르게 불안한 가운데 늘 좌불안석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확정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그래서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면서도 불안한 가운데 행동을 하게 되고
이러한 불안을 줄이기 위해 힘이 될 만한 것들을 자꾸만 끌어 당겨 모아야만 마음이 놓이고
또 모든 것이 자기 주변에 꼭 배치되어 있어야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한 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정녕 죽으리라하신 그 말씀에 갇혀 버린 몸이기에
자신이 자신을 지켜야 된다는 그러한 강박감에서 늘 죽음에서 오는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죽음의 두려움을 스스로 벗어 버릴 수가 없겠죠.
이것이 마귀의 권세 속에 놓여 있는 죄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한계이겠지요.
마귀는 늘 우리에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 주는 것은 힘이요
힘만이 생명을 유지하는 자리라고 유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 아담의 몸에서 태어난 본성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구조 속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 자연적으로 몸에 익힌 구조 탓이기도 한 것이겠지요.
이 세상의 구조 속에서는 자신이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 할 수 없다는 긴장감이 늘 자신을 사로잡고 옥죄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일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힘을 소유하지 못해 살아 갈 수 없는 것이 눈에 보이는 현실입니다.
힘은 돈이 될 수도 있고 권세와 명예도 될 수도 있겠지요.
권세와 명예도 결국 돈을 모으는 수단에 불과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주님에게 유혹한 것이며 또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인간의 배후에는 늘 마귀가 장악하고 있답니다.
마귀의 권세에서 스스로 빠져나갈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겠죠.
하나님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은 마귀가 유혹하는 힘과 하나님의 말씀과의 전쟁터 입니다.
이 전쟁이 말씀이 들어 있는 성도의 마음속에 날마다 처절하게 일어 날 수밖에 없겠지요.
하나님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눈으로 보며 확인되는 것이 아니기에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만이 이 말씀을 알아듣고 이해 할 수가 있겠지요.
육이 생각하는 생명과 영이 생각하는 생명은 다른 것이기에 알아들을 수가 없겠지요.
자신의 현재 살아있는 육체 이것을 유지하고 연장하는 하는 것이 인간들이 생각 할 수밖에 없는 생명의 한계 입니다.
이 육체는 죄로 인해 썩고 부패되고 멸해야 될 몸인데 말입니다.
이 썩을 몸이 하나님의 피 뿌림을 입지 못하면 결국 저주받아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에 들어 갈 수밖에 없는 저주의 몸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사망이라고 하지요.
성경 속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은 또 다른 현실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으로써는 알 수가 없겠지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어진 성령을 받은 자만이 말씀을 통해 알 수가 있으며
이 세상은 마귀가 장악하고 유혹하여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주님을 철저히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저주의 세상입니다.
빛을 제거해버린 어둠이요 죽음만이 지배하는 장망성이요 불 심판 받아 멸망당해야 마땅한 죄악으로 가득찬 곳이며 안개처럼 사라져야 할 헛된 세상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세상에 힘을 비축하여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칠 수가 있을까요.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예비해 두신 자리가 있음을 안다면 모든 것에 감사하며 주님에 십자가 공로만을 자랑하는 나그네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 갈 수가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십자가 피가 죄인의 몸에 덮어 씌워지면 그 몸은 주님의 사랑 입은 새로운 구조 속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속량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율법으로 죄인 됨이 들어 났기에 죄를 용서 받는 것은 주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피로서 새로운 몸을 입게 된 자는 주님의 사랑과 용서함을 받아 어둠과 죽음의 저주에서 불러내어 기이한 생명의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며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 되시는 분을 즐거이 찬양하기 위하여 세움을 입은 몸이 되겠지요.
이러한 몸은 이미 주님의 십자가를 품은 성령을 통해 자신을 위해 사는 주체는 죽고 오직 주님의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주체만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러한 사실들을 고맙게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주고 그러한 길을 가도록 강권 하신답니다.
창세전 약속된 말씀을 한 말씀도 떨어짐 없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서 성령님을 통해 성도에게 일방적으로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위해 죄도 없으신 자기 아들을 대신해서 피를 흘려 죄 값을 모두 지불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며 결정체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율법과 뜻이 온전히 완성 된 것이구요.
또한 성령님은 성령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만을 자기 백성에게 드러내시고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흔히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갈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자신도 예수님처럼 말씀을 지키며 성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자들은 주님께서 왜 홀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되는지
그래서 우리들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대신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 위에서만 온전히 다 이루어야 되는지를 성령님에 가르침이 없으니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죄인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지켜서 일방적으로 죄인에게 덮쳐져서 주님의 다 이루심을 은혜의 선물로 안겨주셔야만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 하고 성령을 받아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하며 오히려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더욱더 분명히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성령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 하신다고 하십니다.
인간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죄 인식 즉 선악과를 따먹은 토대 위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선과 악의 기준을 책망하시면서 주님의 십자가 피를 믿지 못함이 죄라는 것을 고발하며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주님을 죽인 확정적인 증표입니다.
그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죄인 아님을 부정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을 해도 십자가 앞에서 죄 밖에 나올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며 자신의 육의 욕망만 추구 할 수밖에 없는 죄인 중에 괴수임을 철저히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본성이 주님을 십자가에 죽일 수밖에 없음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다가오시는 주님임을 성령으로 알아갈 때마다 그 심령은 상한심령이 되는 것이며 왜 주님 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셔야만 되었는지 그 이루심에 깊이 공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은 자의 모습이요 사랑을 입은 자의 반응이 아닐까요?
말씀을 통해 자신이 늘 책망 받아야 마땅함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도 당연함을 알고 시인 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하나님 하시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선하시며 자신이 하는 것은 모든 것은 악할 수밖에 없음에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심에 고마워하고 감사 할 밖에 더 있겠습니까.
죄인에게 있어서 소망은 오직 십자가에만 있을 뿐입니다.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은 오죽 했으면 십자가만 증거 하겠다고 했으며 자신을 곤고한 자로써 사망의 몸에서 자신을 건져 내어 주실 분은 십자가 지신 주님 밖에 없음을 외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 한다고 고백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만으로 만 해결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윗도 자신의 죄로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우리가 죽여 놓고 그 죽음을 통해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 받는 이것은 인간의 지혜와 상식으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하나님의 지혜요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이미 주님이 주시는 용서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자신이 당연히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인 것과 용서의 혜택을 입게 되는 자임을 안다는 것이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지 아니하고 주님에 관여하심이 없으면 자신이 참으로 저주 받아야 될 죄인중의 괴수임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죄가 계속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가 마냥 좋은 것은 우리의 이러한 모든 것을 아시고 불려 주시고 의롭다고 해주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우리가 한 것은 죄 짓는 것밖에 없지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에게 죄를 알게 해 달라고 했으며 또한 용서 해달라고 애원한 적이 있든가요.
하나님이 지적하는 죄를 알아야 뭘 빌든가 하지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지금까지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집 사람은 머리가 자주 아파요.
병원에 가도 특별한 원인도 모르겠고 너무 아파 할 때는 어찌 해야 좋을지 답답한 마음에 그저 발만 그저 동동 구릴 뿐 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가짜 남편을 의지하지마시고 진짜 남편 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볼 뿐입니다.
그럴 때 마다 나와 함께 있는 내 아내가 아니라면 이렇듯 내 마음이 아플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죄인은 모든 것이 자기 몸 중심 일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가까운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환자 본인의 아픔만큼이나 실제로 자신의 아픔이 되지는 않습니다.
분명 한 몸이 아닌 분리된 몸이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아파하기 전에 이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아픔을 겪으셨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당하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우리 대신해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이미 주님에 한 몸의 지체로 있기 때문에 주께서 모두 다 대신 담당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이러한 아픔과 고통조차도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를 깨닫게 해주시는 사건들입니다.
아파 봐야 안 아플 때 자기 자신의 잘남이나 어떤 조건 때문에 안 아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살핌과 은혜로 즉 십자가의 공로로 건강히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아픔이 없으면 인간은 자신의 몸은 당연히 건강해야 하고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어
야 되고 자신의 육의 욕망이 일으키는 대로 만사가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죄인의 모습이다.
이러한 죄인의 모습을 통해 얼마나 자신이 이기주의며 모든 것이 자기 몸 중심으로 생각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가를 알아야 하며 모든 환경과 여건이 오직 하나님의 십자가 공로를 들어내시기 위해서 배치되어진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 갈 뿐입니다.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저주 할 자에게는 저주를 주시는 주님의 약속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환경과 여건이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주체이신 주님께서 창세전 하나님과 계획 하시고 그 계획하신 시나리오가 말씀의 실타래가 하나하나 풀러 나가듯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대로 다 이루시곤 다시 오실 약속만을 남겨 두시고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신 것입니다.
이제 말씀만이 이 세상에 있으며 그 말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의 보내심을 입은 자만이 그 말씀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믿지 못하고는 전적으로 주님의 권한에 달려 있습니다.
죄인은 그저 믿어지면 믿을 뿐이고 믿어지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인간의 손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코스대로 실타래 풀려나가듯이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죄들이 하나하나 보여주는 삶이 되겠지요.
날마다 자신의 새로운 죄를 바라보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또한 죄가 더한 곳에 주님의 은혜가 더욱더 넘쳐 남을 날마다 체험하게 되는 것이 또한 성도입니다.
성도가 아닌 자에게는 십자가 비밀이 가려져 있기에 주님의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와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가는 평생 동안 자신의 죄악을 그 머리위에 계속 쌓을 뿐이며 영원한 저주의 심판 받을 날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성도로서 그들을 바라보면 자신도 그들과 똑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시혜와 은혜를 입은 사실에 남모를 기쁨과 즐거움에 감사하며 그저 어안 벙벙해 할 뿐이죠.
왜 인간이 주님이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왜 자신이 주님을 살해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에게 이러한 엄청난 용서의 사랑을 주시는지를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날마다 깨달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외치게 되는 것이 이젠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이러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 세상 것의 생명도 되지못한 것에 마음이 빼앗겨 고민하고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신을 보노라면 참으로 한심스럽고 저주 받아도 할 말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늘 성도의 삶 중심에서 책망하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기에 성도는 말씀을 외면 할 수가 없으며 또한 주님께서 교회에 말씀의 은사를 받은 자를 세워서 주님의 교회 머리되심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더욱 알아가게 하시고 지체들 간에 말씀에 교제를 갖게 하시며 서로가 주님의 한 피를 받은 몸의 지체로서 십자가만 증거되며 바라보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몸이기를 원하시고 창세전 계획 하신대로 만들어 가십니다.
한 몸 안에 여러 지체가 있으매 한 지체에게 말씀이 임하여 한 몸 안에 있는 지체에게 말씀이 증거 될 때 한 성령 안에서는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 하는 자도 그 순간 자신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증거자 자신도 자신의 말씀에 의해 복음을 듣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기에 한 지체에게 말씀이 주어져 선포하는 것은 모든 지체에게 말씀이 각각 주어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의 한 지체를 세워서 말씀을 증거 할 때 여려 지체가 같이 공감하며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을 찬양할 때 이것이 진정 주님의 몸 되신 교회가 아닐까요?
한 피를 받은 형제들의 모임 속에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의 교제는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이러한 복음을 천사들도 듣고 전하기를 흠모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자신의 쓸데없는 자존심과 세상 것을 사랑하는 모든 것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이 죄악임을 알려주며 자신의 죄인 됨과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하신 그 사랑 앞에 더 이상 무슨 욕심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죄인 된 육신에서 나온 이러한 욕심들을 주님께서는 끝까지 가져가게 하시겠지요.
왜 그럴까요?
주님은 죄가 더한 곳에 주님의 은혜가 더욱더 끝까지 넘쳐 남을 드러나기 위해서 입니다.
죄 가운데 살며 죄를 발산 할 수밖에 없지만 날마다 주님의 피로서 가림 당하는 의인 그래서 성도는 죽을 때까지 죄인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인인 것입니다.
성도 안에 주님이 계시기에 날마다 성도의 삶속에서 자신의 추악한 죄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역사하여 날마다 죄인을 죽게 하시며 하나님의 의가 성도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마귀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리고 어리석게 보이게 하여 자신의 죄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게 합니다.
죄가 그 속에서 왕 노릇 할 뿐이죠.
죄의 마지막 값은 죽음이라 그래서 늘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젠 죄인을 대신한 자기 아들을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무엇이 부족 합니까?
우리에게 자신의 피로 생명을 주신 주님.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줄 것은 다 주었으며 성도는 받을 것은 다 받은 것입니다.
오늘 죽는다 해도 주님께 영광 돌릴 것 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자리는 이미 하늘에 있으며 그 자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려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 찬양만 할 자리가 이미 준비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부된 성도의 자리입니다.
이한례(IP:119.♡.121.61)
10-07-28 08:49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끓을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各人)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감사합니다!!
성재필(IP:221.♡.137.77)
10-07-28 20:35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늘 새로운 소식이군요^^ 이 소식을 제대로 알지못하면서도 멀리 사회주의 나라까지 가서 복음 전하는 선교사로 자처하며 밥먹고사는 오랜 친구에게도 이글로 대신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copying 해도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