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7:11-17 (울지 말라)
눅 7:11-17 (울지 말라)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203)
본문 : 누가복음 7장11-17절
제목 : 울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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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7-25 13:34
울지 말라
2010년 7월 25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7:11-17
(눅 7:11, 개역)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눅 7:12, 개역)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눅 7:13, 개역)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4, 개역)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5, 개역)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6, 개역)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눅 7:17, 개역)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 일행과 어떤 장례행렬의 우연한 만남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멈추게 했습니다. 죽은 자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어서 울고 있습니다. 이것이 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요 예상한 바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예상 못한 일을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 믿고 난 뒤 기대하고 있는 ‘새로운 사람 되기’와 전혀 상관없는 조치로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상하는 ‘새 사람되기’란 단군 신화에 나와있는 파와 마늘을 100일 동안 먹고 사람되는 식입니다.
즉 사람이 성사 시킬 수 있는 방식을 통해서 인간들은 새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열심과 지극 정성이 묘책이 될 것입니다. 참고 견디면 곰도 인간 되듯이 언젠가는 인간도 신이 될 수 있으리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만들어내시는 새사람은 이런 식이 아닙니다.
도리어 현재 새 사람되려고 애쓰는 그 인간을 저주와 심판과 지옥과 연결시켜버립니다. 즉 인간이 세상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추호도 하자나 잘못이 없는 합당한 조치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살기 힘들고, 외롭고, 욕망을 다 충족되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이유로 신의 사랑에 비해서 비정상적 상황이라고 간주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힘들어 하면서 우는 것은 자기 행실과 행위와 본성에 맞추어볼 때 너무나도 합당한 대우입니다. 사실 더 가혹해야 합니다. 더 처참하게 망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지독한 형벌이 인간에게 주어져도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항변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을 만해서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신을 그려냅니다. 당연히 가짜입니다. 사람은 늘 무너져야하고 늘 울어야 합니다. 운다고해서 그것을 근거로 구원해 줄 필요성을 하나님은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울고 또 울고 영원히 울어야 될 자를 울게 했을 뿐입니다.
그 어떤 동정이나 연민의 이유로 작동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을 삶의 동반자로 여기며 삽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보호 속에서 온갖 저주나 발상사를 사전에 미리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게 되면 그런 것들이 한이 되고 통곡으로 방출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었다고 우는 이 과부는 자신의 소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져내린 것입니다. 만약에 이 여인을 신을 믿고 있었다면 자신이 믿는 신도 함께 무너져내린 바가 됩니다. 그 여인이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날아가버린 것입니다. 자존심이 날아갔다는 말은 더 이상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 줄 그 어떠한 떤 법도 자기에게 일체 남아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면 꼭 법을 염두에 두고 생각합니다. 즉 신의 존재함은 신이 내려준 법의 존재함을 통해서 접근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법해석은 기껏 자신의 자존심의 발로일 뿐입니다. 자신이 죽게 되면 그 하나님도 같이 사장되어버립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신과 더불어 있는 자기만의 삶의 환경을 꾸미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는 마당은 그 신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참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은 말씀과 언약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기대한 하나님과 충돌과 대립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서 신을 믿지만 신의 등장은 인간들로 하여금 도리어 울게 만들고 잃게 만들고 심지어는 죽게 만드는 힘으로 나타나십니다.
희망 걸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새 사람 되겠다’는 의식 자체가 죽어 마땅한 자들의 상투적인 종교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산 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의 몸은 실은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하나님 것인 몸뚱아리를 근거로 거기서 ‘자아’를 조성해놓고 그 자아를 위해 충성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허점을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은 죽음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서 그것으로 자신을 계속 살게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는 글씨가 아니라 사라져야 될 글씨입니다. 골로새서 2:14-15에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잠시 우리에게 보여주고서 사라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말씀을 배우고 익히기 이전부터 이미 온 세계는 그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2-7에 보면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믿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와 함께 있어 저주라는 합당한 조치를 취하고 계셨고 결국에는 우리를 죽여버리십니다. 말씀은 사람의 손을 떠나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모든 능력한 한 지점으로 달려와서 완성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입니다. 즉 십자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은 새 사람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 방법은 법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백성 아닌 자를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자에게 불쑥 나타나시는 식으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 근거는 오직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래서 이 피를 가리는 것들이 모두 이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여기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지점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