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20:10-13 (쌍방 복수)
렘 20:10-13 (쌍방 복수)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203)
본문 : 예레미야 20장10-13절
제목 : 쌍방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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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0-07-14 20:56
쌍방 복수
2010년 7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0:10-13
(렘 20:10, 개정)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렘 20:11, 개정)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렘 20:12, 개정)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렘 20:13, 개정)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말은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불신자들로부터 너무나도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즉 “네가 너를 존중하고 네가 너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처럼 나도 나를 존중하고 나의 의견을 고수한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복음 전하는 너희들이 이 권리를 무시하느냐?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들은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잘라 버리고 단지 입이 나불거리면서 외치는 예레미야의 그 육신의 행동만을 가지고 취득해서 자신들의 육신과의 동등됨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쌍방 고소해보자고 나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나는 옳고 너희들이 틀렸다”고 말해야 할까요? 흔히 교회에 와서 쉽게 구원받고 싶어합니다. 목사가 성경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대신해서 교인들에게 쉽게 구원받은 방법을 제시해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막상 직접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상호 안 맞아 보이는 대목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미술관에 가서 동양화 그림을 보려고 할 때에, 그 미술관에 먼저 도착한 어떤 사람이 작품을 가로막으면서 외치기를, “이 그림 별로야”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그림도 보지 않고 도리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그림이 별로하고 평해도 본인이 직접 그림을 봐야 합니다.
그것처럼 성경을 직접 대해서, 과연 우리 자신이 구원을 쉽게 받겠다는 그 의식 자체가 옳은 생각이냐 하는 것조차 점검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11:25-26의 말씀인,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말씀이 실감나려면, 정말로 우리가 죽을 지경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안다고 여기는 것과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이 믿는 자 맞다고 인정해주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괜히 스스로 최면을 걸 사항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우겨도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즉 소녀 신데렐라 발에 맞는 유리 구두는 왕자 쪽에서 미리 준비되어 있어 신데렐라를 기어이 공주 만들어 버리는 식입니다. 발에 신발을 맞추는 식이 아니라 신발이 발에 맞도록 변형되는 식입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게만 이런 혜택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레미야는 ‘아담 안’이라는 원칙에 준해서 아담과 비교해서는 아예 없는 존재입니다. 즉 아담만 있고 자신은 없는 존재라는 것이 말씀에 입각해서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적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여전히 아담 따로 있고 자기 자신은 따로 있습니다. 눈 부릅뜨고 봐도 여전히 자신은 그 자리에 있다고 우길 것입니다. 말씀이 그들을 말씀대로 축복이 주어지는 사람으로 만들어내지를 않고 있는 겁니다. 이들에 있어 자아란 사화가 만드는 겁니다.
자아란 개인과 사회가 만나는 지점에서 수립됩니다. 낯선 타인이 자기에게 다가오면 인간은 반기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 본인도 미처 몰랐던 본인의 본 모습 중에 일부를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아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에 찾아오는 가족이나 타인들의 관계선상에 발생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통일된 자아성을 쥐게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자아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 이전에 벌써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세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선지자는 말씀 세계가 지니고 있는 그 깊숙한 깊이 속에서 자아를 새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인간은 죽은 존재가 됩니다.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계획 잡혀있는 바가 이미 선지자의 해야 할 일로 삽입되어 들어와 있으며 그 일을 근거로 하나님의 앞 일이 전개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의 자아성을 하나님의 계획 앞에 소용없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음을 압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즉 자아를 타인과의 대결 대상자로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한 나는 여기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불쌍한 아이가 교회에 와서 목사에다 다음과 같이 항의합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가출했고 나는 굶고 있고. 이럴 경우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도와준 것이 뭐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럴 때 복음을 아는 목사가 해줄 말은 오직 이것 뿐이다. “너는 지금 없다!”고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여기 있다’고고 여기는 것은 주변 사람들과의 마주침에서 발생되는 겁니다. 그 불쌍한 아이에게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교회 목사가 보인 겁니다. 그래서 목사와 자신을 비교해 볼 때, 자신이 형편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서는 목사에게 대드는 겁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어도 되는 내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즉 “하나님, 제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간에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감사거리입니다”라는 고백을 내놓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고백의 차원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쪽으로 책임을 미뤄버립니다.
자신이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있음을 결코 자기로 인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게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예레미야의 존재 의미는 말씀 선포입니다. 그의 전 일생이 그러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있다’고 여긴다면 악마는 ‘그 있음’을 기점으로 해서 구원해 봐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보쌈당해서 성사될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말씀대로 존재하게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0-07-16 11:07
071-렘20장10-13(쌍방복수)-jer100714
2010-07-16 10:01:06 녹취 : 오용익
071-렘20장10-13(쌍방복수)-jer1007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0장 10절부터 1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0:10-13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하시는 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서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에서 들었던 것,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골라잡은 것과 실제 성경과 동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를 들어보면 설교는 구원받는 데는 참 쉬워요. 간단하게 되어 있어서 우리는 설교시간에 매우 만족합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책을 보게 되면 왜 그리 복잡한지, 이걸 꼭 알아야 구원받는지, 그런 생각이 한 두 번 드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읽는다고 치면 창세기부터는 진도 좀 나가다가 레위기에 딱 들어오면, 내가
꼭 이것을 알아야 구원받는지, 이것을 모르면 지옥 가는지 그런 회의가 듭니다. 그것은 성경자체, 말씀자체에서 말씀을 만나는 것 하고 목사라는 중간 인물을 걸쳐서 만나다 보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따지는 것도 성경을 보면서 따져야 되는데 자꾸 엉뚱하게 목사를 보면서 따지는 거예요.
목사를 보고 따진다는 말은 본인이 직접 성경말씀과의 교류가 안 일어나니까 목사보고 따지는 겁니다. 목사가 이야기하는 그것은 목사 자기 이야기입니다. 목사 자기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거든요. 미술관에 갔는데 먼저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여기 전시된 그림 별로네.’ 하는 그 소리를 듣고서 그만 미술관 들어가 보지도 않고 그냥 돌아갔다는 사람 봤습니까?
진짜 별로인지 내가 한 번 보자, 하고서 그림을 직접 보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덩치 큰 사람이 그림 앞에 버티어 서서 ‘아이고, 그림 별로네.’ 하니까 뒤에 있는 사람이 그 인간의 덩치만 보고 ‘별로라고요? 알았어요.’ 하고 그냥 돌아간다면 그 미술관에 왜 왔어요. ‘비켜보세요. 나도 좀 보게. 그림 좋은데 뭐가 별론데?’ 이렇게 나와야 정상이죠.
‘내가 보니 이렇게 그림이 좋은데 네가 혼자 생각하기에 별로라고 한 거야? 내가 보기에 아주 좋은데, 나는 감동이다.’ 이러한 자기고백이 있는데 교회 교인들이 성경 보는 수고를 안 해요. 직접 성경 보는 수고를 안 하고 목사가 자기 대신 성경보고 대신 자기 감상을 우리에게 전달하면 그것을 그대로 받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 입에서 좋은 소리 나오잖아요. 성당의 장례식에 가 봤는데 신부가 무슨 설교 하는가를 들어봤어요. 굉장히 쉬워요. 어떤 여중생이 자살을 했는데, 이미 자살한 그 애를 천당 보내려고 장례를 치르는 거예요. 요한복음 11장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그 대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굉장히 간단해 보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그런 소리 들어보지도 않았어요. 가족들이 강제로 장례를 치르는 것인데 요한복음 11장의 그 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맞거든요. 그러면 그 말이 맞으려면 우리가 어떤 지경에 있어야 되느냐하면, 우리가 죽을 지경에 있어야 돼요.
성경은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세종시 문제는 수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교회에서 제직회 같은 것을 해서 변경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제직회는 아무 소용도 없어요. 목사가 뭐라고 선포하든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본인이 성경말씀이 믿어져야 돼요. 본인이 믿어야 돼요. 한 경직 목사 믿어도 소용없어요. 소용도 없는 인간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김수환 추기경도 소용없어요. 본인이 믿어야 돼요. 본인이 이 성경을 믿었을 때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나의 입에 말씀을 쏙 집어넣은 것이 됩니다. 고기 한 점 집어넣고 냉면 한 젓가락 입에 넣어주듯이 ‘주님께서 이 말씀을 집어넣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목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직접 이 말씀을 나에게 집어넣은 것이 진짜 주님이 집어 넣은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알아서 믿는 척 하는 식으로 집어먹은 것인지를 가려내는 일을 목사가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목사는 애초부터 구원이 안 되는 쪽으로 설교 할 수밖에 없어요.
어찌되었든 구원은 안 된다는 겁니다. 목사가 성경을 해석할 때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어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소용없습니다. 애초부터 천국 가는 일은 안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애쓰고 용쓰고 열심 내 봐야 소용없습니다. 자기가 용쓰고 애쓰고 수고한 그것이 멋있어 보이는 모양인데, 그거라도 안하면 너무 허전해서 하시는 모양인데 애초부터 천국은 막혀 있었고 안 됩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그때부터 깜짝 놀라서 ‘왜 목사님은 천국 가고 싶어도 안 된다고 합니까?’ 제가 안 된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밀어냅니다. 천국 문을 닫아 놓고 주님께서 밀어내요. 천국 오겠다는 사람 밀어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런 겁니다. 천국에서 자기 아들 사진을 딱 들고 있어요. ‘천국 갈사람!’ 하니까 수천만 명 모였어요.
수천만 명 모였다고 천국 문 안 열어줍니다. 사진대조에 들어갑니다. 수만 수천만이 모여도 소용없어요. 그 사진에 맞는 사람 찾습니다. 신데렐라 동화에서 남자가 유리 구두 들고 그 동네 다 찾아 헤매도 억지로 발가락 유리 구두에 구겨 넣어도 소용없어요. 그 발에 딱 맞는 사람 골라서 그 사람만이 나중에 공주가 되지요.
말씀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에서 하는 가장 보편화된 거짓말입니다. ‘성경을 여러분들이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하는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좀 어렵게 예를 들까요? 신데렐라 예를 듭시다. 신데렐라라는 그 소녀도 왕자님의 신부가 될 수 없어요. 왕궁에 못 들어갑니다. 그 언니들도 마찬가지고 아무도 왕궁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런데 유리구두가 움직이는 유리구두가 되어서 신데렐라의 발이 구두에 맞는 것이 아니고 구두가 발에 딱 맞춰놓고 ‘맞네. 신발 잘 맞네.’ 그러는 거예요. 이거 이해 못하면 안 되는데 큰일 났습니다. 구두가 발을 찾아가서 맞추는 거예요. 신데렐라도 마찬가지예요. ‘내 구두다.’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애초부터 우리 구두는 없어요.
우리 구두는 없고 누구 구두만 있느냐 하면 예수님 구두밖에 없잖아요. 예수님구두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억지를 부려요. 맞지도 않는 세리와 창기에다가 구두를 신기고는 ‘맞네.’하고 일방적으로 그러는 거예요. 아벨이 제사할 때 제사법 몰라요. 가인이 아벨의 제사법이 있었다면 컨닝을 했을 겁니다. 미워할 필요 없어요. 그대로 드리면 되니까.
‘동생, 나 좀 봐. 네 제사는 하나님이 받았다면서? 제사법이 어떻게 되는데? 음 알았어.’ 자기도 그대로 드리면 하나님이 받겠지요. 이것은 평소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가인은 기를 쓰고 같은 제사를 드려도 가인의 제사를 안 받습니다. 받을 자만 받고 안 받을 자는 안 받는데 그것은 창세전에 주께서 이미 심중에 담아 놓은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과 한바탕 붙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놓치면 안되는 게 뭐냐 하면, 예레미야 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모태로부터 이미 하나님의 종으로, 선지자로서 택정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적들은 그게 없어요. 적들은 예레미야 속에서 ‘쟤는 창세전부터 선택받았어.’ 그걸 찾아내지를 않습니다.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 주제에……’라고 해서 본문 10절에 보면 ‘어이, 나도 너 고소할게, 너도 나 고소해라. 어느 고소가 맞는지 보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예레미야야, 너를 보니 우리한테 없는 것이 있네.’ 예레미야가 ‘뭐가요.’ ‘너는 창세전부터 선택되었네.’ 이런 소리를 불신자가 하는 법이 없어요. 불신자가 절대로 그런 소리 안합니다.
만약에 불신자가 성도보고 ‘어이, 너는 창세전부터 예정되었네.’ 비꼬는 것 말고 진짜 진지하게 ‘야, 가만 보니 너 예정되었다.’라고 한다면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정 안 된 나는 그냥 지옥 갈게.’ 그런 소리밖에는 안되거든요. 그 말을 다시 줄여보면 ‘나는 지옥 가야돼. 나는 지옥가도 마땅한 인간이야.’ 라는 것을 진지하게 느끼는 그런 불신자는 없습니다.
곧 죽어도 자기는 잘났고 남은 지옥가도 자기만큼은 천당 갈만한 존재라고 우기는 것이 불신자들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예레미야가 한소리 하니까 저쪽에서 약이 올라서 ‘에라, 너를 하나님께 고소하겠다.’ 해서 서로서로 고소해서 누가 더 완벽하고 누가 더 철저한지를 비교해볼까, 하는 식으로 적들이 나온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없어요.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요. 만약에 예레미야가 있어버리면 그 있는 예레미야가 구원받으면 다른 사람들도 다 구원받아야 됩니다. 예레미야는 어디까지나 죄인중의 한 사람입니다. 죄인중의 한 사람이기에 예레미야가 죄인으로서 죄인중의 한사람으로 있다고 한다면 예레미야는 뭘 대변하는 게 되냐면 모든 죄인을 대변하는 게 돼요.
아담에 속한 인간은 아담이 범죄 했으면 모든 인간이 다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담 앞에서 그 뒤에 있는 엘리야든 이사야든 예레미야든 세례요한이든 우리든 다 없습니다. 없고 누구만 있으면 되냐 하면 아담만 있으면 돼요. 예레미야가 깨달은 것은 뭐냐, 하나님은 아담만 상대하지 나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때 이미 예레미야는 아담 속을 벗어난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를 공격하는 사람은 ‘아담, 제가 뭔데, 나도 여기 있는데’ 하고 아담도 있고 내가 있다고 해버리면 그 사람은 무슨 관계를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은 아담만 다루는데 아담하고 나하고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안 믿고 거부해버리는 게 돼요. 어렵지요. 성경이 이렇게 상당히 어려워요. 목사를 거치지 않고 성경을 직접 보게 되면 성경말씀 하나하나가 조화가 안 되고 이것이 모순되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예레미야가 진짜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면 둘이 진짜 멱살 잡고 싸웠을 거예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그런데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누구한테 호소하느냐하면 하나님께 호소해요. 이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의 특징은 항상 내가 있다고 여기는 순간 적들이 와르르 몰려와서 ‘너 거기 있지. 한 번 당해봐라.’ 본문대로 하면 ‘우리가 유혹을 받았다고? 너도 한번 타락해봐라. 우리보고 타락 했다고? 너도 타락했어.’ 라고 마치 사람들이 나를 있는 것처럼 같은 레벨에서 같은 수준에서 ‘네가 잘났어, 내가 잘났어? 같은 인간끼리 해보자.’라고 나올 거예요. 예레미야가 만약에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면.
그런데 예레미야 속에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 작용하게 되면 예레미야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후다닥 어디로 도망하느냐 하면 주님한테 도망가 버려요. 주님한테 도망가 버리면 저쪽에서 하는 말이 ‘어이, 겁쟁이! 왜 우리하고 싸우다가 도망가나. 비겁하게 도망가지 말고 네가 믿는 주님이 있으니 우리 사나이답게 일대일로 하자.’고 자꾸 붙들 거예요.
저의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뭘로 돌리느냐 하면 예레미야가 자기 사적인 견해에 의해서, 저도 그런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사적인 견해에 의해서 우리를 정죄한다, 라고 들은 거예요. 한국교회가 문제 있다고 하니까 거의 백발백중 듣는 이야기가 ‘한국 교회가 다 문제 있나? 아닌 사람도 있는데.’ 이런 소리를 많이 듣거든요.
‘한국교회 문제 있다.’를 성경을 두고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은 무엇을 일부러 빼냐하면, 성경이야기를 다 빼버립니다. 성경이야기를 다 빼버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네 사견이고, 그것은 네가 어떻게 남의 사정을 아느냐.’ 라고 나옵니다. ‘네가 어떻게 남의 사정을 알아.’ 지금 예레미야가 그 꼴을 당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하나님, 좀 개입해 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저쪽에서는 하나님 잘라버리고 ‘네 생각은 그렇지만 네가 알기는 뭘 알아. 네가 어떻게 남의 사정을 다 알아.’라는 식으로 반박하는 거예요. ‘네가 우리를 이렇게 정죄했으니 너도 한 번 정죄를 당해볼래? 좋다. 고소한다. 누가 옳은지 해 볼까?’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 있어서 그들이 마지막 버틸 수 있는 것은 뭐냐, ‘여기 버티고 있는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천국에 내 힘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있는 내가 있는 나를 만들어서 천국 보낼 수 있다.’는 거예요.
12절을 보겠습니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하려면 평소에 내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 쉽게 말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기적으로 다가와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목사로서 복음 전하는데 있어서 제일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 내가 꼭 이 세상에 있어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부터 먼저 물어봐야 됩니다. ‘하나님, 저 여기 있습니다. 힘들어서 괴롭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천국 보내주세요.’ 자꾸 있다고, 내가 있다고 여기면 성경에서는 해답이 없어요. 뭐부터 따져야 되느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것이 왜 여기 있어야 됩니까? 없어도 괜찮잖아요. 나라는 것이 이 20세기, 21세기에 걸쳐서 안 태어나도 괜찮잖아요. 내가 대한민국이라는 남한 땅에 없어도 괜찮은데 왜 나는 여기 있어야 됩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교회 와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렇게 아버지는 병들어 누워있고 어머니는 집나가 버렸으니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세요. 우리 가정 돌봐주세요.’ 하면서 기도해서 남들처럼 밥이라도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목사 입장에서는 답답한 것이 ‘아버지 병들었고 어머니는 집 나가고 너는 굶고 있다는 그 자체를 감사하라는 말이야.’라고 하거든요.
제가 ‘감사하세요.’라고 하면 ‘지금 배고픈데 어떻게 감사가 됩니까? 당신 같으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당신 같으면 되겠느냐’ 하는 거예요. ‘당신 같으면’ 제가 아까 계속 이야기 했잖아요. ‘예레미야야 너 같으면 그렇게 하겠느냐, 남의 사정도 모르고.’ 그러거든요.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너는 여기 없거든!’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나는 지금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지금 거기에 있는 거예요. 혀를 나불나불 놀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너 거기 있지? 나 여기 있고. 누가 더 훌륭한지 하나님 앞에 고소해 보자. 너도 고소하고 나도 고소하고 맞고소 해보자.’
그래서 10절에 나오지요. “……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잘 들어 보세요. ‘예레미야야, 네가 너 보기에 잘난 인간 맞지? 그렇지? 그렇다면 나도 나한테 잘난 인간이거든.’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 성경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예레미야는 그런 뜻이 아닌데, ‘여러분, 나는 이 자리에 내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본인들이 없다고 생각하고, 없는데 왜 있어야 되는지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 보세요.’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왜 있어야 되는지. 아버지는 병들어 누웠고 엄마는 가출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자기는 굶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환경과 상관없이 ‘왜 내가 여기 있어야 되는가.’입니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어요.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주변의 사회와 자기하고 만나는 가운데 자기가 있어요.
사람은 혼자 있으면 내가 누군지 모르지만 옆에 누가 나타나면 내가 등장하거든요. ‘나’라는 것이 어느 지점에 있느냐 하면 남이 나에게 나타났을 때 그 남과 현재 내 몸의 그 사이에 ‘나’가 있어요.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 평소에 혼자 사는 남자는 여성에 대해서 몰라요. 그런데 갑자기 어떤 여성이 나타나서 ‘나는 당신 같은 아저씨가 좋아요.’ 하는 경우에 그 때부터 ‘내가 저 여자를 좋아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마음이 약간씩 조마조마 해 지지요.
그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가 나의 삶의 경계선에 나타났을 때 그 경계선에 있는 여자에게 뭔가 반응을 나타내면서 좋으면 좋다고 혹은 나쁘면 나쁘다고 뭔가 내 마음을 전해야 될 그 지점에서 전에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내가 새롭게 발견되는 겁니다. 말을 어렵게 했지만 간단한 것은 그거예요.
누군가가 나타나면 ‘저 사람은 내가 예상치도 못했는데 예상치는 못했지만 뭔가 말은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말을 할 때 ‘나는 당신 같은 여자를 참 좋아해요.’ 하고서 ‘내가 미쳤지. 왜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본인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 여자를 만나고 난 뒤에 내가 평소에 저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했다는 것,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 그 경계선에서 생기면 그것이 새로운 자아로 정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예쁜 여자, 미스코리아 진 김 ○○이 나타나니까 ‘아이고, 이 여자는 생긴 것도 아니네. 저 여자가 키도 크고 인물도 좋네. 저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다.’라고 나왔을 때, 이것은 그 두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내가 미처 몰랐던 거예요. 내가 설마 그럴까 했지만 그 경계선에서 새롭게 자아가 발생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느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어이, 예레미야, 고소해라, 나도 고소한다.’ 이렇게 예레미야 앞에서 자기의 악마적인 요소가 드러나는 하나의 막이 있다면 성도는 누구 앞에 서느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주여 제가 왜 있습니까?’라고 설 때 그게 성도의 자기가 몰랐던 진짜 모습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 가출하고 자기는 굶고 있을 때 ‘하나님 아버지, 그렇다면 저를 왜 만들었습니까?’라고 할 때 비로소 자기의 원래모습, 자기가 자기에게 질문 못했던 것, 그저 남들처럼 돈이나 벌고 남들처럼 행복했으면, 하면서 그저 남, 타인과 나와의 사이에서 부자를 만나면 나도 부자 되고 싶어 하고 가난한 자 만나면 저렇게 되기는 싫고, 항상 타인과의 경계선에서 ‘나’라는 자기 자신을 구축했다가 그 타인의 자리에 불쑥 ‘내가 너를 창세전부터 알았지.’라고 천사를 보내든지, 교회 와서 성경말씀을 보게 하든지 해서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단다. 나는 그런 하나님이다.’라고 왔을 때, 그 때 남들과의 경계선에서 구축해놓은 자아는 날아가 버리고 십자가 앞에서 피 흘리는 모습 앞에서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해놓고 나중에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릴 때 그 때 그 경계선에서 비로소 묻는 거예요. ‘주님이여, 저를 이 땅에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아버지는 아버지의 인생이고 엄마 인생은 엄마의 인생이고, 나는 굶어 죽는데?’ 굶어 죽어도 좋아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여, 왜 저에게 십자가를 보여주셨습니까? 왜 저에게 피 흘림을 보여줬습니까?’ 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예레미야가 됩니다. 거기에 옛날에 남들하고의 경계선에서 만났던 나는 허상이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진짜 딱 집어서 ‘이게 너야!’ 하는 것은 그 사람 최초로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내세울 때 처음으로 내가 바로 십자가 앞에 있었던 겁니다.
저쪽에 있었던 것은 내 몸이 허상으로 만든 가짜 ‘나’였어요. 내가 거기에 있으면 안 될 것인데 있다고 우겼습니다. 허구였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허구적인 나, 이 자존심 덩어리로 만든 나하고, 저쪽 자존심으로 뭉친 덩어리하고 되도 않는 싸움을 얼마나 했습니까? ‘네가 자존심이 세냐, 내가 자존심이 세냐. 네가 더 영광스럽냐, 내가 더 영광스럽냐.’
얼마나 되도 않는, 싸움 할 필요도 없고, 누가 이겨도 상관도 없는 짓들을 하면서 수십 년을, 평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거 내가 아닌데, 그것은 마귀가 나한테 심어준 헛방의 나인데. 내 모습은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쉽게 말씀드릴게요. 인간은 심판받지 아니하면, 인간은 실패하지 않으면 제 모습 몰라요. 자기가 심판받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죽어야 비로소 살아 있는 나는 내가 아니고 내가 죽어야, 지금 죽어도 그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는 것을 발견하는 그 순간 비로소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괜히 목사 걸쳐서 오는 그것 하지 마시고 직접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은 아담 속에서 죽을 너를 신데렐라의 그 왕자처럼 와서……, 내가 맞추려고 하면 안 맞아요, 우리는 자꾸 십자가에 우리를 맞추려고 하고 기도 잘하려고 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하니까 이게 공주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헛방이에요. 예배참석 하려고 하고 헌금을 하려고 하고 혹시 믿음을 잃었는가를 점검하려고 하고 성경 보려고 하고 전도 하려고 하고 신앙 있는 척 하려고 하고, 그러다가 누가 뭐라고 하면, ‘내 신앙이 이렇게 좋은데’ 하면서 남하고 싸우려고 설치고, 이것은 전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데.
그것은 사회의 그 헛방들이, 헛짓한 교회 이단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만들었어요, 그 경계선에서. ‘봐라, 나는 기도 세 시간하는데 너는 몇 시간하는데?’ 그러면 약이 올라서 ‘나는 너보다 30분 더 한다.’ 하고 그 경계선에 30분을 가지고 들어가 주는 거예요. 그 경계선에 들어가 봐야 그거는 자기 자랑하는 것밖에는 안됩니다.
복수, 진짜 복수를 예레미야의 말씀대로 하나님 쪽에서 ‘에서는 미워했다.’는 그 미움이 그대로 그들에게 전달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사랑은 그대로 우리에게 넘겨 온다는 것을, 그것은 일방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정해놓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교회 목사 대 교인의 만남이 아니라, 주님과의 만남의 경계선에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제대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없고, 쉽게 말해서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겁니다. 그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못 지켜요. 주님께서 그 신발을 만들어서 오듯이 주님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말씀해놓고 그 말씀을 그대로 온통 우리 머리에다가 뒤집어 씌워놓고 ‘네가 사는 것은 이미 너는 죽었고 네가 사는 것은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라는 식으로 앞으로 평생 우리를 가지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레미야가 자존심 경쟁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쟁합니다. 예레미야는 잘 믿어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잘 믿어보려고 합니다. 주여 다시 한 번 우리가 왜 여기에 태어나야 하고 십자가를 믿게 되었는지 그 모든 원인과 그 계획을 성경 속에서 발견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