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강-누가복음 6장46-49(무너진 집)-luk100711
035강-누가복음 6장46-49(무너진 집)-luk100711
이름 : 오용익(IP:59.3.201.250)
035강-누가복음 6장46-49(무너진 집)-luk10071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6장 46절에서 4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0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6:46-49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 이 말씀을 하실 때 이 말씀을 하시고 바로 천국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하시면서 계속해서 어디로 가시는가 하면, 위로 올라가실 줄 알았는데 위로 가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죽어야 될 십자가의 그 자리로 가시는 겁니다. 수직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무너진다. 그러니 내 말을 듣는 자는 마지막에 탁류가 일어나는 난리가 나도 버틸 수 있다.’ 하고 위로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고 수평으로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곳으로 가십니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지만 마지막 남기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던 그 시점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것은 피였습니다. 그리고 찢어진 살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고린도교회에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이 예수님을 기념할 때에는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기념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여러 특징이 있고 여러 말씀이 있는데 ‘진정 예수님이다, 참된 구세주고 참된 구원자다.’라고 결정지을 수 있는 최후의 집약된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사도요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 예수, 메시야, 구세주 많은 데 그것에 속지마라. 거짓 영들이 활개치고 적그리스도들이 등장한다. 진짜 예수 그리스도로 확정될 것은 세 가지인데 물과 피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다.’
물과 피와 성령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육체로 오셔서 마지막 남기신 것이 물과 피와 성령이었습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별 탈 없이 오순도순 사는 이 동네에 누군가 휙 왔다 휙 사라졌는데 뭐가 왔다 갔는지 그 흔적을 찾아보니까 거기에는 피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웬 피? 무슨 피? 왜 피를 흘렸지? 예수님은 왜 피를 흘렸고 그 피를 흘리게 한 그 주동자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눈에 확 들어오는 겁니다. 인간에게 수많은 사람이 스쳐지나 갑니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만났다가 헤어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얼른 왔다 가시면서 피를 남기고 가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부처는 나를 닮으라는 둥 온갖 소리 다 했지요. 예수님께서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멸망하고 듣는 자는 버틴다.’는 그 말씀을 하시고 그냥 가셨으면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 뭔가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뭔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지막에 피를 남기시고 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왜 피를 흘렸는가 하는 것을, 그에 앞서서 언급하신 산상설교와 많은 기적들과 자료들을 통해서 왜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야 되는가를, 그 의미가 뭐냐를 알기 위해서 죽 추적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피를 흘리기 전에 남기진 말씀과 이 피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준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시고 ‘이것으로 새 언약이다.’ 하고 끝내지 않고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이것이 너희와 세우는 새 언약이다.’라고 하셨는가, 그 말입니다.
잔소리같이 들리는 산상설교만 해버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지켜야 됩니다. 행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약을 행하는 사람이 돼버려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피 흘리고 찢어진 살 남기고 그래서 수직으로 올라갔다면 그렇게 해서 오신 성령이 되면 우리는 언약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언약사람이 되는 겁니다. 새 언약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새 언약의 사람과 언약 지키는 사람과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언약을 지켜야 된다면 언약을 지켜야 될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이지만 우리가 새 언약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가 새 언약을 만들어낼 주체자가 되지 못하고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새 언약을 지킬 주인공은 따로 계셨고 그 분의 솜씨로 그분의 영으로서 뭔가 새롭게 작품 하나 만들어지면 그 만들어진 작품 작품들을 가지고 새 언약의 사람, 새 언약의 산물,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본문을 보고 옛 언약, 그러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킨다는 우리의 주장이 무엇이 문제가 되며 대체 이런 생각자체가 뭐가 잘못되었기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 뒤에 계속해서 자기 길을 가셔서 십자가를 경과해서 수직으로 하늘나라 올라 가셔야 되는가, 그 내력에 관심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언약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본인자체가 새로운 언약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뭔가 와 닿았기에 십자가의 피의 효력이 있기에 새 언약 입장에서 주님입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드디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제가 엊그제 서울 의존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은행원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17절에 보면 아합왕과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둘이 만날 때 대뜸 아합왕이 엘리야를 보고 하는 소리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합왕이 굉장히 독특하다고 본 거예요. 보통 사람이 엘리야를 보게 되면 ‘아저씨, 어디 가세요?’ 또는 ‘할아버지 누구세요?’라고 이야기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합왕은 엘리야가 독특하다는 것을 알고 독특하게 답변한 거예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 너야? 이제 출몰한 거야?’ 이렇게 본 겁니다. 오늘날의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보통 은행에서 여행원이 고객들을 맞이합니다. ‘고객님, 어서 오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그런데 그 앞에 엘리야가 등장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보통 고객과 똑같이 취급해서 ‘아저씨, 뭘 도와드릴까요?’ 하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엘리야여,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구나.’ 이렇게 했을 때 주변에서 그걸 보는 차장이나 지점장이 ‘저 여직원이 귀신이 들렸나? 지금 오멘 영화 찍나? 왜 저 고객과 다른 고객을 똑같이 취급하지 못하고 왜 특이한 반응을 나타내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우리 앞에 왔을 때 마치 반 지하방에 애가 살고 있는데 창문에 공중의 그림자가 휙 지나가면 다른 사람들은 연속극 본다고 눈이 팔려 있는데 애는 그걸 보고 ‘엄마, 엄마, 뭐가 지금 지나갔어.’ ‘어허, 또 네가 쓸데없는 것을 봤다.’ 뭐가 하나 휙 지나갈 때 거기에 이상스럽게 끌리고 온 영혼이 예민하게 반응할 때 언약 사람입니다.
언약이라는 새로운 관계에 돌입된 사람입니다. 그걸 쉬운 일로 보지 않고 그것을 하찮은 일로 간주하지 않고 거기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겁니다. ‘누구세요? 뉘신데 왔다 갔다 합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 휙 하고 스치듯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가버렸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웬 미친 거지가 왔다 갔다, 하겠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아주 독특하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겁니다.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날 때 ‘주여,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은행원 여직원이 예수 믿는 사람 만났을 때 자기의 고유한 업무를 진행하지 하지 ‘예수님이 누구시죠?’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이것은 아주 특이한 언약적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사람은 자기만 알면 그만이에요. 남까지 신경 쓸 여지가 없습니다. 자기만 알고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어느 순간에 갑자기 자기한테 관심을 전혀 두지 않고 ‘예수라는 분이 누구시지?’라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성령의 휘돌림이 아니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주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럴 때 본문의 경우에 ‘내 말을 믿는 자는 마지막 때에 버티지만 내 말을 믿고 행하지 않는 자는 나중에 무너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들어오게 되면 그 때부터 예수님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은 산꼭대기의 꼭지 점에 서 있는 거예요. 꼭지 점에 서 있으면 산 밑에 있는 사람은 산꼭대기의 저편이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산꼭대기의 꼭지 점에 서 있는 사람이 보면 저쪽에 지옥이 보이고 이쪽에 천국이 보이는 거예요. 지금 그 지점에 서서 ‘내 말을 믿고 그 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현실 그대로 이야기 하는겁니다.
그런데 산 밑에 있는 사람은 ‘뭐가 보이는데? 탁류가 언제 오는데?’ 모르는 겁니다. 히말라야 봉우리들 14좌를 정복한 오 은선 대장이 생중계로 텔레비전에 나왔거든요. 얼른 보니까 카메라가 잡은 것을 보니까 분명히 꼭대기 지점이 아니었어요. 꼭대기 꼭지 점에 서려면 이런 모양으로 서야 되잖아요. 그런데 꼭대기의 한 2미터쯤 아래 지점에서 서서 떨어질까 겁나서 거기서 찍더라는 말이지요.
나중에 오 은선 대장이 이야기를 해요. 왜 꼭대기의 꼭지 점에 서지 않았느냐 하면 꼭대기에 바로 연이어 중국 쪽으로 낭떠러지가 있다는 거예요. 거기서 사진 찍으려고 폼 잡다가는 ‘으악!’하고 떨어져 죽기 십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태극기는 꽂고 거기서 약간 떨어진 2내지 3미터 아래지점에서 사진 찍은 겁니다.
오은선 대장만 알아요. 그 꼭지 점 뒤편으로 중국 쪽으로 절벽이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산 밑에 있는 사람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다는 말은 자기의 언약을 지킬 사람 말고, 자기의 새 언약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봤던 이쪽 편에 지옥이 있다는 그 시선 쪽으로 우리를 당겨 올립니다. 올려서 우리도 같이 보게 해요.
‘겁나지? 아찔하지?’ 그 아찔한 모습으로 교사도 하게하고 은행일도 하게하고 목사도 하게하고 농사도 짓게 하고, 그렇게 다 하게 하는 거예요. 아찔한 거예요. 그럴 경우에 그 자리에 서게 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카리스마와 그 권위에만 복종하고 일체 모든 권위에 대해서는 순종을 안 하게 되어 있습니다.
‘웃기지 마라. 네가 세상을 몰라. 겁나는 일을 몰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경과해서 가실 때에 그 십자가에 끌고 가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어느 날 이사 가는 아파트에 가 보니까 짐정리를 해요. 그 집에 애가 있는데 그 애가 텔레비전이나 통장이나 이런 것은 신경 안 씁니다. 애는 바구니 하나 마련해서 그동안 자기가 사용했던 자기 물건들, 온갖 장난감들, 그림책과 자기노트들을 다 담아요.
그걸 담을 때 거기서 무엇을 봤는가하면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도 결국 인간은 뭔가 자기 그릇을 만들고 그 안에 다 담아 놓으니까 여러 가지 일을 해도 여전히 자기 일밖에 한 적이 없어요. 이사 갈 때 애가 아빠 것과 엄마 것과 자기 것을 명쾌하게 구분하는 것처럼 자기 것만 그대로 담아요.
그런데 만약에 아빠 엄마가 이사한다고 동사무소며 세무서를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다가 자기가 따로 자기 것이라고 담아 놓은 물건을 통째로 안 가져가면 그 애의 자기 과거 인생, 추억은 통째로 다 날아간 거예요. 예수님께서 심판 이야기할 때, 여러분은 교주가 되어서 그 흔한 협박과 공갈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행치 않으면 멸망한다.’는 이 말은 우리를 이렇게 자기 바구니에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담고 있는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로 보는 거예요.
‘나는 네 바구니 안 가져간다.’ 그 말입니다. ‘나는 네 바구니 불 질러 버린다.’ 그 말입니다. ‘네가 교회에서 어떻게 하고 세상에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가 산꼭대기에 올라와서 본 그 지옥가고 천국 가는 그 기준에 의하면 네가 사업을 하니, 공부를 했니, 박사학위를 땄니, 그 모든 장난감바구니 같은 것들, 내 자식을 잘 키워서 성공시켰니, 하는 그런 엄마의 포부를 담아 놓은 장난감바구니 같은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개인별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세대별로 심판한다는 거예요. 어렵지요? 개인별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그쪽 개인들은 이쪽 세대에 속한다는 거예요. ‘그쪽 개인들은 옛 세대에 속하고 너, 너, 너 이쪽은 너의 행함이 담긴 바구니가 아니고 주님께서 나한테 선물로 주신 것만 담는 새로운 새 언약의 피조물의 바구니기 때문에, 너는 새로운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천국 간다.’는 겁니다.
옆에 있는 교인하고 신앙적인 경쟁하지 마세요. 소용없습니다. 전부 다 같은 장난감 들입니다. 전부 다 이 세대에 속해서 또 하나의 멸망 받을 장난감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면 그 내가 만든 내 바구니 말고 주님이 따로 만든 바구니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사람이 정신이 또렷하게 있을 때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졸음이 온다든지 마지막 죽을 때가 되어서 모든 것이 희미해질 때, 침상에 누워서 뭔가 흐릿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주변에서 의사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과천에 시집간 딸이 아버지, 하면서 울고 있고 대구에 시집간 둘째딸은 ‘언니, 울지 마.’ 하면서 희미한 소리들이 들리는 거예요. 미국에 간 아들은 뒤늦게 와서 ‘아버지, 그동안 못 뵈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와서 울고 있고.
이 소리들이 다 깨어져서 어떤 소리는 못 알아듣고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도 구분이 잘 안 되는 흐릿한 상태에서 이쪽 간호사는 다리 붙잡고 있고 이쪽 간호사는 주사 꽂고 있고, 내 육체가 내 몸이 아니고 다 찢어지고 흩어지는 상태에서 대체 세상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그렇게 죽기 직전에 세상은 내 중심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내가 막상 하나도 예외 없이 누구나 다 닥치게 되는, 내 몸이 오징어포 찢듯이 죽죽 찢어지는데, 내가 그렇게 찢어지는데 대체 월드컵이 웬 말이냐, 그 말이죠.
‘내가 찢어지는데 한골 넣었다고 난리치는 너희는 뭐냐.’ 이 말이죠. ‘내가 죽는데 왜 너희들은 내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왜 오늘 놀러 가느냐.’ 그 말이죠. 젊은 애들 차 몰고 동해바다로 놀라가는 게 뭐냐 그 말이죠.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누구 중심이냐? 그 때 그 순간에 성경을 보자 이 말입니다.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가고 내 말을 믿고 행하는 자는 천국에 간다.’
그동안 그 말을 못 알아들었던 것은 아직도 내가 안 죽고 내가 버티고 있다는 이 착각과 환상 때문에 주님의 그 중심, 오 은선 대장이 섰던 것과 같은 주님이 서신 그 산꼭대기에 별 관심 없고 신경 안 쓰고 산 밑에서 나의 영역과 나의 장난감 담기에 급급하며 살아온 거예요. 내가 살면서 담아온 그 장난감에 불 심판 내릴 줄 몰랐던 거예요.
불 심판의 그 소리를 농담, 장난, 혹은 약간의 압박정도로 들었지 그걸 진지함으로 들은 적이 없습니다. 왜? 장난감 만들기에 바빴어요. 우리는 장난감 공장 공장장이에요. 내 영광, 내 노고가 담겨 있는 나의 기념탑, 나의 바벨탑을 평생 쌓고자 애쓰고 있는 공장의 공장장이에요. 총무과장, 자재과장, 영업부장, 전부 다 자기가 다 해요. 자기가 자기공장의 주인공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게 되면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가 보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8절에 보면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7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거리의 오래된 맨홀 뚜껑 보셨지요. 제가 주위를 관찰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오래된 맨홀 뚜껑을 보게 되면 ‘나중에 이 맨홀 뚜껑을 열고 공사해야 하는 사람들은 저 뚜껑을 열려면 참 힘들겠다.’ 생각이 들어가요. 왜냐하면 맨홀 뚜껑 치고 녹 안 스는 경우가 없거든요. 맨홀 뚜껑 잘 안 열리는데 만약에 열면 나도 무심코 지나쳤던 그 맨홀 뚜껑 아래에 또 다른 지하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 비로소 천국문도 같이 보조 맞추어서 열린다는 겁니다. 아래 위로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지하의 맨홀뚜껑을 열면 거기서 용과 뱀과 귀신들이 올라오게 되어 있고 올라오는 동시에 저쪽 천국문도 열려서 새 언약의 피조물은 저쪽을 향하여 뽑혀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못 올라가고 땅에 그냥 남겨진 지옥가야 될 인간들은 귀신이나 뱀이나 용한테 잡혀서 직사하게 고생하고 같이 유황불에 가야 될 세상, 이렇게 둘로 구분 된다는 겁니다.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다.’ 그런 권세를 주님께서 가졌다는 겁니다. 그걸 보고 얼마나 신나던지, ‘가라지 뽑지 말고 그냥 두어라.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나와야 되고 알곡은 알곡대로 나와서 그것을 결국 구분하는 시기가 올 텐데 그 구분하는 시기의 그 기준은 평소에 지옥과 천국을 이야기했던, 멸망을 이야기했던 이 예수님, 바로 내가 마지막 새 언약의 기준에 의거해서 결정짓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 이야기하시면서 마지막에 피를 남기고 수직으로 올라가시면서 ‘또 보자’ 하시면서 다시 오시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들이 본문을 십자가와 연관시키지 않고 그냥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들은 죽음에 임박하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면서 자기 몸도 자기 맘대로 안 되지요. 자기 몸은 그냥 침대에 묶인 듯이 부려져 있고 주변에서는 자식들인지 의사들인지 흐릿하게 뭐가 왔다 갔다 하면서 그저 약간의 느낌이 들었다 말았다 할 뿐이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서 있다는 말이지요.
그럴 경우에 세상이 침대에 누워있는 그 노인중심으로 이 세상이 움직이지는 않았던 거예요. 치매 걸린 노인중심으로 세상이 안 움직여요. 그 침대에 내가 놓여 있다 할지라도 이 근호 중심으로 세상이 안 움직여진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 자기를 착한 사람 만들기 위해서 오늘 읽었던 이 본문 말씀을 자기가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아, 어렵다, 지금 이해가 안 되고 있는데요.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착한 사람 되고자 한다 그 말입니다. 착한 사람, 착한 남자, 착한 여자, 저는 ‘제발 그러지 마세요.’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어차피 죽을 때 세상의 중심이 내 중심이 아니라면 내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상도 아닌 세상에서 나를 위하여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뭘 하겠다는 자체가 아직도 자기가 중심인양 아주 심하게 우기는 셈이 되는 겁니다.
아주 못되었어요. 그렇게 못됐어요. 예수님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이편의 천국과 저편의 지옥이 보이는 곳에서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할 때에 사람들이 그 말씀 듣기 전에는 뭘 했느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착한 사람, 거룩한 사람, 성화된 사람 되려고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려고 하고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고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고 그걸 꽉 쥐어서 훌륭하게 살려고 애를 쓴다 이 말이지요.
그럴 때 우리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우리가 경험할 수도 없는 그 꼭대기의 현실, 지옥 천국을 일방적으로 이야기해버리면 그때부터 우리는 내가 나한테 투자하고 내가 나한테 바르게 살려고 애썼던 것들, 교회 와서 천당 가려고 예배하고 헌금하고 중보 기도한 이 모든 것을 허사로 만드니까 그때부터 예수님이 슬슬 싫어지기 시작하고 미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비로소 그 인간은 최초로 나라는 인간이 나쁜 인간일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감을 잡는 겁니다. ‘내가 나쁜 인간이구나. 예수 믿어서라도 나를 천국으로 밀어 보내겠다는 이따위 사고방식 자체가 이것이 나쁜 짓이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하시는구나.’라는 것을 압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슬슬 기분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와 예수님의 십자가공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문어가 있는데 그 문어가 일곱 번을 맞췄어요. 월드컵에서 어느 팀이 이기는가를 일곱 번 맞췄는데 그 문어가 스코틀랜드나 폴란드 문어가 아니라 독일문어입니다. 독일인들이 슬슬 그 문어가 미워지기 시작한 거예요. 구워먹자고 하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왜? 자꾸 맞추니까, 일곱 번이나 맞추었으니까. 맞춘다는 것이 기분 나쁜 거예요. 그 용한 문어를 구워먹어 버린다면 예수님을 구워먹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하면, 인간들이 내가 측정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들이 자꾸 기적을 보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일 수 있는 기적은 너희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납득이 안 되는 이해 못할 기적이다. 곧 요나의 기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요나의 기적은 다른 게 아니에요. 나처럼 죽지 아니하면 세상이 안 보인다는 기적입니다. 나처럼 죽지 아니하면 세상 지금까지 본 것 다 허구고 거짓말이라는 기적입니다. 그게 요나의 기적입니다.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 사람 나와 보라고 해요. 누구야, 누구야! 베드로도 아니에요. 베드로는 물에 빠졌으면 천만 다행인데 물위를 걸었다는 것이 문제예요.
물에 빠져서 아예 지옥 갔으면 베드로가 지옥에서 주님인줄 알았겠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는 좋았겠지요. 물위를 걸었으니까. 인간이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물 위를 걸으면서 ‘내가 걷는구나.’ 하는 순간에 빠져버렸어요. 희한하지요. 앞에 ‘나’라는 말을 집어넣으니까 빠져버린 거예요.
우리는 물위를 걷든지 불 위를 걷든지 내 소관 아닌데 물 위를 걷는 순간 그 다음에 ‘나’라는 것을 앞에 달아버립니다. ‘내가 걷는다.’ 한 순간 거기서 예수님을 잊어버린 거예요. 교회 200명되고 300명 되어도 괜찮아요. 1000명 되어도 괜찮은데 ‘내가 기도해서, 내가 설교 잘해서, 내가 목회해서, 내가 용 써서, 내가 철야해서, 그 교회 되었다.’ 한 그 순간 그 교회는 절이 되고 마는 거예요. 절, 지옥 가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자식은 제 맘대로 큰다.’ 이러면 되는데. ‘몰라, 제 맘대로 컸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했단다. 둘째는 제 맘대로 크더니만 서울 어디에 들어갔단다. 인간 왜 저런지 몰라.’ 이러면 괜찮은데 ‘내가 키웠거든, 내가! 내가 그 애 키울 때 얼마나 애썼다고.’ 한순간에 다 같이 지옥 가는 지옥 패밀리가 되어 버립니다.
나를 집어넣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죽지 않는 이상 항상 내가 있어요. 죽기 전까지는 나무가 있다, 별 의미 없어요. 꽃이 있다, 별 의미 없어요. 달이 있다, 별 의미 없어요. ‘내가 있다.’ 의미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있다, 없다.’를 가지고 주님한테 나가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있다, 없다가 아니라 ‘이다, 아니다. 너는 천국 갈사람 맞다, 아니다.’로 결정하는 겁니다.
있다, 없다가 의미 없어요. 죽어도 괜찮아요. ‘이다’만 되면 돼요. ‘천국 가는 사람 맞다’만 되면 되는 겁니다. 그러한 시선은 어디의 시선이냐, 바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왜, 어떤 사람이 지옥 갔는가를 예수님과 같은 기준으로 그 기준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주님이 천국 갈사람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낼 사람 지옥 보내는데, 주님이 어떤 사람을 지옥 보내느냐를 같이 보자 이 말이죠.
보게 되면 본문 말씀 그대로예요. ‘아, 지옥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구나.’라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이 약이 올라서 벌떡 일어나서 ‘주님이여, 할 말 있습니다.’ ‘해 봐라.’ ‘그러면 저 천국 가는 사람은 주의 말씀대로 믿는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행한 사람입니까?’
주님이 듣고 있다가 ‘그래, 그렇다.’ 그러니까 ‘에이, 아니던데, 아니던데 뭐. 같은 교회 다니면서 내가 다 봐서 아는데. 내가 주의 말씀대로 못사는 것을 인정합니다만 내가 압니다만 저 사람은 교회 다니면서도 술 담배 다 하고, 진짜 저치는 아닙니다. 내가 여기 지옥에 왔다는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고 천국 가지 말아야 될 그 사람이 천국 갔다는 것이 화딱지가 나서 내가 이 지옥에서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여러분,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안 받았잖아요. 안 받았을 때 그것으로 이야기 끝났으면 그 가정에 아무 문제없습니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알아요. 자기가 자기 동생 어느 정도의 인간인 줄 알아요. 처음부터 아벨이 위대했으면 가인도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면서 표 한 장 찍어줬을 거예요.
자기가 알아요. 동생이 어떤 인간인줄 압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동생을 알잖아요. 같이 커서 알지요. 저도 제 동생 이 근수 알아요. 그런데 저는 지옥 보내고 교회도 잘 안 나오는 그 애를 천국 보내면 나 미칩니다, 정말. ‘도대체 주님의 기준이 뭡니까? 내가 모르는 기준이 따로 있지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 것은 좋아요. 거기에 대해서 가인은 이의 없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제사를 받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사람이 죽기 전에는 북한이 있고 중국이 있고 미국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있는 것이 중요해요.
어떤 목사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사모를 살해했어요. 자기 허락 없이 낙태했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교인들 앞에서 자기를 무시했다고 아내를 목 졸라 숨지게 하고 그 시체를 난도질 해서 하천에 버리기도 하고 시멘트 발라서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고 어떤 점에 착안했느냐하면, 그 남편이 아내 목조를 때의 감정 말고 그 칼을 들고 죽은 사모의 시신을 난도질할 때의 그 기분, 그 즐거움이 어떤 즐거움이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 즐거움은 이거예요. ‘감히 나에게. 이 세상에 사모라는 네가 있는 것은 목사인 내가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어디서 네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감히 내가 있다는 이것에 도전하느냐. 나 있음에 도전하느냐.’ 그렇다면 그 사모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렵니까? ‘이게 어디서, 감이 나 있음에 예수가 나에게 내가 모르는 기준을 제시해서 천국 지옥을 결정짓는가. 이게 어디서, 죽으려고!’
그래서 결국 그 목사는 예수님을 난도질 친 거예요. 양심 때문에 자수했다고요? 가룟 유다는 양심 때문에 자수 안했습니까? 주님은 ‘네가 천국에 있을 사람이냐, 아니냐.’를 보는데 자꾸 우리는 이미 우리 엄마가 나를 낳아서 내가 태어난 것, 이 있음, 있음을 계속 우기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에 예수님의 피가 없으니까 교회 아닙니다.’
이러면 ‘아이고,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교회가 아니구나.’ 이러면 될 텐데, ‘교회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기에 하나님의 피가 없는 것은 교회가 아니고 피가 있으면 교회입니다.’ 하면 받아들이면 그만인데 ‘어딜 감히! 이 교회 역사가 150년인데, 얼마 전에 150년 역사 기념해서 책도 냈는데, 이 형광등 하나 이 벽의 벽돌 하나하나가 교인들의 철야기도와 헌금으로 되어진 교회인데 어딜 감히, 이 교회를…….’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리고 이 교회의 당회장인 나를 감히!’ 여러분, ‘감히!’라는 말은 목사가 쓰면 안 되고 교인들이 목사보고 이야기해줘야 돼요. 왜? 목사는 교인들의 종이기 때문에. 목사가 집사보고 ‘어딜 감히!’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집사가 목사보고 ‘어딜, 섬기라면 섬겨야지, 어딜 감히! 나갈 때 퇴직금을 달라고? 어딜 감히 그런 소리를.’ 이렇게 되어야 돼요.
아멘만 계속할 것이 아니고 왜 그런 소리를 못합니까? 왜 그런 소리를 못하느냐 하면, 교인들부터 교회 올 때 나중에 죽으면 찢어지고 쓰레기 될 그 몸을 생각 못하고 지금 있는 내가 목사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있는 내가 세상부귀영화를 맘껏 누리기 위해서 나의 더 잘난 나 있음 되기 위해서 왔는데 혹시나 저주받을까 겁이 나서 그런 거예요.
여러분, 저주를 겁내면 주님의 피를 허사로 만드는 겁니다. 저주 겁내는 인간이 자기 아내도 목 졸라 죽이잖아요. 그 목사가 무시를 당했다고 하거든요. 그 교회 교인들 열 댓 명인데 그 중에 예수님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 목사를 교인들이 욕하면 욱해서 또 달려들어서 또 죽일 참이에요. 그 목사가 칼을 들고 난도질을 했다 하는 이것,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담아두지 않고 터트렸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교훈입니까? 누구나 그런 것이 있으니까요. 예수 믿고 20년 동안 착해진 나, 이게 그 아내를 난도질 한 그 목사와 같은 류 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얼마나 착했는지.’ 이런 목사들이 바로, 사람들이 그렇게 존경해마지 않고 모델로 삼고 있는 한 ○○, 손○○ 같은 이런 목사들이 바로 자기 아내 목 졸라 죽인 목사하고 똑같은 목사예요.
그거 좋다고 기념관 세우고, 그러고들 있다고요. 나 있음이 죽을 때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주님께서 이 말씀 주실 때 지옥에 가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는 마귀도 가요. 마귀의 주특기, 마귀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말씀대로 우리를 정죄하고 지적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지옥 갈 사람이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고 마귀가 날마다 지적해요.
‘너 오늘 예배 때 들은 말씀이 뭐였는데?’ ‘주여, 주여,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믿고 다 행하지 않으면 멸망 받는다 하더라.’ ‘딱 네 이야기네.’ ‘그래, 딱 내 이야기 맞다.’ 서울 가서 어떤 분과 이야기를 죽 하는데 그 교회 사모 때문에 문제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왜 그 사모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지를 모르겠다고 하는 거예요.
하도 그 교회가 사모로 인해서 말이 많으니까 ‘목사님의 사모님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요. 교인들이 사모를 하나의 어머니상으로 여겨서 사모는 모범이 되어야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듣고 있다가 ‘그게 문제네요.’ 했어요. 그러면 목사님의 사모님은 어떻습니까? “제 아내의 특기가 뭐냐 하면, 누가 무슨 이야기를 건네 오면, ‘저 믿음 하나도 업서예.’
사모가 믿음 있다고 하니까 문제가 돼버린 거예요. ‘저 믿음 하나도 업서예.’ 믿음을 가지고 사모를 뭐라 할 건더기가 없어요. 아마 죽었던 사모가 무지 나댔던 모양이지요. 죽어 마땅하지요. 아, 말을 잘못했다. 여러분들 우리교회 다니시면서 다른데 가서 믿음 있다 하지 마세요. 믿음이 없어야 주님의 피공로만 그대로 증거 됩니다.
지옥 가는 사람이 ‘너, 구원받았다면서.’ ‘미안하다.’ ‘왜?’ ‘예수님 공로로 구원받아서 미안해 죽겠다.’ ‘너하고 나하고 같이 술 먹으면서 네가 예수님 공로로 구원을 받아?’ 그쪽에서는 아직도 자기 힘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의 기준이 거추장스러워요. 내가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지 예수님의 공로를 위해서 자기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버티다가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은, ‘나는 믿음도 없고 애초부터 인간도 아닌데 뭐.’ 예수님의 공로만 담기는 겁니다. 얼마나 가짜가 많은지요. 착한 가짜, 기도 열심히 하는 가짜, 얼마나 가짜가 많은지, 아예 진짜 찾기를 포기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 하시고 바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어디로 갔습니까? 십자가로 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말씀의 취지를 모르고 취지를 모르면 이 말씀을 제대로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혼자 산 위에 올라가고 나머지는 다 산 밑에 있는데 산위에 있는 정경을 무슨 수로 우리가 볼 수 있으며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취지인지 알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오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 위에서 보니까 이쪽이 저주고 지옥이라, ‘아, 피 없이는 지옥 가는구나.’ 단박에 아는 거예요. 워낙 가짜가 많아요.
어떤 남자가 개를 하나 키웠는데, 이 남자가 여자하고 결혼했으면 여자를 좋아해야 되는데 여자와 오순도순 살 생각하지 않고 여자보다 개를 너무 좋아하고 개에 미쳤어요. 이 강아지가 얼마나 귀엽게 구는지 이 남자가 빵! 하면 이 강아지는 캥! 하고 죽는 시늉을 하는 거지요. 그게 재미있어서 빵, 하면 깽, 하면서 노는 거예요.
그걸 보고 아내가 눈꼴이 시어서 ‘저 강아지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우연히 애완견장사가 지나가는데 비슷한 개가 있었어요. 옳다구나, 하면서 그 개를 들고 가서 돈 좀 주고 개를 바꿔치기 했어요. 그렇게 좋아하던 개인데 바꿔치기 했는데도 남편의 눈에 뭐가 씌었는지 못 알아보는 거예요.
퇴근한 남자가 아내고 뭐고 대충 인사하고는 강아지에게 쪼르르 가서 강아지를 보고 빵! 하니까 개가 왕! 하고 달려들어요. 일 년 갔어요. 일 년 지나서 팔아먹었어요. 일 년이 지나도록 모르는 거예요. 피, 하면 깽, 이래야 될 텐데 ‘예수님의 피’ 하니까 ‘왕!’ 하고 달려들어요. 전부 가짜입니다. 신학교수도 가짜고 목사도 가짜고 교인들도 가짜고.
제가 어느 큰 교회 가서 설교할 때 ‘피!’ 하면 ‘주여’ 이래야 될 텐데 왕! 하고 달려들어요. 그게 무슨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입니까? 그게 무슨 교회입니까? 성경본문가지고 지키려고 달려드는데.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가룟유다는 귀신 안 쫒아냈습니까? 가룟유다도 성령의 비췸을 받고 기적도 일으키고 전도하면서 말씀도 전하고 다 했어요. 사울도 성령 받아서 예언하고 다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빵, 피입니다. 피! 나 있음은 의미 없고 주의 피로, 언약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새 언약의 생산물, 새 언약의 새로운 피조물, 피에만 반응하는…….
저쪽에는 자기 착함에 반응하는 더러운 지옥, 이쪽에는 피에만 감사하는. 피는 하늘에서 내려왔지요. 하늘에서 뚜껑이 열려서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자 없’는 그 뚜껑이 열려서 난데없이 피를 주셔서 그 피를 믿게 하신 이 놀라운 은총은 물과 피와 성령에 의해서, 성령주신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 자신의 피가 이제는 우리 피가 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제까지 우리가 입술로 예수 믿는다고 속일 참인지, 마지막 병원에 누워서 곧 일분 뒤에 죽는다면 그러한 고집도 위선도 다 허사인 것을,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세상 중심은 예수님 말씀 중심이었다는 것을 미리 깨달아서 이제는 주님 주신 그 사죄와 자비와 긍휼의 은총과 피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천국사람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035강-누가복음 6장46-49(무너진 집)-luk100711.hwp (64.0K), Down: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