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강-렘20장7-10(선지자의 형편)-jer100707
070강-렘20장7-10(선지자의 형편)-jer100707
이름 : 오용익(IP:59.3.201.250)
070강-렘20장7-10(선지자의 형편)-jer1007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0장 7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0:7-10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수가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지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 백성이라고 여긴 사람들, 그 사람들이나 우리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 겁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렇게 칭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하도 예수쟁이가 많으니 별로 놀랍지도 않지요. 흔하디흔한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니까. 그러나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이 지구상의 200여개의 나라가, 월드컵 예선전에 참가한 모든 나라가 다 합쳐서 힘을 모은다 해도 한 사람의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은행 금고의 귀중품, 다이아몬드, 황금, 석유, 값비싼 것을 다 구입한다 할 찌라도 하나님의 아들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2,13절에 보면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는 말에서 여러분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이것은 불가능중의 불가능이죠. 거북이보고 네가 사람이 되라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집에 있는 강아지보고 ‘네가 내일부터 사람이 되라.’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안되잖아요.
개보다 더 못한 존재가 사람이 된다는 것? 아니 사람정도가 아니지요. ‘인간아, 인간이 되어라’고 하는데 그 인간은 될 수 있어요. 지금 인간 되자는 소리 하는 것 아닙니다. 인간이 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돼야 돼요. 인간에게 머물면 본전치기 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데 무슨 수로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습니다. 못 믿을 정도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너무 놀라우신 분이기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 맞습니다.’ 해도 믿기지가 않아요. 너무나 엄청난 발언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옛날 고대 제국들이 임금을 가지고 ‘태양의 아들, 신의 아들’이라고 했다고요. 사람들은 아닌 줄 압니다. 하지만 그래야 나라꼴이 되니까 믿는 척 해 줬지요. 북한의 김정일도 태양의 아들이지요. 북한은 나라자체가 종교니까 북한 주민들은 울고불고 했지요. 그런데 실제로 만나보면 태양의 아들이 아니지요. 체온이 36.5도인데 무슨 태양의 아들입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신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내가 너를 보기에 네가 신이 아닌 것처럼 내가 나를 보기에 신의 아들이 맞나.’ 할 정도로 의심되는 구석이 한두 구석이 아닙니다. 한국교회 비판하기는 쉬운데 ‘내가 과연 성경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맞나?’ 할 때 영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경험상 아무리 멋들어진 누적된 기억체험을 끌어 모아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답다, 라는 확답, 혹은 정답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용어이기 때문에 정작 진짜 하나님과 만났던 선지자, 하나님의 아들 된 이 사람들은 자기한테 덮쳐진 이 요상한 팔자, 운명이 너무나 희한하기 때문에 자기 내부의 육적인 것으로 극구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거부해보고 또 의심을 가져보는, 계속되는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그 다음에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그냥 안하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기 싫은 것이 있어요. 그러나 내가 하기 싫은 것을 그냥 내가 하기 싫도록 방치하지 않고, 내버려두지 않고 그 하기 싫은 것을 계속 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나보다 더 세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나한테 개입하시고 하나님이 나보다 더 세다는 것이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내가 하기 싫은 일, 내가 안했으면 하는 일, 세상적으로 할 것 같았으면 이미 때려치웠을 일, 그것을 한마디로 하면 남에게 무시당하는 쪽으로 생을 살아야 된다는 그 일, 사람들에게 날마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고 8절에 보면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는 그러한 하루하루의 삶을 살게 할 때입니다.
그러한 삶은 남들 보기에도 ‘인간아, 참 안되었다.’ 하고 남들 보기에도 측은해 보이지만 내가 내 인생 생각해도 ‘꼬라지 하고는!’ 할 정도로 참 측은한데, 문제는 하나님이 내 뜻을 안 들어 준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소원을 안 들어 준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준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포부와 의지를 매일같이 꺾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죽고 사는 것쯤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약을 털어먹고 죽든지, 교회 버리고 돈을 벌려고 가든지 그 정도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죽고 사는 그 권리마저 가져가 버리면 이것은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살고 싶다고 살지도 못하고 죽고 싶어도 안 죽어지고, 그러면서도 주위에서는 놀려대고.
‘왜 그렇습니까?’라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정답은 주어졌습니다. ‘내가 네게 억한 심정이 있어서가 아니고 네가 그 무서운 말씀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뭔가 이질적인 것, 사람들이 무시하고 조롱하고 모독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쳐들어 왔어요, 우리에게. 쳐들어와서 그것이 우리의 팔자가 되고 말았고 그것이 우리의 남은여생, 우리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과 우리의 결합은 내가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아요. 내가 뗄 수가 없어요. 내가 말씀생각 할 때 따로 있고 안할 때 따로 있고, 이런 조정을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면 되는데, ‘말씀아, 좀 떨어져라.’ 해도 이 말씀이 안 떨어지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주께서 나를 이긴 거예요. 말씀이 안 떨어지니까 내가 여호와의 말씀을 안전하고 싶어도 9절에 보니까 속에서 불이 붙어버린 거예요.
“중심이 불이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서” 툭 튀어나온 것이 여호와께서 담아주신 말씀이고 예언이고 계시가 되는 거예요. 좀 징그럽게 말씀드릴게요. 덥고 잠도 좀 온다 싶으니까 징그럽게 말씀드려야지요. 여러분 피부 밑에 뱀이 지나간다면 제가 생각만 해도 징그럽습니다. 피부 밑에서 뱀이 불거진 핏줄처럼 지나간다면 얼마나 징그럽겠어요.
답답하겠지요. 피부 밑으로 기어가는 그 뱀을 피부를 째고 잡아서 밖으로 떼쳐 내면 시원하겠지요. 말씀이 그런 모양으로 내 안을 기어 다닐 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냥 피부 밑에나 있으면 천만다행인데 본문에 보면 뼈 속에까지 골수에까지 말씀이 온통 기어 다니는데 이걸 째서 바깥으로 털어내 놓아야 속이 시원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도 몇 시간 가지도 않습니다. 또 생기지요.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어렵게 갈 것도 없이 쉽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잖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은 없어요. 쉽게 간다고 해놓고는 굉장히 어려워졌는데, 사람이라 하는 것은 어느 세상 안에 놓여 있을 때 ‘사람이다’ 할 때 사람이 되는 거예요.
세상이 바뀌면 그 쪽 세계에서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은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 어려운 것을 어떻게 쉽게 할 수가 없네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아프리카 토인들이 사는 마을에 백인이 잠깐 들렀는데 그냥 차타고 휙 지나가는 것을 그 부족의 어린애가 봤다고 합시다. 아침에 엄마 아빠 깨우고 선생님 찾아가서 ‘선생님, 외계인을 봤어요. 허연 사람을 봤습니다.’ 할 때 선생님이나 부모가 하는 말은 한마디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은 우리 동네에 없다.’
그런 사람은 우리 동네에 없다, 그 말이지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인간역사 속에는 없는 사람을 만들어서 집어넣어놓고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규정짓고 싶은 거예요. 흔히 자식이 애먹일 때 부모가 하는 소리가 뭡니까? ‘우리 집안에 너 같은 자식은 없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의 아들 된 사람이 그래요.
경주이씨 집안에 하나님의 아들 없습니다. 안동 권 씨 집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없어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헷갈리는 이유가 이것이 정리가 안 되어서 그래요. 정리를 해봅시다. 세상이 먼저 있고 그 세상에 의해서 납득이 되는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거예요. 만약에 그 있는 세상에서 납득이 안 되는 사람 같으면 있어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은 그 점을 노린 거예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그것은 사람이 아닌 사람을 만들어놓고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으로 규정짓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있음을 확인하려면 어떤 논리가 성립되느냐 하면 새로운 세상이 왔을 때 그 세상이 밀려오니까 ‘아하, 새로운 세상에서 보니까 이 인간은 기존의 세상에서는 영 맞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서는 원리와 원칙과 규칙에 딱딱 들어맞는 사람, 아, 너는 이쪽 세상에 연결되고 복속된 사람이 맞구나 .’ 하고 판정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얼마나 오해했던지 자기들이 원했던 세상, 육적으로 납득이 되고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는, 뉴우튼의 만유인력법칙과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원리로 해명이 되는 이 세상 속에서 ‘자, 어느 장소에 가면 어느 때에 하늘나라가 임합니까?’라고 물은 거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불신자들이 납득할 수 있고 불신자들이 이해가능한 그 세계에서 x좌표, y좌표를 지정해 달라는 것, 경도 위도를 지정해 달라는 거예요. 하늘나라가 어디에 오며 언제쯤 오느냐고 물은 거예요. 사람들이 이해되는 세상 안에서 하나님나라를 해석하고 파악하겠다는 겁니다. 꼭 개혁주의 신학 같아요. 요즘 갈수록 개혁주의 신학이 미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그럴 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하늘나라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아, 하늘나라는 안보이게 오는구나.’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네가 지금 어떤 인간인데 자기 주제파악도 못한 채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 관을 가지고 감히 하늘나라 세상 관을 파악하려고 하느냐, 이 건방진 것.’ 이런 뜻입니다.
그럼 하늘나라가 없는 것인가? 뭐라고 하느냐하면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한다.’는 겁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라.’ 하니까 ‘그럼 없네. 없는 거네’ 하니까 그 뒤에 하는 말이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한다.’고 해놓고 ‘눈으로 보지도 못한다.’고 하고 그리고는 ‘너희 안에 있거든.’
예수님의 말씀 세 가지를 종합해봅시다. 첫째, 예수님의 나라는 보지 못한다. 두 번째,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한다. 잡았다 하면 저쪽에서 튀어나오고 잡았다 하면 저쪽에서 튀어나오고 없네, 하면 튀어나오고 있네, 하면 사라지고. 사람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하늘나라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으니까 하나님은 그냥 하늘나라에서 사시고 우리는 우리끼리 살 겁니다, 라고 정리하고 싶은데 그 순간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거든.’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여기 있다는 말입니다.
없다고 치고 ‘볼일이나 보소.’ 하고 싶은데 ‘여기 안에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여기 이미 와 버린 하늘나라를 못 알아보고 있고 그것을 파악 못한다 하는 것은 현재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 세상 자체가 멸망 받아야 되고 하늘나라를 핍박하는 더러운 속성을 가진 아담의 세상이었던 겁니다.
아담의 세상에서 하늘나라는 파악하지 못할뿐더러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아담의 세계는 하늘나라로부터 완전히 박살날 대상이 됩니다. 박살날 과녁이 되고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 기다려, 이제 죽었어.’ 그 말입니다. 누가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하늘나라가 그 하늘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인간 아담의 나라를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그 공격한다는 관계를 이쪽에 있는 어떤 사람도 눈치 챌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의 세계에 하나님의 아들을 발생시켜 버렸어요. 발생시키니까 인간들은 낯설게 여기면서 그리고 그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 세상을 처분하고 부순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니까 그것을 참지 못하고 되레 선지자를 공격하는 양상으로 하늘나라와 인간나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서로 박살내고 죽이겠다는 겁니다. 그 경계선에 그 막에 누가 서 있느냐, 바로 선지자 예레미야가 서 있으니까 예레미야는 죽을 지경인 겁니다. 안전하려고 하니까 그 속에서 말씀이 뱀처럼 꾸물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이걸 터뜨려야 속이 시원한데 터뜨리니까 저쪽에서 가만있지 않고 모욕하고 무시하고 도전하고 대들고, 이런 황당함, 바로 그것이 분명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으로 ‘이 땅에서 너 같은 인간을 만들어낸 적이 없다.’고 완전히 결정내린 희한한 인간으로 예레미야는 서 있는 겁니다.
이 예레미야의 인간모습은 예레미야 1장 5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런 팔자를 살라고 태중에서 이미 택함 받았습니다. 택함을 받았다는 말은 뭔가 임무와 역할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야 했는데 그 역할이란 천국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자기 뜻도 아니고 주께서 내 뜻을 꺾어버리고 더 강한 뜻으로 외칠 수밖에 없는 역할을 하라고 주께서 예레미야를 그 어두운 세계에 세워놓은 겁니다.
7월중에 『잠언속의 그리스도』라는 책이 나옵니다. 그 책을 교정하면서 어떤 내용이 눈에 들어왔느냐 하면 계명대학교 교훈이 그 내용 중에 들어 있어요. 그 대학 교훈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대학의 모든 커리큘럼과 교재내용, 학생들과 교수들의 사고방식, 입학동기와 시험의 합격기준이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일체 차단되어야 되고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만 구하는 학생들만 모집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으니까, 지향점이 그쪽에 쏠리면 이쪽은 점점 멀어져야 돼요. 그런데 계명대학이 그렇습니까? 계명대학이 하늘나라 아들 만들어내기 위한 그런 학교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돈 버는 기술 가르치는 학원 같은 곳입니까? 그 교훈을 보면서 ‘계명대학 교목은 참 애 많이 쓰겠다, 얼마나 답답하고 치욕거리가 되고 수욕거리가 될까.’라고 걱정이 될 법도 하지만 전혀 걱정 안합니다.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 거기에 복음 전하는 사람 있으면 교목 안 시켜 줍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대학은 보이는 하늘나라, 보이는 하늘나라를 지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는 방식입니다. 보고도 안보여야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쳐다봤는데 쳐다봐 놓고도 저분이 하나님인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두 눈 가지고 열심히 봤지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니까 졸지에 귀가 고장 나 버렸어요. 두 눈 가지고 똑바로 봤는데 전혀 하나님이 아니고 그냥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어요. 요새 같으면 병원에 가서 단층촬영 해봤을 거예요. 그런데 그것 해봐야 하나님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예레미야가 그 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자기를 본 겁니다. 아무리 말씀으로는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난 그저 누구 집 아들이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에요. 에스겔 같은 경우는 미국 대통령 이름인 부시의 아들입니다. 물론 그 부시가 대통령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이 본인도 부르기가 편해요.
왜, 자기가 아침마다 거울을 봐도 보통 인간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하나님이 그걸 혀용 안 해요. 에스겔이 예쁘고 예레미야가 예쁘고 저와 여러분이 예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말씀이 이 아담의 세계 안에서 이 세상에 없는 존재를 만들어내고자 우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친구한테 하는 말이 ‘너는 보기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보이나?’ 친구가 하는 말, ‘미쳤냐? 네가 교회는 다니는지 몰라도 내가 아무리 널 봐도 너는 천사도 안 같고 예수님도 안 같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나도 그래.’
우리에게 매일같이 떠오르는 것이 욕심과 탐욕이잖아요. 백화점 쇼윈도 앞을 지나갈 때 욕심, 남 잘사는 것 보면서 욕심, 넓은 아파트 보면 욕심, 청와대 자리 있다고 하면 내 친척이 그 자리에 갔으면 하는 그 욕심, 김 정일이라는 인간이 내일 아침이면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그 욕심, 기아 프로야구팀이 15연패의 늪에서 벗어나서 제발 이겨줬으면 하는 그 욕심, 축구 월드컵 8강에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 욕심, 이것은 내가 봐도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들 되지 마세요. 그리고 하나님 아들 행세하지 마세요. 그것 위선입니다. 그것 가짜거든요. 그거 잘하는 것이 목사들이예요. 사기꾼들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일을 벌려 복음의 말씀을 주시면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우겨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싫은데 주께서 더 강해버리면 우리는 성경대로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자랑을 할 수 없어요. 헌금 많이 했느니, 기도를 많이 했느니, 이 자랑이 도대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냥 마귀자식이고 세상 사람하고 하나도 다를 바 없고 돈 좋아하고 돈 생기면 교회고 뭐고 다 버릴 인간일 뿐’이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애 공부 못하면 마구 패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지고는 못살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내 자존심, 내 영광 더 세우고, 막 그래요. 죽 그럴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더 세신데 어떻게 합니까? 주께서 더 강하신데 어떻게 합니까? 신기할 정도입니다. 신기해야 됩니다. 나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다니, ‘주여,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여,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세요.’ 라는 이야기를 속닥속닥 예레미야는 주님과 주고받는 대화가 본문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11절에 보면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라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예레미야는 유혹받는다. 예레미야는 우리하고 똑같이 삯군 될 거야. 제까짓 것이 백날 복음 전해도 결국 삯군 될 거야.’ 라고 주변에서 대기하고 관찰하고 있어요. 지금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매일같이 십자가마을을 보고 있습니다.
‘내가 안 되는 하나님의 아들을 너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기니까 너희들은 분명히 가짜다. 어떻게 가짜인지를 찾아볼게.’라고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그것을 가지고 미워하지 마세요.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눈뜨고 봐야 됩니다. ‘주여, 저 하나님의 아들 아니거든요. 저 되고 싶지도 않거든요. 아닌 거 맞지요? 주여, 제가 천당 안 가는 것 맞지요?’
그런데 말씀이, 십자가의 피가 내속에서 솟구쳐 올라올 때는 이것은 내가 조작한 것도 아니고 만들어내고 싶어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거예요. 나 같은 마귀의 자식을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내는 것은 어떻게 조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나보다 더 센 용사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끝으로 제가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용사라는 대목은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 낼 때 나옵니다. ‘하나님은 용사요’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출애굽 당시에는 나라와 나라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부터 신약에 오게 되면 내가 애굽이고, 물론 세상도 애굽인데, 이 애굽 같은 나를 날마다 주께서 이기시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셨는데 죄도 만만치 않게 짓고 있지만 그 죄보다 더 크게 은혜로 주시는 이 승리, 승리, 승리, 주님의 승리가 터져 나오니까 우리는 ‘주님은 진짜로 용사십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주께서 기어이, 성령께서 말씀의 사람을 가만 두지를 않아요. 기관차의 엔진이 돌아가야 기차가 달리는 것처럼 우리 속에 내 기관이 아니라 주님의 기관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이러니까 너는 세상에 없는 존재다’ 합니다. 이 세상에 없는 존재예요. 우리는 하늘나라에 있는 존재고 하늘나라에 격이 맞아요.
우리의 면류관도 반납하고 모든 공로는 예수님의 공로라고 이야기 한다는 그것이 우리 육의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사는 것이 다 주께서 일하라고 사는 겁니다.’라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레미야가 여러 가지 시련을 받는 가운데 도리어 본인은 은혜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희들도 시련과 눌림과 무시당함이 없으면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알 길이 없사오니 어려움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을 주님의 공로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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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이집사(IP:110.♡.197.100)
10-07-09 15:56
정말 독특하게 말씀 전하시는 이근호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 독특한 말씀이 읽는이에게, 듣는이에게 맛나입니다. 정말 감사해서 댓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맛있어요. 이 글을 녹취록하신 님께도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님이 하시고 칭찬은 우리가 받게 하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