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0. 6. 25) 2강 녹취록
광주 강의(2010. 6. 25) 2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24)
광주 강의(2010. 6. 25) 8-2
지난 시간에 산당을 이야기하다가 끝이 났는데, 6절에 보면 “산당으로 황무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태양 상들이 찍히며 너희 만든 것이 다 멸하며”라고 했는데, 산당은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사는 환경, 신은 계시는데 내가 정성을 다하면 감동받는 그런 신, 그러니까 신과 나 사이에는 보편적인 동질성이 있지요. 이 동질성이라는 파이프를 타고 연락이 가능한 그 신, 그 신이 바로 나의 삶의 환경이 되는 겁니다.
이 환경을 어떻게 바꿉니까?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가인인데,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 있어서 가인은 자기 환경 속에서 신과 자신이 내통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가인이 제물을 드렸는데, 드린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의 속성과 진짜 신과 일치가 된다고 본 거예요.
신이 자신(가인)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내 속에 하나님의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나를 죽이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것을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더구나 내가 신에게 제물을 드리면, 드린다는 이 자체는 신이 주신 속성이기 때문에(흔히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형상을 깨는 것은 모순되기에 그럴 리 없다고 여기고 자신만만하게 가인은 신에게 제사를 드린 거예요.
가인의 생각은 다 착각이었지요. 엄청난 착각을 한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진작 죽어야 될 자입니다. ‘너는 죽어야 될 자야.’ 라고 하시면서 다가오시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제사를 드리니까 너는 죽어야해.’ 라는 것을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시므로 나타낸 거예요.
아벨 제사를 받음으로써 가인의 제사가 거절된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이 아니잖아요. 가인은 가인일 뿐이고 아벨은 아벨일 뿐인데,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했다는 말은 --
첫 번째, 인간과 하나님은 공통점이 있다, 없다?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 것을 보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두 번째, 인간과 하나님은 공통점이 있다, 없다? 있다. 왜? 아벨 제사를 받는 것을 보니까 있는 거예요. 만약 아벨의 제사도 안 받았으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겠어요, 안 죽였겠어요? 안 죽였지요.
‘1)인간은 똑같다. 2)아벨의 제사를 받는다. 3)고로 나의 제사도 받아야 된다.’ 라는 생각은 가인이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안 받으니까 1)번이 문제예요. 인간은 똑같습니까? 인간이 똑같다는 것을 수용해도 문제고(아벨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 제사는 안 받았으니까), 인간은 똑같지 않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똑같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한쪽은 받으시고(축복), 다른 쪽은 안 받는다면(저주), 나는 저주에 해당되지 않고 무조건 축복에 해당되는 식으로 인간은 똑같지 않다는 말이 나와야 된다니까요.
모든 신학이 가인의 생각에서 다 나온 것입니다. ‘내가 제사 드리면 받아야지 네가 뭔데 안 받아?’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나와 저의 차이점이 뭔데?’ 그래서 현재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와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아벨을 제거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을 때, 인간은 1)안 따먹으면 된다. 2)따먹지 말라고 한 건방진 것을 따 먹어버리면 된다. 어느 쪽입니까? 나에게 따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를 꺾어버리면서 ‘누가 나에게 따먹지 말라고 했어?’ 하면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는 이게 바로 악마의 생각인데, 이것이 인간에게 전수된 거지요. 아담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모든 인간에게 다 임하는 겁니다.
대구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프랑스 빵 긴 막대기처럼 생긴 것이 뭐지요? ‘바게트’인데, 여기에 칼집을 내놓고 그곳에 쨈도 넣고 채소도 넣고 고기 다진 것도 넣고 하는데, 이 바게트 위에다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엎어버립니다. 그러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같이 주님이 흘러가는데 예수님의 속성인 공의와 사랑을 여기다 심어줘요. 사랑이 심어지면 이 바게트는 천국 가는 바게트고, 공의가 심어지면 이것은 지옥 가는 바게트지요.
가인과 아벨이 왜 서로 다른 종류인가? 예수님 자신이 공의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속성을 담으라고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이 관계가 뭐냐? 하나님 형상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아는데 두 종류가 있어요. 인간에서 출발해서 하나님 형상으로 가는 것, 두 번째는 하나님에서 출발해서 인간에게 오는 형상이 있어요. 어느 것이 맞겠습니까? 2번이 맞지요. 세 번째는 뭐냐? 진짜 숨어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형상.
1, 2, 3번 중 어느 것이 맞겠습니까? 3번이 맞겠지요.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보세요. 인간들에게 형상이 있다면 인간들이 동물과 다른 점, 인간들의 공통점을 찾아내겠지요. 금으로 이를 한 사람 다 모인다면 금리 한 사람의 집합이 되겠지요. 그러면 금리 한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여기에서 가인의 문제점에 발견되는 거예요.
인간이 신을 아는 것은 공통적으로 다 알 수 있다. 왜? 산당에서 기도하든 일월성신을 섬기든 신에게 정성을 다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신을 찾으면 다 구원해줘야 돼.’ 라고 생각한다면, 인간 대 인간의 구원은 성립이 안 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다 구원을 해야 되고 지옥은 아예 없애고(여호와증인처럼), 인간의 종교심으로 신을 찾는다는 그 공통점만으로 인간을 구원해야 된다는 요구가 나오지요.
그렇다면 문제는, 인간은 신을 찾는다는 그 공통점에서, 그 신을 찾는 공통점을 따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인간은 신을 찾는다.’ 여기에서 ‘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인가?’ 라는 것입니다. 신을 찾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신을 찾는 성질도 하나님의 형상이냐?’ 라는 문제가 생기지요.
두 번째로 가 봅시다. 하나님 쪽에서 오게 되면, 하나님은 형상이다. 따라서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심어줬다. 이렇게 되면 이것도 마찬가지로 1번과 2번 다 인간이란 이유 때문에 다 구원 받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베풀어야 돼요. 1번은 인간의 공통점을 끄집어냈고, 이것은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앞부분만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즉 하나님의 형상이 사랑이니까 모든 인간은 사랑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지옥은 왜 있어야 됩니까? 저주란 말이 없어야 되잖아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으면, 그 뒤에 ‘그래서 저주는 없다.’ 이렇게 나와야 앞뒤가 맞아요. 1번과 2번은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사람들의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3번은 뭔가 하면, 진짜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의 생각 속에 진짜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이 오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진짜 하나님 형상 되시는 분과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어요. 여기에서 나온 것이 뭐냐? ‘죽은 하나님.’
지젝이란 사람이 이것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죽은 자의 하나님’인가 그런 책도 있지요? 죽은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이 땅에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같은 형상을 받은 우리도 이 땅에서 같이 죽은 자가 되지 아니하면 동일한 형상이 될 수 없겠지요. 왜?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지젝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산 하나님이 아니고 이 땅에 와서 죽은 하나님이니까 우리가 죽어줘야, 죽은 채로 있어야 죽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말이 맞는 것 같지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죽은 척을 하면 되는가, 진짜 죽어야 되는가?’ 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에게 맞아 죽은 것처럼 동일하게 우리도 맞아 죽어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도 죽었고 사람도 죽으면 되는데, 하나님 죽고 우리도 죽으면 삽니까? 못 살아요.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옆에 나도 약 먹고 나란히 죽었습니다. 살려줍니까? 사흘 후에 부활되어 있습니까? 턱도 없는 소리. 하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옆에 보니까 어떤 사람이 죽어있어요. ‘살려 줄까?’ 생각하다가 ‘그냥 두자!’ 그러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지젝의 생각도 괜찮은 상상력에 불과해요. 그냥 죽어있으면 돼요. 죽어 있으면 하나님이 구원하든 그냥 두든 그것은 하나님 소관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내가 죽은 척하든 죽었든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 되는가? 주님이 살려주시면 구원 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내가 죽어도 못 사는데 주님이 살려주면 죽어도 산다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우리 자신의 행함에 대해서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그냥 나타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반드시 인간의 1번 2번을 업고 나타납니다. 모든 인간이 다 1번 2번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3번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번으로 진입이 안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1번 2번 3번의 생각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야 우리가 구원 받습니다.
찾아올 때 사랑으로 오는데, 그 사랑이란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죄의 요소가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용서입니다. 정죄하면서 용서하는 식으로. 정죄를 하되 용서를 빌면 용서 비는 그것을 통해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 안에는 반드시 뭐가 들어 있습니까? 우리는 정죄 받아도 마땅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지요. 그런데 1번 2번은 뭡니까? ‘우리의 공통점을 끄집어내서 주님을 섬기자.’ 이렇게 나오지요. 이렇게 되면 정죄 받을 것이 아니고 칭찬 받을 일이잖아요. 칭찬 받을 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원이 안 되지요.
‘주님의 용서 없이는 구원이 안 됩니다.’ 라는 생각을 가지려면, 모든 성경 말씀을 보면서 ‘이래서 내가 가짜 하나님을 섬겼구나.’라는 것을 늘 깨닫는 가운데서 용서라는 의미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아, 용서해서 구원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구나.’ 라고. 왜요? 우리는 눈만 뜨면 우상을 섬깁니다. 바꿔 말하면, 내게 속한 환경만 생각해요.
성룡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있는데, 어릴 때 남자아이들이 그런 장난을 치는데, 언덕이 있는데 그냥 뛰어내리면 아프잖아요. 그래서 대나무를 엮어 큰 공을 만들어서 그 속에 들어가서 구르면 언덕에서 잘 굴러 내리지요. 실제로 이런 놀이기구도 있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정죄라는 공 안에 용서를 담아서 굴려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성경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해요. 왜? 전부 다 나를 정죄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냥 흘려보지 않고 유심히 보게 됩니다. 예전에 십자가마을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손00 목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방종하게 한다.’고 했지요. 성도는 방종할 수가 없어요. 성경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내가 정죄 받을 말씀이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 질 수가 없어요. 성경을 안 보면 교만해져요. ‘이만하면 됐다.’ 라는, 정죄 받을 환경이 아니고 ‘나의 의’를 갖추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나의 의’가 산당이고 우상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발각이 되면 즐거워야 됩니다. 우상이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시거든 다 쳐다보세요. 무엇 때문에 나를 우상화 시켰는지 보세요. 집에 있는 것들을 보면서, ‘이것 처음 가졌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저건 내 딸이 전국 대회에 가서 받은 상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괜찮은 환경 속에서 나를 포근히 감쌀 수 있는 그런 우상 숭배의 장으로 인생을 꾸리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전부 우상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을 탐심이라고 하고, ‘탐심은 우상숭배(골3:5)’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환경 숭배입니다. 이 모두가 우상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이것이 달라지지 않아요. 정죄 받아야 마땅한 것을 그냥 굴리세요. 굴리되 안에는 뭘 집어넣는가? 주님께서 피로써 우리를 용서했다는 것을 가지고 굴리란 말입니다.
불신자와 결혼하기 힘든 이유가, 불신자와 결혼하면 자기는 용서 받을 일인데, 상대방 배후자는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자기가 잘났다고 하니까 만날 싸우게 되는 겁니다. 제가 대전에서 강의하면서 부부이야기를 했어요. 아내가 미워질 때가 있을 겁니다. 마누라 죽고 젊고 돈 많은 처녀하고 결혼하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현재의 아내와 비교가 되면서 미워집니다. 이렇게 아내가 미워질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거예요. 왜? 내 환경이 정죄되고 미워질 때, 그 때 아내가 어디 갔다가 집에 돌아오게 되면 아내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겁니다.
아내 때문에 내가 정죄 받아야 마땅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 살지 말고 결혼하라.’고 합니다. 상대가 있어야 상대가 자꾸 미워지고, 미워져야 내가 남을 미워하고 살인하는 죄인이라는 것이 발견되고, 이런 살인자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피가 감사함으로 다가오고, 이게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속으로는 미워죽겠는데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하고, ‘이번 생일날 뭐 해줄까?’ 이런 위선을 떨지요. 이게 진짜 나쁜 거예요. 원래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걸 아닌 것처럼 감추고 숨기는 것이 악한 짓입니다.
“여보, 당신을 보니까 미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래도 당신 때문에 나의 완악한 마음을 발견하게 되니까 당신의 존재가 소중하게 느껴지네. 당신 없었으면 내가 얼마나 잘난 척 했겠나? 당신한테 내가 할 말이 없다. 오늘 뭐 해줄까?”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미워 죽겠는데,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그래서 자신은 괜찮은 남편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미혼 여성들은 이 강의 듣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남자의 심보를 알면 결혼할 마음이 싹 사라질 건데 ---
그래서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계속해서 다 부숴버립니다. 이것이 일관된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7장 20-21절 봅시다.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지었은즉 내가 그것으로 그들에게 오염물이 되게 하여 외인의 손에 붙여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붙여 그들로 노략하여 더럽히게 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8장 보면,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빠져나오게 하셔서 그들과 동행해요. 동행하게 되면 어떤 것이 출애굽입니까? 원래 출애굽은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출애굽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역 출애굽이 되지요. 무엇이 구원입니까? 이 저주스런 땅을 버리고 포로 잡혀 나오는 것이 출애굽이죠.
마태복음 2장 15절을 보겠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고 하지요. 그런데 실제 지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가요. 이게 바로 환경이 바뀌는 겁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나로 하여금 우상 숭배하게 하는 환경, 현재 우리가 광주에 있다면 이곳이 우상이 있는 환경, 우상의 세계입니다.
우상의 세계에서 여호와 계신 곳으로 가는데, 이렇게 될 때는 반드시 우상을 부수는 작업을 선행하고 난 뒤에 우리가 포로로 잡혀 나오는 식으로 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광주에 살면서 늘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식이 되기 위해서는 이 광주에 의미를 두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자꾸 일어나는 거예요.
자식 믿다가 자식에게 실망하고, 남편 믿다가 남편에게 실망하고 이런 식으로 뭔가 내가 믿을 만한 요소는 전부 다 부수는 작업이 계속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개념의 확장입니다.
이스라엘 당시에 에스겔의 환경이 바뀌듯이, 지금은 우리가 사는 환경이 더러운 세상이고 이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겁니다. 믿었는데 또 실망하고, 의지했는데 또 실망하고. 그런 일들이 자꾸 발생할 때 비로소 에스겔의 의미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7장 20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지었은즉”
사람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마음이 교만해 졌지요? 그러면 광주에서 사람이 살면서 경쟁을 하는데 무엇 때문에 경쟁합니까? 화려한 장식을 해서 ‘내가 얼마나 성공한 자인가?’ 그런 것을 남에게 과시하는 식으로 교만을 품고 경쟁을 합니다.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크게 지으면 검소하게 짓지를 않습니다. 크게 짓는 만큼 화려하게 장식해야 되고, 화려한 만큼 그곳에 출석하는 사람은 마음이 교만해 지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이런 것들이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인간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상 섬기는 모습의 연장입니다.
21절에 보면 “외인의 손에 붙여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붙여 그들로 약탈하여 더럽히게 하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과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을 고생해서 얻어놓으니까 사기꾼이 와서 몽땅 빼앗아 가고.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평생을 살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고.
24절을 봅시다. “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으로 이르러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악한 자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 성소가 더럽힘을 당하리라.”
결국 우리가 믿는 종교는 우상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우상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우상 아닌 것은 ‘이것이 우상이다.’ 라고 하시면서 뒤에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진짜 예수님입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뭐냐? 현재의 우리 환경을 부수고 새로운 땅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서 가지요. 그렇다면 이것을 그대로 예수님께 적용시키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동행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근심하며 길을 갔습니다. 왜 근심했습니까? 그동안 자신이 누렸던 환경, 주님과 함께 있었던 환경이 날아가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근심하면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야기를 나누고 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들어 설명해 주시고 해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식사를 같이 하면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저희에게 주시면서 저희 눈을 밝혀 보여주실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어요(눅24:13절 이하 참조).
예수님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세상살이를 실망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눈을 떠보니까 예수님이 동행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그런 조치를 하시는 가운데서 그 장소가 바로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만약 에스겔 말씀으로 설교를 한다면, “지금도 에스겔의 예언은 죽지 않고 계속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로 세상에 대해서 믿다가 교만케 되고, 그러다가 실망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나중에 깨닫고 보니까 그렇게 실망케 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군요.’ 하고 눈을 뜨니까 또 주님은 사라져 버립니다.”
왜 사라져야 됩니까? 주님을 붙들면 그것이 또 새로운 나를 위한 환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또 우리를 교만케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에스겔 예언과 다르게 되니까 안 되지요. 에스겔 말씀 그대로 예수님이 실천에 옮기시면 우리는 항상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난 사건들을 계속 우리의 사건으로 번복되는 겁니다.
26절을 봅시다. “환란에 환란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거민의 손은 떨리리라.”
여기 선지자, 제사장, 왕 이 사람들이 한 조가 되어서 사람들을 교만케 했지요. 교회 다니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낮추게 하는 것이 아니고 교만케 했지요. “나는 교회 다닌다. 너는 안 다니지? 난 죽으면 천당 갈 거야.” 이게 교만이란 말이지요. 교회 다니는 것이 오히려 교만케 되었어요. 교회 가서 좋은 소리 듣고, 자기 환경을 긍정해 주니까.
교회를 다니지 말고 주께서 우리를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그 교회 안에 있으면 돼요. 주께서 어떻게 만드십니까? 세상을 보면서 교만하다가 남한테 얻어터지는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예배당입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보이지 않는 예배당’이란 표현을 썼어요.
사람이 자기 죄를 알게 되면 불평, 불만이 없어져요. 불평, 불만이 감사와 기쁨으로 바뀝니다. 만약 학생을 예로 들면 “내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이런 고생 안 해도 되는데” 라고 불평하다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이 재미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하고 정신없이 여기에 몰두해 버려요. 그러면 자기를 잊어버려요.
자기를 잊어버리면 우울증,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 버려요.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는 반드시 뭣과 결부되어 있는가 하면, 자기의식과 결부될 때 찾아옵니다. 항상 뭔가 일할 것이 없을 때는 우울증이 와요. 도둑이 도둑질 할 때 우울증 걸리는 것 봤습니까? 지금 급해요. 빨리 물건 훔쳐 도망가기 바빠요. 정말 바쁘면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사람들 도둑질 하는 것이 좋은 점이 뭔가 하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 죄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희괴한 소리를? 학생 때 가장 겸손한 순간이 언제인가? 커닝할 때입니다. 고개 숙여 커닝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고함을 치면 나에게 한 것이 아닌데 내게 한 것인 줄 알고 깜짝 놀라지요. 이정도 겸손한 사람 봤습니까? 남을 꾸중하고 있는데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 정도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기쁘게 만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날마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에스겔의 예언입니다. 이 사람들이 고만운줄 알아야 돼요. 그들은 그 당시에 성전도 있고, 제사장 있고(요새 말로 하면, 목사 있고, 큰 교회 다니고) 이것이 망하는 길입니다. 성전도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된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을 자기가 깨달으면 안 돼요. 깨달으면 깨닫게 된 것 때문에 교만하게 돼요.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주께서 하십니다.
이제 8장으로 넘어갑시다.
1절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집에 앉았고” 그런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임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입니까?
제가 강의 초두가 뭐라고 했습니까? 선지자는 자기가 원해서 선택한 직업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냥 주께서 뒤에서 떠밀어요. 자기는 그냥 집에 앉아있는데 여호와의 권능이 임했어요. 1절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봅시다. 에스겔은 앉아 있고, 그 앞에 유다 장로들이 앉아있고.
유다 장로들이 왜 앉아 있습니까? 누가 이런 만남을 주선했어요? 하나님이 하셨지요. 장로와 에스겔이 만났는데, 그 다음에 주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언이 나왔어요. 그러면 이 예언은 누구 좋으라고 한 거예요? 에스겔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이 장로들에게 전할 말을 에스겔을 통해서 전달하는 겁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이것이 우상이 아닌 진짜 현실입니다.
옷 가게를 하시는데 손님이 왔다면 누가 이렇게 하신 겁니까?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열 두 벌을 입어보더니 그냥 갔습니다. 이런 분을 보면서 이전에 세 번만 입어보고 간 그 손님이 고맙게 여겨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낮아진 마음입니다.
인간은 항상 뭔가 되면 다 자기 잘나서 되고 못되면 하나님 탓인데, 이것을 반대로 바꾸기 위해서 주님의 권능이 임합니다. 주님의 권능이 임하면 반대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주님 어디 계십니까? 주님 보여주세요.” 요청하지 마세요. 가만히 있으면 여러분 마음이 뒤집힐 겁니다. 주님이 마음을 낮추는 역사가 있고, 그래서 선지자로 하여금 자기 할 일을 마음껏 하게 하십니다.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할게.’하는 주님의 뜻이 그대로 전달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3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우상이 뭡니까? 평소에 사람들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자기 환경이 우상입니다. 환경이 우상이기 때문에 절에 안 간다고 해서 우상이 없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은 다 부숴도 이것만큼은 제발 손대지 마세요.’ 라는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바뀌어서 ‘나는 이것을 붙잡기 위해서 평생을 달려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죄입니다.’ 라고 자기 죄를 알 때, 그것이 바로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드러내기 위한 환경입니다.
로마서 5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모든 사람이 지었다고 합니다. 이 하나에게 다수로 어떻게 나아갑니까? 철학에서는 이것이 설명이 안 돼요. 기껏 신학자들이 하는 주장은 유전적인 요인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만약 유전적 요인으로 하나가 다수로 되면 이삭은 어디에서 태어났어요? 이삭은 약속에서 태어났어요.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이 태어났단 말이지요. 야곱도 마찬가지고.
DNA는 혈육입니다. 혈육적으로 다수가 하나가 된다면, 이 다수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로 모아져야 맞지요? 쉽게 말하면, 한 사람에게서 여러 명이 나왔으면 여러 명이 다 한 사람의 공통점을 물려받아야 되잖아요. 그러면 공통점을 끄집어내 보자는 말이지요. 끄집어내 보니까 하나로 소급이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아이가 셋 있으면 다 성질이 달라요. 하나가 안 돼요. 자식 셋 모아봐야 부모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부모로부터 받았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개입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몰라요. 인간은 죄가 개입 되면 죄 중의 일부를 받은 거예요. 열 개의 죄가 있다면 한 사람이 열 개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은 이런 대목을 담당하고, 어떤 사람은 또 다른 대목을 담당했는데 전부 합쳐보면 아담의 죄가 돼요.
가인은 살인죄를 지었지만 아벨은 살인죄를 안 지었지요. 물론 아벨의 마음속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겠지만. 실제적으로 볼 때 인간들의 공통점을 다 발견해서 하나로 모을 수 없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죄가 개입되어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다수를 연결시킨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다수 인간 사이에 죄가 있습니다.
죄가 죄를 낳고, 또 죄가 죄를 낳는데 이 죄는 외부에서 왔는데 사람들은 이 죄를 본인이 짓는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선악과 안 따먹었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선악과 따먹기는커녕 구경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예수님이 십자가 지셔서 피를 흘려서 의인이 되었지요. 한 사람이 순종하므로 다수가 의인이 되었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졌지 우리가 십자가 졌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 죄가 사함을 받는가 말이지요. 유전자 때문에 가능합니까? 혈통적인 요소로 가능합니까? 아니지요.
아담이 죄를 지을 때는 죄가 왔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는 하나님의 의가 온 거예요. 의가 오는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는 선물이에요. 선물을 갚으면 선물 값이 떨어져요. 우 집사님이 제 아내의 옷을 만들어 줬는데 이것을 받고 아내가 제봉 틀을 사서 바느질해서 다시 집사님께 드리면 이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거래가 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섭섭하게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종의 선물로 받은 거예요. 아담이 죄를 지어서 우리는 그냥 죄를 물려받은 거예요. 물려받은 죄를 인간들은 싫다고 해서 ‘내가 죄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다.’ 즉 내가 결정하겠다고 우기는 겁니다. 죄를 내가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다고 해버리면, 아담에서 벗어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관하게 내가 의인 되고 안 되고를 결정할 수 있다는 엄청난 오류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것을 말렸어요. ‘제발 죄인 좀 되어다오. 부탁한다. 의인이라는 소리 하지 말고 평생 죄인이라고 간주해 다오.’ 왜요? 그래야, 그 원리를 알아야 예수님 혼자 의인인데 우리가 덩달아 선물 받아서, 은혜 받아서, 은혜가 왕노릇 해서 의인 되었다는 것을, 이 원리가 우리에게 왔다는 것이 표가 나잖아요.
하나님께서 에스겔 시대에 벌 내렸어요. 그러면 벌 받으면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 당시 유다 백성이라면, 예루살렘 성전 깨지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잖아요. 그냥 잡혀 가세요. 그리고 집과 산당이 다 깨지잖아요. 그냥 깨어지면 됩니다. 무엇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깨어지듯이 우리가 공짜로 하나님의 의를 얻어먹는 그 시절이 온다는 약속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유다 백성들이 포로 잡혀 간 곳에 동행해서 과거에 예루살렘에서 세운 그 전을 이방 나라에서 새롭게 전을 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이야기 하겠다는 겁니다. ‘옛날에 다 깨졌지. 잘 깨졌어.’ 왜? 새롭게 은혜를 받았으니까.
자,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은혜로 우리에게 오는데, 은혜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습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은혜라는 것은 십자가가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지요. 십자가는 뭐냐 하면, 1)진작 우리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 2)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했다. 이 용서가 우리에게 오지요. 그러면 이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옵니다. 이것이 오기 위해서는 우리는 계속해서 아담의 육체를 가지고 그대로 죄를 드러내야 됩니다.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타고난 속성입니다. 그냥 걸어 다니는 것이 죄가 됩니다. 이런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뭘 해도 죄니까 내가 의를 만들어 낼 생각은 아예 하지 마세요. 만약에 일기를 쓰면서 착한 일하면 동그라미, 나쁜 일 하면 가위 표를 했다면, 20년 일기를 미리 쓰세요. 가위 표, 가위 표, 가위 표 ----. 20년 일기를 다 쓰세요. 아, 시원하다. 전부 가위 표네.
우리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용서 받아 구원 되는 겁니다. 이 말 하려고 오늘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습니다. 누가 나를 용서해서 구원 받은 거예요. 내가 착한 일해서 용서 받고 구원 된 것이 아니고, 그냥 용서 그 자체, 이것이 선물인데 이 선물을 다시 갚아줄 필요 없어요.
이 용서가 남아 있으려면 우리는 그냥 평소에 살아가는 대로 죄인으로 살게 되면 내가 미처 몰랐던 죄를 은혜를 내리셔서 알게 하지요. 은혜를 내려서 죄를 짓게 한다고 말하면 말이 안 되고, 은혜가 내려오면 ‘아, 이것도 죄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서 그것이 한 세트가 되는데, 앞면에는 죄, 뒷면에는 용서가 나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님의 공로, 은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에 대해서 감사하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스겔에서 처참하게 유다 나라를 심판하는 것 같지만 그게 사랑이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진짜 하나님이 이렇게 찾아오신다고 알려주신 그 사랑,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슨 죄라도 이미 다 용서된, 용서 받은 죄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용서를 잊지 말고, 용서해 주신 주님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7. 7. 17:4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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