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02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20100702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100702b 울산강의-출애굽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아까 누룩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무교병이란 누룩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없다’는 상태를 계속 유지해달라는 거예요. 네가 네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나? 없습니다. 네가 기도 좀 하던데? 아닙니다. 없습니다. 네가 착한 일, 전도 좀 하지? 아닙니다. 없습니다. 항상 없음을 유지해줘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되는 거예요.
없음이 이걸 공집합, 공백. 없음에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없음이 있음으로 변하는 걸 사건이라 합니다. 그냥 보통 평범한 산인데 여기에 화산이 터져버리면 사건이죠. 터져버리면 여기선 구멍이 생기죠. 이게 바로 사건의 현장이에요. 그러면 사건 때문에 흙들이 쌓이지 않습니까? 쌓이는 이 둔덕, 이걸 사건으로 생긴 주체, 쉬운 말로 자아라고 합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이 자아가 사건의 주인공입니까? 아니죠. 결과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포도가 포도나무를 심은 게 아니에요. 이미 열매가 있다는 말은 나무가 먼저 있고 열매 있는 법이잖아요. 사건이 먼저 터지고 사건 주변에 자아가 돌아가면서 배치돼있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자아는 뭘 증거하느냐 하면, 전에 없었는데 사건 터져서 내가 생긴 거예요. 나와 내 형제들 생겼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묻기를 이런 사건을 일으킨 주님은 어디 있느냐 하면, 주님은 사건만 일으킬 뿐이지 주님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는 경우가 불과 삼십 년만 보이고 그것도 대중적으로 보인 것은 삼 년밖에 없고 나머지는 갈릴리에 숨어 지내다시피하고 나타난 건 삼 년밖에 없죠. 삼 년만 계시다가 여전히 없으신 분이 돼요.
그래서 삼 년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서 성지순례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더듬어가는 내가 만든 사건은 사건 취급을 안 해줘요. 독일에 가면 유명한 성당들이 있는데 옛날 성당들이 오래지은 이유가 뭐냐 하면, 건물도 커서 오래지었지만 스테인드글라스 전부다 성경에 있는 그림으로 했어요. 그 당시 인쇄술이 발달 안 해서 성경을 알려면 그 그림으로 설명해야 돼요. 그걸 조각해서 올린 거예요.
그러면 그 그림 사건은 뭡니까? 왜 헨델의 메시아가 그렇게 웅장합니까? 인간들이 뭘 만들어낸다? 옛날 자기가 은혜 받은 사건을 ‘재현’하기 위해서 성당 지어놓고 천민들 무식한 인간들 은혜에 뿅 가게 만드는 거예요. 그럼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역사입니까, 아닙니까? 아니라니까. 왜? 이미 있는 유에서 유를 사건으로 만드니까 이건 사건이 아니고 그냥 재현이에요.
재현이 되면 주체가 사건 전체를 자기가 나가 설치게 돼. 설치게 되면 주교도 필요하고, 목사도 필요하고, 성만찬 이런 것도 필요하고. 눈에 보이는 교회니까. 그래서 교회는 재현이에요. 다시 인간의 손으로 다듬어서 만들어내는. 그러니까 우상이에요. 이 단어가 적당하네. 사람 손으로 만든 우상이라니까. 교회가 사람 손으로 만든 거예요.
그럼 사람 손으로 만들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 교회를 재현하면 반드시 그 안에 권력, 힘이 작용해요. 힘이 작용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나름대로 질서가 있어요. 질서를 다른 말로 법이 있어요. 율법은 사건입니까, 사건이 아닙니까? 항상 둘 중에 하나만. 하나님이 주어졌죠. 율법은 사건이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사건입니까, 사건 아닙니까? 그건 사건이 아니고 재현이죠. 그러니까 어설프잖아요.
부자청년이 와서 하는 말이, ‘내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나이다.’ 그건 사건입니까, 재현입니까? 재현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지킨 그 권력된 자아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걸 다 팔고. 다 팔면 뭐가 돼버려요? 유가 아니고 무가 되고. 무가 돼서 날 따라오너라. 안 가잖아요. 권력을 다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죠. 이건 자기 질서를 다 날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건 터져서 구멍 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시, 나타난 거죠. 그럼 나타나려면 어떻게 해서 나타나야 돼요? 없는데서 계속 나타나죠. 그럼 이삭의 출생이 나타남입니까, 재현입니까? 나타남이죠. 그걸 아브라함이 믿지요. 그럼 이삭은 하나님이 자식이에요, 자기 자식이에요? 하나님 자식이죠. 없으신 분의 무의 자식이죠. 무의 자식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내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내 자식은 내 앞에서 재현이 되는 거예요. 내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내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구원 못 받아요. 육으로 태어난 건 육이고. 영으로 태어나야 되는데 그 성령이 세상에 눈에 안 보이네. 안 보일 수밖에 안 보여야 무가 되니까. 그냥 바람 같이 왔다가 사라지고 이렇게 돼요.
만약에 유가 돼버리면 그건 인간적인 육적인 힘이 거기다 새기게 됩니다. 그러면 새로운 법이 생겨요. 이 법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보고 자꾸 뭐라고 합니까? ‘좀 보여줘.’ 하니까 주님 하는 말이, ‘내가 사건이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봤어. 나는 아버지와 하나야.’ 하니까 이 사라들이 돌아버린 거예요. ‘하나님은 안 보이고 너는 보이는데 네가 어떻게 하나님이냐?’ 이렇게 된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본다고 하니까 못 보는 거야. 네가 듣는다 하니까 안 들리는 거야.’
방금 이 논리를 펼친 사람이 알랭 바디유라는 철학자입니다. 이 세상에 신은 없고 다수성의 다수성만 있다. 집합의 집합만 있을 뿐이다. 다만 사건이 터지는데 사건이 터질 때 뒤늦게, 그걸 차후적이라 했는데 70이레의 논문에 나옵니다. 또 회고적이란 말 썼고. 회고적이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그냥 뒤 담화하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죠. 이스라엘이 망한 게 이스라엘에게 다행입니다. 망하게 하신 것이 누가 관여한 거예요? 하나님이 관여한 것이 바로 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유가 아니고 무라는 것을 알게 된 사건에서 구원받은 걸 알게 된 사람이 에스겔, 예레미야, 다니엘이에요. 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나라 망해도 좋다는 거예요. 희한한 선지자들이에요. ‘우리 교회 망해서 너무 좋아. 미치겠다.’ 이거란 말이죠. 우리 교회 망했다는 것. 이 사람들이.
그래서 에스겔도 인자고 다니엘도 인자에요. 인자로 오신 분이 이렇게 돼요. 무는 안 보인다는 걸 아는 시절이 어떤 시절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있을 때는 무라 하는 것은 안 보인다. 누가 안 보입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사건만 일으키고 그냥 계시는데 이 땅엔 안 보이죠. 하나님은 안 보인다는 그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해버리고 난 뒤에 하나님은 무 되시는 분이 보인다고 나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이거 미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존의 상식과 선입관으로선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소리에요. 보이는 하나님 보신 적 있습니까? 안 보이는 하나님도 못 보이지만 더더구나 보이는 하나님도 안 보이게 돼있어요. 아무리 봐도 키가 176이고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아니야. 아무리 봐도 모르는 거예요. 이게 더 미치는 거예요. 이걸 걸림돌이라 하는 거예요.
아까 유교병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져요. 차이는 뭐냐? 있음과 없음이에요. 만약에 누룩을 먹어버리면 그 사람은 있음은 반드시 권력이 되거든요. 왜 권력이냐 하면, 알랭 바디유에 의하면, 주체가 등장함이 있음이라. 주체는 가만있질 못해요. 뭐냐 하면, 셈하기. 1, 2, 3, 4, 5, 6, 7 이렇게 셈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셈을 하게 되면, 셈을 무한대로 셈하죠. 2756 그 다음에 2757 이걸 누가 셉니까? 본인이 세죠. 그럼 본인은 2758보다 더 셉니까, 안 셉니까? 더 세죠. 무한대가 있잖아요. 이걸 누가 셉니까? 내가 세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리 신이 있고 해도 신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 이게 오늘날 현대 천문학이에요. 모든 우주가 무한대라도 그 우주가 무한대라고 그걸 알아챘고 그걸 발표하고 알아주는 우리 인간이 위대하다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이 위대한지 인간은 우주에서 별 것 아니라는 걸 알아챌 정도로 위대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우주보다 더 위대한 거예요.
주체가 생겨버리면 주체는 그 다음부터는 셈하기에 들어가요. 셈하게 되면 그건 주체가 갖고 있는 안목과 지식이 점점 더 펑퍼짐하게 늘어납니다. 심지어 신의 능력까지 무한의 능력까지 포함이 되죠. 똥배가 터지려고 해요. 이게 바로 짐승의 모습이에요. 모든 힘은 바다에서 올라와요. 바다에서 온 짐승이 계속해서 이걸 권력을 낳는데 권력을 어떻게 낳느냐 하면, 주체가 셈을 하게 되면, ‘네가 꽃이다’ 하면, 나에게 와서 꽃은 네 마음대로 못해요. 꽃이 그냥 죽어도 전에는 몰랐는데 ‘꽃이 죽었구나.’ 하고 한 소리하게 돼있습니다.
여러분 네비게이션 있잖아요. 좋으나 싫으나 잔소리 들어야 돼요. ‘속도를 줄이세요. 속도를 줄이세요.’ 일단 내 영역에 와버리면 나의 셈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같이 엉키게 돼있어요. 그러면 이 세상이 좋은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내가 좋아요. 이걸 석가모니가 안 거에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우주가 있더라도 그 우주를 바라보는 내가 있음은 내가 우주보다 좋고 더 위대하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이여 온 신보다 여러분들이 위대합니다. 그걸 깨친 그게 해탈의 경지에요. 모든 삼라만상의 모든 변화도 여러분 속에 지금 여러분 되기 위해서 있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힌두교한테 쫓겨났어요. 힌두교는 신이 있는데 불교는 신이 없어요. 오늘날 한국교회 같아요. 한국교회가 오직 천상천하유아독존, 자존심밖에 없어요. 자기 욕망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체가 확장 될 때 그냥 확장되는 게 아니고 분열되고 분산된다는 거예요. 가지치기 계속 갈라지는 거예요. 이 갈라짐의 계열화된 모든 체계가 바로 유에서 유,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계시잖아요. 분명히 계시는데도 하나님이라 했으니까 무슨 하나님이 구름 타고 오지 않고 이렇게 왔느냐 말이죠. 행세가 평범하고 왜 구름 타고 안 왔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구름은 조금 있다 타고 올게.’
왜 주님께서는 보이는 모습으로 오셨느냐 하면, 여기에 유교병, 유교병은 있음이죠. 있음의 자리에 전부다 없음으로 들이대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보인다 하는 사람은 전부다 소경으로 만들어버리고 들린다 하는 사람은 귀머거리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어떤 방식으로? 놀라운 것은, 귀머거리는 귀가 있어도 없는 것이죠. 이 귀머리거리를 주께서 듣게 하셨고, 난치병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한 쪽을 이쪽과 반대방향으로 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뭘 노린다? ‘너는 망했어.’ 그걸 말하기 위해서 이쪽의 엉뚱한 인간을 뽑아내면서 예상치도 못한 가만있는데 은혜 주시는 것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천당 가는 방법을 생각한 적도 없고 그냥 있는데 찾아온 것은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한 거예요. 우리 혼자 구원받았다고 무에서 유로 까불지 말고 거기에 머물지 말고. 바로 저 사람도 나처럼 지금도 복음 모르면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자기 힘만 추구하고 세상만 성공하면
아까 했지요. 본 게임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자살해버리고. 인생 뭐 있어 한 방인데. 짧은 인생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그런데 우리가 우습게 봐도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은혜를 안 받았으면 진짜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 몰랐으면 우리는 나만 신봉하는, 왜 나만 신봉합니까? 사람이 아무리 환상이라 해도 정말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이걸 환상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는 손에 잡히잖아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습니다만 꿈속에 이런 게 있어요. 이게 꿈일까, 진짜일까? 때려봐야지. 꿈속에 때려본다고. ‘그래 맞구나.’ 하고 깨보면 꿈이야. 꿈에선 아무리 때려도 소용없어요. 그 자체가 꿈이란 말이죠. 내가 한 마리 나비가 된 것이 진짜 나비여서 나비된 건지 아니면 꿈속에 잠시 나비된 건지 그걸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없다? 없다고 한 사람이 중국의 철학가 장자였어요.
그래서 불교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는데 아는 것은 모르겠다고 외치는 우리는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이게 꿈인지 내가 나비인지 아니면 내가 인간인지를 고민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아무리 해도 의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게 데카르트고 장자라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시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작은 모르겠고 끝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그냥 사업 안 되고 매니저 돈 떼어먹으면 자살하는 박용하밖에 없는 거예요.
앞뒤 다 잘라내 버리고 모르겠고, 모르겠고. 이것밖에 없고 알고 있는 것은 현재 내가 배고프다는 사실. 어디서 왔는지, 왜 사는지 모르겠고 그냥 힘. 이 힘은 바로 주체가 분열되고 분산되는 겁니다. 이걸 70이레에서 발꿈치의 각질. 이걸 설명하는데 이만큼 깁니다. 각질은 뜯어내도 운동하면 또 생기죠. 벗겨도 또 생기죠. 손톱도 머리카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꾸 자라나고 자라나요. 이 짐승에서.
‘그저 눈에 보이는 게 전부야 딴 생각하지 마. 교회는 다니되 신경 쓰지 말고 네 몸이 최고야.’ 좀더 나가면, ‘네 자식이 최고야.’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자식을 출애굽할 때 하나님이 죽였다고. 장자를 죽였다고. 보라고.
너는 유에서 나올 인물이 아니야. 너는 무에서 아들 될 하나님의 자녀야. 왜요? 창세전부터 시작할 때 이미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도록 돼있는데 너만은 특별히 사랑해줄게. 은혜 내려줄게. 해서 발생된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알았죠. 눈에 보이는 것은 이게 아니구나.
저는 어려운 게 뭐가 어려우냐 하면, 지금 없음을 사람이 유를 무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철야해도 소용없고, 재산 교회 바쳐도 소용없고 아무리 해도 유는 아무리 잘게 잘라내도, 이걸 미분이라 하죠. 아무리 헌신하고 직업 다 때려치우고 교회에서 스물네 시간 기도해도 기도하는 나는 의식되니까 이게 없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공부했으니까 물어봅시다. 유에서 없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없어집니까? 사건이죠. 근데 유에서 사건 터지면 나는 이 사건을 내가 셈하는 알아채는 사건으로 바꾸죠. 그러면 이 사건은 사건 터지고 난 뒤에 뭐로 바뀝니까? 사건 근처 변두리에 뭐가 있다? 그 사건으로 새롭게 달라진 눈에 보이는 있는 주체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은혜 받고 난 뒤에 자기 은혜 받은 걸 또 자랑해요. 사건 또 터져야 됩니다.
사건 터지기 위해서는 유가 할 게 아니고 무가 한다. 그럼 목사님 성령께서 주님께서 지금도 역사합니까? 역사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어떻게 보입니까? 하나님 언제 나타납니까? 이게 구약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은 채로 왔는데 신약 때는 예수님 방식입니다. 예수님 방식은 보이는 방식으로 무를 이야기했잖아요. 신약 때는 내 잘난 것 때문에 핍박 받고 내 자랑 때문에 서러움 받는 힘없는 사람을 통해서 주님께선 사건을 일으킨다니까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바로 예수님한테 한 것이다. 주님은 소자를 풀어놨어요. 그럼 우리는 부자라고 좀 가졌다고 무시하고 막 대하고, 우습게보고, 교인 적다고 ‘죽어라. 나 같으면 죽었다. 우리는 교인 많거든.’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할 때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 대한 밀침, 나에 대한 저주, 소위 있음의 자리에서 또다시 없음의 주님을 공격하게 된 거예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요. 촉수, 빨판. 주님은 머리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촉수를 깔아놔버려요. 지뢰밭을 만들어요. 조금만 까불면 상처받는 집사님이 생기게 만들어요. 나의 깝죽으로 인하여 희생되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자 이 말입니다.
그게 공부 못한다고 팼던 내 자식이란 말이죠. ‘다른 애 공부하는데 너는 왜 공부 못해’ 하고 팼는데 그 애는 원래 성적이 일등할 애가 못 돼. 기껏 이등밖에 못 돼. 그리고 백만 원짜리 옷 안 사주고 오십만 원짜리 사줬다고 남편한테 잔소리할 때 남편은 된 통으로 당하는 거죠. 남편은 아내한테 당해서 ‘주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습니다.’ 그럼 주께서는, ‘너는 핍박 받도록 돼있는 사람이야.’ 그럼 구원받았다고 까불면 남편이 또 하나의 유가 돼서 ‘나 봐라. 구원받았어. 너는 마귀야.’ 까불다가 또
모든 구조가 주님께서는 바로 나약한 형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띤 그런 예수님의 공생애 같은 낮은 모습의 형제들을 깔아서 여기 폭탄, 지뢰밭을 아예 터지게 만들어요.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계속 낮출 수밖에 없죠. 그게 말씀 구조라 합니다. 사람 대 사람들의 관계가 아니고 말씀과 말씀의 관계에요.
그게 한 마디로 말해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겁니다. 처음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주고 가면 될 텐데 꼭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을 끌어당겨서 먼저 열 시에 온 사람들로 하여금 지뢰에 터지도록 만들어요. 삐지게 만들어요. 처음엔 안 삐졌는데 나중에 삐지게 만들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가 안고 있는 육의 죄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관여할 때 뭘 하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분의 성령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육이 영을 만나는 거예요. 끊임없이 끄집어낼 때 우리는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을 전에도 했지만 더 심도 있게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전에 있었던 모든 주변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는 겁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고 우리가 무의 증인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출애굽 사건을 일으켰죠. 첫 번째 유월절 사건을 일으켰잖아요. 그 사건이 터지고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여전히 안 보였어요. 나타난 것은 어린양 피하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주체, 주체는 누굽니까?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은 살아났잖아요. 여기는 뻥하고 뚫려버리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먹지 말라 했죠. 그러면 이 말씀을 율법을 지키려고 이 주체가 지키면 무가 아니고 유가 되죠. 또 엉터리 되죠. 그러면 율법을 지키려면 율법을 그냥 지키지 말고 어떤 율법이냐? 사건화 된 율법을 지켜야 되겠죠. 율법을 지키기 위한 사건이 되겠죠. 그 사건은 우리가 예상 못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요단강 건너갈 때 홍해 건너간 사람이 달랑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만약에 처음에 홍해 건너간 사람이 다 요단강 건너간다고 한다면 요단강 가에서 가만히 기다렸을 거예요. 안 그러면 작대기 대본다든지. 왜냐? 이미 알았거든. 물 나오면 무조건 대면 죽죽 갈라지는 줄 알았거든. 자기가 주체가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은 사건이 아닙니다.
수요일 예배 때 그런 설교했지만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신기한 일이 그대로 나한테 재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거든요. 여러분 기도라 하는 건 기도하게 해줘야 하는 겁니다. 주께서 관여해서 한 기도는 내 기도가 아니고 안에 주님이 한 기도가 되고, 성령이 하시는 기도,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했는데 성령께서 하시게 하는 기도가 나와요. 그 기도는 그 자체가 응답이에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받을 줄로 알아라. 이 말은 뭐냐? 새로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현재 너는 그런 기도를 하게 된 자체가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완성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그런 기도를 하는 자체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향기가 퍼지는 그 자체가 완성품이에요. 주체가 해체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도가 최고 기도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잖아요. 기도원에서 응답 받았으면 응답 버리고 오라고. 응답을 가지고 오면 그 다음은 주님의 응답이 아니고 기도한 나의 응답이 돼버려요. 주님이 응답 줄 때는 날 생각하지 말라고 준 응답인데 응답 받고 난 뒤에는 응답과 현재 눈에 보이는 나와 결부시켜놓으니까 이건 그때 그 당시의 응답이 아니라니까요. 맛이 갔어.
요단강 가서 작대기로 지팡이 만들어서 들여다본다니까. 홍해 한번 그랬기 때문에. 다 죽어서 못 그러지.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안 하지. 여호수아는 어떻게 합니까?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요. 들어가기 전에 갈라지는 게 아니고 들어가니까 갈라지는 것. 이거는 예상치도 못한 겁니다. 항상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시작이요 끝이요 일관성 있게 주님에 원래 장전돼있던 총알 같은 하나님의 저주와 은총의 총알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아니하고 그대로 지속적으로 된다는 것을 연필심 같은 핵심을 드디어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돌아서버리면 또 잊어버립니다만.
사건 터지고 주체가 이 사건을 셈하죠. 셈할 때 발생되는 게 뭐냐 하면, 이게 이름 짓기. 반드시 이름 짓기 전에 셈을 해요. 여기 하나 있다. 이름이 뭐지? 내가 이름 지어줄게. 이름을 지으면 이름 지은 자에게 나에게 의미가 있어요. 전에 의존교회 다녔다가 지금은 안 나온 사람을 만났다 칩시다. 집사님 의존교회 뭐 생각납니까? 그때 강대상에 나무 하나 있었는데. 나무 말고 옆에 서 있는. 그건 기억 안 나는데 나무는 기억 나.
이건 그 사람이 의존교회 있으면서 다 주위를 보는 게 아니에요. 특별히 뭔가 당기는 게 있어요. 거기에 관심을 두게 되면 그 사람은 의존교회를 떠나도 그 모습 중심으로 생각나는 거예요. 그 사람한테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사건이 되는 거예요.
율법을 지킬 때 어떻게 지킨다? 율법을 지킬 때 사건이 터지죠. 이 사건은 주체가 기존에 익히 아는 사건을 정죄하죠. 그러니까 새로운 나중에 나오는 사건은 앞의 사건을 죄인 걸로 정죄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거는 온전한 의가 아닌 걸 정죄하는 겁니다. 이렇게 사건이 되고 최고의 마지막 사건, 예수님 부활했던 마지막 사건,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은 모든 십자가를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다가와 버리면 십자가에서는 모든 것이 죄악 된 걸로 드러나요.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기쁘다, 즐겁다 이 말입니다.
오늘 유난히도 피곤해하시는데 길게 안 하겠습니다. 짧게 하겠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사건이에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뭔가 정리해야 되니까.
하나님께서 유월절 사건을 일으켰듯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이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분을 믿으라 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주체가 생겼다. ‘야 우리는 이스라엘이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라고 자기의식을 갖고 있다 말이죠. 그 다음부터는 이미 있는 자기의식으로 율법을 지키려 하니까 율법 지키는 족족 죄가 되더라.
그게 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그 다음 사건이 계속 터지는 거예요. 율법 지키는데 사건이 퍽 터져버리는 거예요. 언약궤로 승리했잖아요. 그러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할 때 언약궤 들고 나가죠. 분명히 같은 일이 반복되기를 기대했는데 언약궤만 홀랑 빼앗기고 자기는 거기서 죽잖아요. 율법은 율법을 안다는 우리가 지켜내는 것이 아니구나.
사울은 전쟁하기 전에 반드시 제사 드렸잖아요. 제사 드렸다고 이게 죄로 드러나요. 내가 오라했는데 안 와서. 사무엘이 일부러 안 갔어요. 제사 드리고 난 뒤에 짠 나타나서 ‘제사 드렸지?’ 이래서 너는 제사 드려서 잘렸다.
불꽃놀이해요? 축하할 일이 뭐가 있는데. 이 축하를 박용하씨 아버지, 어머니 들었으면 환장합니다. 나는 울고 있는 너희는 좋다하느냐. 이게 권력의 계열이에요. 권력이 갈라지면 다같이 마귀에서 온 권력이라도 왜 내 중심의 내 아픔, 내 한을 안 알아주느냐고 목사 멱살 쥐고 흔드는 거예요. ‘다른 교인들은 은혜 다 받았는데 왜 날 쳐?’ 이게 주체가 또 살아있는 거예요. 당신이 뭐냐? 난 은혜 받았거든. 은혜 받은 사건이 자기 주체 자기 권력을 쥐는 용도로 사용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 육입니다.
그럼 계속해서 하나님은 사건 일으킬 때 그 사건은 지금 어디서 흘러오는가? 바로 십자가에서 흘러오는데 그냥 흘러오는 게 아니고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약한 모습으로 와서 우리로 하여금 쉽게 무시당하고, 우리의 화풀이의 대상이 되고, 우리가 짜증낼 때 나 때문에 내가 살기 위해서 피해를 봐야 될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자기중심으로 사는지 자기 잘난 중심으로 사는지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에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그것이 죄라면 우리는 예수 믿어도 소용없네. 죄인 됐으니까. 죄인은 못 가잖아.’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관여란 말이 있죠.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 율법이 하나님이 날 찾아왔다는 증험이 되는 겁니다. 나는 이래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는 거예요.
쉽게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예인데요. 열 명이 노름을 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이 돈 오십억을 던져놓고 나갔다 할 때 그러니까 열 명이 갈라먹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오억씩 가르면 되는데 어떤 사람은 ‘나는 더 가져야 돼. 어떤 사람이 오십억 준 것은 내가 그때 장땡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받아야 되겠어.’ 공짜로 받은 것을 배분하면서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해서 더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라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오순절에 성령이 왔다는 것은 주께서 공짜로 준 거예요. 이거는 그 사람의 행위와 관계없이 그냥 줬는데 막상 권력이 탐나서 교회가 탐나서 가지러 온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어떤 사람이 희생을 당할 때 ‘저 사람 내 욕심 때문에 희생당했구나.’ 그걸 아는 그 순간을 뽑아내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겠느냐’ 그 율법이 사건화 되면서 그 사람에게 주어진 거예요. 어렵지요.
그러니까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율법 지키는 게 아니고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 놈이 아니구나.’를 아는 그 순간 그렇게 만든 성경구절이 뭐냐 하면, ‘어떻게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구절이 그 사람에게 찾아온 거예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하는 그 순간이 그것이 바로 그 율법의 목표물이 되어서 완성품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은 자기 자랑 안 하니까 그 순간 유가 아니고 무가 되는 겁니다. 그 몸 자체가 짧은 순간 사건이 돼요.
그 사건 있고 난 뒤에 ‘형씨 당신 왜 날 째려봐요?’ ‘미안합니다.’ 방금 그 사건 있고 난 뒤에 0.2초에 방금 그걸 혹독하게 들었기 때문에 ‘아이고 잘못됐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한 5분 지나면 못 되게 나올 겁니다. 짧은 순간이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 모든 동기와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말씀이 저절로 움직이는 사건화 된 말씀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그 순간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저쪽은 말씀이 살아있는 걸로 느껴지는 그런 현장을 봅니다.
그게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우리의 정욕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십자가 사건이 말씀을 통해서 분산되고 확산되어서 여러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율법이 개입된 이유를 알았습니다. 무에서 온 말씀인데 우리는 그걸 유로써 지키려고 했던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 주의 백성인 줄 알았사오니 항상 주님 말씀 보면서 세상 보지 말고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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